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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스크랩] 아라야식과 업력 보존

by 마리산인1324 2006. 12. 30.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업력(業力)보존


아라야식은 모든 법을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을 보존하고 또 원인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상(因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종자를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유실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종자식이라는 별명은 앞으로 과보를 가져올 종자를 보존할 수 있는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종자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종자론이라고 한다. 종자론은 종자와 업력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으로서, 여기에는 열 가지 설명이 있다.

그 열 가지 항목을 들면, 1. 출체문(出體門), 2.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3.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4. 이제분별문(二諦分別門), 5. 사분분별문(四分分別門), 6. 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 7. 신훈본유분별문(新熏本有分別門), 8. 구의다소문(具義多少門), 9. 쌍변생인이인문(雙辯生引二因門), 10. 내외종사연분별문(內外種四緣分別門) 등을 말한다.

이들 열 가지 내용은 종자의 사상을 잘 설명해 주고 또 여러 가지 인연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학설이다. 이들 내용을 모르면 업력과 종자로 말미암아 과보를 초래하는 인과사상을 모를 만큼 매우 중요한 사상이므로 여기에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과(因果)의 동일성[出體門]


인과의 동일성은 업인의 체성이 뚜렷하여 동일성의 업과를 분명하게 가져오도록 하는 인과사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정의는 '모든 종자는 제8아라야식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친히 자과(自果)를 출생시키는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뜻을 보면 종자는 오직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이며, 소승부파(小乘剖破)인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 등에 함께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은 몸에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칠전식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는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선인은 선과만을 초래하고 악인은 악과만을 초래하는 등 존자의 세력(功能)이 뚜렷하게 있음을 말한다. 이것을 친히 자과를 초인(招引)하는 공능의 차별이라고 한다. 공능의 차별이라는 말은 업력의 차별이 분명히 있다는 말로서 선업과 악업이 선과와 악과를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함을 뜻한다. 이렇게 인(因)과 과(果)의 성질이 분명하여 여타의 인과와 차별이 있게 하는 종자는 등류인(等類因)과 인연(因緣)과 명언종자(名言種子) 등이다. 이들 업인은 동일한 성질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숙인(異熟因)과 증상연(增上緣) 등의 업인과 연(緣)은 동일한 과보를 초래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이숙인은 선인이 악과를 초래하며 또 악인은 선과를 초래케 하는 등 인(因)과 과(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가령 선인이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뒤에 안과 밖으로 악연(惡緣)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의 선인은 동일한 성질의 선보를 초래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증상연이 그러한 역할을 많이 한다. 증상연이란 업인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선인에다 선연이 되어 더욱 선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선인에 악연이 되어 악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증상연은 광범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선인에 악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가져오게 하고, 또 악인에 선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 증상연은 다른 연의 뜻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예를 들면 친인연(親因緣)은 악인과 선인에 대하여 동일한 성질의 연을 가하여 동일한 과보를 받도록 한다. 이와 같이 연의 뜻도 다양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상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인과의 도리는 이숙인과 이숙과와 같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자는 변화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는 출체문은 업인과 결과가 동일한 인과응보를 초래하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이 선이면 과보도 선이고, 인이 악이면 과보도 악과이다 라는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은 동일한 과보를 받게 하였으면 그 과보는 비록 선과와 악과의 상태로 나타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임을 강조하고 있다. 무기성은 선성(善性)도 아니고, 악성(惡性)도 아닌 성질을 뜻한다. 이들 내용을 전문적으로 표현한 것을 요약하여 보면 업인은 선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因果善惡, 果是無記)이다 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과보는 표면상으로는 선과 악의 차별이 있지만 그 과보의 내용인 정신의 바탕은 평등하다는 말이다. 정신의 바탕이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각(自覺)의 본성이 있다는 말이며, 자각의 본성이 있는 까닭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경지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면 무엇이든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음을 뜻한다.


2)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밀접한 관계[一異分別門]


종자는 아라야식(Alaya-vijnana)을 비롯하여 모든 심식과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종자는 인이 되고 식의 현행(現行)은 과가 된다. 여기서 현행이란 말은 현재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식의 현행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로부터 발생한 결과로서 이를 과라고 한다. 동시에 식의 현행은 또 결과이면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에 업이 되며, 이 업은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세력을 구비한 채 하나의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켜 종자는 식의 현행을 발생하고 (種子生現行), 식의 현행(活動)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내에 훈습하고 보존하게 된다(現行熏種子)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와 심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이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사이에 더욱 두텁게 나타난다. 아라야식은 본체가 되고 종자는 작용이 되며, 종자는 원인이 되고 아라야식 내에서 의식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현행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 그리고 종자와 모든 심식의 현행 등의 관계가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리하다.

그런데 이들 종자는 아라야식 안에 있으면서 아라야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이 되고, 아라야식의 활동은 결과가 되는 진리가 있다. 아무리 만물의 근본이 되고 또 만물을 창조하는 아라야식이라고 할지라도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도 그 체성은 영원한 진리의 성(性)에 해당하지만 그 위에서 활동하는 범부의 마음은 인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유루심에 속하기 때문에 무루심이 나타날 때까지는 인과법에 얽매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아라야식 안에 있는 무루종자(無漏種子)는 청정한 수행으로 조성되는 무루종자의 훈습(薰習)으로 말미암아 현행할 때까지는 고요히 보존되어 있게 된다. 무루종자를 훈습한다는 말은 청정한 수행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되면 이미 보존하고 있는 불성 또는 진여성에 해당하는 무루종자에게 조연(助緣)이 되어서 그 무루종자로 하여금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무루종자가 마음에 나타나 마음을 지혜롭게 하고 또 보리심이 무성하게 하여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실현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이숙(異熟)의 의미가 실현된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아라야식 내에 있는 무루종자는 무루의 조연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루의 부정한 마음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게 된다. 동시에 유루종자만이 유루심인 아라야식과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면서 찰나찰나 지속하고 있으며 또한 윤회중생을 어디론가 정처없이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무루종자를 부활시켜 깨달음과 안락 그리고 지혜의 생활로 환원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종자의 가실을 밝힘[假實分別門]


유식학에서 업력에 해당하는 종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임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쟁이 많았다. 종자가 임시인 것이며 동시에 가(假)라고 주장한 학파는 공종(空宗)이다. 이들 공종을 대표하는 청변(淸辯)이라는 학자는 업력인 종자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모든 사물은 생겨났다가(生), 잠시 동안 머물러 있게 되고(住), 그리고 변천하여(異), 없어지는 것(滅)과 같기 때문이다. 즉 종자도 생, 주, 이, 멸의 과정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임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의 병(甁)은 본질이 있다. 그 본질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등 사대(四大)의 원소(色素)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대(四大)의 인(因)에 의하여 만들어진 병은 결과(果)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본질인 색소와 만들어진 병은 서로 불가분리(不可不二)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병은 무정(無情)이며 동시에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임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법(萬法)의 원인인 종자(種子)도 가법(假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주장한 공종의 논리에 대하여 유식종(唯識宗)에서는 그 논리를 달리하여 일체의 만법은 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만법에는 진여성(眞如性)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자와 진여는 불가분리(不一不二)한 관계 속에 만법이 존재하므로 그 종자는 가법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식종의 주장을 더 말해 보면, 만약 종자가 가법이라면 진여도 가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진여가 가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내세우는 불성(佛性)과 진승의제(眞勝義諦)와 열반과 성불 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을 창조하는 종자는 실유성(實有性)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종과 공종의 견해 차이가 있어 왔는데, 유식종에서는 종자의 실재(實在)를 주장하며 진여와도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식종은 종자가 실재하는 것이며, 그 종자에 대하여 정신계와 물질계가 연기(緣起)되어지며 또 창조되어진다고 하였다.


4) 종자(種子)의 진속(眞俗)관계[二諦分別門]


종자는 만물의 원인이 되며 창조의 근원이 됨을 밝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진제는 진리적 성(性)을 의미하고 속제는 현상계의 속성(俗性)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두 진제와 속제는 이론상 둘로 표현할 뿐이지 실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眞)은 단독적으로 진일 수 없고, 속(俗)은 단독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진은 속에 의한 진이고, 속은 진에 의한 속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진제가 성립하면 속제도 성립하고, 속제가 성립하면 진제도 성립한다. 이는 곧 진과 속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진리가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 내용을 예로 표현하면, 마치 손수건으로 토끼를 엮어 만든 것을 토끼라고 하는, 실물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손수건을 토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수건은 본질인 진제에 비유하고 토끼의 모습은 속제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와 손수건이 둘이 아니듯이 진제와 속제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만법과 진여가 불가불리(不卽不離)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인 것이다. 동시에 종자도 만법과 진여와도 불가불리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마음의 인식작용과 업력(業力)의 보존[四分分別門]


아라야식에는 사분의 작용이 있다. 물론 그밖에 모든 심식에도 사분작용이 있다. 사분이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식(識)의 내용과 활동을 분류한 것으로서 상분은 외부의 현상을 식의 안에서 꼭 같은 모습으로 현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견분은 그 상분에 영상으로 나타난 모습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자증분은 견분의 역할이 틀림없는지에 대하여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뒤에서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 등 심식에는 네 가지 작용이 있는데 이러한 작용 가운데 종자는 어떤 작용에 의지하고 또 보존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는 법상종(法相宗)에서는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이론에 따르고 있다.

호법의 이론에 따르면 종자는 사분(四分) 가운데 자증분에 포섭(包攝)된다고 하였다. 선업종자와 악업종자 등 온갖 종자는 식의 중심인 자증분에 보존되었다가 다시 의식(意識) 등 여러 심식을 통하여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만물이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며 또한 육체적인 행동까지도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아라야식의 자체(自體)에 해당하는 자증분에 의존하였다가 연(緣)을 만나면 즉시 상분에 나타나게 되며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은 상분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삼라만상은 상분에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분은 객관계의 현상을 나타내주는 의식 속의 객관계이며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삼라만상도 상분을 통하여 의식 속에 나타나며 의식 속에 나타난 모든 영상을 견분이 견조(見照)하여 선악을 구별하고 고락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가운데의 모든 종자는 현상계의 사실로 나타난다고 볼 때 그 소재처(所在處)는 상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분은 식체(識體) 안에서 견분의 반연처이면서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루종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종자는 선악의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유루종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청정하지 못한 유루종자가 유루식(有漏識)의 주체인 아라야식에 보존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정무구한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유루식과 무루종자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무루종자는 염오(染汚)된 아라야식에 의존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체성(體性)에 의존하여 보존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의 현상(現相)은 유루식이지만 본래 지니고 있는 체성은 곧 진여성이며 또한 불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식종에서는 유식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식성은 곧 진여성으로서 식의 실성(實性)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부정한 마음에 해당하는 유루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본성(本性)이 되는 실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식의 실성과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같고 또 잘 융화가 되기 때문에 모든 무루종자는 유식성에 의존하며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가 유식성에 보존되었다가 만약 청정한 수행으로 무루(無漏)의 마음이 나타나면 청정한 견분인 정견(淨見)을 나타나게 하고 또 청정한 상분을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만약 무루위(無漏位)에 오르면 염오성(染汚性)이 퇴치되고 식의성(識性)인 무루성이 청정한 사분에 해당하는 정분을 야기하게 된다. 이때의 무루종자는 무루견분(無漏見分)과 무루상분(無漏相分)을 야기시키는 힘이 되며 무루의 견분은 또 무루의 상분을 상대로 관조(觀照)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루종자는 유루(有漏)의 아라야식의 자증분에 보존되어 있다가 상분을 통하여 정신계의 현상을 나타내며 식의 성에 보존되어 있다가 수행자의 무루심을 통하여 무루의 견분과 무루의 상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6) 선악종자와 무루종자의 보존[三性分別門]


아라야식 안에는 선(善)의 업력과 악(惡)의 업력 그리고 무기(無記)의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업력(業力)인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무루의 종자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매우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선의 종자와 악의 종자 그리고 무기의 종자 등 이른바 삼성종자(三性種子)는 그 성질이 변하여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이숙종자(異熟種子)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가지 성질을 가진 종자들은 아라야식의 별명인 이숙식에 능히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숙식은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숙무기성(異熟無記性)인 이숙식에는 선, 악, 무기 등 삼성종자가 보존되어 있다가 앞으로 연을 만나게 되면 그 결과로 나타나며 또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섭용귀체문(攝用歸體門)과 성용별론문(性用別論門)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섭용귀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라야식은 체(體)이고 종자는 용(用)이다. 유루종자는 유루식인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피차의 성질과 종류(性類)가 함께 유루에 속한다. 유루라는 말은 번뇌가 있고 선과 악의 종자에 의하여 선악의 과보를 받는 등 변화무쌍한 염오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청정치 못한 부정의 성질을 유루라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과 종자는 꼭같이 유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종자는 용(用)으로 포섭되어 삼체(體)인 아라야식에 귀의(歸依)하여 무기성에 섭장(攝藏)하게 된다.

둘째, 성용별론문은 종자인 작용(用)과 제8아라야식인 체(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말하면 능히 활동하면서 종자를 훈습하는 칠전식(七轉識)과 종자로부터 출생하는 현재의 행위(現行)가 선악 등 삼성(三性)에 서로 통하므로 종자도 동일하게 선과 악과 무기성에 통한다.

그러나 무루종자의 체성은 오직 선(唯善)뿐이다. 이 선은 곧 절대선(絶對善)을 뜻하며 절대선을 수행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선과 악이 상대되는 상대선(相對善)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선은 유루선이라 하고 절대선은 무루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선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독특하여 유루성이 있는 아라야식의 상분에 보존되지 않고 무루성인 아라야식의 성(性)에 보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무엇이든지 정화할 수 있는 능대치(能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으나 아라야식의 인과성(因果性)은 오직 무기성이며 동시에 정화되어야 할 소대치(所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루종자는 일반적인 선악업종자와는 달리 아라야식의 이숙무기성에 보존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청정무구한 진여성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모든 업종자가 비록 아라야식에 보존된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와 유루종자와의 보존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일리가 있는 학설이며 동시에 진리에 맞는 논리인 것이다.


7) 선천적인 업력과 후천적인 업력[新熏本有分別]


위에서 업력의 보존관계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들 업력과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여 그 업력의 지배하에 중생이 윤회하고 또 과보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 각자가 이승에 출생하면서 후천적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업력이 조성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중생들이 업보를 받고있다고 한다면 이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에 떨어지는 인과사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이승에 출생하여 비로소 업력을 조성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전생에서 금생에 출생하기 전까지의 업력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벌여왔는데 고래로부터 있어왔던 학설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가) 호월(護月)논사의 본유설(本有說)


먼저 인도의 학자인 호월논사(護月論師)는 업력이란 새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며 본유설(本有說)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은 아라야식에 본래부터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업력은 새로 조성된 것이 아니며 설사 새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에 조력하여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증상(增上)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업인을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조연(助緣)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호월논사는 만약 종자가 새로 생긴다면 동일한 종자가 많이 생기게 되며, 인(因)은 많이 생기는데 과보는 하나(多因一果)밖에 되지 앟는 비진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인과법이 문란해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종자(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이 없는 과보(無因果報)를 초래하게 되고 또 보살도적인 수행을 하여도 청정한 지혜인 무루지(無漏智)의 발생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무루지와 불성과 같은 진리의 성품이 보래부터 보존되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월논사의 업력사상은 업력이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운명론에 빠질 우려가 많다.


나) 난타(難陀)논사의 신훈설(新熏說)


다음으로 난타논사(難陀論師)의 신훈설(新熏說)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신훈설은 글자 그대로 업력과 종자는 본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출생하여 새롭게 훈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종자란 옛적부터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므로 행동이 있는 한 종자도 새로 훈습되며 조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자는 태초부터 찰나찰나 조성되는 것이며 또 무루의 종자도 역시 수행과 포교 그리고 보살도에 의하여 찰나찰나 훈습되고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훈설은 너무나 현실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다.


다)호법(護法)논사의 합성설(合成說)


다음은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신구합성설(新舊合成說)을 살쳐보기로 한다. 호법논사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본유설(種子本有說)과 신훈설(新熏說)을 종합하여, 종자는 본래 보유한 것도 있고 새로 훈습하여 조성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약 본래 보존되어 있는 종자와 새로 훈습되는 종자가 없다면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정신계인 칠전식과 아라야식과의 인과관계가 없어지게 되므로 이는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자가 새로 훈습되어 조성되고 본래 보유하고 있는 종자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유루심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유루종자가 무루종자를 발생하는 모순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호법논사는 무루종자를 비롯한 여러 선악업종자가 이미 보존되어 있다가 금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찰나찰나의 행동에 의하여 훈습되는 종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호법논사의 업력사상은 중국과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이를 옛적부터 정설로 믿어 왔다.

말하자면 업력은 전생에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금생의 연을 만나 과보를 받고 또 아직도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업력은 이승에 출생하자마자 다시 의식활동을 통하여 새롭게 조성해 나가며 자신을 찰나찰나 개선해 가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종자의 보존상태를 알아보았다. 종자는 아라야식에 선천적으로 이미 보존된 것도 있고 후천적으로 새로 조성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로 되어 왔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전생에 지은 업력을 아라야식에 보존하여 이승의 과보를 받게 되었고 또 아직도 남아있는 유루종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루종자는 친인연(親因緣)과 증상연(增上緣) 등 여러 인연을 만날 때까지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眞如性)에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는 수행하는 불자들에게 내적인 친인연이 되어 무루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하고 심지어는 성불(成佛)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유루종자는 중생들로 하여금 현생에서도 악한 과보(惡報)와 고통을 받게 하고 그리고 일시적인 선보(善報)와 안락한 생활만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은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종자의 힘에 의하여 선악의 행동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 행동은 또 새로운 종자를 훈습하고 조성하는 인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본래 보존된 것도 있고 또 찰나찰나 새롭게 조성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업력사상에 의하여 인간의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도 있지만, 그 성질이 새롭게 개선되고 발전하는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종자의 성질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출처 : 한손에 연꽃을 들어보이며
글쓴이 : [應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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