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7/10/24 18:02:4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2418024584210.htm
교회·교리에 얽매인 신학의 족쇄를 풀다 [우리 시대의 명저 50] <42>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말한다' "교회는 왜 민중의 신음에 침묵하는가" 한국기독교의 맹목성·폐쇄성 질타 평신도 중심 운동·서구화 극복 등 주장…10년전 '광야의 외침' 지금도 유효해 | ||||||||||||||||||||||||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전제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를 배제한다. 미국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모습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예수의 사건과 성서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1993년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저같은 선언적 명제를 먼저 밝히고 <민중신학을 말한다>의 길을 열어갔다. 그 해, 1월 한국 기독교는 타성을 깨는 그 천둥 소리를 알아 들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는 이 시대 일부 한국 기독교는 그 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을까.
험난한 시대에 예수의 도래를 외쳤던 세례 요한처럼, 안병무는 광야에서 외쳤다. 맹목적 확장주의와 폐쇄성으로 한국 기독교가 따가운 비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지금, 그의 통찰은 더 매섭다. "나는 1970년 11월 13일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한 22세의 그리스도인 전태일을 생각했습니다."(400쪽) 내 살과 피를 먹으라던 예수의 절규가 한 젊은이의 산 제사로 되살아 났음을 그는 책의 말미에서 말했다. 한국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종교가 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기독교의 역사를 직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 즉 성서론 그리스도론 신론 교회론 죄론 성령론 하느님의 나라론 등 7가지는 성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권 수호를 위한 싸움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류인 헤브라이즘과는 상관없는, 헬레니즘의 소산. 로마의 문화권에 대해 자기 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적 사고의 틀에 자신을 짜맞춘 것이다."
1996년 그는 74세로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는 '사건'으로서, 현재까지 살아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본래 한국에 없었던 서구의 개인주의가 침투, '우리'는 없어졌다"며 "예수 사건은 민중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그는 회고했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 올 때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왔어요. 노동자 한 사람이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무거워서 허리를 꾸부정하게 하고 걸어가는데, 배경에는 시커먼 도시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고, 그 십자가 위에서 신부가 앉아서 졸고 있고, 배가 나온 사장도 앉아 있고, 학자가 책을 읽고 있고… 그들이, 모두 노동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올라앉아 있어요." 독일 유학중 내내 공부방에 걸어뒀다는 그림이다. 그의 민중 의식은 그렇게 태동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민중'이란 말을 즐겨 썼다.
간도땅에서 살았던 소년 안병무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같은 단어를 먹고 자랐다. 소학교 4학년때 교장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경험은 일종의 원체험이었던 셈이다.
그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준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는 구약 속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을 한민족의 수난과 동일시했다. 독립군계, 좌익계, 미션계 학교 중 미션계인 은진중을 택했다. 윤동주, 강원룡, 문동환 등 훗날 한국에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인물들과 함께 수학한 곳이다. 당시 야학과 밀접했던 교회는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다.
안병무에게 간도는 예수 당시의 갈릴레아 같은 이방인의 땅, 민중의 현장이었다 그가 '아무래도 정신 차려야겠다. 현재의 교회로는 안 되겠다. 뭔가 새로운 정신의 모태가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시작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국전쟁 때 피난간 전주에서였다. 12호까지 만들었던 잡지 <야성(野聲)>에서 그는 "예수 팔아 밥 먹는 것은 옳지 않다. 직업적인 목사 두지 말고 평신도 교회를 하자." 바로 향린교회의 이념이다. 이미 독일 유학시절 그가 <사상계>에 투고한 글은 "왜 내가 서구 사람의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을 하는가" 하는 반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성의 대가는 엄혹했다.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 1969년 삼선개헌 반대 백만인 서명 운동에 이어 1972년에는 민중을 신학의 테마로 글을 썼다가 투옥됐다. "나는 성서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등 종교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 사건들은 단절된 독립 사건들이 아니라, 2,000년 전의 예수 사건과 맥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그의 눈에 한국은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 즉 예수 사건의 현장이었다.
그것은 출발점이었다. 민중을 바로 말하기만 한다면 민족ㆍ민주도 다 포괄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신학은 '삼민 신학'을 신학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울뿐인 민족주의로 정권이 유지돼온 현실에 신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첫번째 설립 목적은 '분단 과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였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눌리고 빼앗긴 민중의 힘을 살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민중의 힘이 되살아 나서, 즉 남북 민중의 힘이 하나로 규합돼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이것 아니고서는 민족 통일ㆍ민족 해방의 길이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민중 신학이란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성립된 언어인 것이다.
그는 "내가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것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속속들이 서구화된 것,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썼다. 신학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에서 해방돼 평신도들의 손에 주어지고 그들 나날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목회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살아 움직이는 신학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현장,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그는 항상 감사했다. "어떻게 하면 이 분단 상황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민중 신학이 나온 것이지요." 그것은 동시에 한국의 교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책은 " '오직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성서의 권위를 빌려 어떤 특정한 교리를 정당화할 수 있게 성서를 한갓 편리한 도구로 이용한다"며 여러 종파가 난립 가능성을 지적한다. "놀랍게도 성서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성서는 버림받고 무시당한다"는 그의 비판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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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10/24 18: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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