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1
위에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7식(七識)을 살펴보았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은 오근(五根)을 통하여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객관계를 접촉하고 또 선과 악을 대하며, 고와 낙을 맛보며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과 진여성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며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전칠식(前七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자들이 추구하고 탐구함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 주는 주체가 된다. 이 아라야식은 인도의 무착보살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다. 이미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체를 부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지만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고 무착보살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 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라야(阿梨耶. 阿리耶), 아라야(我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裝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라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을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라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심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체에 대한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결과와 모습을 뜻한다. 그리고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만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 능장(能藏) :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업력이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7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그 중간의 무기행(無記行) 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 소장(所藏) :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 집장(執藏) :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을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들 삼장 가운데 집장이, 아라야식이 망식(妄識)으로 있는 한 아라야식의 뜻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전7식의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능장과 소장의 뜻도 집장의 뜻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상(果相)의 내용도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능장의 뜻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상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초래되는 과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보는 업력을 보존한 장식 내의 종자로부터 업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서로 부합하고 화합하여야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업인을 보존하는 능장과 그 업인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果相)의 내용은 서로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인 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살펴본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은 아라야식 자체에서 야기되는 내용인 것이고,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과상은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중생의 과보를 받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대한 설명은 그 작용에 따라 별명을 붙여 다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8지 보살 이상의 성인들이 수행력에 의하여 말나식의 아집을 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상에 속하는 집장의(執藏義)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상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상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과상(果相)은 아라야식의 업력에 의하여 받은 결과로서 한 세상만 살고 죽을 때에는 과상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과상은 자상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상을 유식학에서는 일취생(一趣生)의 과체(果體)라고 한다. 일취생이란 삼계육도 가운데 한 중생계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중생의 탈을 쓴 과보를 받고 살다가 사망할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상은 아라야식이 자체 내에 보존한 업력에 끌려 어느 세상에서 과보를 받고 사망할 때까지의 과체를 뜻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아라야식(靈魂)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중 과상(果相)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과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8식은 선업종자(善業種子)와 악업종자(惡業種子)에 의하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초생(招生)하게 되며 이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사생(四生)의 총보(總報)로서 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이는 과상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無覆)는 아라야식 자체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부(覆)는 번뇌라는 말과 그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 수동적인 소집장(所執藏)의 뜻만 있고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능집(能執)의 작용은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제6의식 등 육식이 악업을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뜻에서 아라야식을 무부성(無覆性)이라 한다. 그리고 무기성(無記性)이라는 말은 아라야식이 선성(善性)에 속하지도 않고, 악성(惡性)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성에도 기록(記)되지 않고 또 악성에도 기록되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무기성(無記性)이어야 선보와 악보를 받을 종자를 공정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논사에 의하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 때문에 무기성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아라야식이 선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거나 악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미래의 과보를 받을 주체로서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이미 선성이라면 악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또 아라야식이 이미 악성이라면 역시 선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바탕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무부성(無覆性)이어야 하고 또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으로서 당당히 업력을 보존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문헌과 같이 아라야식은 선업종자와 악업종자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가 그 선업과 악업의 세력에 의하여 삼계와 육도의 세계에 출생하여 과보를 받게 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뜻하며 이를 다시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의 내용도 확실히 알아야 아라야식을 중심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설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업력에 따라 삼계 육도에 두루두루 다니며 윤회하게 되는데 그 과보를 받는 출생의 형태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생(四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말한다. 태생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모친의 태중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난생은 닭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알(卵)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습생은 곤충과 같은 생명체가 습기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화생은 지옥중생과 천국의 천인들과 같이 부모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나투어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중도적 입장에서 악업의 세력이 강하면 악도에 출생하고 선업의 세력이 강하면 선도에 태어나는 등 삼계육도의 여러 세계에 사생의 여러 모습으로 출생하게 되는데, 최초에 태어나는 총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이때의 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총보의 뜻은 아라야식이 총체가 되어 출생할 때 출생하는 태아의 전체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태아로 태어날 때, 이목구비 등 여러 신체적조건과 정신적인 작용 등을 구비하고 발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총체를 총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이 총보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작용과 육체의 별체가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총보를 성립시키는 아라야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총보에서 다시 여러 가지 업력(異熟習氣)의 도움으로 정신과 육체가 점차 구비되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숙생은 총체에서 별체가 발생하여 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가운데 출생의 근본이 되는 이숙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숙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숙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 과보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숙식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시간적으로 찰나찰나 몸과 마음이 변천한다는 뜻(異時而熟)과 둘째, 공간적으로도 찰나찰나 마음이 변한다는 뜻(變異而熟)이 있고, 셋째, 과보의 종류를 달리 바꾼다는 뜻(異類而熟)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이숙의 뜻 가운데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은 세 번째의 이숙설이 가장 적합한 학설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이숙은 우리 인간이 현재 살고 있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선과 악으로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뜻 가운데 동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하여 내생에 다른 몸으로 출생하는 것에서 이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숙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모든 이숙의 뜻은 아라야식을 제외시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고 종자를 보존할 수 없으며 또 윤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이 되고 또 과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에 의하면 "진이숙(眞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업과(業果)요, 둘째는 부단(不斷)이며 셋째는 변삼계(遍三界)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업과(業果) : 이는 위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야식이 중심하여 전생의 업력에 따라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질이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기 때문에 선업과 악업을 함께 보존하여 선보도 받을 수 있고 악보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부단(不斷) : 부단은 아라야식의 체성이 계속 유지되며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없이 계속 삼계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변삼계(遍三界) : 변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를 두루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 새로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심식(心識)은 오직 아라야식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단절됨이 없어 계속 상속하고 동시에 어떤 업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업보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세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진이숙(眞異熟)인 이숙식(異熟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밖의 심식들은 어찌하여 진이숙이라 할 수 없고 또 이숙식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7말나식은 그 체성에 염성(染性)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 염성은 곧 번뇌를 야기하며 번뇌는 다름 아닌 말나식의 성품이 악성(不善性)이며 또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주체는 그 바탕에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하는데 말나식에 번뇌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그 자격이 없다는 엄격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업력에 의한 과보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자격은 가지고 있다. 즉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7말나식은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항상 부단(不斷)하며 상속(相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계에 어디에나 두루두루 단절됨이 없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나 다만 업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이숙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제6의식의 경우를 보면 이 의식은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으나 부단의 뜻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6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선정에 들면 그 염오(染汚)의 체성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졸도하거나 의식을 상실했을 때의 극민절(極悶絶)과 수면(睡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극수면(極睡眠) 등 이러한 경우에는 의식이 단절된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이 단절되는 것을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위무심이 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윤회의 주체가 못되며 동시에 진이숙(眞異熟)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선과 악과 무기 등에 공정하게 통하고 또 삼계, 육도에도 두루 단절되지 않고 윤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식(眼識) 등 전오식은 업과의 뜻은 있어도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말나식과 의식과 함께 진이숙(眞異熟)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심식들은 업과와 변삼계와 부단의 뜻에서 하나 내지 둘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이숙의 자격이 없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진이숙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위에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7식(七識)을 살펴보았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은 오근(五根)을 통하여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객관계를 접촉하고 또 선과 악을 대하며, 고와 낙을 맛보며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과 진여성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며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전칠식(前七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자들이 추구하고 탐구함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 주는 주체가 된다. 이 아라야식은 인도의 무착보살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다. 이미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체를 부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지만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고 무착보살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 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라야(阿梨耶. 阿리耶), 아라야(我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裝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라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을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라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심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체에 대한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결과와 모습을 뜻한다. 그리고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만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 능장(能藏) :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업력이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7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그 중간의 무기행(無記行) 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 소장(所藏) :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 집장(執藏) :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을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들 삼장 가운데 집장이, 아라야식이 망식(妄識)으로 있는 한 아라야식의 뜻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전7식의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능장과 소장의 뜻도 집장의 뜻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상(果相)의 내용도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능장의 뜻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상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초래되는 과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보는 업력을 보존한 장식 내의 종자로부터 업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서로 부합하고 화합하여야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업인을 보존하는 능장과 그 업인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果相)의 내용은 서로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인 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살펴본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은 아라야식 자체에서 야기되는 내용인 것이고,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과상은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중생의 과보를 받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대한 설명은 그 작용에 따라 별명을 붙여 다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8지 보살 이상의 성인들이 수행력에 의하여 말나식의 아집을 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상에 속하는 집장의(執藏義)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상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상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과상(果相)은 아라야식의 업력에 의하여 받은 결과로서 한 세상만 살고 죽을 때에는 과상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과상은 자상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상을 유식학에서는 일취생(一趣生)의 과체(果體)라고 한다. 일취생이란 삼계육도 가운데 한 중생계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중생의 탈을 쓴 과보를 받고 살다가 사망할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상은 아라야식이 자체 내에 보존한 업력에 끌려 어느 세상에서 과보를 받고 사망할 때까지의 과체를 뜻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아라야식(靈魂)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중 과상(果相)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과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8식은 선업종자(善業種子)와 악업종자(惡業種子)에 의하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초생(招生)하게 되며 이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사생(四生)의 총보(總報)로서 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이는 과상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無覆)는 아라야식 자체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부(覆)는 번뇌라는 말과 그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 수동적인 소집장(所執藏)의 뜻만 있고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능집(能執)의 작용은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제6의식 등 육식이 악업을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뜻에서 아라야식을 무부성(無覆性)이라 한다. 그리고 무기성(無記性)이라는 말은 아라야식이 선성(善性)에 속하지도 않고, 악성(惡性)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성에도 기록(記)되지 않고 또 악성에도 기록되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무기성(無記性)이어야 선보와 악보를 받을 종자를 공정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논사에 의하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 때문에 무기성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아라야식이 선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거나 악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미래의 과보를 받을 주체로서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이미 선성이라면 악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또 아라야식이 이미 악성이라면 역시 선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바탕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무부성(無覆性)이어야 하고 또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으로서 당당히 업력을 보존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문헌과 같이 아라야식은 선업종자와 악업종자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가 그 선업과 악업의 세력에 의하여 삼계와 육도의 세계에 출생하여 과보를 받게 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뜻하며 이를 다시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의 내용도 확실히 알아야 아라야식을 중심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설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업력에 따라 삼계 육도에 두루두루 다니며 윤회하게 되는데 그 과보를 받는 출생의 형태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생(四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말한다. 태생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모친의 태중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난생은 닭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알(卵)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습생은 곤충과 같은 생명체가 습기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화생은 지옥중생과 천국의 천인들과 같이 부모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나투어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중도적 입장에서 악업의 세력이 강하면 악도에 출생하고 선업의 세력이 강하면 선도에 태어나는 등 삼계육도의 여러 세계에 사생의 여러 모습으로 출생하게 되는데, 최초에 태어나는 총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이때의 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총보의 뜻은 아라야식이 총체가 되어 출생할 때 출생하는 태아의 전체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태아로 태어날 때, 이목구비 등 여러 신체적조건과 정신적인 작용 등을 구비하고 발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총체를 총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이 총보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작용과 육체의 별체가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총보를 성립시키는 아라야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총보에서 다시 여러 가지 업력(異熟習氣)의 도움으로 정신과 육체가 점차 구비되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숙생은 총체에서 별체가 발생하여 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가운데 출생의 근본이 되는 이숙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숙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숙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 과보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숙식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시간적으로 찰나찰나 몸과 마음이 변천한다는 뜻(異時而熟)과 둘째, 공간적으로도 찰나찰나 마음이 변한다는 뜻(變異而熟)이 있고, 셋째, 과보의 종류를 달리 바꾼다는 뜻(異類而熟)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이숙의 뜻 가운데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은 세 번째의 이숙설이 가장 적합한 학설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이숙은 우리 인간이 현재 살고 있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선과 악으로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뜻 가운데 동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하여 내생에 다른 몸으로 출생하는 것에서 이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숙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모든 이숙의 뜻은 아라야식을 제외시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고 종자를 보존할 수 없으며 또 윤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이 되고 또 과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에 의하면 "진이숙(眞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업과(業果)요, 둘째는 부단(不斷)이며 셋째는 변삼계(遍三界)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업과(業果) : 이는 위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야식이 중심하여 전생의 업력에 따라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질이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기 때문에 선업과 악업을 함께 보존하여 선보도 받을 수 있고 악보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부단(不斷) : 부단은 아라야식의 체성이 계속 유지되며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없이 계속 삼계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변삼계(遍三界) : 변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를 두루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 새로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심식(心識)은 오직 아라야식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단절됨이 없어 계속 상속하고 동시에 어떤 업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업보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세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진이숙(眞異熟)인 이숙식(異熟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밖의 심식들은 어찌하여 진이숙이라 할 수 없고 또 이숙식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7말나식은 그 체성에 염성(染性)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 염성은 곧 번뇌를 야기하며 번뇌는 다름 아닌 말나식의 성품이 악성(不善性)이며 또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주체는 그 바탕에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하는데 말나식에 번뇌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그 자격이 없다는 엄격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업력에 의한 과보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자격은 가지고 있다. 즉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7말나식은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항상 부단(不斷)하며 상속(相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계에 어디에나 두루두루 단절됨이 없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나 다만 업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이숙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제6의식의 경우를 보면 이 의식은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으나 부단의 뜻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6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선정에 들면 그 염오(染汚)의 체성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졸도하거나 의식을 상실했을 때의 극민절(極悶絶)과 수면(睡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극수면(極睡眠) 등 이러한 경우에는 의식이 단절된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이 단절되는 것을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위무심이 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윤회의 주체가 못되며 동시에 진이숙(眞異熟)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선과 악과 무기 등에 공정하게 통하고 또 삼계, 육도에도 두루 단절되지 않고 윤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식(眼識) 등 전오식은 업과의 뜻은 있어도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말나식과 의식과 함께 진이숙(眞異熟)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심식들은 업과와 변삼계와 부단의 뜻에서 하나 내지 둘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이숙의 자격이 없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진이숙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출처 : 한손에 연꽃을 들어보이며
글쓴이 : [應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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