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비평> 제5호(2001 가을), pp. 178-190, 생각의 나무
현대사 속의 함석헌
- 고 은 -
함석헌과 관련해서 역사적 사고가 새삼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왔습니다. 또한 이 같은 세기적 전환뿐 아니라 새로운 천년을 맞아 천년기(千年紀)의 거대 시간에 대한 전망의 필요성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다고 해서 지난 20세기에 대한 총괄적 결산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20세기의 수기(數奇)찬 격동과 시련을 우리는 크게 보아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의 체제로 감당했고 그 두 체제는 확고 부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하나 의심할 여지없는 이 같은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적대적 공존 관계는 그러나 20세기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20세기의 문제는 20세기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동구권 및 소련의 극적인 붕괴로 말미암아 소멸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20세기의 모든 세기를 성장과 복지를 병행해 온 서구 선진 국가들의 존재 이유도 20세기 말의 지구화 현상 앞에서 불분명해졌습니다. 아마도 역사에 대한 인식은 21세기 첫 10년 정도의 세월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당장 우리 동시대는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빠르게 이동중이며 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선단적(先端的)상황이기도 합니다. 반도체, 유전자조작, 인터넷, 전자 상거래등 새로운 문명 생활의 실현은 한편으로는 고도 성장에 의한 탐욕적 개발과 생산 증대로 인한 자연파괴와 공해 등의 심각한 현상으로 치닫고 있으며 이는 근대사회전반에 걸친 근본적 모순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력의 발달이 사회진보의 원동력이라는 진보 사관이 흔들리게 되고 근대 국민 국가가 세계 질서나 개인의 행복 어느 쪽에도 가장 믿을 만한 장치였던 것이 정보와 자본 및 시장 개방의 경계 허물기에 의해 그 의미가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활동의 물질적 확대 교류는 오랫동안 지탱해 온 각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 방향에 깊은 충격을 주게 됩니다. 특히 문화 역할의 핵심과 인문학의 위독 상태는 심각합니다.
이런 문제와 함께 있어야 할 자기 점검에는 지난 20세기가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라는 질문도 포함됩니다.
20세기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20세기라는 시대 인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입에 올린 것이 사실상 20세기 중반에야 가능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100년 단위의 근 현대사를 타율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해줍니다.
말하자면 20세기란 민족 생존의 최대 위기와 함께 온 것입니다. 이를테면 3 . 1운동을 이끌어낸 독립선언서의 “눈앞에서 세상이 펼쳐졌도다”라는 수식으로 된 시대 감각이 20세기에 대한 구체적 대응이 될 수 없는 재래적 수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런 출발에 의한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의 비극적 연대기(年代記)야 말로 우리가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이 1901년에 태어난 것은 이 같은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시련 속에 그의 운명이 진행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함석헌과 한국근대사라는 등식적 명제보다는 현대사 속의 함석헌이라는 명제가 먼저 필요합니다.
함석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 현대사 및 현대사로서의 함석헌을 생각해 보는 의무는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크기를 역사 개념의 크기로 과장하는 것을 경계할 것과 한 선각적 인간상이야말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계몽적 실체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 어느 쪽도 다 중요할 것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성서로 본 조선역사)는 함석헌을 역사가로 말하는 단서가 됩니다. 이와 함께 그의 서술 가운데 역사에 의존하고 역사로부터 하염없이 꿈을 찾아내는 행위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아도 그의 역사에의 관심이 일관된 것을 알게됩니다.
그의 한국사 인식은 그의 생애 전반에 해당하는 종교적 역사관으로 한국의 운명을 비춰보는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그는 일단 영웅 사관이나 계급사관을 지양한 다음 민중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한편, 섭리사관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섭리는 반드시 성서적 고난을 통해서 현현(顯現)되는 역사 정신의 중심을 이루고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을 알려면 개성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몇백 몇천 페이지의 역사는 산에서 소경이 코끼리를 다듬는 것 같은, 아무 통일 없는, 아무 뜻 없는, 그저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말을 할 뿐으로 그치는 것은 역사의 구절구절 속에 숨어 있는 이 바닥의 가락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모든 일, 그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서로 떨어진 것이지만, 단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 때문에 한 역사를 이룰 것이다. 그 무엇을 붙잡는 것이 역사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것이 뜻이다.]
이상에서 함석헌의 역사를 뜻의 역사로 만나게 됩니다. 이와 함께 그의 역사관의 기초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 자리를 연극으로서의 무대, 둘째 민족의 특질을 무대 위의 배우로 봅니다. 셋째가 바로 그 땅에서, 그 민족으로 그 역사를 짓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각본으로 봅니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의 논리를 빌어 지리는 기후, 토질이고 민족은 과수(果樹)의 품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란 그 과수를 심는 자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각본과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심는 자”가 바로 다름 아닌 섭리입니다.
함석헌의 역사 의식은 이런 섭리 의식으로 귀결되는데, 바로 이 같은 섭리는 제 머리 위에서 일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일을 일러주자는 것이라고 그는 애써 강조합니다. 이것을 좀더 구체화시켰을 때 “씨의 역사”가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씨’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특수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때 가령 서남동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씨’보다는 ‘민중’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지적 당하기도 합니다.
함석헌은 이 섭리를 말하면서 “선생을 가지지 못한 자는 불행할진저!” 라는 탄식을 내밷고 있습니다.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지경에 한발걸음을 내놓으려 하는 그의 첫 신념이 여기에는 스며 있습니다.
1934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쓰기 이전에 통사(通史)로서의 한국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박은식의 실천적 역사 개관이나 신채호의 진보적 역사관의 업적, 이능화, 문일평의 문화사 탐구 이전에도 조선 후기의 뛰어난 통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자아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시각은 새로운 깨달음이라는 성서적 의미를 통한 조명을 제시한 것입니다. “까닭을 물으면 나도 그 까닭을 모르고 그저 마음의 수평선 뒤에 그렇게 떠올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말하라고 명을 받은 줄 믿으면서 내놓아 이렇게 단언한다”는 말이 바로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입니다.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사상도 무엇도 무엇보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다.
함석헌의 역사관은 이처럼 섭리로서의 고난 사관입니다. 섭리란 신의 의지로 된 운명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전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은 그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 같은 섭리 사관을 그는 오산학교 역사 교사로 부임한 이래 길러낸 것입니다.
그는 식민지 시기의 민족 교육을 위해서 역사 속에서 영광을 찾아내고자 했으나 영광 대신 치욕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 영웅주의를 제창하고 싶었지만 그와 반대로 ‘5000년 역사의 앓는 소리’가 크게 들렀던 것입니다.
석굴암, 다보탑, 거북선 이야기도 삼천리에 박힌 상처 앞에서 너무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 절망을 통해서 , 세계사 무대에서 주역이 된 적이 없는 절망을 통해서, 또는 세계의 대종교 대사상이 일어난 곳이 되어보지 못한 초라한 땅의 절망을 통해서 ‘내가 왜 역사 교사가 되었던가’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자학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서라는 새로운 텍스트를 통해서 그는 책 안의 도처에서 빛나고 있는 ‘고난’ 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 면류관임을 그는 터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한국 역사로 육화시킨 것이고 거꾸로 한국 역사를 성서의 한 명제에 의존적으로 투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계 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임을 깨달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있었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 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마치니와 한 가지로 그녀의 할 일은 이것이다라고 용기를 낼 수 있다. 과연 그녀의 일은 이제부터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역사를 고난으로 보고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시작할 일이라고 확신하며 거기에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성서 해석의 시적 계기에 의해서 한국 역사의 의미를 얻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역사는 인문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아니라 역사 신앙에 해당하는지도 모릅니다. 우선 그의 역사 서술의 문체는 주관적 열의(熱意)가 주조를 이루는 에세이이기 십상입니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의 어떤 측면은 근대 이전의 역사적 이해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서적이라고 할 때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전범으로 한국 역사를 조명하고 고대 동양의 문화 틀로 역사를 보는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일연의 ‘삼국유사’적 문법에 가까워지기도 하겠습니다.
그가 전근대적 한자 문화권에서 익혀진 그의 태생적 인문의 한계를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청년 시절 기독교에 깊이 들어간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맹, 노장 그리고 장차 인도 불교에의 섭렵까지 펼쳐질 그의 광범위한 사상 편력을 점칠 만한 동양 정신의 발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현실이 암담할수록 고대의 여러 명저(名著)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책에만 “살고 죽는 길”이 들어있고 “인간다운 기본적 모습”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고대를 “초창 시기”로 봅니다. 초창 시기란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고,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 보려고 애쓰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원시 공산 사회에 대한 향수가 깊습니다.
그에 의하면 옛날은 가고 가고 해서 먼 시대가 된 때라는 말로써 인생 사회의 뿌리, 시작을 찾아가는 뜻입니다. 한자의 古는 十자와 口자를 합한 것인데 여러 사람이 일러오는 것이 예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해 이제라는 今자는 0자와 0자가 합한 것인데 0은 모았다는 뜻이고 0은 及의 옛 글자인데 그것은 지나간 날이 모이고 모여 오늘에 미친及 것이 바로 이제란 것입니다. 노자가 옛날부터 있는 길 -자리-를 붙잡아 가지고 이제 있음(有)을 꾸린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라고 말한 것으로 그는 역사 공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석헌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민족 지상주의가 아닙니다. 그가 역사를 이야기하는 식민지 민족 사회의 환경을 어떤 열린 논리의 개입도 거절한 채 오직 우리 민족만이 신성하고 위대하며 비록 일시적인 불행을 겪는 중이지만 본래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할 의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되는 자학 역시 지식인의 체념으로 널리 깔려 있었습니다.
함석헌에게도 이 같은 자학 사관으로 역사의 눈이 떠지며 그것이 성서 속의 고난과 만나 황홀한 섭리 사관의 희망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H, G. 웨일스의 세계사와 만납니다. 그 천재적인 서술의 광범위한 역사 조명은 세계국가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닿아 있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토인비 역사보다 훨씬 더 열렬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 웨일스 역사와 웨일스 미래 문학이 제시하는 유토피아였습니다.
함석헌 역시 웨일스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초국가적인 세계 시야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세계와도 합치되어 협소한 민족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민족과 세계의 지속적 의미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웨일스는 과학 문명이 주도하는 이상을 추구했으나 함석헌은 신앙을 통해서 고난으로부터 구원(救援)을 이끌어내는 역사를 지향하게 됩니다.
함석헌의 동시대는 20세기 대부분의 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가 여든다섯살로세상을 떠난 이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100년은 그대로 한국 근현대의 공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공간을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 - 분단 시대는 진행중이다- 라는 두 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역사 공간은 외적으로 격동의 연속이었으며 내적으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격동과 고난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역사였던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직후 예기치 않은 해방을 맞았으나 그 해방이란 맥아더 장군 일반 명령 제1호의 조선 점령군으로서의 미군 주둔과 함께 온갖 모순이 다 드러난 정치적 혼란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은 북의 공산주의 체제, 남의 자유주의 체제로 양단됨으로써 한국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약속된 것처럼 일어난 것입니다.
그 전쟁은 세계사적 분쟁인 동시에 민족 내부의 잔인한 상잔으로서 한반도 민족 사회를 철저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독재 정권과 4월 혁명 그리고 박정희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남한은 70년대의 유신 체제, 80년대 광주 항쟁과 신 군부 체제의 일그러진 역사 한복판에 함석헌의 고난 사관이 지속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심취한 일본 무교회주의 종교지도자 우치무라와 한국 서북 지방의 선각자나 이승훈과 영적(靈的)인 교사 유영모 그리고 김교신 등과의 의기 투합이 진행되면서 그의 사상이 꽃 피워집니다.
씨이란 민(民), People을 뜻하며 인간을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 세계를 지향하는 개개의 생명체를 뜻합니다. 씨은 그런 내용에 대한 의미 기호입니다. 씨는 씨앗이며 기본 내지 근본입니다. 은 o의 극대 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나타내고 은 극소, 혹은 내재적 하늘 곧 자아를 표시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라고 합니다. 이는 고대 인도의 브라만(梵)과 아트만(我)과도 같은 배치를 보여줍니다.
1958년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 8월호, 1958년)라는 유명한 글을 통해서 세상의 별로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 글을 전후 8년을 맞는 시기에 그 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설파함으로써 민족의 분단과 적대 관계를 청산하자는 뜨거운 염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글로 그는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고 그는 필화 사건으로 잠시 감옥에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 글에 대한 좀더 자세한 태도 표명이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는 글을 그 해 [사상계] 10월호에 발표하는데, 거기에도 ‘씨’은 나타나지 않다가 4월 혁명을 지나고 그 혁명의 의미를 유린한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사 정권 시대에 진입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그는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합니다.
생각, 의식, 사상의 민(民)은 이제 꿈틀거리며 움직이며 실천 행동의 민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글 끝에 ‘씨’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꿈틀거려라 씨아
행동하라, 지식인아
모든 신문인은 뭉쳐야 한다
모든 대학 교수는 결속해야 한다
모든 예술인은 하나가 돼야 한다
모든 대학생은 하나로 일어서야 한다
조직을 가져야 한다. 조직 아닌 조직을 가져라
나라 안에 나라를 가지자
민중 속에 들어가자, 민중과 하나가 되자 민중을 움직이자
그 뒤로 ‘삼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에서 박정희에게, 정치인에게, 지식인들에게, 군인들에게, 학생들에게, 민중에게..............질타하고 격려하고 총궐기를 외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60년대 전기간 그는 가장 사나운 광야의 소리를 내지르며 권력을 꾸짖고 백성의 잠을 깨우는 혁명의 최전선을 담당한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전방위적이었습니다. 실지로 그의 정신에는 시가 있고 교육이 있고 저널리즘이 있고 종교가 있고 학문과 사상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근현대사 지도적 인간상의 특징으로서의 전인성(全人性)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화가 아니라 모든 분야에 발을 디디고 일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서 전체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다양성의 통일 단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세계사의 발생론적 동력이기도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해악이 되고 만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부정을 지속했습니다. 특히 70년대 후반 이래 청년 학생층에 번져간 변혁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심기 불편은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함석헌 종교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환멸과 함께 병행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기술에 의한 인간과 자아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고뇌가 그의 사상 밑바닥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분단과 독재 및 군부 체제 극복의 일정한 역사 발전의 단계를 보지 못하고 20세기 후반에 생애를 마감한 것이 함석헌의 현대사적 한계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가 산 현대사와의 끊임없는 불화를 지속함으로써 도리어 화해를 달성하고 그의 말년에 보여준 비종교적이기까지 한 종교의 원숙한 경지를 보편적 인간성을 보여 주었으며, 그럼에도 그의 하얀 수염, 하얀머리,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의 날들은 어쩔수 없이 민족 안에 한 초인(超人)이고자 한 씨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한반도 서북단 압록강 하구의 섬에서 태어난 상민 계층입니다. 하지만 서북 지방에 들어온 민중, 민족의 기상을 이끌어낸 기독교와 만남으로써 유교 양반 사회에서 장기간 소외된 지역에서 당연히 놀라운 인간적 성숙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신구교 합동 성서가 나오기 전의 성서 문화란 사실상 서북 지방의 방언에 의존하고 그 지방에서 쓰는 관념어들이 동원된 사실을 보아도 한국 기독교의 발상지 서부 지방을 추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평양과 정주 일대의 변방 사회가 개인 사회로 바뀜으로서 기독교와 민족은 상호 모순 관계가 아니라 상호 작용의 가치로 재고된 것입니다. 3. 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평양 일대의 교회 지도자가 많았고 외국인 선교사가 독립 운동의 후원자가 된 사실도 모세의 출애굽기와 일제로부터의 민족 해방이 합치되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오산 또는 평양의 미션과 계몽 문화권에서 함석헌의 현대사적 존재가 시작되고 그의 역사 정신이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의 역사 서술은 신문학 이래의 언문 일치 서술에서 더 나아가 구어체(口語體) 서술에 속합니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줄줄 쏟아져 나오는 자동 기술적 구술의 서술체와도 비례합니다. 그래서 그의 강론은 늘 길고 길어서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현대 한국 문학사상에서도 특이한 함석헌의 구어체문학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사상은 철학 쪽이기보다 훨씬 시적입니다. 그는 체질상 시인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 근현대사 속의 아름다운 일화(逸話)라는 전설로서의 함석헌을 가진 문화적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고난의 음악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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