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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Oda Nobunaga]
1534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1582. 6. 21 교토[京都].
후지와라 씨[藤原氏] 출신의 무사.
본명은 기치호시[吉法師], 뒤에는 사부로[三郞]라고 했다.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무너뜨리고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킴으로써 오랜 봉건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서 중앙정부를 안정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룰 여건들을 조성했다.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무사 출신의 가신들을 둔 정부관리였다. 1549년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영지를 이어받아 친척들과 자신의 구니[國] 내의 주요가문들을 복종시켰다. 1560년경에는 오와리 구니의 모든 영토를 자신의 손 안에 넣음으로써 뛰어난 전략적 재능을 과시했다. 또한 같은 해 인근 지방의 대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대군을 무찌름으로써 일본을 놀라게 했는데, 이로써 그는 일본 통일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전제적인 성격의 노부나가는 바람직한 새 정책들을 재빨리 개발하여 시행했다. 그는 소총부대를 조직한 최초의 다이묘[大名 : 봉건영주]였다. 또한 오와리 평야 중심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의 신흥 상인계급만이 아니라 비옥한 오와리 평야의 농업생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처럼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그는 교토 주변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며 오랫동안 일본 정권의 중심지인 긴키[近畿] 지방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1562년에는 이웃 미카와 구니[三河國]의 유능한 봉건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으로 배후지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그는 1567년 작전기지를 북쪽 기후[岐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도와 교토로 진군함으로써 요시아키가 쇼군[將軍]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래 요시아키는 자신의 형이자 전임 쇼군[將軍]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암살당하자 쇼군직에 앉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요시아키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573년 그를 폐위시켰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아시카가 바쿠후가 1597년 요시아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긴 했지만 노부나가의 이같은 행동은 사실상 아시카가 바쿠후의 종말을 의미했다. 1576년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다지기 위해 노부나가는 수도 근처 비와호[琵琶湖] 주변에 위치한 아즈치[安土]의 거대한 성에 자신의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사이 노부나가는 통행세와 동업조합에서 걷는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들 세금은 지금까지 지방 다이묘들의 특권적인 수입원천이었다. 또한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1571년에는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엔랴쿠사[延歷寺]를 초토화했다. 천태종은 8세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래 전통적으로 정치와 종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그 사이 광신적인 잇코 종[一向宗 : 불교의 한 종파]은 지방 소영주들의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세속적 권한을 강화하고, 요시아키를 지원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여러 지방의 권세 있는 다이묘들과 손잡게 함으로써, 일본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노부나가에 완강히 저항한 잇코잇키[一向一揆 : 잇코의 난]를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잇코 종과 직접적·간접적으로 10년 이상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580년에 마침내 노부나가가 잇코 종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 사[本願寺]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실의 중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많은 장원과 사찰 토지를 빼앗았고 이렇게 확보한 토지를 사무라이와 부농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확고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불교사원들이 전통적으로 행사해오던 영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이 기반을 강화했다. 교토에 자리를 잡자 그는 예수회선교사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대했으며 수도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하도록 후원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유럽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장려하는 것이 불교사찰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신자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솔직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1582년 봄이 되자 그는 이미 일본 중부를 석권했고 서일본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불만을 품은 한 가신이 일으킨 반란에서 부상을 입었고 자살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일본의 거의 반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다이묘들이 지니고 있던 분권적 구(舊)질서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통일에 이르는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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