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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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 한길사, 2001.4, pp. 189-221
함석헌의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
- 김 성 수 -
함석헌은 한국인의 시각 혹은 동아시아인의 입장에서 서구 기독교의 의미를 되살리고 해석하고자 힘썼다. 이러므로서 그는 서구 기독교와 동양철학을 사상적으로 융화시켜 나갔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원칙이나 기준은 이념적, 정치적 다원주의뿐만 아니라 철학적, 심지어 종교적 다원주의였던 것 같다.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다원적 종교관은 타종교를 향하여서는 종교적인 관용성을 베풀게 했고, 복잡 다난한 광범위한 인간사(人間事)를 향하여서는 폭넓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가지게 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함석헌이 서구기독교와 동양철학을 유교적 한국문화 안에서 어떻게 사상적으로 융합해나갔는지 살펴볼 것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특성
어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함석헌을 일컬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종교사상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함석헌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기독교관은 분명히 정통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기독교관과 충돌의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1)
이런 면에서 근본주의적 한국기독교인들 중에선 함석헌을 '비기독교인'으로조차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함석헌은 기독교에 대한 그의 종교적 보편주의 입장을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나는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느 한 개인이나 한 집단에 의해서만 절대적으로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2)
그러면 위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우리는 함석헌을 비기독교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1988년 그의 미수(米壽) 생일잔치 자리에서 함석헌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내 주님이라면 예수님밖에 더 있나요..."3)
필자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함석헌을 기독교인으로 본다. 필자는 기독교인을 삼위일체론이나, 속죄론, 육체부활론 등의 교리를 타인에게 주장하는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지금 여기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 정의나 이타주의에 입각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필자는 또한 기존의 기독교 교회만이 예수의 정신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이는 매체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정신이 대자연이나, 위대한 예술품, 혹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 등을 통해서 드러나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구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 (Mikhail Gorbachev: 1931- )의 자연과 교회와의 관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의 강렬한 일체감은 어떨 때는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나의 느낌을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는 없다. 아마도 참된 신앙인들은 내가 체험한 솟구치는 듯한 영(靈)의 감격을 교회를 통해서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대자연이 또한 하나의 교회와 같다...나는 대자연과 아주 가깝게 유기적으로 일치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대자연과의 유기적으로 일치된 느낌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내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대자연은 나의 성격, 나의 세계관 형성에 근본적 영향을 미쳤다. 대자연을 통해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동시에 나는 대자연이 또한 내 마음 안에 나와 함께 살아있다고 느낀다.”4)
비록 정통적인의미에서 고르바쵸프는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는 대자연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서 예수의 영(靈)을 체험한 듯 하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기독교인이었다기 보다는 유대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다닌 곳도 기독교 교회가 아니라 유대교 회당이었다.5)
그리고 그런 예수가 강조한 것은 외적인 성전이나 성지(聖地)가 아니라 내적인 영(靈)과 진실이었다:
"이 산이든 예루살렘이든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문제 되지 않을 때가 오고 있다...아버지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오는데 바로 이 때다...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6)
한편, 함석헌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왜 그럴까? 왜 함석헌이 가진 기독교관은 전통적인 종래의 기독교관과 다르게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함석헌에게 그렇게 어려운 결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어려운 결심은 그가 과연 한국이란 풍토 속에서 어떤 종류의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가 아니었을까? 함석헌은 서구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의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시대의 사회-정치적 혼란기에 동아시아의 미약한 나라 한반도에서 살았다. 이러한 시대상황이 그의 서구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전통적인 서구중심주의적 시각과는 다르게 인식하게 만드는 한 주요 요소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다중문화와 다원화의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유일신의 의미를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함석헌의 종교적 보편주의 입장에 비추어서 동아시아의 한국인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가졌던 교회관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이래 인간이 오늘날까지 조직적으로 형성한 교회가 과연 예수가 생각했던 교회의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기독교는 진정 현대 사회에서도 일신교적인 종교이어야 할까? 왜 함석헌의 종교적 다원주의관과 보편적 기독교관이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에게는 물론이고 비기독교인에게까지도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한국은 종교적 다원주의의 나라다.7)19세기 서구선교사들의 열렬한 전도사업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아시아의 나라들은 신도(神道), 불교, 회교, 힌두교 등 동양적인 종교들을 여전히 국가화된 종교로 지키고 있다. 반면에, 서구의 나라들은 압도적으로 기독교를 자기들의 국가화된 종교로 지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이런 면에서 좀 특이하다. 지리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가 한국의 현대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중국과 일본, 넓게는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에 기독교가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었을 때는 상업자본주의와 군사제국주의가 더불어 함께 들어왔다. 이에 반해 한반도의 경우 기독교는, 특별히 일본의 식민정권 아래서, 문자 그대로 순전한 '복음' 과 '기쁜 소식'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초창기부터 기독교는 한반도의 씨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 당시의 서구선교사들 또한 한반도를 일컬어 "동양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나라"라고 묘사하기까지 했다.8)지난 과거 100년사를 통해서 아시아에서 기독교를 전통적인 민족문화와 더불어 확고하게 주체적으로 확립시킨 나라는 이런 면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서구학자인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이런 면에서 한국을 놓고 "동양종교와 서양종교가 동시에 병행 공존하는 나라" 라고 표현했다.9)헨슨의 지적처럼 어느 누구든지 한국에서는 불교, 유교, 기독교, 토속 샤마니즘(무당)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심각한 종교분쟁 심지어 종교전쟁 등으로 사회-정치 발전에 큰 저해를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 헨더슨은 "상대적으로 그 역사를 통하여 타종교간의 조화관계를 이상적으로 이룬 나라" 라고 본다. 헨더슨이 한국민족의 종교 조화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과 대원군의 천주교탄압정책을 또한 헨더슨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 공식적인 불교탄압정책이나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에 불교와 천주교가 한국인의 주요 종교 중에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이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으로는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러 종교에 대 하여 종교적 관용성과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한반도 안에서 함석헌의 종교관 형성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한국유교의 특성을 살펴보자.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교가 한국만큼 그 문명, 문화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다.10)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의식구조와 생활관습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유교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문화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학문적인 면에서도 중국인보다 훨씬 더 유교적 가치이념에 집착해 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조선시대 이래 한국은 중국의 여러 유학파 중에서 가장 교조적이고 정통보수적인 오직 주희(朱熹)의 유학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11)그것이 곧 주자학(朱子學)이고 성리학(性理學)이다. 그러므로 서구학자들조차 유교의 원산지인 중국보다 한국이 더욱 철저하게 유교적인 나라라고 지적하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12)
두번째로 한국 불교의 특성을 살펴보자. 버스웰 (Robert Buswell Jr)은 한국의 불교문화, 특히 선(禪)을 강조한 대승불교는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왕성하게 번창하는 불교학파의 하나라고 지적했다.13)불교는 오랜세월 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의 종교였고, 내적 정체성을 파악하는 영적 통로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에 세조를 중심으로 한 유학파들이 가혹한 불교박멸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금세기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한국의 가장 큰 종교집단으로 부활하는 막대한 저력을 보였다.
한국역사를 통해서 유교와 불교가 도교보다는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러나 비록 도교는 한번도 한국사를 통해서 중심철학으로 부각되었던 적은 없었지만, 한국인의 대중적 의식구조 저변에 항상 일종의 토속신앙의 형태로 잔류해왔다. 유교와 불교가 수많은 학자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반면, 도교의 학문적 성취는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유불교와 비교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도교에 대한 연구문헌은 아주 단편적이거나 적은 분량에 불과하다. 도교가 한반도에 소개된지 천년이 넘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1945년까지 배출된 도교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문헌은 단 한권뿐인 것도 주목할만하다.14)
이와같이 기록된 자료나 문헌이 빈약한 연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도교는 한국에서 중심종교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도교의 영향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체계적이기보다는 산만한 과정을 통해서 도교는 한반도에서 명맥을 유지했고,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에게 포괄적인 영향을 미쳤다. 도교적 영향의 한 예는 장수(長壽)와 운수를 추구하는 일부 한국인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도교는 또한 풍수지리, 점, 토속문학, 토속종교의 형태로 서민들의 생활 밑바닥까지 깊이 침투해왔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도교는 숙명론적 영향이 강하다. 이러한 도교는 개인의 운, 신중성, 심지어 굴종심 조차 강조한다. 동시에 한국의 도교는 전통대중문화, 토속신앙과 혼합 되면서 물활론(物活論: 목석 등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믿음)적 성향을 강하게 띄워 나갔다.15)
위에 언급한 주요 종교 외에도, 오늘날 한국에서 강한 샤마니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샤마니즘은 오랜 세월동안 한반도의 문맹층을 위한 느낌의 종교였다. 학문적으로 샤마니즘은 가장 발달을 보지 못한 종교 중에 하나이지만, 한국에서 샤마니즘의 역사는 외래종교인 불교와 유교를 훨씬 앞지른다. 외래종교가 아닌 토착적인 종교, 자생적인 한국의 고유한 무속종교라는 의미에서 샤마니즘의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주요종교로서 체계적인 발전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한국에는 서구보다 더 많은 형태의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들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50대 교회중 23개는 한국이라는 한 나라에 있다.16)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큰 두 교회는 한국의 순복음교회다. 한국의 일요일은 매우 바쁘다. 교인들은 새벽예배뿐 아니라, 아침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등을 참가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니 한국의 현대사를 논할 때 기독교나 기독교인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도 나올만하다. 현대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회는 가장 왕성하고 활동적인 종교집단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에 유례없는 양적인 급성장을 이루었다.
서광선의 지적처럼, 남한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상가건물이나 지하실 건물을 비롯해 큰 주택가나 좁은 골목길, 어느 곳에나 산재해 있는 교회당 탑이나 십자가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밤이 되면 수많은 교회들은 빨간 네온사인으로 서울의 전 지역을 아예 빨갛게 물들일 정도다. 실제로 한국의 거의 모든 동네에는 최소한 한개 이상의 크고 작은 교회가 있다.17)일반적으로 교회수는 다방이나 커피숍의 수를 능가한다.
한국의 현대화나 근대화는 교회성장, 교회교육기관의 확장을 따라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서구문명을 한반도에 소개해준 가장 중추적 통로였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된 저변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크고,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도 기독교를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선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가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봉건적인 조선왕조 사회에 하나의 사회혁명적인 일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와 비교해 가장 근래에 들어온 종교이지만,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면에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단적인 예로 한국 현대 정치사의 주요 인물은,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기독교인이 그 주류를 이룬다: 제 1 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제 2 공화국 대통령 윤보선, 제 2 공화국 국무총리 장면, 제 7 공화국 대통령 김영삼, 제 8 공화국 대통령 김대중 등이다. 이것은 군사독재 기간을 제외하고는, 남한의 정치는 압도적으로 기독교인의 손에 의해서 좌우 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독교의 민주주의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필자자신이 어린시절부터 장로교회에서 자란 직접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의 권위주의와 계급조직적인 요소를 그대로 함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유교의 수신(修身)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과 초기 서양선교사들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에는 흥미 있는 일치점이 있다. 둘 다 체제순응적이었고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유교에서는, 통치기구를 (기독교인에게는 교회로 볼 수 있다) 법에 근거한 조직이라기보다는 도덕에 근거한 조직으로 보았다: "덕으로 본을 보이고 예(禮)를 갖춰라. 그러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스로 개심할 것이다."18)그러므로 다스린다는 것은, 피치자 (평신도)를 모범적 행위 (교리)로서 바로 잡는다는 의미다: "다스린다(政)는 것은 옳바름(正)을 보여주는 것이다. 옳바름으로 본을 보이면, 누가 감히 온당치 못한 채로 남을까?"19)이런 면에서, 권위를 강력하게 동경하는 유교의 보수적 전통이 한국 기독교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또한 기독교란 한국문화, 크게는 동아시아의 문화와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만 믿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우스꽝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받아들이고 축하하는 반면 한국전통의 추석은 등한시한다. 유럽의 교회가 미국식 추수감사절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 아주 대조적이고, 이것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얼마나 전통문화에 대한 주체의식, 주체성을 결여하고 있나를 반증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비본질적인 미국식 기독교 문화를 기독교의 전부인 듯 모방하고 열렬히 받아들인 반면, 동아시아인으로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면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일은 등한시 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법
가지각색의 종교-철학이 공존해있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함석헌에게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영국의 문학가 키플링 (Rudyard Kipling: 1865-1936)은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그리고 이 동서양의 두 쌍동이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보았지만, 함석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보편적-기독교관을 통해서 서구의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고 결합시키고자 힘썼다. 함석헌은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사상, 종교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인으로서, 그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 그리고 전통 한국의 무속신앙과 친숙했다. 더욱이 함석헌은 소용돌이와 같았던 그의 인생여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념들을 직접 체험하고 대할 기회가 많았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일본식민주의는 평화주의에 반대되는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북한의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물질주의로 함석헌 앞에 나타났고 그것은 그의 기독교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의 작태는 함석헌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대치되는 기독교 편애주의였다. 유교사상의 절대적 가부장주의를 재강조하는 박정희의 충효이념은 함석헌의 자유-초월사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사상적 환경에서, 함석헌은 동양의 고전사상을 서구 기독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현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필요에 맞게 재해석을 시도했다. 특별히 함석헌이 강조한 개인 각자의 책임의식은 기독교의 전통개념인 대속론을 가차없이 깨뜨렸고, 위로부터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그는 종교적 관용주의 입장을 취한 퀘이커교도로서 엄격하고 경직된 한국의 종교적 풍토를 부드럽고 탄력있게 완화시키고자 힘썼다.
간디와 그의 비폭력 운동의 숭배자로서, 함석헌은 또한 힌두교를 공부했고, 간디를 현대 세계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겼다.20) 전적으로, 한국인은 힌두교와 별로 친숙하지 않다. 그러나 함석헌의 경우, 간디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이 그를 힌두이즘에 심취하게 했다. 심지어 함석헌은 예수의 정신을 가장 참되게 실천한 사람을 간디라고 여기기도 했다.21)기독교의 일신교적 성향과는 대조적으로 힌두교가 종교적 다원주의의 색채를 띄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그러한 힌두교에 왜 사상적으로 공감을 느꼈는지 짐작할 만도 하다. 간디와 힌두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함석헌은1964년 「간디 자서전」, 1981년엔 「날마다 한 생각」: 「간디 일지」, 그리고 1985년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번역작업을 통해서 함석헌은 간디와 힌두교를 종교적 보편주의 입장에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의 생애 초기에 장로교와의 개인적 인연과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서, 함석헌은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우찌무라의 무교회운동과 조지 폭스의 퀘이커리즘에도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에 관한 대표적 역사서인 하워드 브린톤의 「퀘이커 300년」을 번역출판 했고, 중동(中東) 레바논계 미국인 종교가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931)의 저서 「예언자」와 「사람의 아들 예수」를 1960년과 1976년 각각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번역 작업을 통해서 함석헌은 기독교를 좀더 탄력있고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특별히, 함석헌은 지브란의 종교적 신비주의에 끌렸고, 지브란이 동양과 서양을 종교적으로 서로 혼합하고자 노력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함석헌은 그의 전 삶을 통해서 항상 '종교적인 것'을 추구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반면에 이러한 그의 종교-사상적 편력은, 그가 접한 새로운 종교-사상의 영향에 의해 때로는 함석헌이 너무 쉽고 엉뚱하게 사상적 동요를 보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으로서 함석헌이 가졌던 타종교와 사상에 대한 강렬한 지적 동경심과 열의가 결국 그 자신의 독특한 종교관을 형성, 창조하는데 근원적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폭넓은 여러 종교와 사상에 대한 이해는 또한 함석헌에게 왜 종교인으로서 사회-정치적 참여가 중요한지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해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서"라고 한 것은,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인이 받아야 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서구적인 외양의 모습을 무조건 모방하고 추종한다는 것일까? 함석헌은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함석헌은 한국적인 혹은 동아시아적인 기독교인상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다. 비기독교계 언론인 송건호는 함석헌에게서 독특한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기독자상을 발견했다고 술회 했다:
"종래 한국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때, 그들은 마치 준서양인들처럼 행동하고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함선생의 경우는, 한국의 전통적이고도 소박한 시골풍 나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내 눈에 비췄다."22)
19세기 서구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볼 때 송건호가 왜 한국 기독교인들을 시골풍 나는 함석헌과 비교해 마치 준서양인들처럼 느꼈는지 이해할 만도하다. 함석헌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아시아적인 것, 특히 노장사상과 간디즘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함석헌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인식하고 고백했지만, 동시에 아시아의 종교가 그에게 단지 미신에만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양한 동아시아의 종교와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함석헌의 이해심은 넓어지고 깊어져 갈 수 있었다.
서구적인 것 특히 미국적인 것의 겉모습만을 문제의식없이 모방하고 추종하는 것만이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한국교회는 그 형식과 외양적인 면에서 '서구적'일런지 모르지만, 그 의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아주 샤마니즘적이다. 한국의 샤마니즘적 전통에는 역사의식, 사회정의에 대한 의식, 도덕성 등이 극도로 결핍되어있고 오히려 무관심한 입장이다. 이러한 도덕성과 역사의식에 무관심한 한국 샤마니즘 하느님의 개념이 유대-기독교의 하나님관과 결합해 낳은 것은, 교리적인면에서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사회와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기독교였다.23)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한국기독교인의 샤마니즘적 성향을 격렬히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종교[기독교]라는 게 체험을 존중하지 않고 교리만을 자꾸 존중해. 또 행복주의 복리주의로 좋은 일이 있어야만 되는 것, 이것이 옅은 종교의 경우니까 샤머니즘을 탈피 못했다고 그러는 거지요."24)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결코 영적인 것은 아니다. 기복신앙이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이유는 나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오직 남과 이웃의 행복과 잘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자신을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이기적 욕심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고, 남을 위해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이타적인 사랑으로 보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를 위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가 혹은 이웃을 위해 기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은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을 결핍한 대신, 세속적인 축복 즉 물질적 부유함이나 신체적 건강을 획득하기에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열성적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은 부와 물질적 번영의 옹호자다. 이러한 한국기독교인을 향해 함석헌은 이렇게 경고했다:
"오늘의 기독교는 결코 가난한 자의 종교가 아니다. 하늘나라 문을 교회당이 막았다! 예수는 분명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걸까? 예수의 종교는 빈자, 무소유자의 종교였다. 그야말로 살기 위한 필사의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막 돌격이었다. 혁명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재산보호운동, 고리대금운동, 보수운동, 외교운동의 선구자다."25)
예수는 또한 가난한자의 친구였고, 그 자신을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 죄인, 빼앗긴 자들과 동일시했다.26)기독교는 분명히 기득권층 보다는 가난한사람을 위한 종교였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27)
서구 기독교의 동양적 해석
함석헌은 비록 자신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기독교만큼 동양사상에 대해서도 동등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서구 기독교의 사회정의, 인권, 저항의식 등의 요소를, 동양사상의 초월의식, 관용성, 포괄성등과 함께 혼합시켰다. 구리와 아연이 합쳐져서 전혀 새로운 제품 황동을 만드는 것처럼, 함석헌은 동양사상과 서구 기독교의 장점을 융합해 인류를 위해 보다 한 단계 높은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동서의 장점을 합침으로서, 함석헌은 이 융합된 사상이 인류의 장차올 문명을 위한 어떤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으로 믿었다: 함석헌은 동서양이 다른 것은 서로가 보완, 보충해줌으로서 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인류가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믿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두 다리나, 남과 녀, 혹은 음양의 원리처럼, 서로가 떨어졌고 반대되는 것이지만, 서로가 협동해서 밀어줌으로서 몸체 즉 인류전체를 함께 앞으로 밀고 나가는 근원적이고도 역동적인 힘이 된다고 함석헌은 믿었던 것이다.28)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유일신의 개념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에서는 인격개념과 인권의식이 큰 발달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종교나 사상은, 특별이 노자의 도라는 개념은, 형상만들기나 어떤 규정짓기를 거부한다. 노자로 인해서 비로소 종교적 인격개념에 반대하는 과격한 거부운동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29)
기독교와 비교해서, 신 혹은 절대자의 개념은 노장사상에 있어서 직관적이고 탈인격적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사고구조에만 익숙한 서구인들에게는 탈인격적인 신이나 절대자의 개념이 아주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가 없는 것일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이타적인 삶을 산 존재이고, 기독교인이 아닌 이교도인인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누구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그리스도란 결국 인격적인 개념으로만 해석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도 내재적으로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퀘이커교도로서, 함석헌은 하느님이나 절대자의 개념을 인격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지경을 훨씬 넘어선 탈인격적인 개념으로도 보았다. 동아시아의 사상은 이런 면에서 서구 기독교적 사고 구조와 정면으로 대치되고 반대되는 개념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세계의 주요 종교는 다 인류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정신적 자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과 영이야말로 무한정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 또한 내 종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느낀다. 인간의 정신은 획일적이거나 일률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최고의 가치를 발휘한다. 하느님 혹은 절대자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겐 신성(神性) 혹은 불성(佛性)이 있다. 퀘이커들은 이것을 "신적인 어떤 요소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라고 표현한다.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30)법화경(法華經)은 또한 보편적 구제설, 즉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 구원 받는다는 원칙을 가르친다.31)열반경(涅槃經)은 불멸하는 불성을 모든 사람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처럼, 열반경 또한 이 사바세계의 모든 존재는, 태초 때부터 불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의 자손이라고 언급한다.32)이렇듯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기독교사이에도 많은 사상적 유사성과 공통점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인의 종교관도 외골수적이거나 편집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한다. 인간의 삶도 다양성과 다양함이 지향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경제적 단위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 좁아지고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각 나라 각 문화간의 세계화는 불가피한 단계이다. 세계 공동체의 사회구조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변천, 변화되어간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함석헌이 지적했듯이, 인간의 영적 활동이나, 사상, 종교적 믿음 등은 독특성과 개성을 유지해가면서, 지금 세계는 하나가 될 때가 되었다.33)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참이던 1940년대 초에 벌써, 함석헌은 세계는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된 세계에서 인간의 생각은 더욱 폭넓어지며 종합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보았다.34) 참된 종교는 문명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전체 인류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종교사상가로서, 미래 인류의 문명이 어떠한 방향을 잡을 것이고 어떠한 길로 나가야할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곧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보되었다. 그러므로 우주는 영원한 변화, 변천의 체험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과정선상에 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삶은 비록 처음에는 단순한 세포의 활동에서 기원되었지만, 진화의 과정을 여러번 거쳐서 마침내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다원화된 과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35)그러므로, 진보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단순 간단화에서 복잡복합화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
함석헌이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던 만큼, 그는 세계와 인간의 삶은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가장 높은 수준의 삶에선 다양성이 풍부하게 넘쳐흐르고, 반면에 지극히 낮은 수준의 삶에선 규격화와 획일화가 판을 친다고 생각했다.36)전반적으로 모든 종교의 교리는 종종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의 어느 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타종교인들에게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함석헌은 인간의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를 이렇게 역설(力說)한다: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 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37)
함석헌은 기독교문화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의 여러 다양한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라고 여겼다. 이스라엘 민족 구약시대의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뿐만 아니라, 석가, 공자, 노자, 맹자, 소크라테스 등도 동등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인류를 위해 전해주는 예언자라고 믿었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시대를 초월해서 이러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인류는 하느님의 어떤 면을 반드시 볼 수 있다고 믿었다.38)
하느님은 하나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은 각 나라의 민족과 문화를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인류 앞에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왜 무한한 하느님의 영감이 오직 성경과 교회를 통해서야만 나타나야 하는가? 힌두교인 마하트마 간디가 이야기 했듯이: "베다(힌두교의 경전)가 신의 영감을 받아서 쓰여졌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약 베다가 신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쓰여졌다면, 성경과 코란 역시 신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쓰여지면 안된다는 말인가?" 베다와 코란이 그런 것처럼, 성경과 교회는 단지 절대자의 한 부분만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의 경전은 단지 신의 어떤 면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관과 세계관은 시대의 변동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해갔다. 그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인간사의 모든 것은 영원히 미완성이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그에 따라서 사회제도 또한 쉴새없이 고쳐져야 한다고 믿었다.39)이런 함석헌의 시각은 우리 인간의 삶에도 하나의 원칙으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인간은 항상 인생의 완전함과 완벽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완벽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은 아무도 완벽한 하느님이나 절대적인 진리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전체적인 진리가 아닌 부분적인 진리와 부분적인 절대자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40)그러므로 한 종교의 믿음은 한 방법이나 한 스타일로만이 아닌 여러 가지 다양한 양태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절대적 하느님과 상대적 종교와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느님의 품에는 나만이 아닙니다. 나만이 전부를 다 안 것이 아닙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입니다. '종교'란 것은 상대계의 일이지 절대가 아닙니다. 소위 종교란 것이 없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느님을 가두어 둘 만큼 클 수는 없습니다."41)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에게 나가는 길이 무한히 있을 것입니다. 무한을 어떤 길로만 간다는 그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
하느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길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 하나의 종교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비록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는 오직 유한하게만 무한한 존재를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고 정답도 아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만 남과 대상을 이해한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에 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큰 모순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단지 무한한 존재에 대한 유한적 정의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유한적)기관도 하느님(무한적인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마도 노자의 다음과 같은 신비한 표현이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함석헌의 제도적 종교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큰 도는 차고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좌도 될 수 있고 우도 될 수있다.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일이 성취 됐을 때 도는 그것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도는 모든 것을 입히고 모든 것을 키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주인되기를 거부한다. 도는 언제나 조용하니 지극히 작은 것이라 부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도에 의지하나 그것을 느끼지 못하니 도는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부를 수도 있다. 결코 큰 티를 내지 않으므로 큰 일을 성취한다."42)
결국 도나, 하느님이나, 진리는 모든 창조물 가운데 있고, 그것을 깨달은 인간은 모든 것을 경외심으로 대할 것이다. 하느님은 보편적으로 어디 어느 곳에나 있다. 만일 이 세상이 한 종교나 한 관점에 의해서만 독점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단조로운 곳일까. 진리도 만일 기독교에 의해서만 독점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닐 것이다. 영국성공회 신부이며 동시에 퀘이커교도인 폴 오스트리쳐는 이렇게 표현한다: "선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선 안된다."43)
기독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조직이나 제도는,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의 문화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교회가 본질적인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그런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장 큰 것, 즉 도는 가두어질 수 없는 것이다."44)마찬가지로 하느님도 교회나 성경에만 가두어질 수 없다. 함석헌은 죽은 후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았고, 인간 영혼의 영원함을 믿었다. 즉 그는 인간 정신이나 영은 물질현상이나 육체를 초월하고 대신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45)
이런 관점에서 함석헌은, 진리란 모든 사람을 위해, 각 사람의 종교여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했다.46)모든 종교는 이런 면에서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 함석헌은 서구 기독교가 사랑의 복음을 선포한 반면 동시에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을 일으켰으며 가장 악랄한 제국주의를 행했다고 보았고, 아트만 (小我)이 브라만 (大我)이란 것을 믿던 힌두교는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카스트(계급)제도를 유지해 왔다고 비평했다.47)성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믿음이나 사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고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각 인종과 각 문화간에는 각자 고유한 입장과 견해가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진리는 독점할 수 없고, 함석헌의 표현대로 독점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빈부귀천을 떠나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각자 만의 독특한 진리를 표현, 선언할 권리가 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전체주의나 압제주의가 한 때는 마치 절대-궁극적 진리를 소유한 것처럼도 보였지만, 결국 궁극적 진리의 소유는 인간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오히려 인류에게 깨우쳐 주었다. 인간이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단지 '상대적인 진리' 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분류적으로 함석헌은 기독교 사상가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타 종교도 열린 마음과 동등한 눈으로 이해하고 배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좁은 교리주의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교회만을 알고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니 하는 말 아니오? 그 잘못은 다른 데서 온 것 아니고 다만 교회라는 한 점만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아 그것을 온 세계인 것처럼 보았기 때문이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날에 죽을 병든 사람을 살렸다고 예수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교회라는 거룩한 옷을 입고 나오는 사탄에 홀렸기 때문이었지요."48)
함석헌은 현실과 동떨어진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게 기독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 전체였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성인(聖人)조차도 그가 속한 역사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와 상응하게 그는 내세를 믿거나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이 살고있는 지금 여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개인구원이 아닌 인류 전체를 위한 단체구원을 추구했다.49)그는 혼자만이 안락한 삶을 사는 것보다 다 같이 고난받는 삶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보았고, 세계가 구원되지 않은 내 구원이란 없다고 믿었다.50)결국 함석헌은 전체 모두 다가 구원받는 곳이 곧 하늘나라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구원관을 이렇게 말했다:
"나만 들어가면 된다는 신앙은 낡은 신앙입니다. 나는 그것은 싫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욕심이요 교만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귀족주의는 하늘나라에는 못 들어갑니다. 이 세계가 온통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도 무신론자도 그 나라에는 다 들어가야 합니다. 이리 말하는 나나, 반대하는 복음주의자나, 무신론자나, 광신자나 다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반드시 들어갈 수 있어야 믿는 신앙, 신자는 특별히 뺀 자라는 데 어깨가 으쓱해서 믿는 신앙, 그런 따위 현금주의는 신앙이 아닙니다."51)
함석헌은 인간이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무신론자나 비기독교인에게도 기독교인과 동등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체(whole)만이 거룩(holy)한 것"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한 것, 거룩한 것이요,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이다. 때는 몸에서 떠난 살이요, 속(俗)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다."52)자신의 존재를 전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함석헌은 자신을 전체 사회에 빛진 자로 여겼다. 이런 식으로 함석헌은 한 씨알의 어려움을, 그 씨알이 기독교인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자신의 어려움으로 느꼈다.
그런 그가 종교적 배타주의나 독점주의를 싫어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그의 포용성이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융합하게 한 근원적 원동력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주의나 포용성의 원칙은 다른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불교도가 오직 불교신자들의 잘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회교도가 오직 회교도들의 이익만 챙긴다면, 세계는 순전히 이기적 파벌집단의 모임에 불과하게 될 뿐이고 오직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거리간의 충돌만 성행하게 될 것이다.
석가와 예수의 주요 관심사는 불교신자와 기독교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대상이었다. 석가와 예수는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서는 둘 다 혁명적인 개혁가였다. 석가는 힌두교의 전통 중의 하나인 카스트제도를 철폐시키고자 했고, 예수는 강력한 로마권력으로부터 막강한 보호와 지지를 받고있는 유대교의 성전에서 책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둘렀다. 더욱이 석가와 예수는 둘 다 종교적 편견이 없었다. 함석헌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혁명적인 개혁가였고 각 종교간의 편견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3)
함석헌은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 존재인 인간의 위치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비칠 수 있는가를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우리 속에서 믿는 예수는 요렇게 기성품적으로 다된 예수가 아니고 이게 자꾸 자라고 있는 예수라고 그래요... 저 산에 서서히 접근해가는 모양으로 접근해가면 갈수록 모양이 차차 달라지는데, 달라지는 것이 본래 모습에 가까이 가는 것이 잖아요."54)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언어와 표현으로도 해석과 설명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그 종교는 보편적인 종교,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 사회-문화적 토양이 다른 각 나라간의 외부 종교 토착화 작업은 이러한 종교적 재해석 작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함석헌은 그 종교적 재해석 작업의 주요 공헌자였다. 그래서 김경재는 함석헌을 일컬어 "한국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였다"라고 표현했다.55)여러 종교에 대한 지성적인 깊은 이해가 또한 함석헌으로 하여금 타종교를 향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갖게 한 이유 중의 하나다. 함석헌은 자신이 역사적으로 속한 시대의 지성사조와 사상적으로 철저히 가까워지고자 힘썼다. 서구 역사와 철학, 동시에 동아시아의 고전사상과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함석헌으로 하여금 여러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근원적 도움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비록 자신은 기독교인이었지만, 함석헌은 그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노장사상과 기타 동양고전사상을 공개강연으로 한국의 씨알들에게 가르쳤고, 그의 잡지 씨알의 소리에 연재 출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함석헌은 동서양 사이의 사상적 교두보를 놓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의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함석헌은 자신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이렇게 표현한 적도 있었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56)
함석헌은 인간이 종교적 교리의 장벽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예수의 정신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한편, 기독교 교리의 벽을 자유롭게 뛰어 넘었다. 교리나 신조 혹은 고정된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와 다른 뜻을 지닐 수 있다. 단어나 교리는 진리의 본질이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서 Tm여졌을 뿐이다. 그러나 진리의 본질적 개념을 파악한 사람에게 있어서, 단어나 교리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불교(禪佛敎)에서 교리나 경전 대신 묵상과 영감을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57)하느님이나 진리를 의식(意識)과 느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교리나 단어는 문제가 안 된다. 반면에 의식과 느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는 사람에게, 교리나 단어로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한들 그것도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역사적 그리고 사회-문화적 종교
나는 한번 비록 함석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함석헌의 글을 몇번 읽어 본적이 있는,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인 목사 중의 하나인 'Y' 목사와 대화를 나누어 본적이 있었다. 여기서 보수적이란 표현은 기독교의 교리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면을 말하고, 또한 변화나 개혁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는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을 일컫는다. Y목사는 군사독재기간에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나는 Y목사에게 "개신교 목사의 입장에서 함석헌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Y목사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교리적인 입장에서 함선생을 기독교인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함선생은 삼위일체나, 속죄론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나는 Y목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어떤 교리의 준수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주요 관심사는 구약의 율법주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고,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이 제정한 종교제도나 계율을 지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예수의 주요 관심사는 그가 속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실제적인 삶을 살고 죽는 것이었다. 함석헌 역시 예수의 정신을 본받고 그 정신대로 살다 가고자 했지 기독교의 교리를 준수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기독교교리에서 원죄설이나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평화적이고 선하다고 보았다.58)예수와 바리새인은 둘 다 똑같은 경전인 토라를 읽었다. 그러나 함석헌의 지적처럼 그 같은 경전에 대한 해석은 전혀 반대였다: "다 같이 모세와 예언자에게서 받은 성경이지만 바리새 교인의 성경과 예수의 성경과는 같은 성경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59)예수는 성경을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읽은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규정과 교리를 씨알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읽었다.
신앙의 본질과 종교제도 혹은 그 종교의 교리와는 그러므로 언제나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가 하느님과 동격이 아닌 것처럼, 교리는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교회나 교리는 하느님과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단지 하나의 방편, 도구에 불과하다. 비본질적인 교회나 교리가 본질적인 하느님이나 진리보다 부각될 때 그것은 곧 우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종교의 의미는 소위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교리를 입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삶으로서 진리와 함께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의 교리는 그 종교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시적으로는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에 집착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진리를 못 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함석헌의 궁극적 관심은 "진리와 더불어 사는 삶"이었지 "교리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승려가 예를 든 것처럼, 교리는 달(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고, 손가락 자체가 달은 아니고 달과 같을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상대적인 개념(교리나 교회제도)을 마치 절대적인 개념(진리나 하느님)처럼 다루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결국 종교적 교리는 단지 진리에 대한 상징이고 설명일 뿐이다. 이 상징이나 설명은 시대와, 인종, 문화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인간 역사의 각 시대는 그 시대마다 그 시대의 용어나 해석을 필요로 하고 요구한다. 함석헌은 인간의 각각 다른 역사-문화적 환경을 염두에 두면서 기독교인이 편견적인 태도보다는 왜 보편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나도 인도에 났다면 힌두교 믿었을 것이고 중국이나 일본에 났다면 불교라도 믿었을지 모릅니다. 한국, 한국에서도 상놈만인 평안도에서 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들은 것이 그것(기독교)뿐이므로 하는 말입니다."60)
함석헌은 진리의 올바른 체득은 역사의 입장에 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61)그리고 역사는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현재와 끊을 수 없이 연결 되어 있는 것이었다: "역사는 현재 안에 아직 살아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의 산 관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62) 인간역사의 방향이 자유를 향한 전진이라고 믿은 함석헌은 또한 모든 역사적 사건에 자신의 책임의식을 느꼈다: "죄는 내 죄, 네 죄가 아니다. 우리 죄, 인간의 죄지. 전체의 죄다. 모든 죄가 나와 관련 아니 된 것이 없다. '내가 죄인의 대가리다.' 역사상의 모든 죄악이 다 내가 참예한 죄악이다. 나도 공범이다. 내가 주범이다. 나야말로 상습범이다."63)
역사란 항상 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말씀도 역사적 변화에 맞추어 다양하게 표현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계속되는 세태 변화에 따라 종교적 교리나 신조도 항상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종교 경전이라는 것은 개조적인 법률서가 아니요, 자라는 힘을 가진 원리를 보여 준 것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새로운 생활 체험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역사 이해가 있어 그것을 뒷받침하여 주어야 한다."64)
성경은 몇천년전에 쓰여진 고정된 책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몇천년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시각은 크게 성장, 변모 되어왔다. 함석헌은 오늘날 세계와 종교에 대한 인간의 안목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보았다. 분명히 현대인의 세계관이나 종교관은 몇천년 전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넓어지고 커졌다. 우주선과 인공위성이 나르는 현대세계와 비교하면 바울 사도가 살았던 세계는 아주 작은 세계였다. 바울이 살던 세계는 지리적으로는 고작해야, 중동, 마케도니아, 그리이스, 로마제국, 이집트정도였다. 그러나 바울은 중국, 인도, 미대륙, 아프리카, 남북극, 폴리네시아등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상적으로 바울이 바빌론, 이집트, 헬라, 페르시아철학을 좀 접해 보았을런지 모르나, 그는 베단타철학, 힌두교, 불교, 유교, 노장사상에는 일자무식이었다. 더욱이 바울이 알고 있던 과학적지식은 콤퓨터와 인터넷을 마음대로 다루는 현대의 초등학교학생에 비하면 아주 원시적에 가까웠다.65)
함석헌은 기독교와 노장사상에 어떤 연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노장사상의 도는 개념적으로는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참 믿음의 표현이라는 데서는 같은 것이지 않을까."66)함석헌의 보편적 종교관은 아마도 간디의 표현을 빌어서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란 다이아몬드의 표현처럼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오직 그중의 몇면만을 흘끗 볼뿐이다."67)
기독교의 하느님과 노장의 도의 개념을 또한 함석헌은 이렇게 비교한다: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 주장을 아니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했다."68)
함석헌의 폭넓은 보편적 종교성향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1970년대 씨알의 소리의 편집자들이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저명한 평신도 기독교인 김동길, 수많은 수필집을 쓴 송광사의 불교스님 법정, 유기화학의 권위자인 과학자 김용준 전고려대 교수, 그는 한국 자연과학자를 대표해 로마클럽학회에 참석헌 적도 있다. 1975년 해직당하기까지 동아일보 편집장이었던 언론인 송건호. 1976년 송건호는 언론자유보호 투쟁위원회를 창설했다. 비록 송건호는 어느 기성종교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았지만 함석헌의 리더쉽 아래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일했다. 한국최초의 여성 법학박사이며 변호사인 이태영 또한 편집위원이었고, 그녀는 1976년 필리핀정부로부터 막사이사이상을 수상 받기도 했다. 그녀는 함석헌이 발표한 인권선언서의 거의 대부분의 초안을 직접 작성했고,69)역시 열렬한 기독교인이다.
이 논문을 위해 인터뷰를 하는 도중 필자는 함석헌과 관계된 많은 인사들을 만났다. 특별히 부산복음병원원장 장기려박사(1909-1995)를 만났을 때 필자는 그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느꼈다. 장기려는 그의 여러 가지 자선행위로 부산에서 명사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필자는 그가 아주 순수하고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간단 단순한 신앙의 소유자라고 느꼈다. 반면에 필자가 민중신학자 안병무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안병무의 성경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혁신적이고 급진적임을 실감했다. 오늘날에서 조차,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안병무가 제창한 민중신학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장기려의 신앙관과 안병무의 신앙관은 정반대적인 입장이다: 장기려가 아주보수적인 한국 고신파를 대표한다면 안병무는 가장 급진적인 한국 기장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기려나 안병무가 둘 다 함석헌과 깊이 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석헌의 종교관이 얼마나 폭넓은 것인가를 반영한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함석헌의 사상적 영향이 남한의 상이한 정치집단에 미친 영향이다. 함석헌이 운명했을 때,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는 함석헌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제안했다. 노태우는 그전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념적으로 노태우는 극우파이고 종교적으로는 불교신자다.
한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인, 1989년 3월 25일, 급진좌익계 반체제인사 문익환목사는 남한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문익환은 김일성을 만나서 회담을 가졌다. 동년 4월 13일, 북한에서 남한으로 돌아오던 중 문익환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판문점에서 즉석해서 체포 구속 수감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문익환은 남한법정에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70)문익환이나 노태우는 정치적 이념으로는 정반대 입장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같이 정치적으로는 상이한 노선에 있는 인물들이 둘 다 함석헌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에서 우리는 또한 함석헌의 사상적, 인간적 포용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함석헌은 상반되는 이념이나 사상 혹은 서로 다른 정치-종교집단을 하나로 결합하는 보다 높은 사랑의 가치관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한국의 도덕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좌우익의 갈등이나,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보수니 진보니 하는 세계 위에 있었다. 이러한 함석헌을 놓고 김동길은 "20세기 한국의 양심"으로 표현하기도 했다.71)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함석헌은 기독교 어쩌면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치를 강조했다: 사랑의 가치와 정의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권이건 씨알을 탄압하고 그 힘을 남용했을 때, 독재자 박정희가 그랬듯이, 함석헌은 정의의 가치를 발휘해 가차없이 그것을 꾸짖었다. 반면에, 독재정권 조차도 그것이 씨알의 힘으로 타도되고 쇠퇴되었을 때, 독재자 전두환의 경우처럼, 함석헌은 오히려 사랑의 힘, 사랑의 가치를 외쳤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강렬함과 유연함의 덕목을 둘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관용심 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관용심으로 인해, 함석헌은 심지어 그와 아주 가까운 주변 인물들로부터도 종종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함석헌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향하여 전체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선인과 악인은 싫건 좋건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공동운명체라고 믿었고, 악이건 선이건 그 뿌리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라고 믿었다.72)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유다의 자살에 관한 글을 읽으며 함석헌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는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잃어버린 하나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없음으로 전체가 깨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실패는 결코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닙니다. 전체의 실패입니다.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 구원은 옵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는 순간도 유다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는 유다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73)
함석헌이 지적했듯이, 아메바나 짚신벌레 같은 하등생물은 설사 몸통이 잘라지고 분리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은 몸통이 잘라지면 더 이상 그 생명 자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74)그러므로 함석헌은 고등동물인 인간은 기계체(機械體)가 아닌 유기체(有機體)로서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었다: "전체의 생각만이 참 생각 곧 진리요, 전체의 행동만이 참 행동 곧 선이요, 전체의 감정만이 참 감정 곧 정의다."75)"파상풍균이 들어간 것은 발가락이지만 죽는 것은 발가락만이 아니요, 전체다."76)이처럼 함석헌은 현대사회를 유기적인 사회로 보았고, 그러므로 어느 개인도 전체로부터 동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휴머니스트 함석헌
서구기독교와 동양사상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와, 보편적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자 하는 함석헌의 사상적 배후에는 휴머니즘이 있다. 어쩌면 그는 지나치게 제도-조직화된 종교보다는 자연 그대로 있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더 중요시한 것 같다: "기독교가 문제지 교회가 문제냐. 종교가 문제지 기독교가 문제냐. 인생이 문제지 종교가 문제냐."77)하나님은 시공과 형식을 넘어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우리 삶 가운데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역시 그가 속했던 시대의 형식을 넘어서 행동했고 살았다.
2000여년 전 중국의 유학자 순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푸른색 물감은 남색 초목에서 따왔지만 그 초목보다 훨씬 더 푸르다. 얼음은 물로 만들었지만 물보다 훨씬 더 차갑다."78)공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걸을 때 나는 그 둘로부터 꼭 배울 점이 있다. 좋은 친구의 행동은 내가 보고 그대로 모방할 수가 있고, 불량한 친구의 행동은 내가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저래서는 안 되겠다고 고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79)함석헌은 그의 인생의 여러 단계에 스승, 선배, 친구, 심지어 후배 등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과 가치관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대략 들어보면: 유영모, 이승훈, 우찌무라, 김교신, 장준하 등이다. 마치 공자의 경우처럼, 함석헌은 그들의 좋은 점을 모방하려고 노력했고, 바람직하지 않은 점을 통해선 자신을 성찰하고 고치고자 힘썼다.
예를 들면, 유영모를 통해서 함석헌은 종교다원주의적 사고를 배웠다. 그러나 유영모와는 달리, 함석헌은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이념적 다원주의로 발전시켰고, 결국 이해관계가 다른 상이한 정치 이념집단을 포용함으로써 한국 사회 현실에 그의 생각을 적용, 확산시켜나갈 수 있었다. 비록 유영모는 그의 종교다원주의적 사상으로 젊은 시절의 함석헌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지만, 그 후 함석헌의 한국사회현실을 향한 실제적 공헌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씨알들에게 종교적 다원주의의 사상이 그렇게 공개적으로 넓게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영모가 은둔적, 금욕적, 청교도적이었다면, 함석헌은 더욱 폭넓은 전체 사회적 입장에서, 성속의 장벽이나 구분을 없애버리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뜨거운 민족애와 애국애를 이승훈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의 삶에 머무르지 않았다.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의 하나 즉 보편적 신앙으로 이해하게 됨에 따라 함석헌은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넘어선 세계화시대, 세계주의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하였다. 더욱이 여러 가지 동양 고전사상을 통하여, 함석헌은 기독교를 편견이나 편애없이 더 광범위하고 깊은 사상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은 한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보다는 각 종교간에 서로 존중해주고 진리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외에도, 그 인생의 여러 단계에 함석헌은 다양한 외국 사상가들의 생각과 관점을 배우고 흡수하였다: 그는 비폭력원칙을 인도의 간디로부터 배웠다 영국의 쉘리로부터는 불타는 저항정신을 배웠다. 종교와 과학간의 융합에 대해서는 프랑스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에게서 배웠다 이상적 무교회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일본의 우찌무라로부터 배웠다. 절대평화주의와 사회개혁정신은 영미의 퀘이커들로부터 배웠다. 세속의 잡다한 문제를 초월해서 보는 달관의 정신은 중국의 노자와 장자를 통해서 배웠다. 인도주의(Humanitarianism)의 정신은 러시아의 톨스토이로부터 배웠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민주정신에 대해서는 미국 피풀 풀사람 월트 휘트먼으로 부터 배웠다.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중동의 레바논사람 칼릴 지브란에게서 배웠다. 역사적 낙관주의와 세계주의 정신은 웰즈로부터 배웠다. '서로 사랑하라, 하느님은 곧 사랑이시다' 라는 가장 큰 계명은 예수에게서 배웠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가지 보편적 가치를 강조한 함석헌을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보편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함석헌은 동양의 노자, 장자나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었다: "내가 노자도 좋아하고 장자도 좋아하지만 내가 믿는 내 주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지."80)"내가 내 주님이라 한다면야 예수가 내 주님이지 노자, 장자겠어요? 사상으로 한다면 거기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러지만."81)그러면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다'라고만 정의 할 수 있을까? 함석헌은 나와 다른 남의 종교와 생각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믿는 교리나 의식을 따르면 다 선한 사람이라 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덮어놓고 악한 놈이라 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건지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 그림, 내 시, 내 노래만 좋다 하고 남의 그림, 남의 시, 남의 노래는 다 더럽다 한다면, 그것은 정말 예술이 뭔지 모르는 더러운 마음입니다."82)
함석헌은 하느님 앞에 진실해야 할 것과 동시에 나와 다른 생각, 믿음을 가진 이웃도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이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예수의 황금률인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데로 남에게 해주어라"의 계명을 철저히 따르고자 힘썼다. 제도라는 것은 그대로 현상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기에 함석헌은 제도로서의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제도는 언제나 사상의 뒤를 따라온다. 그러므로 제도라는 것은 항상 사상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유효한 것이다. 전 세대에게 적절했던 제도가 반드시 다음 오는 세대에게도 적절한 제도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끊임없이 종교적 고정관념, 정치적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벗음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외부의 종교적 계율이나 정치적 강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리보다 인간 내부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진리가 훨씬 든든한 진리라고 믿었다.83)함석헌은 퀘이커-기독교인으로서, 그가 역사적으로 속했던 시대 안에서, 그것은 정치적 압박의 시대였고 종교적 편견의 시대였다, 진리를 발견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아버지게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84)함석헌은 기독교인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지금 공간적으로는 여기서 일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85)그에게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 즉 영원한 현재였다.86)그러므로 함석헌은 그가 속한 역사적 시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세속적 불의와 독재정권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의 사회비평 종교비평은 곧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그의 신앙선언이었고,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리추구의 길이었다. 그의 사회참여는 이런 맥락에서 씨알의 고난과 시련을 마치 자신의 고난과 시련으로 여기는 종교적 신앙고백행위였다. 하느님을 전체적 존재로 믿은 그는 전체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자신이 개인적으로 범한 죄를 용서받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87)
일반적으로 한국 기독교인은 기독교에는 아주 열성적인 반면, 타종교나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경멸적인 성향마저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인일 수록 지금 살고 있는 삶보다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강조하고,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실의 문제로부터는 동떨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한국기독교인에게 더욱 현실적, 과학적, 이성적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88)
함석헌은 또한 종교와 과학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종교적 관점은 세속적 관점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세속적 관점은 과학의 진보에 의해 형성되어가는 것이라고 함석헌은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파악했고, 결국 과학과 종교는 점차적으로 서로 일치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비과학적인 종교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고, 신학과 과학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차라리 신학을 버릴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89)그러나 함석헌은 또한 진정으로 과학적인 태도는 과학이상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90)다시 말하면 그는 현상세계,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과학의 길이고, 반면에 영적세계,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최고의 길은 종교의 길이라고 믿었다.91)동시에 함석헌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면에 있어서는 종교나 과학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미래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앞으로 종교와 과학은 자꾸 접근할 것이다. 마치 한 산을 반대 방향에서 서로 뚫고 들어간 셈이어서 양자는 이날까지 서로 저쪽을 아니라 했다. 방향이야 물론 반대지만 그 겨눈 것은 다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서로 제 믿는 바대로 뚫은 것이 결국에 맞구멍이 뚫리게 된 셈이다. 이제 두고 보라. 심리학, 사회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에서 연구한 세계가 종교가가 수천 년 두고 제 가슴 속에서 뚫으려던 것과 딴 것이 아님이 증명되는 날이 올 것이다."92)
비록 함석헌은 전체의 가치를 강조했지만, 그가 주장한 전체론은 권위적 사회의 집단주의나 개인의 특색과 개성을 무시한 전체주의가 아니었다. 그의 전체론은 오히려 공동체정신을 바탕으로 한 성숙된 단계의 개인주의였다. 함석헌에게 개인이나 전체의 구별은 없었다, 그것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각개인의 자유는 전체와의 영적교섭을 통해서만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93)그는 하느님과 씨알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씨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의 종교는 두 겨냥을 가진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은 내게 좋은 자만이 아니고 저 인생 온통이다."94)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95)
"하나님 말씀은 민중의 입을 통해 온다."96)96.
"사람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합니다."97)
함석헌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니었다. 한국의 평신도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합일시켰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한국인과 한국기독교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창조했다. '이단자'기독교인으로, 함석헌은 기독교에 대항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부패한 인간들에 대항해서 싸웠고, 비도덕적인 통치자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패하고 비도덕적인 권력자들이 함석헌이 살던 시대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폐습과 부패로 물든 한국기독교를 정화시키자고 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교회의 경직되고 독단적인 교조(敎條)의 흐름에 양심적 인간으로서 '한국기독교 이대로 좋은가'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는 한국교회가 정직하고 건강한 종교로서의 본분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부유하게 돈줄이 넘쳐흐르는 한국교회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신이 더 예수의 정신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고 확신했던 듯이 보인다.
함석헌은 서구중심주의나 샤마니즘적인 혹은 유교적인 한국 교회에 사회-정치적 복음의 의미를 복원시킴으로써 기독교의 근본정신과 역할을 되살렸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교리적'인 반면, 깊은 철학과 사회정의를 위해 행동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함석헌의 서구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 그리고 그의 보편적 종교관, 동아시아인으로서 서구기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재해석은, 100년을 갓 넘긴 한국개신교의 커다란 사상적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님에게 빛을 보여 줄 수는 없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1483-1546)가 그의 시대에 경험했듯이, 함석헌의 종교관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기독교인들로부터는 많이 이해받지를 못했다.98)
기독교인으로서 함석헌의 보편적 종교관은 예수가 한 직접적 표현으로서 적절히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산이든 예루살렘이든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문제 되지 않을 때가 오고 있다...아버지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오는데 바로 이 때다...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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