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 소리> 2002.1-2 (pp. 83-99)
함석헌의 같이 살기 운동
김 영 호 (인하대교수·철학) |
1. 들어가는 말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운동을 펴나가려고 합니다" 이 선언은 함석헌선생이 씨 사상과 운동의 강령이랄 수 있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인류가 이 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필요로 하는 원리인 비폭력을 짚어낸 혜안을 가졌던 분이었기에 이런 선언도 이 사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주장이라고 보여진다. 운동이라고 따로 조직적으로 구상한 것이라기보다 씨 의 소리가 주체가 되는 언론을 매개로 한 그런 운동이었을 법하다. 당시 언론상황이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도 못 내고 있었던 형상이었으니까. 오늘날도 그때와는 다른 면에서 언론은 아직도 중요하다. 일제시대부터 권력과 유착한 신문들이 아직도 국민을 오도시키고 있다. 완전 최면상태로 빠뜨리고 있다. 언론권력이 일간신문만을 내는 것이 아니고 일간 스포츠지, 주간지, 월간지, 월간여성지 등속까지 문어발처럼 국민을 옭아매고 있다. 세계에 유례 없는 언론싹쓸이다. 화려한 치장과 요설로 상업주의의 마술로 순진한 국민을 유혹한다. 쇼핑만능주의를 부추긴다. 청소년, 성인 할 것 없이 전철 칸에서 들고 보는 신문을 컬러풀한 연예인 스포츠인 신변잡기가 중심이 된 스포츠 신문이 대부분이다. 강준만교수도 지적했듯이 남북관계와 아프간 사태에서 보수족벌 신문이 미국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재벌들과 한통속으로 작당하여 누구를 적극적으로 밀 것인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전략적으로 언론을 중심한 운동이 아직도 필요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 반대되는 언론의 목소리는 아직도 약하다. 그만큼 씨 의 소리는 더 크게 소리내야 한다. 그리고 데모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정보혁명으로 사람들이 정보획득에 정신이 없다. 정보획득이야 나쁠 것이 없지만 인터넷 쇼핑과 게임, 채팅에 온통 시간을 다 바친다. 청소년의 인성, 창조력, 도덕성 개발이 그만큼 그렇지 않아도 대화가 적은 사회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간은 더 없어졌다. 함석헌은 정보사회가 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정보(information)보다 탈바꿈(transformation)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같이 살기 운동은 나아가서 언론에 그치지 않고 모듬살이 전체에 적용되어야할 실천원리며 운동이다. 왜 같이 살아야 하는가, 왜 같이 살기 운동을 펼쳐야 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왜 비폭력인가, 왜 통일되어야하는가 같은 문제처럼 근거가 있어야 삶의 원리로 받들 수 있다. 아직 그 당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종교적, 철학적 해명이 요구된다. 종교나 철학은 가장 근원적인 차원과 가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종교인으로 같이 살기 운동을 새마을 운동, 제2건국 운동 같이 정치적 슬로간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이 인류가 나갈 길이 여기에 있다고 보고 한 말이었다. 모듬살이는 인류가 처음부터 지녀온 모습이다. 그것이 점점 변질되어 국가 조직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국가는 한 때 어쩔 수 없이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의 진보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한 '뱀허물'이 되었다. 국가라는 이름 밑에 저질러진 범죄가 그 이점을 초과한 지 오래다. 지금 우리는 미국 대통령 한 사람, 우리 대통령 한 사람의 말에 전전긍긍하는 초개같은 운명이다. 한, 두 사람의 생각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우연히 2000년 미국에서 미국대통령 선거에 유다른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 것도 한국의 장래와도 큰 연관이 있어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인에게는 덜 바람직한 후보가 당선되고 아니나 다를까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 있다. 2002년의 가장 큰 사건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하는 것이다. 이러니 함선생의 국가무용론이 생각 안 날 수가 없다. 그는 선지자였다. 같이 살기 운동은 국가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사회재구성의 새 틀 짜기에 해당한다. 도시는 각종 범죄, 비인간화, 환경파괴, 공해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다. 편리성을 담보로 한 아파트문화는 이웃의 개념을 없애고 있다. 주거형태를 어차피 바꿔가야 할 필요가 있고, 좁은 국토에 아파트가 그 대안이 된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무조건 높이만 지어놓아서 도시미관과 교통혼잡을 유발하고 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구밀집과 더불어 이웃과 공동체의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이왕에 아파트가 필요한 것이라면 장기적으로 봐서 유럽의 모든 도시가 약속처럼 지은 5, 6층 높이의 건물들이 들어섰다면 모든 점에서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도시계획담당공무원이 건축업자의 폭리를 취하게 20층 이상의 고층을 허가한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양보해서 10층 이하로만 제한했더라도 인구과밀집중은 막았을 것이고 조금은 경관을 덜 괴물스럽게 보이게 했을 것이다. 고층아파트 단지는 근시안적인 정치지도자가 눈감아주고 부패한 관료와 재벌이 합작한 졸작이다. 저층 아파트만 있는 과천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조사결과를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층에 살수록 육체, 정신 질병이 증가한다는 연구통계가 이미 선진국에서 나온 바 있다. 도시는 같이 살아가기가 힘든 환경을 제공한다. 땅 값 비싼 도시는 그렇다 쳐도 한가한 시골 들판 한 가운데 불쑥 불쑥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는 또 어인 연고인가. 도시처럼 땅값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환경에 맞지 않는 볼 품 없는 아파트가 아름다운 산천을 값싼 분칠로 치장해가고 있다. 전원주택 짓는다고 산을 깎고 나무와 숲을 베어 내고 있다. 기관장, 의원들이 국민 혈세로 해외시찰 가는 바에는 주거지 환경이나 잘 살펴보고 오라. 미국 워싱턴 교외나 뉴잉글랜드 지방 교외만 가도 주거지가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고 나무 숲 속에서 얼마나 환경친화적으로 위치해있는지 보고 배워올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가 상징하는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인주의 문화가 수입되면서 나눔의 문화는 저 시골구석 노인네들 사는 동네에만 남아있다. 그들이 떠나면 그런 문화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해 있다. 함석헌이 왜 같이 살기를 하자고 외쳤는지 점점 더 이해가 간다.
2. 같이 살기 운동의 종교적 근거
함석헌은 "우리가 내세우는 것"을 이렇게 맺고 있다: "씨알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 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이 선언 가운데 함석헌의 공생/상생 철학이 담겨있다. 이는 우선 함석헌이 어느 종교보다 생각과 행동의 준거로 삼은 기독교의 근본 정신인 '이웃 사랑'에 뿌리가 닿는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상생 사상은 한국 근대민중종교에 맥이 닿기도 한다. 또한 불교의 핵심인 연기론과 연결된다. 여기에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논리가 나타나 있다. 보살정신과 중국불교 교학의 정화인 화엄사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같이 살기 운동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주장이다.
2.1 증산의 상생론
너와 내가 같이 살아간다는 존재론은 어떤 종교나 사상의 맥락에서도 누구라도 입에 올릴 수 있는 생각으로, 비폭력이 그런 것처럼 고래로부터 있던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 사상체계, 즉 씨 사상의 맥락에서 이것을 실천론으로 특별히 내세웠다는 점이다. 함석헌 자신이 인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것이 놀랍게도 19세기 후반기부터 동학을 필두로 연쇄적으로 일어난 근대 신종교운동에서 중시된 상생 사상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상생은 특히 함석헌보다 한 세대 앞서 태어나 그 나름의 독특한 세상구원론(구세론)을 펴면서 불꽃같이 살다간 강증산(1870-1909)에 의하여 종교적으로 새로 정립, 체계화된 개념이다. 이적기사로 가득 찬 그의 행적과 말은 예수 같은 종교 창시자를 얼듯 연상시킬 만큼 종교적 차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실제로 한 신학자는 둘의 언행을 나란히 대조한 표를 만들기도 했다.(『기독교사상』100호 참조) 그는 가까이 있었던 성인을 못 알아보고 먼 데 있는 성인만 알고있었다고 한탄할 만큼 증산을 높이 평가했다. 함석헌이 합리적 사유가 이를 수 있는 끝에서 공생(共生)과 상생의 사상과 실천론에 이르렀다면, 증산은 종교적인 구원론 차원에서 상생의 도를 세웠다. 이르는 과정은 달라도 결과에서 둘은 마주치고 있다. 증산의 사상은 여러 가지로 주목할 점이 있다. 일제가 한국전통과 종교를 '유사종교'나 '미신'으로 분류하여 마멸시켜 한 정책 때문에 증산교가 무속 등 다른 신앙전통과 함께 잘 못 인식되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가르침을 이용한 추종자들의 권력싸움 속에서 사교집단의 행태를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일제의 정책으로 오해받은 점도 있지만 차경석(차천자)의 교단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증산교,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으로 크게 갈려있다. 유산싸움을 벌이는 부잣집 아이들처럼 정신적 유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습이다. '진리의 바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이 모습은 최근에도 여러 교파들간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서로 정통을 내세우는 두 종파간에 탁명환 사건보다 더 큰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난 일이 있다. 종교를 제도화된 조직으로 만들 때 생길 수밖에 없는 폐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다시 함석헌의 조직폐해론이 떠오른다. 또한 함석헌과 대조한 적이 있는 (본지 1999년 5.6월호), 자기를 구세주로 신격화한 집단을 과감히 해체시켜버린 크리슈나무르티가 우러러 보이고, 모든 종교는 조직이 아니고 운동으로 시작했다는 이 시대의 탁월한 비교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증산의 상생론은 한국전통사상에 흐르고 있는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도 표현되는 조화적 사유전통을 재현한 종합이념이라고 할 만하다. 직접적으로는 증산이 만나보기도 한 김일부가 전개한 정역(正易)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선천시대와 후천시대로 구분하고 선천시대는 상극(相克)의 원리가 지배했다면 후천 시대에는 상생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상극은 만물을 생멸시키는 오행(五行: 金, 木, 水, 火, 土)이 서로 이기는 (木剋土, 土剋水, 水剋火, 火剋金, 金剋木) 형국이라면, 상생은 반대로 서로를 낳는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질서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국에서 연유한 주역이 지배하는 상극의 질서가 깨진다. 이것은 중국사상 및 중국인의 사유방식과 차별성을 갖는 한국사상사의 한 획을 긋는 이론으로 주장되었다. 증산이 이를 받아 후천개벽 시대의 새 판(度數)을 짜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선천시대에는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하여야 했으나 이제는 모사재천 성사재인으로 바꾸어졌다. 결과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가 된 것이다. 상극의 이치가 지배하던 선천시대에는 원한이 쌓이고 죄악과 살기가 넘쳐 대립, 갈등, 분쟁, 전쟁으로 가득 찼었으나 상생의 이치가 지배하는 후천은 화해와 공존 및 평화가 도래한 시간대이다. 이를 위해서 변화의 걸림돌이 된 요순시대이래 쌓여온 '원'(寃)을 증산이 풀어놓았다(解寃). 이처럼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어느 종교의 출발점에 못지 않게 보이는 조직적인 교리체계를 내놓았다. 이를 믿고 안 믿고는 신앙 차원에 속한다. 후천개벽은 증산에 앞서서 최수운이 이미 사용했었던 용어이다. 이는 다시 증산 뒤에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에 의해서도 중시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대각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나섰다. 이 세 종교와 대종교가 근대 민족종교의 대종을 이룬다. 이 근대 정신사를 거르고 외래사상에만 물들어 있는 현대한국인에게는 큰 간격이 생기는 셈이 된다. 고래로 연속된 한국정신의 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원효, 류영모, 함석헌 할 것 없이 그 독특하게 보이는 열린 생각들도 그 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상생이란 말은 재벌 총수, 야당총재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외치게 될 정도로 상식이 되었다. 그 말의 종교적 연원까지 알고 말했더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명실상부하지 않게 들리는 빈말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2.2 불교 연기론
같이 살기의 근거는 불교의 연기(緣起)론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가 깨친 진리는 사성제(四聖諦)로 정리되었다. 사성제는 모든 삶이 고통이다(一切皆苦)는 명제와 그 원인이 욕심에 있음과 해탈열반의 길을 제시한 체계이다. 이와 함께 진리는 다시 무아(無我), 중도(中道), 연기로 표현된다. '무아'를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용수가 '공'(空)으로 다시 해석했다. 세 가지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일상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 ‘없다’(無)로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행주의와 탐닉주의가 올바른 수행방법이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중도의 길이 제시된다. 참다운 실체가 ‘나’(Atman)도 아니고 이분법(有無)으로 말할 수 없고 대신에 다만 연기의 법칙으로만 말할 수 있다.‘나’라는 실체는 업고 다만 연기의 과정만 있다. 연기는 윤회의 법칙으로 대표된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늙고 병드는(老死) 단계를 역으로 추적하면 태어남(生)이 있고 끝에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가 근본원인이라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면 윤회를 헤어나지 못한다. 연기를 일반화하면 모든 것이 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독립적인 실체(自性)가 없다. '나'라고 하는 것도 실체가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나와 너의 관계도 그렇다. 나는 너를 전제로 한다. 말 자체로도 그렇지 않은가.‘너’가 없다면‘나’를 말할 수 없다. 연기는 중도처럼 유무 이분법으로 분별할 수 없는 범주(境界)에 속한다. 그래서 연기가 곧 중도라고 한다. "씨 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는 함석헌의 말은 연기와 중도가 내포되어 있는 공(空) 사상에서 말하는 두 가지 영역, 곧 세속적 차원(俗諦)과 초월적 차원(眞諦)을 각각 가리키고 있다. 인간이란 말도 너와 나의 사이(間)를 뜻한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사이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같이 살 수 밖에 없다는 뜻이 아닌가. 연기는 다시 중국불교에 와서 새로운 해석을 얻게 되었다. 7세기 중국에서 화엄경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 교학의 극치인 화엄사상이 수립되었다. 신라에서 의상 대사가 가서 직접 배우고 돌아와서 화엄사, 해인사 등 10개의 사찰(화엄십찰)을 창설하였다. 화엄교학은 지금은 선종인 조계종에 수용되었다. 화엄은 특히 연기론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한다. 현상세계(事法界)와 본체계(理法界)를 설정하고 둘 사이의 유기적 일치(理事無 ) 그리고 현상간의 동일성(事事無 )을 본질로 한 법계까지 네 법계를 내세운다. 이사무애법계는 현상(상대)과 본체(절대) 사이, 세속(생사)과 열반 사이, 말하자면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 양자 사이에 간격이 없음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요청한다 할까, 전제로 한다 할까, 유기적으로 얽혀있음을 나타낸다. 나아가서 사사무애법계는 현상 상호간에, 만물 상호간, 즉 너 나가 유기적으로 뗄 수 없이 서로 겹겹이 연대있음을 가리킨다. 화엄철학 특히 이 법계관은 인간현상,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동서철학을 통틀어 가히 백미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는 비유를 들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화엄의 체계를 세운 법장(法藏)은 측천무후에게 『화엄경』을 해설하면서 금사자상을 비유로 들었다. 금이 이(理)의 경계(법계)를 가리키고 사자가 사(事) 법계를 상징한다. 금과 사자는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자체의 형태를 갖지 않고 현상(事)의 형태를 취한다. 모든 현상은 본체(理)의 나타남이다.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 본체는 하나(一)로, 현상은 여럿(多)으로 표현된다면, 하나가 여럿이고 (一卽多) 여럿이 하나이다(多卽一). 금과 사자형상의 관계는‘이사무애법계’를 상징한다. 다른 차원에서 사자 전체와 신체부위와의 관계가 설명된다. 사자의 각종 신체기관이 금을 매개로 하여 사자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어떤 한 기관이 다른 어떤 기관과도 동일시되어진다. 눈, 코, 입 같은 기관 하나 하나에는 금사자 전체가 들어있는 셈이다. 머리카락 하나에도 온 사자가 들어있다. 풀뿌리 하나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음으로 존중해야하는 생명관이 여기서 나온다. 하나 하나의 개체 현상은 다른 하나 하나의 현상을 껴안고 있다. 이것은‘사사무애법계’를 나타낸다. 이것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하여 법장은 일종의 설치 미술을 동원했다. 그는 열 개의 거울을 법당에서 시방(十方), 즉 동서남북 사방, 사유와 위 아래에 배치했다. 중앙에는 불상 하나를 놓고 큰 횃불로 비치게 했다. 그랬더니 거울 속에 비친 불상 만이 아니고 거울 속에 나타난 불상이 또 다른 모든 거울에 비치고 있는 것이 보여졌다. 이중삼중으로 불상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는 다면체 보석 묶음인 인드라 망(因陀羅網 Indra's net)에 겹치고 겹쳐 나타나는 형상과 같았다. 이렇듯 이 비유는 현상들이 연기적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다중적이고 복합적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얽혀있는가를 말한다. 너와 나는 상호 동일시(相卽)되고 상호 침투(相入)된 관계라고 한다. 너는 나요, 나는 '너'가 된다. 너 속에‘너’가, 나 속에‘너’가 들어 있다. 화엄사상이 기반을 둔 공 사상에서도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원리가 들어있다. 이 사상들이 나보다 남의 구원을 앞세우는 보살의 정신을 뒷받침한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사랑'의 덕목도 화엄사상과 보살정신의 배경에 비추어본다면 지금은 많이 잃어진 참 뜻을 들어낼 수 있을 것이 아닐까. 한국인은 어쩌면 이러한 사유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는 사랑, 부활 같은 개념의 완전한 이해와 실천 이르기 힘들지 모른다. 여기에 외래종교의 토착화 문제가 있다. 불교가 원효를 통과하여 토착화하고 더 보편화하였듯이 기독교도 류영모나 함석헌 같은 용기 있는 선각자를 통해서 토착화, 보편화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제도화한 보수파 교회에서는 저항하고 있다. 화엄사상의 맥락에서 함석헌이 말한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라고 하고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고 한 말씀 속에서 다름 아닌 화엄사상을 읽을 수 있다. 놀라운 일치라고 할 만하다. 이런 생각은 함석헌이 크게 부각시킨 민중의 삶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주도 민요에 이런 노래가 있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 (후렴) 너냥 나냥 두리둥실 너냥,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여기서 새기고 싶은 것은 앞부분 일절 가사보다 후렴의 표현이다. 제주도 말의 뜻과 뉴앙스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너 나가 두리둥실 밤 낮 없이 어울러지는 참사랑의 낭만적 정경 속에 화엄 세계가 들어있는 듯하다. 함석헌은 "타자는 또 다른 자아"라고 한 칼릴 지브란의 말을 깊이 새기고 있다. 그는 "병신자식도 내 자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생각은 화엄적 연기관 같은 세계관이 아니고는 찾을 수 없다. 퍽 근대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을 개척한 프로이드도 정상인과 정신병자 사이의 차이는 아주 미미하다고 보고 정신병자도 우리의 형제라고 말했다. 이 점을 구조주의를 내세운 레비-스트라우스가 지적했다.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병리 현상인 구조적 부패도 이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다 한 배에 타고 있다. 모두 한 통속으로 부패해 있다. 총체적 부패라고 하지 않는가. 김일성, 박정희, 전두환이 우리와 다른 별개 인간이 아니다. 독재자들만을 미워할 수 없다. 우리 속에 그 씨가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같은 논리에서 남북분단은 민족의 정신분열의 상징이다. 함석헌이 내린 이러한 진단은 아직도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에게는 그 파장이 미치지 않는다. 이들은 민족공동체의 분열을 즐기고 있다. 차기집권을 보장받으러 미국에 간 야당총재가 남북화해를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만 남발하고 온 것도 이들의 합작이다. 남북의 화해와 분단극복은 가장 긴급한 같이 살기 운동의 목표로 남아있다.
3. 「·」의 철학
이렇듯이 상생사상과 화엄철학과 비슷한 함석헌의 전체론적인 사유방식은 '씨 ' 개념과 사상 속에 표상 되어 있다. '씨 ' 사상은 아직 화엄교학처럼 체계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완성되어야 할 과제이며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그러나 그 큰 테두리는 주어졌다. ' '을 풀어 함석헌은 "「ㅇ」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은 극소(極小) 혹은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것") ' ' 속에 '이사무애'의 이치가 들어있다. 인도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말하는 자아(Atman)와 초월적 실체(Brahman)의 통일, 즉 범아일여(梵我一如)의 틀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이 말에서 특히 어원적으로 주목할 요소는 아래 아 자(·)이다. 마치 한국 사상의 열쇠가 들어있는 글자처럼 보인다. 왜인가. 이 글자가 이분법적인 사고를 초월하는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자는 중성 모음으로서 아, 오, 우, 이, 으 등 어떤 모음 발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너 나의 문제이다. 아마 원래 ' '만 있었을 텐데 언제인가부터 나와 너로 갈리지 않았을까. 너 나는 발음이 갈리더라도 '내가'와 '네가'의 발음을 얼마나 확실히 분간할 수 있을까.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가 분명치 않은 것은 주어가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다른 언어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 나의 구분이 구태여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서로 너와‘나’가 어울려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래 아 자가 들어있던 또 다른 뚜렷한 경우는 ' '이다. 이 말이 몸과 맘으로 분화되었다. 엄격하게 사람이나 생명을 몸과 맘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길래 민족종교에서 영육병진(靈肉竝進) (증산교), 영육쌍전(靈肉雙全)(원불교)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닐까. 구조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물론 유식론과 유물론의 구별도 불필요할 터이다. 온 , 온 생명만 있을테니까. 또 하나의 예를 들면 ' '의 경우로, '남'과 '님'의 차이를 가져온다. 90년대초반 유행했던 노래중에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떼면 님이 되고, 다시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붙이면 남이 된다"는 가사가 있었다. 나중에는‘나 속에 너, 너 속에 나’라는 노래도 나왔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의 표출이 아닌가. 또한 '?鐸〈?'이라고 했다면 유일신(하나님)과 초월자(하느님)의 뜻을 다 지닌다. 최수운이 마주친 '한울님'을 '?阪〈?'으로 표현한다면 '씨알'과 접촉점을 갖는다. 함석헌은 이런 상태를 보존하고 싶어서‘알’이라 하지 않고 구태여‘ ’을 고집하였을 법하다. 은 얼로 될 수 있다. 얼은 몸과 마음보다는, 함석헌도 지적한 것처럼, 사람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이다. 언어학적, 사회학적으로 이 상태를‘원시미분’(原始未分)의 단계 현상으로 간주할 줄 모른다. 무속과 민족종교에서는‘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안식교 신도들은 채식을 중심한 식생활을 장려하면서 백미 대신에 현미를 먹는다. 현미가 주식이었다가 이조에 들어와서 백미로 정미하여‘이팝’(이조시대의 밥)을 주식으로 하면서부터 사색당쟁 같은 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게 들린다. 이와 비슷하게 아래 아를 없앤 시점부터 이분법적인 분별과 차별의식이 두드러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4. 맺는 말: 남은 과제 - 실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왜 같이 살아야 하느냐를 더 따지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식의 운동이 필요하다. 조직적인 대규모 운동이 아니고 작은 집단운동 형식이 바람직하다. 함석헌은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를 모두 배격했다. 전체가 같이 살아간다는 전체주의라고 천명했지만 그 실천은 작은 모임에서 되어야 한다. 정신적 종교운동이 된다. 모든 종교는 종파로 조직되기 이전에 하나의 운동으로 출발했다. 개인들이 따로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소수의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그룹으로 같이 모여 행동하면 조직의 부담 없이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 자기욕심 버리는 훈련을 해가야 한다. 자기변혁, 사회변혁을 위해서 '사상의 게릴라전'을 펴나가는 아슈람이 되어야 한다. 함석헌은 비폭력 운동을 “무슨 아슈람, 도장 없이 시작한 거 큰 잘못”이라고 후회하고 뒤늦게나마 『씨알의 소리』를 '사상의 게릴라전'하자고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사회구조는 책임소재가 불투명하다. 교육문제 하나만 봐도,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책임을 물어도 다른 데 책임을 전가한다. 작은 수가 모여 같이 의논하고 사회변혁의 길을 찾는 것이 대안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동체 훈련이 필요하다. 함석헌이 한 말을 들어보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동체 훈련 안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새 역사를 짓는 씨 노릇을 하려면 하나가 되기 전에 자기 부근의 가능한 한도 안에서, 크게 욕심 부리지 말고 공동체 훈련을 해야 돼요. 사랑을 하는 것, 대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우리가 악을 대적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것을, 하기는 어렵지만 힘닿는 데까지 해요. 한 급우끼리, 한 가족으로, 또 다른 사람들하고 하면 더 좋고." (『끝나지 않은 강연』127) 이런 종류의 사회공동체 재조직 운동이 없이는 몇 년 가도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아파트 속에 갇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언제 질식할 지 모른다. 개인의 경쟁은 무자비하지만 소규모집단끼리의 경쟁은 인간적이다. 조직이 커질수록 폭력도구화하기 쉽다. 소규모집단은 폭력화할 수 없다. 한국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난 지역감정을 억지로 없애거나 무시하려하지 말고 지역자치를 기초로 한 연방형태로 가는 것이 장기적인 해결책이다. 또한 통일을 앞당기는 장치도 될 수 있다. 북한에서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단계 통일론의 중간단계가 아니고 항구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 형태로는 당면한 남북, 동서 갈등상태를 헤쳐가기 힘들다. 문화적으로도 지방문화의 발전 없이 서울문화만 발전해서는 한국문화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통일과 문화발전을 위해서 지방자치, 지방분권화가 가속되어야 한다. 최근 학계에서라도 이러한 운동이 일고있는 것은 다행이다. "권력도 문화도 분산되어야"된다는 것이 함석헌의 입장이다. 작은 것을 지향하는 것이 씨 정신에 맞다. 작은 나라가 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들어나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가장 잘사는 열 나라 가운데 미국, 일본만 빼고 대개 인구 1000만이 못되는 나라들이라고 한다. 유럽은 작은 나라일수록 높은 사회안정성과 삶의 질을 향유한다. 함선생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대국주의가 없어지려는 시대다. 실지로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비교적 실속 있게 행복스럽게 사는 나라는 결코 강대국들이 아니고 모두 자그마한 평화주의의 나라들이다." (전집 14-35) 함석헌은 소국과민이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대국주의가 세상을 망쳐 놓는다고 경고한다. (전집 4-340) 그는 미국 같은 큰 나라가 큰 일을 저지를 것을 걱정했다.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조직화된 이슬람도 국가주의와 관련되면 근본주의자로 변화하고 만다. 왜 일을 같이 도모해야 하는가. 함석헌은 "씨 은 선을 혼자서 하려하지 않습니다,"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야 한다," "유기적인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생겨야......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아니 된다"(전집 14-353), "공동체 살림의 훈련을 쌓아라" (전집 14-38) 등등 누누이 강조한다. 혼자서 지르는 소리보다 같이 모여 소리치는 것이 더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상에서도 불교의 참선이나 퀘이커의 "단체적 신비주의"(전집 15-357) 효과가 있다. “혼자서 하는 선”은 잘못하면 독선(獨善)주의로 빠지거나 위선(僞善)자가 되기 쉽다.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하기 위한 공동체로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태인가. '진리의 바통'을 받아서 같이 살기 운동을 펼치기는커녕 우리가, 내가 함석헌을 팔아먹고 살고있지나 않는지 스스로 짚어 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 씨 사상을 더욱 체계화하는 일도 해야하지만 병역거부 양심수 구제, 사형제도폐지, 보수족벌언론 비판 같은 문제에서부터 남북화해, 북한 돕기, 연변교포 돕기, 지역갈등, 환경, 평화 등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문제들을 경실련, 참여연대 같은 단체와는 다른 운동 차원에서 다루어 가는 것이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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