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김은주,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8
함석헌의 역사철학 1 김은주 |
<들어가는 말> "4천년을 넘어 이 고난을 겪으면서도 제 개성을 지키고 양심을 살려 독륵한 문루를 창조해 온 우리 속에는 분명히 영원히 키워 갈 만한 가치있는 무엇이 있다. 그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뿐 아니라 이 정신은 앞으로 오는 세계에 쓸 만한 데가 있다. " 「들사람 얼 」 ( 함석헌 선집 2권 p.45)
함석헌은 조선조 말엽 1901년에 출생하여 18세에 삼일 운동을 겪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함석헌은 민족의 평화와 민주, 통일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고 1989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즈음이라 그에 대한 역사적, 학문적 평가를 한다는 것이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후학들에 의해 그가 새롭게 평가되고 해석되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주체적 비판과 학문의 자세를 강조했던 그의 뜻에도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함석헌은 1963년에 쓴 "우리 민족의 이상"이라는 글에서 우리말로 할 수 없는 종교, 철학, 예술, 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 두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고 공작의 깃과 같은 남의 것을 갖을 불여서는 우리 것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우리 생활에서 나오는 학문적 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체적 자세는그의 삶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온 격동의 세월은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시기였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체적 수용이 필요한 시기였다. 주체적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보며 그는 안타 까웠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출생 이전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대략적으로 알아보고, 그의 역사 철학 형성기라 볼 수 있는 청년기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아 그가 부딪치며 부등켜안고 살아간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함석헌 역사관의 주요한 개념인 고난 사관을 정리하여 그는 왜 우리 역사를 수난과 시련이 점철된 고난의 역사라 했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한국 역사 속에서 고난 사관이 드러나는 구체적 예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고난이 주는 사명과 뜻의 의미를 조명할 것이다. 함석헌은 이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힘을 씨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고 씨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씨알은 전체로서의 역사를 인식한 민중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전채의식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는 현대에 어떻게 반영되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마지막으로 한국 민족의 고유한 저력과 근본적 품성을 밝혀 이를 부활,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다시 새기는 것으로 맺으려 한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의 목적은 함석헌의 다양한 사상의 지류 중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추적해서 그것의 사상적 근원을 캐는 것이다. 고난 사관을 통한 우리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들어 나갔던 우리 씨알의 품성을 찾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의식을 찾아보려 한다.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념의 대립으로 갈라졌던 민족은 휴전의 상태로 분단이 고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과 북의 동포들은 이산 가족의 아픔을 간직한 체 살고 있으며, 계속되는 분단의 세월은 동질성을 차츰 잃어 가는 민족 최악의 불행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의 숙제가 하루 빨리 종결되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
함석헌의 역사 해석의 결정적인 틀 거리인 고난 사관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이를 극복할 지혜로운 안목을 제시하리라 믿는다.
<몸 말>
1. 조선 후기 사상의 조류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당쟁이 수준 높은 논쟁의 정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옥자에 의하면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주(主)전공으로 한 사림(士林)이 관료가 되어 정치를 한 사대부(士大夫) 주도의 사회로 이 학자 관료들은 성리학적 이념을 정치 현장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전기에 귀족화하는 훈구(勳舊)세력의 대체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들은 1592년 임진란 이후 정권을 장악한다. 이들은 학문적 성격의 차이로 정파를 달리하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정견에 기초한 붕당 정지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나 사상도 일정 기간의 역사적 역할이 끝나면 폐단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양당 정치 형태의 기능을 하던 붕당 정치도 17세기 이후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면 '당쟁'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김덕일에 의하면 당쟁이란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일본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조선 강점이 있은 후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 경성제대의 교수들과 한국사 비하 작업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용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내부의 당쟁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정당하다는 의식을 유포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대 이전에 조선에 붕당(Party)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체제가 발달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 당쟁이 없었던 것은 그 사회 자체가 주의와 이념을 가진 정당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칼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설혹 정당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무사정권을 옹호하는 일당독재였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소수의 명문 대가들이 독점하는 정치 체제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나라의 기운을 좀먹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정치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중국을 근원지로 발생하였고 동아시아에서 중국, 한국, 일본, 배트남 등등의 많은 나라들이 주자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처럼 주리철학(主理晳學)이 우세하게 맹위를 떨친 나라는 없었다. 퇴계 이황이 일본에 주자학을 전해 준 원조이지만 일본도 주자학을 받아들여 주기철학(主氣哲學)중심으로 발전시켰다. 바로 실사구시의 학풍을 중시하는 것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명치유신의 이념이 되었다. 명치유신 이래로 일본의 개항과 개혁을 주도해 근대 국가 형성의 사상적 원동력이 된 것이 바로 주자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주자학은 종주국인 중국보다 더 보수적이고 관념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민생안정과 국방강화에는 별 큰심 없이 논쟁만을 일삼던 관료들에 의해 조선의 국운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고난 사관 형성의 시발점
함석헌은 나라가 당파 싸움에 휘말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조선 말기,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불사르던 1901년에 평안북도에 태어났다. 함석헌 개인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는 우연히도 같은 시기에 시작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역사 위에 민족의 역사를 부등켜 안음으로써 온몸으로 근현대사를 살아 나갔다. 함석헌은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려고 관립 평양 보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고보 3학년 때에 삼일운동을 겪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결정적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는 최초의 민족적 저항인 삼일 운동을 목도하고 일제가 운영하는 관립 보고의 학업을 포기하였다. 이후 그는 오산 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때 오산학교 설립자였던 남강 이승훈과 교사였던 다석 유영모를 만나고 그들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함석헌에게 인간의 자각이 얼마나 큰일인가를 보여준다. 이승훈은 본래 상민 출신으로 신분상승의 야욕을 갖고 죽도록 일을 하여 재산을 모은다. 그 재산으로 관직을 사서 양반이 될 정도로 그의 신분상승의 욕구는 높았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욕망은 도산 안창호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듣고 난 후 민족 독립의 사명감으로 변하였다. 그는 안창호의 인격과 신념에 탄복하여 그의 모든 재산을 교육 운동에 헌납하면서 교육 운동가로 변모한다. 그가 세운 학교가 청산맹호식의 민중정신, 자립자존의 민족정신, 그리고 참과 사랑의 기독 정신을 이념으로 하는 오산학교였다. 남강 이승훈 이후 교장으로 취임한 다석 유영모는 노자, 장자를 통달하고 동양사상에 밝지만 한편으로 정통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함석헌이 기억하는 유영모선생은 성직자와 같이 청렴하고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신과목의 교사로서 노자, 채근담과 같은 교재로 수업을 하였는데 함석헌은 그에게서 생명, 인생 등의 말을 처음 들었다고 한다. 오산 학교를 졸업한 이후 함석헌은 이승훈과 유영모의 추천으로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여러 방면의 관심을 접고 사범대학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그때 내 생각으로 우리 나라 형편에 그게 급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만세 이후 민중은 부쩍 깨기 시작했으므로 교육열이 높았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육열보다 훨씬 참된 것이었다. 또 한편 다가오는 일본의 자본주의 압박 앞에 이러다가는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을 뿐 아니라 민족적으로 온통 망해 버린다는 불안이 사회에 넘치는 때였다. 그러므로 교육이 가장 급하다는 생각으로 사범 길을 택했다. 」
1924년 동경 유학 길에 오른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모임에 들어가 성경 공부도 하고 관등 대지진과 같은 큰일도 겪으면서 사범대를 졸업한다. 조선에 돌아온 함석헌은 김교신이 주축이 된 "성서조선"이라는 동인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또한 이 글은 그가 오산 학교에서 10년간의 역사 교사로 있는 동안에 역사 교재로도 쓰인다. 이 동인지로 인해 함석헌은 첫 옥살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왜 기독인들이 독립이나 교육 운동에 앞장섰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나 기독교의 유입은 좀 독특한 부분이 있다.선교사들의 포교에 앞서 자발적으로 기독교와 그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독역사틀 볼 때 특이한 점은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에 앞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전도에 힘썼다는 점이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오기도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선교사들과 어울리면서 성서 번역을 도와주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활동을 벌여 왔다. 이 점은 조선 유학이나 불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반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반도에 천주교나 기독교의 유입이 조선 전통사회인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세계종교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며, 획기적인 일이었다. 동양 삼국이 개신교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이었다. 1884년 알렌(H. N. Allen)이 최초로 이 땅에 들어 왔지만 이미 8년 전에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이미 예배처를 마련하여 선교사의 방문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의 북부지역은 세계예서 가장 성공한 선교지역으로 널리 주목받고 있었는데 이는 사람 수의 많음 뿐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결과 때문이었다.
이런 주체적 종교 수용의 자세는 그만큼 민중이 정신적 안정과 평화를 줄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평등 정신이 양반 상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이는 민족의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 들의 백합 한 송이도 뜻 없이 만들지 않고 내 버려두지 않는다는 성경의 교훈은 일본과 똑같이 동등한 존재로서의 한민족을 생각하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 우리 민족이나 일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한 민족이라는 자각은 자연 독립의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는 신학문의 세례를 먼저 받은 유학생들이나 북쪽 지역 사람들에게 먼저 파고든다. 결론적으로 신학문을 접한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믿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민족의 독립과 교육 계몽에 힘쓰게 되는 연관을 갖게 된다.
함석헌이 태어난 평안도는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거리가 먼 이유로 중앙 정부로부터 관리들의 간섭이 적으며 천민, 상민, 양반의 구분이 없는 평등의 기류가 강한 지역적 특수성이 있었다. 이런 지역적 특성으로 종교의 유입은 타 지역보다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함석헌도 집안의 식자층에 속하는 삼촌 함일형의 도움으로 어려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동경 유학 때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모임에 나가면서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교회의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려는 경향을 비판하었다. 「1930년대 한국의 기독교적 분위기는 여러 부흥사틀이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며 열과 성을 다해 집회를 열어 신앙 부흥의 열기가 높았던 때였다. 이런 때에 함석헌은 진정한 예수, 참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나 헌신은 어떤 형태의 형식주의도 필요하지 않다고 과감히 외쳤다. 」
이런 그의 비판적 자세는 기성 교회의 반감을 사게 되고 그를 기독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 사관으로 똘똘뭉쳐 있는 사상가였다. 그의 고난 사관의 출발 역시 성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고향의 특수한 사회적 기류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역사와 종교, 교육에 대한 진보적인 사상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그는 역사에 대한 사색으로 우리 역사에 흐르는 뜻과 의미를 밝혀 이를 고난이라고 이름짓는다.
Ⅱ 고난 사관의 기조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사실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과거의 역사가 현재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이해나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전체적으로 흐르는 역사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며 골라진 사실이며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 산 관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실이란 내 주관과 따로 서서 객관적으로 뚜렷이 있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에는 주관의 랜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 사실은 결국 사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해석된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골라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 역사란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하게 된다.」 역사라는 말은 그 자체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통해 해석되어지고 의미 부여가 이루어진 사실들이 바로 역사이다. 또한 역사는 당대의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일관되게 흐르는 그 뜻을 찾아내야만 한다.
헤겔은 「세계사의 철학 강의」 라는 책에서 역사 연구의 방법을 근원적 역사, 반성적 역사, 철학적 역사로 나눈다. 함석헌의 방법은 둘째, 셋째의 방법에 가깝다. 근원적 역사 연구는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이나 상태, 들은 보고(報告)를 서술한 것으로 당대의 시대 정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성적 역사 연구는 역사의 사실을 시간의 순서에 의해 서술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시대를 떠나서 서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에 의해 역사 연구가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 속에서 현재나 미래에 필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마지막 철학적 역사에서 역사를 철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역사를 사상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역사 연구에 들어가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인다. 그래서 헤겔의 사관을 정신사관이라고 한다. 헤겔은 물질의 본질은 중량이고 정신의 본질은 자유라고 하였다. 헤겔은 세계사에서 실채적인 것, 즉 정신을 인식하는 것이 세계사의 철학, 역사 철학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헤겔의 정신 사관과 함석헌의 사관은 매우 흡사하다.
함석헌은 그 일관을 "정신"에서 찾는다. "정신"의 나타냄을 역사라고 본 함석헌은 우리 역사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의 맥을 찾고자 노력한다. 헤겔 역시 정신의 다른 이름인 이성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그 속의 통일된 맥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역사에서 이성적인 것을 인식하려면 감성적, 육안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성의 눈, 심안(心限)을 가지고 사실을 보아야 한다 역사 철학의 관점은 개별적 상황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상을 다루는 것이다. 이 보편적 관점은 우연적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수한 특수를 통일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와 같이 헤겔의 이성과 함석헌의 정신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함석헌은 우리 역사에서 내포된 정신을 찾는 것은 씨알의 요구라고 한다. 「역사는 단순히 발생하는 것, 되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도 이루어 서는 것, 건설되는 것,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신의 나타냄이다. 역사가 되어지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살았노라는 의식을 가지는 민족에 의해서다. 」 살겠다고 하는 의욕을 가진 민족의 실체인 씨알은 뜻으로 펼쳐 보이는 역사를 원한다. 왜 씨알은 풀이가 된 역사를 원하는가? 씨알은 무식하고 글자를 몰라 문헌으로 된 역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삼국사기", "동국통감", "고려사" 등 이조의 모든 낡은 역사책을 불사르고 싶어한다. 이를 불사르고도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민중의 역사다. 민중온 무식하기 때문에 붓과 덕으로 쓰지 않고 피와 땀으로 쓴 역사를 석실(石室)이 아닌 육실(肉室)에, 골실에, 탑의 지성소에 감추고 지켜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신과 물질, 씨알과 권력의 싸움이 제자리를 겉도는 듯이 보이고, 때로는 옳은 것보다 그른 것이 활개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수레바퀴가 제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나사못이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역사는 역시 자라고 발전하며 진보로 나아간다는 것을 수 천 년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
서양에서 역사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볼테르는 1756년 「일반사 및 제민족의 풍습과 정신」 이라는 책에서 '진보' 라는 것은 '인간성의 자연스런 발휘' , 다시 말해서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 세계의 발전'이라고 하였다. 이런 진보의 이념이 서양에서 대두된 것은 역사 연구의 발전 덕분이었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18세기 역사 과학의 성장은 17세기 물리학의 성장보다 놀랍고 영향력 있는 것이었다. 역사 연구의 결실이 맺어지고 전체적인 역사가 눈앞에 드러나자 놀라운 발견이 일어났다. 역사는 줄거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시종일관하여 중요한 지적인 무엇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더 나은 것으로의 발전인 진보라는 것이었다. 19세기에 와서 진보의 이념은 더욱 유행하게 된다.
함석헌의 진보는 혁명적 변화를 수반한다. 이것은 수레바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된다. 수레바퀴는 본 괘도를 따라 움직인다. 이때 바퀴는 괘도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레바퀴가 잘못 돌고 있을 때는 혁명이 필요하다. 이 바퀴는 축과 체와 살로 이루어졌고 축은 정신적 지향인 신에 비유될 수 있으며, 체는 국민정신으로 하나된 민중, 살은 이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이 바퀴는 그룻된 사회적 제도, 틀거리를 갈아엎고 잘라 버리고 옮은 것으로 인도한다. 이는 바로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혁명은 폭발하는 국민감정, 즉 민중의 정의감에 불타는 노염이다. 민중이 노해야 역사의 전진이 있는 것이다. 한번 크게 노염을 내야 한다. 스스로 자신에게 노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노염 없이는 안 된다. 민중이 노하지 않고는 전진하는 역사가 없다. 어디를 향한 전진인가. 그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 역사가 인간의 행복과 선의 증가를 가저왔다면 그것은 진보한 것이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소수만이 자유롭게 살았으나 현재 자유의 폭은 대다수에게 확대되었다.
결국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찾는 과정이고 역사 연구는 과거 사람들의 행위를 연구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 연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교훈을 발견하고 과거사를 '현재의 거울'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 대한 인식이 확보된 것도 인간 이성의 발전 덕분이었다. 과거시대의 과학과 이성의 수준에서는 역사는 단지 반복되는 변덕의 과정일 뿐이었으나 과학과 이성의 발전으로 역사는 줄거리를 찾고 그 관통하는 맥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더 나은 것으로의 발전을 원하고 이는 진보라는 이름을 가진다.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이성의 힘에 의한 합리적인 발전이 진보다.
2. 고난과 진보
함석헌의 역사 해석의 대표적 관점은 고난사관이다. 기독교인인 함석헌의 성서적 관점이 반영된 이 사관은 6,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의 사회적 현실을 바라보고 은유 하는 각도에서 많이 응용된다. 유신 시대를 겪은이들에게 고난은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고통과 시련이 단지 아픔만이 연속되는 운명적인 것이라면 희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희망의 내일을 위한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대를 버티어 나갈 힘으로 믿고 의지한 것이다.
왜 함석헌은 우리 역사를 고난이라고 했는가? 함석헌은 동경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1928년부터 근 10년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역사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의 자세나 역사에 대한 관점이 우치무라 간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반성한다. 그래서 그는 우치무라의 책을 인용하고 참고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주제적 생각을 갖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성경의 십자가의 원리를 우리 민족에 적응해 보게 된다 함석헌은 「고난의 메시아가 만일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가 될 수는 어찌 없겠느냐?J 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살피기 시작하자 길이 보인 것이다. 그는 이런 주체적 학문의 자세로 민족의 뿌리를 찾고, 역사 해석의 틀을 창조해 냄으로써 역사 교사로서의 사명에도 충실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역사의 사건마다 전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고, 고난이라는 견지에서 역사의 모든 사건을 해석해 보았다. 이것이 이후 고난사관으로 정리된 것이다. 「나는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이름지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우리 역사와 같이 천재지변, 고역, 질병, 압박과 착취, 내란과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는 역사는 또 없는데 거기서도 내버리지 않고 일관하는 어떤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
누구나 시종일관하는 역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반성적으로 살피고 오늘에 미치는 영향과 과거의 사건을 교훈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근간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 역사의 맥락을 고난이라는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고, 이 고난의 역사가 우리 한국에만 특수하게 적응되는 개념이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사에도 적응되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세계 역사에 큰 변화를 준 인물도 사상도 없는 아주 작은 민족임을 시인해야 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압박이요, 부끄러음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왜소하던 역사 속에 진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에서 얻은 믿음이었다.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서계 역사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태꼇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영광의 면류관이 있는 진보와 자유의 세계이다. 수많은 시련의 가시 덩굴 속에 인류는 부단히 피 흗리며 진보와 자유를 향해 전진한다. 일례로 우리가 영위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는 과거 인류의 역사가 검증해낸 최고의 정치 제도이다. 「예를 들어 현대 우리의 정지제도는 원시인이나 고대 그리스, 중세, 심지어 18C인들에개도 부적
Ⅲ. 고난사로 본 한국 역사의 개괄적 전개 과정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한국인으로서 한국 역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태어나기 전의 역사와 살아가고 있는 역사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역사까지도 우리와 깊은 관계에 있다. 이런 역사적 존제로서의 인간은 역사적 전통의 맥락에서 그 전통을 발전시켜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강한 전통을 가지려면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주체화가 필요하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깊이 파고 연구해서 자기의 것으로 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주제적인 힘을 길러 나갈 수 있다. 이 주체적 힘이 바로 경쟁력이며 미래를 향해 전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무심하다. 우리의 뿌리에 대해 근원을 캐고 현대에 일어나는 모순의 본질을 역사에 묻는 의식과 노력이 부족하다. 또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왕조나 인물중심의 영웅 사관으로 역사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심어 주기에 부족하다.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고대사와 중세, 근대 조선만을 중점적으로 다룰 뿐 현대사의 격동적 시기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역사가 주는 사명이나 재해석의 기회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제한되고 선택적으로 학습되어질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 역사관이나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은 빈약하고 역사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현상까지 빚고 있다. 이런 빈약한 역사의식이 헝성된 것은 급변하는 현대사에서 그 원인을 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 시작의 단계였던 즉 함석헌이 역사를 가르치고 깨닫는 그 시기는 오히려 지금보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역사 해석과 역사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새로운 한국 역사 해석은 민족 독립의 의지를 키워 가던 학생들의 역사관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새로이 해석하는 고난사의 기조로 한국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1. 고난이 주는 뜻
함석헌의 고난 사관은 종교적 측면에서 기독 사관의 범주에 속한다. 「기독 사관은 역사의 순환을 거부하고 종국점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이 역사에 직접 관여하는 것으로 이 역사는 순환되지 않는 단선적이고 일직선(straight line)적인 것이며 그 종국은 하나님이 계획한 종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통치하며 변함없이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이 역사는 아지막에는 승리의 종국을 맞이한다는 것이 기독 사관의 핵심이다. 」
함석헌의 사관 역시 우리 고난의 민족사가 결국에는 세계사의 주역으로 나설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안고 있다. 이것은 함석헌이 우리 5친년의 역사 속에서 뜻을 찾는 과정에서 얻게 된 깊은 샘 속의 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뜻이란 무엇인가? 「뜻이란 무엇인가? 여럿인 가운데서 될수록 번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 」 우리 역사의 어지러운 사건과 고난에서 변하지 않고 있는 그 하나를 찾는 것이 뜻이다. 이 뜻으로 역사를 살펴 고난을 찾아냈다. 그러면 고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난은 죄를 씻게 하고 인생을 깊게 만든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 위대한 성격이 형성되기 위해 우리는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나 위대한 성격이 되는 과정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겪어 내면 고난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고난의 그 순간에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예수가 인류의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의 면류관을 쓴 것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해 고난을 받는 것이다. 예수 역시 십자가의 그 순간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 이 잔을 내게서 치울 수 있다면 치워달라고 애원했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죄가 무슨 죄냐? 나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우리의 평면적 인생관을 고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기 위하여, 고식주의를 깨치기 위하여, 은둔주의를 벗기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고난이라도 받아야 한다」 죄가 누구 한 사람의 죄가 아니다. 죄는 그 죄를 짓는 당사자를 포함한 그 무리, 사회 전체의 죄인 것이다. 「죄는 단일범이 아니다. 모든 죄는 다 공범이다. 죄는 내 죄, 네 죄가 아니다. 우리의 죄,인간의 죄, 전체의 죄이다. 죄는 종족적인 존재요, 역사적인 존재다. 」 이 죄를 벗는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할 일이다.
그래서 종국에 이 죄의 대가인 고난을 통해 이르러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생명의 한단 더 높은 진화를 가져올 새 종교다. 세종이 찬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 뒤를 이은 연산군의 횡포가 나온 것은 자신을 깊이 찾는 종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새 종교가 있어야 고난은 새 지평을 맞게 된다. 이 새 종교는 어떤 특정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열 만한 정신적 기둥을 말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하나님 역시 기독교의 하나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범준를 넓히고 있다. 「하나님도 하느님인지, 하누님인지, 한울림인지 알 수 없다. 어쨌건 하나님, 곧 한님은 절대 하나면서 절대 큰이라는 사상만은 틀림없다. 」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 종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종교가 아니라 전체 국민이 가질 수 있는 믿음과 신뢰의 정신적 무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적 깊이가 있어서 만이 새로운 운명의 개척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새로운 믿음의 풍조가 형성되면 역사가 준 고난의 사명을 다하고 새로운 사명이 나올 것이다. 이 사명의 주체는 민중이다. 민중은 고난의 한가운데 있었고 앞으로 올 새 종교의 주인이기도 하다. 스스로 주인 되는 자주성과 자기희생적 생명력. 주체적 사유함을 생명으로 하는 씨알의 본질은 고난과 역경의 세월 속에서 변질되고 만다. 이 왜곡되어진 민중의 본질이 재현될 날을 기대하며 고난의 한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2. 기록이 부실한 우리 역사
우선 함석헌이 한국 역사를 가르치려 하니 기록과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적 문화 자체가 농경 문화로 유적 유물과 같은 문화적 유산의 영구 보존이 용이하지 않은 점도 있고 전쟁 등의 외부적 영향으로 소실되어진 문헌과 자료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왕조가 바뀌거나 왕이 바뀔 때 전대(前代)의 역사와 기록을 보존하는 것을 우선시 한 것이 아니라 앞 세대의 역사와 문화를 바꾸고 없애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록이 없어 한국 역사의 뿌리나 과정을 밝히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기록이 부실한 한국 역사는 함석헌에 의해 고난의 역사라고 이름지어 진다.우리 역사를 수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고난이라고 할 때 그 원인의 절반은 우리 국토의 위치와 지세, 기후에 그 원인이 있다. 「위치를 보면 서쪽, 북쪽, 동쪽에 중국, 만주, 일본이 둘러싸고 있어 억센 실력을 갖지 못하면 수난의 골목, 압박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 애초에는 북 만주 일대가 조상들의 터전이었으니 고난의 시련에서 벗어 날 수도 있었다. 만주를 지켜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지형 뿐 아니라 민족 문화를 결정하는 기후에 있어서도 북을 잃어버렸으니 대륙적인 것은 없고 대체로 온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기후마저 특징도 없고 지르르한 맛이 없으니 그만 뜻뜨미지근한 성격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경치마저 한 점 살벌한 기상을 머금은 곳이 없다. 그러니 평화롭기는 하지만 패기 하나 없고 씩씩한 기상이 적은 것이 한이다. 」 이렇듯 반도는 함께 있어야 할 만주 평원이 떨어져 나감으로 수난의 땅이 되었다. 지세가 주는 객관적 조건이 아니 받아도 될 수모와 고난을 받게 했다. 함석헌은 만주문제를 현대사에 와서도 끝까지 고민한다. 만주문제를 풀어야 새나라 건설의 기틀을 다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상의 땅이었던 만주를 잃게 된 것은 우리의 객관적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조건, 의지의 문제도 컸다. 아무리 지리적 조건과 기후 등의 환경적 요인이 역사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고 역사의 주인은 결국 사람이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역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세로 운명을 개척하는 의지에 의해, 정신의 힘에 의해 역사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일관된 역사관은 주체적 의식, 정신을 중요하게 보며 객관적 조건은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정신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요, 승리의 역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있다. 그 고난의 시발점을 찾아가 보자.
3. 신라의 통일
우리 민족이 북방의 기상을 잃고 수난을 받게 되는 비극의 시작은 고구려의 패망과 신라의 삼국 통일부터이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강성하여 통일 사업을 이룰 듯이 보이더니 중국의 압박이 심하여지고 신라가 점차 강해짐에 따라 삼국관계는 점점 복잡하여졌다. 서로 동맹을 맺어 한편을 대적하였다가는 그 동맹관계가 깨지고 또 서로 다른 동맹을 맺어 국토 확장전을 벌이던 중 신라는 염치없이 당나라를 끌어 들여 고구려를 앞뒤로 공격하였다. 」 이리하여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였으나 이는 참된 통일이 아니었다. 「이는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 이 때문에 나라 땅의 대부분은 잃어지고 겨우 일부분만이 남아서 한국을 대표하게 되었고 사람과 민족의 아름다운 것이 많이 없어지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남게 되었다. 」
고구려의 혼은 민족혼이었다. 북만주에 펼치던 그들의 기상을 잃고 이 민족은 등뼈가 휘기 실작했다. 함석헌은 고구려의 속절없는 최후와 보잘 것 없는 신라의 민족 통일을 생각하면 5천년 역사상에서 가장 쓰린 일이라고 한다. 역사를 읽을 때 고구려의 실패에 이르면 책장을 찢어 버리고 싶고 주먹으로 땅을 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구냐고 반문한다. 그는 신라의 통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우리 민족의 가장 나쁜 버릇인 파쟁, 지방색도 삼국이 그 역사적 과제를 옳게 치르지 못한 데 있다고 한다.
경주에 남아 있는 통일 신라의 유적이 보배로운 것은 인정하지만 이런 역사의 뒤안길을 알고 나면 신라의 삼국 통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현대의 관점에서 수 천 년 전의 상황과 요구를 모두 제단할 수는 없지만 신라의 통일은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로 좌절된 이 반도이지만 이 반도에는 그래도 뜻이 있다. 「역사는 뜻 없이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을 잘못하더라도역사가 무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다시 힘쓸 의무가 남아 있다‥‥‥‥ 잘하고 이긴 자는 미래가 도리어 없을지 몰라도 잘못하고 진자야말로 미래의 주인이다. 」 함석헌의 역사관이 얼마나 낙천인지 알 수 있다. 잘못했기 때문에 도전의 미래가 있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이 관점은 고난 사관의 헥심적인 주장이다. 이 고난 논리의 전제 조건은 역사에 고난이 있다는 것이고 이 고난은 고난으로 끌나는 절망이 아니라 도전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미래에 바로 뜻이 있다. 이 고난의 종착역은 진보라는 희망이다. 삼국통일이 진정한 민족통일도 못되고 민족의 역사를 시련의 긍지로 몰아넣은 사건이지만 실패하였기 때문에 개선과 도전의 가능성과 의무가 남아 있는 것이다. 「외무는 곧 하늘의 명령이다. 할 일을 명령하면서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리 없다. 문제를 내 놓는 역사는 또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뜻이라 해야 할까? 문제가 불거진 역사는 문제 해결의 기회를 준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을 보려면 통일 신라 이후로 천년의 역사를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4. 고려 시대
그 통일이 옳지 믓하였던 신라는 당 나라와의 외교적 노력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얻었으나 옛 고구려 땅의 절반도 차지하지 뭇하였다. 시작이 옳지 못하더니 그 패망은 통일 후 100년을 못 견디고 왔다.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구려의 후예를 다짐하던 우리 민족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나라를 다시 열었다. 만주로 가자는 국민의 여망으로 윤관은 북방의 여진족을 간도까지 몰아내고 만주에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북벌로 조상의 땅을 되찾으려는 윤관과 같은 진취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여진을 두려워해 압록강 이남에만 온순히 있자는 사대주의 보수파들도 있었다. 이들에 의해 윤관의 9성은 다시 여진에게 돌려지고 그후 묘청과 같은 이들의 북벌계획이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조정의 보수파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렇게 북벌론이 주저앉게 되자 국민적 이상은 사라지게 된다. 국민적 이상, 민족적 사명이 사라지자 민심은 흩어지고 나라는 내란의 소용들이에 휘말린다. 이렇게 북벌을 주장하던 무신들이 주저앉게 된 것은 중국에서 배워 온 문존 무비 (文尊武卑) 의 유학 사상의 산물이었다.
이렇듯 나라가 문치에 흐를 때 그 뒷면에 남는 것은 벡성들의 굶주림뿐이었다. 당대의 민중의 애환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는 글귀가 있다.「정부의 관리들은 몽고인처럼 머리를 깎고 옷을 입었다. 또한 원나라를 숭배하여 정부는 이에 소용없으니 원에 아예 합병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하는 벼슬아치까지 있었다」 고 한다 고려 시대에 북방을 평정한 몽고, 즉 원나라는 우리 나라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심각하게 해 들어 왔다. 이에 대한 우리 관리들의 테도는 굴욕적이었다. 이는 800년 후의 일제 시대 친일 관료를 보는 듯하다. 황국신민이 되기를 마다 않고 민중들을 선동하여 오히려 일본 군국주의에 충성할 것을 독려했던 많은 지식인과 관료들이 있었던 것처럼 고려시대도 그랬던 것이다. 원 나라로부터 내정간섭을 끊고 내 나라, 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관리들이 원나라 사람처럼 입고 흉내내며 합병되기를 바랐다니 불행한 국민이요, 불행한 시대였다.
이런 고려에도 빛이 있었으니 그는 함석헌의 고려 역사 서술에 있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에 받은 도통 최영 장군이다. 최영이 이성계의 계략에 빠져 역사에서 퇴장하는 것을 두고 그는 한국 역사 4천년의 큰 탑이 와르르하고 무너졌다고 했다. 죽은 것은 최영이 아니라 한얼이라고 까지 했다. 그만큼 함석헌이 보기에는 최영 장군이 고려 역사를 바로잡아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책에 서려 있는 것이다. 마음을 곧으나 지혜가 적었고 뜻은 굳으나 기다릴 줄 몰랐던 최영은 꾀 많은 이성계에게 모략을 당하고 만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한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가된다.
최영의 용맹과 이성계의 지혜로 북벌의 힘찬 기상을 높였더라면 고려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성계는 「만일 상국(上國)의 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지어 나라와 백성에게 화가 당장 올 것이다. 」 라며 위화도 회군을 하게 된다. 상국의 지경을 범하면 화가 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 역사를 망각한 것이다. 상국의 지경은 선조를의 땅이요 이 민족외 발원지였는데 벌써 이를 잊어버린 것이다. 조상이 누구였는지를 잊고 왜출병하여 북벌을 하는지 그 역사적 대의를 잊고 백성들이 자신을 용맹한 장수라 칭송하니 그만 자신이 왕인 줄 알게 되었다 역사의 방향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 것은 이성계가 자신을 망각하고 역사의 방향을 곡해한 것에서 비롯된다. 주체성을 상실하고 전체를 망각하게 되면 역사는 종국에 가서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나 하나를 잃어버리면 모든 귀한 이, 어진 이의 말도 거짓이 될 뿐이다. 천하에 거짓을 해 가지고 나라가 될 리가 없다. 고려의 실패만 아니라 통히 우리 고난의 역사의 근본원인은 나를 깊이 파지 않은데 있다. 」 이 고려의 다하지 못한 책임, 즉 북방으로의 영토 확장과 민족주체성을 살려내지 못한 책임은 조선에 이어 계속된다. 나를 깊이 파지 않은 죄, 철저히 자기를 들여다보지 못한 죄의 대가는 고려 5백년, 조선 5백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쉬이 잊어버리는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는 깊이 파지 못하고 역사를 이끌어 온 선조의 길을 아직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함석헌은 「고구려, 백제의 마지막보다 신라의 마지막이 더 더럽고 신라의 마지막보다 고려의 그것이 더 더럽고 고려보다 이조는 더 더럽다. 이는 그 속에 있는 산 정신에 비례한 것이다. 」 라고 한다. 고려의 종말이 이성계의 쿠데타적 반란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면 이조의 종말은 우리가 그렇게 얕보았던 일본에게 정지적 실권을 내주고 종살이를 시작하는 치욕스런 것이었다. 그러니 갈수록 왕조의 종말이 추악하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5.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이(利)로써 왕권을 찬탈한 것은 그 뒤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의 난에서 바로 후과를 겪고 만다.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아들들이 왕권을 두고 사병들을 풀어 피를 흘렸으니 이 또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조선에도 성군이 있었으니 이는 왕위를 찬탈한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다. 조선의 몸뚱이를 만든 사람이 태조라면 혼을 불어넣은 사람은 세종이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 창제로 그때서야 비로소 이 땅 의 백성은 자신의 의사를 글로써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과 함께 한글 창제와 반포에 힘쓴 것으로 알고 있는 집현전의 학자들은 실제로는 한글과 같은 서민들의 글이 생기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어느 사회에서나 그렇지만 그들 권력자들은 중국 문화의 도매상을 함으로 유리한 지위를 얻었고 또 그 지위를 오래 가지고 있으려면 그 글과 문화를 오래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교육은 권력계급이 그 지위를 자기네 자손에게 전해 주는 수단으로 그들의 자제에 대한 해주는 것이지 일반 민중의 자식에게는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 학문 권장에 힘써야 할 학자들마저도 백성들을 읽고 쓸 줄 아는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은 것이다. 봉건 시대의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를 이와 같은 지배계층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씨알을 위하여 한글 창제를 이룩한 세종은 과연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이에 대해 함석헌은 세종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민중이 자신들의 글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마치 집을 지을 때 맨 아래 깔리는 토대와 같이 그저 압박 받는 것을 자기 존재의 뜻을 다하는 것으로 알았던 씨알이 이제 자기의 의미를 알아야 할때가 왔다. 」역사의 흐름도 이제 민중에게 글을 가르치고 깨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정치를 하려해도 민중이 글을 알아야 하는 때가 온 것이고 민중들 자신들도 의사 표현의 요구를 갖게 된 것이다. 객관적 상황과 주체적 요구가 이제 씨알로 하여금 자아를 찾고 자기를 표현하는 길을 찾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늦은 시기였다. 민족 5천년 역사에 겨우 5백년 전에 글자에 눈을 뜨고 소경의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었다.
「세종의 때를 이조의 황금시대라 한다. 국민이 처음으로 생활안정을 얻고 정음은 반포되고 유교로 정치의 표준을 꽉세우고 학문 연구의 풍이 서고 이리하여 장차 그 위에 큰 문화 건축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놓였다. 」그러나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세종의 죽음을 너무도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단명 하였고 조선의 황금시대를 연장하지 못한다. 문종의 뒤를 이은 왕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왕세손으로 책봉된 어린 단종이었다. 그러나 문종의 형제들 중에는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수양대군은 단종을 시기하여 왕권을 넘보게 된다. 이리하여 단종은 그의 삼촌인 수양 대군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한민족의 비애로 대표되는 수난의 상징이 된다.
문종이 살아 있었다면 문종의 오른팔 노릇을 했을 수양 대군이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자 역사는 다른 길로 가고 만다.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문종과는 친구처럼 지내던 집현전의 정인지, 신숙주, 최항의 우리가 앞서서 단종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단종을 노산군이라 강등하여 귀향을 보내 버리고 이도 부족하여 세조로 하여금 사약을 내릴 것을 종용한다. 단종이 죽기 전에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죽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사육신이다. 그런 사육신들의 죽음이나 단종의 죽음은 모두 함석헌 역사 해석에 있어 뜻이 있어서 된 일이다. 「육신의 사명은 처음부터 성공에 있지 않고 역시 죽는 데 있다. 그들은 죽기 위해 뽑힌 것이었다. 실패의 원인은 김질의 배반도 아니요, 세조의 흉악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의(義)'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있는 시대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육신과 같이 '의' 를 위하여 죽는 사람을 낸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들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의' 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단종을 수난의 대명사로 만든 것도 조물주의 뜻이었다. 「삼국 시대에서 실패하고 고려시대에 예산이 어긋났다고 판단한 조물주는 4천년 역사의 무너진 탑을 고쳐 세우는 지금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더 진실을 요구하였다. 문종이 일찍 돌아가고 단종이 나이 어려서 임금이 된 것은 이 토대의 굳은 도수가 얼마나 한가 시험하는 검사의 날을 받기 위해서 한 것이다. 」
이 검사의 역할을 한 것은 세조였다. 무자비하게 검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양은 그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 동안 세종이 쌓아 놓은 토대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까? 「세종은 집현전을 세우고 인재를 기르며 충의, 도덕을 가르쳐 나라의 기초를 세우려 하였다‥‥‥‥그러나 역사의 무너진 터를 깊이 파 제치고 자아의 밑바위에 이른 다음에 쌓아 올리는 근본적인 작업을 했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집현전 학사들이란 것이 재주는 있고 학문은 있었겠지만 자기를 파는 종교에 이르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역사 이해에 이르렀느냐 하면 멀었었다. 그들은 아직 권력의식, 지배자 의식을 못 면하였다. 」 재주와 학문으로 치유될 역사의 병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를 깊이 파는 종교적 경지, 역사이해에 도달했어야 그 뒤에 오는 역사가 제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너진 터, 자아의 깊은 속을 파고 재정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의 사람, 단종을 만들고, 사육신을 만들고 말았다. 이 세조의 죄 값은 40년 후 연산군에서 나타난다. 역사에 태조, 태종하고 이름 뒤에 '조'. '종', '군' 을 붙이는 것은 사후(死後) 중묘에 모셔질 때 올리는 묘호(廟號)이다. 왕조를 세웠거나 그에 버름갈 만한 일을 한 왕에게는 '조' 를 붙이고 앞선 왕의 위업을 잘 계승하고 보존한 왕에게는 '종' 을 붙인다. 그러나 연산군, 광해군처럼 역사에 왕노릇을 했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왕자의 호칭인 '대군'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반대로 단종처럼 '노산군' 이라 강등 당하였어도 이후 묘호를 쓰는 대신들에 의해 다시 '단종' 으로 복위시키기도 한다. 연산은 우리가 익히 알 듯이 역사에서 살인의 연극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도 역시 한국 역사 전체로 볼 때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윤씨가 패위를 당했다는 사실에 놀란 연산은 이유도 주장도 없이 그저 윤씨를 폐위시킨 신하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다. 이러한 연산의 살인극은 개인의 일로만 차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개인이 단순히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인 면에서 하면 개인의 값은 절대다. 그러나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단종과 세조는 딴 사람이 아니요, 세조와 연산은 남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여서 전체로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요, 개인의 행, 불행에 있지 않다. 개인의 일은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묻지만 역사적 사건의 책임은 민족적 사회적으로 묻는다. 」 연산의 사건은 세조의 단종, 사육신을 죽인 역사의 죄과를 대신한 것이다. 「세조, 성종 때 무시한 양심의 결과가 연산 때의 시대 인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은 착란에 빠졌다. 삐뚤어지고 까무러쳤다. 」
연산의 시대가 가고 명종을 지나 선조 때에 이르러 역사는 평안을 보여주었다. 퇴계 이황, 율곡 어이에 의해 성리학이 발달되고 새 기운이 일어나는듯 했다. 그러나 이도 한 때이고 당쟁이라는 고질병이 생겨나 민곡의 생명력을 잃게 만든다. 당쟁의 원인을 유교에 있다고 보는 이도 있으나 서두에서 보았듯이 교리 자체가 반드시 당쟁의 원인을 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함석헌은 이 원인을 삼국 시대에 소급해서 찾는다. 「당쟁의 근본 원인을 캐자면 나는 삼국 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원래 크던 한국 민족의 살림이 이때부터 작아지고 시작하였고 원래 크던 한국의 마음이 이때부터 좁아지기 시작했으며 원래 높던 한국의 기상이 이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당대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예송 논쟁에 치우칠 만한 사회 경제적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쟁은 삼국시대 이후, 통일 신라 이후의 만주 벌판을 잃고 졸아든 지형 지세의 영향이 우리의 혼도 파먹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함석헌이 항상 강조하는 나라 패망이 원인은 "나를 깊이 파지 못함", "심각함의 부재"에 있다.「민족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이 자아를 잃어 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가지 병, 백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다. 」 이것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기조의 축을 이룬다. 일관되게 '주체성 없음', '자아 상실'을 민족혼을 잃게 되는 원인으로 주장한다. 내 것을 잃고 중국 사상의 노예가 되어 당쟁을 일삼는 동안 민생은 파탄되고 북방 경개는 허술해졌다. 결국 고난은 절정에 이르러 임진 왜란, 병자 호란의 양난을 치르게 된다. 이 양란의 가운데에서도 이순신 장군, 임경업 장군과 같은 수호신이 있었지만 조정(朝廷) 당론의 시기와 질투는 두 장군을 자결하게 하고, 참수에 처하게 만든다. 이제 이조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모두 당쟁의 결과요, 삼국 시대 이후 자신의 주체성을 잃고 중국의 번방(藩邦)으로 살아온 것의 결과였다. 「삼국 시대에는 아직 정신적으로 종이 되지 않은 때이므로 사상, 학문, 예술에 독자적인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빌려 통일을 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당제(庸制)를 모방하면서부터 고유 문화는 많이 없어지게 되었다」
삼국 통일 이래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은 퇴색되었고 유학의 비주체적 수용은 한국 학문으로서 제창조되지 못하고 중국 숭배 사상을 공고히 하였다. 고려, 이조 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더욱 공고화되고 당쟁은 한국적 사상 논쟁으로 숭화되지 못한 채 유학의 원죄만을 제기함으로써 제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사회는 변화를 막아 전통의 정착과 유지에 관심이 머물러 있었지만 이 시기의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서양의 근대 문명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특히 일본과 만주는 정치질서에 통합된 세력이 나타나는 중대한 변화를 이루어 한반도를 압박하였던 것이다. 뒤따라 거듭된 전란(戰亂)은 국토를 유린하여 농경지를 황폐화시키며, 인구의 격감과 민생의 참혹한 궁핍화로 인하여 의리론을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더욱 유리시키는 결과로 이끌어 갔다. 여기서 현실의 긴박성은 곧 보편적 이념에 앞서 자기의 현실 상황에로 눈을 돌리게 하고 정통의 이념과 변화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자각하게 하였으며 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정통이념 밖에서 찾으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요청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며 또한 실학으로 명명될 수 있었던 원인도 그 시대의 현실적 요구에 더욱 충실하려는 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학의 새 기풍도 기존의 질서를 대신하지 못하고 시들어 간다. 이들의 노력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민족은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조선을 넘보던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를 맞게 된다. 한일 합방 이후 36년간의 국권 상실은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라는 오욕과 함께 제국주의 일본의 수탈을 겪어야 했다. 이 시련 속에서도 민중은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고 제국주의 칼날과 대항하면서 이 고난의 땅을 지켜 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은 이에 감사하며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설계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세계 양대 이데올로기 세력은 우리의 허리에 3.8선을 긋고 끝내는 6.25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다. 고난은 연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끝없이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함석헌은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단련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단련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의 숨은 뜻과 정신을 내면화해서 앞으로 올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IV. 역사 주체로서의 씨알과 전체관
1. 씨알 사상
함석헌 역사 철학에서 역사 발전의 방향은 진보와 자유를 향해 있다. 그 길에서 고난은 필연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우리 민족사를 고난이 점철된 역사로 해석한다. 고난의 연속이되 역사의 끝에는 결국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긍정적 사관에서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주체는 민중이다. 이 고난의 담지자이자, 주체인 민중, 씨알이 역사 발전의 추진력이다. 왜 영웅적 인물들이나 정치가들이 아니라 민중인가? 함석헌은 예로부터 지배세력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변신을 거듭하였지 변함없이 나라와 국토 그리고 역사를 지켜 낸 것은 민중이라고 한다. 이런 민중을 그는 씨알이라고 한다. 「씨알이 민족의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민족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온 민족의 실체이자 주체이다. 민족의 고유성을 지켜 온 것도 지배계층이 아니라 씨알이다. 」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씨알을 주창해 왔다. 처음에 씨알이라는 표현을 한 사람은 그의 스승 유영모였으나 함석헌에 의해 내용적으로 보강되고 알려지게 되었다. 다석 유영모가 大學 강의를 하면서 "大學之遵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善"외 구전을 해석할 때 "한 배움의 뜻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묾에 있나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民을 씨알로 해석한 것에서 빌려 온 것이다. 씨알에 대한 사색으로 함석헌은 씨알 사상을 정립하게 된다. 그는 1970년 창간한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서 씨알에 대한 그외 독창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씨알이란 '씨'라는 말 과 '얼'이라는 말이 한데 불어서 된 합성어로써 '종자'라는 뜻으로 '씨앗' 혹은 '씨갓'이란 말로 쓸 수 있다. '씨'란 생명이 있는 씨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얼'이라는 말은 극대 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는 '0'과 극소 혹은 내재적 자아를 표시하는 ' · '과 활동을 표시하는 'ㄹ'이 합해서 된 말로써 인간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 내기 위해 일부러 새로 만든 말이다. 」 생명을 품은 씨앗이 대지에 뿌리박고 자라나듯이 민중 스스로 해방되어 새로운 창조를 일구어 낸다는 것이다.
2. 역사 주체로서의 씨알의 본질
1) 스스로 주인되는 자주성 들꽃이 일정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스스로 꽃을 피우듯이 씨알은 "스스로함", "스스로 자람"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 총칼의 힘으로 꽃을 피을 수 없듯이 민중은 역사적, 사회적 삶의 무한한 힘과 지혜를 지닌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다. 억압적 강제를 본성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씨알이다. 씨알은 스스로 행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의 명령에 복중하는 삶은 거부한다. 이 성격의 밑바탕에는 인간 본연의 의지인 "자유의지"가 깔려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도륵 '자유의지'의 힘을 부여했다. 이 자유의지는 생명의 원리이며 씨알의 본성이다. 자유는 방종과 멀지 않고, 의지는 늘 고집, 교만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유하는 의지와 함께 양심을 넣어 자유의 가는 곳마다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씨알은 도덕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만물을 대표하여 우주 역사의 도덕적 책임자로 서게 된다. 인간은 서기만 하면 지구의 중심이라고 했다. 제대로 올곧게 서는 것이 어렵지 스스로 일어선다면 그때부터 자신의 운명과 세계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씨알사상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며 내 속애 모든 문제가 있다는 주체 사상이다. 제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제 힘으로 생명을 꽃피우는 이러한 주체 사상은 씨알 개개인의 자주성을 존중한다. 모든 형태의 폭력에 저항한다. 주체성이 확립될수륵 폭력에 대한 저항도 커진다. 자주성이 강할수록 스스함을 거스르는 폭력에 대한 거부도 커지는 것이다.
2) 자기 희생적 생명력 자주성, 스스로 함을 자체 생명으로 하는 씨알의 사명은 먼저 알이 드는 것이다. 먼저 깊은 사색과 반성으로 자신을 꽉 채운다. 그리고 무르익은 낟알 이 땅에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져야만 그 사명을 하게 된다. 땅에 떨어진 씨는 썩어야 생명의 완성을 가져온다. 썩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는 없다. 땅에 떨어져 썩는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한다.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씨알은 역사 주체로 나서게 된다. 씨앗이 대지의 보드라운 흙의 가운데 떨어져 파묻혀야만 꽃을 피우듯이 민중(씨알)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다. 씨알은 남을 딛고 서서는 싹을 틔울 수 없다. 땅에 떨어져야 하듯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자신을 열고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새 열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씨알은 자신을 희생함으로 이웃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사회적 삶의 도리를 보여준다. 타인을 딛고 자신의 실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씨알의 참된 삶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살아온 민중으로 인해 한민족의 삶은 정화되고 풍성해졌다. 민중은 오 천 년 역사 속에서 "죽어서 사는 도리"를 체득한 셈이다. 부패한 정치와 혼탁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도 썩어지는 씨알이고자 노력했던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우리 역사는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은 개체 속에 있는 전체다. 그래서 무수하게 썩는 씨알이 있어도 그 중 작은 한 알이 전체를 건질 수가 일다. 」고 한다.
3) 주체적 사유함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나"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나" 이다. 나를 떠난 논의는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나" 의 문제는 역사적, 사회적 주체성의 문제다. 삶의 원리를 자주성에 있다고 보는 함석헌 사상의 밑바닥에는 '나' 에 대한 주체성 확립의 과제가 놓여 있다. 이런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함석헌은 씨알이 씨알다우려면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의식적이고 주체적 활동은 없다. 함석헌은 생각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다고 했다.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은 거짓된 나로부터 참된 나로의 회개이며 나를 파고들어 나의 주체를 세우는 일이다. 생각은 씨알 속에 내재한 무한한 힘을 깨닫는 일이며 그런 위대한 힘을 지닌 자아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생각을 통한 각각으로 사회 역사적 속죄를 하게 되고 이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생각함의 바탕은 실제에 있고 초점은 전체에 있다. 함석헌은 사람의 살림에는 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뿌리가 생각함이라고 한다. 이 생각함의 뿌리는 사실(事實)의 대지 위에 내려야 한다. 사실은 나보다 객관적인 존재요, 나는 사실보다 참된 주관적 삶이다.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색이라고 한다. 또한 씨알의 생각하는 초점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이다. 과거에는 개인이 생각의 주체였으나 오늘날에는 개인의 생각 속에 공동체 전체의 생각이 들어 있다. 민족과 인류가 유기적 공동체로 되는 도정에 있으므로 공동체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함석헌의 씨알의 개념에는 그의 사상이 응축되어 있다. 씨알은 외부적 힘에 의한 행함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자주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런 이유로 씨알은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향해 전진하는 생명력을 가진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씨알은 수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래하며 자신의 생명을 지켜 왔고 이 과정에서 씨알의 사유함, 생각의 힘이 그 고유성을 지켜 왔다. 의식적 사유함은 주체적 자기 표현이다. 함석헌에게 있어 인간의 무익식적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씨알 사상은 지극히 이성 중심의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라 이웃과 민족, 세계 전체에 있다. 씨알 사유의 본성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사고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씨알의 본성도 사회 역사적 환경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것을 우리 고난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왜곡된 씨알의 본질이 부활되고 씨알이 제대로의 역할을 할때 우리는 21세기외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씨알은 개체에 머물지 않고 전체의식을 깨달아 전체에 동참해야 한다.
3. 전체관
이제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역사를 만들어나가려면 새로운 역사 해석이 필요하다. 이는 바로 인류의 하나됨을 인정하고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이다. 함석헌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조상, 하나의 형제, 한 나라의 백성임을 깨달아 우리가 서로 각각의 지체(members incorporate)인 .한 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씨알은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씨알은 깨기 전에는 개체에 불과하지만 깨면 전체다. 씨알이 개체로서 머물면 무력하지만 전채의식을 가지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로서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되는 전제 조건은 먼저 왜 자신이 썩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개체로서의 씨알이 전체감을 획득해야 가능하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전체감을 획득한다는 것은 세계시민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50년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인류의 하나됨을 고민했던 것이다. 인류가 하나의 연대의식을 갖고 공존공생의 길을 가야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세계화의 구호가 난무한 가운데 영어 몇마디를 배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세계화의 시작은 우리 의식에 있는 것이다. 나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듯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줄 아는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자세를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제 인류는 개인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전체의 시대에 들기 시작했고 역사는 이미 개인 완성의 역사가 아니고 전체적인 '하나됨의 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나아감에 있어 개인이 확실히 한 요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은 저만이 홀로 된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개개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개인 뒤에는 언제나 '전체'가 서 있다.‥‥‥ 그 개인은 전체의 대표다. 전체에서 떨어진 나는 참일 수 없고 스스로 명령하는 전체를 발견한 개체야말로 참 '나'다‥‥‥‥ 그리고 이 전체는 종교적 전체와 세속적 전체로 나눌 수 있다. 종교적 전체는 하나님에 속한 것으로 처음부터 환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이며 세속적 전체는 운명 공동적인 전체 사회다. 세속적 전체는 땅위의 것으로 씨족국가에서 봉건국가로 봉건국가에서 민족국가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달리 하며 변해 왔다. 」 함석헌은 기존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깨고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정립한 것이다. "하나(전체)를 의식하는 새로운 역사 해석 속에서만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
전체관은 함석헌의 사상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생각하는 씨알이 지향해야 할 것은 전체라는 것이다. 이 전체는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은 고정불변의 성격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고 움직이는 전체성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부분와 전체 관계에 있는데 그 전체는 늘 고정된 전체가 아니라 늘 자라가는 전체였다." 함석헌의 전체관은 그의 사상 전면에 걸쳐있다. 궁극적 관념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일상의 생활 윤리적 지침이 되기도 하고 종교적 신념이 되기도 한다. 그의 전체괸은 어느 한 가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습을 띠고 변하는 것이다. 사람은 '나' 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이제' 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체'를 생각하고 '영원' 을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속성 자체가 혼자로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 사고와 행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기적 사고와 행위를 벗어나 도덕적 인간이 되기를 독려하는 전체관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윤리관이기도 하다.
전체의 또 다른 이름은 '한'이다. 「이제 우리는 '전'(全)이라는 말을 쓰지말고 '한'이라 하자. 全은 한 곳, 하나다. 정말 하나는 셈을 뛰어 넘는 것이라‥‥‥ 한자로 한은 한 일(-)이면서 대(大)를 표시하는 말이다. -이면서 大면 天이 되는 것처럼 한은 곧 하나님이다. 하늘이 한울, 하늘, 하날, 한알, 한얼, ㅎ. ㄴ.ㄹ하는 여러 말로 쓸 수 있듯이 하나님도 하느님인지, 하누님인지, 한우님인지, 한울님인지 알 수 없다. 어쨌건 하나님, 곧 한님은 절대 하나면서 절대 큰이라는 사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 여기서 전체는 하나님이 된다. 이때의 하나님은 종교적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경천의 사상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양심을 속이지 않고 전체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전체 역사는 개별 인간 역사의 뭉뚱그림이다. 역사는 실천하는 개인의 힘이 이끌어 나가는 면이 있으나 이 개인이 있기까지에는 그를 둘러싼 사회 집단으로 전체가 있다. 그리고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다. 이제 개체적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근거를 잃었고 모든 개인은 민족의 나타남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영웅적 인물이 역사에 남는 것도 그 민족의 이름 위에 남는 것이다. 영원 불변의 진리를 나타내기도 하고 윤리적 생활 덕목을 나타내기도 하는 전체관은 개인, 사회, 국가, 민족, 세계에 있어 그 모습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전체관의 구체적 발현 형태와 내용을 알아보자.
1) 자아의 하나됨 개인의 인생에 있어 전체는 그 사람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한정된 개인의 일생을 값지게 살려면 잘게 토막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토막낸 하루하루를 야무지게 마무름을 했다 하더라도 이것에 따로 떨어지면 안되고 하나의 커다란 큰 마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큰 마무름이 전체라는 것이다. 인생의 총체적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살아갈 때 개인의 자아는 통일을 이룰 수 있다. 개인의 일생도 전체적인 목표가 있을 때만이 내용적으로 풍성한 생활을 만들어 삶의 완성도나 행북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개별적 인간이 전체적 삶에 이르려면 자아의 인격화가 있어야 한다. 이 자아의 인격화는 전체에 하나되는 것이다. 이것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의 근본 욕구인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함석헌은 「사람의 근본 욕망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가지자는 소유욕이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가질 수 있는 것은 내성격(性), 내 덕(德) 밖에 없다」 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요,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전체적 삶에 이르려면 德을 쌓아 자아의 인격통일에 힘써야 한다. 이런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단절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과 사회와의 연대 속에서 만들어 진다
2) 사회의 하나됨 자아 합일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다면 그 사회의 연대성을 더욱 공고화될 것이다. 사회와 역사는 실천하는 진취적 소수에 의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생리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족적(族的)인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은 전체의 대표다. 전체에 멀어진 나는 참 나일 수 없고 스스로의 안에 명령하는 전체를 발견한 나야말로 참 나다. 」 진정한 자아는 전체 속에서 양심의 부름을 들을 수 있는 자세와 태도를 견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아니 본래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존재이다. 전체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숙명적 운명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이다.
사회는 개별 인간들의 집단이다. 이 속에서 개인의 자아가 인격화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인격의 바탕인 성(性)은 사회적인 것이고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도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양심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기 주장은 이기적이므로 자기를 모른다. 자기를 능히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기를 떠나 전체의 자리에 서려는 마음이다.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 전체의 자리에 서려는 마음이 병들었을 때 사회는 양심을 잊은 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요, 전체이다. 선(善)을 하는 것은 양심인대 양심은 사회적인 것이다‥‥‥‥ 생각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와야 한다. 증언은 곧 행동이다. 참 말함이다‥‥‥‥몸이 살아가는 데 대기(大氣)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듯이 사회가 되어가는 데에도 정신적 대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주를 꿰뚫은 영기(靈氣)다, 천정지기라, 혹은 호연지기라 부르는 것이다. 사회란 우주 영기의 인간적 나타냄이다.」 인간은 공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우리에게 산소가 생명의 절대적 배경이 되듯이 사회는 정신적 대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양심에 찬말과 행동이 바로 우리를 호흡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
선을 행하려는 양심이 사회적 전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면수심의 범죄도 사실은 한 뿌리에 있다. 함석헌은 죄는 단일범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죄는 공범이다. 죄는 내 죄, 네 죄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전체의 죄라고 한다. 뿌리를 뽑아 보면 그 밑의 뿌리는 모두 하나의 덩어리이다. 양심적 문제와 양심을 거스르는 죄의 문제의 배경에는 똑같이 사회라는 전체가 있다. 사회적 구조와 지향이 어떤 방향에서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양심과 정의를 최고선으로 여기고 부정 부패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기풍은 인간적 사회 공동체를 만들 것이요, 그렇지 많으면 그 타락은 끝을 모를 것이다. 범죄와 양심은 모두 사회라는 전체의 다른 모습이다. 이렇듯 「전체의 사회적 혼란이 오는 것은 전체의 산 통일이 깨진 데 원인이 있다. 전체의 산 통일이 깨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물질적 힘과 같은 외부적 요인의 침입과 이에 대한 숭배 때문이다. 」 해방이후 급격히 들어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의 배금주의는 우리의 인간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체의식이 회복되는 사회와 그 속의 사람을 길러 내려면 교육이 제대로의 역할을 해야 한다.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옹글게 하나로 사는 것이 사람이고 겅신에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교육이다. 」 험석헌은 교육에 대해 말하기를 "교육이라면 사람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구경(究竟)에 있어 인격 교육이요 윤리 교육이지, 직능 교육이란 없다"라고 한다. "교육의 목표를 하나되는 것이라고 세울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나라의 통일이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 나무로 비교한다면 나라의 통일이 그 줄기가 되고 그것의 뿌리가 자아의 인격 통일이 되고 그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세계의 통일이다. 함석헌의 하나됨의 교육은 생명의 하나됨을 알리는 것이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로 하면 정치니 경제니 하는 것들도 교육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새나라를 만들려면 다른 나라에서 사용한 교육 방법을 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교육을 연구해 수립해 나갈 기백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교육은 나라의 통일을 지향할 뿐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공동체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펼 수 있는 인격적 개인을 길러 내는데 힘써야 한다. 함석헌은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을 '같이 살기 운동'이라고 한다. 같이 살기란 여수의 맡씀게 의하면 "옷이 두 벌있는 이는 그 하나를 벗어 없는 이에게 주자"는 것처럼 일체의 사회 · 도덕적 계급주의, 차별주의를 깨뜨려 없애고 하나된 살림을 하자는 말이라는 것이다. 같이 살기 운동은 우리 서로를 살리는 길이며 사회적 기풍을 건강하게 하여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3) 민족의 하나됨 민족적 분열의 상태는 국토의 분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적 상태의 혼란스러움도 지적한다. 이것은 하나됨의 역사를 향해 나가는 길목에서 커다란 장애로 대두된다. 이런 분열은 개인이나 사회의 청신한 기풍을 세우고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민족의 영향권의 안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역사상에 영웅의 활동이나 계급의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를 전체되게 하는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한다. 그러므로 운명 공동적이다. 개인의 활동이거나 단체의 활동이거나 그것이 역사 위에 남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민족의 이름으로 남는다. 왜냐, 민족이 전체이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된 민족과 역사의 주체로 나서려면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주의는 국가지상주의, 정부지상주의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나라와 정부를 혼동시킨다. 나라는 하나의 산 전체요, 정부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혼동시켜 민중을 지배하려 한다. 정부는 전체가 아니요, 집단체이다. 이기주의가 가장 높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집단이고 이는 아무리 다수라 하여도 전체는 될 수 없다.
국가주의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국가주의를 버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의 첫번째는 나라안에 퍼져 있는 당파주의를 없에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당파심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 당파심이 특히 개인이 아닌 단체에 버릇이 들면 그 폐해는 훨씬 크다. 단체의 위험성은 전체를 가장(假葬)하여 개인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가 서지 않은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어떤 한 파가 결속하고 들어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집단주의다. 오늘 모든 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집단주의에 빠져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당파주의가 극심한 나라이다. 이것을 고치야 민족의 옳은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고 민족의 분열도 극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문제 또한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낡은 구시대적 당파 싸움에서 벗어나 대의의 한 뜻에 하나가 되었을 때 민족은 하나됨을 이룰 수있다. 이 전체 의식은 도덕적, 정신적 인간의 바탕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전체를 세 개의 테두리로 표시하는데 작게는 가정이요, 크게는 우주라 하고 그 중간을 민족공동체라고 한다‥‥‥‥ 한국은 오랬동안 단일 민족이었으므로 전체 의식을 가지기에는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원화된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지배층에 의해서 갈라진 전체의식이 남북 민중이 결함하는 것으로 한국 민족의 전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전체 의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남북의 통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되어야 한다. 우리는 운명을 같이 하는 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인격 통일이 못되면 사람이 아니듯 통일된 나라를 못 이루면 민족이 아니다. 운명이 같으면 의무도 하나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통일은 호전적이고 권력적인 정권이 할 것이 아니라 남북의 씨알이 직접 해야 한다. 이름 없는 씨알만이 통일을 구상할 수 있다. 남북 통일의 주체는 위정자들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이다. 현재 북의 민중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이를 도와주기 위해 나서는 남의 민중들의 모습을 볼 때 이는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위정자들은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겨레의 반쪽이 아사 상태가 되든 안되든 관심이 없다. 이는 남과 북의 권력자 모두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4) 세계의 하나됨 함석헌의 전체관은 세계의 하나됨에까지 이른다. 그가 민족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도 세계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주의자라 한다. 아무리 세계주의자라 하더라도 인격 없는 역사나 문화는 없을 것이고 인격은 특징적이지 일반적이지 않다고 한다. 세계주의를 하려고 해도 일단 주체적 인격과 문화적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적 인격은 우리의 현재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 인류 역사는 새 시대에 들고 있다. 국제적이라는 말도 낡아 버렸고 세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되어 가고 있다. 」 역사는 이제껏 하나됨을 향해왔고 이것의 마직막은 세계에 있다. 세계 공동체 안에서 인격적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함석헌 전체관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에 의하면 민족주의(제3세계)와 민족주의(제국주의)가 맞부딪쳐서는 민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고난받는 민족이 고난 속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와 사랑을 배움으로써 다른 민족들을 평화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인족 문제는 세계 문제다. 가해자인 제국주의 세력은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오직 피해자인 고난받는 민족만이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주제적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함석헌은 일찍이 민족의 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세계가 하나의 공통체임을 확신했다. 최근 우리 시대는 세계화라는 구호에 온 사회가 전염되어 있으나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불명확하다. 이런 즈음에 함석헌의 전체관에 입각한 세계공동체의 모색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V, 한민족 씨알의 부활
우리는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는 역사적 시점을 살아가는 세대로서 우리 민족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함석헌은 세계 정세의 혼란은 3대, 4대 하는 강대국들이 과거 약소 민족 국가들을 침략하고 쓸데없이 비대해진 틀거리를 유지하느라 고민하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이런 강대국들은 평화 유지를 부르짖지만 실상 그들이 전쟁 유발의 가능성이 제일 높다. 힘의 논리로 약소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방해했던 강대국은 세게 평화 유지에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힘의 논리에 의해 전쟁을 겪어본 기억이 있는 나라들에 의해 앞으로의 평화는 유지될 것이다. 함석헌은 세계 평화의 주역이 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했다. 개조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것을 부활시켜 새로이 고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선조들의 품성 속에 세계사의 주체가 될 만한 것이 숨어 있고 또 주체가 될 만한 시련의 시간들을 견디어 왔다.
1. 우리 민족 고유의 품성과 그 왜곡
함석헌은 민족성은 개인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자연 환경 그리고 역사적 배경이 한데 얽혀서 된 것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물론 인간 본성이다. 자기를 인격적으로 무한히 발전시키자는 강한 욕망을 가지는 인간의 한 단체가 그 타고난 자연과 역사의 조건을 이용할 수 있는데까지 이용하여 자기 속에 본래부터 들어 있는 바탈을 실현해 낸 것이 민족성이라고 한다. 씨알의 본질인 스스로 주인되는 자주성이나, 자기 희생적 생명력, 주체적 사유함의 한국적 발현형태가 민족성이라 할 수 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씨알의 본질이 왜곡되어 왔으나 그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지켜온 우리 민족의 품성이 곧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성을 개조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고유의 씨알의 본성을 부활시켜 내는 것과 같다. 민족을 개조하려면 먼저 개인을 개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를 개조하려면 나의 '참 나' 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참 나'는 복숭아의 모양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사람의 눈을 끄는 외모, 지식과 갈은 껍질의 겉모양도 아니요,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속살도 아닌 "인(仁)' 이라는 '씨" 이다. 이 씨는 맛은 없지만 가장 귀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불멸체인 것이다.
고난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고유의 품성은 어떤 것인가? 우리 선조들을 일컬어 주변국에서 무엇이라 했는지 살펴보면 우리의 근본적 성격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산해경(山海經), 산해경찬(山海經讚) 등에 보면 우리 민족의 특성을 착함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 민족을 두고 사람을 사랑하고 예의를 중시하며, 자존심이 강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仁)하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도덕적 성격이 강한 평화주의의 성격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특성은 날쌤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은 사람을 사랑하고, 예의를 중히 여기며, 자존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대체로 '인' 이라 할 수 있다. 이 '인' 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근본 성격이다. '인' 은 사람의 사람된 본바탈이다. 사람의 본바탈이면 곧 우주의 바탈이요. 하나님의 바탈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착하다면 사람다운 사람, 참 사람, 제바탈대로 사는 사람, 우주 공도(公道)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 민족은 착한 사람, 다른 말로 평화의 민족이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서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막힐 데 없다. 생존경쟁이 생물의 본능인 것을 생각한다면 '평화를 사랑한다', '착하다', '인하다' 하는 것은 그 도덕성이 매우 높은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고난의 역사가 되는 까닭이 거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난은 생명 진화의 지금 단계를 위한 것이 아니요, 다음 단계를 위한 것이다. 우리 민족 성격의 고갱이는 착함이다. 평화의 사람이다. 역사 이래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고 보복을 결심하여 침략한 적도 없다. 그러나 지난 세월 속에 남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판국이 바뀌는 데서 마음을 활짝 열지못하고, 가지고 있던 좋은 성격들을 많이 잃었다. 이렇게 우리의 본성을 잃고 삐뚤어진 데에는 사회구조적, 역사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함석헌이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결함은 '심각성' 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파고들지 못하고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 파는, 컴컴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아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서 시없는 민족이요, 철학없는 국민이요, 종교없는 민중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 이 때문에 역사극의 각본이 중간에 변동이 되었다. 우리 씨알의 본질이 왜곡된 것은 민중의 정신을 짓밟은 정치 역사때문이었다. 우리 민중은 여러 백년의 압박 밑에 옹졸해지고 겁 많아지고 수줍음이 많아졌다. 본래의 씨알의 기운을 잃고 낙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민족의 왜곡된 역사를 풀어 나가기 위해 우리 민족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은 우리 본래의 품성을 되살리는 것이다.「20세기 1백년의 우리 민족사를 보면 전반기는 식민지, 후반기는 분단시대이다. 이는 모두 불행한 역사이다. 그럼에도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민족사회 중에서 선두 그룹에 들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지도력이나 일부 집단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근대 이전부터의 우리 민족 사회가 가졌던 높은 문화 수준과 그것에서 나온 민족적 저력이 큰 힘을 발휘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 우리의 숨어 있던 저력이 힘을 발휘한 만큼 환경이 성숙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조성된 성숙함도 우리 씨알들이 만들어 온 것이다.
2. 씨알 본질의 부활
1) 예언자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날쌔고, 조심성있고, 예의 바르고, 무게가 있고 또 민족의 기상이 있다. 큰 나라를 세우고 고상한 문화를 낳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또 큰 국민이 되는데 필요한 조직력이나 재능에 있어서도 가난하지 않다. 5천년 민족 문화를 지키고 가꿔 왔다는 것은 벌써 상당한 조직력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근븐적으로 부족한 것이 예언의 정신이다. 함석헌은 우리는 역사를 창조하자는 꿈이, 비전이, 이상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예언의 정신은 점을 쳐보자는 미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 조건에 알맞은 꿈과 이상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예언의 정신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같이 작은 나라는 힘(武力)으로 살아갈 나라가 아니라 슬기와 지혜로 살아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주변의 강대국들 속에서 우리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예언의 정신은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 자신과 문제를 파고드는 심각함과 끈기로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 나갈 때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예언의 정신은 자각을 가져온다. 정신적 자각, 역사적 자각을 가져오는 것이다. 역사적 자각이 없으면 나라를 가진 국민이라도, 국민 노룻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을 자각하는 것인가? 자각한다는 데는 주체의식과 사명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나는 나다' 하는 굳센 주체의식이 있어야만 모두가 높은 자아로 자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민족적으로 자아 분열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로는 전체 참여를 할 수 없다. 전체는 자각된 인격들의 통일된 인격이다. 분열된 자아는 반성만으로는 살려낼 수 없다. 속죄의 체험은 사명감과 더불어 온다. 사람은 뜻에 산다. 뜻이야말로 다하여야 할 사명으로 자포자기에 빠지려는 자책감에서 신생하게 하는 힘이다. 앞을 내다보는 선견 없이 작은 나라가 21세기를 헤쳐 나가는 것은 힘들다. 함석헌은 아주 깊은 데서 통회하지 않고 겉으로 경제로 기술로 어떤 발전을 이룬다해도 이 민족은 결코 위대한 인물을 낳을 수 없다고 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지나친 물질중심의 발달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선견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유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2) 평화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근본적 품성이 평화의 사람이라 했다. 이 본래적 품성을 되찾아 평화 운동에 나서야 한다. 함석헌은 평화 운동의 가능성, 불가능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절대 명령임을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삶의 꿈틀거림이 곧 평화운동이요, 평화의 길이라고 한다. 함석헌은 평화 운동은 불가능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평화 운동의 절대성을 설명한다.
첫째, 남북의 긴장과 대립 때문에 평화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수십 년을 다른 체제와 문화 속에서 살아온 현실이나 북 정권의 침략성을 고려할 때 평화주의는 안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석헌은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만든 것은 남북한의 민중이 아니라 정치권이며 공산당이 있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전쟁은 이제 어느 한 쪽만이 한 쪽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쌍방 모두 망하는 것이며, 전 인류가 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분열이 밖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주체적 사람이기에 원인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분열된 것은 민중이 외세와 결탁한 소수 정치인들의 강요를 뿌리질 만큼 전체의식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민족이 다시 통일이 되려면 이데올로기란 가면을 쓴 집단주의를 물리쳐야 하는데 그것을 하려면 먼저 남과 북의 민중 속에 강한 전체 의식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둘째, 주변의 강대국이 우리의 평화 운동을 반대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물질적 힘을 키워 부국강병주의로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다. 함석헌은 평화 운동이라는 것이 철두철미 정신운동이라는 것을 믿고 정신적 강자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셋째, 인간은 본능적으로 싸우려는 기질을 갖고 있어 평화운동은 안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함석헌은 인간의 본능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민중은 평화를 본바탕으로 살아간다. 특히 우리 민족은 그 바탕이 평화적이기에 세계 평화 운동에 나설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건국 정신에는 침략적 영웅주의의 빛깔이 전혀 없고 실제로 4천년 역사에 침략전을 한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넷째, 우리 민중의 도덕적 수준이 평화주의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 잘못이다. 사실 우리 민중이 이기주의의 병, 당파주의의 병이 골수에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병이 들었지만 병이 생리(生理)의 본질은 아니다. 타락이 됐지만 정신의 바탕은 아니다.
함석헌은 우리 역사를 반성해 볼 때 민중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지 힘있게 키우지를 못했다고 한다. 봉건 시대에는 양반의 종이었고 민족 국가 시대에는 일제의 종이었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나 더 참혹하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상전이 일본 하나였으나 이제는 둘 셋이고, 부모 처자가 한 집에 살지 못하고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일제 시대를 살고 분단과 전쟁을 모두 겪어 낸 인물이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그에게는 특히 분단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참혹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과 풍속이 하나요, 이날껏 역사와 이해 운명이 한 가지이기 때문에 갈라질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라고 한다.
함석헌의 평화 운동은 씨알이 자기 본연의 바탈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씨알이 바로 평화이기 때문이다. 씨알이 그간 얽매였던 외적 이유에서 벗어나 "나는 나" 라는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달아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이 평화 만들기의 출발점이다. 이 출발은 민족적 자아 분열의 상태인 분단을 극복하는 것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분단은 세계의 하수구로서 썩어진 물이 고인 상태임으로 이를 정화하는 것이 곧 세계주의를 이루고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여 도덕적 의지가 발동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우리는 작은 나라로서 무력을 길러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다.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은 우리가 미래의 후손들에게 남겨줄 최대의 과제이다.
3) 대화와 토론의 합리성을 정립하자. 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통일 정신, 독립 정신, 신앙 정신인데 이 셋은 근본을 따져보면 결국 하나다. 우리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중교가 없는 데 있다. 화랑도가 있다고 하나 너무 옅고 평면적이고 낙천적이다. 우리 역사의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중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이다. 생각하는 민족, 철학하는 백성이 되려면 대화와 토론을 통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없고, 침묵을 미덕으로 알며 표정으로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학교의 어린 청소년들 조차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어디서 유리하는 것인가? 함석헌은 우리 역사에 그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우리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우리 민중은 입이 없고 표정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슴에 묻고 살아온 것이다. 나라가 발달하지 못한 원인은 민중이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은 더 울어야 서러워 지는 것이요, 정의는 언제나 부르짖어야 높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왜 벙어리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장구한 역사에 있다.‥‥‥‥ 유사이래 권력자들은 민생 경제에는 안중이 없었다. 이러한 처지에 사는 민중은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고 벙어리가 되기로 한 것이다. 」 이런 역사가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이는 더 나아가 말많으면 빨갱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역사도 우리는 안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의사 표현이 활발하지 않은 것과 사회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같은 맥락에 있다.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민중들이 자신들의 의사 표현을 활발히 하고 살아간 나라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근대 이후에도 참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스스로 민중의 소리를 드러내고자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사회는 독단적인 지도자 소수에 의해 이끌려지는 시대가 아니라 전체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대립과 갈등의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다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대화라는 합리적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설득의 대결이 아니다. 자기 주장의 합리적 근거를 시험해 보는 공동의 장이며 시험의 결과를 받아 들여야 하는 개방적 자세를 필요로 하는 장이다. 또한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자극함으로써 변증법적 지양이 일어나게 한다. 분석하고 비판하는 대화도 결국은 새로운 종합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집단적 창조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 대화와 토론은 갈등과 대결의 국면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다. 이를 활용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타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도 훈련을 통해 길러져야 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의사소통적 능력이란 단순히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상호 이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규칙들을 인지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합의와 같은 것이다. 이 합의는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고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합의가 될 수도 있다. 기만적인 합의가 되지 않기 위한 조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상적 합의에 이르기 위한 대화의 조건은 첫째, 대화가 억압적인 동기나 자기 기만에서 나올 수 있는 장애가 없어야 한다. 둘째, 대화에 참석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배와 통제의 관개가 없어야 한다. 셋째, 참가자 각자가 담론적 논의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상적 담화를 하기 위한 조건들은 결국 "진리와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삶의 형태"를 위한 조건들임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우리 민중은 대화와 토론은 물론 자기의 기분을 표현하는 것에도 인색하다. 이는 학교 교육이 가르치지 않은 면도 있으나 우리 역사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 함석헌의 분석이다.
< 나오는 말 >
함석헌의 역사관은 기독사관이다. 이스라엘 민중들이 고난 속에서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 같이 함석헌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 위에 나타날 영광을 고대했던 것이다. 사람이 한 세기를 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함석헌은 1901년에 출생하여 1989년에 운명하였으니 거의 한 세기를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 사건과 시련이 있었다. 구한말 일제의 제국주의적 책동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그 속에서 함석헌은 청년기를 보내고 그후 해방을 맞이했으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은 분단이라는 비극과 참혹한 전쟁을 겪는다. 그는 이 시기를 관통해서 살아났다는 것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던 것이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 후의 격동의 한국정치 속에서 장준하 선생의 권고로 「사상계」 에 글을 투고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시련이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 땅의 자주적 통일과 민주발전을 위해 헌신 했다.우리는 함석헌의 방대한 저서와 사상 속에서 역사라는 맥락을 잡아내어 엮어 보고자 하였다. 그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살펴보고 나름대로 민족의 미래에 필요한 과제의식을 부각시켜 보았다.
첫째 단락에서는 함석헌의 역사철학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 구한말은 밀려오는 해양세력인 일본의 압력에 어쩌할 바를 모르고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뿌리 깊은 유교 사상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체의 흐름이었던 실학사상조차 담아내지 못한다. 결국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방된 조선은 기독교와 신학문의 바람으로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다. 이때에 함석헌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을 겪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후 오산학교에서 민족정신을 배우지만 더 넓은 세계를 접하고 또 민족의 교육 계몽에 힘쓰기 위해 동경 사범대의 유학 길에 오른다 동경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스승 우찌무라 간조에게 무교회주의를 배우게 된다. 형식과 제도의 틀거리를 거부하는 무교회사상은 세계평화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여기서 함석헌은 평화주의를 몸에 체득하게 된다. 둘째 단락에서는 함석헌의 고난사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에 남는 사실들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함석헌의 해석과 다른 역사 철학자들의 의견을 함께 담았다.
셋째 단락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고난 사관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서술하였다. 함석헌은 역사에서 중심되는 맥을 정신의 역사로 본다. 정신이 살아있으면 그 역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과 얼이 꺾여 나간 것은 북만주틀 달리던 고구려의 혼이 사라진 뒤라고 한다. 만주를 잃고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를 두고 참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들에 의해 아직도 논란중인 문제로 함석헌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의 의견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만을 개략적으로 함석헌의 '뜻으로 븐 한국역사"틀 중심으로 다루었다.
넷째 단락에서는 그의 역사 해석에서 핵심인 민중관을 다루었다. 이는 그의 독창적인 이론인 씨알사상이다. 씨알사상은 스스로 주인되는 자주성, 자기 희생적 생명력, 주체적 사유함을 본질로 하는 씨알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 씨알 사상의 정점은 바로 전체관이다. 왜냐하면 씨알이 씨알이 될 수 있는 것은 전체로서의 자기 사명을 깨닫는 전체의식을 획득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만이 아니라 전체에 사는 것이고, 오늘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미래에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께달았을 때 비로소 대자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관의 다른 이름은 하나됨인데 이 하나됨은 자아로부터 세계까지 확장된다. 자아의 분열 상태로는 사회의 통합도, 민족의 통합도, 세계의 통합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우리 한민족 씨알의 부활을 기대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본고의 의도는 씨알이 짓밟힌 우리 역사이지만 이것이 다시 살아난다면 세계사의 주역이 된다는 함석헌의 지론을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이 단락에서 고유의 품성을 상기 해보면서 이것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 민족을 개조하는 것과 같다는 추론을 해보았다. 함석헌은 그의 저서를 통해 누누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씨알의 생명은 생각함에 있다' 라고 했다. 씨알이 씨알다우려면 사유(思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석헌은 우리 벡성이 이성적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깊으면 자연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정신이요, 미래의 정신이다. 우리와 같은 반도에서 세계의 동반자가 되는 것은 깊이 있는 성찰로 얻는 예견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 예견은 우리의 사회적 환경을 올바로 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단이라는 왜곡된 상황에서는 이성적 사유가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또한 세계 평화 운동의 선두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합리적 사회의 기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한 정책적 결정을 제도화하고 대립과 갈등을 성숙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토론의 기풍을 정립시켜야 한다. 21세기 미래 한국을 짊어질 우리에게 함석헌 사상 연구가 미래의 귀퉁이를 밝히는 작은 춧불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참고 문헌>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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