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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도쿠가와 시대 [德川時代, Tokugawa period]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5.
 
 
 
도쿠가와 시대 [德川時代, Tokugawa period]
 
에도 시대[江戶時代]라고도 함.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운 바쿠후[幕府] 체제 아래 국내적으로 평화를 구가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 일본 봉건시대의 마지막 시대(1603~1867).

 

쇼군[將軍]이 된 이에야스는 잠재적인 적대세력인 도자마[外樣]와 전략적으로 배치한 동맹세력인 후다이[譜代], 방계가문인 신판[親藩]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냄으로써 일본 전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1635년부터 이에야스의 후계자들은 전국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다이묘[大名]들에게 도쿠가와 바쿠후의 행정중심지인 에도(지금의 도쿄)에 가족들을 두고 2년마다 몇 개월씩 살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통해 도쿠가와 바쿠후가 중앙에서 통제하는 반자치제도가 확립되어 25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사회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 계획의 하나로 4가지 사회계급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이 확정되고 이들 사이의 이동이 금지되었다. 수많은 무사 즉 사무라이[侍]들이 수도를 비롯한 여러 조카마치[城下町]에 모여 살았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관리가 되었다. 또한 권력층에게 안정되고 지속적인 수입원을 보장해주기 위한 일환으로 인구의 80%를 점하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업에만 종사하도록 했다. 정치적 안정면에서 도쿠가와가 염려했던 또다른 점은 외래사상과 군사개입이었다. 아시아에서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이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인식한 쇼군들은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을 일본에서 쫓아내려는 조치들은 1630년대의 3차례 추방령 선포로 극에 달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조치로 이어졌다. 이러한 법령들을 발포하면서 바쿠후는 공식적으로 쇄국정책을 채택했다. 1633년 이후 내국인의 해외여행과 해외에서의 귀국이 금지되었고 외국인과의 접촉은 나가사키 항[長崎港]을 통해 교역을 하고 있던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들로 제한했다.

 

1680년대부터 1700년대초 일본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바쿠후의 장려에 힘입어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상업과 제조업의 성장은 더 눈부셨는데, 이는 정부의 중앙집권화 노력과 성공적인 평화정착 이후 특히 에도·오사카[大阪]·교토[京都]와 같은 대도시의 발전으로 촉진되었다. 고급 견직물, 종이, 도자기 산업과 양조업이 크고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들 제품의 교역 또한 번창했다. 이러한 상업활동의 증대로 도매상과 환전업자(換錢業者)가 등장했으며 화폐사용과 신용거래가 증가함에 따라 강력한 자본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부유한 상인 계층의 등장으로 역동적인 도시문화가 형성되어 문학과 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겐로쿠 시대).

 

상인들과 수공업자 일부가 18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번영을 구가한 반면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요소득원은 농업생산과 관련된 고정수입이었는데 농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18세기말과 19세기에 걸쳐 정부가 몇 차례 재정개혁을 시도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무사계급이 겪는 재정적 압박은 커져만 갔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마지막 30년 동안 재정문제만이 아니라 농민봉기, 사무라이들의 소요와 씨름해야 했다. 이러한 국내 상황에 서양의 침략 위협까지 높아지면서 바쿠후 체제의 존속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되었으며, 1860년대에 이르자 국가를 통일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천황의 직접 통치를 부활하자는 요구가 커져갔다.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들이 다스리는 남서부의 조슈 한[長州藩]과 사쓰마 한[薩摩藩]이 도쿠가와 바쿠후에 가장 강력한 압박을 가했으며 결국 1867년 마지막 쇼군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를 물러나게 했다. 1년이 못 되어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즉위함으로써 왕정이 회복되었다.→ 메이지 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