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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문화관(박재순)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8.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함석헌의 문화관

박재순

 

함석헌은 평생 사회제도와 체제 밖에서 들사람으로 살았으나 뛰어난 문장가와 언론인으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상활동과 문화활동을 했던 양심적 지성인이었다. 4월에 문화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그의 문화적 활동과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사상가이다. 민족자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함석헌은 늘 민족사의 중심에서 민중과 함께 살았다. 그의 사상은 자신의 깊은 영혼에서 우러난 것일 뿐 아니라 민족사적 체험과 민중의 삶에서 우러난 실천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영혼의 깊은 자리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구도자이고 민족의 혼과 얼을 추구한 주체적 사상가이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 세계정부와 세계평화를 꿈꾸었던 세계인이었다. 사상과 문화의 혼란을 겪는 시대에 그의 문화이해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1. 함석헌의 문화 이해

1) 삶의 바탈을 밝히고 드러낸 문화

함석헌은 문화를 "...소재(素材)대로 있는 자연에 사람이 제 속의 정신을 넣어서 비추고 갈고 닦은 것으로 자기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빛을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문화는 사람과 자연의 삶에서 나온 것이다. 함석헌은 문화의 기본을 글월(文)로 보고 글은 말에서 나오고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삶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글은 말의 닦이운 것이요, 말은 생각의 엉킨 것이요, 생각은 살림의 피어난 것 아니냐?" 문화는 자연과 인간의 삶의 바탈(바탕)을 밝히고 드러낸 것이다. "본래부터 있는 것"을 뜻하는 바탈(性)은 자연생명과 인간의 얼을 나타내며, 자연생명과 인간의 얼은 우주적 신적 전체성을 나타낸다. 문화가 삶의 바탈을 드러내고 밝힌 것이고 바탈은 무한한 우주 전체와 통하는 것이다. 문화는 무한한 전체의 표현이고 밝힘이다. "전체가 참이요, 전체가 선이요, 전체가 미다."

함석헌은 '전체'를 우리말 '한'으로 표현한다. "우리말의 한(혹은 칸, 큰)은 일이면서 대(大)를 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자로는 일(一)이면서 대(大)면 천(天)이 되는 것같이, 한은 곧 하나님이다." 함석헌은 '한'이 '하나'이고 '큰' 전체를 나타내고, 민족의 얼과 하나님을 함께 나타내는데 주목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한'이 물질적 정신적 우주의 근본이라는 사상이 한민족의 정신문화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한'은 함석헌의 문화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 '한'을 드러내고 밝힘으로써 문화가 생기고 문명이 나온다. 문화의 전당인 대학, 유니버시티는 "유니버설한 것, 총체적인 것, 통합적인 것, 보편적인 것, '한'인 것을 드러내는 곳"이고, 진정한 문명 "밝고 빛나는 으리으리한 세계"이다.

함석헌은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서 이런 문화관을 잘 드러낸다. 그에게 아름답다는 것은 '앎답'다는 것, '남이 알아줄 만큼 값이 있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하나를 나타냄"이다. 아름다움은 내용되는 자료에 있지 않고 나타내는 방법, 조화에 있다. 아름다운 조화는 "전체의 각 부분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개체는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다." 어울림의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가장 큰 아름다움은 온 우주와 어울린 아름다움, 하나님과 어울린 아름다움이다.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이 없다면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 위대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고 아름다울 수도 없다."


문화를 '한'(=전체)의 표현으로 보는 함석헌의 문화이해는 종교적인 바탕에 근거하고 있다. 문화의 본질과 바탈은 '한'(=전체), '하나님'이고 문화는 그 나름으로 '한'을 표현한 것이다. 함석헌에게 삶의 전체인 '한'은 고정불변한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삶은 '스스로 하는 것'이고 '자라는 것'(새로워지는 것)이다. 자연과 역사의 삶이 자람에 따라 전체성의 크기도 자란다. 함석헌은 삶이 자라고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문화가 나타내는 '전체'와 자라난 삶의 '전체'가 달라질 때 문화적 혼란이 일어나고 낡은 문화는 무너지고 새 문화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2) 문화의 주체성

일본식민통치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함석헌이 닦아낸 삶과 사상의 기본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생명의 근본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 함석헌은 문화의 원리도 '스스로 함', 곧 주체성으로 본다. 문화는 "바탈을 내 처지에 따라 내 힘대로 드러낸 것"이고 자신의 삶의 본 바탈에서 온 것이므로 주체적인 것이다. 문화의 본질과 바탈을 '스스로 하는' 얼로 보는 함석헌에게는 아름다움도 '스스로 하는' 데서 온다. "스스로야말로 아름다운 것"이고 나대로 내 힘으로 살자는 마음이 바로 서면 "모든 잃어진 아름다움이 다 회복될 것이다." 스스로 하는 마음은 무한을 안은 마음 참된 마음이다.

글(文)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문화의 주체적인 이해가 두드러진다. "글은 무늬다. 바탕이 먼저 있어서 그 바탕의 뜻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그 위에 이리저리 금을 그은 것이다...글은 '내'가 있고서야 되는 것이요,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저마다 제 글을 쓰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함석헌이 말하는 '스스로 하는' 주체는 개별적 자아의 이성적 주체로 한정되지 않고 개별적 자아의 존재와 삶의 바탕에 뿌리를 둔 주체이다. 그가 말하는 글(文)의 주체성은 글을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과 개성의 주체성이 아니라 "바탕의 뜻을 더욱 드러내"는 주체성이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나'는 '혼'이고 '얼'이다. 사람의 혼과 얼은 우주의 근본 되는 절대의 정신과 그 바탈이 하나이다. 절대의 정신과 바탈이 일치하고 통하기 때문에 사람의 혼과 얼에서는 "거의 무한한 능력이 나올 수 있다."

"문명인의 잘못은 문명을 믿는 나머지 근본정신을 잊는 일이다." "문명은 제 글에 취한 사람이요, 제 만든 기계에 종이 된 죄수다." 얼과 제 바탈을 잃은 문명인은 주체성, 스스로 함을 잃은 사람이다. 모든 문화는 제 바탈에서 나온 것이면서 바탈을 잊고 현상적 모습과 사실에 달라붙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자기 문화를 잃고 외래문화에 예속되면 정신문화적 혼란과 위축이 이루어진다.


함석헌은 남의 생각에 중독이 되어 자신의 얼을 잃은 한국문화를 통렬히 비판한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부르던 노래 '얼씨구 절씨구' '얼럴럴 상사디야'의 뜻을 모르셔? 그리고 댄스만 알고 발레만 알고 시나리오만 알지? 글을 배워도 헛배웠고 예술을 해도 헛 했구나." 그리고 남의 생각에 중독된 우리의 얼을 깨워 일으키면 "저절로 슬기가 솟고 힘이 터져 나온다."고 말한다.

문화는 삶의 바탈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 문화에는 우리의 얼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 우리 문화는 우리 삶에서 나온 것, 우리 얼이 담긴 것, 우리의 글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말로는 할 수 없는 종교.철학.예술.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 두시오. 그까짓 것 아니고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글월이 돋아나지, 공작의 깃 같은 남의 글월 가져다 아무리 붙였다기로 그것이 우리 것이 될 까닭이 없읍니다."


민족이 하나되지 못하고 주체적인 문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남의 생각에 중독되어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을 하면 겨레가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뜻'(理想)이 밝아지고 뜻이 밝아지면 겨레의 얼이 살아나고 겨레가 하나될 수 있고 참 삶과 참 글월이 나온다. 스스로 생각하는 데서 참된 문화의 건설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문명은 제가 스스로 낳아야 하는 것이다....정신이 서기 전에 [외래적인] 기술문명이 먼저 들어오면 그 사회의 자치적인 통일을 깨뜨린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급속히 해체되고 서구의 기술문명과 문화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한국사회는 정신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려면 바탈로 돌아가서 우리의 혼을 깨우고 들사람 얼을 살려내야 한다.


문화의 바탕인 인간의 얼과 혼은 스스로 하는 주체적 자아이고 무한.절대와 통하는 영적인 자아이다. 앞으로 정치학문예술도 진보하겠지만 그보다도 얼과 넋과 영을 다루는 종교가 더욱 진보할 것이라고 함석헌은 전망한다.

3) 문화의 윤리성

함석헌은 문화를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본다. 문화는 얼의 표현이고 얼은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에서 나오고 인간의 삶은 인격적인 관계로 이루어진다. "인간에게 있어서 한 생명의 최고 현상은 인격이요,...인격은 인간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인격관계는 복잡 다양하기 때문에 일정한 차례를 세워야 하는데 인간 관계에 차례를 세우는 일이 바로 윤리이다. 문화는 "우주의 윤리화 곧 인격화"이다. 비단에 무늬를 놓듯이 "자연에 인적인 무늬, 즉 문, 다시 말하면 윤(倫), 곧 차례를 세운 것이 문화다."


함석헌에게 문화의 기본성격은 윤리이고 "윤리는 생명적.유기적 통일이다." 또한 "선이란 개체와 전체와의 완전한 통일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를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우주관에서 오늘의 문화적 윤리적 혼란(어지러움)이 나왔다. 인간과 우주를 물질적으로 다시 말해 기계적이고 해부학적으로 보면 인간과 우주는 부분으로 해체되고 전체의 유기적 통일은 깨진다. 전체의 유기적 통일이 깨진 데서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현대는 인간사회 안에 물질이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혹은 힘을 지나치게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생활의 전체의 조화를 잃은 데서 오는 어지러움의 시대다."


참된 문화는 "우주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나와 하나를 이룬 한 인격으로 알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 새로운 문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직관.계시.영감은 산 우주의 숨쉼이다." 우주와의 인격적 교류와 교감 속에서 문화가 창조되고 발전된다.

문화를 '자아의 실현'으로 보고 '우주의 윤리화, 인격화'로 본 함석헌은 문화와 종교를 직결시키고 인간의 인격적 자아인 '나'를 종교와 문화의 중심에 둔다. "종교는 수직운동이요 도덕(문화)은 수평운동이다...두 운동이 똑바르게 90도로 사귀어서만,...십(+)자 돼서만 참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십자의 이루어지는 점이 '나'다." '나'에게서 수직운동(종교)과 수평운동(도덕문화)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하나님(삶)과 사탄(죽음) 사이에서 삶의 신비한 진동이 일어난다. 이 진동의 중심점이 '나'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수직의 진동이 일어나면 나와 너(사회) 사이에 수평운동이 일어난다. 나와 너(사회) 사이에서 "폭 넓은 진동을 해서만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수평운동을 하면서, 함으로, 위로 올라간다. 그것이 사회요, 역사요, 종교요, 윤리요, 문화다."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감으로써 역사와 문화가 나오고, 도덕과 문화의 수평운동을 힘있게 함으로써 '위'로 올라갈 수 있다.

4) 문인과 야인의 대립

문화로 표현되는 삶의 바탈은 하나이고 전체이나 바탈을 문화로 드러내는 이성의 빛은 상대이고 유한하다. 이성은 인간의 바탈인 얼 '한'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바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고 상대적이고 유한한 형태로 인식하고 표현한다. 문화와 문화인은 문화적으로 표현된 상대적이고 유한한 형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이고 전체인 바탈과 이성에 의해 밝혀진 문화는 긴장과 대립 속에 있다. 인간역사는 늘 이 긴장과 대립 속에 있다. 이 대립이 가장 근본적인 대립이다. 이 대립에 의해 문화가 생성하고 소멸한다. 역사는 문화와 바탈 다시 말해 문(文)과 야(野), 문인과 야인의 싸움이다. "역사는 문인과 야인의 문답이요 싸움이다. 가진 놈과 못 가진 놈의 대립도, 누르는 놈 눌린 놈의 대립도, 이 문과 야의 대립에서 나온다."

이처럼 문화는 바탈, 전체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나타내기 때문에 문화와 문화가 표현하는 전체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는 이것을 씨앗과 잎.꽃의 관계로 설명한다. 잎과 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문화이고 씨앗은 영원.무한인 바탈이다. "잎과 꽃이 그 씨가 품었던 전부는 아니다. 씨가 품은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다. 그러므로 꽃마다 잎마다 열매를 내기 위해 떨어져야 하고(현실은 없어지고), 그 씨는 또 더 많은, 더 새로운 씨를 위해 땅 속에 들어가야 한다."


문화와 문명은 바탈을 표현하고 드러낼 뿐 아니라 늘 바탈과 통해 있어야 한다. 모든 문화와 종교의 근본 이상은 사람과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하나되고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문명은 흔히 바탈을 잊고 현상적인 형태와 현실에 집착한다. 신화는 사람과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신화가 표상하는 바탈의 세계를 상실한 문명은 뿌리를 잃은 꽃이고 거짓 문명이다. "신화를 잃어버린 20세기문명은 참혹한 병신이다...이 문명이란 것은 알파도 오메가도 잃은 중간이다. 중간은 죽은 거요, 거짓이다. 이 사실에 붙은 문명은 죽은 문명이요, 거짓 문명이다."

바탈을 잃은 문명은 병이고 병든 문명은 힘을 잃고 망한다. 죽은 문명, 병든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바탈의 자리에서 문명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거짓 문명과 싸우는 들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역사는 이른 바 문화인과 들사람의 싸움이다. 들사람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게 이스라엘 역사다. 모세, 예언자로부터 예수까지 들사람의 전형이다. 기독교도 문명부정주의를 통해서 "서양문명의 등어리 뼈 노릇을 했다."
평생 들사람으로 살았던 함석헌은 문화의 본질인 바탈과 얼을 강조하지만 기계문화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이미 기계는 인간 몸의 한 지체가 되었다. 기계는 "우리가 물질과 접촉하는 점"이며 "볼 수 없는 정신의 무한한 능력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우주적인 살림을 하는 인간에게 없을 수 없는 기관(器官)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듯이 사람은 또 자기 형상대로 기계를 만든다. 사람의 혼이란 렌즈를 가운데 놓고 하늘나라와 기계의 나라가 대칭적으로 설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인조인간에 새 종교의 성격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의 혼을 사이에 두고 하늘나라와 기계의 나라가 대칭을 이룰 것이라는 말은 과학기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과 신뢰를 나타낸다. 기계기술의 세계도 결국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기계의 종이 되지 않고 기계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고 유익하게 기계를 부릴 수만 있다면 기계도 생명과 영혼을 위한 문화의 이기(利器)가 되고 인간의 꿈과 영혼이 깃든 신령한 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민족문화의 이해

1) 한국문화의 본질

함석헌은 문화의 바탈을 '전'(全)으로 보고 '전'을 우리말 '한'으로 표현했다. 그는 '하나'와 '크다'를 뜻하는 '한'이 한겨레를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한님(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임을 주목하고 '한'이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이고 한국문화의 바탈로 본다. 이것이 "우리 문화의 꼭지"이고 "한적 질서의 핵심"이다. "우리들의 조상은 한을 알고 바라고 한을 나타내려 했다." 한겨레의 이상은 "한 사람 곧 하나님 사람, 혹은 한 삶 곧 하나님 삶"이고 이런 종교문화적 삶이 "우리 역사요 우리 문화"이다.


'크게 하나됨'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지향은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되려는 문화적 성향을 낳았다. 함석헌은 한국의 자연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나라는 "아름다움의 나라입니다. 시의 나라요, 그림의 나라요, 음악의 나라가 될 것이지 정치의 나라, 군사의 나라 될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슬기가 있을 나라지 힘을 주장할 나라는 아닙니다. 여기는 생각할 곳이지 바삐 떠들 곳이 아닙니다." 함석헌은 현실계를 떠나 영원 무한에 접해 보려는 신선사상이 민족문화의 맨 처음 열매라고 보았다. 신선사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되고 자연 속에 녹아들려는 사상이다.

함석헌이 강조한 한민족의 '한'문화와 '신선사상'은 자연생명세계와 '하나되고' '어울리며, 어우러지는' 삶으로 나타난다. 한국인의 이러한 삶은 자연에 대한 예술문화적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전 국립박물관장 정양모에 의하면 한국미술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가장 아름다우며...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깨닫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면서 자연과 같이 만들어낸 우리 조상의 문화유산이다". 중국청자가 인위적이고 장식적이며, 완벽하고 장엄하다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한국청자는 자연적이고 간결.단순하고, 실용적이며 소탈.친밀하다. 김형효에 의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이나 주택이 자연에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덧붙이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인의 집짓는 기술은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정원은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그런 아취(雅趣)를 전통적으로 선택하였다". 자연의 생명세계와 하나되고 어우러지는 반(反)인위적인 한국인의 예술감각이 한국음악의 특성으로 이어진다. 거문고와 가얏고의 농현(弄絃)기법은 "마치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나 잎사귀가 바람에 산들거리는 리듬의 감각과 닮은 자연스런 형상으로서...3박자 중심의 형태를 보이는 한국음악의 창법에서도 사용된다".

2) 한국문화의 평화주의적 성격

함석헌에 따르면 '크게 하나되고' 자연과 하나되려는 정신적 성향이 착하고 어진 마음과 평화주의로 나타난다. 함석헌이 한민족의 혼의 고갱이를 '착함'으로 보는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 다른 민족들의 건국신화들에는 흔히 정복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민족의 건국신화들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둘째, 침략전쟁을 하지 않았다. 한민족이 치른 전쟁들은 주로 방어전이었다. 셋째, 사람 이름들에는 그 민족의 뜻이 담겨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인의 이름에 많이 쓰이는 글자들(仁義禮知 信順淳和德 明良淑)에 어질고 착한 성품이 드러나 있다.


옛날 중국사람들도 한민족을 착한 백성으로 높게 평가했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서는 서융(西戎), 남만(南彎), 북적(北狄)을 비난하면서, 동이(東夷)는 "어질어서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또 산해경(山海經)은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크고 하나임'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혼은 착하고 온순한 것만이 아니라 우직하고 용맹한 범으로 표상된다. 함석헌은 한국민중정신을 '백두산 호랑이'로 나타낸다. 함석헌은 가진 것 없고 솔직한 민중이 호랑이처럼 강직하고 용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흩어진 민중은 힘없지만, '크게 하나되어' 일어서는 민중은 호랑이처럼 강하고 용감하다. '크게 하나이며', '밝고 환한' 민족혼이 살아날 때, 한국민중은 백두산 호랑이의 기상을 드러낸다. 한국민중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순해 보이지만 외적인 침입하거나 불의에 맞서 '하나되어' 떨쳐 일어설 때는 호랑이처럼 굳세고 용맹한 모습을 보여 준다.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구한말 일제의 침입에 맞서 일어난 의병운동이나 동학의 갑오농민전쟁, 3.1독립운동(1919), 4.19학생혁명(1960), 박정희독재에 저항한 부마항쟁(1979), 광주민주항쟁(1985), 전두환독재에 맞선 6월 민중항쟁(1987)에서 한국민중은 호랑이의 기상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함석헌은 착하고 평화적이면서 우직하고 용맹한 민족정신의 전형을 신라의 처용, 고구려의 온달, 백제의 검도령에게서 본다. 검도령, 온달, 처용이 고유한 문화사상의 대표인데 우직하고 용맹하며 평화의 사람이다. 을지문덕이 적장에게 "그만하면 족한 줄 알고 물러남이 어떠냐?"고 한 것도 평화주의를 나타낸다. 아내를 빼앗긴 처용이 미움과 분노를 털어 버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춤추었다는 것은 착하고 평화로운 마음, 크게 하나로 끌어안는 마음을 드러낸다.


함석헌에 따르면 오늘 날 우리민족의 이런 정신은 쫄아들었다. "삼국시대를 경계선으로 민족성이 변경되었다. 착하고 너그럽고 곧고 굳고 날쌔고 의젓하던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는 한민족의 어진 성격은 역사의 밑바닥에,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착함을 사람, 우주, 하나님의 본성으로 보고, 착한 한민족을 "우주 공도(公道)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본다. 착한 성격은 한민족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함석헌에 따르면 자연환경의 아름다움과 '한'을 추구하는 민족정신이 만나서 신선사상과 평화주의가 나왔다. 자연(하나님, 영원)과 하나됨을 추구하는 민족정신이 도통과 초탈을 추구하는 신선사상으로, '한'을 추구하는 착한 마음이 함께 살려는 평화주의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통과 초탈을 추구하는 자연친화적인 신선사상은 적을 포용하고 더불어 사는 평화주의와 맞물려 있다.

3.1운동과 4.19혁명의 평화주의적 전통이 지난 50년 동안 민주화운동 속에 이어져 온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치열한 저항투쟁을 벌였으면서도 집단학살에 맞서 자연발생적 무장저항을 한 것을 내놓고는 군사적 무장저항과 테러행위가 없었다는 것은 세계민주화운동사에서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운 함석헌의 영향과 착하고 평화적인 한민족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3) 한국문화의 결점

일치와 동화를 추구하는 한민족의 문화적 성향은 민족적 결점이 되기도 한다. 하나로 느끼고 하나로 어우러지기를 좋아하는 경향은 심각하고 진지한 성격보다는 정서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져왔다. 고대에 단오절과 추수절에 제사 지낼 때 함께 모여 밤낮으로 여러 날씩 함께 술 먹고 춤추고 노래했다는 것은 낙천적 성격을 나타낸다. 오늘도 한국인은 감정에 치우치고 놀 때나 종교적인 체험을 하거나 정치를 할 때도 무리지어 감정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인의 놀이문화, 종교문화, 정치문화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함석헌은 한국인의 결점을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 그래서 시없는 민족이요, 철학없는 국민이요, 종교없는 민중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유한 종교를 발전시키지도 못했고 밖에서 들어온 종교를 "정말 내 것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한민족의 본 바탈인 '인, 용, 지'를 정말 바로 키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려면" 깊이 파고들어 생각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종교를 가져야 한다.


한국인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하나됨을 느끼는 당파주의와 집단주의에 빠지기 쉽다. 함석헌은 한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을 닦아내는데 있다고 보고 이 셋은 결국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 됨"에 있다고 보았다. 민족이 크게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함석헌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민족의 가장 큰 결점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한민족의 과제를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으로 제시한다.


외래문화와 외래사상에 짓눌린 겨레의 얼과 혼을 살려내기 위해서, 한민족이 하나되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보았던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 뚫어 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고 역설했다. 생각함으로써 제 얼과 혼이 살아나고 하나된 민족의 주체적인 문화가 세워진다.

3. 문화의 주체와 세계화

1) 민중문화

함석헌은 문화를 짓는 이도 민중이고 그 문화를 지키고 간직한 이도 민중이라고 보았다. "인간역사의 맨 앞줄에 서서 하늘과 땅을 맞붙여, 다시 말하면, 물질과 영을 결합시켜 인간생활이라는 오묘하고 거룩한 운동을 창조해 내는 것이 씨 이다...(씨 의) 삶이 기술과 제도를 내는 것이요..."


함석헌은 민족의 참된 역사와 문화가 민중의 정신과 삶 속에 살아있다고 보았다. "이 나라의 지도자라 하고 다스린다는 놈들이 돈에 팔리고 권세에 팔려 역사를 삐뚤어지게 쓰고 있는 동안 무식한 민중은 무식하기 때문에 붓과 먹으로 쓰지 않고 피와 땀으로 쓴 역사를 석실(石室) 아닌 육실(肉室)에, 골실에, 그래 탑의 지성소(至聖所)에 감추어 지켜왔다...돌에 아로새겼던 문화는 망가졌어도 여기는 유전 속에 깊이 묻혀 있어 캐내는 날을 기다리는 산 문화가 있다."

험난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짓눌린 민중의 가슴 속에는 이 나라를 푸르게 만들 수 있는 생명에너지가 무진장으로 들어 있다. "그것을 모험하고 캐내기만 하면, 능히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 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참된 문화와 역사가 살아 있는 민중의 정신과 삶이 새 역사와 새 문화를 창조하는 자리이다. 민중의 삶의 자리가 새 역사를 쓰고 짓는 자리이며 "우주의 중심"이고 "과거와 미래가 내다뵈는 점"이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역사와 문화의 개혁과 혁명을 위한 동력은 민중에게서 나와야 한다. "민중과의 호흡이 끊어진 순간 혁명의 힘도 끊어진다."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짓눌리고 빼앗기면서도 인간 생명의 본성과 민족의 얼을 간직한 씨 (민중)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 같으나 지혜롭고, 못난 것 같으나 어질고, 착한 것 같으나 위대한 존재이다. 씨 은 모든 지혜와 문화의 원천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씨 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씨 에게 배울 것을 강조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남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지배 엘리트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죽이고 파괴했다면, '스스로 하는' 민중들은 농사짓고 건설함으로써 평화를 이루었다: "나라를 건진 사람은 사람 죽인 사람이 아니라 그 시체를 치우고 또 씨를 뿌리고 또 갈고 말이 없는 그들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모든 짐을 다 지면서도 이름 앙탈도 자랑도 없는 이름 모를 사람들입니다." 지배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면서도 씨 은 지배자들이 파괴하고 더럽힌 공동체적 삶을 지탱하고 정화하는 구실을 했다. 오 천 년 민족사 속에서 평화적인 삶을 몸으로 익힌 씨 은 비폭력 투쟁을 통해 민족과 인류의 평화 공동체를 실현할 저력을 지니고 있다.

민(民)을 문화와 역사의 주체로 본 함석헌은 민의 세기가 온다고 보았다. "이제 단순한 인간, 사람, 민(民)의 세기가 온다. 근세 이래의 인류가 당한 모든 어려움은 민 하나를 낳자는 운동이었다. 민은 제가 제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 제 노릇을 할 때 민중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해방되고 구원된다. 민이 역사와 문화의 주인일 뿐 아니라 인류를 살리는 세기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민아...너는 고난받음으로 주인됨을 배웠구나. 네가 세기의 그리스도 아니냐?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죽음으로 모든 사람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너의 위대는 너 스스로의 위대가 아니요, 역사를 낳는 그 이, 그 한 이의 위대다."


함석헌이 민을 세기의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민중을 신격화하거나 도덕적으로 이상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죽음으로 모든 사람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너"는 민중 한 사람의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눌리고 소외된 삶을 살면서도 남을 먹이고 살리는 민중의 집단적인 삶의 모습을 가리킨 말이다. 또한 민의 위대는 민중 개개인의 도덕적 위대가 아니라 민의 집단적 삶을 통해 표현되는 '한님'(하나님)의 위대이다. 민은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 살도록 강요된 존재이므로 문화의 바탈에 가깝게 사는 특권을 지닌 존재이다. '민이 세기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탈에서 일탈된 병든 문화를 구원할 힘이 바탈에 가깝게 사는 민중에게 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2) 문화의 세계화

함석헌은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태어나서 활동했다. 그는 기독교신앙과 서구 학문과 서구의 민주정신을 충실히 받아들였고 동양정신과 사상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에 몰두했다. 그는 겨레의 얼과 혼을 일깨우기 위해 평생 힘썼으면서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 세계통일과 세계정부의 꿈을 꾸었다. 남북이 분단되고 지역주의와 당파주의로 갈라진 한겨레가 깊이 생각함으로써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함석헌은 당대를 "세계역사는 이제 하나 됨의 직선 코스로 들고 있는 때"로 파악한다. 그는 이제 세계역사는 세계정부를 이루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 함석헌은 새 시대, 달라지고 변화하는 미래를 내다보며 생각하고 행동했다. 미래적(종말론적) 관점에서 다시 말해 세계화의 관점에서 인생과 역사를 보았다. 그는 동양문명과 서구문명의 종합과 융합을 추구했다. 이미 그의 삶과 정신 속에 서구문화와 한국.동양문화가 융합되었고 그의 글과 사상 속에 한국문화와 서구문화가 함께 녹아 있다.

함석헌은 매우 주체적인 문화관을 지녔으면서도 동서문화를 아우르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우리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를 강조하는 주체적인 관점에서 동서문화의 종합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전망을 지녔다. 함석헌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비교한다. 동양은 정신적, 명상적, 종합적인데 서양은 물질적, 활동적 분석적이고 동양역사는 복종, 통일, 되풀이, 지킴의 역사인데 서양역사는 반항, 자유, 발전, 진보의 역사이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이런 경향적 차이는 "서로 도와 모두 높은 데 오르기 위함"이다.


그는 동서문명이 통일되어 제3의 새 문명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동양과 서양이 다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겠지만 양자를 조화하고 통일시키려고 힘쓰다 보면 제3의 새 문명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동서문명의 통일을 한번 못해 봐요?...구리도 묽고 납도 부슬부슬 떨어지는 거지만 그것을 한데 섞으면 놋이 되어 아주 억센 쇠가 되듯이...동양도 별것 아니고 서양도 잘못이 많겠지만, 그것을 조화하노라고 힘쓰노라면 제3의 새 문명이 혹 아니 나올까요?" 동양인은 서양인 밑에서 자유와 진보의 귀중함을 배웠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주의, 기술주의, 경쟁주의로 치닫는 서구문명의 폐해가 극에 달했다. 그는 오늘의 세계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살기 위해서는 새 길을 뚫어야 하는 데 동서문명의 통일이 바로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통일시키는데 종합과 포용을 지향하는 동양이 주도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이제 정신과 통일을 지향하는 동양이 "서양을 건질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이 시대에 현세적이요, 동적이요, 이성적이요, 실험적이요, 분석적이요, 방법적인 서구(西歐) 민족이 주역을 하였으나 이제...주역이...옮겨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한민족이 현대문화의 위기를 뚫고 동서문화를 아우르는 세계문화를 여는데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 까닭은 한민족이 유교, 불교, 물질문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나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이념과 종교에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종합하고 포용하는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민족은 '하나'이면서 '큰' '한'의 사유와 정서를 품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아우르고 통일하는 자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회의 문화가 한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고 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신문화적 원형질인 '한'이 세계문화형성의 이념과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치는 글

함석헌의 문화이해를 요약하고 그의 문화이해가 갖는 의미를 짚어봄으로써 글을 마치려 한다. 함석헌은 문화를 삶의 바탈인 전체='한'을 밝히고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문화는 삶의 바탈에서 나온 것이므로 주체적인 것이다. 문화는 윤리적 유기적인 통일 다시 말해 "우주의 윤리화"다. 그러나 상대적이고 단편적인 사실과 제도에 매인 문화는 바탈인 전체와 긴장과 대립 속에 있다. 역사는 문화(문화인)와 바탈(야인)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바탈의 자리에 선 야인으로서 이른 바 문화인과 맞서 싸움으로써 문화를 바탈에 돌아가게 해야 한다.

함석헌은 한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원형질을 '한'으로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성격과 본질을 해명했다.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이고 공동체적인 한국문화의 성향을 밝히고 외래 문화와 사상에 짓눌린 한국문화의 정신과 주체성을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다. 함석헌은 문화를 창조하고 지키는 주체를 민중으로 보고 민중의 삶과 정신에서 문화를 찾고 새 문화를 일구어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한'문화의 자질과 성향에 기초하여 동서문화를 아우르는 세계문화의 형성을 지향한다.


 

함석헌은 삶에 기초한 생명문화를 말했고, 문화의 주체성과 전체성, 세계성과 종교적 깊이를 밝혔다. 그의 문화이해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살림의 문화를 세워 가는데 좋은 안내를 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혼이 빠진 외래문화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문화의 얼과 주체성을 회복하는데 함석헌의 주체적이면서 세계적인 문화이해가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문화현실은 해체되고 파편화 되었으며 영적 깊이를 잃고 물질적 감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현대의 문화인들에게 함석헌의 문화이해는 문화의 유기적 전체성과 종교적 깊이를 드러내 준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