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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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한국의 역사가 : 함석헌
노 명 식
(전 한림대교수/역사학)
1. 함석헌이 과연 역사가인가1)
함석헌(咸錫憲)은 20권에 달하는 전집을 남기었는데, 그 전집 편집위원들의 간행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시대에 살아서 글줄이나 읽는 사람 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그처럼 널리 알려져 있는 함석헌이지만, 막상 함석헌은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지 않다. 마치 금강산의 만물상이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같이……. 함석헌은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니고,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2)
함석헌 자신도 자기를 가리켜서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3)라고 자탄스런 자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참 교육자의 참모습을 몸소 실천한 교육자였고, 교직에서 쫓겨난 후에는 여러 해 모범적인 농부이기도 했고, 어느 성서학자 못지 않은 성서연구가였고, 매우 독창적인 역사가이며, 현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사상가였다.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라는 말은, 1934~1935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4)를 월간 『성서조선』에 발표한 후 계속 역사연구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 한 말인데, 그가 역사연구를 계속하지 못한 아쉬운 심정을, 1950년 3월 『조선역사』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을 때 그 서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될 수 있다면 고난의 역사를 연구해 보자고 뜻만은 먹었었으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일은 차타(蹉跎)하여 남으로 북으로 헤매는 동안에 책이라고는 한 페이지도 못 읽기를 십 년이 넘도록 하였으니, 당년의 뜻은 물처럼 흘러가고…… 어찌 아니 슬플까.
그는 대학(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평북 오산학교에서 10년간(1928~1938)역사를 가르쳤고, 그 사이에 『조선역사』를 연구․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5)도 발표한 바 있었으니 역사연구를 계속해 보겠다는 뜻을 먹고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가 스스로 역사책을 내던져서가 아니라 그에게 불어닥친 험난한 우리 현대사가 그에게서 역사책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년의 그 청춘의 뜻이 물처럼 흘러가고 말았으니 그 슬픔이 어찌 그이 한 사람만의 슬픔이겠는가.
이러한 슬픈 사연 속에 그가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다는 말의 뜻이 숨어 있다. 그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서 학술적인 저작을 골라내라면 역시 『조선역사』인데, 그에게는 이에 필적할 만한 다른 역사연구가 더 없는데다가, 『조선역사』는 성서적 입장이라는 특이한 시각에서 서술한 것으로 전문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서술태도에서 떨어져 있는 까닭에 함석헌은 역사가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있게 된다. 사실 함석헌 자신이 역사연구를 평생사업으로 할 뜻은 있었으나 그것을 못했으니 자기는 학자가 못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를 구태여 역사가라고 칭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가란 꼭 한평생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과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만 붙이는 칭호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역사연구를 한평생 한 사람이 아니니까 혹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직업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니까 역사가가 아니라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의 유일한 역사저작인 『조선역사』는 학술적 연구의 자격이 불충분하다거나 아예 자격이 없으니 그를 역사가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아마 틀림없이 그래서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조동걸(趙東杰)은 그의 『현대 한국사학사(現代 韓國史學史)』에서 해방과 더불어 활동한 학자 가운데 가장 활발하던 경우는 일제 말기에 은둔 학자나 망명학자가 은둔지 또는 망명지에서 연구한 것을 해방을 맞아서 논저를 발표하고 있던 학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6)면서 그런 학자들의 명단에 함석헌을 넣지 않고 있다.
『조선역사』는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22회에 걸쳐 월간 『성서조건』에 발표되었고, 해방 후 다시 1946년 11월부터 1950년 2월까지 20회에 걸쳐 『성서연구』지에 연재된 것을 다음달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으로서, 일제시대에 연구해 두었다가 해방 후에야 비로소 발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조선』은 그 구독자가 2백을 넘지 못한 데다가 폐간과 함께 발행인․집필자․구독자들이 모두 곤욕을 당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잡지들도 다 압수되고 말았으니, 「조선역사」는 일제시대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함석헌은 일제의 압력하에 교단에서 물러나야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은둔 또는 망명에서 연구한 학자들 못지 않게 불우하였다. 그러므로 함석헌도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무방할 것 같은데, 조동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조선역사』는 시기적으로 일제시대에 이미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학자들의 저술과 같은 비중의 학술적 가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는, 조동걸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사실이다. 즉 그는「해방 직후의 개설서」라는 항목에서 (1) 최남선(崔南善)의 『신판조선역사(新版朝鮮歷史)』와 (2) 문석준(文錫俊)의 『조선역사(朝鮮歷史)』 및 『조선역사연구(朝鮮歷史硏究)』의 셋을 일제시대에 써 두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판한 조선사개설의 대표작으로 기술하면서(pp.338~339), 함석헌의 『조선역사』에 대해서는 각주(56)에서 통사 가운데서 종교적 성격이 과도한…… 저술은 검토를 보류하였다. 보류한 이유는 종교이론을 통하여 분석할 필자의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다.
조동걸이 『조선역사』를 해방 직후에 나온 개설서의 하나로 취급하지 않은 이유가 종교 이론을 통하여 분석할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역사』는 종교이론―여기서는 기독교적 신학적 이론―을 통하여 비로소 분석할 수 있는 그러한 저작이 아니다. 그 책을 이해하는 데는 기독교나 성서에 관한 지식보다는 오히려 한국사에 관한 기본지식이 더 필요하다. 성서에 관한 지식은 상식적인 정도면 충분하다. 함석헌이 그 책의 서문에서 기독교를 믿고 아니 믿고 간에 성서를 일독도 않고 역사를 알자는 것부터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독자 스스로 수고하기를 바라 주(註)도 아무 것도 아니 넣었다고 말하고 있듯이, 성서의 지식이 비록 빈약하더라도 다소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 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물며 한국사 전문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조선역사』가 1934~1935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 데도 불구하고 조동걸은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어 『현대 한국사상사』의 독자들에게 『조선역사』가 마치 1950년에 처음 쓴 것으로 경신(輕信)케 할 우려마저 있다.
다음으로 조동걸이 「해방 직후의 개설서」라는 항목에서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논하지 않으면서 문석준의 두 책은 거론한 까닭이 궁금하다. 문석준과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의 동창이고, 중학교 역사교원의 경력도 거의 비슷하고, 두 사람의 저작시기도 거의 같다. 다만 문석준의 저작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것이고 함석헌의 것은 성서사관에 입각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문석준의 저작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일반적 경향이기는 하지만 시대구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국사의 특수성을 외면한 저술이고, 그리고 『조선역사연구』의 간행사를 보건대 (문석준의) 『조선역사』가 너무 공식적이어서 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서 미완성이기는 해도 보다 쉽게 쓴 『조선역사연구』를 간행하였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런데, 문석준의 저작이 너무 공식적이고 한국사의 특수성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웠다면,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문석준의 저작의 경우와는 다른 이유에서 읽기가 어려울는지는 몰라도 너무 공식적이거나 한국사의 특수성을 외면한 저작이 아니다.
끝으로 문석준의 『조선역사』는 53페이지에 불과한 일종의 소책자에 지나지 않으나,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286페이지에 달하는 버젓한 단행본이다. 그만큼 양자의 학술적 저작으로서의 무게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지적한 몇 가지 이유에서, 일제시대에 써 두었다가 해방 직후에 출판한 한국사 개설서로 문석준의 것을 최남선의 『신판조선역사』 다음으로 취급하면서 함석헌의 『조선역사』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엄정해야 할 사필(史筆)에서 어긋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를 여기서 다소 장황하게 거론하는 까닭은 실은 그러한 어긋남이 함석헌의 『조선역사』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일반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조동걸의 『조선역사』에 대한 태도는 한국의 전문역사가들의 태도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과연 역사가이냐 하는 논의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 거기 있을 것이다. 이 소론(小論)의 첫 장에서 함석헌이 과연 역사가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까닭도 거기 있다. 사실 함석헌이 자기의 그 역사책을 가리켜서 본래 이것은 자신(自身)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이며 권면(勸勉)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7)라고 자평하고 있다. 이 자평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하여튼 함석헌이 과연 역사가이냐, 역사가라면 어떤 범주의 역사가이냐하는 논의는 우리 사학계가 진지하게 토론해 볼 만한 흥미있고 가치있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만렬(李萬烈)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주목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용감한 언론인이자 가장 탁월한 역사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천관우(千寬宇)는 함 선생의 『조선역사』를 두고, 한국 근대사학사에서 어떤 특정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꿰뚫어 본 거의 유일한 역사책이며, 자기는 그 책을 손에 잡은 후 시간을 잊고 탐독할 수 있었노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물론 이 평가는 그 책의 역사관의 시비를 논하거나 서술의 정확성․객관성이 유지되었느냐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근대사학사의 입장에서 어떤 개성적인 역사관에 의해 한국의 통사(通史)를 서술한 역사책이 (따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신채호가 조선의 상고사를, 박은식이 한국의 근대사를 썼으나 결국 통사를 쓰지 못했고…… 유물사관론자들도…… 단대사(斷代史)는 남긴 적이 있어도 전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하지는 않았다.…… 소위 실증사학자들도 일제하에서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하의 통사치고는 개성적인 사관에 의한 통사는 (『조선역사』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8)
이와 같은 진술은 한국역사학계가 근년에 와서 역사가로서의 함석헌을 진지하게 논의해 볼 때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국사 시민강좌』가 「한국의 역사가」난에 함석헌을 내세운 것은 이제는 역사가로서의 함석헌을 논의해 볼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의 한국사 전공자들 사이에 함석헌 사학에 대한 학문적 토론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2. 성서적 입장에서 본 역사와 뜻으로 본 역사
역사가로서의 함석헌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가 남긴 전집 20권과 기타 많은 글들을 다 섭렵하여 인간 함석헌의 전체상 속에서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추출해내야 하겠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방대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역사가로서의 그를 알려면 그의 『조선역사』와 『세계역사』 두 권이면 기본적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조선역사』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세계역사』는 별로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은데, 함석헌은 1936년 5월부터 1938년 3월까지 22회에 걸쳐서 역시 『성서조선』지에 『세계역사』를 연재하였다. 그것은 『조선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 사관에 서서 세계사를 본 것인데, 1940년에 평양 경찰서에 붙들려 갈 때에 그만 중단이 됐고 원고도 다 잃어 버렸다9)고 한다. 지금은 그 일부만이 남아서 『전집』 9에 수록되어 있으나 함석헌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조선역사』에 더 보탬이 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이 소론은 거의 전적으로 『조선역사』를 참고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역사』는 1960년대 초 『뜻으로 본 한국역사』10)라는 새 제목으로 상당히 증보되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이 증보판이다. 그러면 필자가 증보판을 참고하지 않고 초판 『조선역사』를 참고하여 이 글을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
함석헌은 1950년에 초판을 낼 때 그 서문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말이 일반독자에게 걸림돌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잠깐 있었으나 그것은 사슴에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글의 이 글된 소이(所以)는 성서적 입장인 데 있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성서의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 아니라, 성서의 입장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 엄정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희랍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고 강력한 어조로 말하였다.
역사는 성서적 입장에서만 쓸 수 있다고 강조하여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책이름에서 빼자는 의견을 반대했던 함석헌이 그 후 10여 년 뒤에 사슴에 뿔과 같다던 그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없애고 뜻으로 본으로 고친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인․죄인․문명인․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말이다.11)
여기서 우리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고 희랍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던 그가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도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다는 그의 선언이 옳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성서적 역사관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시간을 발전적으로 이해한 역사의식의 유일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역사의식은 희랍에도 동양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의 역사관의 특징은 상고적(尙古的)․복고적이거나 순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기독교적 역사관은 물론이고 그것을 극복하였다는 18세기의 진보사관이나 19세기의 발전사관도 실은 모두 그 뿌리를 성서의 발전적 시간관과 역사관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함석헌이 이제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러나, 역사가 함석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저 어리둥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고 그의 그러한 변화과정을 추적해 볼 수밖에 없다. 그 추적 방법은 단순하다. 『조선역사』와 『한국역사』를 대조해 보면 될 테니까. 양자를 대조해 보면, 함석헌이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고 한 말의 뜻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가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사상은 변할 리가 없지만이라고 하고, 또 그 역사들을 썼던 이후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의 세계의 격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대한 나의 생각의 근본 졸가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날마다 되어가는 역사는 그 생각을 점점 더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12)라고 한 말들의 뜻도 이해하게 된다. 즉 뜻이란 곧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은 생명이고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고 말씀이 육화(肉化)되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입장에서본 것을 뜻으로 보았다고 해서 함석헌의 역사관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과 성서 이외의 다른 경전들의 알짬을 새로운 자양으로 섭취하여 그 본래의 역사관을 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심화시킨 것뿐이었다.
이와 같은 필자의 판단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13) 그러한 근거에서 함석헌의 역사관은 증보판에서보다는 초판에서 보다 더 명료하고 진솔하게 표명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이 소론에서는 그의 역사관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번거로운 작업은 생략하고 거의 전적으로 『조선역사』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작업상의 편의 외에 다음과 같은 이유가 더 있다. 함석헌의 사관이 왜 고난사관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처음 발표한 1934~1935년의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고난사관을 생산한 것은 물론 함석헌이지만 그로 하여금 그러한 사관을 낳게 한 것은 우리 민족이 그때 현실적으로 겪고 있었던 바로 그 고난의 역사 자체였다. 함석헌이 산모라면 아기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우리 조국의 현실과 격동하는 세계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고난사관을 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고난의 절정에서 그 고난을 몸으로 끌어안고 울부짖는 30대 전반의 한 한국 지식인이 쓴 그 글 자체를, 산고의 고통소리 그 자체를, 직접 읽어야 한다. 이것이 이 소론이 증보판보다 초판을 더 중시하는 까닭이다.
3. 함석헌의 역사관
함석헌은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과거란 현재에 살아있는 과거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와의 관련에서 선택된 유의의(有意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은, 그 의미 있는 사실들을 인과관계적 상호연관의 연쇄 속에 통일적인 체계로 엮어야 한다. 그 체계는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부분들이 전체에서 유리될 수 없다. 한국사는 한국민족의 5천년의 일이 전체로서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것이다.
이처럼 역사서술은 선택된 개개의 사실들을 자료로 한 전일적(全一的) 생명체의 재현인데, 그 재현은 현상적 재현이 아니라 의미적 재현이다. 왜냐하면 자료로서의 사실들이 의미적 해석이라는 역사가의 주관의 렌즈를 통과하지 않고는 참 역사가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해서라면서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백권의 납골당 명록(納骨堂 名錄)만을 쓰고 말았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p.13).14)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학․재․식의 어려운 자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識)이다. 식이란 안광(眼光)이 지배(紙背)에 철(徹)한 의미 관련의 판단력을 말하는 동시에 세계사의 밑을 흐르는 영원의 의지를 파악하는 정신이다. 그러한 판단력과 정신은 반드시 어떤 자리에 서서만이 결정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자리가 곧 사관이다. 그러므로 서는 자리에 따라 즉 사관에 따라, 역사의 모습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게 마련이지만 우주․인생의 진의를 파악시키는 사관은 성서가 보여주는 아가페 사관이다(p.17).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성서적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이 아가페 사관에서 본다는 것이다.
아가페 사관에 의하면 우주와 인생은 자연발생적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본원인 신의 자유의지로써 창조되었다. 따라서 역사도 초월적 신의 섭리의 지배 아래 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관은 섭리사관이기도 하다. 그러면 섭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궁극적 구원이다. 목적이 있는 역사이니 그 역사는 완성이 있어야 하고, 완성이 있으니 종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는 미래에 의해 규정된다. 현재의 인생은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미래의 약속의 희망 속에서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성실한 것이다. 종말을 향해 전진해 가는 역사의 과정도 신의 의지에 의해 통치된다. 신은 존재의 원인인 동시에 발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주와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은 신의 의지의 꼭두각시인가? 아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였다. 자유의지 없이는 인격이 없고 인격 없이는 참 생명이 없으니 인간에게 참 생명이 있으려면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섭리사관의 자리에 선 함석헌은, 역사란 무엇이냐 하는 시험문제에 대해 인류가 하나님을 탐색하는 기록이라고 답하면 그것이 만점이라고 한다(p.29).
그런데 인류가 신을 탐색한다는 것은 신 편에서는 인류를 교육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신에 대한 인류의 지식의 성장과정이다. 그 성장과정에는 발생기․성장기․연단기․완성기의 네 단계가 있는데, 한국사의 경우, 삼국시대 이래 아직도 연단기가 계속되고 있다. 완성기는 물론 아직 멀었다. 그러면 그러한 섭리사관이 한국사에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는가. 각 민족은 각각 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를 버려도 민족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역사의 하담자(荷擔者)는 민족이다. 개인도 계급도 아니다. 개인도 계급도 다 민족적 세력의 대표자․대행자다. 조선역사는 조선 사람의 역사다. 어쩔 수 없이 조선 사람의 역사다(pp.46~47).
함석헌에게 있어 역사의 주체도 역사의 궁극적 힘도, 그리고 역사의 책임자도 민족이다. 거기서 역사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민중이 속깊이 갈구해 마지않는 그 요구에 부응하는 역사를 쓰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의 민중의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민중 위에서 일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위(作爲)를 민중에게 알게 하고, 역사에 나타나 있는 세계정신을 민중에게 파악시키고 미래에 대해 일정한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것이다(p.47,49). 역사가의 사명을 이렇게 규정한 함석헌의 민중의 역사란, 요컨대 조선민족에게 강렬한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고 민족의 역사적 사명의식을 고취하는 역사, 그리하여 민중에게 봉사하는 역사를 말한다. 그것은 민중에게는 이해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민족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는 전문역사가들의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함석헌의 섭리사관은 그 표현은 극히 관념적인 것이지만 실은 매우 현실주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것이다. 그가 이상주의의 귀함은 반드시 그 이상이 실현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비근(卑近)한 것에보다 이상의 고원(高遠)한 데 따르려는 그 정신 그 기개에 있다(p.147)고 말할 때, 그 말은 당시의 우리 민족의 암흑의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암흑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고원한 이상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는 투철한 현실인식에서 한 말이 아닐까. 그의 이상주의는 철저한 현재주의적 역사관의 반영이다. 그러기에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방황과 모색에 피로하여 절망하려는 청년의 안전에 새 역사를 보여주라. 저가 거기서 새 세계관의 월륜(月輪)을 찾아낸 때에 저의 가슴 안에는 희망의 광채를 반사하는 생명의 격조(激潮)가 …… 일어날 것이다(p.8). 허탈에 빠져 있는 조선청년들의 눈앞에 보여주라는 그 새 역사는 곧 섭리사관에 의한 한국역사였는데, 그것은 섭리사관의 이름으로 한국민족을 위하여 한국민족에게 보여주는 민중의 역사였다.
이렇게 볼 때, 그리고 『조선역사』 전체에 넘쳐흐르는 민족애의 열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일제의 지배하에서 신음하는 민족의 문제였다. 민족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번민하고 몸부림치는 30대의 날카로운 양심의 지식인이 역사가로서 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스스로 묻고 또 묻는 가운데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서, 드디어 도달한 성실한 결론이 섭리사관이고 고난사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사관의 중심에는 민족이 자리잡고 있으니, 함석헌의 역사관은 민족주의사관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의도적으로는 아니었더라도 자기의 민족주의를 다소라도 감추기 위해 섭리사관이니 고난사관이니 하는 외장이 필요했을는지도 모른다.
4. 한국의 지리와 한국민족의 성격
한국역사라는 드라마의 무대는 한국땅이고 그 배우는 한국민족이고 각본은 신의 섭리이다. 그 섭리가 지리와 민족성과 실지 역사변천 위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p.49)를 서술한 것이 『조선역사』이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 서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 그 결론은 조선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조선역사 밑에 숨어 있는 기조(基調)는 고난이다.그리고 이 슬픈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6, 7년 전부터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기회가 있어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까 노력하여, 어렸을 때 듣던 모양으로 을지문덕․강감찬의 이름을 크게 불러 보려고도 힘쓰고 또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생생자(生生字)․거북선․석굴암․다보탑을 총출동시켜서 관병식을 거행해 보려고도 하였으나, 그것으로써 묻어버리기에는 조선사 전체에서 발하는 신음소리가 너무도 컸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남루(襤褸)가 너무도 심해 자기 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의 광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거기서 이 참담한 사실을 희망과 자부심에 작약(雀躍)하는 젊은 혼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생각할 때 나는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pp50~51).
그러나 성경은 그 가운데서 진리를 보여 주었는데, 이 고난이야말로 조선이 쓰는 가시면류관이고 또 세계의 역사는 요컨대 고난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지껏 한국을 학대받는 비녀(婢女)로만 알아 왔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면류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인류의 구원과 영생의 길이듯이, 한국역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고 한국민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 고난도 그저 곤욕과 한탄(寒嘆)에 그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의 길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할 때, 그것이 이 민족을 재생시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냄새가 짙은 섭리사관에 의한 한국사 연구가 도달한 그와 같은 결론으로 해서 그 사관을 고난사관이라고 하는데, 섭리사관이건 고난사관이건 그것은 한국 역사학계에는 대단히 낯설은 사관이다.
그러므로 그 사관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써 실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독단에 불과한 것이고 역사적 진실임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거기서 함석헌은 한국역사의 기조(基調)가 고난이라는 사실을 한국의 지리와 민족성과 실제 역사과정의 세 면에서 실증해 보인 것이다.
한국지리에 대하여 함석헌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용어는 쓰고 있지 않으나,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지정학적 단위로서 그 위치, 지세, 기후, 경개(景槪)가 모두 하나의 단위 속에서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 있다고 한다. 만주대륙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한반도의 해양에서 그 힘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는데 ― 사실 역사적으로 한국역사의 요람은 만주였다 ― 고구려가 망한 후로는 두 지역이 장백산맥과 양강(兩江)을 경계로 갈라지고 말았다. 불가분의 한 단위가 둘로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둘로 갈라놓은 그 경계가 좀처럼 넘나들 수 없는 완정한 경계였더라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터인데, 북에서 남하하기에는 어려운 장애가 안 되나 남에서 북상하기에는 어려운 장애가 되는 그러한 경계였다. 하나의 단위가 둘로 갈라진데에 고난의 원인이 있었는데 그 갈라짐이 불완전한 데에 보다 더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땅의 지리적 위치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개재한 중간적 위치로서 힘을 가진 자가 거기 서면 진동의 중심, 호령의 사령탑이 되나 그렇지 못한 약자가 서면 수난의 골목, 압박의 틈바구니가 되는 그러한 위치이다. 기후도 만주의 대륙성 기후와 한반도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가 상보적이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 됐고, 또 경개도 만주의 일망무애(一望無涯)와 한반도의 금수강산이 상보적으로 통일을 이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만주는 호마삭풍(胡馬朔風), 무용(武勇), 영웅심을 기르는 데 알맞는 땅이고, 한반도는 문(文)과 지(智)의 땅이다. 뿌리를 만주에 두고 꽃을 남해에서 피울 수 있었는데 아깝게도 그렇지 못했으니 조선의 지리는 고난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크기는 하나 지리는 주어진 환경이고 활동의 기회와 자료가 될 뿐 역사의 흥망의 원인은 아니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다. 환경이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직 인격에 의해서다. 조선의 지리가 고난의 장소로 되어 있다고 해서 조선에서는 필연적으로 고난의 역사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이지 역사가 아니다.15) 어느 민족에게나 그 역사가 있는 이상 그 민족은 자기 역사에 책임을 진다. 한국역사라는 사실이 있는 이상, 그 사실에 책임을 지는 자는 한국민족이다. 한국민족의 역사의 터전을 이 작은 반도에 국한시키고, 본래 하나의 단위로 되어 있는 만주와 반도를 두 개로 결정해 놓은 것은, 환경도 아니고 국제관계도 아니고 영웅들도 아니고 양반․상놈도 아니고 오직 한국민족이다. 한국역사가 고난의 역사라면 그 근거를 고난의 역사의 산출자이며 하담자인 한국민족의 성격에서 밝혀내야 한다.
고대 한국인은 인(仁), 인의(仁義), 착함이 그 본성이었고 용(勇)과 의용심이 그 기질이었고 또 조직력과 재능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니 큰 민족의 자격과 큰 나라를 세우고 고상한 문화를 일으킬 필수적인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역사가 고난의 순례가 될 까닭이 전혀 없었다(p.74). 그런데 눈을 오늘의 한국사람으로 돌려보면 딴 종족이 아닌가 하리만큼 정반대로 질투․음해․붕당․나약(懦弱)․구차(苟且)가 그 성격이고, 신의(信義) 버리기를 헌신짝같이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되었나. 그것은 삼국시대를 경계로 기울기 시작하여 고구려의 멸망 후 내리막으로 떨어져 갔다. 그런데 그 궁극적 원인은 한국인에게는 현상의 배후에서 실재를 파악하려 하고 무상(無常)의 밑에서 상주(常住)를 찾는 철학적․시적․종교적 심각성이 빈약한 데 있다. 종교가 있기는 있었으나 유대인이나 인도인의 종교 같은 깊은 진리의 종교가 아니라 낙천적인 의식(儀式)의 종교만 있었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깊은 응시가 없고 자존심이 없다. 자존이란 망자존대(妄自尊大)가 아니라 내 인격은 우주의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인격적 자각에서 나오는 자존인데, 그 자존심이 없는 까닭에 자유 정신이 부족하다. 자유는 사람의 생명이다. 자유가 없으면 모처럼의 인(仁)도 얼빠진 것에 지날 것이 없고, 그 장한 용(勇)도 수성(獸性)에 불외(不外)하다. 자유정신이 부족한 한국인은 이중의 고난의 짐을 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남의 압박이고 또 하나는 제 노릇을 못하는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민족성의 그 같은 큰 결함은 그들이 스스로 지어 놓은 그 역사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구차한 외교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해 오기에 겨를이 없고, 문화의 생산물에 웅대한 것이 없고, 여러 백년을 두고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시일 내에 뚝딱 해버리고, 직업을 택하면 호구지책에서 더 지나는 생각이 없고, 사업을 한다면 당장의 보수를 기다린다. 그 계획의 원대함, 이상의 구원(久遠)함이 없고 통(通)히 소(小)요 일시요 그저 고식․구차이다. 이 모든 것이 심각성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p.78). 요컨대 한국역사는, 그 드라마의 무대로서의 지리적 조건들과 배우로서의 한국민족의 성격은 본래 동부아시아에 큰 나라를 세우고 높은 문화를 일으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으나, 만주대륙에 근거를 둔 고구려가 망한 후부터 그 지리적 조건도 민족적 성격도 고난의 역사를 걸머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5. 한국사의 전개과정
(1) 상고시대
이제 우리는 한국역사의 기조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세 번째 문제 즉 그 역사 자체의 변천과정을 살펴봐야겠다. 이 문제는 『조선역사』 총 286쪽에서 161쪽을 차지한다. 이 책의 약 5분의 3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함석헌이 역사가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한 데가 바로 여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상론할 지면이 없는 까닭에 그 골자만을 요약해 보려고 한다.
만주 벌판에서 시작한 한국역사는 희망을 약속하는 광휘 있는 당당한 출발이었다. 저들이 동북 아시아의 무대에 대국가를 건설하여 패주(覇主)가 되리라는 판단은 당시 바른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p.85). 만주 벌판에서 조선반도에까지 영역을 넓혔던 약 1,200년간의 단군조선 시대는 씨족사회에서 부족국가로 발전한 민족역사의 발아기이고, 장차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를 기르기 위해 마련한 묘상(苗床) 위에서 여러 부족국가들이 경쟁하는 열국시대는 그 양육기이고, 부여․옥저․졸본 등의 수십 개의 나라 가운데서 드디어 민족적 사명을 다할 자격자로 뽑힌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정립시대는 민족통일을 위한 역량과 이상과 식견을 용광로 속에서 연단하는 연단기이다. 이 연단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첫째 한사군이라는 비통한 경험을 치르는 동안에 눈뜨기 시작한 민족적 자아의식으로써 낙랑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정신적․도덕적으로 불충분한 조선 고유의 종교와 일상 생활의 상부건축을 지지하는 데 그치는 유교와는 달리, 사생(死生)의 피안(彼岸)에서 도덕의 근거를 구하는 참 종교인 불교의 수입이었다.
강렬한 민족의식과 참 종교로써 민족통일의 자격이 연단되는 가운데서, 삼국이 용광로 안에서 서로 혼전하기를 얼마 동안 하다가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비루한 외교로 자아를 팔았을 때, 2천년간을 두고 기대해 오던 이상은 허(虛)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분할이다. 왜냐하면 민족의 자아를 팔아서 얻은 것이니 민족의식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요, 또 그렇게 해서 겨우 얻은 땅이 청천강 이남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통일의 대사업의 실패였다(p.130).
만일 고구려가 그렇듯 갑자기 망하지 않았더라면 만주와 조선을 하나로 통일하여 대국을 이루었을 것이요(p.104)…… 그 고구려가 실패하고 말았으니 이는 비단 고구려의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요 실로 조선민족 5천년 역사상 일대 통한사다. 고구려가 망하여서 조선은 그 장자(長者)를 잃은 셈이다. 그 희망이 꺼졌고 그 유업이 끊어졌다.…… 만주․조선을 통괄할 자연적 위치인 장백산맥에서 고구려가 거꾸러졌으니, 신라가 그 후 별 재주를 부리더라도 요컨대 그 국한이 내다보이는 일이다. 하물며 자력으로써 된 것도 아니요 남의 힘을 빌어서 하였음에서일까(pp.104~105).
그러면 고구려는 왜 망했는가?
낙랑을 도로 찾느라고 그 손은 이미 다치고, 선비․모용의 포악한 적을 막느라고 그 다리를 이미 상하고, 수․당의 흉악한 도적을 용하게 격퇴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흉부(胸部)에 창상(創傷)을 입은 다음에는, 신라가 다시금 당을 이끌어 복배(腹背)로 협공을 하니 그 고구려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의 제일의 자격자인 고구려는 전 조선 민족과 그 문화를 위하여 국경수비를 하다가……비통한 주검을 전선에 가로놓았으니 고구려의 패망은 민족을 위한 순직(殉職)으로 이해해서만 그 정당한 진가․진의를 알 수 있다(pp.105~106).
신라의 통일과 고구려의 패망을 이상과 같이 이해하는 함석헌은 그때부터 한국역사는 비극이 시작되고 한국민족은 고난의 연옥을 걷게 되어, 압박과 치욕이 퍼붓고 비탄과 신음이 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에는 조선의 아름다운 것이 많이 상실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깉어 남아서 그것이 조선을 대표하게 되었으니, 신라문화의 유물이 자랑거리라고 하나 삼국시대의 이상으로 보아 결코 만족할 바 못 되었다. 또 신라 불교에 고원한 이상, 위대한 신앙이 있었으나 곧 사원(寺院)은 음사의 소굴이 되고 국력소모의 장소가 되었고, 화랑도(花郞徒)로써 조선 고유의 사상이 꽃피려던 정신문화도 중국 모방이라는 독충에 잘려 먹힌 바 되고 말았다. 관제(官制)를 모방하고 지명을 고치고 의복풍속까지 따랐으니 자아를 팔아 외력을 사 온 보응이다. 고로 일시의 통일 기분이 지나가자 국정은 걷잡을 수 없이 문란의 구렁으로 들어갔다(p.108). 거기서 자아를 팔아 외교로 흥했던 신라는 결국 천년사직도 두어 마디 외교의 말로 남의 손에 넘겨주고 망했으니, 그 뿌리에 그 열매가 열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고려조
한국역사의 연단기로서의 삼국시대는 분명히 실패의 역사였다. 그러나 인류역사 위에는 허다한 실패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원의 실패란 없다. 삼국시대의 실패는 한국민족을 영원히 장사지내는 실패는 아니었다. 실패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아를 재건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섭리의 손은 그럴 만한 기회도 주었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으로서 민족적 대이상의 자각 밑에 꾸준히 준비해 온 바가 있었다면 실패의 역사를 영광의 광휘로 살려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재삼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또 실패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강한 외적, 민력(民力)의 피폐, 명군(名君)․현신(賢臣) 없음이 그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보다도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삼국시대를 실패하게 했던 그 병, 즉 자아를 잃고 찾지 못한 데 있었다. 왜 중국제도는 고상한 것이고 조선의 것은 속된 것인가. 왜 새 법은 못쓰고 선왕지도(先王之道)라야 하며, 선왕지도라면 하필 문(文)․무(武)․주공(周公)의 일인가. 왜 공(孔)․맹(孟)을 배울진대 남처럼 똑똑하게…… 바로 배우지 못하고, 나라를 팔고 부모를 팔고 내 자신까지 팔아서 공․맹의 수종을 들어야만 하는 줄만 알았던가. 유교를 배운 것이 아니라 유교의 노예가 되었으니, 자아를 잃어버린 후에는 아무리 귀한 교훈도 허위가 될 뿐이다. 세상에 허위를 행해 가지고 흥하는 이치는 없다. 고려 실패의 원인은, 고려뿐 아니라 총(總)히 조선역사가 고난의 역사가 된 원인은, 나를 잊고 허위에 취하였던 데 있다(p.112).
고려에는 삼국시대의 실패의 역사를 되살려 놓을 수 있는 민족적 자아의식의 고조기가 세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궁예와 태조 왕건에 의한 북벌사상의 대두이고, 두 번째가 숙종에 이어 예종대의 윤관(尹瓘)의 북벌이고, 세 번째가 우왕대의 최영(崔瑩)의 북벌이다. 함석헌은 구체적인 사실들로써 그런 기회들이 왜 역사적 기회였는가, 또 그 기회들이 왜 실패하였는가를 상론하고 있다. 실패의 근본 원인은 부유파(腐儒派)의 사대주의와 현상유지의 고식책에 있다. 모화사상, 즉 자아를 잊고 허위에 취한 데에 있다. 여기 함석헌의 글 몇 군데만 인용해 보자. 윤관의 탄핵에 관해, 조정에는 윤관 등의 적극적 진취론자의 성공을 좋아하지 않는 썩어진 선비들이 많았다.…… 사대주의의 부유일파는 호기를 물실(勿失)이라고 윤관파 타도 운동을 일으켰다.…… 왕은 윤관을 구하려고 했으나…… 조신(朝臣) 일동은 동맹파업을 행하여 수일 되도록 출성(出省)하지 않았다. 국적토벌에 대하여는 그렇게 연했던 사람들이 공신토벌에는 그렇게 강하다고는!…… 일어났던 북벌운동은 서리를 맞고 조정에는 고식․퇴영의 구차한 살림을 탐하는 썩어진 선비만이 있어 용사(用事)하게 되었느니…… 2백년이나 거란의 압박 밑에 있어 오던 발해왕손 고영창(高永昌) 조차 조국회복의 뜻을 내는 이때였으니, 고려로써 하기만 하자면 위태는 무엇이 위태하며 결원(結怨)은 누구와 결원인가(pp.123~124).
묘청(妙淸)의 난에 대해서, 신채호(申采浩)가…… 유파(儒派) 대 불파(佛派), 한학파 대 국풍파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투철한 관찰이요, 이 싸움에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긴 것이 조선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원인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묘청파가 승리하여 (평양으로) 천도하여 칭제(稱帝)를 했더라도 북벌에 성공할 수 있었겠는지는 문제다.……그러나 설혹 그때 당장 북벌을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묘청파가 승리했더라면 적어도 사상적 노예생활은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기고 유파가 이겼다. 허위가 또 이기고 자아를 또 못 찾았다(p.127~128). 또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대하여, 고려와 같이 민족부흥의 책임을 진 시대로서 상무(尙武)의 풍을 길러야 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건만, 그 따위 그릇된 (중국에서 배워온)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으로 문약에 흘러 시서(詩書)의 나라라는 칭찬에 헛배가 불러, 북방 오랑캐라고 멸시를 하다가 그 침입을 받아 곤경을 당하면 비사후폐(卑辭厚幣)로써 구차한 목숨을 빌어 얻고도, 그래도 그 난이 지나가면 무사(武士)에 대하여는 내노라고 서슬을 부리는 것이 그 현신충량들이었다. 그렇게 되고는 나라가 평온할 리가 없다. 무사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으니 그것이 정중부의 난이다(pp.129~130).
마지막으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과 그 후의 사태에 대한 글을 보자. 도통 최영(崔瑩)이 왕을 권하여 북벌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로서는 이것이 최후의 허락받은 기회요, 이제 실패하면 다시는 얻을 기약이 없다. 그뿐 아니라 고구려의 망후 7백년 이래의 실패의 역사를 회복하고 못하는 것이, 이 일전에 달렸던 줄을 당시의 사람은 몰랐으나 후대의 역사는 그것을 말한다. 이때가 세 번째 고조기다.…… 그러나 운명은 이상하였다. 최영을 고려 말의 기둥으로 세우면서 이성계를 거기 대립시켰으니 말이다. 둘은 다 주석(柱石)이고 둘의 세력은 비슷했다. …… 그러나 둘의 사상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진취요 하나는 보수, 하나는 이상주의요 하나는 현실주의다. 하나는 의기요 하나는 이해다. 섭리는 이 지요지중(至要至重)한 위기에 이 두 상반된 주의를 두 인물에 대표시켜서 조선민족을 시험하였다. 천년 가까운 고난의 역사가 그들의 가슴속에 모험 진취의 정신을 길렀는가 못 길렀는가, 자존․자립의 기개를 길렀는가 못 길렀는가를 시험한 것이다(pp.135~136).
우왕 14년 음력 5월 23일, 이날에 조선 역사는 일대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등지고 서서 만일 상국지경(上國地境)을 범하면 천자에 죄를 얻어 종사․생민의 화가 당장 올 것이라.……하던 날이다. 이성계가 이기고 최영이 패하던 날이다. 이상주의가 패하고 현실주의가 이기던 날이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국책이 결정된 날이다. 조선역사의 지침이 고난의 길로 결정적으로 돌아간 날이다.…… 이날에 구차한 현실이 조선사람의 왕이 되고 이해철학의 구구한 논리가 조선사람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대사건일 수밖에. 고려 5백년을 두고 두 번 세 번 왔던 기회도 이날 하루가 있어서 다 무용에 돌아가고 말았다. 고구려가 망한 날이 조선 민족 파산의 날이라면 이날은 가운(家運)부흥의 결심을 내던진 날이다. 집을 영 잊은 날이다. 집을 잊은 날은 집을 빼앗긴 날보다 더 비통한 날이다. 왜냐하면 빼앗길 때는 집이 없어졌지만 잊을 때는 자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물주의 시험에 조선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p.137).
73세에 형장에서 쓰러진 최영을 두고 함석헌은 저는 마지막 사람이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산 혼을 힘있게 나타내던 여럿 중의 마지막 사람이다라고 한다. 백발의 최영의 머리가 떨어질 때 그대들은…… 조선역사의 수천년 대탑(大塔)이 와르르하고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나. 죽은 것은 최영이 아니요 조선혼이었다.…… 아니다. 조선혼이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영의 떨어진 머리가 오히려 자약(自若)한 안색으로, 흑흑 느껴 옷자락을 쥐어짜는 더벅머리 조선의 아들, 조선의 딸들을 바라볼 때, 그 혼이 그 어린 가슴속에 그 뜨거운 혈관 속에 왜 아니 들어갔을까. 불사조가 스스로 태운 자기 시체의 유회(遺灰) 속에서 갱생하여 영원히 사는 것 같이 역사의 무너진 탑은 흩어진 석재를 다시 다스려 새로이 일어서는 때가 있고야 말 것이다(p.142).
함석헌의 이 절규는 최영의 죽음을 빌어 일제에 의한 조선의 망국을 통곡하면서 조선은 망했으나 그 혼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한국의 청년남녀의 가슴 속에 혈관 속에 들어가 무너진 역사의 탑을 다시 세우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청년 함석헌의 신념의 절규이며 조선청년들을 향한 애절한 호소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고구려의 실패로써 고난의 짐을 걸머지기 시작한 한국역사의 그 고난의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고려에게 두 번 세 번 주어졌으나 이제 기둥이 찍히었으니 정몽주(鄭夢周)가 무너지는 대하(大厦)를 쌍수로 고이려고 아무리 애써도 다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 조선조
함석헌은 조선조 5백년의 역사는 수레의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라고 한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상에 살려는 정신과 가치에 살려는 기개를 제하면, 남는 것은 축(軸)이 부러진 수레와 동량(棟梁)이 꺾인 집뿐인데, 이성계는 그것(이상과 가치) 없이 건국을 하였기(p.147) 때문이다. 그리고 부덕자(不德者)가 창업주가 되고 야심가가 통치자의 위에 올랐다면 그 백성의 의지가 떨어졌고 그 사회의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말인즉, 당시 조선 사람은 이미 민족적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기(p.150) 때문이다. 중축이 부러진 역사이니 그것이 정궤(正軌)를 밟아 정도를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5백년의 일은 그저 실착(失錯)이요, 전도요 파손이다. 당초부터 이소사대(以小事大)를 표어로 삼고 된 구차한 건국인지라 구차 아닌 것이 없다. 내 나라를 가지고도 남에게 주었다가 다시 빌어 받기에 힘이 들었고, 내 스스로 된 임금이건만도 남의 승인을 얻기에 수모가 막심하였다(p.150). 중축이 부러졌는 고로 수난이다. 하필 조선조에 파쟁이 심했는가, 하필 조선조에 외환이 많았는가, 하필 조선조의 교학만이 폐해가 우심하였는가. 이 모든 것은 중축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모르고는 정해(正解)할 수 없는 일들이다(p.147).
중축이 부러졌으니, 조선조는 국초부터 비틀거렸다. 왕자의 난은 이(利)로써 세운 나라의 장래를 예표하는 서곡이었고(p.150). 세종의 위대한 치적도 조선조의 핵심에 든 병을 고치지 못한 고로 세종이 돌아간 지 얼마 못 되어 그 공적은 대부분 무너지고 말았다. 왕(세종)의 경륜에 중축이었던 집현전에서 국가의 기초를 세우려 하였건만, 역사의 무너진 터를 깊이 파젖히고 자아의 저암(底岩)에 도달한 후 거기서부터 쌓아 올라오는 근본적인 작업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 고로 승평시대에는 당당한 것 같았던 집현전이 지은 토대공사는, 세조의 일격에 그만 미진(微塵)이 되고 만 것이다.…… 집현전 제신(諸臣)은 세조의 눈살이 한번 붉어질 때 구차한 일명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대세가 그에게로 기울어짐을 보고는 구주(舊主)를 팔아 부귀를 사기를 서로 다투었다.…… 세종이 쌓은 토대는 이처럼 분토처럼 무너졌다. 그는 반석 위에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162). 즉 중축이 부러진 수레를 철저히 새로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세종이 받은 사명은 새 문화의 기초를 닦는 것이었는데 그 사명에 철저하지 못하였으므로 왕의 대(代)를 황금시대라고 하나 그것은 그 후의 역사가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p.159) 그렇게 돋보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중축이 부러진 그 수레는 제멋대로 미친 듯이 굴러 떨어져가다가 결국 경술합방(庚戌合邦)으로 아주 망가지고 말았지 않았느냐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역사』가 발표될 때 그 글은 매달 일경(日警)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통곡의 글을 썼다 해도 그것은 삭제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념이나 한 듯 망국의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경장․경술합방의 세세한 이야기를 다 하지 않는다. 대원군은 무식했거니 민비는 음사(陰邪)했거니 누구의 일은 통한하니 누구의 일은 그 고기를 씹고 싶으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5백년의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수난의 언덕을 구을러 내려가는 그 뒷모양을 보며, 아니 우리 자신이 그 길을 굴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이글을 마치기로 한다(pp.239~240).
여기서 돌아오려던 회복의 기운이란 병자호란 중과 그 후에 일어난 배청운동, 영․정조대(英․正祖代)의 탕평책, 그리고 실학운동과 조선 연구, 기독교의 수입 등을 말한다. 이런 일련의 개혁운동은 부러진 중축을 다시 고쳐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몸부림이 성공했더라면 한국역사는 새 힘을 얻어 경술의 국치를 면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러한 몸부림은 어떻게 일어났으며 왜 또 실패하였는가.
임진란에서는 빠져나갈 하수도 구멍이라도 있었지만, 병자호란에서는 대국천조(大國天朝)로 믿고 있던 그 우상의 중국이, 북방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여진족에게 단숨에 거꾸러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우상도 없어지고 구차한 면목마저도 삼전도(三田渡)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순(因循)할래야 더 할 수 없고, 주저할래야 더 할 여유가 없어졌다. 이제는 사지(死地)에까지 추궁당한 짐승같이 스스로 강해지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p.218). 그리하여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소리지른 것이 삼학사가 발한 배청론(排淸論)이고, 그것을 국책으로 실천한 것이 효종(孝宗)의 북벌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수십년에 식기 시작하였다. 신생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당쟁을 없애는 것이 절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영․정조 80년간의 치세가 당쟁탕평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당쟁은 이미 그 뿌리가 깊고 가지가 엉클어졌는지라 좀처럼 없앨 수가 없었다. 당쟁은 민족의 기력을 먹어치우고 정신을 위축시키고 양심을 질식시키고 생명을 깎아먹는 고질인데(p.181), 그 근인(近因)을 찾자면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사림파와 반사림파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는 원인설명이 불충분하고 예종조의 남이(南怡)의 옥(獄)에서 이미 파쟁의 경향을 볼 수 있지만…… 그것도 그 시대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요, 세조 이래의 살기 많고 음모무해(陰謀誣害)가 성행하는 사회의 풍이 낳아 놓은 것이라 함이 마땅하다(p.182).
역사의 표면의 피상적 관찰을 하는 속류사가(俗流史家)들은 세조를 영주라 하고 성종대를 태평성세라 하나, 시대의 의미는 결코…… 표면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p.173). 세조대에 김시습(金時習)이 미침은 의(義)로써 미친 것이다.…… 정상인으로 살아가기에는 그 사회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친 것이다(p.174). 또 성종대에 기첩(妓妾) 하나를 두고 두 조신이 다툼에, 성종이 이는 쇠망의 세대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참아 내 대로써 쇠망의 세대라 하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부치게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겉으로는 성세(盛世)같으나 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 대가 끝나자마자 그날로 병상이 나타났다. 의인들을 죽인 조선은 정신이 착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p.178).
연산에서 발광하기 시작한 무오․갑자 또는 기묘․을사의 사화들, 무슨 옥(獄) 무슨 옥 하는 끝없는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치 사람 죽이는 것이 목적이요 취미인 듯이 광란을 부리는 그 살인의 역사, 그것이 정상의 심리 가진 사람의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로부터 조선의 마음은 착란에 빠졌다(p.179). 한바탕의 광란이 지나간 후 명종을 지나 선조조에 들어 소강(小康)을 보이는 듯 이황(李滉), 이이(李珥)가 나오고…… 회복의 기운이 돌 듯 하였으나, 중추신경에 깊이 먹어 들어간 그 병근은 빠지지 않았다. 일시 평온한 듯한 것은 그 정신이상이 드디어 만성적으로 되는 증상에 지나지 않았다(p.181). 당쟁의 원인을 김종서, 단종, 사육신을 죽인 세조와 최영을 죽인 이성계에까지 소급하여 추구하는 함석헌은, 그 근본원인을 훨씬 더 멀리 고구려의 멸망에서 찾는다. 당쟁은 조선역사 특유의 산물로서 정상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상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겉으로 보면 노소(老少) 싸움, 정당 싸움, 신구(新舊)사상의 충돌인 듯한 점도 있으나, 그것들은 오직 싸움의 재료 구실이 되며 동기를 일으키고 발단을 준 것일 뿐 그 원인은 아니다. 당쟁의 근본원인을 캐자면 삼국시대까지 소급해야 한다. 원래 크던 조선사람의 생활이 그때부터 적어졌고, 원래 넓던 조선심이 그때부터 좁아졌고, 원래 높던 민족의 기개가 그때부터 낮아졌으니 발병의 원인도 여기 있다(p.181). 실로 삼국시대의 역사가 실패되던 날에 배태된 것이다.…… 자아의 상실이 백병․백폐의 원인이 된다. 나를 잊었는 고로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대이상이 없는지라 대동단결이 없고, 자유를 잃은지라 편당을 짓게 된다. 파쟁의 목적은 적은 권세를 다투는 데 있으니 강자에 대해 비굴한 자일수록 심한 법이다. 고로 파쟁은 노예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구려의 패망으로부터 저하(低下)의 길을 밟게된 조선은 급기야 여기까지 왔다(pp.182~183).
이제 민족적 정신착란이 장차 무서운 고질로 고정되려 할 때, 마치 이준경(李俊慶)의 유차사조(遺箚四條)가 앞으로 다가올 무서운 당쟁을 경고하였건만, 일대의 식자였던 율곡(栗谷)이 이스라엘의 예레미아(jeremiah)같이 죄악에 대한 숨김없는 질책과 다가올 환난에 대한 두려운 경고를 하지 않고,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으로 동․서 양당의 잘못을 유야무야 비벼 없애고 타협을 이루어보려 하다가 결국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함석헌은 율곡은 신의 노(怒)와 의(義)와 애(愛)를 대언(代言)하는 이스라엘식의 예언자가 아니요,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하고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16)을 이상으로 삼는 동양식 군자였다. 그런 고로 그의 소구(所求)는 회개에 있지 않고 조정(調停)에 있었다(p.185)고 강렬히 비판한다. 붕당의 분열이 숨길 수 없는 사실임을 알고서도 사건을 확대하지 않고 원만하게 타협케 하려는 것이 유교식 군자의 이상으로 하면 현명한 것일는지 모르나, 그것은 없는 평안을 있다 하며 어루만지는 위선지자적(僞先知者的)인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하며 결국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준경의 유차를 계기로 철저히 수술을 했더라면 후일이 그렇게까지는 아니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pp.188~189).
붕당싸움의 고질병을 수술대에 올려놓지 않고 원만의 꿈장막을 꿰매던 율곡이 49세의 장년으로 죽자, 이제 끓는 가마의 연기가 남에도 있고 북에도 있었다. 곧 남에서 오는 임진란이요 북에서 오는 병자호란이다. 일시미봉의 인간적 애국을 물리치고 민족의 뇌척수 위에 철저한 수술을 행하려 신(神)의 거수(巨手)는 움직였다(p.191). 이성계의 건국 이래 2백년의 역사를 심판하기 위하여 신이 보내는 폭풍우였다(p191). 내일 올 민족의 환난보다 지금 누리는 안일과 권세가 더 중요하였고 …… 없는 평안을 있는 줄로 스스로 속이면서 찰나의 안위를 탐하고 있는 동안에 무서운 심판의 폭풍우가 내습한 것이다(p.194).
충무공에 대하여 함석헌은,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다.…… 더구나 그의 최후를 보고 그가 하나님이 세운 사람임을 더욱 알게 된다. 왜 개선장군이 못 되고 비장한 최후를 마쳐야 했나. 왜 공을 세우기만 하고 영예를 거두지는 못했나. 영원히 승자가 되기 위해, 영원히 산 사람이 되기 위해, 영원히 산 조선사람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다.…… 당시의 조선은 저 같은 숭고한 혼의 소유자가 부끄럼 없이 영예의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도 누추한 사회였다(p.197).
그 누추한 조선조 사회가 무서운 환난을 당한 것은 새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채찍이었으나, 나라의 지배층은 여전히 몽마(夢魔)에 붙들려 있었다. 그 타기(惰氣)와 그 당파심이 그대로 계속되었다. 난으로 인하여 인명을 잃고 국재를 탕진하고, 문헌과 예술품, 모든 문화유산을 허다하게 잃어버렸는데, 이 당파심만은 아니 잃었다. 환란의 의미가 이것 청소에 있었는데, 이것만이 도리어 남았으니 기이한 운명의 역사가 아닌가(p.201).
이렇게 하여 당쟁이라는 한국역사 특이의 정신병은 더욱더 악화되어 결국 망국을 낳았는데, 망국을 면하게 할 만한 일대 신생운동이 실학과 기독교로써 일어났으나 당파 싸움은 그 뿌리가 굳고 깊어 …… 그 고질에 굳어진 마음은 신지식(실학)의 힘에 향하여도 복음 (기독교)의 빛에 향하여도 다 문을 닫고 열지 않았다. 사색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고(p.238), 실학도 무용이고 조선연구도 어디로 가고 복음도 잠류(潛流)하고 남은 것은 냄새나는 상투 밑에 들어있는 존주대의(尊周大義)밖에 없었다. …… 서양문물의 거파(巨波)가 닥쳐 들어오고 열국의 압박이 날로 심해 가는데도, 국책의 수립도 국민적 각오도 역사적 이상도 없고 고식지계(姑息之計)로 오늘은 친청(親淸) 내일은 친로(親露), 임시임시를 미봉하여 가며 일신의 영욕을 다투기에만 급급하였으니(p.239) 신은 이 역사의 지침을 벌써 전락[亡國]의 방향으로 쑥 돌려놓았던 것이다(p.240).
6. 함석헌 사학의 특징 - 그 사학사상(史學史上)의 위치
19세기 이래의 근대사학의 기초를 놓은 것은 사료와 그 비판작업을 통한 사실의 확립을 강조한 랑케 사학이었다. 역사연구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해야 할 과업이 사실의 확립이다. 그러나 역사서술은 사실의 확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립된 사실들에 대한 설명과 해석으로써 비로소 성립된다. 이 새로운 자각에 입각하여 19세 후엽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의 신관념학파에 의해 역사인식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비판이 일어났다. 이 학파의 역사이론은 이탈리아의 크로체에 의해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크로체를 정점으로 하는 신관념학파의 역사이론은 당대에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역사가들이나 일반 지식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그런데 역사의 기본동인을 정신․이성․이념 등 관념적인 것에 귀착시키는 신관념학파의 역사이론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 다음세대는 보다 세련되고 보다 정밀해진 사회과학의 힘을 빌어서 보다 더 합리적으로 역사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종래 랑케 사학과 신관념학파를 연결시켰던 역사학은 사회과학과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이것이 근대사학의 오늘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근대사학의 발전과정을 배경으로 하여 볼 때 함석헌이 역사공부를 하고 『조선역사』를 쓴 1920~1930년대는 역사학이 신관념학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사회과학과의 연결을 중시하는 오늘의 역사학의 입장에서보다는 1920~1930년대의 역사학의 조류에 비추어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조선역사』는 랑케 사학의 연구방법을 따르고 있고 특히 크로체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유력했던 유물사관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으나 함석헌은 유물사관의 기본 전제들과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지 않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의 세계관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역사서술에 나타난 첫째 특징은 크로체적 영향이다. 크로체의 역사이론은 직관을 가장 중시했는데, 『조선역사』에서도 섬광(閃光)같이 번쩍이는 직관적 통찰력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크로체는 직관을 철학적 이지(理知)와 동가(同價)의 독립된 인식활동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지식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직관적 지식이거나 논리적 지식, 상상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거나 지력(知力)에 의해 얻어진 지식, 개별에 관한 지식이거나 보편에 관한 지식, 개개 사물에 관한 지식이거나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지식이다.17) 동시에 크로체는 직관과 함께 사상을 중시하였다. 그에게 역사학의 핵심은 사상활동이다. 기록이나 문서, 연대기들을 정리하고 추려내고 분류하고 이리저리 다시 결합하고 배치하는 문헌학적 역사학은 죽은 역사이다. 참 역사는 그런 기록들과 문헌들을 역사가의 직관과 사상에 의해, 이념과 정신에 의해 현재에 소생시킨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조선역사』는 그러한 문헌학적 역사가 아닐뿐더러 모든 과거의 사실들이 함석헌의 직관과 사상․정신․이념에 의해 현재에 생동력 있게 소생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함석헌은, 과거의 많은 문헌학적 역사가들이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백권의 납골당 명록만을 쓰고 말았는데,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끝으로 크로체의 역사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사의 현재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삶에 있어서의 관심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은 …… 과거의 관심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심에 답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성은 모든 역사의 본래의 특성으로서, 삶의 현재적 관심에 의해 정신의 인식의 대상으로 선택되지 않은 문서는 단순한 외적인 사물 즉 죽은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18) 함석헌으로 하여금 한국역사 전체를 그의 특유한 시각에서 보게 한 동기는 철두철미 현재의 삶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었다. 『조선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관심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일제하에서 고난받는 자기 동포의 현재의 문제의 관심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실학파의 조선연구의 목적에 대해서도 조선을 연구함은 죽은 과거의 분묘를 캐는 일이 아니라 자라나는 역사의 현재에 대하여 가지는 사명을 깨달음이다(p.225)라고 하였다.
함석헌의 역사가 철저히 현재주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의 역사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이것만은 부정하지 못하리라.
함석헌 사학의 두 번째 특징은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의 강조이다. 1930년 전후에만 해도 19세기 이래의 역사주의와 과학적․실증적 역사학의 영향 아래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은 아직 대체로 외면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그러한 지적 풍토에서 함석헌이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 사실에 우리는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서구 사학계와 사상계에서 함석헌 유형의 역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제 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나게 되는데, 그 움직임은 시기적으로 『조선역사』보다 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세계에서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는 함석헌 유형의 새로운 역사관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말은 요컨대 역사는 그 출발에서 종말까지 연속성과 통일성이 있고, 일정한 법칙 ― 신적인 것이든 합리적인 것이든 ― 의 지배하에 있고, 신앙이나 이성이 그 법칙의 구조를 밝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종교적 전통에 따르면 신의 섭리하에 있고, 세속적 역사철학에 따르면 변증법일 수도 있고, 흥망성쇠의 반복의 연속일 수도 있고, 진화의 법칙을 역사에 적용한 경우와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어느 경우에도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이 역사의 의미에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은 종교적․철학적 배경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엽 이래 합리적 철학들은 일체의 형이상학을 역사에서는 물론 기타 모든 지적 분야에서 추방하고 신의 섭리라는 신비적 개념을 역사에서 제거함으로써, 역사의 의미는 역사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만 있다고 강조하여, 역사의 주권을 인간이 맘대로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자연 법칙의 발견이 인간에게 자연의 세계를 정복하고 통제할 길을 열어 주었듯이, 역사의 내재적 법칙들을 알게 된 인간은 역사의 세계도 제 맘대로 개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세계사의 현실은 어떠하였는가. 이 세속적 신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에 대한 합리적인 열쇠도 실제적인 지배력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거기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사람들은 목적을 잃고 자기의 선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역사는 해답없는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또 과거를 조각조각 부숴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미래를 조작하기 위해, 그 많은 자료를 무의미하게 써버리는 공장 같기도 하였다.19) 끝없이 일어나는 역사의 사건들은, 너무나 급속하고 모순투성이고 이해할 수 없고, 비합리적이고 걷잡을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역사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거기서 합리적으로는 뚫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그 역사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소리는 역사의 현실 앞에서의 좌절과 절망의 반사음(反射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좌절과 절망으로 쓰러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어야 한다. 역사에 의미가 없는 것은 그 의미를 역사 자체에서 합리적․철학적으로만 찾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의미는 역사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상가들과 역사가들의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베르자예프(Berdyaev), 바르트(Barth), 니버(Nievuhr), 틸리히(Tillich), 버터필드(Butterfield), 뢰비트(Löwith), 피에퍼(Pieper), 도슨(Dawson), 토인비(Toynbee)가 그들이다. 르네상스 이래 사라졌던 어거스틴적 전통의 역사의 기독교적 해석이 수백년 후 다시 힘있게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의 의미 문제에 대한 이러한 기독교적․종교적 해결은 전문 역사가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일반대중 사이에서도 광범한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잃어버릴 뻔했던 전통적 의미의 역사의 의미에 대한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20)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서구세계에서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상과 같이 개관할 때, 함석헌의 『조선역사』의 자리는 어디쯤인가? 『조선역사』는 그 저작의 동기도 목적도 사실들의 해석도 서술 방법도 모두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역사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저편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섭리에서 발견되는 의미였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서양의 석학들이 함석헌 유형의 새로운 역사관을 주장한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제 2차세계대전과 원자폭탄 및 냉전의 엄혹한 현실을 겪으면서였다. 모두 함석헌보다 뒤의 일이다.
저들이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역사 앞에서 빠져나갈 길을 역사의 저편에서 찾고 있을 때, 함석헌은 벌써 조국의 멸망, 3․1운동의 실패, 일제의 만주침략,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폭력주의 등등 절망의 먹구름이 꽉 짓누르고 있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갈 길을 역사의 저편에서 이미 찾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위에 열거한 세계적 석학들의 어느 누구도, 토인비 이외에는, 역사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메시아 사상에서, 즉 인류 역사의 고난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체계적인 역사연구로써 주장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토인비도 그러한 사관을 보여준 것은 그가 문명사관에서 종교사관으로 바꾼 제 2차세계대전 이후였다. 토인비가 역사란 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영혼들에게 신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는 비전이라고 말한 것은,21) 함석헌이 역사는 인류가 하나님을 탐색하는 기록이며 신에 대한 인류의 지식의 성장과정이라고 말한 지 20여 년이나 지난 후였다. 이렇게 볼 때 『조선역사』는 20세기 세계 사학사에서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역사』가 한국사학사에서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 『조선역사』 전편에 관통하는 사상의 큰 줄거리는, 한국역사의 적장자 고구려가 통일을 이루지 못한 탓에 한국역사는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니, 그 고난의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잃어버린 고구려 땅을 도로 찾는 것이었다. 거기서 북진정책은 자주적인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존화사대적이고 자아를 팔아서 영화와 투안(偸安)을 누리는 허위였다. 그런데 북진책을 반대한 자들은 예외 없이 존화사대의 썩은 유신파였다. 거기서 『조선역사』에는 신라 중심의 유교적․사대적․비자주적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부정의식이 깊이 깔려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함석헌은 『삼국사기』의 사통(史統)을 이은 조선조의 유파사가(儒派史家)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삼국사기』보다는 『구삼국사』나 『삼국유사』같이 고구려 중심의 독립․자존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한 사통을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고려는 고구려=발해와의 강한 연계의식을 갖고 있었으나 김부식 부류의 존화세력에게 눌리고 말았으니, 결국 이성계 같은 사대파가 조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역사』를 민족적 자주의식의 사통에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17~18세기의 반존화적․자주적 역사의식을 새삼 강조했던 실학파의 사풍이나 그 후의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의 흐름에도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함석헌은,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와 독립에 대한 확신을 고취하기 위해 한국역사의 어둡고 부끄러운 면을 숨기고 밝고 영예로운 것만을 애써 강조하는 따위의 쇼비니즘(chauvinism)은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조선역사』의 현대 한국 사학사상의 위치를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자리 매김할 수 있다면 그 사풍(史風)은 앞으로도 계승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의 고난사관도 유사한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긍정적으로 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계 역사학계의 대세는 함석헌=토인비 유형의 역사관에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거시적으로 본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끝으로 역사가로서의 함석헌의 문장은 오늘과 내일의 한국 역사학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서술은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문법적으로 정확해야 함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 표현이 난해하거나 생경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그 활발한 연구활동에 비해 그 연구성과가 널리 읽혀지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소수의 전문역사가들 사이에서만 겨우 이해될 수 있는 난삽한 표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학이 역사의 대중화라는 구호에 반드시 호응해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구호가 오늘의 우리 역사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테오도 몸젠(Theodor Mommsen)이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처럼 역사연구로써 노벨 문학상을 꼭 바라지는 않더라도, 역사서술은 산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만큼 훌륭한 작가의 문장에 지지 않는 풍부한 어휘와 박학다식한 상징들과 비유들, 독자를 힘있게 끌고가는 박진력, 독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시적 필치, 평이하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런 면에서 역사가로서의 함석헌의 문장은 한국 역사학계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될 만하다. 물론 그렇게 하다 보면 머리로 쓰는 역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역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사실 함석헌의 역사서술에는 그런 면이 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나 프랑스의 쥴 미슐레(Jules Michelet)가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가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그들의 저작은 자기 시대가 가야 할 길을 민중에게 뜨거운 가슴으로 제시한 것들이었다. 함석헌의 저작도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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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논문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 26집(2000년)>에 게재된 것이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싣는다. -편집자 주
1) 함석헌(1901~1989)의 역사연구에 대해서는 역사학적 입장에서 여러 모양으로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한국사 전공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다만 이 소론에서 어떤 종류의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함석헌 자신의 입장에 서서 그의 독특한 역사서술을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뿐이다.
2) 『咸錫憲全集 1 -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하『全集』)(한길사, 1983), 「함석헌 선생 전집 간행에 부쳐」, pp.5~7.
3) 『水平線 넘어』(생각사, 1961), 「머리말」.
4) 이하 『조선역사』로 약기함.
5) 이하『세계역사』로 약기함.
6) 趙東杰, 『現代韓國史學史』(나남출판사, 1998), p.321.
7) 함석헌,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星光文化社, 1950), p.3.
8) 이만열, 「한 역사학도에게 비친 함석헌 선생」, 김용준 엮음, 『나의 스승 咸錫憲』(해동문화사, 1991), p.272.
9) 「책을 내면서」, 『全集』9 (1964).
10) 이하 『한국역사』로 약기함.
11) 『全集』 1, pp.18~19.
12) 이하 『全集』 9, p4.
13) 李萬烈은 『조선역사』를 『한국역사』로 개제(改題)한 것은 함석헌이 한국사의 성서적 해석에 자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함석헌의 고난의 역사이해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침윤되어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이 좌절감과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던 사실을 상기할 때, 자기 역사에 자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위안을 위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역설의 논리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만열, 『韓國史의 基督敎的 理解』 (亞細亞聯合神學硏究院, 1977), p.25.
14) 이하 본문 중 ( )안의 숫자는 『조선역사』의 페이지이다.
15) 李萬烈은 『조선역사』를 지리적 결정론의 사서(史書)라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인간의 책임을 묻는 기독교 사관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이만열, 『한국사의 기독교적 해석』, p25)고 하는데 이는 『조선역사』를 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16) 잘되면 겸하여 천하를 좋게 하고, 잘못되면 홀로 자기 몸을 좋게 한다는 뜻임.
17) 吉玄謨,「크로체의 역사이론」,길현모․노명식 편,『서양사학사론』(法文社, 1997), p.315.
18) 윗책, p.342.
19) Hans Meyerhoff,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our Time(마이어호프, 『우리 시대의 역사철학』, (Doubleday, 1959), p.22.
20) 같은 책, p.23.
21) 나의 글, 「토인비와 咸錫憲의 比較試論-苦難史觀을 중심으로-」, 『韓國基督敎의 存在理由』 (崇實大學校出版部, 1985), pp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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