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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역사철학과 고난의 자기의식(김상봉)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6.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민족의 큰사상가 함석헌선생> 한길사, 2001.4 - pp.53-82

 

 

           함석헌의 역사철학과 고난의 자기의식

- 김상봉 -


함석헌을 철학적으로 읽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것은 함석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철학을 철학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요구되는 일이다. 남의 말글을 빌려 철학해야만 했던 우리의 지난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지난 100년 우리의 지성사만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민족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철학은 아직도 자기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학은 자기반성이 아니라 타자적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체계로 이해된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 보편적 진리에 이르기 위한 지름길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이 자기를 망각한 채 보편을 욕구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의 허영에 다름 아니다.


반성과 진리


너 자신을 알---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철학의 첫번째 경구이다. 철학이 분명 존재 일반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지향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 대한 인식이 존재사유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존재가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자를 눈으로 보지만 존재자의 존재까지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있는 것들의 있음 그 자체는 있는 것들의 한 부분으로서 자기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그 자체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오직 정신의 눈을 통해서만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가 문제라면 우리는 분주한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한에서 참된 존재사유는 언제나 자기인식이요 자기반성인 것이다.


반성은 모든 지식 행동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그 시작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을 뒤집어 놓으면 자기를 아는 것이 지식․지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아의 속의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1)


“모든 지식 행동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그 시작”이 되는 것, 요컨대 모든 인식과 행위의 시원(archē)과 목표(telos)가 되는 것, 그것이 철학이 찾는 존재의 진리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 즉 절대자 속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밖에서 찾는다. 그러나 내가 나의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자요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존재자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미로서, 즉 함석헌의 표현에 따르자면 “뜻”으로서만 나에게 깃들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오직 “자아의 속의 속에” 있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가 문제라면 우리는 오직 “반성” 속에서만 우리가 찾는 존재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반성이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체가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등지고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자아 속에 칩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주관의 주()는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나지, 서로 충돌하는 작은 나, 거짓 나, 사()가 아니다.”2) 다시 말해 내가 반성 속에서 나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나”, 즉 보편적 자아, 보편적 주체성으로서의 참된 나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런 보편적 주체성이란 또한 오직 가장 주체적인 자기반성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가 없다.”3)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개성적인 인격이다.”4)

이런 의미에서 반성의 과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반성이란 내가 가장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나의 본래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때 반성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의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정신의 활동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반성이란 남이 아닌 나 속에서 존재의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한갓 사사로운 나에게만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라 모든 나에게 통할 수 있는 존재의 보편적 뜻과 의미를, 곧 하나님을 드러내는 정신의 활동이다. 그것은 각 사람이 각각 제 자리에서 제 식으로 직접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요, 나에게서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5) 이런 의미에서 반성은 “가장 내 일이지만 또 모든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일”인6) 것이다.


반성과 주체성


함석헌의 지성사적 의의는 그가 우리에게 반성과 자기인식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을 것을 요구했다는 데 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 된다.”7) 주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이다.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물건이 아니라 주체요 인격이다. 그런데 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돌아감으로써만 주체로서 존재한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함으로써만 내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원리의 참뜻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망각해버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를 잃어버린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로서 존재할 뿐이요, 내가 누구인지를 묻기를 그치면, 참된 의미에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직 생각하고 반성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이러한 주체성의 근원적 본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집을 잊은 날은 집을 빼앗기던 날보다 더 슬프고 아픈 날이다. 빼앗길 때는 집이 밖에 없는 대신 속 깊이 들어왔지만, 잊은 날에는 마음의 집마저 없어지지 않았느냐? 빼앗길 때는 집이 없어졌거니와 잊은 날에는 자아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집이 없으면 천지로 집을 삼을 수 있어도 자아가 없어진 다음에는 지옥에도 갈 자리가 없지 않느냐?8)


나의 자아, 나의 주체성은 남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이 빼앗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의해 정립되거나 망각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오직 내가 나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이켜봄으로써만 나로서 존재한다. 사람들은 내가 자고 있을 때에도 나는 나이므로, 내가 오직 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을 때에만 나일 수 있다는 말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린다면, 그때 있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일 뿐이다. 오직 내가 ‘나는 나다’라고 나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한에서만,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즉 나는 내가 나에게 말 건네는 한에서만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번 존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지속하는 물건이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인 활동으로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떤 타자적 원인에 의해 기성의 것으로 만들어져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능동적인 반성의 활동에 의해서만 정립되는 자유로운 주체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자아와 주체성은 남이 빼앗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빼앗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소멸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스스로 버리고 망각할 때뿐이다. 나는 나를 돌이켜 생각함으로써 내가 되지만, 내가 나를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을 때, 나의 자아는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림으로써 스스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참된 의미에서 우리로서 존재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나 자신을 잊어버리면, 나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일 뿐이다. 주체는 자기반성과 자기의식 속에서만 주체인 나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뒤에는, 우리는 더 이상 주체인 우리가 아니라, 객체인 그들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주체가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한갓 객체로 전락하고 나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규정하는 자유를 상실하고 언제나 타자적 주체에 의해 규정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 주체는 자유롭다. 자유란 주체의 자기규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은 노예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역사적 비극은 본질적으로는 이처럼 우리가 주체의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노예의 자리로 전락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객체가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회상하고 자기에게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이란 사실 민족의 자기반성이 체계적인 형태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시대정신에게 요구되는 가장 절실한 과제는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처음으로 참된 의미에서 철학적이 되는 것이다. 함석헌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이 과제를 우리의 지성사 속에서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데 있다.


주체의 자기의식과 역사의식


주체는 오직 반성 속에서만 주체가 된다. 내가 참된 내가 되는 것, 우리가 주체인 우리가 되는 것은 오로지 내가 나를,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돌이켜 생각함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이다. 그리고 주체는 이 자기복귀 속에서, 자기복귀의 활동으로서 존재한다. 주체란 자기에게로 되돌아감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한다.

주체의 이러한 근원적 자유를 철학자들은 주체의 자기정립(Selbst- setzung)이라 불렀다. 그러나 주체의 자기반성이 자기정립적 성격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때마다 절대적인 무()의 심연으로부터 자기를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주체가 절대적인 무전제의 상태로부터 자기를 정립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 주체가 되는 한에서, 그것은 언제나 되돌아가야 할 자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되돌아갈 곳이 없을 때, 반성은 불가능하며, 반성이 없는 곳에는 주체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되돌아가야 할 자기야말로 반성과 주체성의 본질적 전제인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가야 할 자기란 무엇인가? 그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한에서, 되돌아가야 할 자기는 과거의 자기이다. 그리고 이때 주체의 자기반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과 회상으로 발생한다. 반면에 주체가 자기에게로의 되돌아감을 통해 비로소 주체로서 정립되는 한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자기는 내가 지향하고 동경하는 자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성이 주체의 근원적 자기동일성의 실현인 한에서, 그것은 내가 회상하는 자기와 내가 동경하는 자기의 동일성인 것이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시대의 자기인식이 언제나 역사의식으로 발생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시대가 자기를 반성한다는 것은 그 시대가 지나온 시대를 회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내가 오직 기억과 회상 속에서만 내가 되듯이, 우리는 오직 역사적 반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의 자기인식은 역사의식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주체의 자기의식은 역사의식과 본질적으로 공속한다. 다시 말해 나와 역사는 따로 떨어져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가리켜 함석헌은 “자아에 철저하지 못한 믿음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요, 역사의 이해 없는 믿음은 가시덤불에 난 곡식”이라9) 하였다. 주체의 자기반성은 오직 역사의식을 통해서만 온전히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지나간 일의 기록”이라10)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할 때, 사람들은 역사를 지나간 시대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역사적 탐구의 대상은 나와 무관하게 지나가버린 사건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역사는 반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주어져 있는 객관적 사태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역사 없이 나로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없는 곳에서는 역사 또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회상하지 않을 때 역사는 무의미의 어둠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오직 나의 자기의식, 자기반성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실에 집착하는 역사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역사는 지나간 사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지나간 일을 기록한다 하지만 지나간 날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놓는 것이 역사는 아니다. 우선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지나간 10년간의 일을 다시 나타내려면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들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역사는 영 쓸 수 없는 일이다. 또 설혹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 전에 살았던 김 아무개, 이 아무개의 이름을 다 빼지 않고 적고 그 생김생김이 어떻고 몸맵시가 어떠했다는 것을 아무리 자세히 그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한푼어치 값도 없다. 그 까닭은 그것은 우리의 지금 살림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11)


참된 의미에서의 역사란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질 수 있고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나간 過去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現今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 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12)


그러니까 역사는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의 산 관련”13)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가 되어가는 지평, 역사가 존립하는 지평이 바로 주체의 반성과 회상이다. 주체의 회상 속에서 역사는 지금과 산 관련을 맺는다.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 이것이야말로 주체의 자기반성의 요체이다. 주체의 자기반성은 주체의 자기관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기동일성의 관계로 발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라는 주체의 자기동일성은 그 자체로서는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반드시 구체적인 자기관계 속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이야말로 주체의 자기관계의 첫번째 구체적인 전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상인바, 회상은 반성의 첫번째 계기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반성 속에서 주체이다. 이 말이 주체가 반성을 통해 자기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한에서, 주체의 자기동일성은 오직 반성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반성이 회상으로 발생하는 한에서, 나의 자기동일성은 회상하는 나와 회상되는 나의 동일성에 존립한다. 역사의식이란 주체의 자기회상이 서로주체성의 자각 속에서 주체적 내용을 얻은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역사의식 속에서 주체의 자기동일성은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 지금과 역사의 본질적 동일성으로 나타난다.

참된 의미에서의 역사학이란 이런 의미에서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 지금과 역사의 근원적 동일성의 바탕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기록은 개개의 사실을 자료로 삼아가지고 옹근 하나인 산 것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14)


이 “하나인 산 것”, 그것이 “뜻”이다. 그것은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나를 매개하는 것, 회상하는 나와 회상되는 나를 매개하는 것, 그리고 지금과 역사를 이어주는 근원적인 존재의 지평인 것이다. 역사학이란 바로 그런 “뜻의 드러냄”이다.15) 


부끄러운 역사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제와 오늘을 매개하는 하나의 뜻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자기동일성 속에서 하나로 통일하는 하나의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왜인가? 그것은 우리의 과거가 결코 회상하고 싶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이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예닐곱 해 전부터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젊은 가슴에 영광스런 조국의 역사를 안겨줄 수 있을까 하고 힘써보았다. 그러나 쓸데없었다. 어려서 듣던 을지문덕, 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로써 묻어버리기엔 5천 년 역사의 앓는 소리는 너무도 컸다.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생생자(生生字), 거북선, 석굴암, 다보탑, 있는 것을 다 출동시켜 관병식을 거행해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 허울로 가리기에는 삼천리에 박혀 있는 상처는 너무도 크고 많았다. 나는 스스로 자기를 속임 없이는 유행식의 ‘영광스런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16)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업적이 아무것도 없는 민족, 그것이 우리이다. “피라미드 같은 만리장성 같은, 굉장한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에 크게 공헌한 발명도 없다. 인물이 있기는 하나 그 사람으로 인하여 세계 역사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할 만한 이도 없고, 사상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세계 사조의 한 큰 주류가 되었다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도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17)

이것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다.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역사, 아니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역사가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함석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은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18)


그러나 수천 년 우리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절망적인 수난밖에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주체가 자기의식 속에서 회상하는 과거는 또한 그가 지향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주체의 반성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매개하는 하나의 지평, 그것이 역사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비참한 고난이 역사의 의미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어쩔 수 없이 고정된 사실일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가 동경하고 지향하는 미래의 모습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자기의식의 분열과 단절은 우리가 수난의 역사로부터 지금과 역사를 매개하는 산 관련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참된 역사의식을 정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식 없는 곳에는 민족의 자기의식 또한 불가능하다. 반성은 회상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삶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고통과 슬픔 그 자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통틀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들뿐이다. 우리 역사는 탁월한 민족, 고귀한 정신이 어떻게 스스로 비참하게 몰락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 작아지고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해서 끝내는 스스로가 가장 멸시했던 민족에게 벼슬아치들이 스스로 나라의 주권을 헌납하기에 이르렀던 역사, 그것이 우리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해방된 뒤에도 다시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남이 씨뿌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이 우리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과연 역사에 대한 반성이 가능한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ꡔ역사ꡕ(Historiai) 첫머리에서 자신의 역사서술의 의도가 사람들이 이룩한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erga megala te kai thō masta)을 망각에서 구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19) 그러나 우리가 역사 속에서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우리 자신이 위대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위대함이야말로 비단 헤로도토스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모든 역사서술이 추구해왔던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서양의 역사서술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가장 오랜 역사서라 할 수 있는 ꡔ서경ꡕ(書經)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帝堯를 상고하건대 放勳(공이 큼)이시니, 공경하고 밝고 문채롭고 생각함이 편안하고 편안하시며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하시어 광채가 四表에 입혀지시며 上下에 이르셨다. 능히 큰 덕을 밝혀 九族을 친하게 하시니 九族이 이미 화목하거늘 백성을 고루 밝히시니 백성이 덕을 밝히며, 萬邦을 합하여 고르게 하시니 黎民들이 아! 변하여 이에 하였다.20)


이는 옛 요()임금에 대한 서술로서, 그의 공과 덕이 얼마나 큰지를(堯之大德) 말하고 있다. 공자는 “하늘이 위대하신대 가 이를 본받았다”(惟天爲大, 惟堯則之)라고 평하였다 하거니와,21) 여기 ꡔ서경ꡕ의 경우에도 역사서술의 이념은 지난 시대 성인들의 큰 덕(俊德)과 위대한 업적(放勳)을 오늘에 돌이켜 생각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ꡔ역사ꡕ와 ꡔ서경ꡕ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을 이루는 것은 정신의 위대함이다. 우리가 역사를 회고하는 것은 위대한 것을 회상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위대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역사가 위대함 속에서 일치하는 것, 이 일치야말로 역사의식 속에서 추구되는 주체의 자기동일성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자랑할 만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들은 어디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등감과 비극적 역사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이 문제라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우리 역사를 뒤져 그런 것들을 긁어 모은다 하더라도, 그 모든 업적이 다른 민족의 업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우리가 다른 민족에 대해 느낄 수밖에 없는 열등감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세계의 각 민족이 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있는 게 가난과 고난밖에 없구나, 할 때 천지가 아득하였다. 애굽과 바빌론은 문명의 시작이라는 명예를 가졌고, 중국은 도덕을, 그리스는 그 예술을, 로마는 그 정치를 가지고 가겠지만, 한국은 무엇을 가지고 갈 터인가? 인도는 망했어도 인도교, 불교를 남길 수 있고, 유대는 없어졌어도 유대교, 기독교가 남을 수 있으며, 영국도 오히려 헌법을 자랑할 수 있고, 독일도 오히려 철학을 내세울 수 있으나, 그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자랑할 터인가?22)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긍지와 자랑이 타자와의 비교를 수반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규정이 한정과 제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역사 속에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아무리 많이 긁어 모은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우리의 자랑과 긍지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모든 위대한 일들을 다른 민족의 업적과 비교해보는 순간, 그 모든 크고 놀라운 일들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로서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가 우리의 추하고 역겨운 자화상에 지나지 않을 때, 주체의 역사적 반성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반성은 자기를 돌이켜 보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추하고 역겨운 자기 자신을 즐겨 되돌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가망없는 선택에 자기를 맡기게 되는데, 더러는 어디서도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예 전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자발적인 자기상실의 길을 걷기도 하고, 더러는 못난 자화상에 잔뜩 분칠을 하여 할 수 있는 한 미화시키기도 하며, 아니면 사람들은 주체의 존재가 오직 현재의 자기의식에 의해 근원적으로 정립되는 것이라 믿으면서 아예 역사를 무시해버리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차피 우리의 현재와 과거의 역사가 산 관련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라면 이미 지나가 어쩔 수도 없게 되어버린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직 현재의 일에만 충실하려 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 세 가지 태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온전한 의미의 민족의 자기의식의 표현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이 회상과 역사의식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에서, 그것은 오직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의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지만, 저 세 가지 태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을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첫번째 방책은 자기상실에 빠진 정신의 비겁을 보여줄 뿐이며, 둘째는 자기도취에 빠진 정신의 허영을 보여줄 뿐이고, 셋째는 회상 없이도 반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어리석은 정신의 무모함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든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 즉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인 산 것”, 또는 “뜻”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회상하는 나와 회상되는 나는 여전히 분열 속에 있고 나는 참된 자기동일성의 의식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내가 반성 속에서 자기동일성의 의식에 도달하지 못할 때, 나는 더 이상 주체인 나로서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주체는 오직 ‘=나’라는 반성적 자기동일성의 의-이것이 바로 주체의 자기의식이-속에서만 주체인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참된 의미의 주체성을 갖지 못한 우리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 험한 물살을 주체적으로 헤쳐나가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 자기를 내맡긴 채, 한갓 수동적인 객체로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 채 떠밀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객체로 전락하는 것, 쉽게 말해 노예상태에 떨어지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없다.


고난의 뜻에 대한 물음


우리가 이 치명적인 정신의 자기상실과 정치적 예속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주체성과 자유를 정립할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시는 회상하고 싶지조차 않은 추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두고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을 찾아내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일 수 있겠는가? 돌이켜 보면 함석헌의 위대함은 대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물음에 대하여 처음으로 대답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구경만 하고, 읽기만 하고, 바라만 보고 있으리요? 그 비렁뱅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다른 사람의 일인 듯 우리가 바라보고 있었던 그 끔찍한 형상은 고난의 시냇물 위에 비친 우리 자신의 그림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고난자로 스스로 의식하고 수난자의 심정을 가지고 아픔을 우리 자신에 체험하여야 한다. ……제3자의 태도를 버리고 내가 되어야 한다.23)

회상하고 싶지 않은 역사,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역사 앞에서 나는 타자가 된다. 아니, 역사는 나에게 낯선 타자가 된다. 그리하여 회상하는 나와 회상되는 나, 또는 비슷한 말이지만 지금과 역사는 주체의 자기동일성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분열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을 참된 자기동일성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회상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용기이다. “다른 사람의 일인 듯 우리가 바라보고 있었던 그 끔찍한 형상은 고난의 시냇물 위에 비친 우리 자신의 그림자였다.”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 역사는 한 민족의 자기반성의 거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의 거울 앞에 마주설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비렁뱅이”요, “아시아의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큰길 가에 앉아 천년 동안 그 비참한 모양을 하고 앉은 이 늙은 갈보”의24) 끔찍한 형상이다. 그런데 그 끔찍한 형상이야말로 “고난의 시냇물 위에 비친 우리 자신의 그림자”인 것이다.

나르시스가 맑고 깨끗한 연못의 수면에 자기를 비추어 보았을 때, 그가 거기서 보았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수면에 비친 얼굴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의 시냇가에서 비추어 본 우리들의 모습이란, 도저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하고 부끄러운 비렁뱅이요 늙은 갈보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추하다 하여 외면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한, 우리는 끝끝내 자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참된 자기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되고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비렁뱅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고난자로 스스로 의식하고 수난자의 심정을 가지고 아픔을 우리 자신에 체험하여야 한다.”

이때 역사의 아픔과 슬픔은 우리들 자신의 슬픔이 된다. 그리고 이 슬픔의 동일성, 슬픔의 관련을 통해, 낯설음과 무관심 속에서 단절되어 있었던 지금과 역사가 자기동일성의 지평 속으로 통일된다. 그리하여 회상하는 오늘의 나와 회상되는 역사적 내가 자기분열을 극복하고 참된 의미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고난과 슬픔이란 우리에겐 “지금과 역사의 산 관련”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아픔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복귀하고 우리 자신과 하나된다. 그리하여 역사의 슬픔이 곧 지금 우리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며, 모든 주체가 그러하듯, 우리 또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 주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과 슬픔은 우리의 자기의식의 본질적 내용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기와 하나된다는 것은 고난받는 자, 슬퍼하는 자에게 되돌아가 그와 자기동일성 속에서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슬픔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하나된다는 것은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슬픔과 즉자적(卽自的)으로 하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슬픔의 상태에 함몰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수난자가 되고, 아픔을 우리 자신에 체험하며, 사유가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은 슬픔 속에 있되 슬픔에 대하여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 자기에 대하여 있음’(an und für sich Sein)이야말로 반성의 본질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반성 속에서, 또는 같은 말이지만 반성적으로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은 슬픔 곁에서 슬픔에 대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내가 반성적 자기의식 속에서 나 곁에서 나에 대하여 있듯이. 그런데 이 자기 속에서 자기에 대하여 있음은 오직 반성적 자기의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돌이켜 생각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슬픔 곁에서 슬픔에 대하여 있다는 것은 슬픔을 돌이켜 생각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은 슬픔에 대해 슬픔과 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슬픔과 고난의 의미를 되묻고 돌이켜 생각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난의 짐을 지는 자들아, 오라. 헤매기를 그만두고 이 비장한 곡조로 높이 우는 고난의 냇가로 오라. 와서 그 무거운 짐을 이 높은 바위 끝에 내려놓고 이 고난의 뜻을 시원히 이야기하자. ……너와 내가 수난의 비렁뱅이니라.25)


우리는 “너와 내가 수난의 비렁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고난의 냇가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적인 의미로 반성 없이 수난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고난의 냇가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 즉 자기를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 고난의 뜻을 시원히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의 보편성


바로 여기에 함석헌 철학의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철학은 존재의 진리를 물어왔다. 그러나 진리란 여기서 단순한 완전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존재의 진리를 묻는다는 것은 완전한 존재의 이념을 사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학이 오로지 완전한 존재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세계에 가득 찬 슬픔은 잊혀진다. 완전한 존재의 이념에서 볼 때, 슬픔은 비본질적인 것, 비본래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오랫동안 세상에 가득한 어둠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투명한 빛의 세계에 침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이 세계에 가득한 어둠과 슬픔을 외면하고 잊어버릴 때, 그것은 결국 하나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에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슬픔을 잊어버린다고 해서 슬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존재의 완전성의 이념에 도취하여 슬픔과 고통을 외면할 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동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현실을 등진 철학, 그것이야말로 허위의식이요 자기기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신의 허영과 허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본래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속해 있는 슬픔의 지평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한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역사적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근원적인 슬픔의 지평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이를 통해 존재 일반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지평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은 본질적으로는 너나 할것없이 슬픔의 지평 속에서 비로소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기를 그만두라. 인류의 역사란 결국 눈물의 역사요, 피의 역사가 아닌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온 인류가 다 그렇다. 사람의 매골로 되지 않은 성벽을 어디서 보았느냐? 사람의 가죽을 병풍으로 삼지 않았다는 왕좌를 어디서 들었느냐? 한숨 없이는 예술이 없고, 희생 없이는 종교가 없다. 어떤 자가 이기고 어떤 자가 졌다 하며, 어떤 자가 어질고 어떤 자가 어리석다 하나, 모르는 말이다.26)

인간의 삶을 너나의 일로 보지 않고 인류 전체의 일로 볼 때, 그것은 “다 같이 한 개 수난의 행렬을 지을 뿐이다.”27) 비단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인28)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슬픔의 지평으로 되돌아가 슬픔과 고난의 의미를 되물을 때, 우리는 단지 특정한 민족의 역사로서 우리 역사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되묻고 사유하게 된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고난의 역사의 의미는 오직 여기에 있다. 모든 인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슬픔과 고난의 지평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하여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슬픔과 고통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생각은 슬픔의 자리를 향해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철학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 슬픔의 소리에 귀기울이려 하기보다는 슬픔 없는 천상적 존재를 동경하여 마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는 열망에 의해 인도되어왔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철학의 이러한 열망의 전형적 형상화이거니와, 여기서 철학은 어둠의 지하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 올라가는 ‘영혼의 오름길’(psychēs an-hodos)로29) 이해되어 있다. 진리는 높은 곳, 빛의 세계에 있다. 그리하여 철학이 진리를 얻기 원한다면, 그것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눈길을 돌려 높은 곳을 향해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철학은 처음부터 슬픔을 망각한 채 존재의 진리를 추구했었다. 아니 슬픔과 고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원적인 이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진리의 영역을 벗어나 진리의 영역으로 상승하는 것이 철학의 이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정신은 빛의 세계에서 진리를 인식하고 난 뒤에는 다시 동굴 속 어둠의 세계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30) 그러나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일 뿐이다. 슬픔의 의미를 묻는 것, 겸손히 슬픔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은 처음부터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직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는 슬픔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어둠 속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 이런 것들만이 철학의 관심사였다. 요컨대 철학은 슬픔으로 돌아가 그것과 하나되어 슬픔의 의미를 되묻기보다는 슬픔을 부정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은 오랫동안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에서 이른바 존재의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다. 그리고 슬픔은 잊혀졌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절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오직 눈물의 골짜기에서이다. 이것을 표현하여 함석헌은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말한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궁핍에 주려보고야 아버지를 찾는 버린 자식같이, 인류는 고난을 통해서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았다. ……지옥에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에게로 나가는 길은 악의로 포장이 되어 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31)


여기서 함석헌은 철학적 사유의 처음과 끝을 눈물과 고난을 통해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눈물과 고난은 철학적 사유가 그 속에서 운동하는 근원적 지평이다. 한편에서 그것은 철학의 시원이다. 사람이 철학적이 되는 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된다. 즉 오직 슬픔과 고난 속에서 우리는 왜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까닭에 대한 물음 즉 근거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되는 한에서, 고난과 눈물은 철학의 시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 철학적 사유의 최종적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다시 말해 오직 고난만이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 즉 존재의 절대적 진리로 이끈다. 철학은 존재의 절대적 진리를 파악하려는 열망에 의해 움직여왔지만, 절대자를 슬픔과 눈물 없는 낙원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은 오직 슬픔과 고난의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며, 또한 하늘나라는 오직 눈물의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참으로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동경한다면, 그것은 가장 깊은 눈물과 슬픔의 골짜기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역사의 의미를 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슬픔 속에서 존재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역사를 지배해온 오랜 허위의식을 근원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의 극복


그러나 생각이 슬픔으로 돌아가 그것과 하나된다는 것은 단지 슬픔의 의미를 묻고 생각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슬픔을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슬픔을 넘어간다는 것은 슬픔 자신의 본질적 진리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슬픔과 만날 때, 슬픔과 일치할 때 그리고 슬픔에게 돌아가 슬픔 곁에 있을 때 철학적 생각은 진리가 된다. 철학적 생각의 진리는 무엇보다 생각이 슬픔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존립한다. 생각은 슬픔으로 복귀함으로써 바로 자기 자신의 본래성으로 복귀한다. 진리는 생각의 이 자기복귀에 존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단지 되돌아감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진리는 동시에 넘어감이다. 즉 그것은 슬픔을 넘어감인 것이다. 생각의 진리는 생각이 슬픔으로 돌아감으로써 시작되고, 생각이 슬픔을 넘어감으로써 실현된다. 넘어간다는 것은 부정한다는 것 또는 폐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슬픔의 부정, 이것은 슬픔의 본질이다. 모든 슬픔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을 본질적 이념으로 가진다. 즉 자기 자신의 부정의 이념을 통해서만 슬픔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쁨과 슬픔의 차이이다. 기쁨은 자신의 폐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픔은 자신의 폐지를 추구하며, 또한 자신의 부정의 이념에 의해 매개되어 비로소 슬픔은 생겨난다. 부정해야 할 현실이 없는 사람은 또한 슬퍼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생각이 슬픔과 하나된다는 것은 마지막에는 슬픔을 넘어가는 것에 존립한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 되돌아가 그것의 의미를 되묻는 것도 고난의 역사를 지금에 그대로 이어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고난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고난의 역사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난을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난을 이긴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불의하고 불행한 현실을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의하고 불행한 현실을 두고, 그것이 어쩔 수도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런 현실을 사유 속에서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 속에서 비극적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현실 자체가 제거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현실은 또 다른 현실에 의해서만 부정되고 극복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슬픔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억누르는 모든 타자적 힘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짐으로써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타자적 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약해지고 작아져 왔던 민족이었다. 처음에 만주대륙을 호령하던 기상은 나중으로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소사대(以小事大)가 나라의 건국이념이 되었을 정도로 자기를 잊어버린 민족이 우리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 역사의 모든 고난도 근본적으로는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약해지고 작아진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도 죄지만 자기를 업신여기면 더 큰 죄다. 그 죄에서 모든 죄가 나오기 때문이다. 자유정신이 부족한 한민족은 두 가지 무거운 짐을 겹쳐 지고 있다. 하나는 남이 주는 압박이요, 또 하나는 저를 버린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32)


이런 문맥에서 함석헌은 우리에게 오랜 자기망각과 자기상실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남으로부터의 압박과 자기를 버린 자에게 내려지는 역사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요, 어떠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되는 것과 강해지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절박한 도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함석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주체성의 도덕은 서양 사람들이 추구해왔던 홀로주체의 자기보존의 도덕이 아니다. 이를테면 스피노자(B. Spinoza)는 그의 ꡔ에티카ꡕ(Ethica)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충동은 덕의 첫째가는 유일한 기초이다”(Conatus sese conservandi primum, & unicum virtutis est fundamentum)라고33) 말한다. 이런 입장에 따른다면,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할수록, 즉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유덕하다. 그리고 반대로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즉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를 등한시하는 경우엔 그는 무력하다.”34) 그리고 선(bonum)과 악(malum)도 “우리들의 존재의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 즉 우리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것”(quod nostro esse conservando prodest, vel obest, hoc est, quod nostram agendi potentiam auget, vel minuit, juvat, vel coercet)을35)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원칙적으로, 타자(他者)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타자를 위하여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36) 도덕의 본질은 오직 자기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대변하는 서양적 도덕의 입장에서 보자면,37) 우리는 부덕하고 무능한 민족이다. 그리고 유덕해지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를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우리에게 자기의 주체성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결코 그 주체성을 타자를 배제하고 제압하는 홀로주체성으로38) 이해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의 도덕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유덕해진다는 것은 이를테면 미국과 중국이나 일본처럼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적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갖추는 데 있다 할 것이다. 함석헌 또한 외세의 침략 앞에서 무능하고 비굴했던 역사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래 영토확장의 의지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우리의 역사를 통탄하며 외세의 억압에 짓눌리고 스스로 움츠러든 우리의 민족혼의 소생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억압했던 외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존재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자기를 확장하고 타자에 대한 패권적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를 전체로 볼 때, 거기에는 더 이상 길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역사는 폭력으로 하는 쟁탈의 역사였으나, 인류가 망하기를 자취하지 않는 한, 이 앞으로의 역사는 도덕적 싸움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39) 것이 함석헌의 확신이다. 모두가 자기보존과 자기확장에 집착하는 한, 이제 인류에겐 다 같이 멸망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은 약육강식의 불의한 역사 속에서 남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역사와 약육강식의 원리 그 자체를 극복하는 데 있다.


세계 불의의 결과가 우리에게 지워졌으니, 우리가 만일 그것을 깨끗이 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이다. ……영국도 그것을 할 수 없고 미국도 그것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을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넉넉해졌고 너무 높아졌다. 이것은 세계의 하수구요 공창(公娼)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저들이 너무 부하고 귀해졌다는 것은 저들은 채무자라는 말이다. 물질적으로 채권자인 저들은 정신적으로는 채무자다. 저는 우리에게 빚진 자다. 그러므로 빚 청장(淸帳)은 우리만이 할 수 있다. 지난날에 있어서도 새 역사의 싹은 언제나 쓰레기통에서 나왔지만 이제 오는 역사에서는 더구나도 그렇다.40)


생각하면 우리는 “세계사의 하수구”와도41) 같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다 모여드는 하수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행이요 우리가 짊어진 고난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가 사는 이 하수구를 깨끗이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통해 세계가 모두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에 따르면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다.


하수구가 되라는 말이 더러워지라는 말은 아니다. 하수구의 일은 잘 받음에 있다. 잘 받으려면 잘 돌려야 한다. 시내가 받은 물을 다 바다로 돌리듯이 모든 불의를 감수하는 것은 좋으나 감수만 하고 돌릴 줄 모르면 메어버린 하수구같이 곧 썩어 그 해가 더 심할 것이다. 하수구는 보이는 위에서는 받는 구멍이 있는 대신 보이지 않는 밑에 이 무한의 바다에 통하는 길이 있어야 한다. 모든 불의를 받아서는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절대의 신앙이다. 세계사의 하수구가 되었거든, 나와 세상을 건지는 사명을 다하려면 내 속을 깊이 뚫어 하나님께 직통하는 지하도를 어서 파야 한다.42)


우리의 사명은 불의를 같은 불의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불의를 받아서는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불의를 신적인 사랑으로 이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각이 고난을 이기고 슬픔을 넘어간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같은 종류의 힘으로 또 다른 힘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과 사랑의 힘으로 모든 물리적 힘에 기초한 투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야말로 슬픔의 역사를 넘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열어 보이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닌 것, 종내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써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증거하여야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43)


일연(一然)이 ꡔ삼국유사ꡕ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말했던 것은 오래 전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여 온 나라가 그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겨레의 수난의 한복판, 가장 깊은 치욕과 슬픔의 심연에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함으로써 갚아야 하리라고 다짐하는 영혼은 얼마나 순결한가?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거룩한 사랑으로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하고 큰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신의 깊이가 아닌가.

생각하면 함석헌은 일제시대에 환생한 일연대사이다. 나라가 이민족의 침략 아래 자기를 잃어버린 바 되었을 때, 그 또한 일연대사처럼 겨레의 역사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 겨레가 자기를 되찾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도 역시 일연대사처럼 우리가 겪는 고난을 사랑을 통해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세계의 불의를 담당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높이 올리는 일”이야말로44) 그가 깨달은 우리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 자신이 도덕적․정신적으로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철학자가 말했듯이 “낮은 일은 높은 마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고, 작은 일은 큰 마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고, 더러운 것을 치우려면 무엇으로도 더러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죄를 처분하려면 어떤 죄로도 상하지 않는 거룩한 혼이 있어야 할 것이다.”45)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거룩한 겨레얼이 살아 있는가? 21세기 우리의 철학은 이 물음과 맞서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