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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인간학 [哲學的人間學, philosophical anthropology]
인간의 본성, 인간과 세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학문.
개요
자연과학적·역사학적·사회학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연구를 포함하기도 한다.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셸러(1874~1928)는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에 관해서 모든 과학들이 얻어낸 풍성한 개별지식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자기의식과 자기성찰에 관한 새로운 형식을 전개하려는 것"이라고 했고, 란트만(1913~)은 "철학적 인간학은 전인간에 관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에 관해서 묻는다"라고 말했다.
인간연구의 문제점과 그 유형
우리가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인간에 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해석학에서는 전이해(前理解)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생물학자가 인간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했을 때, 그 생물학자의 지식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그 생물학자는 먼저 인간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어떤 진화론자가 인간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 화석(化石)뼈를 발견했을 경우, 그 화석뼈 자체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 그 진화론자는 화석뼈가 인간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인간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어야만 한다(→ 진화론).
진화론자는 처음부터 창조설을 거부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다른 동물은 유기체로부터, 또 유기체는 무기체로부터 진화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인간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것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로만 구성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전이해'를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이 인간에 대한 '전이해'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의 인생관·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연구자 자신의 인간에 대한 자기 이해가 항상 전제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전이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이해'는 더 풍부하고 완전한 이해를 위하여 항상 열려져 있어야 한다. 셸러는 "인간은 동물처럼 종(種)의 성질을 가지고 확고부동하게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면서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개방된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본래 확정된 성격이나 정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삶은 미리 정해진 궤도에 따라 달리는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태어났다. 하느님이나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완성하도록 위임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자신을 완성하는 과제를 이미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완성은 그가 스스로 자기자신에 관해서 만든 어떤 관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의 동기를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다른 충동을 받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절대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은 출발점이란 없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말할 때, 학자들은 그러한 특성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연히 착안한 어떤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전부를 밝힐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다원적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매우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물음에 대답을 이끌어 낼 확고한 출발점이 없다. 이 물음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제기되며, 또 이 물음은 제기되는 여러 가지 경우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인간은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비교해봄으로써 인간의 특성을 살피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은 빈약한 본능을 가졌으며 비전문화(非專門化)되어 있지만,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기의식과 자기반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든가, 인간도 환경의 지배를 받기는 해도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理性)의 도움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우수한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철학적 인간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써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밖으로부터 고찰해보는 것과 안으로부터 성찰해보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을 밖으로부터 고찰하는 경우에 인간은 문화적·사회적·역사적 존재임을 통찰할 수 있다. 인간은 문화·사회·역사의 창조자이면서, 또한 문화·사회·역사(전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피조자(被造者)이기도 하다. 미완성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완성을 하며, 문화창조자로서의 인간에게 자유와 개성이 인간이해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또 문화의 피조자라는 면에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의 사회성·역사성이 인간이해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안으로 성찰할 때 이른바 정신적 존재 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과 이성의 이해의 변천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관해 보며, 정신·이성·오성·의지·감정·영혼·육체의 의미 등을 살펴보게 된다. 셋째,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통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신학적 인간학 및 종교적 인간학이 발생하고, 그리스도교적 인간학, 불교적 인간학, 이슬람교적 인간학, 유교적 인간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영혼불멸·영생·은총·구원·죽음·고통·희망·사랑의 의미가 인간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나 누구를 사랑할 때, 대체로 절대자 또는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원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종교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밖에도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특정한 학문에 주안점을 두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제기할 수 있다. 예컨대 교육학적 인간학, 의학적 인간학, 정치학적 인간학, 법학적 인간학이라고 하는 철학적인 영역들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소외의 해소와 인간의 존엄성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해명해보려고 했다.
인간이해의 방법
철학적 인간은 그의 대상인 인간과 이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인간에 관해서 직접 탐구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특수과학들인데, 이 특수과학들의 성과들이 다시 간접적으로 철학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인간의 포괄적인 전체 이해를 다룬다. 예컨대 셸러는 쾰러의 동물학적인 유인원 연구로부터 그의 정신개념의 새로운 정초를 입었으며, 겔렌은 먼저 동물계에서의 인간의 특수위치를 순수하게 해부학적으로 해석한 것을 받아들여서 인간을 결핍존재(Mängelwesen)라는 그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 이용했고, 인간과 문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러한 관찰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의 특수과학의 성과가 그 과학의 특정한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전체적인 이해와 연결된다. 이런 경우 철학은 인간의 이해에 접근하는 간접적인 통로를, 즉 특수과학들이 그에게 제공해주는 연구성과들을 통해서 가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2가지 서로 분리된 연구과정의 길이 있는데, 하나의 과정이 다른 과정 위에 연결된다. 그런데 인간에 관한 특수과학들 자체가 철학적이며 철학적 인간학적인 관찰방법에 이르기까지 심화되어가게 되면,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연구과정들의 경계선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둘째, 철학적 인간학의 관찰들은 특수과학들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그 대상인 인간을 다룬다. 인간존재의 경험 속에 나타나는 삶의 경험에 있어서 하나의 직접적인 통로를 발견하고 여기에 철학적 인간학의 관찰 근거를 찾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체험하는 삶의 현상들이 바로 이와 같은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모두 불안이 무엇이며, 환희가 무엇이며, 신뢰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철학적 인간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바로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클라우스 길은 이와 관련하여 "인간적인 현상들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이미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이론을 통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만 가능한 일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이해를 간과할 수 없으며, 직접적인 삶의 이해는 철학적 인간학의 기반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특수과학들의 입장에 서서 이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의 성과들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러한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단지 '시적인 명증(明證)'을 가졌을 뿐이고, 과학의 연구결과들만 확실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모든 과학의 연구는 이미 과학 이전에 삶의 체험 속에 주어져 있는 개념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러한 개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해의 범위 안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도 인간의 고유한 삶의 체험 속에서 그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직접적인 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가공적인 사변을 하는 것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시하는 것은 개별과학들의 방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삶의 체험의 특수한 성격을 밝혀내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연구한다는 것도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 주어진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형성이 '전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으나, 이해의 순환성이 삶의 경험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해하는 방법을 현상학적인 방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직접 삶의 경험에 기초한 방법의 엄밀한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레스너가 현상학의 방법을 중요시하고, 후설과 셸러를 극찬하면서도 이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상학적인 방법이 철학적 인간학에 적용될 때는 하나의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다.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철학적 인간학에 미리 결정적인 하나의 방법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철학적 인간학이 비로소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자신의 과제를 다루는 데 알맞도록 발전시켜가야 할 성질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현상학이라는 말을 아주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무리한 단순화와 체계화를 거부하고 비교·구별하는 연구자세로 현상들 그 자체를 바라보려고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향을 F. 뵈이텐디에크, 메를로 퐁티, 리프스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현상학적 관찰방법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자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면에서 고찰해보면 철학은 오로지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과학적인 연구의 확실한 기초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철학이 직접적인 삶의 경험에만 의존한다면 그 출발점의 우연성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철학은 특수과학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내용적인 확대와 보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기초적인 출발점의 확인과 교정을 위해서도 특수과학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 의존하는 방법과 간접적으로 특수과학들의 성과들에 의존하는 방법 사이에는 일방적인 선후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인 관찰은 언제나 특수과학들이 이미 이루어놓은 성과들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으며, 또한 철학이 항상 미리 특수과학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단지 상호의존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철학적 인간학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면과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면의 융합을 꾀하며, 삶을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자유롭게 해주면서 개방성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
인간이 동물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은 동물이기는 하지만 짐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는가? 첫째, 인간과 다른 동물(짐승)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짐승이 그의 육체 기관(器官)의 기능에 있어서 인간보다 더욱 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의 모든 육체적인 기관은 그의 자연적인 생활조건과 특수한 환경에 알맞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겔렌은 신생아의 생물학적인 초기 양상을 연구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하면 미완성된 상태로 출생한다"라고 했다. 다른 동물들은 그들이 살아가야 할 자연환경에 꼭 알맞도록 기관의 기능이 특수하게 완성된 상태로 출생한다. 그들은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행동할 때 기계적이며 자동적이다. 동물의 이빨은 육식이나 초식에 알맞게 되어 있으나 인간의 치아는 육식에도 초식에도 꼭 알맞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고 살 수도 있고, 목축이나 사냥을 해서 짐승의 고기를 먹고 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서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동물처럼 자연적인 본능이나 육체적인 기관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인간의 수태시기도 다른 동물처럼 시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성교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의 기관들이 특수한 생활조건과 특정한 환경에 꼭 맞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생존경쟁을 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면에 유리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치아는 맹수에 비해 육식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불리하고 초식을 하는 데 있어서도 초식동물에 비하면 매우 불리하다. 그러나 인간은 요리를 만들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겔렌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결핍된 존재라고 하면서 인간은 동시에 그의 결핍의 보상으로 자기반성과 자기의식을 할 수 있는 정신이 주어졌다고 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주어졌다. 인간이 비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은 자유로운 정신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간의 성장 리듬이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하면 더 오랜 임신기간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1년쯤 더 빨리 출생한다고 한다. 포르트만은 이 현상을 자궁외조기출산이라고 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오랜 성장기간을 갖는다. 인간은 성인이 되는데 거의 20년이 걸린다. 그러나 고래는 2년 만에 20m에 이르는 거의 완전한 성숙에 도달한다. 다른 동물은 모태(母胎) 안에서 그의 육체적인 기관들이 성숙한 다음에 출생하기 때문에 오랜 성장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출생 후 20년 동안 계속 일정하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리듬이 다른 동물에 비해 매우 특이하다. 인간은 육체적인 성장이 끝난 후에도 다른 동물보다 더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 다른 포유동물의 수명은 짧은 것은 2~3년, 보통은 12~15년이고, 드물게 30년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 다른 동물은 성장기간이 끝나면 기관들이 바로 쇠퇴한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배우고 생각하면서 삶의 경험을 쌓고 그의 경험의 축적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준다. 인간의 조기출생과 유년기가 긴 것은 본래부터 학습하도록 되어 있는 학습존재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직립보행 같은 기본자세조차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표본과 모범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고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
셋째, 인간에게는 환경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세계가 개방되어 있는 존재'(Weltoffenes Wesen)이다. 다른 동물은 주어진 일정한 환경에서는 인간보다 더 잘 적응하지만, 일단 환경이 크게 바뀌면 능동적으로 환경을 삶에 맞도록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과 세계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또한 환경과 세계를 자기 삶에 알맞도록 변조시킬 수가 있다. 인간은 환경에 고정되거나 매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환경을 고정시킨 채로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집단마다 그때그때마다 인간에게 적합한 또다른 환경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관심을 갖기에 따라서 다른 생물의 환경 속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환경에 얽매어 있는 것과 세계가 열려 있다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유전적으로 확정되어져 있는 환경 속에서만 산다면, 인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로타커는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윤리적인 존재이다. 돼지는 과식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필요한 만큼 먹고 그 이상 더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과음·과식을 하고 소화불량에 잘 걸린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자동조절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때그때마다 자기반성을 통해서 자기제어를 해야 한다. 니체는 인간은 자기를 극복해야 할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동물들은 영양상태와 발육이 좋은 때를 골라서 발정기와 생식기간이 정해진다. 그리고 주위 환경이 종족번식에 적합한 때에 수태를 한다. 천재지변이 있을 때나 동물의 건강상태가 나쁠 때 동물은 교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고도의 정신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병이 들었거나 주위 여건이 나쁠 때, 또 전쟁중이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일수록 성욕이 항진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동물은 수태중일 때는 성교를 하지 않으나, 인간은 언제나 성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고 자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물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반성을 통하여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윤리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런 음식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윤리적인 판단이 내려지면 인간은 그런 음식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건강에 해로울 때처럼 필요하면 인간은 금욕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 인간을 정신적 존재라고 할 때, 정신이라는 말은 자기억제와 금욕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생활이란 윤리적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것 또는 사람다움의 패러다임
① 생물학적으로 비전문화되어 있다. ② 물음을 묻는 존재(지성 또는 이성)이다. ③ 문화의 창조자·피조자이다. ④ 자유의지를 가진 윤리적 존재이다. ⑤ 고유한 내면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⑥ 이해를 초월하는 탈중심성을 가지며, 불편·부당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⑦ 유토피아 의식을 가지며 미래지향적이다. ⑧ 사회적 존재이다. ⑨학습존재이다. ⑩ 상징적인 존재이다. ⑪ 종교적인 존재(기도·희망·사랑)이다. ⑫ 수치를 아는 존재이다. 이 패러다임들은 서로 배타적·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중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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