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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未完成'을 읽고(김경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6.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http://soombat.org/


                         함석헌의 '未完成'을 읽고

김경재 (한신대, 신학)

 

 

1. 들어가는 말

 

격동했던 20세기 한국역사의 태양이  역사의 지평선  저물어가려는 이 때,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속에 '광야의 예언자'처럼 나타나서 활동하다가 간 한 사람, 함석헌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시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고 그의 작품을 문학평론지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그 분 자신의 말대로 '詩 아닌 詩'를 무려 300편 이상이나 남기고 간 분이다. 함석헌의 시를 읽노라면, 유명한 원로시인들의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시인들이 결코  흉내낼수 없는 영향 곧 우리 영혼의 깊은 지성소에 파문과 전율을 때론 일으키곤한다. 언젠가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함석헌의 시의 세계를 주목하여 다루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의 종교시집 <수평선 넘어> 재판(再版)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은유인즉, 서울 남대문 시장과 백화점에 진열된 흠집난 곳도 없고 벌레가 먹지도 않는 윤기나는 잘생긴 과일들과, 한 노인이  시골장터에서  좌판 위에 올려놓고 팔고있는  벌레먹었거나 쪼그라진 볼품없는 과일을 서로 비교한다. 남대문 시장과 백화점의 과일들은 중산층 이상의 부자들과 문화인들이 사먹겠지만, 시골장터 쪼그라진 볼품없는 과일은 가난한 사람이 병든 가족식구  죽기전에 과일을 먹게하려고 돈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사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은유적으로 비유한다. 전자의 과일은 부자 사람들에겐 맛으로, 후식으로, 비타민 섭취정도로 생각하면서 먹지만, 가난한 그 할머니의 간절한 맘으로 사들고 간 그 쪼그라진 과일은 손자의 중병을 낫게하는 영약이 될수도 있을 거라는 은유를 든다. 다시말하자면, 함석헌은 자신의 시는  시골장터 좌판에 벌려놓은 벌레먹고 쪼그라진 품위없는 상품이겠지만, 그런 상품이나마 사러오는 그 할머니를 기다려 보련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 말 속에는 자기의 시가 유한 문화인들의 후식이나 심심풀이로서 먹히우는  것은 곧죽어도 사양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기의 시는 상품가치로서는 축에도 못끼는 병들고 쪼그라진 맛물 과일일런지 모르지만, 그런과일도 사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과일이라도 사가지고 가서 병든 손주의 마지막 갈증타는 목을 추겨줄수 있다면 기꺼이 부끄럼 없이 세상에 내놓겠다는 변이다. 함석헌의 시는 곧 그의 영혼의 울부짖음이고, 전인격적 신앙고백이며, 진리와의 처절한 싸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형시로서의 시 음율이나 격식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람들의 영혼이 후다닥 정신이 들어, 누어있다가도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켜 바른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번에 감상하려고 하는 '미완성'은 요즘 짧은 현대시들에 비하면 좀 길다고 느껴지겠지만, 더 긴 다른 함석헌의  산문시  길이에 비하면 길지않는 시이다. 먼저 '미완성'이라는 시제(詩題)가 붙은 전문을 읽어보자.

 

                          미 완 성

       높은 봉우리에 내타는 憧憬의 얼굴빛 있고
       날 뛰는 바다에 풀지 못한 분노의 울부름 있고
       오고가는 바람에 잊지못하는 탄식의 속삭임 있고
       흐르는 구름에 끝없는 追窮의 헐떡임 있고
       벌럭거리는 심장엔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理想의 불탐있고.

       모든 무덤 무엇이라 말하던가 ?
       모든 기념탑 무엇이라 일러주던가 ?
       모든 철인의 엄숙한 사색은 무엇이라 가르치던가 ?
       모든 시인의 이상 환상은  그 무엇을 노래하던가 ?
       자연과 맘의 섞어짜는 역사의 음악은 그래 무엇이라 아뢰던가 ?

       영원의 이상,
       영원의 찾음,
       영원의 씨름,
       영원의 벌어짐,
       아아, 宇宙야 人生아 생명아 너는 영원한 미완성이더냐 ?  

       완성은 반갑다고 누가 그러나 ?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나 ?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 그러나 ?
       자연은 언제나 완성할 줄 모르는 靈感의 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意志.
  
       영원의 미완성,
       영원히 자라는 혼의 타는 그 가슴엔
       지극히 적은 부분의 불꽃바다 제대로 무한한 즐거움,
       끝없이 닫는 영의 헐떡이는 염통엔
       찰나 찰나의 고동의 울림마다 그대로 영원한 이김.

       영원의 미완성품 만세 !
       영원히 높아가고 확대해가는 정신 만세 !
       영원히 영광을 더해가며 벌어져 나가는 생명의 불바다 만세 !
       아키레스 거북을 쫒아 잡지 못하듯이
       그칠 줄 모르고 닫는 인생아 네 걸음걸음에 무한 기쁨 있을 지어다.

 

[2] 시의 내용분석

 

위 시는 함석헌의 실재관, 역사관,및  그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철학적 종교시이다. 시는 여섯문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문단은 5행씩으로 짜여저있어 무질서한듯 하면서도 일정한 규칙적 변화리듬을 느끼게 한다.
     
     첫째 문단에서는 자연의 삼라만물의 변화운동현상을 사례로 들면서 의인화형태로 시의 주제의식을 독자가 가까이  접하도록 인도한다. 높은 봉우리, 날뛰는 바다, 오가는 바람, 흐르는 구름, 벌럭거리는 심장등 다섯가지 운동변화현상이 무심한 운동이거나 기계적 변화가 아니라, 그 속에  뜻을 지닌 것으로 시인은 의인화하여 말한다. 애타는 동경, 풀지못한 분노, 탄식의 속삭임, 끝없는 추궁의 헐떡임, 영원한 이상의 불탐은 각각, 산, 바다, 바람, 구름 심장의 운동변화변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속삭임과 울부짖음으로서  감수성 깊은 시인의 귀는 듣는다.
     
    둘째 문단에서는 이제 자연의 삼라만물에서가 아니라, 역사문화 현상속에서  '미완성'이라는 화두를  감지하도록 독자들을 유도하는데, 문장형식은 의문형 문장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무덤, 기념탑, 철인의 사색,시인의 이상과 환상, 그리고 역사등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가르치고 노래하고 증언하는 바가 무엇이였느냐고 시인은 묻는다.
    
    셋째 문단에서 시인은 아주 짧은 문장 아닌 단구로서 궁극적인 화두, 시인이 추구하려는 근본주제, 곧 삶의 비밀과 역사와 자연의 숨은 뜻이 무엇임을 단도직입적으로 폭로한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영원의 이상, 영원의 찾음, 영원의 씨름, 영원의 벌어짐, 영원한 미완성의 운동 바로 그것이라고 직관적이고도 직설적인 어법으로 토해낸다.
    
    넷째문단은 반어법을 3행까지 사용하고 나머지 넷째행과 다섯째 행에서 다시 두마디 불완전한 문장형식을 빌어서 자신의 삶의 철학, 세계관, 역사철학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앞부분 반어법형식을 빌려서, 정태적 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생관, 역동성을 상실한 탐미주의를 비판한다. 완성은 반갑다고, 끝맺음은 아름답다고, 얻어들음은 즐겁다고 누가그러더냐고 힐문하면서 '생성'(Becoming)보다는 '존재'(Being)를 더 좋하하거나 우선적으로 보는 모든 정태적 세계관을 비판한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넷째행과 다섯째 행에서  이 종교시의 중심사상이 다음과 같은 두마디 불완전한 문장형식을 써서 역설적으로 강조효과를 자아내면서 시문의 형태로 형상화 된다.              
               "자연은 언제나 완성 할줄 모르는 靈感의 巨匠,          
                역사는 영원히 끝날 줄 모르는 절대의 意志."

자연과 역사는 실재를 나타내는 기본적인 두가지 범주이다. 동양문화는 자연이라는 범주를 역사라는 범주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중심적인 범주라고 보았다. 그에 비하여 서양문화는 자연범주를 역사범주에 종속시키고 역사범주를 더 근본적인 가치세계라고 보았다. 자연범주를 중심범주로 삼는 동양문화와 예술과 종교는 공간개념이 중요했고, 역사범주를 중요시하는 서양문명은 시간개념이 중심축을 이룬다. 그런데, 동양문화의 핏줄에서부터  그 살과 피를 받았고, 기독교를 통하여 서양문화의 진수를 섭취한 함석헌은 자연도 역사도 미완성의 표현으로 통전시키면서, 자연을 '영감의 거장'으로 역사를 '절대의 의지'로서 파악한다.
   
    다섯째 문단은 실재를 영원한 미완성적 과정, 창조적 과정, 생성하는 운동이라고 파악하는 근본주제를 독자가 행여나 불완전한 부분 또는 미완성의 찰나성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상대주의로 곡해하거나 허무주의로  오해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시인은 방어한다. 비록 부분적인것 같고, 찰나적인것 같고, 시간적인것 같고, 상대적인것 같이 보이지만, 그 안에 전체와 영원과 절대가 있다고 노래한다. 부분속에서 전체를,  시간 속에서 영원을, 상대 속에서 절대를 보고 느끼게 함으로서 오늘의 현실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삶에 대한 존재에로의 용기를 북돋운다.
   
     여섯째 문단에서 시인은 이제 미완성적인 삶의 운동과 높아가고 확대해가는 정신의 신비로운 창조적 운동과정을 노래하면서 만세를 부른다. 중생들의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현실적 생명리얼리티, 그 생명의 불바다 속에서 시인은  도리어 영광을 더해가며 확장 심화해가는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신의 영광의 광휘를 언뜻 보기까지 한다. 마침내, 시인이 살던  동시대사람들이 겪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삶의  길을 달려나가는 인생에게  낙담, 비관주의를 거두고 기쁨을 갖자고 추복하면서 시를 마감한다.      
       

[3] '미완성'의 철학적 이해

 

위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미완성'이라는 시제가 붙은 이 시는 함석헌이라는 종교사상가의 깊은 내면이 표출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철학적 내용 또는 신학적 내용이 담겨져있는 종교시이다. 종교시 일지라도 인간의 정신적 내면성을 도닥거리는 개인의 경건성을 노래하는 종교시가 아니라, 시의 세계가 우주전체를 포괄하고 시공간적으로 자연계와 역사계 전체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 매우 남성적인 거친 시이다. 여기서 내가 남성적이라고 말함은 여성적인 것을 가치론적으로 폄하하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함석헌의 시가 지닌 거칠음과 억센 기품을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함석헌의 종교시는 분장이나 고운얼굴을 더 아름답게 하려는 화장술이 없다. 거친 바람과 햇빛에 노출된 채로 노동을 해야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같아서 까칠해진 어부나 농부의 얼굴살갗을 연상시킨다.


함석헌의  '미완성' 속에 나타난 종교철학적 사상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 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첫째, 시인은 세계 또는 생명현실이란 '생성'(生成) 이라는 시각에서 파악하고 '존재'(存在)라는 시각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시인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지 존재의 철학이 아니다. 일찍이 헬라 고전 철학자중에서 '존재'를 주목한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을 주목한 헤라클레토스가 있었다. 실재를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말은 세계와 삼라만물을 합리적인 로고스의 법칙적 운동으로서 파악한다는 말이며, '생성'으로서 파악한다는 말은 실재를 창조적과정과 비합리적 역동성으로서 파악한다는 말이다. 전자에서는 질서, 표준, 안정, 법칙성, 원리,의무가 강조되지만, 후자에서는 정열,창의성,고유성, 모험,변혁,자유가 강조된다.
  
  둘째, 시인은 삼라만물의 변화과정을 운동과 생성으로서 파악하지만,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다르고,  절대 예지적인 신의 섭리를 말하는 어거스틴의 목적사관이나 세계정신의  자기실현을 말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과도 다르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한마디로 말해서 무한한 창조적 과정이 완결되거나 중지되는 종국점을 설정하지않고 생명은 영원히 창조적 운동을 하면서 더욱 인격화, 정신화, 영성화해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다. '창조적 과정'은 어떤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적 단계가 아니라 그 과정 한단계 한순간들이 모두 목적 자체가 된다. 예를 들면 초등교육과정의 소년소녀들은 중등교욱과정을 밟기 위한 예비교욱단계가 아니며, 중고등교육과정은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단계 교육이 아니며, 어린이는 어른되기 위한 예행연습의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셋째, 시인은 '영원한 현재'를 강조하며, 삶을 '뜻의 실현과정'으로서 파악하며, 자연과 역사라는 두가지 범주를 통전시킴으로서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여는 실재관을 제시한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과학문명은 자연을 대하되 '영감의 거장'이라는 예술적 눈으로 보지 않고 죽어있는 '물질의 덩어리'로 봄으로서 오늘날 생태계 파괴라는 위기를 초래하였다.  세계현실을  '영원의 이상, 찾음,씨름,벌어짐'이라는 창조적 과정으로 보지못하고 현대인들은 능률성과 실용성과 경제성만을 좆아가는 도구적 이성, 소유적 존재, 감각적 존재가 되어 마르쿠제가 말하는데로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전통종교들은 삶의 현재가 지니는 중요성과 영원성을 모른채  타계주의 신앙, 관념주의 종교, 미래종말적 신화종교에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함으로서 '지금 여기'의 삶이 지니는 중요성을 책임도피하게 한다. 함석헌의 '미완성'의 시는 이러한 잘못된 세계관을 질책하고 고발하면서, 고난을 담지하고 오늘도 삶의 모순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씨알들의 삶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말고, 진실하게 이길을 뚜벅 뚜벅 함께 걸어가자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완성'이라는 이 시는 창조세계와 생명과정을 '미완성'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미완성은 불완전하다거나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거나 임시적이고 예비적인 의미로서의 미완성이 아니다. 시인이 말하는 '미완성'은 도리어 미래를 지향하는 이상과 비젼을 지니면서도 항상 '지금 여기'의 삶 속에 현재하는 영원의 의미와 절대를 감지하고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현실의 불의나 부정에 절망하지말고 더 높게 깊고 넓게 이상을 현재화하면서 달려나아가는 삶의 역동적 자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교사로서 농부로서 노동자로서 예술가로서 정치가로서의 작고 부분적인 내 삶의 광장에서 포기나 패배는 곧바로 영원자의 포기와 실패가 된다는 것. 지극이 작은 내 생명의 불꽃이 전체 영원한 생명과 잇대어 있음을 일깨워주는 종교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