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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조직종교를 넘어서(김영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7.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 소리> 1999.5-6.(pp.60-80)

 

 

조직종교를 넘어서
- 종교개혁론(함석헌)과 종교무용론(크리슈나무르티) -

 

김  영  호 (인하대 교수·철학)

 

 

   1. 시작하는 말

 

한국인에게 종교는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사건들이 때마다 터진다. 최근에는 조계종 사태와 만민교회 사건이 일어나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종교가 무엇이길래 저럴까. 우리에게 종교는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가,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민족보다 한국인은 현재 정치와 종교, 이 두 가지에, 함석헌 식 표현을 써서, 마치 뱀에게처럼 칭칭 감겨있다. 언젠가부터 관심을 안 둘래야 안 둘 수 없는, 한시도 우리를 떠날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같이 모이기만 하면 정치 이야기요, 전철 칸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종교이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어쩌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지고, 참여하지 않아도 찜찜하게 느낄 것이다. 투표를 하자니 귀찮기도 하고 후보자가 다 맘에 안 들고, 안 하자니 어쩐지 켕기는 느낌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두 가지 중에서 정치는 그래도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듯 한데, 종교는 오리무중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앞이 깜깜하다. 함 선생 같은 불 밝혀줄 어른이 옆에 없어서 더욱 그렇다. 그의 말씀은 남아있으므로 다시 오늘의 종교를 비추어보자.
 
무엇이 문제인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국 종교 자체보다는 종교조직, 조직으로서의 종교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를 내세워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금방 나올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조직은 타락하기 마련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조직을 등에 엎거나 업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조직이 경직되어 본래 의도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분석이 나올 만 하다. 그렇다면 정통, 이단 서로 나무랄 것 없이 조직된 종교는 다 문제가 있고 종교의 본질을 벗어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 만하다. 종교가 꼭 조직화할 필요가 있을까. 고래로 한국인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유교인이 되고 도교인으로 살아왔다. 불교와는 달리 이 두 종교는 딱히 조직화된 종교가 아니고 종교사회학자들이 말하는 "흩어진" (diffuse) 종교로 존재해 왔다. 여기에다 무속을 보탤 수도 있다. 불교도 그런 점이 없지 않다. 알게 모르게 한국인의 삶은 꼭 절에 가지 않더라도 불교적 세계관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유불선 삼교와 무속이 엮어내는 삶의 틀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직화한 종교들이 판을 치고 있다. 종교는 조직화할수록 자기것만 고수하는 배타성이 강해지게 된다. 이것은 종교갈등으로 이어지고 사회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사회갈등과 사회적인 폐해의 문제가 아니고 조직종교가 진리의 길로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느냐 하는 인식론적인 문제이다. 이 점에 착안하면, 우리는 누구보다 함석헌의 종교관에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그는 일찍부터 조직 종교에 몸담지 않고 새 종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을 역설해왔다.
현재와 미래의 종교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와 건덕지를 주는 또 다른 사상가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인도출신의 종교가 크리슈나무르티이다.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 (이하 크-티)는 현재의 종교형태를 탈피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다음에 올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는 주로 닮은 점을 중심으로 분석을 해나가 보자.  


   2. 함석헌의 허물벗기론/새종교론

 

평생을 야인의 대표처럼 살다간 함석헌 선생은 오산학교 교사가 그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그가 능력이 없어서 다시 직업을 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시대적 환경, 타고난 자유주의와 야인적 기질에 기인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사상과 삶의 스타일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준 영향의 차원에서 나름대로 그의 뜻을 펴나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종교, 교육, 농사에 뜻을 두고 살았다. 땅과 식물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캐어내며 진리를 찾고 그 찾은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씨 이라는 말속에 농축되어 있다. 조직적으로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온 국민을 상대로 씨 을 자아와 사회 속에서 가꾸는 법을 보여주었다.
일견 천성적인 듯한 함석헌의 조직불신은 살아오면서 그가 도달한 소신에 뿌리를 둔 생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직에 대한 불신은 단순한 조직기피증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인류의 문명사와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수난사)를 꿰뚫어 보고 낸 결론적 선언이었다. 조직중의 조직이라 할 국가와 정부는 인류가 살아오면서 한 때는 필요한 기구였을 지 모르지만 이제는 인류가 성장해서 이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공과를 따져보면 분명하다. 국가라는 이름 밑에 소수의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는가. 지금도 세계를 돌아보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뱀이 그 동안 입어온 허물을 벗어버리듯 인류가 벗어버려야 할 껍질(구각)이다. 일종의 아나키즘적인 입장으로 들리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단정적으로 어떤 주의로 나아가자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이념주의자는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예수도 '프로그램 없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역점을 둔다. 그 다음에 올 것은 씨 인 민중이 알아서 하게 놔두어야 한다. 그가 좋아하는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의 철학이 여기 끼어 든다. 破邪顯正의 참 뜻도 그러하다. 그릇된 것을 지적, 비판하면, 바른 것은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조직이라는 것은 그래서 나쁜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스스로 고쳐가면서 잘 되어갈 것을 놔두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일이 끝내 그르쳐지는 것이다. 마치 이 농사 저 농사 지으라고 정부에서 하는 말 듣다 농사를 다 그르치고 정부주도의 협동조합들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요새 통합한다 하니까 그로 인해서 기득권을 잃을 사람들이 반대성명서를 내고 야단이다. 정부라는 조직이 왜 소용없는 것인지 함석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오늘의 종교들은 다 국가주의와 그런 관계에까지 들어가 있다, 그 말입니다.  나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 인류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은 국가지상주의라고 단정하는 사람입니다. 국가는 인류의 소년기에 그것을 돌봐준 후견인의 공로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 이미 성인기에 든 오늘에 와서까지 후견인의 옛 버릇을 놓지 못하고 간섭한다면 이제는 은인이 아니라 망쳐주는 원수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인간은 이미 소년기 이후부터 하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상 행위의 완전 자유가 있고, 그래야 정신적 존재로서 성인 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까지의 역사에서 국가가 후견인으로서의 자격을 넘어서 간교하게 인간을 제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폐해가 오늘의 세계의 고민입니다. 이제라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그 잘못을 크게 깨닫고 그 국가주의의 이빨과 발톱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이유는 너무 깊이 관계하여 혼의 핵심에까지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탄의 비밀이라하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民族觀〉, 전집 12-129)  

정치조직만이 아니라 함석헌은 종교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사탄의 비밀을 이미 안 현대 종교는 아마 그 불의의 연인 국가지상주의와 운명을 같이하여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거다.... 종교는 일단 죽어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전집 12-130)  함석헌은 일찍이 일본유학 시절부터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교회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무조직적이었다. 무교회주의의 주창자 우찌무라는 우찌무라이고 자기는 자기라고 주장했다. 똑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직이나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자유인이었다. 사람마다 다른 개성이 있기에 한 통속으로 한 조직에 묶일 수 없다는 말이다. 나중에 퀘이커 모임에 몸담은 것은 그가 받드는 비폭력을 실천하는 집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장 비조직적인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모임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모임을 종교친우회라 부른다. 친우회 정도로 생각하고 모이는 것이다. 그냥 먹고 마시는 동창회 같은 친우회가 아니고 종교를 생각하는 모임이라 종교친우회라고 한 것이다. 가끔 모여서 같이 명상하고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틀은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점을 함선생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직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조직이라기보다는 단체이다. 그 친우회를 함선생이 선호하게 된 것은 그가 받드는 삶의 원리인 비폭력주의를 실천하는 단체라는 점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를 하거나 의식을 집전하는 중재자 없이 말없는 침묵과 명상 속에서 진리를 인식, 체험하는 것을 모임의 내용으로 삼는다는 점이 또한 그의 종교관과 일치했던 것이다. 종교라는 말도 근본을 가르치는 체계를 지칭하는 것이지 외형적인 조직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현실적인 인간에게 조직이나 단체가 없을 수 없다고 구태여 말한다면 그것은 작을수록 좋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주장은 경제원리만이 아니고 종교에도 적용된다.
  
조직의 폐해는 거기에 속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는 스스로 찾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는데 조직으로서의 종교는 개인이 스스로 함이 없이 다른 중간매체에 의존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교회는 원래의 뜻을 벗어난 비대한 조직이 되어버렸다. 교회의 뜻은 종교모임이란 말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조직을 위한 조직처럼 되어서 개인은 왜소해졌다. 모임은 어디 가고 큰 건물과 조직만 남아있다. 마치 큰 교회에 속하면 그만큼 구원이 더 확실하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데 문제가 있다. 결국 진리나 하나님은 사람사람이 직접 현실과 자신에 맞서서 스스로 찾아야할 대상이다.  

불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깨달음을 찾는 가르침으로 출발한 종교가 오늘날 큰 조직이 되어 얼마전 조계사 난입사건처럼 아수라장을 연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육도중생의 고해에서 해탈하자는 목적도 무색하게 육도중생 가운데 스스로가 인간보다 못한 아수라들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하나가 수백만 신도를 잃게 만들었다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불교에 동정이나 향심을 가진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였다. 머리 깎고 중옷 입고 큰 절을 차지하고 신도들의 보시나 받고 편하게 살면 윤회를 벗어나 제도된다는 착각에 빠진 무리들이다. 차라리 환속하여 세속가운데서 도를 닦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조계종 같은 거대한 조직을 해체하고 퀘이커 종교친우회처럼 '선우회'(善友會) 정도로 작은모임들로 갈라서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을는지 모른다. 善知識이라고도 하는 선우 (kalyana-mitra, good friends), 좋은 친구들의 모임 얼마나 좋은 말인가. 같은 길을 가는 길벗(道伴)들의 모임 정도라 해도 좋다. 이 땅의 불교는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대승이기는커녕 자기구제만 일삼는다고 하는 소승만도 못한 위치로 전락했다.

어떤 이름난 스님은 세속적인 가치의 대표인 박사학위(명예)를 너무 좋아해서 99개까지 탔다하고 스스로를 世界法皇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든 조직 속에서 군림하다가 돌아갔다. 조직광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기서 최근에 한국불교를 주름잡다 몇 해전 열반한 스님이 남긴 涅槃頌이 생각난다.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심오한 숨은 뜻이 담겨있는 글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내가 평생 남녀를 속인 죄가 수미산을 지나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을 참회한다"는 취지가 들어있다. 이 겸양 섞인 표현을 직설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조직종교의 수장까지 오른 분이 마지막 고해하는 말이 어느 면으로 진실이 담겨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조직종교의 폐해를 지적한 말일 수 있다. 조직에서 위계가 높아질수록 그 기대는 높아지고 그만큼 그가 모든 것을 갖다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신자들은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기 마련일 것이다. 오죽하면 자기를 만나려면 삼천배를 하고 오라고 했을까. 스스로 이룬 실제 깨달음이 자기 위계와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못 미쳐 실상을 솔직하게 고백, 참회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보고 따른 사람들에게 죄지은 것 같이 느꼈기 때문일 듯하다. 불경에 나타난 것을 보자면, 석가모니가 입적할 때, 제자들이 이제 누구를 따르고 배우느냐고 물으니까 "법을 등불로 삼고 깨달아가라, 자기를 등불로 삼고 깨달아가라" (法燈明自燈明) 고 했다한 것이 바른 말이다. 따로 종교조직을 만들어 의지하고 살아가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특별히 어떤 제자에게 법을 부촉한다든지 법통을 이어받으라고 전해주지는 않았다. 중국불교, 특히 禪家에서는 마치 석가가 제자 가섭에게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해준 것처럼 가섭을 제2조라고 세우고 보리달마를 제28조요 선가의 제1조라고 족보를 만들어 6조까지 이름을 열거해놨다. 다 근거없는 종파싸움, 밥그릇 싸움에서 나온 조작이요 신화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 경전의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한 것이 있다"(以心傳心敎外別傳)는 것은 적어도 석가모니와 인도불교에 있어서는 괜한 헛소리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불교도 근래 사이비 종교들이 창시자가 아들이나 친인척에게 대물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불교 조직안에서 헛소리라고 말한다면 아마 오역죄(五逆罪)라도 되는 양 취급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불교가 그만큼 조직이 비대해지고 경직되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국불교에서까지 끌고 와서 조계종 안에서도 누가 정통이냐를 놓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조계종의 법통을 중국에까지 가서 실제로 받아온 것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쪽이 있다. 불교는 그 근본을 말하면 어떤 식으로나 어디서나 깨달으면 불자이지 딴 것이 아니다. 중옷 입었다고 꼭 더 유리할 것도 없다. 법맥 따지고 종파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한국불교사의 대표적인 두 고승인 원효, 지눌은 스스로 깨친 분들이었다. 불상 앞에 가서 절하는 것조차, 그것이 깨침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몰라도, 일시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는 있어도, 공연한 짓이다. 추우면 불상이라도 쪼개서 불을 때는 우상파괴주의적(iconoclast) 정신이 禪家에 흐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함선생도 참회의 게송을 남긴 고승과 비슷한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무신론자의 주장을 해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이란 사람이 상상해낸 거다" 그 말하게 돼 있어요.  물론 그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거지만, 그러니까 종교 치고 거짓말해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 들어가지 않은 종교는 없는데, 세상에 누가 제일 거짓말을 많이 하냐 하면 종교가 제일 거짓말을 많이 해요.  난 오늘 아침에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어요.  "나도 거짓말 참 많이 했다."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많이 했다."  하나님 언제 보았어? 보지도 않은 걸 내가 분명히 안다고 그러고, 그게 거짓말 아니에요? 그러고 또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지식 가진 사람들이 무식한 걸 묶어두고 지배해먹기 위해서 자꾸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 죄, 죄가 무슨 죄냐?  죄인이라고 그래서 자꾸 공포심을 주어가지고 거기 얽매여서 그런다고 그러는데, 그걸 읽으면서 참 인정을 안할 수 없던데요.  뭐 그전에도 그런 생각을 아니한 건 아니고 또 하기도 했지만, 그걸 아주 세계적으로 잡지를 내서 보내고 그러니까 "이 종교가 옛날에 비해 자꾸 약해져간다.  마지막에 가면 이제 종교 없는 시대가 올거다" 그러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으려거든 그보다는 높은 차윈에서, 깊은 차원에서 무엇을 체험한 것이 있지 않고는 그런 헤픈 소리를 하지 않아야 되요." (〈무신론, 거짓종교, 참종교〉, 전집 15-15)

여기서 함선생도 불자처럼 "깨달아야 하는 거", "체험한 것"을 중시한다. 이것을 촉발하거나 얻게 하지 못하는 종교 조직은 그 궁극적 사명을 못한 것이 된다. 깨달음은 자기개혁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자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 없이 종교를 믿는다고 아무리 오래 자랑하더라도 자기 위안이나 심리적인 스트레스 해소일 뿐이지 궁극적이 의미에서 소용없는 짓일 지 모른다. 남 보기에 더 할 수 없이 경건하게 보이고 높은 직책에까지 갔다고 하드라도 스스로 달라짐 없이는 나무아미타불일 터이다. 스스로의 영적인 위치를 인식하고 남 앞에서 적어도 지도자랍시고 헛소리를 치지 않는 겸손함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르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는 것은 여기에 맞는 말이다. 알아도 침묵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1979년이라고 기억되는데, 함 선생이 미국에 왔다가 캐나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일요일이 되어서 토론토 퀘이커 모임에 갈 때 필자도 따라갔다. 명상 시간이 진행되는 도중에 누군가 일어나서 이러쿵저러쿵 무슨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영적으로 의미 있는 얘기 같지 않았다. 듣고 있다가 함 선생이 나지막한 소리로 "저 친구 스트레스 푸는군"하고 코멘트를 했다. 물론 우리말을 옆에 있는 나밖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함 선생 자신이 친우회 모임에서 말씀을 자주 한 편이라면 그것은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영적으로 한 걸음 앞서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평생 광야의 소리일 망정 자신 있게 큰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닐까. 그는 이 현실에서는 침묵보다는 소리가 더 나은 방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 천년동안 눌려있는 씨 의 소리를 뱉어내지 않고는 속에서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모두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씨 의 소리를 펼쳐야 할 차례다.

함석헌 선생은 기존하는 종교체제들이 시대에 맞지 않음과 그 실질적인 무용론을 내세운 예언자요 종교개혁주의자였다. 이에 관한 그의 입장은 "내가 믿는 예수"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다소 길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심정으로 그 생각이 담긴 부분을 읽어보자.
  
나야 소심익익(小心翼翼)의 위인이지 큰 것을 자담(自擔)하고 나서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앞을 보고 싶지, 있다는 것을 내 가슴에 미리 가지고 싶지, 이젠 여기서 무엇에 들러붙은 생각이 없습니다.  내 따위로도 약간 내 무리를 만들라면 못할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느 선생이라거나 어느 주의라거나 그대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 합시다.  무교회주의의 깃발을 들고 그 '진영'(陣營)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한다면 나를 따르고 좋다 할 사람이 얼마쯤 있을 줄 압니다마는 나는 그것은 싫습니다. 내 양심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이 참이 아닙니다.  아버지 품에는 나만이 아닙니다. 진리의 산에는 오르는 길이 이 길만이 아닙니다. 나만이 전부를 다 안 것이 아닙니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입니다. 이 곧 길(道)이기 때문에. 하지만 상대(相對)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썽이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란 것은 상대계(相對界)의 일이지 절대가 아닙니다. 기독교조차도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입니다. 그러니깐 나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사람은 상대적인 좁은 소견에 잡힌 생각입니다. 그것이 곧 교파심(敎派心) 입니다.  종교로 하면 기독교도 겸손히 일종교(一宗敎)로 자인하여야 사람을 참으로 교도(敎導)할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사람이라야만 유일절대(唯一絶對)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지경에 계셨다면 십자가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십이영(十二營) 더 되는 천사도 부리려면 부릴 수 있는 이가 아니 부리시고 묵묵히 십자가로 나가신 것은 종교라는 그런 엉터리를 만들잔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라 이름하고 나오면 엉터리입니다. 엉터리 중에 제일 나은 엉터리이기 때문에 제일 나쁜 엉터리입니다. 종교만이겠어요. 사람의 하는 것이 엉터리 아닌 것이 무엇이겠어요. 일체(一切)를 엉터리로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데서 갈립니다. 엉터리는 이용하는 거지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종교란 것이 없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 그 엉터리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집,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나님을 가두어둘 만큼 클 수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도 남이 하는 대로 규례(規例) 따라 엉터리를 이용하기는 했습니다. 제자도 뽑고, 사도(使徒) 도 택하고, 그러나 거기 집착은 아니했습니다. 자기 간 후에 성령을 모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다고 했지, 자기의 엉터리를 꼭 계속 유지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이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를 믿으면 나도 그와 같이 어느 엉터리에나 붙잡히지 않고 자유의 영(靈)으로 살 것입니다.  기독교 신도라는 사람들 어때요?  예수를 교조(敎祖)라 할 때 듣기 좋아요?  싫어요?  싫지.  분명 그것은 싫어합니다.  어떤 정통주의자(正統主義者)도 그것은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예수는 교조는 아닙니다.  예수를 제일교조(第一敎祖)라 아니하거든 기독교를 주장하지 말라 하셔요.  기독교를 가지고 하늘나라는 못 갑니다. 하늘나라는 그것까지도 버린 알 영(靈)만이 들어갈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문을 하지만 학문에는 학교를 가지고 못 들어가지 않아요 기독교도들이 낙담상혼(落膽喪魂)을 할지는 몰라도 또 그러지 않는다면 이를 갈고 달려들는지 몰라도 기독교를 가지고 하늘나라는 못 들어갑니다. 보셔요, 이제 지금은 미친 듯한 내 말이 이따는 당연한 진리로 알려지는 때가 오지 않나.  이것은 나만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말이 아닙니다. ........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같이 더듬어가는 이 길이지, 찾아가는 아버지지 나만 아들이란 게 어디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 어린 소견에 열심을 내라고 내가 너만을 아들이라 했습니다만, 장성한 담에는 나만이 아들이 아닌 줄을 알아야 참 아들 노릇할 것입니다. 유대인을 실패(失敗)시킨 것이 무엇이에요? 바로 그 생각이지, 그런데 우리가 또 그래? 안될 말입니다. 이 담을 헐어버리면 허전해 못 살 것 같지. 그것이 어린 맘입니다.  무얼 그래, 이제 있다는 그 담이, 기독교라는 담조차 다 헐리는 날이 올 터인데.  그럼 네 집의 추태(醜態)가 곧 빤히 드러나요.  그래서 서로 내 놓고 청산하고 한집 되면 그때 정말로 기쁘지 않아요. (〈내가 믿는 예수〉, 전집 9권 314-316)

이 말씀은 사람들이 종교를 조직해서 허울을 세우고 담을 쌓는 것이 얼마나 무위한 일인지 잘 지적하고 있다. 다만 방편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조직자체는 '엉터리'이다. 불교에서는 가르침(敎學)체계를 방편이라고 하면서 수단으로서의 상대적 가치만을 인정하는데 함석헌의 '엉터리'는 이보다 한 술 더 뜨는 표현이다. 방편은 개인의 개성, 바탕능력(根機), 및 상황 등을 고려하여 적용하는 그때그때 적합한 가르침을 가리킨다. '엉터리’는 방편의 뜻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이다. 모든 종교는 방편이거나 엉터리이다. 무슨 종교, 무슨 종교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진리자체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종교의 조직화, 절대화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본말전도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종교의 외형이 비대해지고 물량적인 확대가 일삼아지면서 조직자체의 비대화, 절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거야말로 우상화,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은 보수적이 되고싶어서 보수적이 아니고 양심과는 별도로 웬만하면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안주하여 어렵게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잘못 되어가고 있는 화석화한 기존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체제에 빌붙어 살기마련이라 그냥 그대로 눅어 지내게 된다. 함 선생은 “기성종교는, 기독교까지 포함해서, 격변하는 역사에 앞장을 서서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사명을 능히 다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오늘의 기성종교들은 다 국가주의와 붙어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역사 속의 민족관〉) 진단한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세상이 이렇게 어두운 게 다른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더욱이 정치하고 종교가 결탁해 가지고 그저 무식한 사람을 '너희 다 죄 지었다' 그러고 '하나님 무서우니라' 하면서 돈을 긁어먹는,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선 아주 대규모로 되고 있기 때문 아니겠어요?" (〈무신론, 거짓종교, 참종교 〉, 전집 15-15). 1984년에 한 이 말씀은 지금 현실에 더 맞으면 맞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특징의 하나로 치는 호국불교도 자세히 알고 보면 씨 과는 관계없는 정교유착의 산물이라 할만한 요소가 다분하다. 국가조직과 '붙어먹는' 쪽은 조직화한 종교이지 씨 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함 선생이 분명히 밝히지 못한 점은 조직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조직하면 부패, 타락한다는 것이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미쳐 주의를 환기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새 종교의 출현을 대망하는 걸 보면 더욱 그렇게 보인다. 어떻든 많은 사람들은 마르틴 루터나 함석헌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개혁을 부르짖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는 지금 이런 형편에 있다. 생각은 있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아무 잃을 것이 없는 맨 사람이라 그런 소리를 내 지를 수 있었다. 그는 삶을 끊임없이 개혁하고 잘못된 현실에 저항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생각하고 저항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부르짖었다.


  3. 크리슈나무르티의 종교무용론/총체적자유론

 

함석헌 선생이 제시한 예언자적인 길이 다른 데도 없었는지 동서사상을 더듬어 보자면 인도 쪽에서 마주치는 종교인이 있다. 우리에게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1895-1986)가 바로 그 이다. 함 선생과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산 동시대인이다.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정신적 공백기를 틈타 서구에 밀려온 인도의 성자들, 즉, 마헤리쉬 요기, 라즈니쉬 등의 가르침, 하레 크리슈나 (Hare Krishna) 운동과 같은 조직이나 종파로 생각할 지 모르나 그들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조직에 대한 태도와 진리인식 방법론에서 갈라진다. 인도의 성자들이나 수행자들은 비교적 조직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인생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수학기, 가정(在家者) 생활, 삼림에 들어가 지내는 시기, 그리고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수행하는 포기자 (산냐신 sannyasin) 생활이 그 네 단계인데 마지막 단계인 산냐신은 그야말로 무소유의 순수한 삶으로 조직종교에 의탁하는 것이 아닌 운수납자나 사문 스타일이다.  크-티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처음에는 조직종교와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열 네살 때, 부친이 근무하던 마드라스 소재 국제신지(神智 theosophy) 협회 본부 경내로 이주하여 살면서 그 간부들의 눈에 비상한 영적 능력과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발견된다. 호주출신의 여인 베산트 부인이 회장인 협회의 회원들은 "세계 법사"("World Teacher")라고 부르는 메시아나 미륵 같은 존재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그 준비를 위하여 "동방성단" (東方聖團 The Order of the Star in the East)를 조직하여 크-티를 그 우두머리로 앉혔다. 1912년 크-티는 정식으로 세계법사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1929년 홀랜드 집회에서 3000명의 추종자 앞에서 그는 "진리는 길 없는 곳"(Truth Is a Pathless Land)이라는 강연을 통해서 이 교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이로서 크-티는 그에게 맡겨진 모든 재산권, 권력, 권위를 다 거부하였다. 무소유의 자유인이 된 것이다. 나머지 60년 가까운 여생 동안 유럽, 미국, 인도,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를 돌아다니면서 그의 말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면서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을 주로 하였고 여기저기에 실험학교 같은 것을 세워 뜻을 펴나갔다. 그의 강연집과 저술은 20여개 국어로 번역되어 종교와 진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어떤 책은 장기간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그의 존재가 알려져 왔다.
 
크-티의 교단 해체선언은 그가 그의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도달한 진리관과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가 해체선언을 한 강연의 주제는 진리는 미리 닦여진 길(path)을 통해서 이를 수 있는 데 있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다. 큰 도는 따로 들어가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는 말과 통한다. 미리 닦여진 길은 조직을 가르킨다. 자기의 영성을 찾고, 행복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절대 남한테 의존해서 될 일이 아니다. 스스로가 직접 찾고, 추구하고, 얻어야 하는 것들이다. "어떤 조직도 인간을 영성으로 이끌 수 없다"(No organization can lead man to spirituality). 진리는 어떤 종교나 종파 또는 어떠한 통로를 통해서도 이를 수 없다. 진리는 무한하고, 조건지워지는 것이 아니라서 조직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조직하여 완성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조직하면 죽어버리고 결정체처럼 굳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되는 신조나 종파, 종교가 되어버린다. 위에서 함 선생도 지적한 바 있듯이 이들은 이기주의적인 안전을 찾는 개인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공포에 기초를 둔, 인간을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지속시키거나 영원불멸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한 공포가 생기고 권위를 행사하는 주체가 생겨나게 된다. 종교나 조직화된 신앙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틀밖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개인은 공포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많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환상들의 망에서 깨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일대 자기 혁명이 필요하다. 자기혁명을 위해서는 자기가 갇혀있는 우리를 인식하고 참다운 지혜를 발휘하여 자각을 이루어야 한다. 이 사상체계에서 저 사상체계로, 이 스승에서 저 스승으로 옮겨다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크-티는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정파나 종교에 속하면 이들이 요구하는 제한된 관점과 편견의 장막에 가린 채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 취지를 이해하고 모든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하나만 옆에 있어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따르는 순간 진리를 따르기를 멈추는 것이 된다. 모든 추종은 자기완성에 해가 된다. 진리는 스스로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깨달아야할 대상이지 어떤 조직이나 권위, 외형적인 것에 의존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크-티의 역할과 관심은 인간을 절대적, 무조건적으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도움을 주는 데 있다. 사상 체계를 가져다주자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깨우자는 것이 그의 가르침, 담화의 목적이다. 자기도 누구도 "세계의 법사"가 될 수 없다. 조직은 필요하지 않지만 자기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열심히 찾는 길벗들의 모임은 있는 것이 좋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종교적 카리스마와 신앙에 기초하기보다는 大悟체험까지 이른 자신의 깨달음과 독특한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있다. 여느 종교적 가르침과는 다르게 보이지만 인도의 철학전통에 깊이 뿌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 인식론, 선불교와도 통한다. 여기서 다시 크-티의 가르침의 핵심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크리슈나므르티 재단의 출판물에 정리되어있는 것을 옮긴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조직을 통해서나, 어떤 신조를 통해서도, 어떤 교리나, 사제, 또는 儀式을 통해서도, 어떤 철학적인 지식 또는 심리학적인 技術을 통해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 스스로가 관계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지적인 분석이나 內省的인 해부(introspective dissection)를 통해서가 아니고, 관찰(observation)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은 안전감(sense of security)으로서 자기 속에 종교적, 정치적, 인격적인 형상을 구축해왔다. 이것들은 상징, 관념, 신앙들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인간의 사고, 관계,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짐(burden)이 된다. 이들은 우리의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개인의 인식은 이미 자기 마음속에 설정된 개념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인간의 의식 내용은 바로 이 의식 자체일 뿐이다. 이 내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다. 개성(individuality)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이름, 형태, 그리고 그가 주위환경에서 획득한 피상적인 문화일 뿐이다. 개인의 독특성은 피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의식의 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함 (total freedom from the content of consciousness) 속에 있다.

자유는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자유는 선택이 아니다. 선택이 있어서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허식이다. 자유는 [불순한] 동기 없는 순수한 관찰이요, 자유는 인간 진화의 끝에 있지도 않으며 존재의 첫 걸음에 있다. 관찰은 자유가 없음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유는 우리의 일상 존재를 선택 없이 파악하는 데 있다.
생각은 시간이다. 생각은 시간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체험과 지식에서 나온다.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적이다. 우리의 행동은 지식과 그 때문에 생긴 시간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항상 과거에 노예가 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알게되면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 관찰자와 관찰대상, 체험자와 체험 사이의 구분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구분이 망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순수한 관찰이 되어지는데 이것은 과거의 어떠한 그림자도 없는 통찰이다. 이 무시간적인 꿰뚫어 봄(timeless insight)이 마음 속에서 깊은 근본적 변화(deep radical change)를 가져온다.


  4. 맺는 말

 

20세기의 대부분을 비슷하게 같이 살다간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는 현재의 종교체제는 진리인식과 자아혁신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주장 속에서 만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와야 할 종교의 모습에 대해서는 똑 같지 않다. 함 선생은 현대 종교가 사라지고 새 종교가 나타나야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방편성을 인정한다. 크-티는 종교는 현재나 미래나 조직으로서 무가치한 장애물이 되는 것만이 아니고 사고체계로서도 진리인식에 장애가 된다고 믿는다. 그는 종교가 대표하는 모든 조직, 허울, 전통, 이념, 이상, 편견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편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함석헌은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형태에 대해서는 개인의 판단을 유보한다. 파사(破邪)가 곧 현정(顯正)이라는 파사현정의 원래 의미에 충실하다. 그건 하나님이나 씨 이 결정해갈 문제이고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석헌도 바람직한 종교 추구의 형태는 무조직적인 조직, 즉 작은 모임과 같은 소집단운동의 성격을 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크-티가 주장하는 모임의 성격과 마주치고 있음을 본다. 다시 말해서 함석헌의 새 종교는 앞으로 형성되어야할 것이지만 어쩌면 다름 아닌 크-티의 길을 가리키게 될런지도 알 수 없다.
 
두 종교관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수 있다. 아무리 외쳐도 종교조직은 현실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을 지 모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라면, 정치고 종교건 간에 조직은 없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럴 수 없을 바엔 될수록 작게 만들어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을수록 아름답고' 인간다운 경제제도(슈마허)라는 주장이나 미국 학자 존 로울즈의 '極小 정부'(minimal government) 이론이 바로 이러한 원리이다.

인간세계가 존재하는 한 개인마다 다른 타고난 역량과 기질, 수준, 환경에 따른 방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함석헌의 새 종교나 크-티의 순수 직관적인 자아 분석 및 투시 역시 다 일종의 방편이다. 자기의 처지와 이해수준에 따라서 어떤 것이 특별히 더 적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직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조직에 몸담는 것과 조직이 온전하다고 믿고 조직원이 되는 것과는 살아가는 태도와 종교적 인식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종교관은 선택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이 되거나, 아니면 자기가 택하고 있는 기존의 종교관을 수정 보완시켜주는 영양소로 삼을 수도 있다.

조직이 주는 역기능과 폐해는 종교만이 아니고 한국사회의 다른 면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면에서 아직 해결해야할 과제는 재벌의 존재이다. 일상생활에서 재벌을 거치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이다. 경제, 금융은 물론 스포츠, 언론, 대학에까지 마수가 뻗치고 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역까지, 개인의 심신을 지배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몇 대 재벌이 상징하는 단순한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국민의 심신을 이리저리 얽어매고 있다. 국민을 구속하는 다른 또 한 가지 조직은 교육체계이다. 어떻게 뽑고 (입학시험제도) 어떻게 가르치는가는 (커리큘럼) 대학과 자치단체 교육청에 맡겨버리면 될 일을 관료집단이 간섭하고 재단과 유착하는 바람에 학생들, 학부형, 교육자들 할 것 없이 국민 모두가 고통 당하는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이 모두가 정부라는 비대한 조직, 재벌이라는 공룡화한 조직이 주는 폐해들이다. 조직은 종교만이 문제가 아니고, 정치, 경제, 교육에도 문제가 된다. 정경유착이 잘 나타내는 것처럼 이 모두가 한 사회 속에서 불가분의 유기적인 관계를 갖기 때문에 종교만을 비조직화한다고 종교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는 사회와 세계의 당면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비판한 현실참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