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오식(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
위에서 불교의 심식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설명을 더 하지 않아도 우리 인간의 심성을 낱낱이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유식학의 심식사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심식사상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심성을 8가지로 분류하여 그 성질과 작용을 논하고 또 선과 악을
논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마음의 의지처인 육체의 기능도 함께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구성을 면밀히
관찰 해 볼 때 아무리 마음이 인간의 주체가 된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도움없는 마음은 그 역할을 못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자성과 삶을 설명하면서도 마음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육체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육체적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육체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없고, 정신이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원만한 삶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 속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육체와 정신의 인연관계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유식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또 우리 인간의 삶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하여 그 인식여하에 따라 고통과 안락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그
인식의 대상을 철저하게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적인 세간(世間)에 의지하여 살고있기 때문에 역시 그
물질계는 우리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해명한다. 그것은 물질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물질계와 정신계가 서로 마찰없이 조화를 이루는 화합의 경지에 도달토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처하고 있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적나라하게 파악하고 이해시켜 진정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시켜 주자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의 망심(妄心)에 해당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의식, 말나식, 아라야식 등 팔식을 가지고 차례로 그 성질과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편의상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5식(五識)을 먼저 설명해 나갈까 한다.
1.
전오식(前五識)과 오경(五境)
위의 제목에서 전오식이라고 명제를 붙인 것은 유식학을 설명할 때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팔식의 순으로 정하여 설명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제 6의식 이전의 오식을 함께 설명할 때의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들
오식을 함께 자주 설명하게 되는 동기는 이들 식의 성질이 거의 같고 또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하는 작용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오식의 성질과 역할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식에 대한 개념부터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식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는 뜻이 있는데 이는 요즘의 인식이라는 말과 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식은 마음과 물질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습에 얽매이며 망각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식(識)이라고 할
때 항상 상대를 요하는 인식주(認識主)이며 그 상대를 망각함과 더불어 선(善), 악(惡) 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 등 세 가지
성질(三性)로 요별하여 알아내는 기능을 가진다고 정의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나쁘게 느끼면
괴로움(苦), 좋게 느끼면 즐거움(樂)이 있게 된다. 그리고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게 느끼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捨) 등으로 받아들이는
주체가 곳 식체(識體)이다.
이상과 같이 심식은 항상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식학에서 범부의
심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 심식은 팔식 하나하나가 인식의 대상이 다르며 작용도 다르며 의지하는 의지처도 다르다. 그러나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들
심식은 진리를 망각하여 번뇌를 야기하고 그 번뇌로 말미암아 본래의 식성(識性)에서 발생하는 지혜로움이 장애를 받기 때문에 절대의 진리인
진여성(眞如性)과 무아(無我)의 본성을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작동하는 심식은 번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이고 상대성이 아니지만
무위(無爲)의 진리에 배반하여 상대성을 야기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심식은 일시적으로 온갖 번뇌를 띄면서 상대적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이들 번뇌가 정화되면 식의본성인 진여(眞如)와지혜가 다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 때는 온갖 사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절대의 경지에서 관찰하며 동시에 그 사물의 겉모습이 아닌 실상과 본성을 한번에 알 수 있게 되는 경지를 열게 된다. 이를 증득(證得)이라 하고
또 식(識)이라는 말 대신에 지혜(智慧)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상을 종합하여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번뇌로운 심식을 전화하여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의 핵심사상은 망식(妄識)을 정화하여 지혜를 증득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본성은 본래 모든 진리와 통하며 또 그 실상을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망상을 야기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절대의 경지에 눈이 어두워 상대적으로 보아 온 습성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에 설명되는 심식은 곧 범부의 입장인 번뇌심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1) 안식(眼識)과
색경(色境)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전오식의 성질을 차례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먼저 오식 가운데
안식(眼識)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식은 우리 마음 가운데 눈으로 보는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안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별 또는 분별의
작용을 가지고 인식의 대상을 요별하게 된다.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빛깔(色)이다. 이 빛깔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나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 네 가지 현색(四顯色)을 말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빛깔(顯色)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길고(長). 짧고(短). 모나고(方). 둥글고(圓). 높고(高). 낮고(下). 바르고(正).
바르지 못한 것(不正) 등 사쌍 팔종(四雙 八種)의 모양다리를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형색(形色)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안식을 통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여러 가지로 구별하여 보게 되는데 그 인식의 대상을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
이는 곧 요별의 대상, 즉 인식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인 안식과 안식의 대상인 소연경의 관계를 보면 인식의 주체인 안식이 능히
그 대상을 인식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때의 안식은 능연식(能緣識)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 능동적으로 대상에 대하여 선과 악 등의
성질을 구별하는 입장에 있고, 그 대상은 인식되어지는 입장에 있으며 동시에 항상 식에 의하여 그 가치가 규정되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다.
능연과 소연은 서로 인연을 맺는다는 뜻과 통하며 인연을 맺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능동적으로 사물을 좌우하는 능동자임을 알 수 있고 또 사물 등 물질계는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능연과 소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인식의 내용을 확실히 해주는 논리인 것이다.
다음으로 안식은
어디에 의지하여 활동하게 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는 무조건 마음 또는 식 등으로 말할 뿐 그 식의 의지처(依止處)를 모르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식관이 흐려지고 막연하여 확신을 갖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안식 등 여러 심식의 의지처를
확실히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안식의 의지처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안식은 안근(眼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안근은 우리의 육체 위에 있는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우리의 눈, 즉 육안(肉眼)을 의미한다. 위에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마음은 육체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는 것이며, 육체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으로 있는 한 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의 일부인
안근(眼根)은 안식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발식취경(發識取境)의 도움을 준다. 즉 안식을 발생시켜 인식의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을
인식케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取)라는 말은 범부들이 모든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고 취착(取着)하는 번뇌를 야기한다는 뜻에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즉시 집착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안식을 발생시켜
현색(顯色)과 형색(形色) 등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케 하는 안근은 부진근(扶塵根)과 승의근(勝義根)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이들 두 가지
근(根)은 우리 육체의 기능과 내용을 대변하고 있으며 또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먼저 부진근은 순수한 물질적인 육체를 말한다. 물질은 견고한
성질을 의미하는 지성(地性)과 물 기운을 말하는 수성(水性), 그리고 더운 기운과 불기운을 뜻하는 화성(火性)과 물질의 생동력을 의미하는
풍성(風性) 등의 사대성(四大性)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물질관이다. 그리하여 이들 사대성은 인연이 화합함에 따라 극미(極微)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물질을 성립시키는 본질이 되는데 우리 육체도 물질인 이상 사대성의 인연으로 조립된 것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승의근(勝義根)은 육체내에 극미와 같은 미세한 물, 순수한 육체인 부진근 속에서 본질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고 안식(眼識) 등 심식으로 하여금 발식취경케 하는 승묘(勝妙)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진근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의 부분을 의미하며 승의근은 육안의 대상이 아니며 불보살의 지혜로서만 알 수 있는 극미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승의근은 육체내의 보이지
않는 경지를 이루면서 전체의 육체를 생동케 하는 중요한 부분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안근은 육체의 일부분이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장엄(莊嚴)해 주고 동시에 승의근을 토대로 안식의 직접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며 또한 식을 활동케 한다. 그러므로 근(根)에는 의지처(依止處),
도양(導養), 장엄 등의 뜻이 있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안근은 안식과 불가분리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식의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왜냐하면 안식은 이 안근에 의지하여야만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등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이식(耳識)과 성경(聲境)
안식은 위에서 대략 설명한 바와 같고 다음은
이식(耳識) 등 나머지 식의 성질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식(耳識)은 육체의 기관인 이근(耳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 의하여 이식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그 활동하는 범위와 내용은 앞에 설명한 안식과 거의 같다. 다만 인식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식은 글자 그대로 귀로
들어서 아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식의 대상은 소리일 뿐이다. 소리를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성경(聲境)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식의 경계 즉
인식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소리와 감정이
없는 목석의 소리 등을 통하여 즐거운 소리와 즐겁지 못한 소리 등 여러 가지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소리에 대하여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師)는 등 그 내용을 구별하는 것은 이식이므로 이식은 능히 반연하는 능연(能緣)의 입장에 있고, 반대로
소리들은 인식에 의하여 반연되어지는 대상이며 동시에 수동적인 입장에 있으므로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 그밖에 이식의 성질이 선성(善性),
악성(惡性),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無記性) 등 삼성(三性)에 통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안식과 동일하다.
3) 비식(鼻識)과 향경(香境)
다음 비식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코를 통하여 냄새를 맡아서 내용을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 비식은 육체의 구조인 코와 불가분리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의하여 육체의
구조적인 코를 비근(鼻根)이라 하고 동시에 코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비식(鼻識)이라고 이름한다. 비식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냄새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활동을 하는데 그 대상의 이름을 향경(香境)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향(香)이라는 말은 향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냄새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냄새가 식별되는 내용은 여러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나 이를 종합하여 대체로
악향(惡香) 또는 호향(好香) 등으로 구별한다. 이들 악향과 호향에는 그 냄새의 범위가 육체의 구조인 비근(鼻根)과 균등하게 나타난 냄새가
있으면 이를 등향(等香)이라 한다. 그리고 그 냄새가 좋은 냄새(好香)이거나 나쁜 냄새(惡香)이거나 비근보다 더욱 많은 양을 대할 때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부등향(不等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의 대상인 냄새의 양이 비식의 의지처인 비근보다 작을 때도 있고 많을 때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비근과 동등한 양이 아니라는 뜻에서 부등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설식(설식)과 미경(味境)
다음에는 설식(舌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설식은 혀로 음식 등 입으로 들어오는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말한다. 동시에 식의 이름도 설근(舌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서 정해진
이름이다. 그리고 설식은 맛을 알고 뜨겁고 찬 것을 구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도 미경(味境)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달고. 짜고.
맵고. 시고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맛을 미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설식은 미경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활동을 하며 그 대상이 마음에 맞고
안 맞고에 따라 우리 인간의 고(苦)와 낙(樂)을 가져다주는 마음인 것이다.
5) 신식(身識)과 촉경(觸境)
다음으로 신식(身識)은 우리 몸 전체에 촉감을 느낄
수 있고 또 몸에 닿는 것은 다 알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눈. 귀. 코. 입 등 네 가지 인식기관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몸을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인데 그 의지처를 신근(身根)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식은 이 신근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시에 신근은 항상 신식의 의지처이면서 신식을 도와서 원만히 활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신식은 몸을 통하여
몸이 닿는 곳만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식의 대상을 촉경(觸境)이라고 이름한다. 촉경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지성(地性), 수성(水性),
화성(火性), 풍성(風性) 등 네 가지 성질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계를 포함하여 촉감의 대상을 총망라한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계는 물론 육안으로 잘 볼 수 없는 공기도 몸에 와 닿는 것이므로 촉경에 속한다.
이와 같이 육안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물체가 육체에 닿는 것은 모두 촉감의 대상이 되므로 촉경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무덥거나 추운 것,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 무겁거나 가벼운 것, 뜨겁거나 찬 것,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나는 것 등은 모두 촉경에 해당한다.
이상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들 오식(五識)은 육체상의 조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활동하며 그 의지처(根)이 다르고 인식의 대상(境)이 다를 뿐 여타의 성질은 거의 같다. 이 오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들로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능히 체험할 수 있는 정신영역이다. 그러나 이들 오식은 현량(現量)과 같은 식별의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 대상의 오묘한 내용까지를 잘 관찰하여 선악의 구별과 가치를 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제6의식이
가담하여야 만이 대상의 내용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오식(五識)과 의식(意識)과의 관계와 의식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제6의식(第六意識)과 의근(意根)
제6의식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할 때 앞에서 살펴본 안식 등 전오식 다음에 설명하게 되고 또
전오식 다음의 제6위에서 설명하는 식이라는 뜻이다. 이 의식은 전오식에 의하여 식별되는 대상을 다시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 마음을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심식은 본래 전오식과 함께 단순히 식(識)이라고만 호칭되었던 것을 이 식의 의지처인 근(根)의 이름을
따서 식명을 붙인다는 원칙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의식(意識)과 의근(意根)
본래 의식(意識)이라는 명칭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도 이미 써 왔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대승불교와 크게 다르다. 먼저 소승불교의 경우를 보면 대승불교와 같이 의식이
의지하는 소의근(所依根)의 이름을 따서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의식이 의지한다는 의근(意根)의 사상에 있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와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
그 내용을 보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은 안근 등과 같이 육체의 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인 것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근을 일명 심근(心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심근에 해당하는 의근은
대승불교에서와 같이 일정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 중 앞의 작용이라고 단정하였다. 여기서 마음의 전 작용이란 눈(眼識), 귀(耳識),
코(鼻識), 혀(舌識), 몸(身識), 뜻(意識) 등 여섯 가지 마음(六識)이 앞 생각(前念)과 뒷 생각(後念)을 나타내는데 이 중 앞 생각을
뜻한다.
앞 생각은 앞에서 없어지면서 뒷 생각을 발생시키는(前滅後生)바탕이 되며 뒷 생각은 앞 생각에 의지하여 발생하게 되므로 뒷
생각의 의지처인 앞 생각을 의근(意根)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이들 육식에는 모두 전념과 후념을 되풀이하는 마음으로 모두
의근의 뜻이 있으나 그러나 안식 등 전오식은 안근 등 육체상의 의지처(所依處)가 있으므로 심근(心根)에 해당하는 의근의 뜻이 약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육체상의 의지처가 없는 의식에만 의근의 뜻을 부여하게 되었다. 즉 의식이 내면세계의 주체가 되면서 의식의
전념을 의근으로 하여 후념이 나타나는 등 의식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을 의식
자체에서 발생하는 앞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의 앞 생각을 의근이라고
한다면 평소 건전한 정신상태하에서는 이 이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만약 의식불명이 되거나 어떤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상태가
고르지 않는 등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된다면 그 때는 그 의근의 의미를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식학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없애고 영원성이 있는 의근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식의 종류를 소승불교의 육식(六識)사상에다 말나식과 아라야식을 더하여 팔식(八識)사상을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단절됨이 없는 의근사상도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의근(意根)은 곧 제7말나식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유식학에서는
심의식(心意識)사상을 논할 때 심(心)을 아라야식이라 하였고, 의(意)를 말나식이라 하였으며, 식(識)을 안식 등 6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6식 가운데 여섯 번 째의 식을 의식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식의 의지처인 소의근에 따라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즉 제6식은 제7말나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종래의 소승불교에서 앞 생각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을 혁신하여 말나식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말나(manas)라는 말을 의역하면 의(意)라는 뜻인데 이 의(意)라는 이름을 제6식에 양보하여
제6의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제7식은 제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원어 그대로 말나(末那, manas)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중국의 현장법사가 역경할 때 정한 것이며 현장법사 이전에는 제6식과 제7식을 의의식(意意識)이라고 번역하여 후세 학인들에게 혼돈을
야기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의근사상은 소승과 대승의 견해가 크게 다르며 유식학에서 크게 발전시켜 과거, 현재, 미래 할 것이
없이 삼세(三世)를 통하여 단절되지 않은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설사 의식불명이 된다 하더라도 그 의근은 단절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 이유는 의식의 의지처인 말나식이 단절되는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다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의근(意根)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의근은 소승불교적인 앞 생각(前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제7말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의근은 의식을 비롯한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의근은 직접적으로는 제6의식의 의지처이기는 하지만 이는 서로 주종(主從)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은 그 체성(體性)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상호간에 의지하고 공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근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이 의근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잘 유지시켜 주는 의지처가 된다. 그런데 뒤에 이야기할 문제이지만
말나식과 아라야식은 식 자체인 체성의 내용에 의하여 이름이 정해진 것이고 제6의식만은 의지처인 의근을 이름을 따서 식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2) 의식(意識)의 광연(廣緣)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근에 의지하는 의식은 안식과 이식 등 전오식과는 달리 내면의 의식활동을 전담하는 등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그 활동의 범위에 따라 의식을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광연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 의식은 법경(法境)을 인식한다. 법경이라고 하는 법(法)은
물질계(色法)와 정신계(心法)를 모두 포함한 진리를 말하며 경(境)은 곧 인식의 대상을 뜻한다.
동시에 이들 물질계와 정신계는 그
내용별로 부정(不淨)한 것(有漏法)과 청정한 것(無漏法)으로 나누어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들 유루법과 무루법을 모두 상대하여 인식활동을 펴는 것이
제6의식의 활동영역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모든 대상을 상대적인 경지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도 인식한다. 만약 의식에 여러 가지
번뇌가 있는 심식일 때는 모든 법을 상대하여 선과 악 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無記) 등으로 분별하지만 그러나 의식이 정화(淨化)되어
청정심으로 있을 때는 모든 법(諸法)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마음과 물질계가 하나의 경지를 이루는 절대의 경지(唯識無境)를 관조하게 된다.
이때는 번뇌의 장애를 받는 의식이 아니라 의식 속의 번뇌를 정화하여 나타나는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상(眞相) 그대로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역할을 하고 또 다양하게 작용을 하는 의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역할을 하는지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3) 오구의식(五俱意識)
의식은 객관세계를 관찰하며 판단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나 객관세계의 사물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앞에 안식 등 오종의 심식(五蘊)에 가담하여 그 대상을 분별한다. 그러므로 이 의식의 별명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 눈(眼根)에 의하여 색깔(色境)을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이에 가담하여 청색, 황색 등 색깔의 내용을
파악하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최종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또 이식이 소리(聲境)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그
소리가 높고, 낮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여러 가지 소리의 내용을 식별한다.
다른 심식도 마찬가지이다. 즉 코로 냄새를 맡는
비식이 냄새(香境)를 맡을 때, 그리고 혀로 맛을 아는 마음인 설식이 맛(味境)을 식별하고자 할 때, 또는 몸으로 닿는 곳마다 촉감(觸境)을
느낄 때와 같은 모든 현상에 의식은 즉각 그들 심식과 함께 반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식은 냄새가 좋다거나 나쁘다든가 또 맛에
대하여 쓰다, 달다, 시다, 짜다, 등을 구별하고 그리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그 내용이 딱딱하다, 부드럽다, 차다, 덥다 등은 이 의식이
모두 구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 그 대상을 식별하기는 하나 완전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의식이 이들 심식들에 필히 가담하여 분별하는 식이라는 뜻에서 오구의식이라고 한다.
4) 분별의식(分別意識)
제6의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인식활동을 한다고 해서 오구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또 의식은 전오식의 인식대상인 색깔(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
촉감(觸境) 등 오경(五境)의 대상을 안식 등 오식보다 더욱 분별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분별의식(分別意識)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분별력이라고
말할 때 곧 이 의식의 분별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6의식은 전오식의 의지처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전오식에
대한 의식을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에게 네 가지 의지처(四依)가 있는데 이 가운데 의식은 분별력을 빌리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분별의식이라고 하며 또 전오식에 대한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그런데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객관계의 인식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물론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다가 단독으로 인식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과 인식의 대상을 같이 반연하여 식별하는 오구동연의식(五俱同緣意識)이 있는가 하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그 대상에는 같이 반연하지
않고 단독으로 어떤 대상을 생각하며 반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고 이름한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 어떤 그림을 볼 때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주시라고 한다. 주시는 그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보고 이해한다는 뜻인데 그러나 그
그림만을 계속 응시하며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그림에서 눈을 떼고 또 다른 대상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감각기관은 육체상에 조직된 눈, 코, 혀, 귀, 몸 등 오관으로 구별되는데 이들 오관을 통하여 그 기능에 따라 소리, 냄새, 촉감 등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한 대상만을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6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분별하다가 다른 대상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전오식과 관계없이 단독으로
전오식과 함께 보고 들었던 일들을 그 후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하며 또한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전오식과 동일한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별명이
많게 된다.
5) 독두의식(獨頭意識)
의식의 또 하나의 별명을 보면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의식의 객관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마음
안에서 단독으로 활동하는 의식을 이름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두의식은 내면세계에서 단독으로 의식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생각하는 일이라든가 또 현재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을 추리하고 예측하며 계획하는 일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깊은 사유에 빠져 생각하는 일이 많고 또 여러 가지 잡념을 야기하여 온갖 생각을 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심리작용은 모두 독두의식에 속하는 것이며 그 내용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독두의식도 내용별로 다시 분류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그것은 곧 몽중의식(夢中意識)과 독산의식(獨散意識) 그리고 정중의식(定中意識) 등을 말한다. 이들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 몽중의식(夢中意識)
몽중의식은
글자 그대로 꿈 가운데서의 의식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은 천태망상으로 나타나고 또 비현실적인 꿈들이
너무 많아 꿈을 꾼 자신도 꿈의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고 동시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꿈의 주인공을 불교에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이들 꿈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순전히 환상이며 거짓된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식이
아무런 근거없이 헤매는 거짓작용을 나타낸 것으로서 되도록 꿈이 없는 것을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꿈은 공허한 의식작용으로서
실다운 것이 없기 때문에 의식의 피로만 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전한 의식에는 꿈이 없다고 하며 꿈이 없는 의식은 정신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하나의 꿈은 전혀 거짓된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유가사지론 등에서 꿈이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사실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은 전혀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꿈은 가몽(假夢)과 실몽(實夢)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가몽은 거짓된 꿈을 날하고 실몽은 실제의 체험과 경험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실몽의 경우는 유식학적으로 해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생활 속에서 객관계와 주관계를 모두 포함한
법경(法境)을 인식하는 심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오식과 같이 인식의 활동을 하면서도 최종적인 결정은 의식이 하기 때문에 그 결정적인
의식활동이 꿈속에서 사실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구별하여 수발업(隨發業)과 정발업(正發業)이라고도 한다.
발업이라는 말은 행동을 하고 또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눈, 귀, 코, 입, 몸 등 오온을 통하여 활동하는 전오식은 자연발생적으로 외부의 인연에
따라 나타나며 또 수동적으로 의식에 따라서 활동하는 심식들이기 때문에 전오식의 행동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오식과
는 달리 의식적이고 사유적이며 어떤 동작을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다. 그리고 전오식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도 그 내용과 가치를 결정하는 심식은 곧 의식이기 때문에 이 의식의 활동을 정발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매우 강력하고 주관계의 활동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그 활동의 업력이 이른바 아라야식 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는
잠이 깬 상태나 잠을 자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항상 의식을 통하여 평소 익혔던 일들이 현재의 심행(心行)과
신행(身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에 익혔든 아니면 몇 년 전에 익혔든 관계없이 한 번 경험하고 체험한 것은 의식을 통하여 다시
실현되기 때문에 꿈속에 실현된 것에 대한 의식을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고 이름한다.
나) 독산의식(獨散意識)
다음에는 독산의식(獨散意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산의식은 평소의 의식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른 심식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헤매는 것을 뜻한다. 단독으로 헤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상실하고
인식의 대상(法境)과도 일치하지 못하며 방탕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의 의식은 산만하고 분열된 현상을 보이며 정처없이 밖을 향하여 달려 나가려는
산란심소(散亂心所)를 야기하게 된다.
심소(心所)는 의식의 체(體)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행동에 의하여
나타나는 작용을 말한 것으로 이러한 독산의식은 산란하여 흩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암기력(暗記力)이 없어지게 된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여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고 명칭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극도로 정상을 잃고 산만하게 되면 비정상의식으로 변하게 되며 결국 광식(狂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때의 광식은 사실을 곡해하는 전도(顚倒)된 마음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를 미쳤다고 표현한다.
예들 들면 눈병이 난
사람이 푸른 하늘을 누렇게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착각과 환각을 야기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비량심(非量心)이라고
한다. 즉 그릇되게 인식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인식 내용을 세 가지로 구별하여 말한다. 그것을 삼량(三量)이라고 하는데
양(量)이라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양탁(量度)이라고 하며 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삼량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현량(現量)이요, 둘째는 비량(比量)이며, 셋째는 비량(非量)의 내용으로 구별한다. 현량은 앞에 놓인 사물을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무엇이나 틀림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량(比量)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량은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간혹 틀리게 인식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예를 들면 담장 너머에 뿔이 보였을 때 이를 추리하여 소가 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반면에 소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소와 비슷한 뿔을 가진 또다른 동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먼 곳에 연기가 보일
때 그곳에는 불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구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량(比量)은 간혹 틀릴 수 있는 인식의 내용을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사를 그릇되게 판단하는 인식의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인식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산란의식은 비량의 인식을 파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여 산란심을 없애는 정신생활이 매우 긴요한 것이다.
6) 정중의식(定中意識)
다음으로
제6의식에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는 별명이 있다. 정중의식은 마음의 안정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산란의식과 같은 마음을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정(禪定) 가운데 유지되는 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입정(入定) 가운데 나타나는 지혜로운 마음을 정중의식이라 한다. 여기서
정(定)이라는 말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은 경지(不動心)를 말하며 또한 산란하지 않은 마음(不亂心)의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마음은
마음을 요란케 하고 분열시키며 지혜의 활동을 장애하는 번뇌(煩惱)를 정화한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또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에서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定)의 뜻을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과 대상이
하나가 된 경지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는 마음에 한 점의 잡념도 없고 번뇌가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과 인식의 장애를 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상과 같이 정중의식은 마음이 가장 잘 정화된 청정심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말한다. 이 의식에서는 오직 진리만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열(禪悅)과 법열(法悅)에 해당하는 희열(喜悅)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심식을 말하여 무분별식(無分別識) 또는
무차별식(無差別識)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통일되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평등심만이 나타날 뿐이며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나타난 심일경성(心一境性)이기 때문에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중의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모든 대상(法相)은 그 실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히 나타나며 차별없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경지를 증득(證得)이라 한다.
증(證)이라는 말은
경계(境界)가 없다는 뜻으로서 합일(合一)의 경지를 뜻한다. 이는 곧 각(覺)과도 통한다. 모든 대상(法相)을 진리롭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깨닫는 경지는 피차(彼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피차가 없는 하나의 경지에서 체득하고 득입(得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체(法體)가 지닌 체성(體性)까지도 인식한다. 이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정중의식인 것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번뇌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유로우며 고통이 없고 편안한 열반(涅槃)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7) 의식(意識)과 번뇌작용(煩惱作用)
이상으로 제6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제6의식은 우리 인간의 심식(心識)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며 우리 생활의 전부를 결정하는 정신이다. 때로는 눈. 귀. 코. 입. 몸 등 오관(五根)을 통하여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객관세계(六境)를 인식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의 역할을 하고, 또 대내적으로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추측하며 계획도
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몽중의식(夢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이와 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淸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 가운데서 가장 넓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광범의한 역할을 하는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은 이들 의식생활이 핵심이 되며 의식생활 여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하고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중의식의 생활이다.
현대인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주체는 곧 정중의식 뿐이며
동시에 복잡한 산업시대에 잡념과 망상을 극복하고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까지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정중의식의 생활화를 실천하는 길뿐이다.
이제 정중의식에 의하여 정화되는 대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위에서 소개한 산란의식이며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6의식을 산란케 하는 것이 곧 번뇌이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뇌를 야기하는 근원은 제6의식이 아니라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고 한다. 이 말나식이 진리를 망각하여 비진리적인 번뇌망상을 야기하며
제6의식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제7말나식을 설명할 때 다루기로 하고 제6의식 자체에도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나식만큼 근원적인 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번뇌는 제6의식이 오히려 광범위하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정신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제6의식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산란의식의 상태가 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곧 정중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지혜를 방해하고 의식을 흐리게 하여 불행한 업력만 조성하는
정신작용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진리를 망각하여 진리로운 가치관을 상실한 채 고통을 받게 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야기하는 무명(無明)이 있게 되는데 이는 의식의 행위를 그릇되게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며 열반(涅槃)과 보리(菩堤)를 장애한다. 아집은 무아(無我)의 경지인 순수한 자아를 망각하고 집착하여 끝없는 이기심을
나타내는 근원이 되며, 법집은 모든 인연으로 구성된 사물의 진실성을 망각하고 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끝없는 소유욕을 나타내며 온갖
악행을 유도하는 근원이 된다. 이들 탐심이 앞서니까 자신의 의식에 거슬리면 즉각 진심(瞋心)을 내며 또한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아만(我慢)을
나타낸다.
이러한 마음들은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는 정신작용들이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들은 남을 멸시하고
질투하며(嫉), 한탄(恨)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을 속이며( ), 동시에 자기 이익을 위하여 아첨(諂)하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한다.
이와 같이 아집과 법집에 의하여 나타나는 의식은 뚜렷한 진리관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차지 못하고 오히려
놀고, 방탕한 것이 행복인양 착각한다. 동시에 게으른 마음(懈怠心)과 방종(放逸)하는 마음을 갖고 세월을 하송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참(無慙)과 무괴(無愧)라는 마음으로 반성과 참회를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에 가로막힌 의식은 항상
혼침(?沈)과 흔들리는 도거(掉擧)의 마음을 중심하여 산란하고 침체된 의식 속에서 악업(惡業)만 조성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의식작용들을 유식학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라고 부른다. 번뇌는 마음을 번거롭게 하며 혼란시키고 고뇌를
일으키는 작용으로서 이를 곧 악(惡)이라고 표현한다. 악은 또 고통과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모든 의식의 번뇌현상은 죄업과 일치되며 불행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통한 살생 등 십악업(十惡業)과 불살생 등 십선업(十善業)과는 매우 다른 심리적인
업력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욱 심리적으로 세분화한 죄업설인 것이다.
이상으로 제6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의 현상 그리고
산란의식적인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의식생활은 각자의 수행력에 의하여 정화되며 정화된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이 정중의식은 선업(善業)의 핵심이 되며 위에서 말한 번뇌의식과는 달리 모든 생활을 밝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정(定)에서
나타나는 의식은 모든 진리를 확신하는 지혜를 동반하며 그 생활을 열반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