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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20세기 한국 철학 김상봉 |
제3세계 나라가 주체를 포기하면 노예적인 굴종과 예속만 있을 뿐이다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대였다. 그 불행이란 물론 일제 식민지배나 6,25전쟁 또는 80년 광주처럼 현실적 비극을 뜻하는 것이지만, 단지 현실 역사의 비참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의 불행은 물질적인 궁핍이 아니라, 정신의 빈곤에 놓여 있다. 우리의 20세기는 철학이 없는 시대였다. 만해는 그 시대 우리가 겪어야 했던 불행을 땅이 없고, 추수가 없고 저녁거리가 없고, 집도 민적도 인권도 없다고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런 결핍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20세기 우리 역사의 불행은 철학이 없었다는 데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철학교수는 많이 있었으나 단 한 사람의 제대로 된 철학자도 낳지 못한 시대가 이 시대이다. 끔찍한 정신의 파산, 그것이 이 시대의 진짜 불행이었던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자는 묻는 사람이다. 철학교수는 남이 물었던 물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아무도 묻지 않았던 물음, 하지만 모두가 같이 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을 처음으로 던지는 사람이다. 20세기가 철학 없는 시대였던 것은 우리에게 그런 철학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이 땅에서 철학을 직업으로 공부하고 가르친 사람 중에서 단 한사람도 그런 고유하고도 보편적인 물음을 명확한 방식으로 던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 한에서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 우리 역사의 암흑시대였다. 사유의 빛이 밝혀지지 못했던 시대, 역사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이 시대였던 것이다. 함석헌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우리는 20세기 우리 철학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더러 눈에 보이는 사건들의 연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깊음 속에서 이어진다. 함석헌은 많은 책을 썼으나 단 한 번도 강단철학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개 종교사상가나 아마추어 역사가, 아니면 반독재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재야인사로 간주되었을 뿐 생전에 한 번도 철학자로 취급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자신도 자기를 철학자로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그는 20세기 한국의 철학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씨앗은 그 자신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썩어 없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땅 위로 새싹을 틔워올리는 법이다. 함석헌은 그런 씨앗이었다. 그는 역사가 후세를 위하여 땅 속에 심어둔 씨앗, 즉 철학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철학의 영원한 금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철학적 지혜가 결국에는 언제나 자기인식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서 오랫동안 매우 비철학적인 민족이었다. 우리에게 철학은 자기인식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체계로서만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20세기는 이런 측면에서 정신의 자기망각과 자기상실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그리고 철학이 주체의 자기인식인 한에서, 자기망각 속에 빠져 있었던 20세기는 철학이 있을 수 없었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체란 무엇인가 함석헌의 철학사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1930년대에 처음 쓰고, 1950년에 처음 출판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는 자기인식이다. "반성은 모든 지식 행동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그 시작이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470쪽) 여기서 반성이란 당연히 자기인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반성이 지식 행동의 시작이라면 이는 곧 "자기를 아는 것이 지식·지혜의 근본"(470)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란 단순히 대상에 대한 인식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반성을 통해 참된 의미의 나로서, 다시 말해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주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이다. 또는 나는 누구인가? 마찬가지로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이다. 참된 의미에서 주체로서의 나는 언제나 나의 반성적 자기관계 속에서 나로서 존재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반성적 자기의식 그 자체가 바로 나인 것이다. 물론 반성적 자기의식 없이도 인간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때 존재하는 인간은 주체적 인격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학적인 종에 속하는 하나의 개별자, 요컨대 사물적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식물인간이 되어 의식을 잃어버린다면, 그 때 있는 것은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닌 것이다. 주체에 대해 갖은 모욕을 표시하는 것이 시대의 유행이 되어버린 오늘날 주체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타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점에서 우리와 서양은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다. 처음부터 자기 밖에서 타자적 주체를 가지지 않았던 서양정신은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하더라도 타자에 의해 규정될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나 미국이 술독에 빠진다고 해서 쿠바나 알제리가 미국이나 프랑스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정신이 주체성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한다 가정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들이 곧바로 타자의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나쁜 경우라 하더라도 그 때 그들 내부에서 생각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적 욕망이 주인 노릇할 것이며, 정신이 야수적 욕망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미사일 방어체제를 통해 자기를 방어하고 있는 한, 서양세계는 타자적 주체의 객체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이 주체성을 마음놓고 비판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주체성을 유보한다고 하더라도 낯선 타자에 의해 객체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 없이 주체성을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체성을 비판하고 익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들이 객체로 전락할 위험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제3세계 나라가 거기 부화뇌동하여 자기를 망각하고 주체성을 포기할 때,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강대국에 의한 노예적인 굴종과 예속의 길일 뿐이다. 함석헌이 던진 물음,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새로움을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물음 자체는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전승된 낡은 물음이다. 그러나 이 물음의 참된 가치는 그것이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새롭게 물어지고 각자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대답되기를 기다린다는 데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같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묻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나에게서 나는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마나 나는 나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스스로 묻고 그에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묻는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기반성이 단순히 사사로운 나의 경험적인 자기인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관의 주(主)는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나지, 서로 충돌하는 작은 나, 거짓 나, 사(私)가 아니다."(42) 그러나 주관이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나라고 해서 그것이 평균적이고 개성없는 추상적 주체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가장 개성적인 인격에 깃들이는 보편적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세계에서는 가장 보편적이려면 추상적이 되어야 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반대다.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서는 가장 보편적일 수가 없다."(49) 그런 까닭에 함석헌에 따르면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개성적인 인격이다."(같은 곳) 다시말해 하나님 즉 보편적인 진리는 언제나 가장 개성적인 인격 속에서 계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묻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속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자기인식이다. 정신이 대상 세계 속에서 진리를 찾을 때 그것은 과학이지만, 자기 속에서 진리를 찾을 때, 비로소 정신은 철학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에 대해 묻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왔었다. 내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과 같이 되는 것이야말로―그 남이 중국이든 일본이든 아니면 미국이든 이스라엘이든지 간에―우리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우리의 불행도 그것의 근원적 뿌리에서 보자면 바로 그런 우리의 자기망각에 놓여 있다. 함석헌의 지성사적 의의는 그가 우리에게 반성과 자기인식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을 것을 요구했다는 데 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 된다."(287) 그리고 이런 진단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grad.yonsei.ac.kr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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