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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이데올로기 [Ideologie]

by 마리산인1324 200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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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Ideologie]

 

이론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정치 철학의 한 형태.

 

개요

 

세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뒷받침하는 관념체계이다.

 

이데올로기의 기원과 특징

 

이데올로기(idéologie)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기에 철학자 A. L. C. 데스튀트 드 트라시가 자신의 '관념의 과학'의 약칭으로 도입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관념의 과학이 모든 인간지식을 관념에 관한 지식으로 본 철학자 존 로크와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야크의 인식론을 각색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사실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베이컨은 과학의 운명은 인간 지식의 확대뿐만 아니라 '지구 위의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베이컨처럼 지식과 실용을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설명을 본질로 하는 이론·철학과 데스튀트 드 트라시의 이데올로기를 구별짓는 특징이다. 관념의 과학은 인간정신에서 편견을 몰아내고 이성을 복권함으로써 인간에 봉사하고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스를 합리적·과학적 사회로 변혁하리라 믿고 국민교육체계를 고안한 데스튀트 드 트라시와 동료 이데올로그(idéologue)들의 가르침은 1795~99년 프랑스 총재정부의 공인학설이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들을 지지했던 나폴레옹이 곧 등을 돌렸고 1812년 12월 프랑스군의 패배를 이데올로그들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이데올로기는 시작부터 뚜렷한 감정적 함축을 지닌 용어가 되어 버렸다. 이데올로기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가 관념의 과학에 정열적으로 애정을 쏟고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좋은 의미를 가졌다가 그후 나폴레옹이 혁명사상의 혐오스런 요소들을 이 낱말과 결합함으로써 온갖 비난과 불신의 느낌으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이데올로기는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전세계 언어로 번역될 때 칭찬과 욕설의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협의와 광의로 구별할 수 있는데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논쟁이 적어도 어떤 부분은 용어의 정의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광의의 이데올로기는 체계적인 관념의 인도를 받는 모든 종류의 행동지향적 이론이나 관념 체계에 비추어 정치에 접근하는 모든 시도를 뜻한다. 협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음의 5가지 특징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데스튀트 드 트라시의 원래 견해에 매우 가깝다. ① 이데올로기는 인간경험과 외부세계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이론을 포함한다. ②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추상적 용어로 사회·정치를 조직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③ 이데올로기는 이 프로그램의 실현에는 투쟁이 뒤따를 것이라고 본다. ④ 이데올로기는 때때로 서약을 요구하면서 충실한 지지자를 모으려 한다. ⑤ 이데올로기는 광범한 대중을 향하며 지식인에게 특별한 지도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을 띤다.

 

 

철학적 맥락

 

이데올로기와 종교

 

이데올로기는 종종 종교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 이야기된다. 2가지 모두 총체적 체계이며 진리 및 행위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차이이다. 종교이론은 신적 질서에 따라 세워지며 이데올로기처럼 현실세계에만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종교는 정의로운 사회의 이상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정치적 실천 프로그램을 가지기 어려우며, 믿음·예배를 강조하고 영성(靈性)에 호소하며 인간정신의 구원·정화를 목적으로 한다. 이데올로기는 집단·민족·계급을 향해 말하며, 계시에 의지하는 종교에 반해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있더라도 이성에만 의지한다고 믿는다. 근대 세계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몇몇 종교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최초의 '이데올로기적'인 그리스도교도였으며, 프로테스탄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상향을 지금 우리가 실현해야 할 모델로 여겼고, 실현방법으로서 하층민에 호소해 국가를 지배하고 경제와 시민의 사생활을 감독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부여한 시도 때문에 수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칼뱅의 제네바 및 신대륙의 청교도 공동체에 영감을 주었다.

 

초기 정치철학에서 이데올로기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와 함께 근대 이데올로그의 선구자였다. 마키아벨리의 꿈은 근대 이탈리아에서 고대 로마와 같은 찬란한 공화제가 부활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는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이데올로기를 테러와 결합했으나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치학자의 성격이 강했다. 17세기 영국은 이데올로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영국에서 혁명세력의 신속한 움직임은 급진적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정치이론은 정치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존 로크의 〈통치론 2편 Two Treatises of Government〉(1690)은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인간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쓴 대표적 문헌이다. 17세기에 추상적 이론이 성장하고 이론체계의 확립과 정치를 원리에 따라 논의하는 경향이 증가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양식의 출현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헤겔과 마르크스

 

이데올로기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부여받은 특수한 의미를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허위의식'을 나타내는 비난조의 의미를 지닌다. 헤겔에 따르면 인민은 역사의 도구로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외적인 힘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리하여 역사의 의미는 인민의 배후에 숨어 있다. 현실을 이렇게 해석해서 현실과 타협하려는 헤겔의 시도는 현상유지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개인이 외적 힘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면 상황을 바꾸거나 개선하려는 노력은 거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헤겔에 대한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이며,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와 그밖의 초기저작에서 전개한 주장이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련의 믿음을 뜻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진리와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이론이 이데올로기이자 허위의식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용어를 일관되게 비난조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이데올로기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으로도 사용했다. 종종 이데올로기의 경멸적 의미를 무시했던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이데올로기로 일컬어지는 데 만족했다. 몇몇 공산주의 나라에서 당 철학자는 보통 당 이데올로그라 불린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데올로기의 훌륭한 전형이다.

 

지식사회학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카를 만하임을 필두로 하는 지식사회학자의 저작 속에서도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라는 비난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들의 접근방법의 특징은 이데올로기를 특정 이해관계의 결과나 표현으로 여기고 이런 이데올로기를 진짜 성격을 감춘 어떤 것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식사회학자들은 만하임이 말한 '이데올로기를 산출하는 생활조건'의 베일을 벗기는 일을 사회학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컨대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독립된 지식 구성물로 인정할 수 없으며 그 자체의 진리 및 일관성에 따라 평가할 수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써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근의 지식사회학은 이데올로기가 계급이익의 무의식적 합리화임을 주장하기 위해 프로이트 심리학을 지지해왔다. 이때문에 지식사회학자들은 지식사회학 이론에서 비과학적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받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심리학을 도입하면 지식사회학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부르주아 특질을 가진 고의적 투사로 더이상 낙인찍지 않고 그저 자본주의의 무의식적 대변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지식사회학자들은 프로이트 심리학이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못지 않게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임을 주장해왔다. 본질적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방법은 반항적 성격의 소유자를 부르주아 사회의 요구와 속박에 적응시키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지식사회학에 대한 비판자들은 모든 철학이 이데올로기라면 지식사회학도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비록 베버와 만하임이 지식사회학자들의 견해에 강한 암시를 주기는 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일관된 이데올로기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위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베버와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라는 낱말을 서로 다르게 사용했다. 베버는 경제구조가 이념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예를 들면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자본주의를 낳았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이념체계가 경제구조의 산물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뒤집는 데 관심을 가졌다. 반면 만하임은 이데올로기가 사회구조의 산물이라는 마르크스의 제안을 좀더 정교한 형태로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낱말은 다소 보수적인 관념체계에서, 유토피아라는 낱말은 좀더 혁명적인 또는 천년왕국적 성격을 가진 관념체계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제안 때문에 만하임의 이러한 노력은 빛을 잃은 것 같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에서조차 이러한 약정적 정의에 충실하지 못했다. 한편 모든 관념체계가 계급 기반과 계급 편견을 가진다는 원리가 함축하고 있는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길로서 만하임이 설정한 계급 아닌 계급인 지식인, 즉 '사회적 중립을 지키는 인텔리겐치아'의 가능성은 계급 이해나 제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그러나 뛰어난 정신을 지닌 소수 엘리트를 이상으로 제시한 것은 만하임이 마르크스보다 플라톤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주고 지식사회학이 과학이라는 주장에 새로운 의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맥락

 

이데올로기·합리주의·낭만주의

 

어떤 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열광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와 합리주의의 연관, 산 경험보다 추상적 이념에 따라 정치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이데올로기의 연관을 강조한다. 또 책을 통해 정치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도제살이함으로써만 정치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이론가도 있다. 왜냐하면 정치이론의 가치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합리주의의 한 형태로 본 영국의 마이클 오크쇼트는 로크의 정치적 자유 이론을 영국인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하나의 '요약'이라 보고, 이같은 개념을 그 전통과 연관짓지 않으면 프랑스 인권선언 속의 여러 자유개념처럼 합리주의적 원리나 형이상학적 추상이 된다고 했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를 극단적 낭만주의의 산물로 본 미국의 정치학자 에드워드 실스는 낭만주의가 이상을 예찬하고 현실적인 것, 특히 타산과 타협을 경멸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정치라는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고 보았다. 시민정치는 타협·책략·자제·신중함을 요구하므로 낭만주의와는 다르며, 따라서 낭만주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적 정치로 질주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데올로기와 테러

 

비평가들은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 성격, 과격주의, 폭력을 분석했다. '우주는 부조리'라는 견해를 표방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작가인 알베르 카뮈〈반항인 L'Homme révolté〉에서 진정한 반항인은 혁명 이데올로기의 정통성에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정행위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며,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주의 정치보다 현대 노동조합 사회주의 같은 개혁정치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카뮈는 이데올로기의 체계적 폭력을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으며, 현대에 들어와 성장한 이데올로기는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고통의 감소에 있다고 인정했지만 선한 목적이 사악한 수단의 사용을 허용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점진적 사회공학'을 내놓은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의 철학자인 카를 포퍼〈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에서 참된 과학적 방법으로 예측·실험 방법과 반증가능성의 원리를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최종적 지식은 없고 끊임없이 수정되는 잠정적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그들이 그릇된 과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예측과는 전혀 동떨어진 예언을 낳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에는 '더러운 손'이 필요하며 유혈을 싫어하는 부르주아적 성벽을 가진 자는 대체로 혁명적 대의명분에 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이상에 대한 사르트르의 애정은 나이가 듦에 따라 점점 더 커졌으며 심지어는 폭력이 그 자체로 좋을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에서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했다. 철학이란 데카르트의 합리론이나 헤겔의 관념론처럼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인간정신을 지배한 중요한 사상체계이며, 이데올로기란 참된 철학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철학체계의 많은 부분을 이용하는 국소적 관념체계라고 정의했다. 이 저작에서 사르트르가 의도한 것은 실존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추출한 요소들을 통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주요철학'을 현대화하고 부활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와 실용주의

 

종종 정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법과 실용주의적 접근법을 구별하기도 한다. 실용주의적 접근법이란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다룰 뿐 원칙적인 해결책은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 두 접근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오랫동안 이론가들의 논쟁거리였다. 스탈린 사후 소련은 공산주의의 보편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보다 국가안보와 세력균형에 대한 실용주의적 고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미국과 소련이 평화공존과 영향권의 평화적 분할이라는 실용적 정책을 택하도록 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오래된 이데올로기적 적대가 사라지고 혼합경제를 더 능률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적인 모색을 중시하는 징후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1950년대 후반에 이데올로기 쇠퇴의 여러 징후가 목격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세계 곳곳에서 실용주의적 정치풍토에 도전하는 좌익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했고, 이는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까운 장래에는 닥치지 않으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데올로기는 신념체계의 한 유형이지만 모든 신념체계가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앞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정치에서 실용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의 거부가 반드시 실용주의의 채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데올로기와 실용주의의 대결은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실용주의적인 것 사이의 구별로 바꾸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에 대한 접근법은 좀더 이데올로기적이라거나 좀더 실용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제관계의 맥락

 

세계전쟁에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20세기 국제관계를 뒤바꾸어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데올로기적 고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동맹을 맺고 조약을 체결하는 일이 많았다. 공산주의 진영은 자유주의 진영과 대결하고, 제3세계의 신생국가들은 민족주의·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여 정체성을 확립하고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전쟁, 이데올로기 외교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초기의 국제관계에서는 약했던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현대에 와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가 되었다는 점만 새로울 뿐이다. 특히 세계대전에서 이데올로기가 한층 돋보인 것은 예전과는 달리 일반대중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직접 고려하는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전망이 점차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1916년 연합국이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보호하는' 투쟁으로 생각하자고 촉구한 데 반해 독일은 야만에 대한 '문화' 투쟁으로 여기도록 부추겼다. 이같은 전쟁의도가 해당정부의 주요목표였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전쟁을 정당화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이 정당화가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다.

 

냉전 이데올로기

 

1950년대의 냉전은 대규모의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이해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분명 이데올로기이지만, 서구의 비공산주의나 반공산주의도 소극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가 반드시 다른 이데올로기에 속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제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은 종류 차이보다는 오히려 정도 차이로 더 잘 나타낼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전쟁과 비이데올로기적 전쟁 사이에 분명한 경계는 없으며 어떤 전쟁이 다른 전쟁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일 뿐이다. 과거의 종교전쟁을 떠올려보면 명백하다. 투르크에 대한 그리스도교 십자군 원정,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 갈등은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매우 큰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부차적이었던 반면 현대의 특징은 종교전쟁과 정치전쟁, 외교에서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M. Cransto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