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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저항사상(김삼웅)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6.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사상연구회 12월연구발표회 2003.2월 8일

 

 

함석헌의 저항사상


김삼웅(성균관대학 겸임교수)


저항정신의 본바탕


함석헌은 본디 태어나기를 온순한 천성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 ․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겸손과 겸양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저항의 인물이 되고 그 저항을 통해서 항일 ․ 반분단 ․ 반독재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씨의 올갱이가 되었다. “내가 반항을 좋아한다면 또 그만치 못지않게 순종 ․ 온건 ․ 평화도 좋아한다. 반항은 나의 후천적으로, 의식적으로, 뜻으로, 사상으로 하는 것인지 몰라도 평화는 내 선천적으로, 바탕으로, 감정으로 된 대로 하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온순으로 났다. 인간 세상에 나서부터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 건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다.” 1)

함석헌은 영국의 시인 셸리를 좋아했다.  특히 ‘서풍의 노래’를 좋아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라는 마지막 구절을 즐겨 인용하면서 셸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 압박 ․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 서풍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어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반항 ․ 항의 ․ 생명의 바탕이 만일 자유에 있다면, 그 자유는 구속하고 뺏으려는 세력이 밖에서 오고 말라붙으려는 제도, 전통의 때가 안에서 꺼려 할 때, 거기에 대해 일어나 겨루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귀한 도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영어를 나는 모르지만, 그 중에 resist란 말처럼 좋은 것은 없다. resit ․ revolt ․ protest, 다 좋은 말이다. 만일 resist란 말이 없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다.”2)


셸리의 저항정신은 함석헌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다. resist(저항),  revolt(반항), protest(항의)는 모두 저항정신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셸리의 ‘서풍의 노래’를 통해 포악한 독재에 시달리는 씨들을 위로하면서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의 시구는 분단과 냉전과 정치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씨에게 ‘새 봄’ 으로 상징되는 해방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은 ‘저항의 철학’3) 이란 글에서 보다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는 인격을 저항으로 인식한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고 서슴없이 갈파한다. 직접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 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함석헌은 저항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하였다. 저항에서 인격을 찾고, 인격의 원리로써 저항을 택한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 있어서도, 자유의 원리,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그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4)고 주장한다. 함석헌이 ‘저항’에 관해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살펴본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 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쏘아 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라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5)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앉은 듯한, 그러한 모양을 표시하는 그 운동이란 말은, 곧 영겁의 침묵을 깨치려는 첫 말씀의 고민이요, 무한 깊음의 혼탁을 뚫고 나오려는 코스모스의 몸부림이요, 원시의 어둠을 한 칼에 쪼개려는 빛의 떨림이었다.”6)


함석헌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비폭력 저항주의자이다. 이에 따라 반체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두고 저항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짓’ 이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역사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반항은 하지만 미워하지 말고 싸움은 하지만 주먹질을 말라”고 비폭력 저항을 주창하였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딱 한 차례 ‘폭력’을 사용한 적이 있다. 성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 함석헌도 구조악 또는 공권력에 의한 현장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한 것이다. 여성인권운동가 이우정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은,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실천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던 때의 일이다. 농성을 하던 기자들을 깡패와 경찰을 투입해서 끌어내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많이 구타를 당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고, 부패정권의 포악을 폭로하는 증인이 되고자 해서였다. 우리가 도착해서 항의나 시위를 할 사이도 없이 함선생님과 나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와 공덕귀 선생님(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은 경찰차에 쑤셔넣듯이 떠밀려 태워졌다. 그런데 함선생이 벼락같이 소리를 치시더니 우리를 떠미는 순경의 뺨을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순경도 우리도 갑작스런 함선생의 행동에 잠시 벙벙했다. 나는 경찰차 (4인승의 조그만 차였다) 속에서 공선생님과 함께 함선생님을 놀리면서 실컷 웃었다. 왜냐하면 항상 비폭력투쟁을 강조하시면서 젊은이들이 경찰에 대해 욕을 하거나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을 극구 말리시고 경계하시던 분이 느닷없이 경찰의 뺨을 후려치셨기 때문이다. (…) 나는 함선생님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것은 당신이 경찰에 떠밀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선생님과 나를 그렇게도 거칠게 질질 끌고 가서 차 속에 쑤셔 넣는 것을 보시고 격노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한 자를 함부로 다루는 권력의 횡포에 참으실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던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느냐고 물어도 쑥스러운 듯이 그냥 웃기만 하시던 모습은 꼭 부끄럼 타는 소년과 같았고, 그 인상은 지금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7)


함석헌은 어느 글에서 “이성과 감정이 싸울 때 감정의 편에 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을 액면대로 이성 보다는 감정을 택한 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서툰 분석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자인 함석헌의 비폭력사상은 폭력으로 무장한 구조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제국주의,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한 것은 그것이 비인간적인 구조악의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송기득은 “저항하는 사람이 영웅주의에 빠지면 참 저항자가 되지 못한다.”8)고 했다. 어떤 뜻으로는 지배에의 순응에 이미 말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만 함석헌이 경찰관의 뺨을 때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감정적이거나 권력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존재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행동인이었던 그는 스스로 용기를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로써 싸울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 말라고 했습니다”9)


함석헌의 비폭력저항은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다음에 인용한 ‘간디의 참모습’에서도 밝혔듯이 간디와 함석헌은 “싸울 실력이 없거든 폭력을 써서라도” 대적할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함석헌 저항사상의 본질이고, 철학이고, 실천윤리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10)


신학자 안병무에 따르면 “함석헌은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우찌무라에게서 성서, 타골 ․ 칼라일 ․ 라스키 ․ 노자 ․ 장자 ․ 바가받 기타에서 최근의 데미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11)

또 역시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12)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목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 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13)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14)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 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 ․ 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 ․ 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 이승훈 ․ 안창호 ․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 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이승만 독재, 5 ․ 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 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는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15)     

본디 행동인이었다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저항적인 행동주의자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먹물쟁이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투사이고 들사람이고 저항인이었다. 그에게서 행동과 실천성을 빼면 사상가이고, 철학자이고, 문명비평가이고 종교인이 된다. 시인이고 역사연구가이고 언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함석헌의 본령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식견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 식견과 학식은 행동과 실천을 위한 에너지요 무기요 군량미였을 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사상을 위한 사상,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학문, 실천을 위한 철학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실천을 배제한다면 평범한 저항적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애를 추적하면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행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일제식민지 시절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침묵할 때 그는 성서조선사건, 계우회사건, 독서회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 일제의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해방후 신의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북쪽에서 투옥되고 월남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서 투옥되었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행동하다가 잡혀들어간 것이다. 그의 고난의 대부분이 말이나 글 때문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하고 저항운동에 나선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자유당 독재가 극에 이르렀을 때 충남 천안의 씨농장에서 단식하면서 저항하고,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이나 삭발 단식투쟁을 벌이고, 1974년 11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한국신학대학생과 교수들이 삭발단식을 할 때, 이들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거침없이 머리깎고 단식을 함께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런 행동과 저항이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례를 들려드리겠다. 1971년 4월 19일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와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창립한 것은 함석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로 기록되는 ‘민수협’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정권에 도전한 이가 다름아닌 함석헌이었던 것이다.

‘민수협’은 70년대말부터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난 각계 인사들이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발아되었다. 이들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1인 장기집권을 막아내고자 1970년 4월8일 서울 YMCA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4・27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한데 이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서 김재준, 천관우, 이병린, 이병용, 장용, 김정례 등 6인으로 준비소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4월 19일 ‘민수협’을 정식 발족시키고,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민수협’은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발표, 인권탄압 사례 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이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긴급조치 시대 재야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민수협’의 지도자가 바로 함석헌이었고, 그는 모든 재야세력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해방후 함석헌의 저항적인 실천운동은 1964년 박정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을 붙였다. 야당이 주최하는 전국적인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반민족적인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1969년 박정권이 영구집권 야욕에서 자행한 3선개헌반대투쟁과 그 이후 반유신투쟁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함석헌이 참석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3.1 선언사건 등 반독재투쟁 앞장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 윤보선, 윤반웅, 문익환, 함세웅, 신현봉, 김승훈, 이문영, 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안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또한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 양순직, 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


저항으로 일관한 생애


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 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북한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전두환 세력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세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비노바바베의 초월사상이 삭여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 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종교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ㆍ평가ㆍ분석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