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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씨알사상과 민중신학 (박재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8.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의소리> 1988년 12월호

 

 

씨알사상과 민중신학  

 

박 재 순

 

 


1. 들어가는 말

 

함석헌 님의 씨알사상은 서구사상(기독교)과 동양사상(도교, 유교, 불교)을 씨알(民)에 입각해서 독창적으로 결합시킨 주체적인 한국사상이다. 그것은 서구정신과 동양정신의 창조적 만남이며 씨알을 일깨우고 씨알의 시대를 열어가는 실천적인 사상이며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인에 의해 형성된 순수한 한국사상이다.
민중신학은 한국에서 기독교와 민중 ·민주운동이 합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신학이다. 그것은 성서적 민중전통과 한국적 민중전통의 창조적 만남이며,민중고난의 현장에서 형성된 실천적인 현장신학이며 폐쇄적인 서구신학의 교리적 ·사변적 전통을 거부한 주체적인 한국신학이다.

 

씨알사상과 민중신학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두 사상의 유사성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 만남이라는 것. 둘째, 씨알 또는 민중에 집중한다는 것. 세째, 남북분단 이후의 민족사 속에서 민중민주 운동의 실천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 님의 씨알사상이 '50년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1970년 4월에 창간한 「씨알의 소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면 민중신학은 1975년 경에 한국의 진보적 신학 자들에 의해 등장했다. 두 사상의 시대적 연속성 내지 동시대성을 지적할 수 있다.

 

두 사상이 한국민족의 주체적 사상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두 사상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씨알사상의 핵심 또는 기본성격을 밝히고 두 사상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논하려 한다.  

 

2. 씨알사상의 핵심과 기본성격

 

   1 ) 씨알이란 말을 쓰는 까닭
함석헌 님이 '씨알'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스승 유영모 님이 대학 강의를 하다가 민(民)을 '씨9'로 옮긴데서 비롯되었다. (민중, 백성, 국민)과 같은 말들이 엄연히 있는데 굳이 '씨알'이란 말을 쓰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민(民)이란 말 속에 지배 ·피지배의 관계, 다시말해 봉건제도의 잔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민(民)이 봉건시대를 표시한다면 씨알은 민주주의시대를 표시한다. 둘째, 우리의 민족혼 우리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함이다. 중국의 한자문화에 눌려 잃어버린 민족정신과 언어를 찾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인 '씨알'을 쓰자는 것이다. 씨알을 '씨ㅇ.ㄹ'로 쓰는 이유도 민(民)의 주체성을 찾기 위함이다. 함석헌 님에 의하면 " ."는 모든 모음의 기본이 되는 소리이다. 그에게 있어서 '씨알'은 모든 삶의 밑뿌리면서도 무시를 당해 거의 잊혀졌던 민(民)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심볼이다.

 

   2) 씨알의 본질과 현상
그의 씨알관을 이해하려면 언제나 체(體)와 용(用)의 두가지 관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체(體)의 관점은 씨알의 본체에 집중하는 존재론적 관점이고 용(用)의 관점은 사회역사속에 나타난 씨알의 현상적 모습에 초점을 맞춘 관점이다.그가 역사적 사회적 관계에서만 씨쥠을 규정하고 이해하는데 반대하면서 지배  피지배 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씨알의 본질적 측면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씨온이 지배자들에 의해 억눌리고 수탈당하고 소외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결코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항상 그 사실을 폭로하면서 지배자들을 질타하거나 그 사실을 전제한다. 그에게 있어서 씨알은 억눌리고 빼앗기며 무시당하는 존재이면서도,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생명의 본성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한 존재이다. 씨알은 결코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며 단순히 존재론적인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지배 피지배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그 관계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공동체적 관계를 지향하는 실천적 역동적 개념이다. 씨알은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다.

 

  3) '맨사람' 씨알의 주체적 역량
씨알은 '맨사람'이다. 씨론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 있기 때문에 사회제도의 신분과 계급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은 '나(我)대로 있는' 사람이며 '난(生)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회제도적 옷을 벗은 사람 곧 'ㅇ.ㄹ사람'이다. 따라서 씨알은 사회제도 속에 규정된 인간 즉 임금, 대통령, 장관, 학자,목사, 신부, 군인, 관리, 문사, 장사꾼, 죄수 등과 대조된다.
씨알이 사회제도의 신분과 계급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 것은 씨알의 주체적인 역량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씨알은 인위적인 사회제도의 해독에 물들지 않은 존재, 인간생명의 본성(자발성, 스스로 함)을 비교적 충실히 간직한 존재이다. 평생 들 사람으로 살아온 함석헌 님은 정치와 사회제도의 지배층에 대해 강한 불신을 지닌 반면에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씨펄에 대해 서는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 ‥‥‥‥몇천 몇백 년을 있어도 그 [씨알의] 본성은 변함이 없읍니다‥‥‥민중 [씨알]은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합니다 제도나 이데을로기는 민중(씨알)을 선하게 못하는 대신 근본적으로 타락시키지도 못합니다. "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짓눌리고 빼앗기면서도 인간생명의 본성을 간직한 씨알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 같으나 지혜롭고, 못난 것 같으나 어질고, 착한 것 같으나 위대한 존재이다. 씨알이 모든 지혜와 문화의 원천이다. 따라서 씨알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씨알에게 배워야 한다.

함석헌 님에게 있어서 씨알의 주체적 자발적 역량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정치적 지배계층과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맞물려 있다. 정치적 간섭과 고정된 사화제도로 씨알의 앞길을 막지 말고 씨알을 씨알대로 둬 달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스스로 하는 것이 생명의 근본원리이고 씨온은 누구보다도 생명의 근본바탕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씨알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씨알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한다. 노장사상도 인위적인 정치의 간섭을 거부하고 씨◎을 씨◎의 자연스런 삶에 맡길 것을 역설한다.

이처럼 씨론 사상과 노장사상이 씨운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역설한 것은 한낱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신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헤겔은 아시아적 사회를 1인이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로 보았으나 아시아적 농경사회의 농민들은 서구의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상당히 자율적인 농업생산공동체(부락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관개시설을 국가가 관장했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으나 그 국가 체제 안에서 농민들은 비교적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생산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룩된 아시아인들의 자율적 전통과 그 전통 속에서 축적된 아시아인들의 주체적 역량이 이 땅의 씨알 속에 살아 있다면 씨알사상과 노장사상은 역사적 객관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4) 하나님과 씨알은 직결된다

씨알은 사회역사적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직결되는 종교적 신앙적 개념이다. 가장 깊은 중심에서 보면 씨알은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다. 씨알의 본질을 '나'와 '하나님'으로 파악한 것은 씨알을 신앙적 ·존재론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개체로서의 씨알을 극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이라든지 하나님이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씨알은 '나'와 하나님의 역동적 관계, 긴장된 일치를  나타낸다. 씨알이란 말 자체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ㅇ)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 · )은 극소(極小) 혹은 내재적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과 씨알은 직접 일치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땅에서 현상계에서, 역사 속에서는 씨알과 일치된다.

 "하나님과 민중(씨알),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씨알)에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그것이 곧 민중(씨됨)이다·

하나님과 씨알을 일치시키는 표현은 무수히 많이 발견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민중[씨알]이고 "하나님이 현상계에 내려오는 자리가 씨알이며 "하늘의 뜻은 언제나 씨알의 가슴에 내려와 있다. 그리고 (전체)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씨알이 일치되기도 한다. 우주에서는 하나님이 전체라면 역사에서는 씨알이 전체다. 어떻게 땅에 있는 씨알, 역사 속에 있는 씨알을 하나님과 일치시킬 수 있나?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고 땅에 있는 씨알은 역사적 ·상대적 존재가 아닌가?그렇다. 그 점에서 하나님과 씨알을 무조건 일치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가장  크고 위대한 존재, 만물을 포괄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씨알 이외에 어떤 존재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현실 속에서 씨알보다 크고 위대한 존재가 누구인가?함석헌 님이 하나님과 씨알을 일치시킨 것은 씨알이 역사와 사회의 현실 속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5천년 동안 민족사 속에서 짓밟히고 무시당한 씨알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세우고 모든 판단의 표준으로 삼은데서 씨알사상은 시작된다. 이로써 전통적인 지배자 중심의 가치관은 정면에서 부정되고 씨알 중심의 가치관이 수립된다. 역 사와 사회의 중심에 놓인 씨알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일하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은 당연하다.
씨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이며 하나님의 계시가 내리는 안테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씨알에게로 가야 한다 예배당의 목사나 불당의 스님에게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씨알, 사회의 밑바닥에 묻혀 있는 씨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함석헌 님에게서 하나님은 교회당에 갇혀 있거나 종교의식에서만 살아있는 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 세상 한 복판에 살아계신 분이며 역사와 세상 안에서도 이름없는 수많은 씨알 속에 그리고 씨알 하나 하나의 혼 속에 살아계신 분이다. 하나님과 씨알을 직결시킴으로써 함석헌 님은 형식적인 제도적 종교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다.

씨알과 하나님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씨알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된다. 씨알을 "더럽다 하고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프게 하는 자이다. 함석헌 님에게 있어서 씨알은 나라의 물질적 ·정신적 건강 의 척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 섬김의 표준이다. 씨알을 외면한 정치와 종교는 악이고 위선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씨쥠을 받듦이 하늘나라 섬김이요,씨알을 노래함이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그러나 무조건 씨알을 미화하고 이상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씨알은 재주있 지도 않고 살림을 규모있게 하는 존재도 유식한 존재도 아닐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 이름을 더럽히는 어리석고 둔한 존재일 수 있다. 반드시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훌륭한 존재여서 씨알이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세상의 온갖 짐과 고난을 짊어지고 맨 사람으로서 사는 존재이기에, 어리석고 허물많은 듯이 보이는 씨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참다운 삶을 얻으려면 역사의 바닥에 있는 씨알에게 가야 한다 씨앗이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질 때 생명의 노래와 춤이 나오듯이 인간도 세상의 바닥에 있는 씨알에게 내려올 때 생명의 기쁨과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세상에서 씨알을 제쳐 놓고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그러면 씨알 자신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기서 (스스로 함)의 원리가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씨알은 결코 하나님과 이분법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 씨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순한 타자가 아니다. 하나님과 '나'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서구사상의 주관/객관 도식이 여기에서 극복된다. 하나님은 밖에 있는 존재이기 전에 '내'안에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씨알은 하나님을 제속에서 제 자신을 통해 찾고 만날 수 있다. 씨알은 자신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 말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말해야 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씨알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제게 대하여, 저 를 통해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권력도 재산도 없는 씨알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 속에 살 아있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지배자는 힘에 살지만 씨됨은 믿음에 산다. 씨알은 저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다. 씨알이 제 속에서 스스로 일으키는 씨알의 생명운동은 하늘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5) 씨알은 역사의 주체다

씨알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온갖 힘든 일은 다하면서도, 이름도 빛도 없는 존재이지만 씨알이야말로 역사의 실질적인 담당자요 역사창조의 참다운 주체이다. 씨알은 역사의 중심에 있다. 씨알은 "앞선 영원[과거역사1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미래역사1의 맨 꼭지다. " 씨알은 새시대를 낳는 산모요 씨알이 역사 속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새시대 새 공동체를 낳는 진통이다. 역사의 변혁, 참된 혁명은 위로부터 일어날 수 없고 역사의 바닥에서 씨론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역사의 미래는 씨알의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당한 모든 고난은 씨알의 시대를 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씨알사상은 씨알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씨알의 시대를 가로막는 것은 지배자들, 영웅들이다. 이들이 씨알을 짓밟고 으시대면서 역사를 피로 물들이지만 말없이 일하는 씨알들이 역사를 푸른 생명의 동산으로 이끌어간다.

함석헌 님은 씨알이 역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씨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며 고난받음으로 주인됨을 배우는 존재요,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존재이다. 씨알의 이러한 삶은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지배자들에 의해 강요된 삶이다. 그러나 씨알은 피동적으로 마지못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슬기있게 그들의 삶을 살아왔다. 역사의 밑바닥에서 세상의 온갖 짐을 짊어진 씨알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같다.  

씨알이 오늘의 현실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역사의 짐을 짊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고난의 짐을 잘 져야겠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씨알이 스스로 고난의 운명에서 벗어날 때 세상의 온전한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제 3세계의 모든 씨알이 "덮어 누르는 불의의 고난에서 이기고 나와서 제 노릇을 하면 인류는 구원을 얻는다. 인류의 역사적 운명은 씨알에게 달려 있다.

 

   6) 씨알과 전체-반국가주의

씨알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전체'다. '전체'는 하나님과 씨알을 연결하는 매개개념이다 우주에서는 하나님이 전체이고 역사에서는 씨알이 전체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함석헌 님에게는 "전체만이 참이요 선한 것"이다. 과거에는 개인이 생각과 행동의 주체였지만  오늘날에는 전체가 생각과 행동의 주체다.

씨알은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씨알이 깨기 전에는 개체에 불과하지만 깨면 전체이다. 씨알이 개체로서 머물면 무력하지만 전체의식을 가지면 역사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개체로서의 씨알과 전체를 직결시킴으로써 당파주의, 집단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실제로는 당파주의, 집단주의이면서 전체를 표방하고 씨알에게 폭력을 서두르는 것이 국가주의다. 반국가주의는 함석헌 님의 오랜 신념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국가주의는 ,씨알사상의 소극적 표현에 불과하다. 씨알의 주체성을 살리는 것과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인류역사 자체가  국가와 씨알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갈수록 씨알이 승리하는 싸움이다. 세계의 씨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향해 나가는 앞길을 국가주의가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다.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함석헌 님의 철저한 반국가주의에서 우리는 씨알에 대한 절대적 낙관과 신뢰를 볼 수 있고 국가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볼 수 있다.

 

  7) 씨알과 평화주의

씨알사상은 평화주의와 직결된다. 그 까닭은 씨알이 전체에 살고 전체에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체의 자리에서는 것은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대적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적대자를 구원하지 않고는 '나'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적대자와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사랑의 정신으로 싸워야 한다. 폭력을 쓰는 것은 나와 적대자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함석헌 님의 비폭력 평화주의는 '사랑의 전체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씨알사상의 평화주의는 생명과 역사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것이다. 생명의 근본원리는 '스스로 함'에 있기 때문에 폭력적 강제는 원리적으로 거부된다. 인류의 진화과정도 평화주의를 입증해 준다. 거대한 물리력을 지닌 파충류가 몰락하고 힘 없는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힘에 의존하지 않고 말과 이성을 통해 서로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도 그렇다. 폭력을 휘둘렀던 지배자들과 소위 영웅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힘없이 고난당하는 씨알들이 오늘까지 역사를 지켜왔고 갈수록 역사의 주인으로 부상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실체이자 주체인 씨알의 삶 자체가 평화주의를 실천해 왔다 지배자가  죽이고 파괴했다면 씨알은 생산하고 건설했다. 전쟁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생산하고 건설하는 것이 씨알의 전형적인 삶이다.

'정말 이기는 것' 정말 위대한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약한 것이다.  그것은 공자의 인(仁)이요, 예수의 사랑이요, 석가의 자비이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축적된 씨알의 지혜와 역량은 강제로 동원될 수 없다. 그것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고 동원될 수 있다. 함석헌 님의 씨알사상은 철두철미 평화주의로 관통된다.

 

3. 씨알사상과 민중신학의 관계    

 

지면 관계로 여기서 민중신학을 소개할 여유는 없다. 단지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의 몇 가지 공통점을 제시해 보자.우선 민중신학은 민중의 실체에 대한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철저히 민중의 편에서 민중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성서를 해석하는 민중신학은 민중적 삶의 주체적 역량과 지혜에 대한 깊은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중신학의 이러한 대원칙은 씨알사상과 그대로 통한다.    

둘째, 민중신학은 민중개념을 ·사회과학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서남동 님이 민중에 대한 잠정적 규정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대부분의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에 대한 개념규정을 한사코 거부한다. 민중을 개념적인 틀 속에 가두어놓을 경우에 민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이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씨알을 사회 제도적 관계 속에서만 규정하지 않으려는 씨알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세째, 민중을 가르치기 보다는 먼저 민중에게 배울 것을 강조하는 점도 씨알 사상과 통한다.

네째, 민중신학의 핵심은 민중구원론에 있다. 민중구원론은 민중이 구원(해방) 받을 대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구원(해방)을 스스로 이루어가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민중의 해방자로 자처하거나 민중해방의 전략전술을 민중에게 가르치려는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민중은 자신의 해방을 이루어갈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민중구원론의 다른 측면은 비 민중계층이 민중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민중과 그리스도(하나님)가 동일시된다. 민중신학은 민중 속에서 그리스도(하나님)의 현존을, 민중사건에서 예수사건을 보고 증언하는 신학이다. 민중이 자기구원의 주체이고 민중과 그리스도(하나님)가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과 씨2사상은 일치한다.

다섯째, 해방신학에 비해 민중신학이 해방보다는 민중고난의 현실에 촛점을 맞춘 것도 씨알사상과 일치하는 점이다.

여섯째, 민중과 정치권력을 예리하게 대립시키고 민중에 대한 철저한 긍정과 정치권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견지하는 것도 씨알사상자 일치한다. 그러면 민중신학과 씨알사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내용적으로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다. 함석헌 님의 씨알사상이 오랜 인생경험과 실천 속에서 명상과 사색을 통해 형성되었다면 민중신학은 민중고난의 현장에 직접 참여한 몇몇 신학자들의 집단적 경험과 성찰을 통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씨알사상이 존재론적(또는 신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민중신학은 정치적 상황, 민중고난의 현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양자는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다. 씨알사상은 현장적인 구체성을 민중신학으로부터 보충받고 민중신학은 존재론적 확신을 씨알사상으로부터 보충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씨알사상과 민중신학은 민중운동의 운동적 논리와 집단적 성격을 이해하고 민중운동에 기여하기 위해서 사회과학적 언어와 관점을 포용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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