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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생애 (1901-1989)
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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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구분
작은 지면에 한 사람의 생애를 다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함석헌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요 실천가의 생애를 수박 겉할기식으로 더듬어 가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짚어가기 앞서 짧게나마 그의 생을 되짚어 보려는 것은 그의 모든 사상과 삶의 실천을 조망하는데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사상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생의 여러 사건과 계기를 통해 익어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 맘 날카론 맘 인생은 푸른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고 인생은 꺽인 갈대 한토막 막뚫린 피리
이 시에서 그는 인생을 크게 여섯시기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시 자체가 함석헌 자신의 생애 이해와 바램을 토대로 된 것이기에 그의 인생구분과 이해에 좋은 틀거리 역할을 하고 있다. 따 제1기 : "어린 순 날카론 맘" 〈1901∼1923〉
2. 생애의 발자취
1) "어린 맘 날카론 맘"(1901∼1923)
이 기간은 그가 태어나서 오산학교를 졸업할때까지의 시기이다.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부라면 원성동 사점, 일명 사자(獅子)섬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아버지 함형택(咸亨澤),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로서 당시의 명의였다고 전해지며, 어머니는 50세가 되도록 글을 모르시는 분이셨으나 두 분 모두 이성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계신분이셨다도 한다. 함석헌은 자신의 고향인 '사점'을 늘 가슴에 두고 사셨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적인 의미에서 고향이 아니라, 그 고향에 얽힌 정신을 그리워했다. 더욱이 청나라에 맞써 싸운 임경업 장군이 쌓은 산성들과 그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디를 헤매거나 사점은 내 고향이다. 내 속엔 사점이 있다.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이 있다. 나를 물아래서 감탕물을 먹고 자라나 하늘로 올라가고야 말려는 사자 새끼의 영혼을 받았다." 함석헌이 태어난 시기는 국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이 극심하게 대두된 시기였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처 그 폐해성이 극명하게 들어 나는 조선조 말기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때였다. 이에 일본은 자신의 패권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첫 희생양으로 조선을 선택하였고 세계 열강과의 담합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을 꾸준히 실현해가는 시기였다. 이와같이 함석헌의 생애의 출발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고난의 시작과 일치하고 있다.어린시절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충격적인 사건은 한일합방이었다. 그의 나이 열살때 일인데 그 자
2) "뜻 하늘에 달듯컨만"(1923∼1927년)
이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 시절이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그래 4월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된것은 민족의 새로운 길을 교육을 통해 펼치고자 교육에 뜻을 둔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3·1운동 이후 많은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대적으로 느끼고 있을 때였고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했다.
"그때 만세 이후에 민중은 부쩍 깨기 시작했으므로 교육열이 높았다. 그것은 오늘의 소위 교육열보다는 훨씬 참된 것이었다. 또 한편 다가오는 일본 자본주의의 압박 앞에 이러다가는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을 뿐아니라 민족적으로 온통 망해 버린다는 불안이 사회에 넘치는 때였다. 그러므로 교육이 가장 급하다는 생각에 사범의 길을 택했다."
일본에서 입학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를 경험하게 된다. 이 지진은 일본 동경의 3분를 잿더미로 만든 천재였지만 일본 군국주의가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빌미로 조선인을 폭동의 주범자로 모아 수천명을 살해하였다. 함석헌은 이 사건을 체험하면서 이 학살은 일본의 '조센징의 학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조선이 학살된 사건으로 보고 일본의 예견된 파멸을 예견 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유학시절 그가 처음에 직면하게 된 사상적 갈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민족을 건질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타당한가 하는 번민속에서 사로잡혔다. 그 갈등의 구체적 내용은 당시 민족의 상황이 혁명없이는 해방의 길이 없다는 판단과 그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또 그 사회주의는 기독교가 갖고있는 "도덕적 인도주의"를 무시하고있다는 인식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그는 당시의 비기독교적인 사회주의 윤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 상황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山)과의 만남은 하나의 빛이었다. 그와 우찌무라와의 만남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기독교의 진리'를 새롭게 깨닫고 신앙과 민족, 신앙과 애국 등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평생을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갈 것을 아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소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 있습니다. 속 어물려면 물론 아지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알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오산 시절에 이미 깨기 시작한 '혼'의 소리를 쫓아 다양한 사상들을 수용하면서 '뜻'을 향해 나간 시기이며, 이후에 전개될 함석헌 사상의 열매의 씨앗들이 심겨진 시기였다.
3) "외로운 길손" : 1928∼1947년
이 시기는 동경 유학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을 시작으로 해방후 월남하기 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다시 두시기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는 1928∼1938까지의 오산학교 선생시절이며, 두번째는 1938∼1947년 오산 교사이후부터 월남하기 전까지 기간이다.오산 교사시절은 함석헌 자신이 갖고 있었던 역사의식과 기독교정신(무교회신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정립해 가는 때이다. 귀국 후 그는 무교회 신앙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발간하고 거기에 '신앙의 참 본질'을 다루는 글들을 기고했다. 동시에 그는 역사 교사로서 올바른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고민 속에서 당시 무교회 신앙인들의 동인지였던 "성서조선" 에"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1932∼1934) 이 글은 30대초 눈으로 당시 만연되어 있던 "보수적 사관을 뒤엎고 연대기에 머문 사학계풍토에 사관을 갖고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사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왕권중심의 사관을 깨고 '반역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았고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한국사를 세계사의 지평, 그리고 그것도 넘어서 역사 밖에서 역사를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민족의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직시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갖는 "뜻" 밝혀내고 있다.
"지금은 나는 사람의 삶을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때는 아직 개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바로 되면 사뢰는 저절로 바로된다. 다라서 개인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적이요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때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가치관으로 인해 함석헌은 일제의 억압을 몰아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정치적 투쟁, 조직적 투쟁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으며 다만 종교와 교육과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서대문 형무소 생활 이후에 다시 귀향해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농사일에 전념하는데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8·15해방이 다시금 그를 역사의 무대에 나서게 한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용암포 자치위원장, 그리고 군 자치위원장자격으로서 신의주에 파견되어 평북 자치위원회 무교담당을 맡게 된다. 이것이 그의 사회·정치적 활동의 첫 시작이었다. 그가 월남하게된 경위는 신의주 교육담당으로 있을 당시 용암포 군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李龍洽)의 횡포에 대항한 용암포사건이 도화선되어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학생사건(新義州學生事件)에서 비롯되었다. 함석헌은 이 사건의 배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제는 소련군의총칼 앞에서 사생의 길을 걷게된다. 당시 소련군의 총부리 앞에서 서있었던 그때의 심정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것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똑똑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양을 그리라 해도 그릴 수 있다. 숨결이 높아졌다는 기억도 겁이 났다는 기억도 없다. 열인지 스물인지 알 수 없는 총부리와 칼과 피스톨이 내 가슴에 방사선형으로 와 닿을 때 번 듯 내 속에 비친 말은 '오늘은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순간 '이왕 죽는 것이면 비겁하게 해선 못 쓰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다. 그때 남향을 하고 서 있었는데 그저 뵈는 대로 저 먼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하다는 생각도 그들이 밉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이란 생각, 믿는다는 생각, 옳은 도리라는 생각, 평생에 배우고 지켜온 것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그를 살려냈다. 그는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후 그는 출옥되었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험분자'라 분류되어 보안대의 감시 속에서 재수감의 생활을 반복한다. 그것까지는 견딜만했는데 급기야는 스파이 활동의 강요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결심으로 결국 1947년 2월 26일 월남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이 약 20년의 삶은 개인적 그리고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서 점점 정치적, 현실역사적 차원에로 접어들게 되는 시기이다. 민족고난의 현장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민중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와 무교회 신앙을 서서히 벗어나 신앙의 실천적 이해를 넓히는 시기며, 동시에 실패와 좌절의 연속 속에서 고난의 실제적인 차원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4) "다시금 하늘 우러러" : 1947∼1962
1947년 2월 26일 월남하여, 그해 3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유영모 선생과 재회하게 된다. 이 재회는 그로 하여금 사상의 지평을 동양 사상으로 넓히는 동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동양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세계질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편되는 것을 비판 하면서 국가주의의 종말을 예견하고 이에 대응하는 '새질서'를 감당할 새정신, 새종교, 새문명을 추구하게 시작했으며, 이것을 동양사상과 서구 사상의 만남을 통해 지향해 갔던 시기다.신앙적으로는 무교회의 내촌(內村)에게서 배운 신앙의 틀을 벗어나서 주체적인 신앙을 향해 도약한다. 그는 월남 후 '말씀'이라는 잡지를 발간함으로서 그의 종교사상을 심화 시켜나갔으며 또한 자신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무교회 신앙을 탈퇴하게 되는데(1952년) 이것을 계기로 그는 보다 넓은 종교와 기독교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즈음에 그는 퀘이커들을 만나 교류를 시작한다.
이 시기는 함석헌의 '제소리'가 한껏 펼쳐 나가는 때이다. 사상적으로는 동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동시에 성숙시켜 나가는 때이며, 그 결과 무교회 신앙에서 탈피하여 보다 주체적 기독교 사상들을 추구해 나갔다. 사회활동에 있어서는 당시의 정치, 사회현실, 한국기독교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고 저항함으로서 자신의 저항의 철학, 혁명론을 전개 시키면서 비폭력 평화투쟁의 사상의 깊이를 정립해간 시기였다.
5) "찬 물결 밟고 서서" (1963∼1970)
함석헌은 1962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유럽을 여행하게 된다. 그 여행의 와중, 독일에서 1963년 5·16군사세력이 정치 권력으로 주저 앉았다는 말을 듣고는 당시 독일 유학중이었던 안병무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도, 아프리카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즉시 귀국한다. 그리고 귀국 후 함석헌은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판 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칼날 시퍼판 군사 독재정치 횡포도 그의 의기를 꺽지 못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아. 이제라도 민중에게로 돌아와. 자유를 완전히 허락해. 민중의 입에 씌우려는 재갈, 그 목에 채우려는 칼을 즉시로 내버려. 그럼 된다. 그러면 죽을까 봐 겁이 나나? 아니다. 특권의식은 본래 좁은 거지만 민중의 가슴은 언제나 넓은 것이다. 박정희씨가 2.27 성명을 했을 때 민중이 얼마나 다행으로 여긴지 아는가. 당장은 몰라도 그랬다가 만일 다음 선거기를 출마했다면 당신이 됐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것을 못했으니 아깝지 않은가. 속(速)한 것만이 속한 것 아닌 줄도 모르나. 그것도 모르고 정치를 어떻게 하나. 속담에 '당대발복(當代發福)에도 강도질이 제일'이라고, 당장 복을 누리잔 것이 화(禍)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다. 사는 길은 언제나 위험이다. 죽을 각오 아니하고 어찌 살 수 있나.
비판 사상이 육화(肉化)된 실천가로서의 모습과 더불어 이 시기는 퀘이커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해가면서 자신의 기독교사상의 내적인 성숙을 시도해 가는 시기이다. 1967년 그는 미국 퀘이커 교도 태평양년회 초정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퀘이커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냉혹한 '찬 물 밟고 서있는' 이때에 사상적으로 함석헌은 퀘이커의 '역사의식', '공동체외 내면의 절대 순수의식', 그리고 평화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이 기간에 보다 중요한 그의 삶의 모습은 그 자신이 일제시대 경험한 민중, 민중의식을 보다 삶 속에서 구체화시켰나갔는 점이다. 다시말해 씨 이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사회활동을 통해 경험하고 사상적으로 확립해 나간 때이며, 이것은 다음시기 '씨 의 소리' 창간과 그것을 통한 활동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6)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1970∼1989)
1970년 '씨 의 소리'를 창간 하면서 본격적으로 씨 사상을 전개시켜가는 시기이다. 당시 "씨 의 소리"는 '사상계'와 더불어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과 씨 의 소리를 대변지 역할을 감당했다. 함석헌은 "씨 의 소리"를 내는 목적을 "천하 씨 이 다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그 구체적인 목적을 다음과 말하고 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 의 속에는 일너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씨 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하나님 혹은 하늘이 하지. 옳습니다.(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빌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은 사람의 입에 있습니다.(중략) 둘째는 거기 따라오는 것인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씨 들의 살아있는 전달하는 매개체로, 그리고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된 유기적인 공동체로 사회변화의 힘을 길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그의 모든 사상을 이 '씨 '에 집중시켜 씨알의 '씨 됨'을 주장해 나갔다."씨 의 소리"는 1970년 4월 창간되었으나 정부의 인가취소로 1년간 법정 투쟁을 해야했고 계속에서 언론 탄압의 구조로 상처받다 결국 1980년 폐간조치를 당한다. 그리고는 다시 1988년 12월 복간되었다.
지금까지 함석헌의 멋진 삶을 짧게 서술해 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을 걱정하며 민주주의 민중을 위해 전 삶을 바친 사람들 중의 함석헌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 삶의 영양분을 먹지 않는 자 없다. 그 만큼 그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사상사에서, 혹은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빼놀 수 없는 분이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몸소 체험하고 이 사건들을 자신의 삶과 사상 속에서 체화시키려는 자세로 생애를 살으셨다.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內村에게서 성서, 타골, 칼라일, 카스키, 노자, 장자, 바가바드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함석헌의 전 생애는 좌절, 번민, 희망을 끌어안고, 밖으로 수많은 모함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참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악과 싸우면서 진리를 역사속에서 평화적으로 실천하려는 비폭력 저항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평생 국가주의를 배격하고 '노자적인 아나키즘'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으며 정치적 활동을 전개해갔다.
"우리의 멋쟁이, 겨레의 어버이, 만인의 벗, 함석헌 선생님!"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그 멋진 수염 흩날리며 팔십팔년이나 쳐다보시던 (중략) 당신은 씨 을 믿으셨지요 간파하고 말았군요 이리하여 당신은 일찌감치 불온분자가 되셨군요 박정희가 권좌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계획된 여행을 중단하시고 허둥지둥 돌아오셔서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종교신학 연구소 김 진 http://www.religionstheology.org/main.htm 에서 인용 |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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