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 말나식(第七末那識)
1. 말나식(末那識)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은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의 발견이다. 말나식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육식(六識)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육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평상시의 의식생활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내용을 보면 평상시의 의식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의 행동과 악의 행동 가운데 특히 선의 행동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에 귀의하여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을 낙으로 알고 생활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갖게 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평소의 생활태도가 매우 착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범행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가끔 화제거리로 등장하는 예가 흔히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마음을 관찰하며 탐구하는 유식학도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정화해 갈 때,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자들은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요가(yoga)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한역(漢譯)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데 이들이 닦는 요가, 즉 명상은 불교적 선정(禪定)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선정을 닦는 유가행파들이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였다. 부사의(不思議)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를 지니고 있어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말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심의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방법은 종래에 내려오던 심의식사상을 소승불교와는 달리 확대 해석하여 심(心)을 아라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하였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들은 곧 유식학도로서 종래의 심의식 사상을 혁신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라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팔식(八識)으로 분류되어 작용하고 있다고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이 후세에 중국에서 번역될 때 한문으로 제7식(第七識)을 의(意) 그리고 육식 가운데 제6식(第六識)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진제삼장 등 구역가(舊譯家)에 속하는 유식학자들이 번역한 것이고 그 뒤에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많은 범본(梵本)을 번역할 때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번역하였고, 제6식은 의식(意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구유식가(舊唯識家)들이 번역한 의(意), 의식(意識)은 의(意) 자가 두 번 반복되어 논전 등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학들이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법사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7식인 의(意)를 원어로 두기로 하고 말나(manas)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의 유식학계에서는 그 후 말나식과 의식으로 그 성질을 분명히 하여 읽게 되었고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에서는 의식과 말나식에 나타나는 번뇌의 성질과 심체의 성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선정(禪定)의 이름도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선정을 수행할 때 의식의 번뇌만을 정화하는 선정의 이름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하였고, 또 의식의 번뇌는 정화되었지만 때때로 의식에 영향을 주면서 아직도 번뇌의 작용을 야기하며 또한 번뇌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지니고 있는 말나식까지 정화하여 완전히 해탈케 하는 선정의 이름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선정의 이름을 정하여 불교 이외의 종교인 외도(外道)들은 무상정을 닦아 의식까지의 번뇌만을 정화하지만 불교(聖敎)에서는 더욱 깊이 있는 말나식의 번뇌까지 정화하고, 완전히 해탈의 경지에 도달케 하는 멸진정을 수행한다고 외도의 선정사상과 구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이 우리 인간의 심성 내에 있다고 보고 그 체성을 독특하게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말나식의 체성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말나식(末那識)의 체성론(體性論)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삼량(三量)설에 비하면 비량(非量)에 속한다. 비량이라는 말은 비(非)는 그릇 비(非)자로 해석하고 량(量)은 헤아린다는 말로서, 즉 인식한 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하여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이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량(思量)이라는 뜻도 식의 작용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8식(八識)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는 데 있다. 이제 말나식을 다른 식과 몇 가지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안식(眼識) 등 전5식(前五識) : 이들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않으며 또 오식의 심체는 그 작용이 간간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항상(恒) 지속하고 심세(審細)한 사량심이 부족하다(恒審俱無).
* 제6의식(意識) : 의식은 심세(審細)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작용이 가끔 단절되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출생하면 사량의 작용이 단절되고 무상정(無想定)에 들면 역시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또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역시 의식의 작용이 단절되고 극심한 수면(極睡眠)에 들면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그리고 졸도하거나 의식불명(極悶絶)일 때 의식작용이 단절되는 등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작용이 단절된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은 오위무심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세(審細)한 사량의 작용은 야기하지만 말나식과 같이 심체가 항상 지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審而非恒).
* 제8아라야식 :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심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恒而非審).
* 제7말나식 : 말나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명실공히 사량심의 자격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恒審俱有).
이상과 같이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하므로 이 식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어떻게 사량의 작용을 일으키며 그 사량의 내용은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세친논사(世親論師)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다.
다음의 제이능변(次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思量爲性相).
이를 해석해 보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가령 어머니 태(母胎) 안에 태어날 때 인간의 모습으로 아라야식이 최초로 능히 변화한다고 해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依彼)하여 전생(轉)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반연(緣彼)하며 사량하는 것이며 이것을 성질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량의 뜻은 아라야식의 참 모습인 무아(無我)의 경지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번뇌를 야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3. 말나식(末那識)과 사번뇌(四煩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나식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번뇌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말나식에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항상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는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번뇌는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해서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한 데서 나타나는 번뇌의 작용을 말한다. 그 번뇌의 종류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를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치(我痴) : 아치는 나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가 보통 집착심으로 나를 내세우는 나가 아니라 그 집착심이 있기 전의 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라고도 하며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이러한 나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진여성(眞如性) 또는 불성(佛性) 그리고 법성(法性)과도 통하는 나이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하여 전도된 마음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을 치(痴)라 하며 치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무지로서 모든 진리를 비진리적으로 전도(顚倒)하는 마음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도란 마음이 뒤집어졌다는 말이며 항상 진리를 정반대로 착각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이러한 작용에서 나타나는 마음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심을 아치(我痴)라 할 수 있는데 아치의 마음이 야기하는 그 순간을 해설하여 아집(我執) 또는 법집(法執)이라 한다. 아집은 아치와 통하는 말로서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또 평등한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집착함을 뜻한다. 또 법집은 진리로운 법칙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를 집착함을 뜻한다. 즉 마음속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법집이고 동시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을 아집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집과 법집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곧 무아(無我)인 것이며 이 무아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부단히 수행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하는 도상에서 제일 먼저 정화되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이고, 그 다음에 정화되는 마음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최후에 정화되는 마음은 말나식(末那識)으로서 이 말나식이 정화 될 때, 위에서 말한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고 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치(我痴)의 번뇌도 없어진다. 이러한 경지를 우리는 성불(成佛)의 경지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또한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심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범부의 것이며, 반대로 만약 말나식의 번뇌가 다 정화되었다면 성불의 경지로서 다시는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곧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한 진여의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번뇌사상과 수행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말나식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종래의 학자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의 위치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설명할 때에 매우 필요할 뿐 아니라 번뇌와 수행을 설명할 때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아왔다.
* 아견(我見) : 아견은 위에서 살펴본 아치라는 번뇌가 야기한 후에 곧 나타나는 망견(妄見)을 뜻한다. 즉 무아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견(邪見)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번뇌심이 매우 고정되어 나라는 집념이 강화된 경지를 말한다. 아집의 작용이 고정화되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7말나식이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의 영향을 받아 자기 이익을 위한 모든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에 의하여 작용되는 아견의 현상은 보통 행동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아만(我慢) : 아만은 아치의 번뇌에서 아집이 생기고, 아견에서 더욱 객관화된 번뇌이다. 즉 나를 밖으로 나타내려는 심리가 싹 튼 것이며, 그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면 오직 자기만이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못하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평등한 진리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집착한 나를 거만하게 나타내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아만에는 자신이 남보다 수승하다는 아승만(我勝慢)이 있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이 고귀하다는 아등만(我等慢)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높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나타내는 태도는 겸손한 체 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의 구별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는 모두 아만에 속한다.
* 아애(我愛) : 아애는 마음속 깊이 집착한 자아(自我)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하는 정신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속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망각한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비진리적이고 일시적인 자아(假我)를 설정하여 고정적으로 탐심(貪心)과 애착심을 야기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에는 사번뇌(四煩惱)가 항상 야기하게 된다. 이들 사번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나(我)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참다운 나에 대한 망각(痴)과 더불어 파생되는 망견(妄見)과 거만과 탐애 등의 심리작용을 사번뇌라고 하는데 이들 심리작용은 항상 자아를 유일무이한 제왕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서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작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집착된 나(有我)는 항상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실체는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들을 모두 번뇌의 근본이 된다고 해서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가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밖에 가지와 같은 번뇌(枝末煩惱)를 야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말나식과 더불어 시작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과거로부터(無始劫來)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시도 단절됨이 없이 야기하는 번뇌라고 일러오는 것이다. 참으로 이들 번뇌는 가장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범부들의 지혜로는 가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팔지(八地)보살 이상의 성인들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전해온다.
그것은 이들 번뇌 가운데서도 아치(我痴)는 평등한 일여(平等一如)의 진아(眞我)에 대하여 최초로 착각하는 번뇌에 속한다. 이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아직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번뇌로서 이러한 번뇌의 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상분과 견분이 미분화된 상태의 번뇌라는 뜻은 상분(相分)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며, 견분(見分)은 능히 인식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음속의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분별의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절대경지인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아치의 번뇌로서 그 망각한 심리작용이 아직 객관화되지 않은 채 무명만이 나타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업상(業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원효대사와 현수대사 등이 주석한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의하면 업(業)이란 동념(動念)을 뜻하며 일심(一心) 위에서 일념(一念)이 최초로 동요한 상태를 업상(業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미세한 경지를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식학(唯識學)의 심분설(心分說)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의 작용은 무궁무진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모든 심식의 인식내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 사분설(四分說)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서 기신론 주석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가령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할 때 마음 위에 떠오르는 영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동시에 그 상분을 상대로 하여 선악(善惡)의 내용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그리고 그 견분작용을 다시 자체 내에서 틀림없는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自證分)이라 이름하며, 또 자증분을 뒤에서 재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사분(四分)작용이 있는데 이는 주로 상대적 인식내용을 설명할 때 많이 활용한다. 이에 의하여 상대를 떠난 절대의 진리는 상분과 견분의 상대성이 없는 경지인 것이며, 따라서 설사 진리를 망각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객관화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에서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기신론의 업상(業相)의 상태나 유식학의 아치의 상태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의 사번뇌는 매우 미세한 것이며 동시에 이를 정화하는 데는 부단한 수행이 뒤따르게 된다. 이를 완전히 정화하려면 이른바 삼현(三賢)보살의 수행으로도 불가능하며 적어도 십지보살(十地菩薩) 중 제7지보살(第七地菩薩)의 지위에 올라야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집의 번뇌가 겨우 없어진다.
그 밖의 법집과 미망의 습기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로서 구경각(究竟覺)을 증득한 경지에 도달해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생기번뇌란 선천적이며 또한 원천적인 번뇌라는 뜻으로서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번뇌이다. 이러한 경지에 대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성위(聖位)와 멸진정의 선정과 출세간의 경지에서만이 말나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阿羅漢滅盡定出世道無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한의 경지는 불타의 경지를 말하며, 또 멸진정은 구경(究竟)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금강유정(金剛喩定)에 해당하는 선정을 뜻한다. 그리고 출세도는 속세적인 번뇌와 세간적인 번뇌를 해탈한 진리의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청정한 마음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 보살도의 수행력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되고 정화되니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진여의 성(眞如性)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진여성을 아무런 번뇌의 장애없이 완전히 증득하고 관찰하는 경지를 또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선가에서도 말나식의 사량심(思量心)과 도거심(掉擧心)을 정화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였고 또 말나식의 번뇌를 완전히 정화한 경지를 견성이라고 하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1. 말나식(末那識)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은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의 발견이다. 말나식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육식(六識)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육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평상시의 의식생활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내용을 보면 평상시의 의식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의 행동과 악의 행동 가운데 특히 선의 행동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에 귀의하여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을 낙으로 알고 생활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갖게 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평소의 생활태도가 매우 착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범행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가끔 화제거리로 등장하는 예가 흔히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마음을 관찰하며 탐구하는 유식학도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정화해 갈 때,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자들은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요가(yoga)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한역(漢譯)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데 이들이 닦는 요가, 즉 명상은 불교적 선정(禪定)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선정을 닦는 유가행파들이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였다. 부사의(不思議)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를 지니고 있어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말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심의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방법은 종래에 내려오던 심의식사상을 소승불교와는 달리 확대 해석하여 심(心)을 아라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하였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들은 곧 유식학도로서 종래의 심의식 사상을 혁신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라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팔식(八識)으로 분류되어 작용하고 있다고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이 후세에 중국에서 번역될 때 한문으로 제7식(第七識)을 의(意) 그리고 육식 가운데 제6식(第六識)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진제삼장 등 구역가(舊譯家)에 속하는 유식학자들이 번역한 것이고 그 뒤에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많은 범본(梵本)을 번역할 때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번역하였고, 제6식은 의식(意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구유식가(舊唯識家)들이 번역한 의(意), 의식(意識)은 의(意) 자가 두 번 반복되어 논전 등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학들이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법사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7식인 의(意)를 원어로 두기로 하고 말나(manas)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의 유식학계에서는 그 후 말나식과 의식으로 그 성질을 분명히 하여 읽게 되었고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에서는 의식과 말나식에 나타나는 번뇌의 성질과 심체의 성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선정(禪定)의 이름도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선정을 수행할 때 의식의 번뇌만을 정화하는 선정의 이름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하였고, 또 의식의 번뇌는 정화되었지만 때때로 의식에 영향을 주면서 아직도 번뇌의 작용을 야기하며 또한 번뇌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지니고 있는 말나식까지 정화하여 완전히 해탈케 하는 선정의 이름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선정의 이름을 정하여 불교 이외의 종교인 외도(外道)들은 무상정을 닦아 의식까지의 번뇌만을 정화하지만 불교(聖敎)에서는 더욱 깊이 있는 말나식의 번뇌까지 정화하고, 완전히 해탈의 경지에 도달케 하는 멸진정을 수행한다고 외도의 선정사상과 구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이 우리 인간의 심성 내에 있다고 보고 그 체성을 독특하게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말나식의 체성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말나식(末那識)의 체성론(體性論)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삼량(三量)설에 비하면 비량(非量)에 속한다. 비량이라는 말은 비(非)는 그릇 비(非)자로 해석하고 량(量)은 헤아린다는 말로서, 즉 인식한 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하여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이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량(思量)이라는 뜻도 식의 작용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8식(八識)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는 데 있다. 이제 말나식을 다른 식과 몇 가지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안식(眼識) 등 전5식(前五識) : 이들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않으며 또 오식의 심체는 그 작용이 간간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항상(恒) 지속하고 심세(審細)한 사량심이 부족하다(恒審俱無).
* 제6의식(意識) : 의식은 심세(審細)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작용이 가끔 단절되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출생하면 사량의 작용이 단절되고 무상정(無想定)에 들면 역시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또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역시 의식의 작용이 단절되고 극심한 수면(極睡眠)에 들면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그리고 졸도하거나 의식불명(極悶絶)일 때 의식작용이 단절되는 등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작용이 단절된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은 오위무심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세(審細)한 사량의 작용은 야기하지만 말나식과 같이 심체가 항상 지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審而非恒).
* 제8아라야식 :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심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恒而非審).
* 제7말나식 : 말나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명실공히 사량심의 자격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恒審俱有).
이상과 같이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하므로 이 식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어떻게 사량의 작용을 일으키며 그 사량의 내용은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세친논사(世親論師)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다.
다음의 제이능변(次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思量爲性相).
이를 해석해 보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가령 어머니 태(母胎) 안에 태어날 때 인간의 모습으로 아라야식이 최초로 능히 변화한다고 해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依彼)하여 전생(轉)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반연(緣彼)하며 사량하는 것이며 이것을 성질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량의 뜻은 아라야식의 참 모습인 무아(無我)의 경지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번뇌를 야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3. 말나식(末那識)과 사번뇌(四煩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나식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번뇌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말나식에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항상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는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번뇌는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해서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한 데서 나타나는 번뇌의 작용을 말한다. 그 번뇌의 종류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를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치(我痴) : 아치는 나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가 보통 집착심으로 나를 내세우는 나가 아니라 그 집착심이 있기 전의 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라고도 하며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이러한 나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진여성(眞如性) 또는 불성(佛性) 그리고 법성(法性)과도 통하는 나이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하여 전도된 마음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을 치(痴)라 하며 치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무지로서 모든 진리를 비진리적으로 전도(顚倒)하는 마음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도란 마음이 뒤집어졌다는 말이며 항상 진리를 정반대로 착각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이러한 작용에서 나타나는 마음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심을 아치(我痴)라 할 수 있는데 아치의 마음이 야기하는 그 순간을 해설하여 아집(我執) 또는 법집(法執)이라 한다. 아집은 아치와 통하는 말로서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또 평등한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집착함을 뜻한다. 또 법집은 진리로운 법칙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를 집착함을 뜻한다. 즉 마음속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법집이고 동시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을 아집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집과 법집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곧 무아(無我)인 것이며 이 무아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부단히 수행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하는 도상에서 제일 먼저 정화되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이고, 그 다음에 정화되는 마음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최후에 정화되는 마음은 말나식(末那識)으로서 이 말나식이 정화 될 때, 위에서 말한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고 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치(我痴)의 번뇌도 없어진다. 이러한 경지를 우리는 성불(成佛)의 경지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또한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심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범부의 것이며, 반대로 만약 말나식의 번뇌가 다 정화되었다면 성불의 경지로서 다시는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곧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한 진여의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번뇌사상과 수행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말나식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종래의 학자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의 위치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설명할 때에 매우 필요할 뿐 아니라 번뇌와 수행을 설명할 때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아왔다.
* 아견(我見) : 아견은 위에서 살펴본 아치라는 번뇌가 야기한 후에 곧 나타나는 망견(妄見)을 뜻한다. 즉 무아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견(邪見)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번뇌심이 매우 고정되어 나라는 집념이 강화된 경지를 말한다. 아집의 작용이 고정화되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7말나식이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의 영향을 받아 자기 이익을 위한 모든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에 의하여 작용되는 아견의 현상은 보통 행동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아만(我慢) : 아만은 아치의 번뇌에서 아집이 생기고, 아견에서 더욱 객관화된 번뇌이다. 즉 나를 밖으로 나타내려는 심리가 싹 튼 것이며, 그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면 오직 자기만이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못하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평등한 진리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집착한 나를 거만하게 나타내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아만에는 자신이 남보다 수승하다는 아승만(我勝慢)이 있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이 고귀하다는 아등만(我等慢)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높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나타내는 태도는 겸손한 체 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의 구별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는 모두 아만에 속한다.
* 아애(我愛) : 아애는 마음속 깊이 집착한 자아(自我)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하는 정신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속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망각한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비진리적이고 일시적인 자아(假我)를 설정하여 고정적으로 탐심(貪心)과 애착심을 야기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에는 사번뇌(四煩惱)가 항상 야기하게 된다. 이들 사번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나(我)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참다운 나에 대한 망각(痴)과 더불어 파생되는 망견(妄見)과 거만과 탐애 등의 심리작용을 사번뇌라고 하는데 이들 심리작용은 항상 자아를 유일무이한 제왕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서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작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집착된 나(有我)는 항상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실체는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들을 모두 번뇌의 근본이 된다고 해서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가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밖에 가지와 같은 번뇌(枝末煩惱)를 야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말나식과 더불어 시작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과거로부터(無始劫來)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시도 단절됨이 없이 야기하는 번뇌라고 일러오는 것이다. 참으로 이들 번뇌는 가장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범부들의 지혜로는 가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팔지(八地)보살 이상의 성인들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전해온다.
그것은 이들 번뇌 가운데서도 아치(我痴)는 평등한 일여(平等一如)의 진아(眞我)에 대하여 최초로 착각하는 번뇌에 속한다. 이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아직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번뇌로서 이러한 번뇌의 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상분과 견분이 미분화된 상태의 번뇌라는 뜻은 상분(相分)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며, 견분(見分)은 능히 인식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음속의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분별의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절대경지인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아치의 번뇌로서 그 망각한 심리작용이 아직 객관화되지 않은 채 무명만이 나타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업상(業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원효대사와 현수대사 등이 주석한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의하면 업(業)이란 동념(動念)을 뜻하며 일심(一心) 위에서 일념(一念)이 최초로 동요한 상태를 업상(業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미세한 경지를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식학(唯識學)의 심분설(心分說)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의 작용은 무궁무진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모든 심식의 인식내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 사분설(四分說)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서 기신론 주석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가령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할 때 마음 위에 떠오르는 영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동시에 그 상분을 상대로 하여 선악(善惡)의 내용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그리고 그 견분작용을 다시 자체 내에서 틀림없는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自證分)이라 이름하며, 또 자증분을 뒤에서 재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사분(四分)작용이 있는데 이는 주로 상대적 인식내용을 설명할 때 많이 활용한다. 이에 의하여 상대를 떠난 절대의 진리는 상분과 견분의 상대성이 없는 경지인 것이며, 따라서 설사 진리를 망각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객관화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에서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기신론의 업상(業相)의 상태나 유식학의 아치의 상태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의 사번뇌는 매우 미세한 것이며 동시에 이를 정화하는 데는 부단한 수행이 뒤따르게 된다. 이를 완전히 정화하려면 이른바 삼현(三賢)보살의 수행으로도 불가능하며 적어도 십지보살(十地菩薩) 중 제7지보살(第七地菩薩)의 지위에 올라야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집의 번뇌가 겨우 없어진다.
그 밖의 법집과 미망의 습기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로서 구경각(究竟覺)을 증득한 경지에 도달해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생기번뇌란 선천적이며 또한 원천적인 번뇌라는 뜻으로서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번뇌이다. 이러한 경지에 대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성위(聖位)와 멸진정의 선정과 출세간의 경지에서만이 말나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阿羅漢滅盡定出世道無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한의 경지는 불타의 경지를 말하며, 또 멸진정은 구경(究竟)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금강유정(金剛喩定)에 해당하는 선정을 뜻한다. 그리고 출세도는 속세적인 번뇌와 세간적인 번뇌를 해탈한 진리의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청정한 마음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 보살도의 수행력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되고 정화되니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진여의 성(眞如性)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진여성을 아무런 번뇌의 장애없이 완전히 증득하고 관찰하는 경지를 또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선가에서도 말나식의 사량심(思量心)과 도거심(掉擧心)을 정화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였고 또 말나식의 번뇌를 완전히 정화한 경지를 견성이라고 하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 한손에 연꽃을 들어보이며
글쓴이 : [應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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