<중부매일> 2007년 10월 22일 17:25:10
자타가 공인하는 호서사림 '등대 서원' | |||||||||||||
明에 대한 보은·의리 中華 공간 구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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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혁연 기자 chohy@jbnews.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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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괴산 화양서원
■ 화양서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복원되기 이전에는 우암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암서재(巖捿齋·사진참조) 정도만 존재했다. 서원이름 '화양(華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중국 정신을 드날린다'는 의미가 보다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양서원은 권상하, 정호 등이 스승 우암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22년(1696년) 창건을 하고 그해 사액을 받았다. 원래는 화양동 밖 만경대(萬景臺)에 위치했으나 숙종 35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건립됐다. 현재 우암 1위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다. 대원군 때(1870년) 훼철돼 파괴된 이후 최근 복원되어, 성공문, 비각, 외삼문, 중반청, 사당, 숭삼문, 풍천제, 존사청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 1999년 국가사적 제 417호로 지정됐다. ■ 독향인물 송시열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천여 회 언급될 정도로, 서인 노론계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써 조선후기 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은진이다. 옥천에서 태어나 대전 회덕에서 수학, 생원시에 장원급제해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에는 봉림대군(뒤에 효종)의 사부(師傅)가 됐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되면서, 숭명배청을 역설하는 글로 효종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내용을 김자점이 청에 밀고하면서 다시 낙향, 후진양성에 진력한다. 효종 9년(1658년) 다시 관직에 복귀해서는 이른바 '예송'(禮訟)에 휘말리면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인현왕후, 장희빈 모두 이때 등장하는 인물로, 우암의 몰락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 만동묘 화양서원과 함께 짝을 이룬 만동묘는 화양동의 실제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우암은 화양동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할 때부터 이곳을 '작은 중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화양서원 건립 이전에 이미 중국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을 글씨가 수직 암반 곳곳에 새겨졌다.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의 굴복으로 청의 연호를 써야하는 등 사실상 청나라 속국이 됐다. 완고한 숭명주의자 우암은 이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즉시 화양동으로 낙향,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權尙夏)는 동지들과 함께 화양동에 만동묘를 건립함으로써 명에 대한 은혜를 갚고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1704년 건립과 함께 두 황제에 대한 제향이 시작됐다. 만동묘에 모셔진 신종 만력제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ㆍ멸망해 가는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 군주로, 의종 숭정제는 명의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인물이다. 만동묘는 1865년(고종 2) 훼철됐으나 두 황제에 대한 제사는 계속 모셔졌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일제는 제사를 금지하고 또,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 매몰했다. 최근 화양서원과 함께 복원됐다. ■ 관람 포인트 1. 왜 화양동에 강한 애착을 가졌나 학자들은 크게 3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우선 화양동은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다. 이밖에 화양동은 지리적으로 보면 충청, 호남과 쉽게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사림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 남한강 수계로도 쉽게 연결되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다. 일부에서는 암각글씨를 꼽고 있기도 하다. 우암은 화양동에 머물면서 곳곳의 암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만절필동(萬折必東·용어해설 참조), 충효절의(忠孝節義·사진참조), 대명천지(大明天地·큰 명나라 세상), 숭정일월(崇楨日月·숭정황제가 다스리는 세상) 등의 글자를 새겼다. 그것도 충효절의 글자같은 경우 어마어마한 크기로 새겼다. 이쯤되면 화양동은 가히 '서체 박물관'이 되고 있다. '비례부동'은 명나라 의종 친필, '충효절의'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 '대명천지'와 '숭정일월'은 우암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우암의 사상과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이는 후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들어서는 주요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2. 만동묘 계단 폭은 왜 좁을까 송시열은 죽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사당의 지어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건립됐던 것이 만동묘이다. 그 이름은 암각글자 '만절필동'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동묘 계단 폭은 20cm가 채 안될 정도로 매우 좁다. 따라서 이 계단을 오르려면 앞걸음이 아닌, 발바닥을 옆으로 해서 올라가야 한다. 이는 만동묘를 오를 때 경건함과 엄숙함을 의도적으로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진참조>당시는 우측 계단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내려왔다. 가운데 계단을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은 이용하지 못했다. 이는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총독부는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자 이를 강제 철거했다. 최근에 다시 복원됐다. 만동묘에 들어서면 '만동묘정비'(도기념물 25호)가 있다. 그러나 비문을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상당수 학자들은 이를 일본인들이 고의로 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른 쪽'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사진참조> 3. 무소불위 권력, 어디서 나왔나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을 보면 그의 제자가 무려 9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김창협 등 그의 제자 가운데 당상관 이상 벼슬에 오른 인물만도 54명이 이르고 있다. 우암에 중앙정계에 진출, 활동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후기=송시열의 나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은 학맥이 두텁고 풍부하게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종 집권 이후 소위 산림(山林)이라 불리는 인사들이 발탁됐다. 이는 학맥으로 연결된 정치의 연장이었다. 우암의 예에 보이듯 산림은 굳이 정계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중앙정계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잇었다. 이는 우암이 문장과 서예에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데서 비롯됐다. 김장생이 그의 스승이다. 4. 북벌계획 추진, 어떻게 볼 것인가 효종과 우암이 북벌을 가운데 놓고 의기투합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효종은 그에 따른 의지로 '초구'로 불리우는 호피를 우암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북벌계획은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죽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학자들이 우암의 북벌 의지를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그 이유로 조선이 청나라를 칠 만큼 국력이 크지 않았고 또 우암이 군사적 북벌을 주장한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꼽고 있다. 따라서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우암의 북벌 계획을 관념적 북벌론으로 보고 있다. 이는 '先-사회윤리 기강 확립', '後-이를 바탕으로 한 對청나라 도덕적 우위확보'를 의미하고 있다. 5. 소중화는 과연 사대였나 상당수 학자를 우암을 완고한 보수주의자이자 사대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우암을 '사대주의자'로 볼 수 없고, 그가 개창한 '소중화'는 병자호란에 대한 정신적 치유법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늘고 있다. 이들은 "우암이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세계문화의 중심국이 되겠다는 뜻에서 '조선=중화'를 말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땅덩어리가 작아 '소중화'라 일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암의 소중화 사상은 '直사상', 즉 '부당한 침해는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논리를 낳으면서 북벌론을 이어지게 된다. 6. 천하의 우암, 어떻게 쓰러졌나 이른바 2차 예송(禮訟)이 그 씨앗을 잉태했다. 효종비 인현왕후가 죽자 우암은 대공설(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남인들은 기년설(만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다. 허목 등 남인계는 인종이 비록 둘째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 마디로 왕과 일반인은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비해 우암은 효종을 서자로 봤다. 그의 예학 사상은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 모두를 서자로 봤다. 이른바 '체이부정'(體以不正·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으로, 그 밑바탕에는 사대부의 예절을 왕가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한 마디로 이 때의 우암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은 대등하다고 보고 있었다. 이는 조선초 태종(방원)과 정도전의 갈등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9대 숙종은 효종의 손자이다. 숙종이 이를 모를리 없는 가운데 그와 장희빈 사이에 낳은 아들(후에 경종)의 세자책봉이 문제가 됐다. 우암은 시기상조라며 강력 반대를 했으나 숙종은 이를 빌미삼아 그의 모든 관직을 삭탈하고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국문을 받기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우암이 정읍에 이르자 사약을 내렸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조선시대 대신에게는 역모가 아니고서는 사약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암은 대신(삼정승) 출신임에도 불구, 죄인의 수괴라는 명목으로 사사됐다. 그것도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사사됐다. 신권을 내세우게 된 우암과 왕권을 유지하려는 숙종 사이에는 그런 역관계가 놓여 있었다. 우암은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신원(伸寃·가슴에 맺힌 한을 품)됐다. 국립청주박물관(관장 민병훈)이 개관 20주년을 기념, 오늘부터 내년 1월말까지 우암 송시열 기획특별전을 개최한다. 우암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도움말 : 괴산군청, 괴산향토사학회,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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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0월 22일 17:25:10 / 수정 : 2007년 10월 22일 17:3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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