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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07-03-06 오후 09:13:23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94680.html

 

다석 유영모, 한국 기독교 일깨운 ‘지도자들의 스승’
한겨레 조연현 기자
» 다석 유영모의 제자인 김흥호 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가 스승의 수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서 ⑦다석 유영모

노자·불경 통달 뒤 더 큰 신앙
40년간 하루 한끼만 먹는 고행
함석헌·이현필·김흥호 등 제자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다석 유영모(1890~1981·왼쪽 사진)는 손꼽히는 ‘기인’이다. 160㎝의 단구의 몸으로 서울 구기동에서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던 다석은 쉰둘이 되자 간디처럼 아내와 해혼(부부 성관계를 그만둠)을 선언한 뒤 늘 무릎을 꿇고 앉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널빤지에서 잠을 자면서 철저히 고행했다.

 

4일 다석의 제자 김흥호(88·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목사를 찾아 이화여대로 갔다. ‘기독교 도인’으로 꼽히는 김 목사는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서울 신촌 이화여대 학내 교회에서 성경 강의를 하고 있다. 스물아홉에 종로의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다석의 강의를 듣고 그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지금까지 불경, 노자 등을 강의했고, 45년 넘게 하루 한 끼만 먹는다. 그는 “30살을 넘길 수 없다고 할 만큼 병약하던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죽지 않고 병 없이 산 것은 일일 일식 덕분”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의 스승 다석은 서울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웠다. 다석이 처음 교회에 나간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다석은 정식 학교로는 요즘 중학교 2학년밖에 마치지 않았지만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데 일찍부터 천재적이었다. 짧은 ‘가방 끈’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스무 살부터 2년간 교사를 했던 그를 10년 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이 교장으로 초빙한 것도 다석의 탁월성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향교를 교실로 사용했던 오산학교는 다석이 스물에 부임하기 전까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교적 학풍이었다. 그런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씨앗을 심은 이가 바로 다석이었다. 약관 다석의 기독교 강의를 40대의 남강이 경청했고, 마침내 오산학교를 기독교 사학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때까지 다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보혈로써 속죄 받는다는 십자가 신앙’에 충실했다. 그러나 스물둘에 두살 아래 동생 영묵이 죽고, 도쿄에서 1년 동안 유학하는 사이 다양한 학문 세계를 접하고 강연을 들으면서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재 신채호의 권유로 노자와 불경을 섭렵했고, 춘원 이광수가 가져다준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동서양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로 꼽히던 다석은 2000년 동안 형성된 교리와 신학은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조차 벗어버린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때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교의신학을 벗고 순수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로 귀환하고자 했다.

 

동서양의 경전을 꿰뚫어보며 수도를 쉬지 않은 다석은 마침내 쉰둘에 육체와 욕망에 붙잡혀 살아온 제나(몸과 마음을 나로 믿는 개체)가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찬 허공과 하나님의 참 얼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 뒤 다석은 예수를 ‘참 하나님’이 아니라 ‘참 사람’으로 보았다. 예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 참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얼의 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사람이 이를 깨달으면 이 세상 그대로가 하늘나라이며, 몸이 죽고 안 죽고에 상관 없이 영생한다는 것이었다.

 

다석은 스님들보다 불경에 달통하고, 도교인보다 노자 장자에 도통했지만, 개종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모두 회통한 뒤에도 다석은 예수를 자신이 본받을 궁극의 선생이자 가장 큰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세속적 성공과 욕망을 실현하려는 세속심을 부추기고 야합하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라 죽어버린 성령을 깨워 참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호랑이였다. 그가 3·1운동 기독교 대표 남강과 오산학교를 깨우지 않았다면, 불과 인구 1% 정도의 비율에 불과하던 ‘외래 종교’ 기독(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단시일에 ‘한국인의 종교’가 되기는 어려웠다. 또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일제 땐 신사참배와 친일로 민족을 배신하고, 광복 뒤엔 친독재로 민초를 배신했을 때 그가 길러낸 ‘민주화의 대부’ 함석헌 등이 있어서 한국 기독교는 그나마 시대의 역사적 소명에 가장 잘 부응한 종교로 떳떳해졌다. 광주의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동광원 수도자들은 매년 며칠씩 다석을 초청한 사경회에서 집중적으로 설교를 들었다. 동광원은 잃어버린 한국 기독교의 영성을 회복시켜줄 등불로 주목받고 있다.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 민중의 정신을 깨운 김교신과 유달영, 박영호, 주규식, 안병무, 서영훈 등도 그를 받들었다. 다석은 한국인과 ‘한국 기독교’를 깨운 최대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의 스승’이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일일 일식을 하고, 널빤지에서 잔 것은 절대자를 직접 체험한 쉰두 살부터였다”며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대로’ 혹은 ‘깨달은 그대로’ 살아가는 ‘정행’(바른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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