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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3. 9. 흥사단 강연



- 多夕선생 탄생 101주기, 서거 10주기 기념강연 -



유영모 -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김흥호 (감신대 교수)






내가 유영모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분의 연세가 이미 60을 넘어서는 때였다. 선생님은 당신의 생명의 연한을 67세로 잡고 있었으니 그 때는 그의 생애의 가장 원숙한 시기였다. 그때 선생님을 따르던 우리들은 무르익은 열매에 매혹되어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선생님의 생애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고 어떻게 사셨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선생님은 어려서 의사로부터 30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철든 후부터 선생의 스승으로부터 배웠다는 건강체조와 냉수마찰을 했다고 한다.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톱으로 잘라 버렸다니 얼마나 정좌에 힘썼는지 알 수 있다. 교장실에는 왕양명의 험이(險夷)의 시를 적어 걸어 놓았다고 한다. 30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일찍이 생의 허무를 깨달아 철학에 몰두하였다. 25․6세 때에는 당시의 문인 최남선, 문일평 등과 같이 문학지에 글을 실었다. 그때 쓴 ‘무한대’는 그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30세에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그분은 뛰어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된다. 선생님은 참으로 일찍 된 사람이었고 참사람이었다. 또 진인무몽(眞人無夢)이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정말 꿈 없이 산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안병무 선생을 비롯하여 그분을 따르던 후학들이 벽제에 가서 장례를 치뤘다. 그분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분은 함석헌 선생이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감화를 받았다. 선생님의 생애는 선생님의 전기에, 선생님의 사상은 선생님의 일기에 맡기고 나는 선생님의 기독교 이해에 대해 약간 피력해 보려고 한다.





선생님의 기독교 이해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생은 한학에 능하여 동양의 고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유교의 성리학, 불교의 선학, 도교의 현학에 깊이 통하여 있었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분의 성경책은, 줄을 긋고 점을 찍고 주를 붙이며 얼마나 열심히 일었는지 위편삼절(韋編三絶)할 정도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일은 없고 내촌감삼(內村鑑三)의 성서연구 정도를 읽었을 것이다.



유교의 핵심은 효(孝) 사상이고 부자유친이 유고의 전부이다. 그는 기독교를 부자유친의 완성태라고 본다. 예수를 효자의 극치로 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서 신앙의 본질을 찾는다. 그가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바디”였다. 여기서 ‘아’는 감탄사,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이며, ‘디’는 디딘다는 실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 동양의 특징이다. 동양의 특징은 한 마디로 실천이다. 동양은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행을 돌아보고(言顧行), 행은 말을 돌아보라고 한다. 동양은 졸교도 철학도 예술도 과학도 그리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덕에 있어서는 동양처럼 일찍 눈뜬 족속은 없었을 것이다. 말은 짧게 그리고 실천은 길게, 어떤 때는 말은 없어져 하나의 빛이 된다. 그 빛을 실천하는 것이 동양의 도덕이다. 도덕을 실천하여 새로운 빛이 되면 그 빛을 비쳐주는 것이 종교이다. 이것이 중용(中庸)의 전부이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빛을 보는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실천하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완성하여 새 빛을 보여주는 것아 교이다. 성을 강조하는 것이 불교이다. 도를 강조하는 것이 도교이다, 교를 강조하는 것이 유교이다.



불교에서 선(禪)은 특히 견성(見性)을 강조한다. 도교에서 노자는 특히 도덕(道德)을 강조한다. 도덕은 도의 체득이다. 유교에서 공자는 특히 인(仁)을 강조한다. 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교의 원천이다. 성과 도와 교 가운데서 동양의 특징은 도에 있다. 도란 성의 실천이요 교의 원천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이다. 교는 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유영모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성이 특이하고 그의 교가 박력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에게서 가장 경이를 느낀 것은 그의 도였다. 도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다. 그의 성에서 나오는 내적행위이다. 그것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까닭 없이 하는 것이다. 꽃이 까닭 없이 치는 것처럼 도는 그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같다.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그것을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선생님은 댁에서 YMCA까지 20리 길을 언제나 걸어 다이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남녀관계를 끊으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며 희노애락을 넘어서야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초월하는 데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식(一食)을 권면하였다. 식욕은 모든 욕심의 근원이다. 욕심의 근원이 식용이요 죄의 근원이 성욕이다. 일식의 일은 끊는다는 뜻이다. 일식으로 식욕을 끊고, 일언으로 성욕을 끊고, 일인으로 명예욕을 끊는다. 도라고 하는 것은 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무욕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를 무(無)라고 한다. 무가 되어야 진리의 세계를 살 수 있다. 진리의 세계를 사는 것이 도덕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참사람이라고 하였다. 참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 믿을 신(信) 자는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였다.



그는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는다고 해서 그는 자기의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하였다. 저녁 석 자를 세 개 합친 것이다. 내가 맨처음 그에게 경탄하여 따라 다니게 된 것도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도대체 한 끼만 먹고 어떻게 살까, 얼마나 먹나 한번 가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밥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소식(小食)에 주로 채식이었다. 그것을 먹고도 당일로 개성에 다녀오고 인천에도 당일로 걸어서 다녀오곤 하였다. 유 선생이 한 끼만 먹는 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한 끼만 먹는다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빛을 십자가에서 본다. 부자유친의 극치를 십자가에서 본다. 그는 요한복음 13장 31절을 그 나름대로 이렇게 번역한다. “이제 아들이 뚜렸하고 한웋님도 아들 않에 뚜렷하시도다. 한웋님이 아들 않에 뚜렷하시면 한웋님도 한웋님 않에 아들을 뚜렷하게 하시리니 곧 아들을 뚜렷하게 하시리라.” 그는 십자가를 환빛이라고 하였다. 영광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 그것은 임금 왕(王) 자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를 천명지위성(性)이라고 하고 십자가의 보혈을 꽃피라고 하였다. 꽃피는 꽃이 핀다는 것이다. 꽃이 피는 것이 견성이요 천명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꽃피를 본다. 그는 일제를 초월하여 천명(天命)이 된다. 그는 세상의 집착을 끊어버린다. 식(食)을 끊어버리고 색(色)을 끊어버린다. 지(知)를 끊어버리고 명(名)을 끊어버리고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을 하는 하나의 천체가 된다. 그것이 천명이다. 천체는 스스로 궤도(軌道)를 가진다. 이것이 도(道)이다. 매일 해가 떠서 환빛을 드러내듯이 도인은 또 다시 빛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것이 교(敎)이다.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성(性)이요 궤도를 돌아가는 것이 도이다. 공자는 ‘오도는 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다. 하나로 꿰뚫는 거이 도이다. 일식 일언 일좌 일인 하나로 꿰뚫는 것이 도이다. 동양의 특징은 도이다. 궤도를 가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나무에 달리는 것이요 하늘에 달리는 것이요 천체가 되는 것이다. 하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자유친이다. 부자유친이 될 때 땅의 집착은 끊어지고 일식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것이다. 땅을 떠나서 하늘에서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는 것이 일식이다. 유 선생은 일식이 성만찬이요 일식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제사요 산 예배라고 한다. 그는 성만찬으로만 살았다는 성녀 젬마를 좋아하여 젬마 전기를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일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소강절(邵康節)도 일식을 하였다. 소강절이 67세를 살았다고 하여 유 선생도 67세를 살고 가겠다고 말할만큼 그는 소강절을 좋아하였다. 소강절은 서화담(徐花潭)이 사숙한 스승이다. 석가가 일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석가가 일식하기 전에 인도에는 일식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식은 불교 이전의 힌두교 전통이다. 간디도 일식을 하였다. 그는 인도의 근본이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이 일식인 것을 알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는 신의 찬양이요 그 핵심은 단식인전생심소(斷食人前生心消)라고 유 선생은 말씀하셨다.



부자유친을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의 시조 주렴계(周濂溪)는 무극이 태극이라고 한다. 도교에서는 “무극이 태극”을 우주관이라고 하는데 장자(壯者) 첫머리에 나오는 붕새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중천에 빛나는 태양을 우주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일식을 일중식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일중식을 점심이라고 한다. 유 선생은 그리스도를 의의 태양이라고 보고 그의 십자가를 점심이라고 보았으며 성만찬을 일식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고 빛을 보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듯 그의 죄성이 사라지는 것을 속죄라고 생각하였다. 죄성이 사라지고 땅에 집착이 없어져 일식일언 일좌일인하게 되는 것을 그는 일이관지로 보고 그렇게 사는 것을 도라고 하였다. 도는 하늘을 사는 것이요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이. 이러한 삶을 그는 청의미(淸意味)라고 하였다. 깨끗한 맛이라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를 무극이 태극이라고 본다 동양의 우주관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몸소 보여주신 이가 예수님이다. 그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다. 자기를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일식은 타력이 아니다. 견성에서 이루어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이것이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유영모에게는 일이관지의 도이다. 각각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에 십자가의 도는 일이관지의 도이다. 이것이 그가 동양사상으로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다. 유영모에게 그리스도는 무극이 태극이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있다는 부자유친이요 십자가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꽃피였다. 꽃이 피는 것을 보고 그는 우주가 피어남을 본다. 조선이라는 아침햇살에 무궁화 꽃이 피는 것을 보고 그는 한국의 십자가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십자가의 도가 신앙이다. 도의 실천 없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뿌리박을 수 없다. 한국에 뿌리박는 기독교는 한국의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도는 동양의 도이며 그것은 “무극이 태극”의 태극도인 것이다. 태극도를 소강절은 이렇게 읊었다.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요득소인지(料得少人知) 달이 하늘 중심에 있듯이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물 위에 바람이 불 듯이 우리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었을 때, 이때의 기쁨이야말로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유영모는 16살에 세례받고 연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가 38년만에 십자가의 빛을 보고 믿음으로 들어감이라는 글을 성서조선에 실렸다.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 - “나는 시름 없고 나 인제부터 시름 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내거라곤 다 버렸네. 죽기 전에 뭘 할까도, 남의 말은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로다.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를 나타내고, 모든 행동선을 그으니 만유물질 늘어섰다. 온 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다 없으니 위이무(位而無) 탈사아(脫私我) 되어 반짝 빛 요한복음 일장 사절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슴(道) 체득(體得)한 빛이로다.’ 님 뵈옵잔 낯이요 말슴 읽을 몸이라.” 그래서 유영모는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에서 노자신(老子身)도 아니요 석가심(釋迦心)도 아니고 공자가(孔子家)도 아니고 인자 예수라고 결론을 내렸다. “인자 예수 말슴(道)으로 몸 이루고 뜻을 받어 말하시니 한울 밖엔 집이 없고 걸음걸이 참과 옳음 뵈오니 한나신 아들 예수신가 하노라” 유영모에게 있어서는 우주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심판이다.



그는 십자가를 일식으로, 부활을 일언으로, 승천을 일좌로, 재림을 일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기독교 교리이며, 그 교리를 현실적으로 사는 것이 실식일언 일좌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님 예수”라는 노래에서 ‘언니 님되신 내 언니 따라 나가믄 돼요 돼. 아바계신 우리게시골 가온 따위 일도 참 앎이 데래 우리 울리워 도라가온 님닌담.’ 그는 예수님을 하늘나라에서 빛을 발하는 달님으로 생각했다. 그는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성만찬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식만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요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빵이 예수님의 살이라는 화체설(化體設)도 있고, 빵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길이 있다는 공생설(共生設)도 있으며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기념설도 있고 그밖에 많은 학설이 있지만 그에게 있어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인 동시에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일식은 가장 짧은 금식이다. 금식은 역시 자기의 살과 피를 마시고 사는 것이다. 자기의 살과 피를 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한다. 마음과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예배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유영모에게는 일식이 예배다. 일식 뿐만 아니라 사는 것이 예배였다. 일식이 찬송이요 일언이 기도며 일좌가 성격이고 일인이 설교였다. 하루가 그대로 예배였다. 그래서 유영모는 하루를 산다고 하여 하루살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자기가 난 날부터 매일매일 날수를 계산하면서 살아갔다. 다석일지에는 자기가 산 날을 계속 적어갔는데 82세에 3만 날을 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하루를 사는 그에게는 한 달이니 일년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는 하루를 오늘이라고 하였다. 오늘은 하루라는 뜻도 되지만, ‘오’는 감탄사요 ‘늘’은 영원이라는 뜻을 갖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 하루 속에 영원을 살아가는 감격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 이가 유영모였다. 유영모의 삶 속에는 언제나 빛이 솟아나왔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시조형으로 된 노래를 적어 와서 신이 나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노래를 읊조리면서 흥에 겨워 어깨를 들고 발을 떼면서 춤도 추었다. 그는 천진난만 그대로였다. 언제나 바지저고리에 성경책이 든 가방을 들고 YMCA까지 걸어왔다. 40년 동안 시계바늘처럼 지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간을 초월한 이에게 지각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일식은 한 때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이기도 하다. 점심은 시간이 끊어진 것을 말한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동안 그것은 근원적인 시간은 아니다. 점심이라는 시간은 솟아나는 때요 무르익은 때이며 근원적인 시간이요 현존의 시간이다. 그래서 유영모는 67세 4월 26일을 한정하고 하루 하루 유한한 시간을 살아갔다. 유영모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제도 없다.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현재, 그것이 그의 하루였다. 기독교는 하루를 사는 종교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것이 하루다. 유영모는 그런 하루를 살았다. 그것이 영원한 하루다. 그는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늘 말하였다. 죽음이야말로 십자가요 그것은 하늘 궤도에 오르 순간이요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참사는 것이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유교의 인의예지처럼 언제나 하나의 여러 모습이다. 마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교회가 언제나 하나인 것처럼 성부는 십자가요 성자는 부활이요 성령은 승천이요 교회는 재림이었다. 유영모는 노자를 좋아했다. 그것은 노자가 언재나 통채로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통째를 박(樸)이라고 한다. 통나무가 산 나무다. 쪼개면 나무는 말라 죽는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잇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통으로 사는 기독교 그 속에 그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성령을 숨님이라고 번역하였다. 목숨을 쉬고 말숨을 쉬는 것이 다 숨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기쁨을 기가 뿜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기가 뿜어 나오기 때문에 그는 터져나오는 화산처럼 수없이 많은 말씀을 뿜어 냈다. 그는 목숨과 말숨, 쉬는 숨님을 이렇게 그렸다. ‘우릴내사 예 이제 살게하는 숨님이요 한뜻 다다름에 닐닌 돌려 푸러피인 숨쉬 말과 숨 말숨으로 숴 아침올치 저녁도 우린 예 이젤 살거니 보고 듣고 먹고 싸고 그저져긔 너나서야 보내나봐 바더나들 나너나 서먹서먹컨 제계듬직 나그네 살게할순 숨님이고 건져줄순 예수시고 깊히고이 앳겨쉬며 높이고디 사르리니 가까워 다다른 자릴 제계든든 들고맙.’ 유영모는 기도를 숨쉼이라고 하여 삶을 기도로 본다. 그는 “살줄 잡고”라는 글에 ‘한얼(絶大靈) 모신 마음의 긴김(長久氣) 밑이 없는 빈탕까지 차고 남는 깊힘(深信力) 이(是) 한숨 자라 나라 들어 이르름을 믿고 밤낮 쉰 숨결’이 주기도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어 이에 숨 쉬는 우리 속에 밝는 속알이 밝아 더욱 나라 찾임이어지이다. 우리는 삶에 힘씀으로 우리 새힘이 나고 우리 지는 짐이 우리를 누루지는 않게 되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고 우리의 오늘이 아버지 뜻을 이루는 데 먹히어지이다. 우리가 이제 땅에 부닫힌 몸이 되었사오나 오히려 님을 따라 위로 솟아갈 줄 믿습니다. 사람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유영모는 주기도문 외에도 천주교의 봉헌기도를 좋아했다. ‘한울님 계셔 날 네셨으니 내 날 가져 계받들어 성김 싶흐므로 이제 내 속알과 살몸 목숨과 내 나위 힘과를 계 받드러 드려 내 밝아 곌 앎 내 마음 둬 겔그림 내 겔 사랑코 고맙 내 눈 계 거룩을 기리우고 내 소리 계 아름다움 노래 내 손 하늘 일에 쓰며 내 발 하늘 길을 가면 하오니 내 마음의 생각과 내 입에 말과 내 몸의 짓과 내 만나는 어려움과 내 받게 되는 업시임과 욕됨과 나 사는 동안 해달날덧 남죽 걱정 고맙을 계 계로 받들어 들여 일찍이는 흙바탕 낯에서 찾던 것을 온통 계 참빛께 도라가기로 꼭 바람이 옵지므슨 계 가서 열두오랠 차지릿가. 한울님 뜻맞고 한울님 말씀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알 나외임에 더욱 되기만을 가장 비나이다. 한웋님 우리 이 조임살의 조임이 크고 몬진 모질이 묵우워 들인다 못되오나 계 불상힐 바라며 계 성김을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제계듦 앎.’



유영모의 삶은 숨쉼이며 기도였다. 숨님이 유영모의 주체요 숨쉼이 유영모의 활동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글 “나는 여기서 삽니다”를 통해 그의 삶을 살펴보자. ‘높고 높고 굶보다 높고 산들보다 높고 눈보다 높고 3억5천6백 만리 해보다 높고 넓고 넓고 우리 해와 백만 동무 해가 한데 어룰려 뛰어 돌아가는 그 직경으로 2만 광년 되는 태양성단 보다 넓고 성단은 성단대로 약 만개 뭉치어 돌아가는 직경 20만 광년 되는 은하계 성무보다 넓고 우리 성무와 어깨를 마주 대고 돌아가는 1천조 성무로 짠 직경 1천8백억조 광년인 우리 우주보다 넓고 우주들을 둘러싸고 있는 빈탕한데 보다 넓고 한울의 하늘을 먹은 바람보다 높은 한자리에서 산다. 아버지 한나신 아들 참 거룩하신 얼이 끝없이 밑없이 그득 차이시고 고루 잠기시며 두루 옯기시어 얼얼이 절절이 사무치어 움직이시는 데에서 살고 있다. 얼김 맞어 마음 오래 열려 예어 오른 김 듣고 귀 띄며 큰 김 굴러 코 뚫리니 안으로 그뜩 산김이 4백조 살알을 꿰뚫고 모여 나린 뱃심 잘몬이 바탕힘이라. 바다보다 깊어 따알로 깊이 해달로 깊이 은하게알로 깊이 그 밖으로 왼통 한알달을 뚫어 꿰는 이런 곳에 산다. 콧김 뱃심으로 긴긴 깊힘에 잇대는 동안 옅은 낯에 불똥이 뛰고 좁은 속에 마음 좀 울리다 마니 싶으지 않은가 곺으지 않은가 울고프지 않은가 우는 이는 좋음이 있나니 저희가 마음 삭음을 받을 것이니라 먹은 마음이 삭아서 얼이 크느니 우리 마음의 한 먹음은 목숨키기 깊이 느껴 높이 살음 잘몬의 피어 오르는 피도 이때문 한알알의 나리는 빛도 이때문 우리 안에 밝은 속알이 밝아 굴러 커지는 대로 우리속은 넓어지며 우리 껍질은 얇아지리 바람타고 난 마음 그대로 온통 울리어 속알 굴려 깨 솟아 날라 오르리로다’ 유영모의 기도(氣道)는 지강지대의 기다. 놓아두면 우주에 꽉차고 움켜잡으면 가슴 세치에 들어서는 호연지기다. 이 기를 잡은 이가 기체요 이 기체는 그는 개성에도 걸어갔다 오고 인천에도 걸어갔다 왔으며 백운대에도 팔팔 날라 올라 갔다 내려왔다. 유영모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도(企圖)를 하였다.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이 모두 몸으로 드리는 산기도였다. 그는 숨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숨이라는 도장을 새겨 가지고 와서 우리들 공책에 찍어 주기도 하였다. 그 도장은 엽전만한 것으로 밖은 둥글고 가운데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은 떳떳 상(常)자의 가운데 입구(口)가 되었다. 그러니까 도장 가운데는 떳떳 상자요 상위에는 없을 무(無) 상 아래는 날 생(生), 비 왼편에는 목숨 명(命)자가 새겨져 있다. 세로로는 무상생(無常生) 가로로는 비상명(非常命)이라고 새겨진 것이다. 뜻은 생필무상(生必無常)이요 명시비상(命是非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영모의 숨에 대한 해석이다.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천명은 비상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관이다. 무상한 인생 속에서 헤매지 말고 비상한 천명 속에서 뜻을 찾으란 말이다.



유영모는 “호흡”(呼吸)이라는 그의 시에서 ‘대괴능변여상(大塊能變如常)인데 소아집착욕상(小我執着欲常)하여 봉변괴상(逢變塊商)하다 호흡대사백년구억(呼吸代謝百年九億) 흡시이생호종이사(吸始以生呼終而死) 일생일사(一生一死) 불외기식지두미야(不外氣息之頭尾也) 일흡무상(一吸無常) 황혜반호(恍兮反呼) 일호비상(一呼非常_ 홀혜복흡(惚兮復吸) 일식지간(一息之間) 가견(可見) 생지무상(生之無常) 명지비상(命之非常) 일호일흡즉생명지좌우야(一呼一吸卽生命之左右也) 호흡사생(呼吸死生) 각이극이반복(各二極而反復) 기식생명(氣息生命) 자중정이강건(自中正而剛建) 중정지위상(中正之謂常) 지상지위도(知常之謂道) 일음일양위지도(一陰一陽謂之道) 석생명인왈(釋生命印曰) 무상생(無常生) 비상명(非常命)인데 지상처중(知常處中)하면 어동어서(於東於西)에 무비생명(無非生命).’ 유영모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상처중이면 무비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어디 살든지 생명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유영모는 목숨과 말숨을 한숨으로 생각한다. 그의 “소식”이라는 시는 그가 젊었을 때 지은 것 같다. ‘소식 소식 므슨 소식(消息消息何消息) 우주 기후는 편소식(宇宙氣候平消息) 사람들은 계속 소식을 묻지만(尋消而息人消息) 깨어 일어났다 또 자고 쉬는 것이 내 소식이다(與消寢息自消息) 침식에 이상이 없어서 우리의 전통이 이어지고(寢息無恙一姑息) 부모님의 은덕으로 우리의 자손이 이어진다(父母有養多子息). 일생을 살려면 9억5천만 번의 숨을 쉬어야 하는(九億四千萬回消) 우리의 삶은 한없이 신비한 것이다(無量不可思議息). 같은 공기를 숨쉬며 모든 생명이 하나의 동포를 이루고(壹氣衆生同胞消) 수 많은 계절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길러내는 세상이다(非候一也獨胎息). 때를 끊고 기다림은 음식을 소화하고 지식을 소화시키기 위해서요 땅에 누워 깊이 쉼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다시 깨어나기 위해서이다(消遺有待食消化休息無他要氣息). 숨었다 드러났다 하는 만물에서 조화의 신의 뜻을 살펴야 하고(隱顯事物萬化消) 몸과 마음을 살리고 죽이어 자기의 영혼을 일깨워 살려야 한다(活殺心身一氣息). 언제나 안일과 이해는 죽은 소식이요(便消利見死消息) 숨이 통하고 이치에 통하고 신에게 통하는 것이 산소식이다(通息窮消活消息). 노래가 그치고 춤이 멎음은 너무도 고독한 처사이고(歌消舞息固孤單)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소일하는 것이 흥겨운 삶이다(消舞息歌眞消息). 소식 가운데 기쁜 소식은 어린 아이 낳았다는 소식이다(消息象中消息子). 하늘의 기운은 내려오고 땅의 기운은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氤氳氣壹通消息) 몸은 기운차게 올라가고 마음은 겸손하게 내려가야 한다(心可配地重 身克奉天敏).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서 유희삼매하는 것이 사는 것이요(脫則生) 사람이 구습에 짓눌리면 죽는 것이다(套故則殞). 높이 긴김 먼숨 목숨푹 깊이 핀 피 깨끗이(直前勁志勤地來 何上 毅氣冲天去). 이것이 숨의 노래다. 깊이 생각하고 높이 살아가는 숨님의 모습이다. 살게할순 숨님이고 건져줄순 예수시고 깊이 고이 앳겨 쉬며 높히 고디 사르리니 가까워 다다른 자릴 제계 든든 들고맙.


그는 기도(祈禱)를 기도(氣道)라고도 하였다. 숨님의 길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숨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과 나는 한숨으로 통하여 사는 것이다. 또 유영모는 성령을 숨님이라고 하고, 예수를 ‘이 어 이 수’라고 풀어 말했다. 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글이스트’라고 했다. 피아니스트라고 하듯이 글이스트라는 것이다. 글은 진리요 진리 자신이 글이스드다. 글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바지를 그리워하는 사랑에서 글이스트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그의 노래에서는, ‘글 그리울 밖에 이어이 예수는 숨쉬는 한 목숨 이어늘 그 어록’이라고 하였다. 유영모는 그리스도를 한없이 사모했다. “그리움”이라는 그의 노래에서는, ‘그이 그늘 그리움이 그날 끈이 우에 높고 저밤낮 맑힘이 저녁 그늘 아래 깊더니 이 누리 건네여 제 그늘에 든이라’.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록이라고 풀어쓰기도 했다. ‘때는 할우를 셰온 예순날 닷새 우리 해로 모르고모르는 가온데로 티운 우리 터전에 예수여 그리스도록 우리 올흠 아아멘.’ 또 그는 그리스도를 ‘글보리 웋에 타낳’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글은 진리요 보리도 진리다. 진리 웋에 태여나온 한송이 꽃피라는 말이다. 글보리는 갈보리라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글보리 웋에 타낳’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어떤 때는 십자가를 제사로 표현하여 가나다라마바사아 자차카타파하에서 ‘ㅏ ’음을 빼고 기니디림비시이지 치키티피히 그이가 제물로 드려짐이 보이지 않니 치키티 피어남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십자가를 다리라고 했다. 달려있다는 뜻도 있지만 하늘 나라에 건너가는 다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리라는 것이다. 다리는 참말로 목숨불 놓아 빛이어 낼 김 거룩한 드림 보시는 모습 내 나를 내 보내 나 나서서 나가는 본때 난 죄다 버리고 님께 다 바친꼴 고이다 보이신 골고다 들린 한울사리 들임이 다리 한다리를 건네다 두다리로 걷다 세다리 세운 데 달리시다 높이 놓와세운 다리 한복판에 달리신 님 받고야 주는 주금사리의 금줄을 끊고 넘쳐 흘려주고 주고주시는 주신데 주 그이신데 왼쪽엔 받을 셈으로만 여기다가 예까지 와서도 받으랴고만 하는 제바람 맞히어 죽은이오 옳은 쪽에 맞힐 셈만 보랴던 이님의 그저 그저 주고 주시는 새 셈풀이에 풀려 죽음을 깨치고 드러가니라.‘



그는 십자가를 가로가는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세로가는 삶을 들어낸 모습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한나신 아들” 믿만가려던 세상은 못난 아들의 짓이요 솟아날 문이 열리며 한나신 아들 오시니 시원타 죽어간 길에 그 사랑을 펴셨네 “십자가” 가로 가던 누리는 가로대에 못박히고 바로 솟아나갈 얼만 머리 위로 솎우치니 영원을 허전타 마라 길히 길히 삶이라 “인자를 가로보면” 생전 제 욕심만을 채움을 복으로 아는 구인생관으로 보면 미천한데서 나서 30 평생에 출세한 것이 없고 최종 3년간 광인지목을 받다가 폭사를 당한 것이 예수의 인간생이었다. 누가 돌아다나 보랴 “인자를 세로보면” 속안에는 보이지도 않고 본사람의 말도 믿지도 않겠지만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설흔살에 한울문 세울 일을 맡었다면 3년 동안 세상을 책망하는 채찍으로 묵은 누리를 다 헐어냈다면 묵은 누리의 돌바침이(안식일을 중심으로 한 고식생활로 된 세계니 무망의 인생은 고역이라 안식을 최대 이상으로 할밖에) 새로 세운 나무 기둥에(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극복사명으로 된 세계니 신망의 인생은 성역이라 영원진작을 최상 이상으로 한다) 밀쳐서 깨졌다면 그 돌바침이 깨지는 바람에 목수의 묵은 꺼풀도(한번 안 버릴 수 없는 몸) 들리워서 그가 세운 기둥 나무에 걸려 있었다면 묵은 꺼풀일망정 밀알 같이 영근 몸이라 사람이 가져다가 땅에 나려 묻었더니 묻은 지 사흘만에 새 생명의 싹이 나서 다시 살아났다면 곧이 들을까. 이것이 한 나신 아들로 33년간에 이루신 성역. 새 천지의 개벽은 이로 쫓아 시작이다. 그 뒤로 인간은 천문으로 통하게 되었다. “빋가는 소리” 땅에 붙어 편하고 해만 쬐면 따뜻한데 한울이란 허전하야 나 못 가겠다. 가라면 난 꼭 죽겠다. “곧 오는 소리” 꼭 주겠다는 네 말이 옳다. 죽을 것이 죽어야 살 것이 산다. 너( 生)로 죽어야 나(新生)로 산다. 네가 원체는 흙과 물과 바람이었지. 그러나 땅에 붙어 편하던 너희로는 죽어서 그 편함을 버리므로 살과 피로 살게 한 것이 나의 뜻이니라. 금생 너도 혈육으로는 죽어서 더 놓은 나(永)로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세상 빛은 불의 어미요 해의 자식이나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 일체에서 누구나 사(私)하는 자는 근소(近小)로 말라죽고 공(公)하는 자는 원대한 생명을 완성하는 자리니 죽고 또 죽어야 살고 또 살리라. 여기서 유영모는 십자가와 제사와 성만찬과 일식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니 사람이 이 양식을 먹은즉 영생하리라. 내가 줄 양식은 곧 내 살이니 세상생명을 위하여 주는 것이로라” 혈육이 죽어서 다시 산다는 것보다 혈육을 양식삼아 먹어서 새 생명을 이룬다는 말씀으로 풀이한다.“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며이 없나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이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릴터이니 내 살은 참 먹을 것이요 내 피는 참 마실 것이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나도 아버지로 하여 사노니 나를 먹는 사람도 이같이 나로 하여 살리라. 이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니 너희 조상이 먹어도 죽은 것 같지 않고 이 양식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장 50절) 영(永) 아닌 것이 무슨 참이랴 영 착해 않은 것이 무슨 착함이며 영 옳지 않은 것이 무슨 옳음이며 영 밝지 않은 것이 무슨 빛이며 영 살지 못하는 것이 무슨 삶이랴. 참이 있다면 영에 있고 그 참만이 선이요 삶이요 빛일 것이다. 육체는 가생(假生)이요 중간생이다. 동식물이 생물이로되 중간생으로 먹이는 양식이 됨같이 사람의 혈육도 참신과 참삶을 위하여 먹여야 하는 관계가 있으니 인생에게 사(死)란 고역(苦役)이 딸린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또 말씀이 ”살려주시는이는 신이시니 육신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나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나니라“(요 6:63) 하시고 또 ”너희가 인생의 종국을 보는 때에도 육신이 무익한 가생(假生)인 것을 아니라 하고 영 먹을 자요 먹일 자는 아닌 것으로 알아서 피와 살을 먹혀라 먹어라 하는 말을 싫어하겠느냐‘ 하시는 뜻으로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려느냐 하시니라. 예수가 12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또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하는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 아멘.’ 이것이 유영모가 한 한끼 먹는 십자가의 해석이다.



  유영모는 52세에 일식을 시작했다. 그는 요한 복음 7장 52절의 “무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 홀로 산으로 가시다”라는 말에 이끌리어 서울을 떠나 북한산으로 들어간 것이 52세다. 67세로 죽음을 각오한 그는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자각하고 “생선”이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마리면 몇토막에 한토막은 몇점인가 하루하후 점여내니 어늬덧 끝점 하루 하루는 죽는 날인데 만(萬) 날 수(壽) 만 녁이네 맛없이도 머리토막 점여내여 없이 했고 세간 한답시고 간대토막 녹였으니 님께서는 무얼 바치나 꼬리 잡고 뉘웇네. 국 거리는 못 되어도 찌개라도 하시려니 찌개감도 채 못되면 고명에는 씨울거니 성키만 하올 것이면 님계 드려 보고저 오십구빌 도라드니 큰 도막은 다 썻고 나 인간의 도마우에선 쓸데없는 찌꺽이나 님께서 별너주시면 배부르게 오천인’



  그후 유영모는 Y.M.C.A를 중심으로 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전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기쁨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것은 진리에서 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기쁨이었다. 유영모는 세상에 태어난 지 1만 8천일을 지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간증했다. ‘내게 실천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 내가 난지 18925일 되는 오늘, 내가 중생한 오늘, 증거할 말씀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이다. ‘주와 나, 주는 누구시뇨. 말씀이시다, 나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주는 한울에 가셨다 하나 말씀은 여기 계시다. 나는 죽겠으나 믿음은 살겠다.’ 유영모가 찾은 것은 말씀이요 말씀에서 솟아나는 믿힘이다. 믿음은 믿힘이다. 근본적인 영의 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힘을 얻은 것이다. 동양에서 말씀은 도(道)요 힘은 덕(德)이다. 유영모는 말씀과 믿음을 도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다. 그는 “말씀대로 믿음”이란 노내를 지었다. ‘1. 아버지께 가는데 예수 길 되시니 참말 삶에 나감은 믿음으로 얻네. 진리의 성신이 떠붓듯 오실제 죄와 의와 심판이 바로 뵈저 나네. 그 모든 걸림 헤치며 아바 찾아 열제 세상 이긴 인자로 앞을 서 주시네. 3. 일다일운 말씀이 집에 돌아갈 제 보혜사를 보내마 떠먹듯이 했네. 4. 저는 삶이 그립습니다. 몸을 잊자 낯을 벗자 마음을 비우자 즈리고 보내신 이의 뜻을 품자. 주를 따라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자 말씀을 이름으로 살자. 아멘.’



  유영모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지듯이 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90이 가깝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도 어느덧 빈탕 한데가 되었다. ‘이 빈탕 한데 우리 아바마음 아바 아바지 뜻 맨처음 이름 있 우리 아바 한알 하우님 앎 거룩한 한알 뜻뜻 야 웨여 아멘.’ 빈탕 한데는 노자의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의 인생관이다. 몸은 돌같이 단단하고 마음은 하늘처럼 텅빈 세계다. 이것이 일좌식(一座食)이다. 유영모는 강의할 때, 온돌방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시간 씩도 정좌하고 있곤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편이었다. 하늘 땅을 잇는 고디(直) 그는 나무처럼 하늘을 이고 앉아 있었다. 유영모는 ‘이마’를 임을 이고 있다고 해서 이마라고 하였다. ‘이 나가 이마 이 이마 웋에 내임 이마 이마웋 손수 나린 예수 예수 온갖수 수 이손 있손 손 맞어 드릴 올 디림 눈을 맞혀 떨칠가 고히 고히 올나갈 웋 고히 고히 우러 옐나 조히 조히 주금 너메 조히 조히 사리브름 비 바람 빌고 바람에 말슴 따름 그 밧게 손둘 너 나가 떨치면 주금에 느러질 손 손 하나 맞어 디리면 사리 불 너 부를손 그믄지 그믐 보름의 조금사리 므르믈’. 유영모는 사람을 땅을 디디고 하늘을 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수출고고영현외(首出高高領玄外) 요긴심심이황중(要緊深深理黃中)이 라고 했다. 머리는 하늘 위에 두고 마음은 진리의 가운데를 붙잡는 것, 그것이 정좌다. 빈탕한데다. 유영모는 언제나 정좌를 하였다. 그것이 가장 편한 탓이다. 그는 저녁 8시 자서 밤 12시에 깼다. 4시간이면 수면은 충분했다. 그만큼 그는 깊은 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잠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인생의 근본문제도 풀었다. 잠 속에서 지은 시를 읊기도 하였다. 잠이야말로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때였다. 그에게 잠은 진짜 기도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잠을 일언(一言)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다. 그는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정좌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대로 그는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Y.M.C.A에 들고 나가 그것을 몇 시간이고 풀이를 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20리 길을 걸어와서 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또 20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Y.M.C.A 간사 가운데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동완 간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Y.M.C.A에서 강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동완이 간 후에 그는 Y에서 쫓겨났다. 그리고는 이 집 저 집 헤메고 다녔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람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하나님이 계tu 내게 사람으로 내샤 아들 삼으시다(一在在人生子) 그 일르시믄 때를 있으미오 그 하이시믄 한 대를 느리미네 아비뜻 마음에 소리니난 뜻참 보이오 속알이 말씀으로 품기우니 참 말슴스매 된 길이 번듯하여이다’ 유영모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있다시온 옛다시간 있시 없을 나 없에 제생각 제불꽃에 살아지야 말씀 있다시옴 옛다시감 있시 없음 없음에 계심. 그는 언제나 “한 말씀”을 들고 나왔다. 한 말씀만 나는 남게 그리스돌 걸일 뉘나 홀린데서 벗어나서 뚯렸이 나슬 말씀 예수 뚜렸이 하나님 보시고 맨첨부터 내 모신 아버지라 부르심 나도 이예 숨 쉬므로 뚜렸이 아달로 사람나이 단 말씀. 이것이 유영모의 예수다. 살게 할 순 숨님이고 건져줄순 예수시고 깊이 고이 앴겨 쉬면 높이 고디 사리리리 가까워 다다른 자릴 제게 든든 들고맙. 유영모는 예수를 참사는 수는 사는힘 줌 한토막 주고 끝막은 금 주금 이김에 삼킨바 된 참사는 수는 사는힘줌. 유영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사는 힘 주는 참사는 수가 예수다 아멘. 이 한 빛에 바다가온 맑은 삶이 불결에 피는 꽃피로 참힘 참빛이 되며 타올은 거룩한 숨님 질까 불똥이나마 이것이 유영모가 본 십자가다. 유영모는 67세에 죽기로 날을 잡고 요한복음 17장을 수없이 외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럿사오니 아달을 뚜렷하게 하시 아달로 아버지를 뚯려시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살팽이에게 늘 삶을 주게 하시려고 온씨알을 잇끄는 힘을 아들에게 주셧슴이로소이다. 늘삶은 곧 오직 하나신 한을님과 그의 보내시는 그리고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일우어 아바지를 이 누리에서 뚜렷하게 하얏사오니 아바지여 맨첨부터 내가 아바지와 함께 가졌던 뚜렷함으로써 이제도 아바지와 함께 나를 뚜려시 하옵소서. 누리가 온대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바지의 이름을 나타내엿나이다. 저희는 아바지 것이엇는데 내게 주셧스며 저희는 아바지 말슴을 지니엇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야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누리를 위함이 아니오 내게 주신 이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바지의 것이로소이다. 내것은 다 아바지의 것이요 아바지의 것은 내 것이온 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뚜렷함을 바덧나이다. 이제 내가 아바지계로 가오니 내가 누리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그득히 가지게 하랴 함이니이다. 내가 아바지 말슴을 저희게 주엇사오매 누리가 저희를 미워하얏사오니 이는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가티 저희도 누리에 붙지 아니함을 탓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누리에서 다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오 오직 못된 데 빠지지 않게 돌보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가티 저희도 붙지 아니하얏삽나이다. 저희를 참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셔. 아바지 말슴은 참이니이다. 아바지계서 나를 누리에 보내신 것가티 나도 저희를 누리에 보내였고 또 저희를 위하야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참으로 거룩함을 얻게 하랴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오 또 저희 말로 인하야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바지계서 내 안에 내가 아바지 안에 잇는 것가티 저희도 다 하나이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누리는 아바지계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셔. 내게 주신 뚜렷함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아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이 된 것가티 저희도 하나이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유영모는 언제나 이렇게 맺었다. 한 말슴만 나는 남계 그리스도를 걸일. 뉘나 홀린 데서 벗어나서 뚜려시 나슬 말슴 예수 뚜렷이 한웋님 보시고 맨첨부터 내모신 아바지라 부르심 나도 이에 숨쉬므로 뚜려시 아들로 사람 나이단 말슴, 이것이 유영모의 기도요 말슴이요 삶이다. 한 말슴만 나는 남계 그리스도를 걸일. 뉘나 홀린 데서 벗어나서 뚜려시 나슬 말슴 예수 뚜렷이 한웋님 보시고 맨첨부터 내모신 아바지라 부르심 나도 이에 숨쉬므로 뚜려시 아들로 사람 나이단 말슴, 이것이 유영모의 기도요 말슴이요 삶이다. 한 말슴만 나는 남계 그리스도를 걸일. 이것이 유영모의 우주관이요 십자가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일식이다. 일식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뉘나 흘린데서 버서나서 뚜려시 나슬 말슴 이것이 유영모의 세계관이요 부활이며 읷을 실천하는 것이 일언이며 일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다. 예수 뚜려시 한웋님 보시고 맨첨무터 내모신 아바지라 부르심. 이것이 유영모의 인생관이며 승천이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일좌요 성신에 대한 사랑이다. 나도 이에 숨쉬므로 뚜려시 아들로 사람나이단 말슴. 이것이 유영모의 신관이며 재림이요,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일언이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유영모의 지혜다.



  유영모의 신앙은 한마디로 ‘아바지 아들’신앙디다. 모든 것의 맨꼭데기가 있으니 한웋 님 아바지시오 한 대온 속이 있으니 나 아들이니이다. 하나님은 빈탕 나는 한대. 그래서 부자유친을 빈탕한대라 하였다. 바탕을 트고 마틈을 마침이 사람의 길 아름답게 마친살림 힘차게 키언얼 한 대속나(一遠大中心我) 이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고 맛으로 맞인 껩데기도 맟임이 사람 노릇. 유영모는 자신고집충충신(自信固執充忠臣) 유신첨앙영학사(唯信瞻仰永學士) 주심동의성지정(主心同意聖旨精) 부자유친영인자(父子有親灵人子)로 살았다. 아바디 계시샤 우린아들 우리 그리움을 솟난 월하늘나라의 씨아들로 거록히. 그는 한국의 사명을 부자유친하처재(父子有親何處在) 대동천고개천국(大同千古開天國)이라 하였다. 우리 아바 한을님 계시골 께 눈마자 좋말들어 옳 지 내봐맘 맞습니다. 나서봐 좋 지내봐 좋 도라가 보곗스니 좋 아므렴 좋고 좋을시 힘입히심 고맙삽. 유영모는 아바지 그리움으로 살았다. 그는 아바지를 그리고 또 그렸다. 아바지 그림이 글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글이 아바지 그리워 하는 글이다. “한아홉” 한을님 하옵신 참한 아홉는 게 뜻을 받할 받할뜻 앞으로 할 일 더 잘 할람 뿐이지요 그러니 한아홉만이 가온 인가 하노라. 그는 십자가를 가온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 가온이요 동과 서의 가온이다. 그는 열(10)을 한아홉이라고 했다. 하나와 아홉이 합쳐서 열이라는 듯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십자가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십자가요 부자유친이 십자가다. 그의 글은 글이라기 보다는 그림이다. 속알 말먐, 데뎔로 온갖 우리 낮파닥진 업서진 대로 뵘같치 님의 빛월 빛웰빛월 더할나위 업슬 빛속이 곧 님 거륵한 압ㅎ신 속알말먐. 그리고는 알게하기 위하여 주를 달았다. 所信之靈主也 主之靈所在 人得自由 我衆面不蒙岾 如由鏡得 觀主榮 亦必代爲此像 由榮而愈榮 卽由主之靈而化也.



  유영모의 글은 글이 아니고 그리움이다. “모름딕길 꼭 미듬” 야하웨 그리워 그립사와 기리우리이다. 하야우에 하이아 하야 해 우리 힘써해서 힘입히 속에들 나라 데께돌아 모심만! “님뵙잔 계가온” 님 그린 기 나서기는 님닐 길가님 보입잠 님은 얼님이시오니 얼골속깊 드러서야 으이아 아바지 외침 자리인가 하노라. 유영모는 글만 그림이 아니라 이 우주와 인생이 모두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나간 같 여기서” 하늘(宇宙)이란 조희뭉치 혜치느니 얇은 꺼풀 꺼풀마다 그린 그림 긋금 글뜻 므름 브름프름 맛 맞 맟이려는 아조 작은 있 나 있어 나 스다 있나의 작은 얼골도 조고만 참 조고만 조희긋 많은 남다 같은 있 나들이 이 조희 긋의 보이는 뜻을 알랴고 보고 또 본다. 읽으러 읽으랴다 못 읽고들 뜻 못 푼채 도라가며 므슨 맛이나 볼가 하는지 이 참으로 웃은 일이옵. 모두가 볼라다 볼꼴 없는 얼골이며 알기 어려운 글 때로는 월 조차 가춘 작은 조희긋 저절로 나타난 한 빛깔 몬꼴이란 한 조각 한 조각 있나 이눈금으로 보라고 드려지는 조희글월이여 누가 조희글시를 들코 드러가서 한 없나 계 뵈올 뜻을 먹은 마음으로 살가기 어데 갔나 갖나 간나 나간 같 여기서 이리하여 유영모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한 아달” 우리나라 하나나 나나 우리 하나 모자라 나와 나라 드러 계에 나나 드나 가온이 도라가온. 빈탕한대로 다 자라난 한 아 유영모의 아바지 신앙은 가슴에 사무친 신앙이다. 신앙이라기 보다는 사랑이요, 사랑이라기 보다는 사람이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삶이다. 그는 빈탕 한대를 사랑하고 빈탕한대를 산 사람이다. 빈탕한대란 일좌식이요, 없이 계신 하나님이다. 없이 계신다는 말은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영적존재란 살아계신 실재를 말한다. 없이 계시다는 말은 아무 것에도 걸릴 것이 없는 자유자재라는 말이다. 동양사람들은 자유를 무(無)로 표시한다. 무위니 무주니, 무욕이니, 무지니, 인간적인 언어를 넘어선 자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표시하여 무라고 한다.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으리만큼 하나님은 크시고 빛나시고 살아계신 분이다. 동양에서 무는 깨쳐난다는 뜻이다. 동양의 생각은 깨쳐나는 생각이다. 깨쳐나야 아바디요, 깨쳐나지 못하면 어머니다. 유영모는 어머니 종교를 싫어했다. 기독교는 아버지 종교라서 좋아했다. 어머니 종교란 땅에 붙은 종교다. 세상에서 오래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이 어머니 종교다. 유영모는 깨여 솟아 오르는 종교를 아버지 종교라 했다. 아바 아바지는 깨여난다는 말이다. “아바디” 깨쳐내니 깨다름으로 솟나 올홀 한을 하 그 거룩히 그리우심 생각 검 얼속뜻 맘시 예수언 부르신대로 우리 뫼신 아바디 “아바 아바디” 우리 아바 아바이여 알 아바디 아바 우리 이제 생각 아바디 생각 아바디 생각 이제. 이제들 도라가옵기. 제계 뫃여 뫼시렴 “없이 계신 아바” 하나 알아 있다 간데 한일 알 한 아이다. 났다들은 세상 없나 없 한아 암 가온 아들이 있 없이 없이 계신대 아바참 찾 도라듬 도모지 이제게 뭣에 쓸라고 뭘 할라 골가 온누리 사람 다 잘 살게 할라는 노릇이대 뉘다 잘 살아 죽음은 또 뭘 한단 말일가 모르지 또 뭘 할꼬 다시 뭣에 쓸꼬 모르지 마지막 뉘 마침긋 뭐랄지는 아무도 몰 이제게 없 한아 라믄 다니랄 수 없어라 있이 없을 없샐 수는 도모지들 없을거니 부스러진 것으로서 왼통을란 없앨 수 없이저게 없 한아라믄 아니랄 수 없어라.



  유영모는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 하고 소리내서 불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라.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뫼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그는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 뿐이 아니다. 그 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그는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그는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그의 실천이다. 그는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의 부음으로 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그것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이다. 그것은 윤리의 실천도 아니고 초월의 방법도 아니다. 하늘을 들고 있는 천체요, 궤도요, 사랑인 것 뿐이다. 그것은 은례요, 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에 나온 말씀이요, 하늘의 목숨이요, 아버지의 길이다. 여기에 유영모의 기독교가 갖는 특색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기에 동양적인 특색을 갖는다. 도덕이란 도의 실천이 아니고 도의 체득이다. 도에서 나오는 힘으로 높이 날아가는 것이다. 마치 새가 하늘을 날 듯이 나는 것 뿐이다.그것은 영체요 기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생님 기체후라는 말을 잘 쓴다. 기체란 선생님의 모습이다. 선생이란 생을 초월한 존재다. 생만 초월한 것이 아니라 사(死)도 초월한 것이다. 십자가는 생의 초월이요, 부활은 사의 초월이다. 도는 생사를 초월한 것이다.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다.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기체다. 기체에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이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한다고 한다. 진리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선생님이다. 유영모는 선생이었다.



  그의 한마디는 아버지다.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기체다. “뫼신사리” 김김 내림받아 말숨살이 참말로 숴 고맙. 머리웋님 믿자리로 더 위로 맘에 한님 예예. 우리로 서니 도라가온 계실계. 유영모는 하나님 계신 데를 게라고 하였다. 계는 빈탕한대다. 빈탕한대로 깨쳐 솟구쳐 나가지 않고는 못견디는 사람의 본성. 그것을 바탈(性)이라고 한다. 유영모는 바탈대로 산 사람이었다. 속은 넓어지며 누리 꺼플은 얇아지니 바탈타고 난 마음 그대로 왼통 울려 속알 굴려 깨쳐 솟아나라 오르리로다. 병아리가 깨나듯, 새가 날아가듯 날라(飛) 하늘나라(國)를 사는 것이 선생님의 기체후의 삶이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유영모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에게는 장래가 있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기재가 있었을 뿐이다. 그의 하루 하루는 현재가 아니었다. 현존이었다. 있다가 없어지는 현재가 아니라 없다가 있어지는 현존이다. 그는 빈탕한대를 산 사람이었다. 빈탕한대는 깨여나는 삶이다. 깨어나서 자유자래로 날아 다니는 삶이다. 유영모는 아바디를 믿었고 아달을 믿었다. “염실존”(念實存) 지공무아지성지(至空無我至誠地) 의식정심복명천(意識正心復命天) 대공중화사무사(大公中和思無邪) 심존정음성신현(心存正音聖神現) “신실재(信實在)” 신상고성신계천(信上古聖神繼天) 염지금인자독생(念至今人子獨生) 칠십이후이십사절(七十二候二十四節) 일중솔성능인성(日重率性能仁成). 그는 이 뜻을 실어 주기도문을 자기에게 알맞게 맞춰 기도렸다.



 다시 한번 그의 주기도문을 적어 본다.


“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살림에서 벗어나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이 없이 다만 주를 따라 웋으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사람이 서로 널리 생각할 수 있게 하옵시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91. 3. 9 흥사단 강연)





  參考, 「씨-多夕 柳永模의 生涯와 思想」,


        朴永浩, 弘益   刊


        사색 10 「제소리」, 김홍호, 풍만출판사


        「多夕日誌」3권 (김홍호 影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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