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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김경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6.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2003-01-11  교수신문 <www.kyosu.net>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삶과 신앙 안에서 피워올린 깊은 민중사관 


김경재


함석헌의 사상은 근대 출범 이후 가장 한국적이고 주체적인 이성의 자기 전개로 손꼽힌다. 특히 그가 '뜻으로 본 조선역사'에서 보여준 독특한 역사철학은 침략과 약탈의 현대사를 겪은 이 땅의 개개인들이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현실성 있는 역사의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 메시아적 이론으로 기능해왔다. 기독교에서 출발해 기독교를 넘어서고, 유물론적 철학을 수긍하면서도 무신론의 오만을 경계하며, 진화론적 이성을 통해 초월의 논리로 도피하는 현실 종교인들을 규탄한 함석헌의 역사철학은 하나님(초월적 힘)과 연결된 존재로서의 민중(씨알)이 고난의 역사를 수긍하고 극복하도록 설득하는 가장 확실한 관념적 언어이면서도 또 동시에 현실적으로 와닿는 충고였다. 비록 역사학의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지정학의 표준말을 개의치 않는 역사학이지만, 그 사관이 지니는 세심한 종합주의와 유연함, 그에 바탕한 당대적 파급력은 아직까지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편집자주]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이 낳은 탁월한 자생적 종교 사상가, 우리 글과 우리 말을 다듬어 쓴 독창적 문필가, 인권 평화 시민운동가, 그리고 탁월한 종교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헌을 학문적으로 말할 때는 그 무엇보다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남긴 역사철학자로서 주목해야 한다. 모든 사상은 사상이 잉태돼 자라면서 영글어 가는 ‘삶의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의 삶의 자리는 정치·사회적 삶의 자리와 문화-종교적 삶의 자리로 대별할 수 있겠다.
함석헌의 정치-사회적 삶의 자리는 일본의 식민지 침탈과 지배통치, 세계 열강들의 국가주의 폭력자행, 그리고 냉전체제의 생명 옥죄임, 그 삼중적 고난이 중첩되던 한민족 수난의 시대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의 역사철학은 잉태되고 저항을 통해 성숙해가고 돌파를 통해 영글어 갔다. 그는 19세 때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3·1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오산학교 역사교사 시절 ‘성서조선’지 필화사건으로 첫 옥고를 경험한 후, 해방정국에서 북한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남한 미군정과 자유당 시절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엔 양심과 진실의 비폭력저항으로 인해 또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삶의 자리는 민족의 고난, 국가주의 및 정치이념의 폭력성, 제도적 종교와 제도교육의 경직성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삶의 정황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해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를 형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살았다.

역사는 의미와 의지로 이뤄지는 것
함석헌의 문화-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오산학교 학창시절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 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 웰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 물론 1920년대 후반 일본유학시절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의 인간과 역사이해가 너무나 일찍 조숙해 사회주의 좌파철학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1950년대 이후는, 점점 더 예수회 신부 고생물학자 테야르 드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사상’과 노장철학 및 퀘이커 신앙이 공명하는 비폭력 저항적 평화사상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의 독창적인 사상을 더욱 확대 심화했다.
함석헌의 역사철학은 한국 인문학계에서 최초로 한국사 전체를 어떤 ‘사관’을 갖고 꿰뚫어 보면서 해석하려는 역사 해석학적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가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전공분야로 공부한 영역이 특히 역사분야였기에, 졸업 후 1929년 무렵 모교 오산학교에 역사선생으로 부임했다. 젊은 교사 함석헌은 사실에 정직하려는 과학정신, 민족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민족정신, 그리고 현실을 창조적으로 돌파하려는 기독교 신앙정신 그 세가지를 불씨처럼 맘속에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당시 역사학계는 일본 식민사관, 그에 맞서는 민족주의 사관,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경도했던 유물사관이 있었으나, 함석헌은 그 어느 것에도 추종하지 않고, 참고할 만한 장서가 전혀 없는 시골 민족 사립학교에서 고독한 사색의 깊은 우물을 파고 들어가 독창적인 ‘뜻으로 본 한국사’를 집필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한국인이 쓴 책 속에서 그이 만큼, 역사서술 문제는 인간 정신적 삶의 ‘해석학적 과정’임을 깊이 인식한 사람이 없을 만큼 선구자였다. 함석헌은 말한다: “뜻이라는 말을 나는 두가지 뜻으로 씁니다. 하나는 의미(meaning)라는 뜻에서고 또 하나는 의지(will)라는 뜻에서입니다. 전자는 體요 후자는 用입니다. 역사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요 의지로서 이뤄집니다”.
함석헌의 역사철학은 고난을 통해 인간과 문명의 정신적 성숙도가 더욱 영글어져 간다는 창조적 과정철학 사상 계열에 서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역사철학은 여유 있는 학자의 서재에서 관념적 사색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민초들 속에서 형성됐다. 고난을 미화시키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용기를 조선 청년들에게 주려는 내적 동기가 단초였던 것이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 “고난은 삶의 원리이다”라는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개인의 삶과 역사는 고난 없이 진보 발전과 성숙 승화될 수 없다고 봤다.

민중사관 세우고 계급·영웅·민족사관 타파
그의 역사철학은 초창기엔 전통적 기독교의 시대 경륜적 섭리사관 색깔을 많이 나타냈으나, 후기엔 도리어 탈기독교화하면서 테야르 드 샤르댕이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실재관’에 가까워졌다. 그는 말했다: “변하는 역사는 한 개 자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자람이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전집, 제1권, 57쪽).
함석헌의 역사철학에서 진정한 새로움은 1930년대에 이미, 역사의 진정한 주체와 담지자는 民, 곧 씨알들이라고 민중사관을 세우고, 일체의 계급사관, 영웅사관, 닫혀진 민족사관을 극복했다는 데 있다. 그의 역사철학이 일제강점기에 형성됐기 때문에 함석헌의 역사 담론이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니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의 주체가 특히 한국사에 있어서 사회계급이라기보다 민족이란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밀착돼 변질된 그런 닫혀진 민족주의를 거절한다. 생명의 역사는 자라는 역사요 끊임없이 껍질을 벗기는 역사인데, 현대 인류문명사가 당면한 가장 단단한 껍질은 국가주의요 폭력주의라고 강조한다. 그가 끝까지 주민등록증 발부에 저항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민족을 숲이라 한다면, 씨알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다. 전체성과 개체성이 상호공속적 관계에 있듯이 민족운명과 개인 씨알의 운명은 상호 공속관계이지만, 역사의미를 전체성에서 의식하고 책임지는 생명체의 알짬은 씨알이라고 본다. 함석헌은 말한다: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 정말 있는 것은 알 뿐이다. 그것이 알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民이란 곧 그러한 모든 우연적인 일시적 제한과 꾸밈을 벗고 바랄 대로 있는 인격이다”(‘생활철학’, 97쪽). 역사의 주체인 씨알 곧 민은 보통 때는 물처럼 순응하지만, 역사의 위기 때는 폭포처럼 태풍처럼 일어나 변질된 역사를 바로잡고, 역사의 불의에 저항한다. “스스로 함이란 생명의 제1원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 다음 동양사상과 서구 기독교 사상이 그의 삶과 신앙 안에서 통전된 ‘나선형의 진보사관’을 나타냄으로서, 동서사상의 지평융합의 한 범례를 함석헌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형성한다. 힌두교, 불교, 유교,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역사관은 ‘원형 반복적 원형’으로서 상징된다면, 기독교는 흔히 목적지향적 ‘직선형’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이 둘이 만나면 반복, 자람, 창조적 새로움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통전되는 원추형 기하학 도형을 닮은 ‘나선형 모델’로 상징된다.
함석헌이 “한국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며, 한국역사의 기조는 고난”이라고 단정하면서도 그의 고난사관이 비관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도리어 새로운 역사창조와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확신이 거기에서 나온다. 함석헌은 한민족의 민족분단선, 남북의 갈등, 그리고 오늘의 한민족 고난의 현실은 단순한 한민족 7천5백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 인류문명의 새로운 창조적 계기, 반전, 돌파의 기회로 삼으라는 하늘의 뜻으로 해석할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그의 평화주의는 순응적 평화주의가 아니라 무섭게 저항하고 올곧게 꿈틀대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예언자적 열정을 지닌다. 그의 역사철학적 거대담론이 헤겔적 관념론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부정성’을 ‘이성의 간지’로 가볍게 보지 않고 생명이 감내해야 할 진주를 만드는 ‘조개의 아픔’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이단자 취급, 본격 연구 진행 안돼
사학계나 철학계 및 정통 기독교 신학계에서 볼 때 함석헌은 기껏해야 재야 사학자 또는 종교적 이단자 취급을 받아온 터여서, 그의 사상이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과제로 인식되지 못한 채 너무 오랫동안 방치돼 온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함석헌의 역사철학과 씨알사상은 한국의 민중신학자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 문익환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사학자 노명식, 이만열, 서굉일 교수를 비롯해 유동식, 지명관, 김동길, 조형균, 김용준, 이문영, 한승헌, 김영호, 김조년, 박재순, 한명숙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젊은 소장학자 김성수는 함석헌 연구로 영국에서 학위를 받았고 ‘함석헌 평전’을 비롯해 그의 작품을 영어로 펴내는 일에 공헌하고 있다. 민권운동가로서 함석헌은 계훈제, 송건호, 장준하, 서영훈, 김찬국, 김지하, 박성준, 윤영규, 박노해 등에게 영향을 줬다. 그리고 현재 시민운동, 노동운동, 생명운동, 평화운동을 펴고있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모두 함석헌의 사상적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체로서는 재단법인 ‘함석헌 기념 사업회’(이사장 이문영)가 있으며, 도서출판 한길사는 함석헌 전집을 발간해 그의 사상을 펴는 데 큰 문화사상적 공헌을 한 셈이다. 현재 기념사업회 기구 안에 ‘씨알사상연구회’(회장 박재순)가 매월 정기적으로 연구모임을 지속하고 있으며, 격월간지 ‘씨알의 소리’가 꾸준하게 발간되고 있다. 함석헌의 연구는 이제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분명 한국 현대사가 낳은 매우 주체적이고도 독창적인 사상가임에 틀림없으며,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그의 사상은 21세기에도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될 것이다.
‘함석헌전집’ 총20권의 핵심 화두는 ‘생명’이고, 생명의 구체적인 역동적 실재가 ‘역사’며, 그 나선형의 운동을 이끌고 가는 하느님의 고난의 동반자가 ‘씨알’ 곧 民이기 때문에, 새로운 ‘민의 정치시대’가 열리는 한국현대사 전환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