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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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신102년 기념 심포지움
함석헌의 민주정신
박 재 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1. 들어가는 글
씨 함석헌은 한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했고 민주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 실현했고, 씨사상을 풀뿌리 민주철학으로 닦아냈다. 그는 순수한 민주정신과 민주원리, 새로운 민주시대를 나타내기 위해 민중, 시민, 국민이라는 말 대신에 씨이라는 말을 썼다. 민중, 시민, 국민이라는 말들이 오염된 낡은 말이며, 악용될 수지가 있고, 제한된 의미를 나타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이나 국민은 다른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함석헌도 1970년 씨의 소리를 내기 전에는 민중이란 말을 널리 썼다. 이 글에서는 씨이란 말과 함께 민중, 국민이라는 말을 함께 쓰려고 한다.
1) 한국민주화운동과 민주정신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서구의 민주화과정과 다르다. 서구에서는 오랜 세월 계급투쟁과 권력투쟁을 거쳐 개인과 집단의 권리와 자유를 확대해왔다. 왕과 귀족 사이의 투쟁, 왕과 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의 투쟁, 부르주아에 대한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농민 민중의 투쟁이 이어졌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불합리하고 불의한 제도, 전통, 권위를 비판하는 합리적 이성의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계몽운동은 자신의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사용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중세사회가 기독교와 불합리한 정치권력이 결합된 세계였으므로 민주적 계몽운동은 반기독교, 반종교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서구의 근대 민주화운동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운동이고 집단의 속박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해방하는 운동이었다.
한국에서 근대 민주화운동의 원점은 동학운동이었다. 동학운동은 종교와 결합된 민중해방운동이었다. 동학은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반봉건적이고 외세를 배격하고 외세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민족자주운동이었다. 최제우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이 깨어짐으로써 자신을 얽어맸던 봉건적 신분 제도와 관념을 떨쳐버리고 평등한 인간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로 섬길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관이 민주정신과 민주화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는 종교적 깊이가 있었고 민족의 집단적 운동으로서 집단적, 민족적 성격이 있었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기독교의 구실이 컸다. 3.1독립운동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큰 충격과 감동을 받고서, 양반이 되고 큰 기업가가 되려는 야심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바로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민족 지도자로서 남을 앞세우고 섬기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제자와 후배와 동료를 앞세우고 섬기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그는 남을 앞세우고 섬기는 민주적이고 종교적인 지도자의 귀감이 되었다.
3.1운동, 4.19 혁명은 70년대와 80년대의 집단적인 민중항쟁과 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7-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도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는 개인과 합리적 이성뿐 아니라 종교의 신앙열정과 민족·집단적 성격이 작용했다. 그것은 민족적 열정과 단합된 힘의 분출이었고, 헌신성과 희생정신이 부각되었다.
이상하게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희생적 죽음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전태일열사의 분신과 희생을 비롯해서 수많은 열사와 의사들의 자기희생과 헌신이 이어졌다. 이 땅의 민주화운동은 최제우의 강신체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된 동학혁명운동, 기독교와 천도교의 협력으로 시작된 3.1독립운동, 김주열학생의 죽음에서 비롯된 4.19혁명,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민중항쟁,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에서 불붙은 6월민주항쟁(1987), 문익환목사의 자기희생적 통일운동으로 맥을 이어왔다. 어린 학생 신효순, 심미선의 죽음으로 비롯된 촛불시위는 대통령선거를 국민의 승리로 이끌면서 민족자주와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뜻과 마음을 결집시켰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한결같이 종교적 열정과 헌신, 희생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개인의 권리보다는 민족전체를 생각하는 열정과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죽은 자 또는 죽음을 기리고 존중하고 죽은 자와 죽음에 이끌리는 한국민주화운동의 전통은 조상숭배전통과도 관련이 있지만 생사를 넘는 종교적 영적 초월과 제사의식, 장례의식과 관련이 있다.
국민, 민중의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국민 전체가 하나로 되어 참여할 수 있고, 국민전체가 참여해야 혁명적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진다. 좋은 정책을 수립하거나, 역사와 사회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만으로는 국민이 하나로 되어 참여하는 운동을 일으킬 수 없다. 국민을 하나로 불러일으키려면 국민의 정신과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필요하다.
한민족의 민주화운동에 종교의 영성과 정신이 깊이 배어있듯이, 함석헌의 민주정신과 사상에는 그의 종교적인 체험과 깊이가 담겨 있다. 지난 해 촛불시위와 대통령선거는 국민이 정치의 주체임을 확인하고 입증했다. 함석헌은 씨이 역사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길을 열기 위해 한평생 힘썼다. 그는 민중을 앞세우고 민중을 섬기는 정치를 추구했다.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를 추구하는 마당에 함석헌의 민주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2) 함석헌의 민주정신은 어떻게 닦여졌는가?
함석헌은 삼일운동에 참여한 이래 줄기차게 신앙정신과 민족자주정신과 민주정신을 가지고 민족자주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다. 일제 때는 오산학교와 ‘성서조선’을 통해서 겨레의 얼을 지키고 일깨우는데 힘썼다. 그리고 50년대 사상계를 통해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자리에서 민주정신과 사상을 밝혔고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구심점이 되고 민주정신과 사상을 밝혔으며, 민주정신의 사표가 되었다. 나이 70에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씨사상을 풀뿌리민주철학으로 제시했다.
90 평생 그의 삶은 더불어 삶, 자기를 비움, 가족과 사사로움에서 벗어남, 공(公)을 위한 헌신으로 일관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림, 자리다툼을 하지 않음, 남을 앞세움,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과거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고, 공적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그의 마음과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가진 것은 원효로 집과 몸밖에 없다. 원효로 집은 공적인 일에 쓰고 몸은 표본해서 학생들 공부하는 재료로 쓰게 하라. 평생 남강 선생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려고 애썼으나 이룬 게 없다. 남강 선생이 돌아가실 때 당신의 몸을 표본해서 학생들 공부하는데 쓰라고 유언하셨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그 유언마저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남강 선생이 못 이룬 것 내 몸으로라도 이루고 싶다.” 그는 자기를 위해 무엇을 만들거나 쌓으려하고 하지 않았다. 말년에 남강문화재단을 만들고 원고료, 강연료, 상금 전액을 재단에 헌납하셨다.
말년에 해외여행을 나서면서 한국에 대해 알리는 자료로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의 사진을 가지고 가서 우리 나라에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고 한국을 소개했다. 이들은 모두 사심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고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높은 인격을 지닌 이들이었다. 함석헌은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며 살았지만 민족사의 정신적 흐름 속에서 남강, 도산, 고당의 정신적 숨결을 이어받아 살았다.
민주정신과 실천으로 일관된 함석헌의 삶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함석헌의 민주정신의 밑자리가 어떻게 놓여졌는지 살펴보자.
첫째 함석헌은 스스로 일컫듯이 “타고난 민주주의자”였다. 그의 타고난 성품이 온순하고 평화로웠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겸손과 겸양의 사람이었다. 남을 억누르고 휘두를 줄 몰라서 “글쎄, 어떡하지”하면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이끌었다.
둘째 그는 상놈기질이 지배하는 평안북도 서쪽 끝 사자섬에서 태어났다. 조선 5백년 동안 소외된 지역 평안도, 그 가운데서도 상놈이 사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다. 고구려의 민족 자주적 정신과 굳센 기상이 스며 있는 곳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민중정신, 민주정신, 자주정신을 익혔다. 평안도 서북지방은 일찍부터 자유와 평등, 인권을 강조하는 서구사상과 함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다. 함석헌은 서구사상과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민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그에게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모든 인간적 세상적 특권을 부정하고 사심을 버리고 민중을 주체로 세우고 민중을 섬기는데 헌신하도록 이끌었다.
셋째 함석헌의 민주정신은 삶과 영혼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섬세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서너 살 때 알 수 없는 짜증이 나고 속이 답답해서 몸부림칠 때 야단을 맞고 억눌렸던 경험을 말하면서 어린 영혼의 짜증과 뒤틀림을 누르지 말고 잘 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어린 생명의 느낌과 생각을 짓밟는 것은 살인행위와 같다고 보았다. 생명과 영혼을 살리고 키우고 피어나게 하려는 사랑의 마음이 그의 민주정신의 기초를 이룬다.
그의 민주정신은 맏아들로서의 가부장적 특권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그는 당시의 풍조대로 맏아들로서의 특권을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 자기가 먹으려던 오이를 못나 보이는 여동생이 먹자 누이동생을 심하게 나무랐다. 늘 자기를 위해 주시던 어머니가 함석헌을 나무라며 “얘, 그건 사람이 아니더냐?”면서 누이를 편들어주었을 때 그의 특권의식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초석이 놓여졌다고 함석헌은 말한다.
함석헌은 평양고보 학생으로서 평양의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민중과 하나되어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감격을 맛보았다.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그의 일생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지었다. 오산학교로 옮긴 그는 3.1운동을 주도한 남강의 정신에서 3.1정신을 체득하였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나라와 민족을 사심 없이 사랑하고 헌신하는 민족지도자들에게서 민주정신을 배웠다.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이 모두 오산학교의 설립과 교육 정신에 깊이 관여하고 영향을 준 인물들인데 이들에게서 사심 없는 헌신의 자세와 열정을 배웠다. 특히 이승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승훈의 평민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은 그의 귀감이 되었다. 남강 이승훈이 어린 자신의 성서강의에 들어와 듣고 남에게 권하는데서 비권위주의적인, 민주적인 자세를 배웠다. 남강은 민족의 지도자이면서 남을 늘 앞세우고 남을 섬겼다. 감옥에서는 변소청소를 맡아 하고 오산학교에서는 겨울에 변소간에 쌓여 가는 얼음 똥 무더기를 까다가 똥을 먹기도 했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남을 섬기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과 자세를 배웠다.
함석헌의 민주정신은 깊은 자기부정과 훈련을 통해 닦여졌다. 그는 스승 유영모에게서 철저한 자기부정과 깊은 영성의 훈련을 배웠다. 스스로 땀흘려 일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유영모는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는 남 위에서 남을 부리며 놀고먹는 양반이 나라를 망쳤다고 보았으며, 민중, 씨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진리의 삶이라 보았다. 대학공부는 남보다 출세하는 길을 가는 것이라 여겨서 대학을 버리고 농사짓고 살기로 하고 시골에 들어가 살았다.
유영모는 몸과 맘을 곧게 했다. 32세 때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해서 맨 먼저 교장실 의자 등받이를 자르고 무릎 꿇고 곧게 앉아 공부하고 일했다. 중국의 정치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의 권력에 대한 굴종에서 벗어나 주체로서 곧게 서려 했다. 평생 널빤지에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해 곧게 솟아오르려 했다. 남강에게서 나라와 겨레에 대한 열정적이고 헌신적 사랑을 배웠고 다석에게서 몸과 마음을 곧게 세우는 주체성과 종교·사상적 깊이를 배웠다. 함석헌은 똑 바로 곧게 서서 씨을 섬기려 했다.
함석헌의 민주정신은 그의 철학과 신념으로 닦여졌다. 그는 생명과 인격의 원리를 자유, ‘스스로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정신과 기질, 생명과 인격과 신앙의 원리를 ‘스스로 함’(자유)으로 보는 사상과 철학이 결합되어서 독재와 폭력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평화적인 성품, 동양종교사상(노장, 유교, 불교)의 평화주의와 기독교의 평화주의가 결합되어 비폭력 평화사상이 나왔다. 자유정신, 저항정신, 평화정신이 그의 민주정신의 내용을 이룬다. 그의 비폭력 저항은 자신의 자유와 상대의 자유를 함께 인정하는 민주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씨알(민중)의 시대와 씨알의 발견: 씨알은 누구인가?
함석헌은 민심이 천심이라는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맹자 사상의 시대적 한계를 분명히 보았다. 맹자에게서 민중은 하늘과 동일시되기까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의 대상과 객체로 머문다. 맹자의 시대에는 정치는 왕과 군자, 지도자들만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함석헌은 맹자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분명히 갈라서 보았다. “동적인 근대는 민중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제 의식적으로 역사의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을 옛날과...역사를 질적으로 다르게 하는 정말 혁명입니다.” 함석헌은 맹자의 시대와 현대의 차이를 혁명적 차이로 명확히 인식했다. 그에 따르면 “나라의 주체는 민중이요, 정치가 달라지는 원인은 민중의 생각이 달라지는데 있다.” 그는 새시대의 의미를 이렇게 밝힌다. “천재와 영웅의 시대는 가고 민중에게 겸허히 배우는 민중시대가 왔다.” 현실적으로 민중의 시대는 자명하지 않다. 민중은 온갖 시련과 혼란 속에 있다. 그러나 역사의 시련은 특권계급이 소멸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역사의 상속자는 민중이다.
그는 민중을 “하늘, 땅에 떳떳한 감투, 지위 없는 천민(天民)”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민중, 씨은 “필요 이상의 지나친 소유, 권력 없는 대다수 맨 사람”이다. 가진 것이 없는 씨이 높은 덕을 지닌, 두려운 존재이다. “[가진 것도 지위도 없으므로] 민중은 잃을 것이 없고, 대적이 없으므로 근심이 없다. 천하에 무서운 것은 근심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얼굴이다...천하에 뚫린 덕...은 민중의 덕, 민중의 속...이다. 민중이고서야 인(仁)할 수 있고 지(智)할 수 있고 용(勇)할 수 있다. 고기가 물 밖에서 헤엄칠 수 없듯이 민중을 떠나, 민중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영웅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영웅을 두려워 할 줄 알고 민중을 두려워 할 줄을 어찌도 모르는고!”
함석헌은 민족사에 대한 탐구를 거쳐서 기독교신앙의 빛에서 민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보게 되었다. 그가 30대에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한민족, 한국민중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음으로써 구원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고난받는 민중을 메시아로 보는 관점은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서구정통신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고난받는 민중을 역사와 구원의 주체로 본 것이다. 유영모도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라고 했다.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의 사고체계와 가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다.
함석헌은 민중, 씨을 사회관계에서만 보지 않고 내면에서 하나님과 직결된 존재, 하나님의 씨를 지닌 존재, 불멸체로 본다. 씨은 하나님, 우주, 전체의 구체적 표현이다. 그가 씨의 소리에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씨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1989년 2월호)라고 했다. “역사는 씨로 간다...씨로 감은 결국 하나님께 감이다.” 민중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상대할 때 민중의 위대한 힘이 나와서 역사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위대한 문학 없는 것은 민중으로 직접 하나님 못 만나게 한 탓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이 씨 속에 계시다고 보았다. “씨의 은 하늘에서 온 것, 유한 속에 있는 무한, 시간 속에 있는 영원”이다. 뭇 사람의 속에 ‘인(仁)’, ‘하나님의 씨’가 있다. 이것은 죽을 수도 없는 불멸체, 더러워지지도 않는 불염체(不染體)이다. 그는 역사와 정치의 주체인 씨을 궁극적 존재인 하나님과 직결시킴으로써 씨을 지배하고 통제할 다른 어떤 정치·사회·종교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민중을 ‘스스로 하는 존재’로 보았는데, 민중은 스스로 하는 주체로서의 본질과 힘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모순을 통일하고 까닭 없이 하는 것이다. 바깥과 안, 안과 안의 모순과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된 인격과 주체를 지닐 때 스스로 할 수 있으며, 바깥과 안의 장애와 걸림, 저항과 누름을 넘어설 때 스스로 할 수 있다. 또 스스로 한다는 것은 남의 힘과 영향으로 바깥의 이유나 원인 때문에 하지 않고 스스로 원해서 제 힘으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려면 제 속에서 힘을 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면 왜 민중은 주체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는가? 인간의 본질이 크게 고장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격이 모순과 분열 속에 있다. 인격의 모순, 분열을 고치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분열된 자기의 부정과 초월을 통해 자기 속의 참된 존재에로 돌아감이다. 함석헌에게 회개는 참된 자기에게 돌아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찾는 일이므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찾고 발견하여 ‘스스로 하는 존재’(主體)가 되려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고 했다.
함석헌은 개인적 영웅주의와 권력적 집단적 국가주의를 거부하고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의 내면에서 그리고 민중 전체의 자리에서 민중을 보았다. 민중의 시대에는 “지혜도 힘도 [민중] 전체에 있다.” 민중은 정치권력보다 강하고,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따라서 “민중끼리 만나면 큰 힘이 나온다.” 함석헌은 역사와 정치의 주체인 씨을 하나님처럼 받들어 섬겼다. “씨 받듬은 하나님 나라 섬김이요 씨 노래함이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함석헌은 민중의 위대한 힘을 강조하고 민중과 하나님(하늘)을 직결시키지만 민중에 대한 경험 없이 순진하게 민중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처럼 민중을 가까이 느끼고 민중을 몸으로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고향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민중을 현실적으로 경험했다. 함석헌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민중은 함석헌을 멀리하고 외면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민중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약삭빠르고 속이고 악독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때가 되어 큰 감격을 안고 움직일 때면 민중의 참 모습, 호랑이 같은 용맹한 모습, 착하고 어진 성품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함석헌은 오랜 역사의 경험을 통해 체험했다. 일제 때는 그와 아무런 소통이 없고 대화가 없던 민중이 해방이 되자 아무 막힘 없이 그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이 때의 민중체험을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나와 그들[민중] 사이에 아무 어색함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36년은 없었던 것처럼 민중은 싱싱하게 민족정기를 드러내고 하나로 일어섰다. 나라를 위해서는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민중을 함석헌은 보았다. 3.1운동 때 경험한 민중체험과 해방 후의 민중체험을 통해서 함석헌은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니게 되었다. 3.1운동과 8.15 때 하나로 일어선 민중이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이념적 분쟁과 선동으로 갈라지고 무력하게 된 것을 본 함석헌은 정치적 이념과 선동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함석헌은 민중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민중을 “저를 모르는 것, 어리석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민중을 민중의 속 마음에서 보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았다. 민중은 “저를 만나는 감격으로 역사를 짓는다.” 민중 자신이 아니고는 아무도 역사의 잘못을 고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적 영웅주의의 눈을 버리고 민중을 보아야 하며, 비판하지 말고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함석헌은 민중을 믿었고 하늘처럼 받들고 모시려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민중이 주체가 되도록 호소하고 부르짖음으로써 민중이 역사를 열어가도록 했다. 그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켰다. 모든 인간을 주체로 존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다른 사람을 부리려 하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네 몸 거둠 네가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첫 걸음이라고 했다.
그는 근대화의 과제를 ‘민족이 하나의 전체로 되는 것’으로 보았고, 민족의 주체적인 힘으로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제를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밖의 힘에 의존하면 전체는 깨진다.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이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드러났듯이, “밖의 힘 가지고 흥정하고 이용하면 전체는 깨진다. 이용하자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개인이나 자기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전체를 이용하려들면 전체는 깨진다. 함석헌은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민중을 위해서는 자신이 이용당해도 좋다고 보았고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정치적인 일에 앞장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서는 민중을 이용하거나 민족의 이름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내편에서 [민중이나 민족을] 이용하면 도적이다.” 여기서 함석헌의 철저한 헌신의 자세를 볼 수 있다.
3. 민중의 정치: 씨이 정치의 주체이다.
1) 민중이 정치의 주체이다
함석헌의 민주정신과 사상은 초기에 이미 형성되고 표현되었으나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사상은 5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 독재정부와 군사정부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표현되고 형성되었다. 특히 초기에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민중을 생각하면서도 개인의 믿음과 양심이 바로 서면 나라와 민족도 바로 선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개인을 중심으로 역사와 민족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와 맞서 싸우고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면서, 특히 5.16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 서면서 민중, 민족 전체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을 생각해도 전체와 관련해서 전체 안에서 생각했다. 생각의 주체도 행동의 주체도 개인이 아니라 전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가 민중, 씨을 말할 때 전체로서의 개념이 중심에 있다.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보았던 그는 통치자가 민중을 다스린다든지, 민중을 위무한다는 낡은 생각을 거부했다. 국민은 결코 통치나 위무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이 바로 주권자이고 통치의 주체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정치(政治)의 개념을 뒤집는데서 시작한다. 정치(政治)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주권자가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이다. 정치란 말 속에 이미 국민을 정치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이런 관점을 그는 거부한다. 그는 한 마디로 “이제 (민중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 아니”라고 한다. 거꾸로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그는 국민이 정치의 주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오늘은...스스로 하는 민의 종합행동이 정치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도 민중 자신이요, 이론을 세우는 것도 방안을 꾸미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감독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민중 곧 전체의 대중 그 자체이다.”
4.19혁명 이후에 쓴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라는 글에서 정치를 민중에게 돌려 줄 것을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호소한다. 정치, 공적인 일을 “우리가 한다”는 건방진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민중을 내논 일[公務]에서 제해 버리기 때문에 (정치는) 타락한 거다. 공(公)을 빼앗아 먹는 계급에서 빼앗아 민중에게 도로 돌려라.” 그리고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소금이 물에 녹듯이 민중의 하나로 녹아버려!”라고 했다.
함석헌은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비판하면서 지금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때가 아니라 “씨이, 길거리에 웅성거리는 생활꾼이, 나라를 하고, 임금질을 하는 때다.”라고 했다. 또한 삶에서 정치가 나오고 지혜와 도덕이 나온다. “정치가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삶이 기술과 제도를 내는 것이요, 철학자, 도덕가가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도리어 지혜를 가르치고 힘을 주는 것이다.”
2) 민중이 역사를 창조한다.
함석헌은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서 역사를 변혁하고 창조한다고 보았다. “너는 씨 앞선 영원의 총결산,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지나온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민중의 자궁 속에 새 시대의 아들이 설어진다.” 그에게 민중은 역사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민중은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 자체가 민중 속에 있다. 그리고 민중이 역사를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씨은 (역사의) 어머니인 동시에 아들이다. 시간마다 역사의 심판, 우주의 창조, 역사의 출발이다.”
“자유로이 생각하는 씨의 혼”에 의해서 “우주생명의 진화, 역사의 방향”이 결정된다. “민중의 가슴, 맘이 하늘”이며, 나라를 세우는 터이다. 단군이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열고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6.25의 참혹한 전쟁에서 나라를 건진 것도 이름 없는 민중이다. “대적을 물리쳤노라 번쩍번쩍 가슴에 훈장을 달던 사람들...사람 죽인 사람이 아니라 그 시체를 치우고 또 씨를 뿌리고 또 갈고 말이 없는 그들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모든 짐을 다 지면서도 이름 앙탈도 자랑도 없는 이름 모를 사람들입니다.”
함석헌은 이 나라 역사의 숙제를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을 이룸에 있다고 보았다. 남북분단의 상징인 38선은 “이성계, 신라가 고구려를 배제하고 한반도에 움츠러든 데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고구려의 자주정신과 기상을 회복하는 독립정신이 있어야 통일이 된다. 그리고 독립정신을 가지고 제 노릇을 하자면 깊은 인생관과 세계관, 다시 말해 신앙정신이 있어야 한다. 정권싸움, 지역감정, 당파싸움을 끝내려면 “민중이 단결해 국민운동이 일어나야”하고 역사창조는 전체의식에서만 일어난다. 민중이 전체의식에 이르려면 민중이 자주정신을 가져야 하고 자주정신을 가지려면 신앙정신을 가져야 한다.
3) 민중을 주체로 섬기는 정치: 민중을 주로 모시고 호소하라
민중이 신앙정신, 자주정신, 통일정신을 가지고 주체가 되는 정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정치가들, 지식인들이 정치를 독점하는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 정치인들이 할 일은 민중이 정치의 주체가 되도록 민중을 모시고 섬기고 민중에게 호소하는 일이다. 민중이 주인 노릇을 하게 하려면 겸손히 민중의 자리에 내려와 민중에게 호소해야 한다. “스스로 낮아와서 민중이 될만한 사랑과 겸손이 없고...지도자의식에 굳어진 사람은 민중의 실정을 모른다...그런 사람에게는 민중이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불쌍하게만 뵌다. 민중을 불쌍하게 보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민중을 다스리고 간섭하고 교도하려는 의식 때문에 민중과 관계가 끊어진다...민중과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혁명, 개혁도 힘을 잃는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홍경래란과 3.1독립운동을 비교한다. 홍경래란은 민중의 저항운동이기는 했으나 민중의 넋을 일깨우는 사상이 없기에 실패했다. 3.1운동은 민중의 혼을 일깨운 사상정신운동이었다. 3.1운동은 인텔리가 겸손히 민중에게 다가간 운동이고 지도자가 민중을 향해 부르짖은 운동이었다. 민중의 주체, 혼을 일깨우려면 민중을 사람으로 믿고 대접해야 한다. 3.1운동은 지사들이 “민중을 무조건 믿고 대접한 것이요, 한국민족이 자기를 압박하는 일본을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다. “사람은 사람대접을 받을 때...남을 사람으로 대접할 때 자기 속에...정신의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민중이 보통 때는 무력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 전체가 하나로 되어서 일어서면 세상을 뒤집는 큰 힘, 호랑이 같은 무서운 힘을 낸다. 민중이 “자기 속에서 전체를 체험하면 힘이 나온다.” 민중이 일어나서 큰 힘을 내게 하려면 인위적인 노력으로, 조작으로, 정치적인 술수와 꾀로는 안 된다. 하늘의 뜻과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민중을 믿고 겸허하게 민중과 하나로 되어서 민중을 섬겨야 한다.
“참 위대한 정치가는 민중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이”이며, “민이 통일되어야 참 정치가 나온다.”고 함석헌은 말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민을 주(主)로 모시고 절하고 호소하라. 그러면 대번에 천하를 손바닥 뒤집듯 할 것이다.”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과 하나로 되어 민중을 하나로 일으켜 세우는 정치가, 민중의 하나된 힘을 타고 역사의 흐름을 열어 가는 정치가를 함석헌은 고대했다.
4. 나라 이해: 자유와 평등을 통합하는 사랑의 전체주의
1) 국가주의 비판: 국민을 지배하는 집단주의, 폭력주의.
민중을 신뢰한 함석헌은 당파주의와 국가주의를 거부하고 민중 개인을 전체와 직결시킨다. 당파주의이며 국가주의는 민중을 주인과 주체로 서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당파주의와 국가주의는 힘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다수가결에 따르는 민주주의조차도 소수에 대한 다수의 억압이며 위장된 폭력이다.
함석헌은 국가주의뿐 아니라 국가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모든 국가는 전체라는 가면을 쓴 집단주의”이다. 국가와 국가주의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일제 식민통치와 이승만 독재정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로 이어진 정치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민중에 대한 국가의 불의한 폭력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고 거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국가주의 비판은 과거와 현재의 정치경험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적 통찰과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주의는 멸망한다...전체주의 시대...개인적 완성의 시대가 아니라 전체적 하나됨의 역사 전 인류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시대”가 동튼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전체주의는 파시즘적 전체주의는 아니다. 그가 생각한 전체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통전하는 유기체적 전체이다. 하나님, 우주, 자연생명세계, 인류, 민족, 민중을 전체로 생각했다.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자유롭고 포용적인 전체를 꿈꾸었다. 의식적으로 전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상의 후기에서부터였다. 무교회신앙에 충실할 때 함석헌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해도 개인의 양심과 신앙이 바로 되면 나라와 민족도 바로 된다고 보았다.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사상계에 글을 쓰고 4.19 혁명 이후 사회참여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면서 전체의 자리에서 개인을 보게 되었다. 생각도 전체가 하고 행동도 전체가 한다고 보았다.
전체의 관점에서 그는 남한과 북한의 국가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남한도 북한도 국가주의에 사로잡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도 ‘평등사회주의’(공산주의)도 부정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국가주의, 제도와 체제를 비판하고 거부한다. 그는 어떤 대안적 이념과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민중의 주체, 자치를 내세울 뿐이다. 그에게는 씨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주체로 서 전체를 지향해가는 사회역사의 과정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씨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주인 노릇하려면 국민 전체가 하나로 결집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2) 나라의 이해: 자유와 평등의 통합: 사랑의 공동체
함석헌은 대안적 이념과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남한과 북한, 자유와 평등을 통합하는 공동체로서 나라 이념을 그려주었다. 그는 먼저 국가와 나라를 구별한다. 국가는 인위적으로 제도적으로 만든 집단적 체제이고 나라는 오랜 전통과 문화를 지닌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공동체이다. 함석헌은 ‘나라’라는 우리말에서 나라의 뜻을 풀어낸다. ‘나라’는 “‘나’요, ‘나라!’ 하는 자요, ‘낳는 자’다.” 나라는 “자연과 사람, 물질과 정신, ‘나들’과 ‘너들’의 하나로 되어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그는 또한 나라를 공간적, 공시적으로만 보지 않고 통시적으로 역사적, 시대적인 것으로 본다. “절대되는 하나님의 뜻이 시간으로 공간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면 나라다.” 나라는 나라의 주체이고 주인인 씨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에서 비롯된다. “새 나라는 ‘나’에서 시작이다. 내(씨)가 나라다. 루이 14세는 그 말하면 죄지만, 바닥에 있는 씨이 하면 당당한 말이다.”
함석헌은 하나로 통일된 나라를 꿈꾼다. “통일은 혁명이다. 남북의 정권 밑에 들어가는 것 아니다.” 함석헌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평등에 이르려 했던 자유주의(자본주의)도 실패하고 평등에서 시작하여 자유에 이르려 했던 평등주의(공산주의)도 실패했다고 그는 진단했다. 어떻게 자유와 평등이 이념적으로 결합될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에서 내세운 세 구호 ‘자유, 평등, 사랑’에서 사랑이 자유와 평등을 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통일된 하나의 나라는 씨 속에 잠자고 있다. “씨 속에 잠자는 나라”를 깨우려면 씨을 깨워야 한다. 오랜 세월 고난을 겪은 한겨레의 마음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 한겨레의 이름대로 한겨레는 ‘한’, ‘하나’이기를 갈구한다. 그러므로 한겨레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나라를 이룰 힘과 자격을 가지고 있다.
3) 화해와 통합을 위한 사랑의 정치
함석헌은 화해와 일치를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 이런 정치는 반민주적인 분단세력, 폭력적인 독재세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나타났다. 그에게 민주화운동은 독재세력과 분단세력에 맞서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통일된 나라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그의 저항철학과 민주정치의 원리는 사랑과 평화의 전체주의였다. 사랑과 평화의 전체주의는 계급, 국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자유와 평등을 사랑으로 결합하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함석헌은 국가주의뿐 아니라 민족주의의 한계도 분명히 지적했다. 그는 민족을 중요한 단위로 여겼으나 민족문제를 하나로 되는 인류세계의 전망 속에서 보았다.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는 다른 민족들의 정신과 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된 세계의 울타리 속에서 꽃피고 펼쳐져야 한다.
함석헌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정권 아래 평생을 지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으나 적을 제거하고 말살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할 대상으로 보았다. 적을 공존할 상대로 보는 그의 신념은 두 가지 사상적 신념에서 나왔다. 첫째는 모든 인간은 속에 신적인 씨앗을 품고 있으므로 서로 통할 수 있고 일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적을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으로 존중하고 긍정할 수 있었고,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적과 공존하려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둘째 그는 양 백 마리 가운데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전체가 깨지는 것처럼 적대자나 죄인을 내버리고는 온전한 전체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가룟 유다까지도 공존하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서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구원은 옵니다...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갈고 있는 한은 천당이 무사할 수 없습니다...악마의 마지막 아들이 놓여날 때, 그 때에야 인류의 천국은 옵니다.”
21세기의 정치사회종교문제는 대립과 배제의 원리로는 풀 수 없다. 전지구적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싫든 좋든 한 울타리 속에 살아야 하고, 약자도 강자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힐 만큼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이 갈등과 대립을 푸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민족통합을 이루는 일도, 남북의 적대적 관계를 넘어서 민족통일을 이루는 일도 민족과 인종과 종교의 갈등과 분규에서 벗어나 인류공동체를 이루는 일도 적대자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사랑으로 문제를 풀어갈 때 비로소 미움과 폭력의 적대관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5. 마치는 글
함석헌은 독재세력에 맞서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으나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싸웠다. 사랑으로 싸우면 불필요한 감정과 편견은 사라지고 싸움의 본질과 핵심, 목표만 뚜렷이 드러난다. 싸움을 하더라도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함석헌의 가르침은 한국정치의 낡은 관행과 풍토를 쇄신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풍토를 돌이켜 보면 말과 감정과 힘의 낭비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지역과 지역 사이에, 적대적인 정치세력들 사이에 미운 감정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이 미운 감정들을 씻어내지 않고는 상생의 정치를 열 수 없고, 민족의 힘을 모을 수 없다. 한국의 정치사는 오랜 세월 파행과 굴절을 거쳐왔기 때문에 적당히 덮어버리거나 두루뭉수리로 싸안아서는 문제의 가닥을 잡을 수 없다. 국민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고, 민족전체를 하나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원칙을 지키면서 미운 감정을 버리고 사랑으로 싸워야 한다.
오늘 이 땅의 씨과 정치인은 미운 감정을 버리고 사랑으로 싸우는 법을 익히고 민족 전체를 하나로 품는 이념과 철학을 지녀야 한다. 함석헌의 씨사상은 이런 철학과 자세를 가르쳐 준다. 씨을 정치의 주체로 보는 관점과 자유와 평등을 하나로 통합하는 사랑의 전체주의는 함석헌의 씨사상에 잘 드러나 있다. 씨은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씨 하나 속에 나무 전체가 들어 있고 나무에는 수 없는 씨이 맺혀 있다. 씨은 ‘홀로’이면서 전체를 안고 있다. 씨 한 사람에게 정성과 헌신을 하는 사람이 나라와 민족 전체에게 정성과 헌신을 하는 것이다. 옹근 씨이 꽃과 열매로 공생과 상생의 세계를 열듯이, 옹근 정신을 품은 사람은 자신의 재주와 지혜, 힘과 물질로써 같이 살기를 힘쓰고, 지연, 학연, 혈연을 넘어서 이념과 종파를 넘어서 사랑의 전체를 이루는 일에 힘쓴다.
씨은 흙에 묻힘으로써 생명의 창조활동을 펼친다. 씨의 정치도 국민의 흙밭 속으로 들어가야 창조적인 정치활동을 펼칠 수 있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고 하나님의 생명기운(숨)을 코에 불어넣음으로써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의 생명기운, 하늘의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몸 속에 넣는다는 것은 하늘(天)이 흙(地) 속에 들어온 것을 뜻한다. 주역에서 하늘이 겸손하게 땅 아래로 오면 태평해진다고 한다. 하늘이 땅 위에 높이 있으려 하면 위험하고 흉해진다. 그러나 땅이 하늘 앞에, 위에 오고 하늘이 땅 뒤에 땅 아래 오면 태평해진다는 것이다.(地天泰) 평화세계(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天)이 사람의 몸(地)을 입고 땅 바닥으로 내려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주역의 지천태가 시사하는 생명·평화세계의 진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뜻과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스스로 국민 속으로 들어가 국민을 높일 때 지천태(地天泰)의 태평이 이루어질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가 자신을 깨트림으로써 아름답고 풍성한 생명세계를 펼치는 씨의 삶에는 지천태와 성육신의 신비가 담겨 있다. 씨은 낮춤으로써 높아지고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생명·평화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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