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역사적 종교신들을 넘어 있는 하나님(김경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6.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마당> 1994. 11.

 

역사적 종교신들을 넘어 있는 하나님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다까시 사부로님의 글을 읽고- 

                   김경재    

 

[1]  다까하시 사부로 선생님의 "고난의 한국민중사" 평론을 읽고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사상가요,무교회지도자이신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1980년에 집필하여 그분의 월간지 "십자가의 말씀"에 실린  종교적 논문 "고난의 한국민중사"를 조형균님의 한글번역본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처음으로 함석헌님의 종교사상에 관계된 일본 원로 사상가의 격조높은 논문을 읽을수 있게 된것을 깊이 감사한다.
이 글은 위 논문에서 다까하시 사부로 선생님이 제기하신 함석헌 선생님의 종교사상에 관련된  근본적 질문 곧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나타난 함석헌의 후기종교사상이(년대적으로는 1950년대 한국동란 이후) 얼마나 "그리스도교적"인가에 대한 물음, 특히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속죄신앙" 에 대해서 필자도 생각해 오던바 이기에 필자의 견해를 밝혀보고  다까하시 사부로 선생님과의 지면을 통한 대화를 통해 깨우침을 얻고자 한다. 문제를 던지시는 이나 대답을 해야 하는 이나 ,표면적으로는 다까하시 사부로라는 사람과  함석헌이라는  개인이지만,이면적으로는  진리 안에서 생명과 빛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公案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이글은 필자가 이해하고 해석한 함석헌의 종교관이지만,동시에 다까하시 사부로님과 함석헌님의 대화를 통해서 나 자신에게 물어오는 진리추구의 물음이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진리 이해와 해석학적 이해체험의 어쩔수 없는 과정이고 방식이고 한계이다. 함석헌사상의 엄밀한 객관적 실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함석헌 종교사상 곧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제기하신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의 본질적 성격"이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신앙"에 대한 함석헌님의 객관적 사상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생" 또는 "재구성" 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해석을 통한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이다. 함석헌이 직접 쓴 글의 자료들이 불충분해서도  아니고,한 사상가의 원래의 사상을 왜곡없이 밝혀보려는 진지한 노력이나 태도가 결핍해서도 아니다.

그건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이해의 과정에서  "해석학적 원리"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해란 언제나 이해하는 자의 삶의 지평및 이해의 前構造와의 어우림과 영혼간의 울림(공명) 속에서 이뤄지는 "해석된 이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글에서 필자가  피력하는 "함석헌의 종교사상" 또한 필자가 해석한 이해의 표현 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필자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위에 언급한 논문(평론)을 통해서 지금까지 한국인 그 누가 쓴 글보다도  뚜렷하게 함석헌의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추구하려고 하는 핵심적 본질을 ,역사철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꿰뚫어 짧은 글 속에 밝혀주신 것에 놀라고 감사 한다. 인간과 역사의 저 깊은 고뇌와 영광에 대한 감수성 높은 이해, 맑고 순수한  인간 양심의  분별력, 동료 인간과 이웃동족의 고난에 대해 몸으로 느끼는 체휼과 도덕적 책임감,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복음이 주는 자유와 사랑의 은혜체험을 하신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아니고서는 쓸수 없는 명문의 신학적 평론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과연 한국과 일본을 대표할 만한 종교사상가 사이의 영혼의 울림이 없고서야 그렇게 핵심을 갈파하는 글을 쓸수 없을 것이다. 영혼과 영혼의 울림이란 반드시 동의하거나 견해를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아니한다.서로 다름과 개별성과 다양성이 내포하는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면서도 서로 피차 존경하고 和할수 있음이 참다운 이해이기 때문이다.   두 분 영혼 사이의 울림과 서로의 존경은 어디에서 오는가.그 것은 두 분의 생명과 삶의 경험이 근거하고 있는 진리자체로부터 온다. 두 분 사이의 차이와 다름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그 두 분의 삶이 배태되고 자라난 한국과 일본이라는 역사적,문화적 경험지평의 차이에서 온다. 나는 아래에서 그것을 말해보려고 한다.

 

[2] 함석헌의 "하나님 종교"가 성서적 신관이나 십자가의 "좁은길"과 관련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제기하시는 첫번째 물음은 과연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가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인가의 물음이다. 다시말하면 특히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강의되고 "성서조선'지에 연재되던  1933-34년 시기와 적어도 초판본이 단행본으로서 인쇄되어 출판하던 때까지(1950),함석헌의 전기 사상기간 동안 문제의 저서가 기초하고 있던 근본적 신관인 성서적 하나님 이해,구원사 이해,대속적 신앙 이해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개정증보판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혹은 더 엄밀하게 말하면,저자(함석헌)자신의 사상 안에서도 그 둘의 관계 (저자의 하나님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복음)가 어느정도까지 명확하게 자각이 되고 있는지,고쳐묻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라고까지 표현하면서 함석헌 신관의 일관성 여부와 그리스도교 복음적 신관사이의 상관관계여부를 묻는다.  

우선 필자의 결론적 이해를 단도직입적으로 진술한다면, 함석헌의 전기사상(1950년이전)과 후기 사상은 질적으로 큰 비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그의 하나님이해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다. 도리혀 그의 전기사상 기간동안(그의 나이 50세) 그가 지니었던  기독교 종파심에 의해 채색되었던 하나님 이해를 더욱 확대심화하여 보다 복음적인 하나님 이해에로,성경이 증언하는 철저한 유일신 하나님 신앙에로, 철저화시키고 순수화시켰다고 본다. 여기에서 "복음적"이라는 말이나 "유일신 신앙"이라는 어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문제의 관건이다.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함석헌의 "하나님종교"가 과연 얼마만큼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 복음과 관련되느냐"를 물었지만, 그렇게 물으시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 복음"이라고 표현 하셨듯이   복음이란 자명한 과학적 법칙으로 고정되어 있는 객관적 진리 이거나, 교리적 또는 교의적 형식 속에 담겨져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어떤 개인 또는 신앙공동체가 이해하고 해석하여 받아드린 복음인 것이다.다까하시 사부로님의 질문을 앞두 무장의 문맥을 생략하고 중요한 부분을 이용해 본다:

" 그렇지만, 이 책이 이렇듯 중대한 발언을 하고 있는 만큼,저자가 제창하는 하나님 종교와,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어떻게 관련되느냐 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로서,그 해명을 다그쳐 온다.혹은 더 엄밀히 말하면,저자 자신의 사상 안에서 그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명확하게 자각이 되고 있는지,고쳐묻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 이 같은 관측이 틀림없는 것이라면 실은 여기에 한 커다란 모순이 숨어 있는 것이 된다. 씨가 '이제 기독교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교파주의 적인 것,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모든 사람을 포괄 할수잇는 '하나님 종교'의 입장으로 돌진해 갔을 때,그것은 실은 '넓은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 까? 단군 조선시대의 신화로부터 태양신 숭배,또한 조상숭배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 할수 있는 입장에 서서,하나님은  천지의 주인인 동시에 또 민족의 조상이었다'(105 쪽) 라는 그의 사상은 이념상에서는 확실히 '넓은 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나는 여기에 이 책이 내포하는 비극적인 모순을 보는 느낌이 든다.원래 저자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던 무렵,그는 분명히 한 사람의 그리스도 신도로서 그 신앙의 눈에 비치는 조선 역사를 강의 했던 것이다.그리고 또,절망의 늪에 빠지려 했을 때 '그러나 성경은 ...진리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나를 건진 것은 믿음 이었다.'(73쪽) 라고 술회하느 대목에도 당초의 신앙이 확실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후에 성경을 넘어서는 입장으로 몸을 옮기고,본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될 터인 신앙의 길을 ,만인에게 해방된 '넓은 길"로 바꾸고자 했을 때,그는 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던 것이 아닐까? "

위에 인용한 세 문단은 앞뒤 문맥을 단절하고 인용한 것이어서 독자들에게 그 질문의 충분한 사상적 깊이와 맛을 전달하기에 부족하지만,다까하시 사부로님이 함석헌의 종교관의 핵심 특히 그의  신관이 성서적이며 복음적인가를 묻는다는 점을 확인하는데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아래에서 나는 내가 이해한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가 결코 초기와 후기 사이에 변질된 것이 아니며,더욱이 진리의 "좁은길"을 "넓은 길"로 확장시켜버린 것이 아니라,도리혀 정반대로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의 구원패러다임 까지를 상대화 시키는 용기를 가질 때라야만 진정한 성서적 신앙의 본질에 접근할수 있다고 본점에서 더욱더 "좁은"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설명해보려고 한다.

 

첫째, 위 인용 문장과 다른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함석헌의 "하나님종교"라는 말이 맘에 걸린다. 함석헌은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우주적 종교를 ,기존종교들의 순수한 핵심을 종합하여 만들어 보려는 망상을 한적이 없다.그러한 망상을 흔히 서양 종교사상가들이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개별적 ,구체적 종교가 지닌 생명력을 거세하고 죽여버린 교리나 신관을 종교사상가들의 머리 속에서 모자이끄식으로 조립한  "인간종교"인 것이며 생명력이 없다.종교는 위로부터,또는 심령 안에서 인간에게 직감적으로 닥아오고 주어지고 계시해오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발생하는 것이지,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맘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둘째,  함석헌이 "하나님 종교"라는 단어를  말할 때라도     그는 결코 韓민족의 민족신을 말하지 않는다.그가 단군신화를 말하고,한사상을 말할 때라도,韓민족과 절대자 하나님이 신통적 혈연관계가 있다는  류의 신화론적 망상을 결코 한적이 없다. 한민족은 추천년간 민중의 마음 속에 "하나님"신앙을 가져왔지만 그 하나님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예를 들면 '태양"과 같은 것으로 상징화 한적도 없고 무형적 ,유형적 형상이나 개념을 만들어 본적이 없다.
  
셋째, 함석헌이 기독교의 종파적 하나님을 넘어서려고 한것은 ,기독교가 증언하는 '궁극적 실재 그자체"(Ultomate Reality in Itself)이신 하나님이 불완전하거나 상대적이어서가 아니라 역사적 이스라엘의 종교사와 기독교 종교사 속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사유되고  고백된 그 하나님이 "인간적으로 경험되고 사유된 긍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humanly experienced and thought)이므로 ,그 성서안에 증언된 하나님과 이스라엘민족사 및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체험되고 사유된 하나님만 절대적 진리의 오직 유일한 하나님 그 자체라고 고집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2,000년 교회사가 증명하듯이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신,문명신,경전신으로 유패당하고 ,기독교는 우상숭배의 자리로 떨어진다.제약할수 없는 무제약자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생명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제약하고 국한시키려하기 때문이다.
  
넷째, 만약 함석헌의 "하나님종교"라는 말을 수정하여 그이 본 의도를 들어내는 방향에서 사용한다면 오늘날 죤힉(John Hick),파니카(R.Pannikar), 폴 니터(Paul Knitter)등의 종교다원론(Religious Pluralism)이 말하려는 "하나님 중심주의"(Theocentrism)의 사고방향을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 "하나님으로하여금 참 하나님되게하라"는 것이고 ,성서 안에 흐르는 참다운 유일신 신앙의 철저한 관철의 정신이라고 한다면,"절대 영원자 하나님 그 자신"을 제외하고서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국가,민족,철학 이념,과학법칙등은 물론이며 기독교 경전인 성경,교리 신학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리챠드 니버가 바르게 갈파한 것처럼 유일신 신앙이란 one among Many" (만물 중의 최고 존재자)를 말하려는 신앙고백이 아니고 만물 안에 철저히 내재적으로 있으면서 만물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창조적 활동성을 부여하여 주면서도 만물을 넘어서는 하나님 곧 one beyond Many" (만유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믄이다.함석헌의 하나님 표현을 들어보자:

"성경 예순여섯 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라는 한 말에 요약 된다.곧 몯느 것이 ,천사나 인생이나 자연이나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나왔고,하나님으로 말미 암고,하나님 안에 뛰 놀고,마침네 하나님께로 돌아 간다는 것이 성경의 근본주장 이다.주장이라기 보다 증거요 밝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다.우주과정의 뒤에 있어서,그 흐름의 밑에 있어서,그 생명의 속에 있어서,자기 몸소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해서 자기를 제한하여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 이다" (한글판,뜻으로본 한국역사,43쪽)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영원의 미완성 곡이다.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그렇기 때문에 역사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위 책,57쪽)

위 인용구에서 볼 때,   두 말 할것도 없이 함석헌의 하나님이해는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스스로의 자기 즐거움과 영광의 들어나심으로서 창조의 과정,절대자의 자기 비우심과 자기 내어주심으로서의 피조물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엡4:6),피조물과 진정한 의미에서 동행하시고 피조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고난과 죄의 결과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씻어가는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다. 흔히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가 한국의 전통주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의해서 범신론적이라고 매도 되거나, 진보적 기도교인들에게 의해서 "내재적 초월신"으로 평가되지만, 그 어느 경우에나 함석헌의 하나님 이해를 바르고 충분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의 종교관이 전통적 기독교를 넘어서려고 한다는 말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전통적 기독교가 그리스도교적 구원패러다임의 유형적 특징으로서 이해하고 고백한 하나님 체험만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들면,하나님의 초월성 강조,인격성의 강조,계약사상과 선택사상의 강조, 종말론적 심판사상의 강조,나와 너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안에서 분화된 책임성강조,등등이다. 함석헌이 이해하고 체험한 하나님은 위에서 말하는 성서적 하나님 체험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그것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할 때,무제약적 영원자 하나님을 제약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초월과 내제,존재와 생성, 인격성과 원리성,관계성과 구조성,영원성과 시간성등 모든 이분법을 넘어서시고,그 양자를 통전하시며,그 양자를 가능케하시는 이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개정판 (1962) 서문에서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가 아니요,성경만이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파격적인 말을 했을 때,함석헌을 무교회주의자라고  비방하던 정통한국 기독교인은 물론이요,함석헌 주위의 친구나 제자들도 적지 아니하게 놀라고 염려하였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기독교를 떠나서 보편적 종교인이 된다는 말인가라고. 그러나 위 문장을 좀더 진지하게 본다면,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종교라는 독선을 부정하려는 것이지,기독교가 참진리의 종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아니다.성경만이 계시된 완전종교의 경전이고 다른 종교는 인간적 자연종교이거나 이성종교라는 전통적 성경관을 비판극복하려는 것이지 성경 안에 참된 인간 구원의 질리가 계시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기독교를 버리고,종교적 무국적자같은 보편종교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말 할수 있는 것은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퀘이커교인으로서 살았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그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은 구주라고 고백하면서 살으신 분이다. 다만 그의 기독교이해나,성경 이해가 전통적 교리신학체계나,전통적 성경해석관을 넘어서는 활짝열린 21세기를 지향한  개방성을 지녔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나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함석헌의 하나님이해를 해석함에 있어서,함석헌님이 "하나님종교"를 주창함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이질적인 신관을 가르친 결과가 되엇고,더욱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좁은길"을 "넓은 길"로 만들어버린 과오를 범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하고자 한다. 도리혀 정 반대이다. 함석헌의 기독교 이해를 한국이나 일본의 기도교인들이 쉽게 받아드릴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도리혀 그가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를 더욱 철처화시키겨서 "좁은 길"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 더욱 좁은 길이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교로서 개종하면서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기부정의 길 만이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라는 종교까지를 다시한번 십자가에 못박고 진리 앞으로 나서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다시 말하면 기도교 안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고 체험하엿기에 철저하게 구체적인 기도교인으로서 살면서도,역설적으로 역사적 종교로서의기도교를 상대화시키는 용기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무교회주의는 루터나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복음의 본질에 더욱 철저화하고 그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기독교가 루터나 칼빈의 해석과 체험을 참조하는 것은 가하되 거기에 메달리는 것을 또하나의 갇힘이며,복음의 제약이며,하나님의 제3 "바베론 포로"라고 보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바르트의 기독교,로마 바티칸의 기독교, 예루살렘의 기독교,영국과 북미주의 기독교가 아니라 갈릴리 원복음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갈릴리 원 복음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얼굴은 마치 불교의 선종처럼,모든 교의와 성전과 조직과 신학을 넘어서고 깨뜨리면서 오로지 삶 생명 그 자체,특히 민중들의 생명체를 몸으로 삼고 함께 그 안에서 고통하고 울고 환희 하시는 살아게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불입무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라는 선종의 정신은 단순히 불성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보편적 관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주장은 곧 진리를 그 무엇으로 갇우어 놓고,독점하고,유한한 것들을 성스러운 것이라고 신성화함으로서 인간을 거기에 예속화시키느  일체의 우상들에대한 우상타파정신이요,파사현정을 통한 자유정신의 발로요,저항정신의 발로이다. 함석헌의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가 그러하다. 함석헌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요,성경이나 종교개혁의 믿음만의 교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가 씨알이라고 파악한 민초듫의 생명 속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분명히 말 할수 있는 것은 역사를 완성하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신랑 임금"은 다까하시 사부로 님이 비판적 대안으로 제안하신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재림의 예언 이외에 그 답은 발견되지 않는게 아닐까?"라고 질문하심에 대하여,분명히 함석헌은 "글쎄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글쎄요"라는 어정쩡한 이 유명한 말투는 함석헌의  특징으로서 유명한데 그 것은 상대방의 주의 주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표현하려는 함석헌의 독특한 어법이다.다시 말하면,역사의 완성과 종말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초자연적 권능으로 완성된다는 전통적 기독교 재림론은 거부한다. 그것은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가 지니었던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한 신화론적 패러다임이다. 그것을 그대로 성서가 말하는바이니까 진리라고 주장한다면,함석헌이 우려하는 바 과학과 신앙이 충돌되면서,함석헌은 그런 형태의 예수재림과 종말은  오지 않는다고 말 할  것이다. 다른 한편  "글쎄요" 안에는 긍정의 뜻이 함축 되어 있는 데,예수 재림론이 말하는 참된 의미는 역사적 진보주의의 값싼 낙관론이나, 악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역사 비관론이나, 점진적 사회개량에 의해 천국을 지상에 실현한다는 사회복지주의적 유토피안니즘을 거부하는것이다.그러면 무엇을 말하자는 것인가. 종말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씨알들의 생명 속에,씨알들의 생명을 통해서 이뤄지면서 동시에 그순간엔 홀연히 거울 속에서 보는 것 같았던 진리의 참 실재가 투명하게 현시되고 현존하는 위로부토 오시느 재림의 예수로서 체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종말론은 떼이야르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를 닮았다.역사와 우주 생명의 과정은 타원형의 영원한 창조적 원추모습을 하면서 앞과 위를 향해 나아가는 영원한 창조적 진화이기 때문에, 민중들과 함께 더물어서 과정 안에 현존하는 동행자 그리스도와 종말의 시점에 위에서 재림하는 그리스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3] 함석헌의 종교관 속에 성서적 속죄신앙이 남아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함석헌의 종교관,또는 하나님 이해는 인간의 구원이해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다까하시 사부로님의 글의 말미에서,선생은 이렇게 걱정하면서 비판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 그리고 또 이 의문의 배후에 숨어있는 다음과 같은 의문도 아울러 말하는 것을 용서받고 싶다.그것은 그에게 잇어서 '죄'란 무엇이냐고 하는 물음이다.이 책에서 그가 거듭하여 '민족의 자기 상실'을 타이르고 있는 것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지만,이것은 단순히 한낱 정신적 결함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 죄요,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317쪽)라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악에 대해서는 수 없이 서술을 전개하고 있으나,내가 알아차린 한에 있어서는 '죄'의 본질에 관한 규정은 여기서 밖에 찾아 볼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그리고 그것이 그의 죄인식이라고 한다면,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속량이라는 신앙사상이 존립할 여지는 더 이상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 그렇다고 한다면,그가 '그리스도교'를 입에 올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속죄신앙은 존재하지 않으며,따라서 또 신도는 그리스도에 합쳐짐으로써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주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신생의 은헤에 목욕한다는 내용도 결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위의 인용구에서 다까하시 사부로 님이 제기하신 물음은 물론 중요하며, 한국에서도 특히 함선생의 가장 가까은 믿음의 형제요 신앙의 동지이신 장기려 박사가 진지하게 물으셨던 문제이다.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긴 말을 이 글에서 할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앞에서 말한 우리 토론의 연장 선상에서 내가 이해한 함석헌의 속죄신앙을 한두마디 이야기하는데 그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참조하신 함옹의 저작집중에서 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기엔 너무나 자료가 한정되었다는 것을 지적허고자 한다.물론 함석헌은 '죄론'에 대하 체계적인 논문을 쓰시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체게적인 죄론을 설파하신 자료는 없지만 "죄를 한낮 정신적 결함"으로서 가볍게 보고 있거나 "주체적 자아의 상실" 정더로서 가볍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 하고자 한다.      필자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을 비롯한 무교회 형제들이 경험한 죄의 심각성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한 신생의 환희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다까하시 사부로님이 각주에서 부연 설명하는 죄의 속량체험 곧,하나님과의 의지적 적대행위로서의 죄의 반란성,무자각성,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죄의 실체를 보는 눈뜨임,하나님과의 화해와 하나님에 의한 은총 안에서의 용납됨, 신생의 감사와 환희와 사랑의 선행 열매등등 기독교 구원체험의 그 귀중한 체험들을, 필자가 믿기엔, 함석헌 자신도 그의  신앙여정에서 체험했고 귀중하게 간직한 분이라고 믿는다. 함옹은 말년 80세 가까운 시절에도 성경공부를 인도하시곤 했는데,그 때마다 성서연구에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찬송가를  많이 불렀고,마지막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신후 병상에 계실 때도 기력과 기억력이 있으실 때,조용하게 찬송가를 부르고 듣기를 좋아하셨는데, 그 찬송가 가사중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속죄신앙의 가사찬송도 즐겨부르셨다.

함석헌 선생이 저항한것은 그리스도교 속죄신앙이 , 교리적 도그마의 진리로 변질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주체적인 거듭남의 체험과 信行이 동반되지 않은체  부적처럼 남용,오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촛점이 있었다.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신생체험이 기독교 안에만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도교인들의 독선적 주장에도 비판적이셨다.함옹에 잇어서 "생명의 제1원리는 스스로 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신앙 강조가 인간의 주체적 책임성을 약화시켜서 타율적 구원종교로 전락되는 것을 비판햇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도교인이거나 불교인 이거나  깊은 자리에  들어간 종교인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이뤄지느냐,하나님이나 부처님의 은혜나 법력에의해 이뤄지느냐는 식의 이분법적 도식은 이미 의미를 잃게 된다. 진정한 은혜체험은 철저한 타율적 은총에 의한 구원이면서,동시에 철저한 자율적 각성과 정진이 동반되는 자력구원이다. 자력과 타력은 역설적으로 하나로 통전되는 자리이다.

함석헌은  에수그리스도에 의한 타력적 속죄신앙을 더욱 남달리 자주 강렬하게  강조하는 한국 기독교가 ,그 신생된 사람들로서의 信行의 열매에 있어서는 무력하거나 도리혀 윤리적 단게에도 못미치는 "열매없는 교리적 종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 의 종교사상 속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속죄신앙"이 없거나,속죄신앙을  부정한다고 속단하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의 견해에 필지는 동의 할수 없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에 의한 속죄적 구원체험이 반드시 그리스도교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필수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전통교회의 속죄론적 구원론이라면 함옹은 거절 할 것이다. 함옹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적, 구체적  표출이요,가장 투명하고도 분명하게 인간과 세상의 죄의 본질이 폭로되고 극복되는 우주사적인  촛점임을 인정하지만,그 사건을 통해서만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중생체험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요 독선이며,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의 활동을 인간이 제약하려는 불신앙적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다까하시 사부로님의 훌륭하신 논문울 읽고, 그 글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내가 이해한 나름데로 부족한 견해를 피력해 보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함석헌의 전집 20여권에 담겨져 있는 넓고도 깊은  그 분 사상의 지극히 작은 일 단면임을 밝혀두면서 ,이런 것을 계기로 한일 그리스도인간의 진지한 진리체험의 교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