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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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사상논총>제10집(2001년), 강남대학교
함석헌의 비폭력사상과 종교
김 성 수 박사
『함석헌 평전』저자
들어가면서 Ⅰ.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 Ⅴ. 종교와 사회 Ⅱ. 종교간의 대화 Ⅵ. 종교의 본질과 현상 Ⅲ. 보편적 가치로서의 종교 Ⅶ. 종교인의 역사의식 Ⅳ. 과학과 종교 나오면서 -- 비폭력과 종교 |
들어가면서
"예수의 종교는 두 겨냥을 가진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은 내게 좋은 자만이 아니고 저 인생 온통 이다." (함석헌전집5, 서울: 한길사, 1983, p.315)
Ⅰ.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지만, 함석헌은 인간을 “종교적 동물”로 보았다. 장기홍은 “종교는 함석헌의 시작과 끝, 함석헌의 전부다”(2001년 3월 13일 서울프레스센터 에서) 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엑스타시(황홀경)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고, 그 어떤 엑스타시도, 성(sex)이나 마약을 통한 엑스타시 조차도. 종교적 엑스타시만큼 인간이란 존재에게 기쁨과 만족을 채워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런 종교적 ‘도구’를 통해서 그가 추구한 것은 사자와 어린양, 독사와 어린 아기가 함께 놀아도 전혀 위험이 없는 철저한 비폭력의 세계였다. 이만큼 그의 비폭력사상과 종교관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종교인으로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예민하게 인식하는 감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부조리한 현실을 종교적 사랑으로 개혁할 뜨거운 정열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런 함석헌 비폭력사상의 뿌리는 종교적 다원주의라고 평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다원적 종교관은 타종교를 향하여서는 종교적인 관용성을 베풀게 했고, 복잡 다난한 광범위한 인간사(人間事)를 향하여서는 폭넓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가지게 했다. 종교적 관용주의 입장을 취한 그는 엄격하고 경직된 한국의 종교적 풍토를 부드럽고 탄력 있게 완화시키고자 힘썼다. 이런 그에게 오늘날 남아있는 세계의 주요 종교는 다 인류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정신적 자원이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개 석상에 그는 자신의 종교관을 선포했지만, 종교적 이해 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모든 주요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고 힘썼다.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라고 느꼈고,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진리도 받아들였다. 그는 기독교를 유일한 인류의 종교나 진리로 보기보다는 진리를 소유한 많은 인류의 종교중의 하나로 이해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길을 통해서도 성취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그에게 인간이 궁극적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비폭력휴머니즘은 그가 자신의 종교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남의 종교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다.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서양인들이 혹은 한국인들 자신조차도, 유교와 불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그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보다는 얕은 교단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Ham Sokhon. Kicked by God, Baltimore, Md. AFSC, 1969, p.17) 다양한 동아시아의 종교와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이해심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져 갈 수 있었다. 과거에 기독교가 종교로서 미 발달, 미성숙 단계에 있었을 때에는 그 생존을 위해서, 강력한 기독교 중심주의의 사고에 의해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종교간의 반목, 질시, 폭력보다는 화합과 더불어 사는 길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곧잘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만 볼 것이 아니라 노자, 공자, 불경도 봐야 합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 싸움과 폭력이 없는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다. 한국이 종교적 다원주의의 나라인 것을 고려할 때 우리가 함석헌을 일컬어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라고 묘사하는 것은 다양한 한국사상의 발전을 위해 지극히 고무적인 일이다. 전통적으로 아시아 나라들은 신도(神道), 불교, 회교, 힌두교등 동양적인 종교들을 여전히 국가 종교로 지키고 있다. 반면에, 서구 나라들은 압도적으로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지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이런 면에서 좀 특이하다. 서구학자 헨더슨(Gregory Henderson)조차도 한국을 놓고 "동양종교와 서양종교가 동시에 병행 공존하는 나라" 라고 표현했다. (Gregory Henderson.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Mass: Harvard U.P, 1968)
Ⅱ. 종교간의 대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심각한 종교분쟁 심지어 폭력을 앞세운 종교전쟁으로 사회-정치 발전에 큰 저해를 미치기도 했다. 그것은 그만큼 잘못 이해된 종교가 무서운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이래서인지 함석헌은 서로 다른 각 종교들간에 서로 관대하게 포용해 줄 것을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나, 불교나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그 근본에서는 하나라는 확신을 가졌다. 한국인이 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 수용해 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성은 한반도의 사회 문화적 풍토에 아주 적절하다 할 수 있다. 가지각색의 종교-철학이 공존해있는 동북아시아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그에게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은 이래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타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무조건 폐쇄적이고 편파적인 좁은 안목을 갖고있는 일부 기독교인에게, 그가 제시한 종교적 관용성은 사상-문화적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더욱이 한반도가 지난 세기동안 흑백논리를 바탕으로 한 군사독재체제아래 있었을 때, 종교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념적 다원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동시에 주장한 함석헌의 주장이 결국은 비폭력 민주화운동으로 현실에 나타났다.
함석헌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사상, 종교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인으로서, 그는 유불교, 노장, 전통 무속신앙과 친숙했다. 더욱이 그는 소용돌이와 같았던 그의 인생여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념들을 직접 체험할 기회가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일본식민주의는 평화주의에 반대되는 폭력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3.1운동을 통해서 그가 벌써 비폭력운동과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참여의식에 눈을 뜨게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물질주의로 그 앞에 나타났고 그것은 그의 비폭력 기독교신앙과 양립할 수 없었다. 기독교 정권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의 작태는 그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대치되는 기독교 편애주의였다. 유교사상의 절대적 가부장주의를 재 강조하는 박정희의 충효이념은 그의 자유-초월사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참 종교는 문명에 끌려 다니거나 어느 한 집단이나 계층을 위하기보다는 전체인류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함석헌은 미래 인류 문명이 비폭력을 바탕으로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뤄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던 만큼, 그는 세계와 인간의 삶은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 야요" 라고 그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종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 인식은 훗날 그가 서구의 기독교와 동양철학을 사상적으로 융합하는데 근본적 원리가 된다. 이런 그에게 단지 누구만을 의한 종교는 별 의미가 없었다.
다석을 통해서 함석헌은 종교 다원주의적 사고를 배웠다. 그러나 다석과는 달리, 그는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을 이념적 다원주의로 발전시켰고, 결국 1970년대 한국의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서 이해관계가 다른 상이한 정치 이념집단을 포용함으로서 한국 사회현실에 그의 생각을 적용, 확산 시켜나갈 수 있었다
함석헌은 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의 한 형태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는 현실에서 유리되거나 사실과 관계없는 종교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 이어야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 역사의식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미신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폭력이 어디서 나오나? 이성과 합리성이 결핍된 곳에서는 무력과 폭력만이 판을 친다.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는 도덕이 설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그는 온 몸으로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종교적 도덕성을 통해서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는 이래서 도덕성을 상실한 종교는 미신이나 광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물론 종교의 세계는 '현실'이상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는 종교가 현실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Ⅲ. 보편적 가치로서의 종교
교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폭력과 불행을 인간에게 안겨준 것을 의식해서인지, 함석헌에게는 전 인류의 문제가 특정 집단이나 종교인들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우선권을 가졌다. 그에게는 이성과 과학을 중심으로 한 객관성과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이 자신의 주관성만큼 중요했다. 그는 각 사람의 종교관도 외곬 적이거나 편집 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한다고 보았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타종교를 향한 그의 인도적 관용성과 사상적 포용성 그리고 비폭력원칙을 바탕으로 한 민주화 운동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기독교인들과 급진적 ‘운동권’인사들로부터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적 신앙심, 특별히 기독교적 신앙심은 그가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도록 끊이지 않는 원천적 힘과 에너지, 영감(inspiration)을 제공해 주었다. 동시에 그는 분쟁과 ‘키재기’로 얼룩지어진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진보, 개방적 심성으로 변화시켰고, 타종교에 대하여는 편견을 갖지 않도록 이끌었다. 그는 ‘산‘ 이라는 시를 통해서 상대세계의 편견과 독선에 빠지지 않는 중립적 절대자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묵묵하고 초연한 하늘과 산을 우러러보고, 그는 복잡 다난한 인간사의 문제로부터 초월해 있는 절대자를 보았던 것이다. 절대자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모두 빛과 비를 공평히 내려 주고, 그는 이러한 절대자의 본성을 초월적이고 편애에 사로잡히지 않은 존재로 파악한다. 폭력과 전쟁은 내편 너희 편, 나의 것, 너희 것을 가르는데서 나온다.
Ⅳ. 과학과 종교
종교의 본질인 이타주의를 상실하고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과 폭력을 초래한 역사를 생각하고 함석헌은 종교인들이 최소한 과학적 합리성을 지닐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데이아르드 샤르댕에 대한 그의 애착은 특별했다. 프러시아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스코틀랜드의 경험주의자 흄(David Hume: 1711-76),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0), 플로렌스의 철학자 베카리아(Cesare Beccaria)등이 과학이 진보하면 종교는 후퇴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샤르댕은 종교와 과학, 즉 그의 기독교적 비전과 과학의 진화론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종합하고자 끊임없이 힘썼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종교 없는 과학은 장님과 같고,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다”라고 강변했다. 함석헌은 과학, 철학, 종교가 한데 어울린 샤르댕의 사상을 통해서 이상적인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 그래서 그가 기존의 종교 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퀘이커의 역사의식, 현실참여정신과 더불어 그들의 진지한 ‘과학적’ 태도에 있다.
절대 계의 진리뿐만 아니라 상대 계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서구역사를 통해 과학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과 연결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종교는 영원성과 영성(靈性)을, 그리고 과학은 합리주의와 현실감각을 대표해주는 두 근본 요소였다. 그래서 그가 서구 퀘이커의 예민한 현실감각과 합리적 과학정신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과학적-종교인'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기독교인은 교회에는 아주 열성적인 반면, 타종교나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경멸 적인 성향마저 가지고 있다. 내가 남을 경멸하면 남도 나를 경멸하게되고 이러한 태도는 결국 싸움과 폭력만 가져올 뿐이다. 함석헌이 왜 ‘합리주의자’가 되고자 했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와 상식주의적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 한만큼 퀘이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던 것을 이해할 만도 하다.
Ⅴ. 종교와 사회
격동의 20세기를 몸으로 겪으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는 함석헌에게 단순히 종교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사회-정치적 계몽운동, 훌륭한 문화의 본보기, 민족발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조국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근본적 매개체로서 젊은 시절 기독교적 종교윤리를 받아드려야 할 것이냐, 혹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적 정치이념을 선택해야 할 것이냐 고민했을 때에도, 결국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더욱 효율성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덜 효율적인’ 기독교를 택한다. 그는 자신이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패배자가 되거나 비효율적인 길을 택하게 되더라도 비폭력의 길을 선택했다.
정치적 의미에서건 혹은 종교적 의미에서건, 전체주의사회에서는, 오직 하나의 관점이나 주의만이 허용되고, 이 하나의 시각만을 전체가 받아들이도록 폭력적인 방법이 강요된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스스로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함석헌은 이런 면에서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대변자였다. 낱낱의 개성이 폭력적인 권력 횡포에 의해 탄압 받지 않고 보장,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 그였기에 그는 한 종교가 폐쇄성, 독단 성을 갖지 않도록 경고하기도 한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 종교로써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함석헌전집3, p.36) 이렇게 그는 기독교를 "선택된 사람(選民)"들만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버림받은 씨알의 종교로 보았다. 그렇기에 폭력을 앞세운 정치깡패를 서슴없이 동원한 기독교정권(자유당) 하에서, 소외된 비기독교인을 위해 그는 ”대선언“(1953)을 발표한다. 이 "대선언"은 그가 기독교 정권 하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종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종교적 입장을 신앙 고백으로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비폭력을 중요시한 함석헌은, '종교'를 절대 계의 일이 아닌 상대 계의 일로 보았다. 그래서 그 종교 없이 그가 절대자나 진리를 배울 수가 없었지만, 그 종교가 그의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느님을 가두어 둘 만큼 클 수는 없다고 그는 느꼈던 것이다.(함석헌전집9, p.315) 그는 인간을 철저히 유한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절대자의 이름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그런 것이 단지 무한한 존재에 대한 유한자의 자기합리화, 정당화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유한적)기관도 하느님(무한적인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진리란 모든 사람을 위해, 각 사람의 종교, 비종교 여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했다.
Ⅵ. 종교의 본질과 현상
함석헌은 기독교 정권 하에서 한국교회 증가운동을 종교적 부흥운동으로 보기보다는, 분파적 집단주의의 한 현상으로 보았고, 그 분파주의로부터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자유당의 횡포를 직접 체험한 그는, 자유당의 정치적 노리개가 된 한국교회의 종교적 진실성에 더욱 회의를 품었다. 이때부터 그는 제도화된 종교 안에 자신의 영성(靈性)을 가두어 두기, 보다는 자유자재로 무한하게 종교의 진리를 추구 할 것을 결의했다. 제도 속에 갇혀있는 종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뚜렷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지, 인간을 착취하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하나의 강력한 제도로 자리 잡을 때, 그것은 특권층만을 위한 종교로 전락하기 쉽고, 역사의 진보를 오히려 방해한다.... 사실 참 종교는 박해 아래서 성장한다." 이렇게 그는 종교의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거나, 교회 중심주의로부터 소외 되어있는 버림받은 씨알에게 위로를 주었고, 그들의 역할을 부각 시켰다. 그는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는 늙은 종교, 침체된 종교로 믿었다. 그는 국가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의 폭력적인 정책조차도 받아들이고, 부정, 불의와 충돌을 피하고 보조를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비폭력을 강조하는 종교적 무정부주의자였다.
함석헌은 또한 막강한 종교조직을 유지하는 것보다, 씨알의 가슴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 참 종교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된 힘이나 권력은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대한 조직을 가진 종교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소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최고의 종교라고 여겼다.
종교의 세계는 물론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쟁점이었다. 자유와 평등이 중요시되는 현대사회의 풍토에 맞게, 완고하고 답답한 종교적 교리도 현대의 시대정신과 흐름을 탄력 있게 반영해야 생존할 수 있다. 함석헌은 한 개인이 갖고있는 역사-사회의식과 그 개인이 지닌 종교의식(意識)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했고, 기독교를 종교적 맥락에서 뿐이니라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비폭력을 앞세운 종교인으로서 그의 조국의 정치 사회적 문제를 항상 의식하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거침없이 그의 조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전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그는 아마도 종교자체의 정체성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우리는 타인의 존엄성을 보장해주지 않고, 나의 존엄성이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Ⅶ. 종교인의 역사의식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 역사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평신도 종교인으로서 한국의 종교와 사회간의 바람직하고 이상적 관계를 위해 함석헌은 비폭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편안하게 현상유지만 바라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현실 고통의 도피수단으로 점쟁이나 기형적 종교집단을 찾는 것도 한 인간이나 집단의 병든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함석헌은 그런 곳을 찾아서 위안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비폭력사회참여의 길이 더욱 중요하고 종교인으로서의 참된 길을 걷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그에게 당연히 기독교의 근본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이었다. 그는 인간 각자가 물론 개인적으로 존재하지만, 생각만큼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체, 세계 전체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진정 현대 사회에서도 일신교적인 종교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 신은 하나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 모습이나 인상은 각 사회나 문화에 따라 다른 양태,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함석헌은 "오늘의 기독교는 결코 가난한 자의 종교가 아니다"라고 보았지만 그의 비폭력원칙에 대한 애착 때문에, 권력을 뒤집어엎는 사회혁명가가 되기보다는 ‘종교인’으로 남았다. 예수 역시 가난한자의 친구였고, 그 자신을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 죄인, 빼앗긴 자들과 동일시했다. 기독교도 초창기에는 분명히 기득권 층보다는 가난한사람을 위한 종교였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기조차 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장사 터로 만드느냐?” 그러나 그렇게 사회부조리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통렬하게 비판한 예수조차도 불의, 부패권력에 대항하여, 폭력혁명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는 남의 생명을 위협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희생되는 길을 택했다. 함석헌이 택한 길도 그런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세계의 이권다툼이나 생존경쟁에서는 무력한 “바보새”로 대처했다. 석가와 예수는 둘 다 종교적 편견이 없었다. 함석헌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혁명적인 개혁가(혁명은 안 했지만)이었고 각 종교간의 편견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현대사를 통한 함석헌의 끊임없는 비폭력사회참여는 그의 기민한 정치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씨알의 고난과 시련을 마치 자신의 고난과 시련으로 여기는 그의 철저한 종교적 신앙고백행위였다. 이상적인 종교인은, 그의 삶을 통해 초월적인 영원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역사현실의 세속적인 사회참여를 함께 병행시켜야 한다. 그의 생애 동안 함석헌은 자신의 이상과 종교심을 갖고 여러 가지 사회, 현실문제에 비폭력적 방법으로 부딪쳤다. 그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이 조국을 향한 애국심과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일찍부터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직접행동에 옮겼다. 그는 동시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 교리 혹은 어느 특정 종교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 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각 개인이 스스로 절대자와의 독창적인 관계를 갖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믿었다. 어떤 외부적인 폭력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담담하고 겸손하게 신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자유인, 이것이 함석헌이 본 현대 종교인의 본모습이 아닐까?
나오는 말
비폭력과 종교
함석헌은 폭력의 가치, 약육강식의 가치가 휩쓸던 시대를 살았지만, 그 자신은 각 개인이나 민족사이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종교를 발견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시한 그였기에, 그 이웃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사랑해야할 종교적 의무를 느낀 그였다. 그래서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다"라는 시각에 그는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늘 가르치고 읽기를 좋아하던 <도덕경>도 그 요지는, 정치인이나 정치가에게 주는 철학가 혹은 종교인의 조언이라고 요약 될 수 있다. 노자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비폭력의 상징인 어린아이, 여성 그리고 물로 대표 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약함이다. 물은 낮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만물에 생명을 보급한다. 어떤 생명도 물이 없이는 살 수 가없다. 그러므로 노자에게 있어서 약(弱)은 곧 강(强)이 될 수 있다. 함석헌은 이렇게 도덕경을 통해서 약으로 강을 제압하는 법, 비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방법을 습득했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에게 종교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종교는 인간의 내적 생활을 위해 그리고 정치는 외적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느꼈다. 간디는 정치적 문제를 비폭력을 통한 종교적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간디의 비폭력원칙을 한국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1970년 그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을 때나, 군사독재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위해 활동 할 때,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씨알들에게 항상 비폭력원칙을 주장했다. 그는 학문도 현실생활에 적용되어서 인류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 무익한 것처럼, 비폭력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도 살아있는 역사의 짐, 인류의 짐을 지지 않는 한 무익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절대적 비폭력보다는 자기방어로서의 완력사용을 정당화시키기도 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나 한시대의 고민을 상실한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무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靈感)일지라도, 함석헌에게는,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 재 적용되지 않고는, 그저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의 종교관과 세계관도 고정관념을 깨고, 시대의 변동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해갔다.
함석헌은 비폭력원칙을 주장한 종교 사상가로서 각 종교는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타종교도 열린 마음과 동등한 눈으로 이해하고 배우고자 했다. 그는 인간이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그런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인간애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타종교에 대한 그의 포용성이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융합하게 한 근원적 원동력이었다. 만약 불교도가 오직 불교신자들의 잘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회교도가 오직 회교도들의 이익만 챙긴다면, 세계는 순전히 이기적 파벌집단의 모임에 불과하게 될 뿐이고 오직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거리간의 충돌과 폭력만 성행하게 될 것이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언어와 표현으로도 해석과 설명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그 종교는 보편적인 종교,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 여러 종교에 대한 지성적인 깊은 이해가 또한 함석헌으로 하여금 타종교를 향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갖게 한 이유중의 하나다.
함석헌은 비폭력원칙을 제시함으로서 상반되는 이념이나 사상 혹은 서로 다른 정치-종교집단을 하나로 결합하는 보다 높은 사랑의 가치관을 보여 주었다. 그는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계율이나 교리준수가 아닌 사랑의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면에선 ‘종교’ 보다 따뜻한 휴머니즘을 더 중요시했다: "기독교가 문제지 교회가 문제냐. 종교가 문제지 기독교가 문제냐. 인생이 문제지 종교가 문제냐"(전집6, p.377)는 그의 말도 이러한 그의 심정을 나타낸다. 비폭력의 가치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한 그였기에, 한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보다는 각 종교간에 서로 존중해주고 진리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과 종교적 신앙심을 영적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일은, 그가 절대자를 향한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둘 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참 종교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일과 비종교적인 일,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모든 일이 종교적인 일이고, 모든 일이 비폭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인간애가 바로 종교와 비종교, 절대자 하느님과 상대자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타종교를 배척하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종교적 우월주의를 주장했을 때, 그는 타종교인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구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인종, 국가, 종교,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고 이상주의자였다. 그가 특별히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했던 것은 생기발랄한 인간의 직관과 종교적 신앙심이 현학적 혹은 정주(定柱)성의 종교 교리적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부시정권의 철저한 자국이익중심주의외교, 무력외교를 지켜보면서, 종교인으로서 폭력이 없는 아름다운세상을 실현하는 길은 함석헌뿐 아니라 인류모두가 추구해야할 진정하고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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