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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 [濊貊]
고대 만주지역에 거주한 한국의 종족명칭. 예와 맥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왔다. 이를 대별해보면 ① 예·맥 동종설(同種說)과 ② 예·맥 이종설(異種說)로 나누어진다.
〔예·맥 동종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맥은 종족명칭이고, 예는 지역 또는 강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맥족의 아홉 갈래(九貊) 중의 하나를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하였다.
미지나(三品彰英)는 선진(先秦)문헌에 보이는 맥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예는 진대(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한대(漢代)에 범칭되는 예는 고구려·부여·동예를 포괄하는 민족명이라고 보았다. 예맥이라는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과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맥을 결합시킨 편의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예족 내의 특정한 부족명이라 하였다. 곧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한 계통의 실체라 하였다.
윤무병(尹武炳)은 예맥이라는 명칭은 ≪사기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한대 이후의 예와 (예)맥은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어졌던 실체였다고 보았다.
한편,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을 예맥과 한(韓)의 양계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예·맥 이종설〕
이종설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했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계통이고, 맥족은 무문토기문화를 남긴 퉁구스족계통으로 파악하였다.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어졌다.
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은 원래 중국의 산시성·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는데, 서기전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은 이어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으로 왔다가 고조선에 쫓겨 요동군에 예속하게 된 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고,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서기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왔는데, 예·맥은 같은 계통의 종족이라고 여겨진다. 대체로 서기전 2세기 이후 중국문헌에서는 맥이나 예를 예맥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양족간의 접촉과 융화가 진전됨에 따른 일면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疆域考(丁若鏞)
≪참고문헌≫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李玉, 교보문고, 1984)
≪참고문헌≫ 濊貊考(尹武炳, 白山學報 1, 1966)
≪참고문헌≫ 濊貊族에 관한 연구(金貞培, 白山學報 5, 1968)
≪참고문헌≫ 松花江下流的赫哲族(凌純聲, 1934)
≪참고문헌≫ 韓國古代民族考略(芮逸夫, 中韓論集 1, 1955)
≪참고문헌≫ 濊貊族小考(三品彰英, 朝鮮學報 4, 1953)
≪참고문헌≫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の史硏究, 吉川弘文館,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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