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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씨앗에 대한 민중신학적 성찰(박재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8.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앗에 대한 민중신학적 성찰

 

박재순

 

오랫동안 한국의 민중신학은 억압받고 수탈 당하고 소외된 민중의 사회 정치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힘썼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민중은 사회경제 문화적 고통 속에 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민중이 스스로 일어서서 운명을 쇄신해 가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과제가 중요해졌다. 민중의 내면과 주체적 영적 차원이 중요해진 것이다.
민중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 속에서의 집단이면서 구체적인 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서의 민중을 외면하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민중만을 말하면 민중을 추상화하고 관념화하게 된다. 민중의 주체적 영적 차원을 밝히는 일은 민중 한 사람의 삶이 집단적 사회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구체적인 한 사람의 내적, 영적 차원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비유했고 스스로 씨앗의 삶을 살았다. 땅에서 떨어져 죽어서 많은 결실을 맺는 밀알처럼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쳐서 인류상생의 길을 열었다. 예수는 자신을 비우고 버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열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 우주적 삶의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인 한 사람(잃은 양 한 마리)에 집중했다. 예수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빛 속에서 구체적인 한 사람을 치유하고 돌봄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쇄신하는 운동이었다.
 예수운동을 오늘 펼치기 위해서 정치경제적 구조와 사회문화적 억압을 깨뜨릴 뿐 아니라 민중의 영성을 쇄신해야 한다. 오늘의 전지구적 생태학적 위기 앞에서 그리고 지구화되는 산업문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안과 밖, 개체와 전체가 구별 없이 서로 얽히고 통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미 내 속에 사회의 모순과 악이 침투해 있고 악마적인 사회문화의 원리와 힘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또한 우리 각자의 자기중심적 욕망과 지배욕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악화시킨다.
씨앗은 민중의 개체성과 전체성을 드러내는 적절한 은유이다. 씨앗 한 알속에 수 십억 년 이어 온 생명이 응축되어 있고 씨앗 한 알속에 꽃과 열매, 잎과 줄기의 싹이 담겨 있다. 씨앗은 스스로 자라는 존재이고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의 어울림을 통해 우주적 생명을 펼친다.
씨앗은 민중의 영성적 깊이와 우주적 생명의 조화와 일치를 드러낸다. 씨앗은 민중의 자발성, 주체적 영성적 차원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민중적 삶의 생태학적 차원을 밝혀 준다. 씨앗의 은유를 통해 민중의 주체적 영성을 밝히고 서로 살림의 생태학적 차원을 강조할 수 있다.
또한 씨앗은 체제와 구조의 악마적 죄성을 고발하는 효과적인 은유이다. 어떤 기득권이나 체제와 제도의 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펼쳐 가는 민중의 자주적이고 고유한 삶의 힘과 지혜를 씨앗은 보여 준다. 그리하여 씨앗은 체제와 제도의 굴레에 매인 민중으로 하여금 체제와 제도를 넘어서 자유와 평등의 삶을 펼쳐 갈 힘과 지혜를 보여 준다.

 

1. 씨앗과 꽃과 인간의 이야기

 

5억 년 전에 오존층이 완성되고 지상에 처음으로 겉씨 식물이 생겨나고 10m 넘는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었다. 3억년 전에 몸길이 60cm밖에 안 되는 공룡이 엄청난 식욕을 가지고 나뭇잎을 먹어대서 몸길이 50m까지 자랐다. 긴 목과 작은 머리와 엉성한 이빨을 지닌 거대한 공룡들은 겉씨 식물이 주종을 이루는 거대한 숲의 파괴자였다.
겉씨 식물인 침엽수림이 파괴되면서 꽃과 열매를 지닌 속씨 식물이 생겨났다. 꽃과 열매, 꽃가와 꿀은 곤충과 포유류와의 공생관계를 위한 미끼이고 노력이다. 꽃가루와 열매와 꿀을 주고 아름다운 색깔과 자태를 지님으로써 속씨 식물들은 곤충들 특히 포유류를 끌어들이고 이 동물들에게 맛나고 좋은 먹거리를 주고 자신의 씨앗을 전파하게 했다. 곤충과 포유류를 통해 속씨식물들
은 빠르고 다양하고 넓게 퍼졌다.
파괴자 공룡은 겉씨식물이 꽃과 열매를 지닌 속씨식물로 대체되자 적응 못하고 소멸해 갔다.
6,500만년 전에 지름 10km의 운석이 충돌해서 먼지 때문에 긴 겨울이 와서 공룡은 멸절했다. 포유류는 속씨 식물과 공생하면서 빠르게 진화하고 번식했고, 영양이 풍부한 열매를 먹고 지구적 재난의 긴 겨울을 이겨냈다.
꽃의 아름다움과 열매와 꿀은 공생하려는 생명의 의지에서 나왔다. 꽃의 아름다움, 열매와 꿀의 달콤함은 상생을 위한 것이다. 꽃의 아름다운 자태, 다채로운 빛깔, 다양한 모습은 상생에로의 부름이며 더불어 살려는 생명, 더불어 살려는 조물주의 아름다운 의지이다.
 1 만 1천년 년 전에 북미대륙의 얼음물이 바다로 퍼져 다시 기온이 내려갔고, 숲과 초원이 줄자 식량위기를 맞은 인간들이 추위를 이기는 야생 밀을 발견하여 농사를 시작했다. 씨앗으로 농사를 지음으로써 인구는 급증하고 오늘의 문명사회를 이루었다.

 

2. 민중: 역사와 사회의 씨앗

 

1) 씨앗의 은유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온갖 설움과 恨(Han)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 온 민중을 함석헌은 씨앗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씨앗 속에 수십억 년의 생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씨앗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무한히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꽃씨 하나에 수십억 년 동안 피고 졌던 꽃나무들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이 꽃씨 하나를 통해 앞으로 수천 수만의 꽃나무들이 피고 질 수 있다. 따라서 씨앗은 영원무궁한 우주적 생명의 응축이다. 씨앗처럼 민중은 영원한 생명의 담지자다. 민중의 한많은 가슴 속에 오천 년 민족사의 설움과 염원이 쌓여 있고 앞으로도 민중의 삶을 통해 한민족의 삶이 무한히 전개될 것이다.
씨앗은 자신 안에 생명의 힘과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스스로 싹을 틔우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꽃과 열매를 맺는 자발적 생명의 표본이다. 생명활동의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씨앗은 언제 어디서나 생명을 꽃피울 수 있다. 물리적 힘과 법의 명령에 의해 씨앗의 생명활동을 강요할 수 없다. 총칼의 힘으로 꽃을 피울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중은 역사적 사회적 삶의 무한한 힘과 지혜를 지닌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다. 민중은 자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이다.
씨앗은 흙에 떨어져서만 다시 말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생명활동을 할 수 있다. 씨앗은 남을 딛고 서서는 싹을 틔울 수 없다. 금과 은으로 된 귀한 상자 속에서는 생명의 노래와 춤을 시작할 수 없다. 땅에

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을 열고 아름다운 생명을 꽃피울 수 있다. 그리고 씨앗의 모습 자체가 둥근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한 점만 있으면 설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중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름도 지위도 없이 민족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의 삶을 꽃피우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민중이 높은 지위를 탐할 때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버리고 다른 민중을 배신하게 된다. 씨앗이 흙에 떨어져 대지의 주인이 되듯이, 민중은 스스로 바닥에 섬으로써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 된다.
씨앗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풍성한 생명을 꽃피운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하나의 씨앗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써 풍성한 삶을 사는 씨앗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위대한 삶이 약속된다는 삶의 원칙과 '나'를 희생함으로써 이웃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사회적 삶의 도리를 보여 준다. 민중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난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아 왔다. 민중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한민족의 삶은 정화되고 풍성해졌다. 민중은 오천 년 민족사 속에서 "죽어서 사는 도리"를 체득한 셈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예수가 인류 전체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음으로써 인류의 메시아가 되었듯이 민중도 민족과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감으로써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
하나의 씨앗 속에 전체 생명이 담겨 있으며 전체 생명의 뿌리에서 하나 하나의 씨앗이 생겨난다. 씨앗은 전체와 개체의 상호동속성을 잘 보여 준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하나의 인간 속에 우주생명(인류생명)의 중심인 하나님이 내재해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직결시킴으로써 한 인간과 사회 전체가 직결된다. 한 인간의 선행이나 범죄는 단순히 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전체 사회가 관련된 행위이고, 전체 사회의 미래는 구체적인 개인의 생각과 실천에 달려 있다.
씨앗은 제 모습을 지키기만 하면 수 천년이 지난 후에도 싹을 틔울 수 있다. 씨앗이 오랜 세월의 추위와 바람을 참고 견디어 낸 후 생명을 꽃피우듯이, 민중은 오랜 역사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본연의 제 모습을 지켜 낸 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2) 민중은 역사와 사회의 씨앗

한국의 민중이 5천 년 험한 민족사 속에서 혹독한 고난과 시련, 죽음과 한을 이기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도의 달리트(Dalits)들이 수 천년 동안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종교신분적으로 비인간적 억압과 소외와 수탈을 겪고 생존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생명의 힘과 영성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씨앗 한 알 속에 무궁하고 풍성한 생명이 응축되어 있듯이, 민중 한 사람, 달리트 한 사람 속에 엄청난 영적 생명의 힘과 지혜가 들어 있다. 수 억년 전, 수 십 억년 전에 땅 속 깊은 바닥에 묻힌 울창한 삼림과 거대한 공룡, 맴머스들이 수 억년, 수 십억년 동안 거대한 산과 두터운 바위에 짓눌려 석유, 석탄, 개스와 같은 엄청난 에너지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아름답고 단단한 보석이 되었듯이, 수 천 년, 수 만년 동안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역사와 사회의 모든 짐을 지고 상처와 시련을 이겨 낸 민중의 삶 속에도 엄청난 영적 생명에너지,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영성이 담겨 있다.
한국의 지배층은 외래문화와 외세에 쉽게 굴복하고 동화되었으나 약한 것 같은 민중은 민족의 얼과 자존을 지켜 왔다. 인류와 민족의 참된 생명, 영과 얼이 민중 속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인위적인 제도와 이념으로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의 바탈-(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간직한 존재다. 씨앗인 민중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보존한 존재이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민중도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 그리고 지배문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칠 때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난다. 밟아도 밟아도 굳세고 무성하게 일어서는 잡초처럼 민중은 눌리고 뺏기고 밀려나도 억세게 활기차게 일어난다. 언 땅을 뚫고 푸른 풀이 돋아나듯이 풀씨가 소나 말의 뱃속을 지나서도 싹을 티우고 꽃을 피우듯이 민중도 모진 억압과 수탈을 뚫고 힘차고 아름답게 살아난다.
씨앗은 제가 제 몸으로 자라고 변화한다. 씨앗은 '스스로 함'의 상징이다. 스스로 함은 스스로 말미암음(自由), 스스로 됨(自然)과 통하는 말이다. 스스로 함은 생명의 기본원리다. 세상에서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다. 먹고 자고 싸고 낳고 자라는 모든 일을 남이 대신할 수 없다. 남이 대신 살 수도 없고 대신 죽어 줄 수도 없다. 민중은 스스로 사는 존재이다. 지배층은 남을 부리고 남에게 의존하지만 민중은 몸으로 직접 한다. 그러므로 민중이 생명 자체에 더 가깝다.
생명은 스스로 함이고 스스로 함은 스스로 자람이다. 함석헌에 의하면 역사도 우주도 인간도 스스로 자라는 존재이다. 예수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라는 인격이고 하나님도 스스로 자라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나'도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 될 것을 믿는 존재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자람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나도 영원히 되지 못한 것이다. 되려는, 되자는 믿음이 나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사는 민중은 날마다 자기를 넘어선다. 자기초월은 스스로 자유로움이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고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밑바닥 민중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자유혼으로 사는 민중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별처럼 초연하고, 들풀처럼 무심하며 사자처럼 용맹하다. 살인적인 작업환경에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1970년에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은 오늘날 한국인의 가슴 속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씨앗은 아무리 나쁜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생명의 본성에 따라서 성실한 생명활동을 한다. 하수도구멍에서나 교도소 담벼락에서나 긴 줄기와 잎과 꽃을 성실히 피우는 들꽃의 성실한 아름다움, 이름없이,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일구는 들꽃의 생명력을 보라. 민중은 이름없이 자랑이나 과시하지 않고 아름답고 성실하게 산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들풀처럼 강인한 삶을 산다.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려 가 닿는 곳 어디서나 자기 생명을 꽃 피우듯이, 이주노동자, 장애인, 정신대 여성들 그리고 모든 민중은 있는 그 자리에서 시련과 좌절을 딛고 아름다운 삶을 꽃 피우고 생명을 불태운다.
들풀은 자살을 모른다. 밟혀도 밟혀도 짓푸르게 일어선다. 거짓 관념이나 인위적인 제도와 체제에 매이지 않고 몸으로 생명을 사는 민중도 무조건 산다. 억눌리고 짓밟히며 밀려난 민중은 거짓 관념이나 제도에 매이지 않고 삶의 본능과 의지에 충실하게 산다. 민중은 직접 삶에 몰두한다. 生命은 살라는 명령이다. 민중은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힘겹게 살아온 많은 민중들, 가난한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흔히 "자식 새끼 때문에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민중에게는 삶 자체가 삶의 목적이고 과제였다. 실제로 많은 민중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자식의 생존을 위해 끝까지 산다. 그리하여 끝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일군다.

씨앗으로 생명을 전하고 유지하는 식물들은 생태계 먹이사슬의 바탕을 이룬다. 사슴과 토끼는 풀을 먹고 여우와 늑대는 사슴과 토끼를 먹고 호랑이와 사자는 여우와 늑대를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와 사자는 죽어서 거름이 되어 풀의 먹이가 된다. 모든 생명체의 먹이가 되어 생명세계를 살리면서 자신도 사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사는 씨앗들처럼, 민중도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서 인류를 먹임으로써 상생과 공존의 삶을 지켜 왔다. 민중은 생명세계의 바탕이다. 씨앗이 뭇 생명을 먹이듯이, 민중은 농사를 지어 먹여 주고, 옷을 지어 입혀 준다. 민중은 온갖 상품을 만들고, 집을 짓고, 길을 닦고, 차를 만든다. 먹히면서도 남을 살리고 나도 사는 상생의 길을 연다.
민중은 사회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을 하지만 짓밟히고 밀려나 있다. 남을 먹이면서도 자신은 굶주리고 남을 입히면서도 헐벗고 남에게 좋은 집을 지어 주면서도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한다. 살림의 주체이면서 예속된 삶을 산다. 민중의 해방은 생명의 해방이며 노동의 해방이며 사회의 해방이다. 민중의 해방은 반공동체적인 지배엘리트를 공동체적 삶에로 해방하는 것이다. 풀이 고갈되면 다른 모든 생명이 고갈된다. 풀이 푸르고 풍성하면 다른 생명도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 민중의 삶이 고갈되면 사회 전체의 삶이 고갈된다. 생명의 원천, 활력은 민중을 통해 솟아난다. 삶의 재미와 활력은 민중에게 있다. 민중의 삶이 재미있고 신나고 생생하다. 인위적이고 화려한 상류층의 삶은 조화처럼 시들하고 맛이 없다.
씨앗이 작고 약하듯이 민중은 개인으로서는 무한히 작고 약하다. 오랜 세월 동안 눌려 지냈기 때문에 민중은 자신의 숨은 존재와 능력을 모를 수 있다. 수 천년, 수 만년 짓밟히고 모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받고 마음 깊은 곳에 한을 쌓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모나고 뒤틀리고 팍팍할 수 있다. 민중의 마음의 빗장이 굳게 닫혀 있다.
총칼로 씨앗을 싹트게 못하고 대포로 꽃망울을 피게 못하듯이, 의심과 강제력으로는 민중의 마음을 열 수 없다. 따뜻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으로만 꽃망울을 피우고, 보드라운 흙과 스며드는 물로 싹이 트듯이, 민중의 굳게 닫힌 마음은 신뢰와 사랑으로만 열 수 있다. 민중에게 머리 숙이고 먼저 민중에게 배우지 않고는 결코 민중을 가르치거나 일깨울 수 없다. 독재자나 영도자, 지식인 엘리트가 민중에게 구원과 해방을 안겨 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생명을 펼쳐가는 씨앗처럼, 민중은 스스로 구원을 펼쳐간다.
스스로 사는 사람은 나의 자주성을 지킬 뿐 아니라 너의 자주성을 존중한다. 스스로 함의 원리에 충실하자면, 상대방의 생각과 뜻과 느낌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씨앗사상은 인간의 자주성을 짓밟는 물리적, 제도적 폭력에 저항한다. 주체성이 확립될 수록 폭력적 지배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 투쟁정신도 커진다. 이 투쟁은 스스로 하는 삶을 유린하는 폭력에 대한 투쟁이므로 평화를 위한 투쟁이다.
씨앗인 민중이 역사와 사회의 주체, 지구화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배권력의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국가주의는 민중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씨앗이고 민초인 민중은 지역자치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실현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치적인 동기나 목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는 보다 높은 가치와 목표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3) 나-민중-예수의 꿰뚫림

씨앗 하나 속에 우주생명의 신비와 숨결이 담겨 있듯이 민중의 삶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이, 거룩한 영의 숨결이 닿아 있다. 사회의 바닥에서 자연을 가지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민중은 하나님의 창조역사, 자연생명의 조화(造化)와 작용에 동참한다.
함석헌은 예수의 고난과 민족의 고난과 오늘의 '나'를 일치시킨다. 함석헌에게 민족의= 주체와 실체는 민중 곧 씨앗이었으므로 [예수-민중-나]가 하나로 꿰뚫린다. [나-예수(하나님)-씨앗(민중)]을 일치시킴으로써 오늘의 나(마음의 결단과 실천)를 강조하는 주체적 포용적 신앙이 형성되었다.
민중을 외면하고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 민중을 외면하고는 역사와 사회의 참된 쇄신은 없다. 역사와 사회의 참된 진전은 민중을 통해서, 민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을 제쳐 놓고 옳고 건전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역사와 사회의 해방과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은 민중과 함께 민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여신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나는 민중에게 가야 한다. 민중이 내게 참 하나님, 참 예수를 보여 준다.
예수와 민중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다. 민중과 유리된 예수는 죽은 예수다. 내 속에 살아 있는 예수는 나를 민중에게 이끈다. 예수와 나와 민중이 하나로 꿰뚫릴 때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3. 성서의 씨앗: 믿음과 영의 씨앗

 

1) 사람의 씨앗과 용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두 발로 곧게 서는 존재--책임과 자존과 자유를 지닌 창조자적 재--로 지어졌다. 과학과 종교를 통해 인간에게 무한히 넓고 높은 세계가 열렸다. 직립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창조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자격과 능력이었다. 직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 존재로 전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동산을 떠나 서로 죽임의 세계에 빠졌다. 정복하고 지배하며 약탈하는 인간을 통해서 씨앗과 푸른 잎, 다른 모든 피조물도 저주와 심판의 그늘--영원한 파멸의 위기-- 속에 있다.
죽임과 저주의 나락에서 벗어나 서로 살림의 공동체적 삶을 실현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고 구원의 성취이다.
공존과 상생의 공동체를 실현할 인류의 씨앗을 성서는 여성(하와:생명의 어머니)의 씨앗(후손)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업을 파괴할 죄와 저주와 죽음의 세력, 갈등과 서로 죽임의 세력을 뱀이나 용으로 나타낸다.
창세기 3장 15절은 악마의 상징인 뱀과 여성의 씨(후손) 사이의 적대를 말한다. 인류를 하나님없는 죄악과 죽음의 나락으로 유혹한 뱀(악마)과 그 유혹에 빠진 여성(하와)의 씨앗 사이에 대결이 이루어진다. 유혹에 빠진 여성은 구원과 승리를 자신의 삶 속에 품고 있다. 여성의 씨는 타락한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룰 존재이다. 뱀은 여성의 씨의 발꿈치를 물고 여성의 씨는 뱀의 머리를 깨뜨린다. 요한묵시록 12장에 따르면 다시 용과 여성의 씨(후손)의 대결이 나온다. 여기서 여성은 신의 고난당하는 로운 민중, 교회를 상징한다. 여성은 만국을 다스릴 이(하나님 나라의 주권), 사람의 아들을 낳기 위해 지금 해산의 고통을 겪는 민중이다.
뱀과 용은 엄청난 식욕과 폭력으로 생명세계에 군림했던 공룡을 상징한다.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에서 용은 왕과 왕권을 나타낸다. 성경에서도 용은 제국주의적 국가들(에집트, 아씨리아, 바빌론, 로마)과 그 권력자를 상징한다.
여성의 씨앗인 메시아는 어린이와 독사, 늑대와 어린양이 더불어 사는 평화세상을 여는 사람의 아들(人子), 민중(의 구원자)이다. 다니엘서와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씨앗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딸, 사람의 씨앗은 부와 권력과 지위에 의지하지 않는 순수한 맨 사람, 민중이다.
사람의 씨앗들, 사람의 딸들과 아들들인 민중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박해받는 이스라엘 민중이며 그 백성의 집단적 화신이다. 메시아 예수는 그 자신이 민중이고 민중의 삶과 죽음의 화신이었다. 사람의 씨앗이 제국주의적인 국가권력에 맞서 사람을 구원한다.

 

2)  자라는 씨앗과 하나님 나라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가난한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 예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운동도 헬라문화가 지배하는 대도시를 피하고 주로 농촌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은 농촌의 언어와 문화를 반영한다. 하나님 나라도 자라나는 씨, 씨뿌리는 농사꾼, 곡식과 가라지, 겨자씨와 누룩 등으로 비유된다.
씨앗의 비유는 인간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자연과 역사의 합생임을 보여 준다. 예수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사회적 현실이면서 자연생명의 비밀과 통하는 우주적 현실이다. 역사와 자연의 이분법적 분리는 서구사상의 인간중심적이고 관념주의적인 관행이다. 이미 역사의 주체인 인간의 몸과 마음은 자연과의 생태학적 순환 속에 얽혀 있다. 먹고 자고 싸는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가 이미 역사를 움직이고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민중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실현하고 몸을 치유하는 예수의 활동에서 이미 자연생명이 새 역사의 바탕과 내용을 이룬다. 밥을 함께 나누는 일, 성만찬과 잔치는 씨앗(곡식)이 사람의 몸을 이룰 뿐 아니라 사귐의 바탕임을 나타낸다. 동학의 2대교주 최해월은 "밥(씨앗)은 하늘(Heaven, God)이다" 라고 말했다. 예수도 "밥(씨앗)이 곧 내 몸"이라고 했다. 밥(씨앗)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한 몸을 이룬다. 예수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한 생명을 이룬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몸과 마음의 깊은 사귐의 신비이다.
씨앗은 자란다. 보이지 않게 스스로 자란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햇빛과 물과 바람과 흙의 어울림 속에서 자란다. 창조자 하나님이 씨앗을 키운다. 씨앗의 비유는 하나님의 생명력과 대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신뢰를 가르친다. 겉보기에 아무리 초라해 보이고 실패한 것 같지만 끝에는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씨앗농사와 같다. 하나님 나라는 인위적으로 조작적으로 기계적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자기를 비우고 열고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진리에 의해 자라난다. 민중의 초라함과 약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다. 씨앗이 작고 초라해도 혹독한 겨울에는 다 죽고 없는 것 같아도 봄이 오면 온 땅을 푸르고 아름답게 뒤덮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인 민중도 없는 것 같고 죽은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역사와 사회의 주인으로 서게 된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가 다 자라면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되듯이 겨자씨처럼 작고 이름없는 민중이 결국 온 세상의 주인이 된다. 공중을 나는 새처럼 세상을 주름잡는 지배자들, 엘리트들, 명망가들도 민중의 품에 안기게 된다. 세상의 참된 변화는 작은 이들의 작은 일들에서 시작된다.
아름다운 들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을 가리킨다. 작은 씨앗이 피워낸 이름없는 들꽃 한 송이가 창조자 하나님의 솜씨와 영광을 드러낸다. 숨어서 피는 겸허한 들꽃은 인간의 탐욕과 교만, 미움과 거짓과 폭력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른다.
들꽃은 거짓과 미움 속에서 서로 죽이는 삶에서 벗어나 서로 살리는 삶에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들꽃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맡기는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위한 온전한 헌신과 통한다.

 

3) 푸른 잎과 인간의 화해

성서에서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삶이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자연에 대한 축복과 저주와 이어지고 자연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인간에 대한 축복과 저주를 뜻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땅과 자연의 생산력도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농사짓는 일도 고통스런 일이다. 전쟁과 불의로 인해 자연도 황폐해진다. 인간의 악과 불의, 사회.정치적 억압과 수탈은 인간의 노동과 자연적 삶을 황폐케 하면 농사를 망치게 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씨앗의 풍성한 결실로 나타난다. 씨앗은 인간의 정성에 감응하기도 한다. 눈물 흘리며 정성스럽게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타골에 의하면 "푸른 잎이 사람을 구원한다." 창세기에서도 생명나무는 인간 삶의 중심에 있고, 묵시록 22장에서도 생명나무의 잎새가 민족들을 치유한다. 푸른 잎과 씨앗은 주체도 의식도 없는 단순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다. 나름대로 삶의 기쁨을 느끼고 음악을 즐긴다. 푸른 잎과 씨앗은 창조공동체적 삶의 기쁨을 드러낸다. 푸른 잎과의 화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동산에로 들어 갈 수 있다.
푸른 잎은 수 십 억 년 동안 지구생명세계의 바탕을 이루며 생명세계를 품에 안고 지켜 왔다. 그 품 속에서 자라난 인류는 지난 수 백 년 동안 어머니같은 푸른 잎의 생명들을 착취하고 짓밟고 파괴했다. 철없는 망난이같은 인류는 푸른 잎새 앞에서 참회하고 푸른 잎의 품에 안겨야 한다.
자기중심적 탐욕과 자기집착에 사로 잡힌 인간은 푸른 잎과 화해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 화해를 통해 푸른 잎도 저주와 심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4. 죽음으로써 사는 씨앗

 

1) 믿음과 생명력
씨앗의 생명은 온 우주의 생명과 통한다.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들어 있다. 믿음은 생명의 바탕이고 힘이다. 몸과 마음밖에 없는 민중은 자신의 생명과 하나님의 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을 믿음은 나를 바로 세움이다. 하나님을 믿음은 나를 속박하는 게 아니라 참과 사랑에로 나를 해방함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인간으로서 활동을 힘껏 하기 위해 생사성패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믿음, 주체성, 책임적 행위가 하나로 통한다.
하나님과 나는 서로 다르면서도 믿음 안에서 하나로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는 주격도 목적격도 없다." 하나님과 나는 역설적 긴장과 일치 속에 있다. "절대자가 제게서 멀리 떨어져 절대 먼 거리에 있음을 알 때 이상하게도...제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절대로 먼 은 절대로 가까운 곳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로 통할 때 엄청난 생명력이 솟구친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중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예수와 내가 하나일 때 속죄의 능력, 구원의 힘이 나온다. 모든 힘의 근본은 예수 또는 전능자가 곧 나의 바탈임을 믿는데서 나온다. 씨앗인 민중이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있으므로 위대한 힘을 낼 수 있다.
전통적인 속죄론은 예수와 나를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씨앗사상은 예수와 나를 일치시킨다. 예수와 나의 일치에서만 속죄가 성립된다. 예수의 피만 흘려서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피를 흘려야 속죄가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네 피없는 예수의 피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나를 떠난 예수도 없고 내 피없는 예수의 피도 없다.
예수는 내 속에서 살아 있는 예수, 내 속에서 완성되는 예수다. 예수는 생명의 참된 씨앗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예수라는 인격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역사는 예수의 인격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함석헌님에게 있어서 예수는 2천년 전에 살다 죽은 한 개체가 아니다. 만인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육화된 분 예수는 만인의 공동체적 인격이다.

 

2)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 십자가에 핀 부활의 생명꽃

요한복음 12장 24절은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로써 예수의 삶과 죽음을 서술한다. 예수는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처럼 죽고 살았다. 예수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순복하는 삶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싸우는 삶이었다. 한없이 비우고 버리는 삶이면서 자신을 온전히 불살라 힘껏 싸우는 삶이었다. 그는 함없이 하고 일없이 일을 이루었다. 십자가는 그의 믿음과 삶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십자가는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삶이고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이었다.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꽃이 핀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나락, 저주와 갈등과 미움의 나락, 좌절과 허무의 나락이다. 그것은 실패와 패배의 나락, 공허와 무의미의 나락이었다. 창과 칼이 다스리는 죽임의 나락이었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민중의 자리였다. 그 나락에서 부활의 생명꽃이 피었다. 거기서 서로를 살리는 하나님 나라가 열렸다.
오늘의 민중들도 십자가의 나락에서 산다. 민중들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산다. 그들의 마음에는 한없는 나락이 있다. 장애인, 정신대할머니는 깊은 피해의식에서 자학, 증오, 분노, 열등감, 허무, 무의미에 빠져 있다. 민중도 그 자학과 분노와 허무의 나락에서 생명꽃을 피우고 있다. 하나의 씨앗이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고 하나의 씨앗이 하수도에서 교도소 담벼락에서 아름다운 들꽃을 피우듯이. 생명은 죽음을 무릅쓴 모험이다. 자신을 내맡기는 모험을 통해서만 새 삶, 풍성한미래의 삶을얻을 수 있다. 뼈로 자신의 살을 감싼 조개와 소라는 굳은 껍질 속에 갇혔지만 뼈를 살로 감싼 물고기는 포유류와 인간으로까지 진화했다. 씨앗은 자신을 깨뜨리고 내맡김으로써 새 생명을 펼친다. 씨앗은 꽃과 열매로 자신을 내 주고 먹게 함으로써 자신을 살리고 널리 펼친다. 주고 버림으로써, 남을 먹이고 살림으로써 내가 사는 원리를 씨앗은 보여 준다. 씨앗은 나눔의 생명원리를 실현한다. 씨앗은 땅과 환경에 순응함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낳는다. 여성적인 순응의 원리는 서로 살림의 원리이다. 이것은 예수의 삶의 원리이고 민중의 삶의 현실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힘이 체제와 제도의 구조적인 폭력과 부딪치면 고난과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혼의 힘은 주체적, 공동체적인 데 폭력은 타율적, 반공동체적이다. 모든 씨앗 하나 하나 속에 영원한 생명의 알갱이가 들어 있듯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영원한 생명인 예수, 하나님의 얼과 숨결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너를 말살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한, 어떤 원수도 더불어 살아갈 형제/자매일 수밖에 없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면서 그와 함께 사랑의 공동체에 이르는 길을 열려면 그의 폭력을 감수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자발적인 고난의 길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버림이 자기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주체적인 행동이다. 고난은 구원의 통로이며 삶의 원리다. 내가 쾌락을 누리기 위해 남에게 고난을 강요함으로써 인류의 공동체적 삶은 파괴되고 인간영혼은 짐승보다 악한 악마가 되었다

예수처럼 고난을 내 등에 짐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실현되고 인간영혼은 맑게 정화된다.
자발적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민중의 평화주의는 패배주의가 아니라 인류역사와 우주적 생명에 대한 낙관적 신뢰에 기초한다. 민중의 주체적 역량에 대한 신뢰, 삶 자체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바탕에 있다. 또한 나를 죽이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 전체의 삶이 나온다는 기독교적 부활신앙이 바탕에 있다. "나를 자르면 거기서 새싹이 나온다".
씨앗이 자기를 깨뜨리고 죽임으로써 새 생명을 꽃피우듯이, 인간도 고난과 죽음을 통해 새 삶의 힘이솟아난다.
나를 부정하고 죽임은 동양사상의 없음과 버림에 통한다. 없음(無, 空)에서 대자대비가 나오고 버림에서 참된 얻음에 이르듯이 나를 죽임은 새로운 삶과 실천에로 이름이다. 무의 심연인 죽음에 나를 던질 때 새로운 나,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고난과 죽음은 삶에 대한 절대긍정과 맞물려 있다.
고난과 희생의 길은 나와 너의 단절을 넘어 공동체를 이루는 길이며 아집과 집착을 벗고 참으로 너에게 이르는 길이다. 내가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전체를 살린다. 씨앗은 스스로를 깨뜨리고 죽임으로써 햇빛과 물과 바람과 흙과 한데 어우러진다. 자기를 비우고 없앰으로써 천지만물, 우주생명과 하나로 된다. 씨앗은 하늘과 땅의 원융합일에 이른다. 사회와 역사의 십자가를 진민중은 하나님, 이웃, 자연만물과 한데 어우러지는 삶의 바다로 나아간다.
예수는 생명의 씨앗으로서, 밥으로서 우리의 살과 피속으로 들어 온다. 예수는 우리의 몸과 영혼 속에 부활생명의 씨앗으로 심기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살과 피 속에 예수의 생명 씨앗을 심는 것이다. 믿음은 이 생명씨앗을 싹트고 자라게 하는 것이다.

 

3) 바닥에서 솟구치는 민중의 영성

지구 전체가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되고 있다. 탐욕과 경쟁과 정복의 철학과 윤리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 철학과 윤리로 인해서 지배 엘리트만이 아니라 민중과 어린이의 삶도 오염되고 타락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8세와 11세의 초등학생이 네 살의 어린이가 말 안 듣고 놀린다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종이상자에 담아 버렸다. 그 위에 돌을 던지고 돌을 쌓았다. 그리고는 어떤 아저씨가 죽였다고 경찰에 거짓신고까지 했다. 가족 사이에 애인 사이에 토막살인이 다시 유행한다. 청소년들은 스포츠, 섹스, 스크린(영화/유행음악)에 매몰된다.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영성과 삶은 어떻게 시작될까? 우선 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씨앗이 기를 깨뜨리고 새 생명을 싸티우듯이, 나를 철저히 깨뜨리고 부정할 때 새 생명이 싹튼다. 하나님, 이웃, 피조물의 우주적 생명세계가 열린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씨앗의 자기부정, 비움, 죽음을 통해 풍성한 생명에 이른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통한다. 나를 부정하고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역사와 사회의 악, 죄와 죽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 시장경제체제의 빈틈을 비집고 서로 살리는 새 바람을 일으키려면 나의 영혼과 삶 속에서 서로 살림의 생명바람, 새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서로 살림의 영성의 바람은 바닥에서 일어난다. 탐욕과 경쟁과 정복의 체제를 이끌고 지키는 사람들은 변화의 새 바람을 한사코 거부할 것이다. 이 체제에 물들고 이 체제에 의존해서 살면서도 이 체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이 체제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사람들, 탐욕과 경쟁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지겨워져서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영성과 삶의 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그렇다. 민중은 그 깊은 고통과 恨, 역사와 사회의 모순과 갈등으로 인하여 영성적 깊이와 우주적 생명의 일치에로 이끌리며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고 있다. 민중이 종교적 영성의 풍성한 세계, 믿음과 은총의 세계에 가깝다. 오늘날 심원한 영성과 종교적 활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 고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서 밀려난 민중들,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체제, 지배와 수탈의 구조, 탐욕과 경쟁의 원리와 체제에 안주하지 못하는 시민들 사이에,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가난한 민중들 사이에서 닥여지고 솟구친다.

 

http://www.religionstheology.org/Data/ham/ham-pjs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