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4456 2006년 12월 25일 (월) 23:04:35
농업 죽으면 흙도 지구도 죽는다 | ||||||||||||||||||||||||
[땅을 갈고 맘을 닦고-마지막회] 다시 생각하는 농자천하지대본 | ||||||||||||||||||||||||
성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농사에 대한 제 얘기의 결론을 끝으로 이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총정리의 성격이 있어 앞의 글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그동안 제 얘기를 들어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는 이유
농자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라 했습니다. 농자란 농부일 수도 있고, 농사짓는 일일 수도 있고, 그에 기반한 농경문화 전체를 통칭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이랍시고 고리타분한 봉건적인 조선시대 얘기를 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원시공동체 사회이든, 노예제 사회이든, 봉건 사회이든, 자본주의 사회이든, 사회주의 사회이든, 정보지식 사회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핸드폰, 자동차, 컴퓨터로 외화를 잔뜩 벌어들인다 해도 핸드폰을 밥처럼 먹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동차를 고아 먹을 수도 없는 일이고, 컴퓨터를 김장 담가 먹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먹는 일은 시대를 초월하고 역사를 초월하는 큰 근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출 아니면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해 온 동안 우리는 식량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식량 자급율이 30%를 밑돌고 100% 자급하는 쌀 덕에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니, 쌀을 빼면 자급율은 한자리수로 추락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식량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어 식량 국제시장을 장악한지 오래입니다. 가장 큰 곡물 메이저인 미국의 카길이 세계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큰 미국의 ADM을 합치면 미국은 세계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답니다.(경향신문, 2006.10.30) 여기에 강대국 회사들까지 해서 10대 메이저까지 합치면 세계 곡물 시장은 다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세계 식량시장을 장악한 미국
이들은 선박회사까지 만들어 생산과 가공과 유통까지 다 장악해버려, 앞으로 세계 인류의 목숨이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었습니다. 엘빈 토플러니 하는 유명한 학자를 동원해 마치 정보와 지식 산업만 발전시키면 선진국이 될 것처럼 착각시켜 놓고선 저들은 우리의 목숨 줄을 낚아채간 것입니다. 겨우 하나 남은 쌀 주권마저 FTA로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량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종자 주권입니다. 심어 먹을 종자가 없으면 식량 주권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자를 우리는 IMF 때 다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국내 종자 시장을 주요 5개 업체가 81%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 회사들이 초국적 기업에 의해 인수된 것입니다.
세계 종자 시장에서 초국적 기업 10개가 전체 시장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종자 시장의 집중도는 낮지만 종자의 자연 제약적 성격을 감안하면 이들의 시장 지배는 매우 위력적이라 합니다.(‘종자의 사유화. 상품화와 농업의 위기’ 박민선, “환경과 생명” 05년 봄호)
식량보다 더 중요한 종자주권 IMF 때 상실
우리 조상들은 종자를 베갯속에 보관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종자만큼은 철저히 보관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땅도 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땅을 한번 놀리면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가 자라나 다시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1년 땅을 묵혀 다시 농사를 지으면 1년치 고생하는 게 아니라 2년, 3년치 고생해야 그 땅을 원래대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애를 쓰며 보존해온 종자를 너무도 쉽게 버려버리고 조상들이 몇백년 몇천년 가꿔온 논을 개발과 부동산 바람에 너무도 쉽게 팔아먹고 있지 않습니까?
원판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 영화 중에 원숭이 인간들이 농사짓고 수확한 열매 중 맛있는 것들은 다 먹어버리고 쭉정이 열매만 씨앗으로 남기는 것을 보자, 영화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이 맛있는 것들로 씨앗을 남겨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저들은 우리를 원숭이 인간쯤으로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자괴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는 말합니다. 핸드폰 팔아서 더 맛있고 싼 미국 칼로스 쌀 사다 먹으면 될 것을 왜 쓸데없는 고민을 하냐고 말입니다. 아주 저렴한 중국산 약재가 국내에 들어와 국내 토종 약재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시장의 함정과 세계화의 칼날
그런데 토종 약재가 사라지면 중국산 약재가 옛날 토종 약재값보다 비싸져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게 시장의 함정이고 국제화, 세계화가 품고 있는 칼날 아닐까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토종이 사라지면 전 지구적으로 볼 때 한 종자가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어느 글에선가 바나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나나의 토종과 야생종을 유전자원으로 삼아 맛있는 상품 바나나를 만들어 놓고는 원재료인 토종 종자는 없애버립니다. 육종한 바나나 종자는 종묘회사가 독점을 하지요.
그런데 육종한 종자는 토종 종자와 달리 특정 병충해에 약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종한 종자만 공격하는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면 바나나는 멸종한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생태적 종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단지 우리의 토종만 중요하고 우리 것이 최고라는 유치한 국수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나가 없어지면 우리만 바나나를 못 먹는 게 아니고 초국적 기업의 사장님도 바나나를 먹지 못할 것이니 그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식량과 종자의 주권을 강대국의 초국적 기업들한테 빼앗겨 버리면 우리의 목숨 줄을 담보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종의 다양성을 죽여버려 결국엔 인류의 먹을거리가 없어지고 인류와 모든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이 근본적으로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흙과 지구를 살리는 농사
농자가 천하의 큰 근본인 이유는 단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면서 농부는 흙을 살립니다. 그런데 흙earth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구earth이지요. 그러나 모든 농사가 흙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순환하는 농사만이 흙을 살리고 지구를 살립니다. 저는 순환이 생명이고 창조라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는 화학약품에 의존한 농사와 공장식 대량축산이 있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과 제초제 등 농자재 화학약품이 얼마나 흙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독약들이 왜 나왔을까요? 바로 흙을 살리는 농사가 아니라 흙을 수탈하고 죽이는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흙을 수탈한다는 것은 흙 속에 있는 영양분을 빼어먹기만 하고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빼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살지 못하고 인간이 먹을 작물들만 자라라고 살생독약을 살포합니다. 그게 농약이고 제초제이지요. 그렇게 흙을 또 죽입니다.
이런 화학약품이 서양에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밀, 보리와 채소 농사를 많이 했습니다. 목축 농사도 하였지만 주로는 작물 농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순환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일부이지만 그들도 동양인처럼 가축과 사람의 똥을 다시 거름으로 재활용하는 것을 실천해왔습니다. 또한 그들도 콩을 비롯한 자운영, 클로버 같은 콩과 식물을 이용해 땅을 보호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순환적인 농사를 깬 자본주의
그러나 그들의 농사와 삶에서 순환은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시골과 달리 도시에서는 똥이 길거리에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자연히 인분도 많아 거름 걱정이 없어 농사가 잘되었던 것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제한적이었던 그들의 순환적인 농사조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른바 엔클로우져 운동을 통해 농촌에서 농부들을 도시로 쫓아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오던 농부들의 농지 점유권을 박탈하고는 그 자리에 양을 비롯해 가축들을 키웠습니다.
주인 없는 공유지조차 빼앗아버려 농민들을 도시의 무산자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점차 농업을 자급 경제에서 시장 경제, 곧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시켜 갔습니다.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소농 중심의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순환적인 농사조차 깨져버렸다 할 수 있습니다.(E.M 번즈 “서양문명의 역사” 소나무)
육식문화, 순환농사를 깨뜨리다
산업혁명 이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육식 문화 또한 순환의 농사를 깨뜨리는 데 일등 공신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귀족들이나 즐기던 육식 문화가 도시가 팽창하면서 신흥 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육식 문화를 퍼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급격한 도시 인구의 팽창이 육식 문화를 확산시킨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식을 공급할 목초 식민지를 적극 개척하였고 그로 인해 시골의 자급 경제, 순환 농사는 더 깨져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순환 농사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것은 화학비료의 발명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인분을 가지고 거름 만드는 데 적극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자 자연히 인분이 넘쳐 났는데 이를 거름으로 활용하고자 인분 벽돌을 제작해 팔았습니다.
이름 하여 푸드레트가 그것입니다.(다니엘 푸러 “화장실의 작은 역사” 들녘) 그러나 이런 공장들 주변엔 독한 악취가 발생하여 주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닥쳐 곧 문을 닫고 맙니다.
순환농사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화학비료의 발명
이 즈음에 화학비료가 발명되었지요. 화학비료란 작물을 키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질소질 비료를 똥에서 얻는 게 아니라 공기 중의 무한한 질소를 화학적으로 합성시켜 만든 비료입니다. 요소 비료라는 게 그것인데 하얀 입자로 생겨 시골에선 흰 비료라고들 하지요.
이는 나오자마자 거의 기적의 비료로 취급 받았습니다. 냄새도 나지 않는 아주 청결한 백색의 비료를 한 숟가락만 물에 타서 주면 포대 한 자루만큼의 퇴비를 준 효과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농부들은 지금도 단비, 금비(金肥)라고들 합니다.
화학비료가 나오자 넘쳐나는 축분과 인분은 쓸데가 없어 그대로 하수도를 통해 강으로 호수로 바다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귀한 거름의 자원이 오염의 원흉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반면 동양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순환의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이들의 순환은 서양 사람들과 달리 전면적이어서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 바탕에는 쌀과 콩이 있었습니다. 밀과 달리 쌀은 같은 땅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도 땅을 사막화시키질 않습니다.
논의 물 때문이지요. 한 작물을 같은 땅에서 오랫동안 재배하면 표토에 염류가 축적되어 땅을 산성화시킵니다. 그런데 논에 가둔 물이 이를 막아주는 겁니다. 그래서 벼를 한 곳에서 몇 백 년 몇 천 년 재배를 해도 땅이 멀쩡한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논은 지하수를 만드는 공장이면서 지표수를 보호하여 홍수로 인한 땅의 유출을 막아줍니다.
단백질 공급원인 콩은 고기와 달리 흙을 비옥하게 해줍니다. 이른바 콩에 기생하고 있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주인공이지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며 화학비료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2형제 쌀과 콩
쌀과 콩은 모두 흙을 쌀 찌우는 지구의 파수꾼, 우스갯소리로 하면 지구를 지키는 작물 2형제라 할만한 존재입니다. 쌀과 콩 문화는 서양처럼 육식을 일반화하질 않았습니다. 동양에서 가축이란 먹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기보다는 농사용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소는 쟁기질을 하는 일꾼이고 돼지는 거름 만드는 거름꾼이었습니다. 닭은 단백질 공급원이지만 닭 자체보다는 달걀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다 똥을 매개로 순환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똥은 개가 먹고 개똥은 닭이 먹고 닭똥은 돼지가 먹고 돼지 똥은 오리가 먹어서 땅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땅 속에서 사는 지렁이가 먹습니다.
그러면 지렁이 똥은 작물이 먹고, 작물은 사람이 먹어서 똥의 순환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소는 초식동물이라 똥을 먹지 않고 사람이 먹지 않는 풀을 먹어 똥을 싸면 바로 땅으로 들어갑니다. 자기 똥을 3년 이상 먹지 못하면 큰 병 온다는 옛말은 다 순환의 삶과 생명을 말한 것입니다.
농자가 천하의 제일 큰 근본인 것의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가장 더러운 똥을 가장 귀한 먹을거리의 자원으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농부는 자기 먹을 것을 위해 흙을 수탈하는 작물을 심지 않고 흙을 살리는 작물을 심으며 또한 자기가 먹고 싼 똥을 흙을 살리는 자원으로 재활용까지 하니 천하의 큰 근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레도 먹고 새도 먹고 사람도 먹고
농자가 천하의 큰 근본인 마지막 이유는 공동체적인 공생의 삶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공동체적인 삶은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동물과 작물, 하다못해 미물의 벌레들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옛 농부님들은 콩을 심을 때 세알을 심었습니다. 하나는 벌레가 먹고, 하나는 새가 먹고, 나머지 하나를 사람이 먹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착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나 혼자 다 먹으려고 하나만 심으면 나도 결국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벌레를 없앨 수 없고 새도 없앨 수 없으니(아니 오히려 그들이 없으면 농사 자체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과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또 콩 입장에서도 하나 있을 때보다 여럿이 같이 있어야 협력도 하고 경쟁도 하여 싹을 잘 틔우고 자라기도 잘 자랍니다. 말하자면 공생을 통해 자기 살 길을 찾은 것이지요.
옛날 농부님들은 대단한 육종가였습니다. 볍씨 토종을 600종 넘게 만들어놓았으니 말입니다. 왜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놓았을까요? 볍씨를 파종할 때 옛날엔 하나만 심지 않았다 합니다. 가뭄에 강한 종자, 장마에 강한 종자, 추위에 강한 종자, 쓰러짐에 강한 종자, 일찍 이삭을 패는 종자, 늦게 패는 종자 등 여러 개를 심어 놓았다가 날씨의 변화를 잘 보아가며 그해 날씨에 맞는 벼모를 모내기 한 것입니다.
자연의 변화를 자연적인 방법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응이 벼의 후손들을 번식시켜주었습니다. 인간이 작물을 먹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작물의 후손을 널리 번성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도 먹을 게 더 많아지죠. 지금의 종묘회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일제 시대 때 만주로 피난 간 우리 농부님들이 그 춥고 마른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힘도 바로 뛰어난 육종기술에 있었습니다. 서리도 길고 비도 적고 건조한 기후에 맞는 벼종자, 그러니까 조생종에다 가뭄에 강한 놈을 육종하여 재배한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가축들도 식구나 매한가지였다는 얘기는 앞글 어디에선가 얘기한 것 같아 그냥 넘어가려 합니다.
태양에너지로 새 에너지를 만드는 노동은 농사 뿐
이웃간에 공동체적인 삶은 두레라는 공동체 문화로 꽃피었지요. 두레는 단오날 조직합니다. 풍물패와 함께 말이죠. 두레 회의를 열어 올해 모내기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 정합니다. 이 때는 내 것, 네 것이 없지요. 지주 것에서부터 힘없는 노인네, 과부, 장애인 것을 해주고는 나머지도 다 우리 것처럼 열심히 모내기를 합니다. 김매기, 수확하기도 마찬가지였지요.
우리네 농경문화는 공동체적인 결속이 강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논농사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농사보다 협동노동을 필요로 하는 게 논이거든요. 논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농경문화는 그래서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서양처럼 공동체가 무너져서 쉽게 자본주의로 발전하기 힘든 내부 결속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강력한 외부의 충격이 아니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자본주의가 진보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어쩐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왠지 아주 낯선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한마디로 하면 저는 순환을 말하고 싶습니다. 농자가 천하의 큰 근본인 것은 바로 순환에 있습니다. 저는 순환을 생명이라 생각합니다. 순환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지요. 사람 몸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농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순환은 또한 창조이기도 합니다. 우주 밖의 태양 에너지를 끌어들여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노동은 농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농자가 천하의 큰 근본인 것은 당연한 진리인 것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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