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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Toyotomi Hideyoshi]
1536/37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 나카무라[中村]~1598. 9. 18 후시미[伏見].
중세 일본의 무장(武將).
개요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고도 함.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1585~98]를 지냈다.
초기생애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집을 떠나 지금의 시즈오카 현[靜岡縣]인 도토미 구니[遠江國]로 가 다이묘[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보병]가 되었는데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노부나가가 1568년 중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는 몇몇 주요전투에 참전했다. 1573년 9월 2명의 강력한 다이묘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미 구니[近江國]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고 따라서 하시바 지쿠젠노가미라고 불렸다.
1577년부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산인-산요[山陰山陽:中國地方] 지방의 정벌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빗추 구니[備中國]를 침공했다. 그는 하리마 구니[播磨國]의 히메지 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포위공격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씨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1583년 히데요시는 2명의 가신 중 1명을 패퇴시키고 할복자살하게 했으며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뒤 그해 오사카[大阪]에 큰 성을 지었다.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뒤 정적(政敵) 모리 데루토모와 휴전을 하고 일본 서부의 시고쿠[四']와 규슈[九州]를 정벌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간혹 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關東]와 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킨 뒤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체제 개혁
우선 그는 농부·상인·승려의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다. 이어 일본 전역에 널려 있는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다. 또한 사농공상제(士農工商制)를 도입하여 무사·농민·장인·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 차이를 명확하게 했고, 봉건사회의 신분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살도록 했다. 한편 겐치[檢地:토지측량]를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하여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으며 교통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했다. 또한 광물자원 개발의 장려로 화폐의 주조가 원활해짐으로써 교역이 촉진되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가 되었다. 이어 조선침략을 준비했는데 최종목표는 중국·필리핀·인도의 정복이었다. 그러나 1592년에 처음 침공한 조선반도의 정복도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일본의 원정군 규모가 조선침략을 완수할 정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파기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정실(正室)은 후사를 낳지 못했으며 측실이 아들을 하나 두었을 뿐인데 이 아이는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했다. 2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603년에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세웠다.
평가
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 공부하여 시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하며 노[能] 연기도 잘 했고 선사(禪師)인 센 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열심히 배워 종종 다도회를 베풀고 솜씨를 자랑했다. 그가 추진해온 전국통일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Tadachika Kuwata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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