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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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틀
김 진
함석헌은 소위 말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적이 없으며 학문적인 체계를 가지고 저술 활동을 전개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이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자신의 독특한 말과 문체로 자유롭게 펼쳐 나갔다. 오랜 시간의 깊은 사색과 공부, 그리고 투철한 실천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시켜 나간 결과 함석헌은 한국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함석헌의 사상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속에 깊고, 푸른, 그리고 다양한 물줄기가 굽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물줄기는 다양한 시대와 지역, 종교와 사람들을 막힘없이 넘나들며 하나로 힘차게 흐르고 있다. 즉 그의 사상 안에는 "동과 서가 만나고,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노장의 자연주의와 성서적 역사주의가 만나고, 종교적 신비주의와 합리적 과학주의가 만나고 있는데 단순한 병존이나 갈등이나 천박한 습합(習合)이 아니라 인류 미래의 종교의 어떤 방향을 암시하는 실증적 범례"가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다양함과 포괄성 때문에 어느 하나의 틀로서 설명하고 해석하려 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의 사상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특히 서구 합리주의적 학문 방법론에만 익숙한 지식인들이나, 학문의 식민주의성을 벗겨내지 못한 학자들은 함석헌의 사상을 분석하거나 비판하기 이전에 그 안에 발을 디딜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을것이고, 설사 몇 편의 글을 읽어다하더라도 그 깊이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함석선의 사상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주요인이다.
함석헌 사상을 깊이있게 이해하기에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글이 직관적인 시적인 문체라는데 있다. 부길만은 "그의 말, 그의 글 뿐 아니라 그의 사상 자체도 어느면에선 학문적인 이론이기 보다는 시에 가깝다 해야 할것이다. 그의 사상 전개 방식이 무한한 비유와 상징과 직관과 시적 비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물론, 사상 자체가 차라리 하나의 고백적 '시(詩)'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글을 대할 때 시를 읽는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다. 그 안에 감추어진 함석헌의 논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시적 논리를 쫓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시어는 상징이고, 함축이기 때문에 이해보다 깨달음을 지향해야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 있는 넓은 의미의 여백을 놓치면 그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언어적 표현너머에 있는 그 '뜻'을 잡는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靈)의 진동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의 사상의 '알짬'을 올바르게 파악해 가기 앞서 그 큰 물줄기를 일단 한번 가름해 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그 큰 흐름을 "기독교 사상"과 "동양 사상"으로 가름할 수 있으리라 본다.
1. 함석헌의 기독교 사상
함석헌은 평생을 '기독교'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의 사상적 특징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는 현실 기독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뛰어넘어 본래 예수의 정신을 추구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 했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사상을 현실 기독교의 교리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현실 한국 기독교의 '이단자'이었다. 기독교 사상 형성의 측면에서 보면 초기 무교회 신앙의 영향과 중기 이후의 퀘이커 신앙의 특징이 교차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하게 된다. 1) 무교회(無敎會) 신앙 함석헌이 무교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가름침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우찌무라의 신앙과 삶에 대해 처음 전해 들은 것은 오산학교 학생시절 유영모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그후 함석헌은 일본 유학생시절 직접 우찌무라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그 당시 우찌무라 모임에 나가고 있었던 김교신의 인도로 그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것이다.
함석헌이 우찌무라를 만난 초기 그에게서 받은 가장 큰 영향은 '민족과 신앙'과의 문제였다. 당시의 우찌무라는 강한 애국적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상호 연결시키면서 이것을 자신의 신앙의 중심점 위에 놓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두개의 J를 사랑하고 그 이외의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 두개의 J중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Japan)이다. (…) 예수와 일본, 나의 신앙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원이 아니다. 그것은 두개의 중심을 가지는 타원이다. (…)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하게 한다. 예수는 일본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강하게 하고 또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예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분명하게 하고 목표를 제시해 준다."
함석헌도 당시 이 민족과 신앙을 어떻게 연결시켜 이해할 것인가는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면서 그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함석헌에게 우찌무라의 예레미야 강의는 하나의 빛이였다.
함석은 "그때 인생문제와 민족문제가 한데 얽혀 맘에 결정을 못했던 나는 그 강의를 듣는 동안에 많이 풀린것이 있고 참 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선생님께 배워감에 따라 우리 맘속에는 차차 우리나라와 민족이 살길은 참 믿음에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함석헌이 우찌무라 간조와 당시 일본의 무교회 신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과 신앙을 연결시키면서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형성시켜 났다는 사실은 초기 무교회 신앙이 그의 사상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와 역사'의 관계를 다루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민족과 신앙을 연결 시켜보려는 노력의 결정판이 그의 초기 역작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이다. 그는 당시 국가의 문제를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조선의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요, 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조선사람의 손에 세계 운명이 달렸다는 신념을 가지지 못했다면 저의 신앙은 껍질이요,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 우리는 세계의 불의를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주장 속에서 우리는 '고난 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이 민족의 차원으로 해석적 전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상은 무교회를 떠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함석헌이 무교회의 신앙을 본격적으로 쌓아간 것은 귀국후 김교신, 정상훈,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과 주축이 되어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통해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그가 강조한 무교회 신앙은 '형식적인 교회주의를 비판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있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자유로운 진리를 추구할 때 비로서 형성되는데 그 사이에 교회의 형식이나 수단이 방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교회 그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천상교회의 의미를 잘알고 있었다. 그가 배격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주의였다.
그 당시 그 자신이 강조한 무교회 신앙의 특징은 성서조선 초기에 실린 그의 글속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무교회 신앙의 핵심을 '형식적인 교회주의를 비판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라고 다. 그는 "교회내에 있는 인간주의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한다. 인간적 의사를 가지고 교회에 임할때에 양심은 생명적인 신앙을 경시하고 외적기구를 유지함에 의하여 세속적 요구에 응합하려는 사업상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 본위(本位)에서 교회본위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특색을 표시하는 말로 이에서 더 적합한 것은 없다"고 말하며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주의'를 배격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형식, 의식, 교권에 반대하면서 "하나님께 직접 나감"과 "모든 사람을 꼭같이 대접함"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무교회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이것만이 하나님 중심의신앙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무교회주의자와는 달리 무교회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을 중요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 "자유하는 프로데스탄트의 정신"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무교회주의는 부정주의다. 언제든지 부정적이자는 주의다. 청년성을 영원히 가지자는 것이다. 전통에 대하여 반항적,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던 청년사상가도 노식하면 보수적이 되는 것 같이 어떤 신앙도 그 나타날때는 프로데스트적이나 마침내는 일개 체계를 이루어 고정하고 마는 것이다. 무교회 신앙은 영원히 체계를 이루지 말자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 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인간수업이 부족한 편협한(偏狹漢), 조야한(組野漢)이라는 욕을 들으면서라도 고정화 하려는 시류(時流)에 반항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반항정신'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이 무교회 신앙에 자리 잡게 한 중요한 사상임과 동시에 또 그 무교회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그를 떠나게 되는 동인이 된 것이다. 그는 무교회를 처음 비판하는 주된 내용은 자신들의 폐쇄성과 민중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그가 무교회에 머물지 않는 첫째 이유는 자신의 신앙 주체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교회신앙의 본바닥인 일본 무교회신앙과 우찌무라 선생으로부터 벗어나서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서 무교회를 떠났다. 둘째 이유는 우리 민족, 역사가 직면한 독특한 문제를 조망하고 해결하는데 보다 적합한 종교, 신앙을 찾자는데 있었다. "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우리만이 들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 나는 지난 날에 배우던 무교회를 찾고 그것을 받들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셋째 이유는 민중을 위한 종교에 대한 갈망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중을 위해, 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잘못될 때는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라도 새 바람이 들어오는 구멍을 뚫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된 소리 못된 소리를 민중의 가슴에 쥐어 뿌리기로 했다."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 이 땅의 종교가 민중을 향하지 않고서는 그 존재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위와 같은 이유를 가지고 1952년 '흰손', 1953년 '대선언'을 발표하고는 "모든 종교에서의, 물론 무교회에서도 탈퇴를 선언"했다. 그는 이 선언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대면사상과 비형식적, 비교권주의적인 '참'을 추구하는 신앙을 천명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 신앙의 주체성, 역사성 그리고 민중을 위한 민중을 위한 민주성을 지향하고, 이것을 자신의 기독교 사상 발전의 중심토대로 삼는다.
2) 퀘이커 신앙
함석헌은 30여년을 퀘이커로 사셨다. 함석헌이 퀘이커를 처음 알게된 시기는 월남한 해인 1947년이었다. 당시에 그는 현동완을 통해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전해 듣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기독교가 평화를 이야기 하지만 전쟁반대라는 구체적인 주장을가지고 역사적, 사회적 운동으로 전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에 1953년 부터 퀘이커 사람을 자신이 직접 만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이끌어 오던 주일 모임을 그만 두게된 이후 부터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식 퀘이커가 된때는 1967년 제4차 세계 퀘이커교 대회와 태평양 연회 모임에 참석한 이후였다. 그것은 퀘이커 사상을 처음 접한지 20년이 지난 후였다.
그가 퀘이커와 친밀하게 지내게된 결정적인 요인은 1960년에 그 자신이 행한 잘못 때문에 선생과 친구들로 소외당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접하면 접할 수록 그들에게 빠져간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사상이 퀘이커 사상을 만나면서 보다 깊어지고, 구체화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퀘이커 사상 연구 초기에 영양을 받는 사상은 '신비주의 공동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석헌 자신은 개인주의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어서 전체를 생각하는 사고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퀘이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퀘이커가 지향하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이론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늘 '개인과 전체'를 관계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이다.
두번째로 그가 받은 영향은 역사에 관한 태도였다. 그 자신이 물론 역사에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퀘이커를 통해 발견한 사실 그들은 미래의 역사에 대한 책임있고 공격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갖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가 평화운동이라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함석헌은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 영향을 넘어서서 퀘이커로서 함석헌은 퀘이커 신앙을 통해 보다 발전시킨 자신의 기독교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첫째, "하나님 내적 체험사상"이 발전되어 간다. 퀘이커 신앙의 특징은 본래 "영원한 그리스도"에 집중된다. 그래서 제4복음서를 자신의 '신학의 샘'으로 보고 "속의 생명"(the Toward Life) "속의 빛"(the Inner Light) "안에있는 그리스도"(Christ Within)를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살아있는 빛으로 동격화 하면서, 이 생명, 이 광명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살아서 꿈틀거리는 혼으로 현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 깊은 내면에 하나님 씨앗으로 내재 하고있음을 강조한다. 즉 사람 속에는 누구나 다 '거룩' 혹은 '초인간적인' 어떤 무엇이 있다는 신앙과 그것을 만나고 깨달을 수 있다는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함석헌의 신앙의 내적 깊이를 더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함석헌은 그 '영원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려는 노력을 씨 , 역사, 종교, 동양사상등 제 삶의영역에서 추구해 간것이다.
두번째로 함석헌이 퀘이커로부 발전시킨 사상은 "신비주의 사상"이다. 퀘이커는 이 세상의 모든 고등종교가 예외 없이 신비스런 영혼의 체험을 통한 가르침이 있다고 믿고 있고 그 신비한 경험이 모양과 이름, 장소와 환경의 다름이 있어도 깊은 속에서는 결국 다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함석헌은 이들의 신비주의를 하나님의 체험 신앙에 있어서 배제되어서는 안 될 요소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는 상식을 배제한 형이상학적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는 퀘이커가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다 경험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신비주의와 상식주의 결합을 한마디로 "윤리적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윤리적 신비주의는 "신비체험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인 수평적인 윤리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현시" 되는 신비주의이다. 함석헌의 종교 사상이 신비주의적인 면을 강하게 가지면서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표현될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윤리적 신비주의를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함석헌은 퀘이커의 이러한 윤리적 신비주의가 개인의 체험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떠난 '모임'에서 참 말씀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단체적 신비주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란 신비주의가 단순히 개인주의적인 차원에서 발현되는 것이아니라, 전체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속성과 연결되어 발현되는 신비주의이다. 이것은 오늘날 "공동체적 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셋째로 함석헌은 퀘이커의 갖는 역사에 대한 책임적인 자세를 자신의 사회적 활동으로 실천해 갔다. 그 자신이 이미 역사에 대해 남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사관이 현대 세계 속에서 육화 해야한다는 구체적인 도전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평화사상의 실천을 향한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60년대 들어서서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사건들에 평화적 방법으로 깊이 투신하는 것은 바로 이 퀘이커의 현실참여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사상 측면에서 함석헌은 초기 무교회 신앙의 "알짬"들을 그대로 가지고 이를 퀘이커와 만남을 통해 그 성숙함을 성취시켰으며, 삶의 양태, 행동으로서 무교회에서 느꼈던 문제의식을 실천해 나가는 발전의 과정을 격었다. 즉 무교회 신앙의 특징인 '하나님의 직접 체험', '비형식적이고 비제도적인 예배'가 퀘이커 안에서도 계속 계승될 수 있었고, 또 무교회의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의 부족함이 퀘이커의 평화운동에서 채울 수 있었다. 퀘이커의 신학과의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은 계승, 발전하면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해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무교회와 퀘이커 사이에서 그 자신의 기독교 사상과 신앙이 단절된 것이 아닌 연속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2. 함석헌의 동양사상
함석헌의 동양사상, 특히 노자와 장자에 대한 그의 해석과 강연은 한 기독교인으로서 동양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좋은 예가 된다. 또한 그의 동양사상이 갖는 특징을 바로 짚어야 비로서 그의 사상이 총체적으로 규명될 것이다. 함석헌 생애의 시대적 배경이 아직은 동양사유가 전반적으로 흐르는 때였으나 그가 동양사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것은 40∼50세가 넘어서부터이다. 이 시기는 자신의 신앙의 주체성을 찾으려 우찌무라에게서 떠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우찌무라가 서양에 경도된 것에 대한 반발에 동양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결국 주체적인 기독교 신앙 형성에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양 사상에 눈을 돌린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내촌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기 보다는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동양사상에 집요한 관심을 갖게된 중요한 동기는 2차세계 이후의 문명을 이끌고 나갈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그는 1,2차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 모순이 폭로된 이상 필연적으로 국가관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양의 근대화가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듯이 다시한번 인류문명이 새롭게 변신하려면 새로운 동양 고전연구 필요성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정관사를 붙여 더 리포매이션(The Reformation) 이라고 할때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이 합쳐야 합니다. 이 형식대로 꼭 된다고 할수 없지만, 이제 인류가 또 한번 고쳐나려고 한다면 무슨 일로든지 생각이 달라져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려면 서양의 고전은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지요. 아리스토켈레스, 플아톤을 이 이상 더 써먹을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동양에 수천년래의 고전이있지요. 다만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는 종교철학이 없다 이렇게 봤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줄 알고 찾아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요. 이제 우리가 이것을 캐어내 봐야겠다는 것이 2차대전후에 내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고전 속에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야말로 초창 시기이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순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뜻속에 실현해 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동양고전을 통해서 현대 문명을 올바르게 이글어 갈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는 '옛날부터 있는 길(곧 진리)을 붙잡아 가지고 이제는 있음(有)를 부린다.'(執古之道 以御今之有)라고 했다. 마치고삐를 잘 잡아야 사나운 말을 잘 부려서 차를 몰아갈수있듯이 이제 있는 이 천지만물과 인생역사를 올바르게 이끌어 가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뚫려 있어 변함이 없는 그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상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동양 사상연구에 대한 요청은 문명사적, 정신사적, 그리고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의 그의 동양 사상의 필요성을 "첫째 우리는 문명의 새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고"(문명사적인 관점), "둘째 새로운 가치 체계를 세우기 위해 동양의 옛글을 연구" 할 필요가 있으며(정신사적인 측면), "세째로는 새 마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종교사적인 관점) 이러한 탁견은 지금의 상황에도 결코 약화될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은 그 어떤 시대보다 이러한 세가지 관점에서 동양사상 연구의 필요성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고전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는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날 까지의 옛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옛글을 오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 해석하는"일이다. 즉 그는 동양고전의 해석학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옛글의 의미지평이 오늘날의 상황에 재해석되어 그 의미가 올바르고 힘있게 전달하도록 노력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그의 동양 사상 연구는 새문명, 새정신, 새종교 를 향한 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옛글 고쳐씹기"의 작업은 당시의 문명과 정신세계와 종교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치체계를 창출 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양사상과 성서의 사상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몸부림의 시기와 동양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자신은 기독교를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동양사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결과 그 의 동양사상 연구는 자신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인것이 좀더 넓게 좀더 깊게, 자신의 것으로 가깝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동양것을 스스로 읽어보는데서 시작'했고 '동양에 대한 눈이 넓어지면 질수록 기독교 이해는 뿌리가 조금씩 더 깊어가고 가지가 더 높이 올라갔다'고 고백하고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동양것은 미신이요 잘못된 것으로 잘라버리는데는 이해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동양사상이 단순히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 보조수단이 아니라 그 동양사상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고 보았다그래서 함석헌은 단순히 동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사이의 유사성을 접목시키려 했던것이 아니며 진리의 혜안을 가지고 양자의 진리의 맥을 뚫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동양의 진리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역으로 동양의 진리를 기독교 진리로 재해석 하는 작업을 자유롭게 시도했다. 이것은 두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에 배어있는 정신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한 예로 그는 기독교의 예수의 도와 노장의 도를 연결시켜 진리의 빛을 던져준다. 그 한 예로 유교의 실천윤리를 성서의 바리새적인 태도와 유비시키면서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 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던 것같이 노자는 자기의 길은 따져서 알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한다. 또 '보아도 안보이니 그 이름 이(夷), 들어도 안들리니 그 이름이 희(希), 잡아도 안 붙잡히니 그 이름이 미(微), 이셋은 따져 될것이 아니다' (視之不見名日夷 聽之不聞名日希 搏之不得名日微 地三者不可詰)라는 노자의 도의 특성을 예수의 진리의 길과 연결시키며 해석하기도 하고, 도덕경 20장을 "동양식 이사야 53장"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역으로 노자 사상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도 더 밝혀보여 주고 있다.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데서 나온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기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 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 주장을 아니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이가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그래 노자는 말 첫머리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며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고 했다."
그의 동양사상에는 노장사상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힌두교, 불교, 한국사상이 녹아져 있다. 김경재는 그의 사상의 특징을 노하면서 그의 사상안에 스며있는 동양사상의 내용을 "동양사사의 핵심적 알짬인 간디를 낳은 흰두교의 불살생(不殺生)비폭력 저항사상, 원효를 낳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대승불교사상 그리고 노장의 순수 본바탈을 찾아 지키려는 비판적 무위자연 사상과 유가의 인의(仁義) 천명(天命)사상및 한국의 하늘님 신앙 등이 기독교사상 및 서구 과학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융섭되고 있다"고 말한다.그의 동양사상이 갖는 외형적 특징은 그의 동양사상의 위치가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사상과 대등한 위치 속에 근거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는 동과 서의 지역적 차별성 속에서 동양사상가과 기독교의 진리를 동일선상에서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함석헌 사상을 크게 가름지어 볼때 기독교사상과 동양사상으로 가름지을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상이 상호교류하며, 상호깊이를 더해 가면서 자신의 창조적인 사상으로 발현되어 나간 것이다. 그의 사상의 깊고 넓은 맛은 이러한 깊은 만남의 결과이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종교사상 이해는 이 두 사상의 이해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