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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님의 씨알사상(박재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8.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함석헌님의 씨알사상

 

                                                        박 재 순

 

 1. 왜 씨 사상인가?  

 

씨 은 뭇 생명의 씨와 알이다. 함석헌님은 씨 로써 사람의 삶, 역사, 신앙을 이해했다. 가장 흔한 씨 은 세상 어디나 있는 풀씨 이다. 들풀과 들꽃의 씨 은 뭇생명의 먹이사슬의 바탕을 이루고 생태학적 생명세계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씨 은 본래적 생명의 알짬이며, 삶의 시작과 끝을 안고 있다. 씨 은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틀과 규정에 매이지 않은 사람의 참 생명을 나타낸다.함석헌님의 씨 사상은 삶과 실천의 사상이다. 함석헌님은 옹근 씨 로 살았다. 그의 삶은 믿음과 어짐, 민족의 얼과 바른 기운을 온전히 드러냈다. 그의 말과 글과 삶은 하나로 뚫려 있었다.
그는 언제나 민중(씨 )의 자리에서 민중과 함께 생각하고 민중에게 말하려 했다. 하나의 씨 로서 함석헌님은 농사와 교육과 신앙을 이어 보려고 애썼다.

 

1) 씨 의 은유: '맨 사람'

씨 은 民 또는 民衆에 대한 순수 우리 말로서 '맨 사람'을 뜻한다. 씨 은 '씨'와 ' '을 한데 붙인 말이다. 民은 봉건시대의 흔적을 나타내는데, 씨 은 풀뿌리 민주시대를 나타낸다. 함석헌님은 사회적인 지위와 치장으로 장식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 풀씨 을 은유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씨 은 먼저 '특권없는 보통사람들'을 나타낸다.
흔히 씨 은 눌리고 뺏기고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다. 씨 은 사회나 역사의 바닥과 가장자리에서 역사와 사회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다. 여늬 때도 사회적으로 고난과 희생을 당하며 살지만, 민족사회가 시련과 위기를 맞으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희생과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다. 그러면서도 씨 은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삶을 지탱해 왔다.
맨 사람인 씨 은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서 신적 생명, 본래적 생명바탕을 지닌 존재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이다. 겉보기에 작고 초라한 씨 이 속에 무궁한 생명을 지녔듯이, 사람도 속에 신적 우주적 생명을 지닌 존재이다.
더 나아가서 이 땅의 씨 들인 민중들은 수 천 년, 수 만 년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거치면서 속으로 다져진 엄청난 생명에너지를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님은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 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씨 은 단순한 개체가 아니라 역사의 집단적 생명과 우주 전체의 신적 생명을 품은 존재다. 씨  속에 나무가 들어 있고 나무 속에 무수한 씨 들이 있다. 씨 은 하나(一)이면서 전체(全體: 하나님)이다. 씨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고, 씨  하나가 전체와 이어져 있다. 씨  하나는 나무(전체)를 이룸이 목적이고 나무(전체)는 씨 을 맺는게 목적이다. 씨 을 통해 전체가 드러난다.
함석헌님은 1970년에 '씨 의 소리'를 내면서 씨 의 헌장을 밝혔다. 씨 의 소리는 씨 이 제 소리(내 소리)를 내자는 데 있다. 씨 의 제 소리는 전체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와 통한다. 씨 은 "서로 같이 우는(共鳴) 것, 느껴 주는(感應) 것"이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때, '맨 사람', 씨 은 전체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내게 된다.

 

2) 씨 : 우주적 생명의 중심

씨 사상은 씨 의 자리에서 사람과 역사와 신앙을 이해하고 밝힘으로써 생태학적이고 생명중심적인 이해와 사상을 제시한다.
씨 을 통해 하늘과 땅이 서로 어우러지고 어울려서 생명의 춤과 노래를 한다. 씨 은 하늘과 땅을 잇고, 하늘과 땅으로 아름다운 꽃과 잎새와 열매를 빚는다. 사람도 하늘과 땅을 잇는 주체로서 사랑과 진리와 평화의 세상을 창조한다.
씨 사상은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한다. 지금 여기의 삶이 우주적 생명의 중심이고 생명진화의 끝이다. 씨 은 오늘의 삶을 있는 힘껏 산다. 씨 은 제 삶에 지극 정성을 다하면서 사심이 없다. 지극 정성을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는 뭇 짐승에게 아낌없이 주고 아름다운 향기를 바람에 날린다.
씨 은 무궁한 역사적 생명의 알짬이다. 씨  속에 시작과 끝이 담겨 있다. 모든 생명은 씨 에서 비롯되고 씨 을 맺는 것으로 끝난다. 씨 은 오늘의 삶 속에, 자기 몸 속에 과거와 미래를 품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씨 의 몸 속에 함축되어 있다. 씨  하나는 지나온 생명역사를 담고 있고, 펼쳐질 미래를 안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여기의 삶 속에 통전되어 있다. 현재의 삶에 과거와 미래가 살아 있고 새롭게 살아난다. 오늘의 삶이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위해 위축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의 삶 속에 피어난다.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것은 단군신화나 동학이나 무교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종교사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씨 은 펼쳐질 생명의 잠재태이다. 함석헌님은 그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맘은 씨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모든 형상의 어머니"라고 노래했다. 씨 은 미래적 삶의 가능성이며 꿈이다. 모든 생명은 '살려는 의지'를 지녔고, 살려는 의지는 생명진화의 중심이다. 씨 은 미래적 생명을 잉태한 존재요, 생명을 펼치'려 함'이다. '...려 함'은 생명의 미래지향적 본질을 드러낸다.
씨 은 생명세계의 바탕을 이룬다. 풀-염소-늑대-호랑이의 먹이사슬에서 맨 밑바닥에 풀씨 이 있다. 씨 은 뭇 짐승들의 밥이다. 염소는 풀을 먹고 늑대는 염소를 먹고 호랑이는 늑대를 먹는다. 그러나 호랑이도 늑대도 염소도 기운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와 풀의 먹이가 된다. 씨 은 공생과 상생과 희생의 생명길, 생명세계의 중심을 가리킨다.

 

2. 씨 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본질: 스스로 함

 

함석헌님에 따르면 생명의 본질은 자람이며 우주는 영원의 미완성이다. 역사와 삶의 변화와 운동은 일정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다. 인류역사는 물질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며 초정신.초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변화되기 위해서, 새로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다. 함석헌님은 이러한 변화와 생성의 힘을 생명력, 또는 기(氣)라고 한다. 이 기(또는 생명력)가 개체적 존재의 핵심일 뿐 아니라 역사와 삶의 핵심이다.
이 기는 역사와 삶의 혁신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힘이다.
역사와 삶은 끊임없이 새로와지는 것이며 앞으로 뛰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직선운동은 아니다. 짧게 보면 "사정없이 올라만 가는" 뛰쳐 나가는 직선운동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생명의 근본에로 되돌아 오는 원운동이다. 생명의 가장 높은 운동은 "창조주에게서 발사된 생명이 무한의 벽을 치고 제 나온 근본에로 돌아 오는 것"이다. 모든 민족, 모든 문화가 '한'(전체)에서 나왔고 '한'(전체)을 목표로 나아간다. 근원에로 복귀하는 원운동과 끊임없이 새로와지는 직선운동의 결합은 절대와 상대,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이(理)와 기(氣)의 결합을 의미한다.
함석헌의 사상은 매우 역동적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존재와 삶의 근본이고 전체이다. 이 하나님마저도 고정불변한 완전자가 아니라 절대자로서 완전한 존재인 동시에 '자람'이며 '영원의 미완성'이다. 하나님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을 이, 영원히 있으려는 이'이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역동성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을 "...려 함"이라고도 한다.

 

1) 스스로 함

함석헌님은 이런 생명의 본질을 '스스로 함'으로 표현한다. 삶은 남이 대신 살 수 없다. 씨 은 스스로 싹트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꽃 피고 스스로 열매 맺는다. 자연생명은 스스로 하는 삶이고,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
씨 의 '스스로 함'은 강인한 생명력과 지성(至誠)에서 드러난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억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씨 의 삶은 자유롭고 순수하고 아름답다. 높은 낭떠러지 바위 틈새에서 남몰래 피는 들꽃의 맑고 고운 아름다움은 스스로 함의 지극한 표현이다. 들꽃의 아름다움은 기계적으로 저절로 된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다. 수십억년의 외로운 몸짓을 통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스스로 하는 삶은 무궁한 조화와 기적을 일으킨다. 씨 을 통해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이 어울리고, 어우러진다. 씨 은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으로 푸른 잎새와 붉은 꽃과 달콤한 열매를 만든다. 푸른 잎과 붉은 꽃과 달콤한 열매는 햇빛과 바람과 흙과 물의 창조적 어우러짐이며 어울림이다.
스스로 사는 생명만이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남에게 의존하고 기생하는 삶은 생명을 해치고, 스스로 하는 생명은 서로 살림으로 나타난다. 꽃과 나무들은 나비와 벌, 온갖 곤충과 포유류 짐승들에게 아름다운 꽃 속의 달콤한 꿀을 주고, 맛난 열매를 줌으로써 자신의 씨앗들이 널리 빠르게 퍼질 수 있도록 했다.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열매는 서로 살리는 생명의지의 표현이다. 남을 먹이고 살림으로써 나도 살자는 상생의 의지이고 부름이다. 씨 의 꽃과 열매는 남을 살림으로써 내가 사는 생태학적 삶의 길, 더불어 살고 서로 살리고 남을 위해 나를 버리는 삶의 길을 보여 준다.
씨 은 몸으로 산다. 씨 은 몸 밖에 없다. 몸을 금과 은으로 포장하면 씨 은 생명활동을 못 한다. 남의 위에 올라 서서는 생명의 싹을 내지 못한다. 바닥에 설 때 비로소 싹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씨 은 민주적이고 평등하다. 씨 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흙 속에 내어 놓음으로써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몸에는 무궁한 생명이 담겨 있다. 몸은 닦을 수록 힘이 난다.
스스로 하는 삶은 평화적이다. 강제로 싹을 틔울 수 없고, 칼이나 총으로 꽃피게 할 수 없고, 대포로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 따뜻한 햇빛과 부드러운 흙과 시원한 바람과 스미는 물로 씨 의 생명활동이 시작하듯이 사람도 서로 울리고(共鳴), 느낌(感應)으로써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생명활동을 시작한다.
스스로 함은 온갖 억압과 폭력의 강제에 맞서 싸움이다. 씨 의 생명은 온갖 장애와 시련에 맞선다. 자라는 삶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에 저항한다. 씨 은 포기와 체념을 모른다. 영원히 젊은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자라고 영원히 생명활동을 펼치려 한다. 스스로 자라는 씨 의 생명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씨 은 영원한 하늘을 향해 늘 새롭게 솟아 오른다.씨 은 자란다. 생명은 자라는 것이고 새로와지는 것이고 변하는 것이다. 변함없음은 죽은 것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솟구치고 뛰쳐 나가는 것이다. 언 땅을 뚫고 바위를 뚫고 솟는 새싹들을 보라. 씨 의 생명은 일어나 솟구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팔을뻗자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말하듯이 생의 약동(엘랑 비탈)이 삶의 본질이다.
그러나 씨 의 생명은 무성한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맺은 후 다시 뿌리로 돌아 온다. 쉼없이 자라고 뻗어 나가면서 뿌리로 돌아오는 씨 의 생명은 순환하면서 나아간다. 삶은 끝없는 새로움이며 나감이고 돌아옴이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다.씨 의 '스스로 함'은 동양적 무위자연의 원리와 계몽주의적 이성의 주체성원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함을 강조한 것은 씨 의 삶을 인위적으로 간섭하고 개입하지 말고 씨  스스로에게 맡기라는 무위자연의 사상을 반영한다. 스스로 하는 씨 의 자연생명에 대한 신뢰와 지배 엘리트의 억압과 간섭에 대한 저항이 스스로 함의 사상에 배어 있다. 그러나 스스로 함은 무위자연의 소극적 수동적 자세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나타낸다. 이것은 근대적인 생각하는 이성의 능동적 주체성을 수용한 것이다.

 

2) 하나로 어우러지는 삶

스스로 하는 삶은 깊이를 알 수 없고 미묘하며 신비하다. 아무리 생체 세포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정보를 캐내도 '스스로 하는' 삶의 깊이와 미묘함을 다 드러낼 수 없다. 뭇 생명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살아가니까, 삶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고 다름으로써 다양하고 풍성해진다. 삶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다양하다.
스스로 하는 씨 의 삶은 미묘하고 신비하고 복잡하면서도 서로 느끼고 서로 울린다. 뭇 생명은 하나로 이어지고 통해 있다. 씨 의 생명은 우주적 생명과 교감하고, 감응하며, 함께 숨쉬고, 서로 울린다. 씨 은 하나이면서 우주이다. 스스로 하는 씨 의 생명은 우주와 하나로 뚫려 있고, 우주적 생명과 공명한다.
씨 의 삶은 '스스로 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사는' 뭇 생명의 존재와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며 받아 준다. '나'의 스스로 함을 지키고 존중하듯이 '남'의 스스로 함도 지키고 존중한다. 스스로 사는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다. 씨 은 옹근 하나이면서 뭇 씨 들과 더불어 함께 산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어울려서, 서로 살리는 생명세계를 이룬다.
씨 은 하나이면서 다양하다. 한 씨 에서 잎새와 줄기, 꽃과 열매가 나온다. 온갖 씨 들에서 무수히 많고 다양한 풀과 꽃과 나무들이 피어난다. 온갖 꽃과 나무들이 서로 다르고 풍성하게 피어난다.
씨 은 하나이면서 전체(많음)이고, 지극히 작은 생명체이면서 우주의 생명과 물질을 품는다.
지극히 작은 씨 이 햇빛과 물과 바람과 흙을 하나로 끌어 안는다. 씨  속에서, 씨 을 통해서 햇빛과 물과 바람과 흙이 어우러지고 어울림은 한국전통사상의 구조와 원리 즉 묘합(妙合)과 귀일(歸一)을 드러낸다. 삼일신고에 나타난 사상구조의 원리인 "하나를 잡아 셋(만물)을 포함하고"(執一含三)과 "셋(만물)이 어우러져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는 것은 한국종교사상의 원리일 뿐 아니라 한국적 생명이해의 원리요, 씨 의 생명원리이다. 씨 은 우주의 생명과 물질을 하나로 품고 끌어 안음으로써 색이고 녹여서 하나의 묘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이룬다.

 

3. 스스로 하는 나: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선 사람

 

1) 역사와 우주의 중심

씨 이 '스스로 하는' 생명이듯이 사람은 '스스로 하는 나'이다. 스스로 하는 나는 하늘에 머리를 두고 곧게 선 이다. 씨 이 우주적 생명과 감응하고 통하듯이, 사람은 하나님(하늘)과 감응하고 통한다. 함석헌님은 이렇게 말한다: "높은 것은 하늘과 씨 뿐이다. 그 하늘 뜻은 씨  속에 영글었고, 그 씨 의 꼭지 하늘에 달려 있다." 사람이란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서서 "하늘 땅을 연락시키잔 것이다." 사람은 몸과 영이 뗄 수 없이 결합된 존재다. 몸은 흙과 통하고 영은 하늘과 통한다. 사람에게는 본능의 차원, 이성의 차원, 영의 차원이 있다. 이 차원들이 제 구실을 하고 서로 통할 때 온전한 사람이 된다. 스스로 하는 정신인 인간은 '스스로 말미암는 존재'(自由)이고 스스로 일어서는 이다.
인간은 역사의 주체이고 중심이다: "너는 씨 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지나 간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가 무한하다 하여도 그 중심은 나요, 만물이 수없이 버려져 있다 하여도 그것을 알고 쓰는 것은 나다." 인간은 스스로 하는 나로서 주체적인 존재이면서 역사적으로나 우주적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로서 역사와 우주의 중심에 선다.

 

2) 죄악의 집단성

사람 속에는 신적 우주적 생명의 알짬이 있고, 수 천, 수 만 년 역사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함석헌님은 나.씨 =역사=우주적 생명=신의 낙관적 동일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는 치열한 죄의식이 있다. 그에게서 죄는 개인적인 것도 단순히 사회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영적인 실재이다: "(죄의) 원흉을 밖에서 찾을 수록 못 찾고, 악을 벌할 수록 죄는 놓쳐 버린다. 모든 죄가 나와 관련 아니 된 것이 없다. '내가 죄인의 대가리다.'...과거에 몇 천 몇 백 번 사람으로 나와 사람을 잡아 먹고 도둑질하고 간음.강간 다 했던 마음이 또 태어나온 것이다....죄는 오늘 아침에 나온 콩나물 같은 것이 아니라, 마을 복판의 천년 묵은느티나무 같은 것이요, 돌담 속에 5 백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것이다." 죄는 무엇인가? 죄는 주체성의 상실이고 '나-남' 관계의 파괴이다. 죄는 나-남 관계의 근거인 '신적 생명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이다. 나를 예속시키고 죽음에로 이끄는 것이며 서로 미워하고 원수지게 하는 것이다. 죄는 남과의 관계에서 저질러진다. 죄는 '남'을 해치고 짓밟고 부정하고 죽이는 일이다. 치열한 죄의식에는 치열한 '나'의식과 함께 치열한 '남'의식이 있다. 죄의식은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남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식한다. 죄의식은 '나'와 '남'의 존재의 근원이고 근거인 하나님(전체)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의식이다.
치열한 죄의식은 동양의 자연적 생명관이나 나-우리-전체의 일원적 사유구조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함석헌님의 치열한 죄의식은 기독교적 신앙관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적인 씨의 은유를 넘어선다.

 

3) 명상과 수행: 생각하라, 몸을 공경하라

그러면 어떻게 인간 속에 잠긴 역사적이고 신적인 생명에너지를 살려 쓸 수 있을까? 함석헌님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이였고 일생동안 생각에 집중했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며 나의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생각함으로써 운명적인 삶에서 '스스로 하는' 주체적인 삶으로 바뀐다. 생각함으로써 '나'의 죄악과 恨 속에 파묻힌 생명에너지를 살려낼 수 있다. 생각은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영감)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영감)이 난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을 얻고, '나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제 속에 있는 무진장한 생명에너지, 신적 생명의 씨 을 살려 내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산다.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생명력을 살려내려면 생각할 뿐 아니라 몸을 아끼고 단련하고 공경해야 한다. 함석헌님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하늘과 땅의 중심 다시 말해 우주의 중심이다. 몸은 흙과 통하고 마음은 하늘과 통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몸이 흐트러지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공경해야 하고, 몸을 공경하려면 몸이 시키는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내 몸을 남이 돌보게 하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하는 것이다.
씨 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자신의) 얼굴"부터 우선 사랑하고 절해야 한다." 씨 인 나는 "우주의 주인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손발이 뭐 하잔거냐? 만물의 임금노릇 하잔 것이다." 인간의 얼굴과 몸을 역사와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최해월이 조상들을 중심한 제사인 향벽설위(向壁設位)에서 '나'를 중심한 제사인 향아설위(向我設位)로 옮겨 간 것과 같다.
함석헌님은 하루 한 끼 먹으면서 몸과 마음을 닦고 몸과 마음의 기운을 길렀다. 그는 사람되려고 날마다 새롭게 일어선 이다.

 

4. 씨 이 곧 나라다

 

"새 나라는 '나'에서 시작이다. 내(씨 )가 나라다. 루이 14세는 그 말하면 죄지만, 바닥에 있는 씨 이 하면 당당한 말이다."
씨 이 곧 나라다. 씨 이 나라의 주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나라 자체이다. 씨 없으면 나라도 없다. 더 나아가서 씨 의 몸이 곧 나라다. 함석헌님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 나라의 흙을 먹고 그 물을 마시고 그 바람을 숨쉬고 그 해빛을 받고 그 풀, 그 나무를 다 자료로 삼아서 피로 되고 살로 되고 뼈로 되고 신경으로 된 것이 이 가슴 아닌가? 이 강산이 살아난 것, 생명화.정신화한 것이 이 가슴이다. 반대로 이 가슴을 펴고, 피어내면 저 강산이다. 그러므로 몸과 나라가 서로 딴 것이 아니다. 내 몸이 곧 살아 있는 나라고, 나라 땅이 곧 내 몸이다."
씨 이 나라의 바탕이고 중심이다. 그러므로 씨 에게 근거하지 않은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민중과의 호흡이 끊어진 순간 혁명의 힘도 끊어진다. 장자가 '참 사람은 발꿈치로 숨을 쉰다.' 한 것은 이것일까? 민중이 뭐냐? 하나님의 발꿈치, 나라의 발꿈치지."(전집2 인간혁명. 74쪽)나라는 어떤 자리나 제도에 있지 않고 씨 에게 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랑은 구체적인 한 사람 씨 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나라가 서울 있느냐, 시골 있느냐? 서울도 시골도 있지 않고, 네 옆에 있다. 나라 사랑하거든 네 옆의 사람부터 존경하라. 네가 만물의 왕이라면 그도 만물의 왕이다. 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식모는 네 식모가 아니요, 영원한 님의 아내다. 너를 섬기기 위해 세상 온 것 아니라 '그이'를 모시러 온 것이다."(살림살이, 전집2. 314)나라는 역사의 중심단위다. 씨 이 역사의 주체로 되고, 나라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 역사다.
씨 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역사의 진보요 완성이다. 함석헌님은 씨 이 지배와 수탈의 사슬을 끊고 일어서지 못하는 역사라면 하나님 아니 믿겠다고 했다. 따라서 함석헌님은 철저히 풀뿌리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정치권력을 불신한다. 씨 을 누르고 예속시키는 국가의 폭력에 맞서 씨 의 자치와 자주를 실현하는 것이 정치와 교육과 종교의 목적이라고 본다.
씨 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함석헌님은 국가주의도 민족주의도 넘어선다. 함석헌님은 누구보다 우리말과 글과 정신과 문화를 아끼고 살리려 힘썼지만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공동체주의를 추구한다. 그는 인류사가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인류사회로 나가고 있다는 세계사의 미래적 전망을 가지고 오늘의 국가와 민족을 본다. 그의 삶과 생각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렸고, 새 시대의 말씀을 받고자 귀를 기울였다.
함석헌님은 "모든 민족 모든 문화가 '한'(전체)에서 나왔고 '한'(전체)을 목표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세계통일이 "역사발전의 등허리 뼈"라고 말한다. 종교는 "몸과 마음이 하나됨...국민이 하나됨...만물과 하나님이 하나됨을 이루자는 것"이며, 나와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는 믿음이 "모든 통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은 그 하나를 찾고, 정치는 그 하나로 나가는 길을 열고, 예술은 그 하나의 깃발을 그리고, 종교는 그 하나이고..."라고 한다.

그는 역사와 문화의 근본이 통일(하나됨)에 있고, 모든 통일의 근본은 종교(신앙)에 있으므로 어떤 문화도 종교로 일어났고 종교로 망했으며, 역사적 변동의 원인은 종교에 있다고 한다.

 

5. 믿음: 나를 자르고 전체의 자리에 섬

 

오늘 씨 이 풀어야 할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땅에 건전한 민주사회를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세계평화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건전한 민주사회와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자아를 넘어서 전체(하나됨)의 자리, 공공성의 자리에 설 때만 가능해진다.
씨 이 자신을 깨뜨리고 죽음으로써 전체 생명이 살아나듯이, 사람도 자기를 비우고 죽임으로써 전체의 자리에서 전체의 삶을 산다. 믿음은 자아를 넘어서 전체의 자리에 섬이다.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은 사심을 버리는 것이고 사랑으로 전체를 끌어 안는 것이다.자유와 평등이 결합될 때 온전한 나라가 된다. 그런데 사심없이 전체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은 일치할 수 없다. 나의 자유와 권리가 남의 자유와 권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구호가 자유.평등.박애인데 자본주의는 자유에서 시작하고 사회주의는 평등에서 시작했으나 자유와 평등이 결합된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박애 곧 사랑이 빠졌다. 자유와 평등은 자아를 넘는 공동체적 사랑으로 하나된다. 자아를 넘는 사랑은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건강한 민족사회를 이루는 일도 세계평화를 이루는 일도 믿음으로 귀결된다. 믿음은 나를 넘어서는 일이며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일이다. 믿음은 나를 부정하고 비우는데서 시작한다:
"자를 곳은 한 곳뿐이다. 이 '나'다...나를 자르면 거기서 새 싹이 돋는다."예수는 참 씨 로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자름으로써 새 생명의 길을 열었다. 함석헌님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길을 갔다. 해방 후 쓴 신앙시 '흰손'에서 "네 피없는 예수의 피 어디 있느냐?"면서 나와 예수의 신앙적 실천적 일치를 추구했다. 믿는 주체와 객체의 일치는 동양.한국적 종교사상의 주객일치와 원융합일, 천인합일의 정신을 반영하며,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를 살아내는 실천적인 신앙을 반영한다. 함석헌님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를 살았다.
함석헌님은 나와 하나님을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나를 철저히 부정하고 비움으로써 나와 하나님의 차이와 간격을 강조한다. 자기를 죽이고 비우고 부정함으로써 자아의 없음(無)과 빔(空)을 말한다. 그러나 자아를 죽이고 비움으로써 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믿음은 자기초월이다. 믿음은 자기를 넘어서서 자기 속에 잠긴 생명에너지를 살려낸다. 자기를 넘어서서 전체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恨을 생명에너지로, 남과 나를 살리는 힘으로 승화발전시킨다. 하나님을 믿음은 나 밖의 남을 믿음이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나'의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비로소 나를 넘어서서 남을 남으로 보고, 남의 자리에서 남을 이해할 수 있다. 남을 남의 자리에서 볼 때 비로소  진리와 정의의 세상이 열린다.믿음의 세계, 영의 세계는 없음의 나라이다. 현실세계는 있음의 세계이다. 없음의 세계에서 있음의 세계가 나온다. 없음에서 있음을 펼쳐내는 씨 의 생명활동처럼, 사람도 자기를 비우고 부정함으로써 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 을 살려 낸다. 껍질이 깨져야 생명의 싹이 트듯이, 자아의 껍질이 깨져야 하나님의 생명의 씨 이 싹을 낸다. 자기를 비우고 버림으로써 공적인 책임을 다하는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

 

새김 말: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꿰뚫은 공동체 사상

 

함석헌님의 씨 사상은 씨 의 자유롭고 초연한 삶을 추구했고, 자연생명과 역사와 신앙을 꿰뚫고 있다. 또한 씨 사상은 역사적 갈등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신앙(십자가)과 일치와 동화를 추구하는 동양사상(원융합일), 생각하는 주체를 강조한 서양사상을 결합시켰다.함석헌님은 성서와 동양고전에 오늘의 삶을 비추며 살았고, 다가 올 미래를 내다 보며 미래의 말씀을 듣고자 귀를 기울인 사람이다. 과거의 삶을 품고 다가 올 미래의 삶을 품고 살았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의 줄을 팽팽히 켕겨서 오늘의 삶을 온전히 깊게 살았다. 그는 참 씨 로 살았다.함석헌님의 씨 사상은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꿰뚫은 공동체사상이다. 동양과 한국의 사상은 나, 우리, 전체의 연속성과 일원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어는 '나'가 우리로 해소되거나 생략되는 경향이 있고 나와 남의 일치와 동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의 통전성과 일원성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우리의식은 강화되지만 개성과 나의식이 약화되고 객관적인 남의식, 엄정한 공공성에 이르기 어렵다. '남'과 '공공성'이 '나'와 '우리' 속에 편입되고 굴절되기 쉽다. 나의식과 남의식과 공공성이 약하면 건전한 민주사회를 이룰 수 없다.서구언어와 문화에서는 '나'가 두드러지고 지배한다. 나의식과 개성이 강조되고 남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이해와 접근이 가능하다. '나'와 '우리'에 편입시키지 않고 '남'을 '남'으로 보는 일이 가능하다. 나의식과 남의식과 공공성의식이 민주사회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사상에서는 나와 남의 갈등과 대립이 전제되므로 나와 남의 통전과 일치에 이르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동체적인 민주사회, 하나되는 지구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씨 사상은 스스로 함과 생각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치열하게 나의식을 강조하고, '나'의 부정과 비움, '남'의 스스로 함을 말함으로써 '남'을 '남'으로 보는 객관적인 남의식, 전체의 공공성에 이른다. 또한 '나'와 '남'을 '한'(전체) 속에 일치시키고 통전시키는 생명이해를 통해 공동체적인 삶의 기초와 원리를 닦아 내고 있다. 씨 사상은 생태학적인 통전성에 기초해서 개성(스스로 함)과 전체(공공성)를 창조적으로 결합한다. 씨 사상은 건강한 민주사회와 지구공동체를 위한 꿈과 실
천적 지침을 담고 있다.

 

http://www.religionstheology.org/Data/ham/ham-pjs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