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야식(阿賴耶識)의 인상(因相)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을 살폈다. 아라야식은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몸을 받고 또 그 몸과 정신을 부단히 변화시키고 또 유지시킬 수 있는 체성(體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또 아라야식은 진이숙(眞異熟)으로서 과보를 받는 총체라는 뜻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보식은 과체(果體)로 최초에 과보를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중생이 삼계와 육도 내에서 업력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을 때, 과보를 아라야식이 최초로 받으며 그리고 능히 변화시켜 무형(無形)의 업력과 더불어 유형(有形)의 과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최초의 생명체이며 근원이다. 여기에 의지하여 칠식(七識)과 육근(六根)이 생기며 출생 후도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인간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것을 아라야식의 별명인 아다나식(阿陀那識)에서도 알 수 있다. 아다나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고 번역하며, 집지(執持)의 뜻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비롯하여 정신과 육체도 함께 잘 붙들어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중생의 과보를 받는데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이숙식(異熟識)으로 과보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이 과보체(果報體)를 출생하는 내용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학설은 이른바 인간의 태아(胎兒)가 출생하는 것과 그 내용이 같으므로 불교적 태아설과 함께 설명해 보고자 한다.
가) 인능변(因能變)과 태아(胎兒)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능히 변천한다는 뜻으로서 과보에 대한 원인의 변화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불교의 교리는 반드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능변은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을 때, 그 업인이 어떻게 변화하여 과보가 발생하는가를 소상히 알려주는 학설이다. 물론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출생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사생(四生)의 내용을 다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나 모든 교리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우리 인간을 대표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능변과 과능변도 인간의 태아와 관계시킴으로써 더욱 현실성이 있고, 또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태아로 출생하기 전에 어떠한 영혼이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과거 소승불교에서 가장 많이 취급해 왔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위에서 말한 인능변과 과능변의 총체가 되는 아라야식을 말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소승불교에서는 그 문제를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의 사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유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유(中有)는 전생에 지은 모든 업력을 지니고 사망해서 다시 출생하기까지의 중간 생명을 뜻한다.
* 생유(生有)는 중유 기간의 영혼(阿賴耶識)이 출생의 인연을 만나 이승에 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 본유(本有)는 중유가 출생하여 이승에서 살다가 사망하기까지의 생명체를 뜻한다.
* 사유(死有)는 이승에서 살다가 인연이 다 되어 사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중생이 윤회하는 과정을 사유(四有)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사유 가운데 중유와 생유가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아라야식의 인능변과 과능변과의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설명의 편의상 비록 소승불교의 교설이지만 요약하여 인용해 보기로 한다.
소승불교의 중유설은 매우 인격화된 논리를 갖고 있다. 즉 중생이 사망하면 49일을 전후하여 거의 내세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생활을 5,6세의 아동만큼이나 큰 존재로서 냄새를 맡고 식사를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매우 검은 빛을 발휘하며 업력이 같은 무리들끼리 산다. 선업을 많이 지은 중생들은 그 몸에서 매우 흰 빛을 발휘하며 역시 선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산다.
중유는 부단히 출생처를 찾아 우주 공간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므로 중유의 별명을 구유(求有)라고도 한다. 구유라는 말은 공간에 있으면서 출생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유를 건달바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심향(尋香)이라 하며 심향은 냄새를 먹고 사는 중유의 생활을 나타낸 말로서 냄새를 찾아다닌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공간에 있는 중유는 이승의 출생처를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다시 생과 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신의 업력과 인연이 맞는 부모와 세계를 발견하면 곧 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유는 천안(天眼)과 같이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도 다 볼 수 있는데 다만 업력에 적합한 것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은 업력과 합당한 부모와 환경을 발견하면 급속도로 그 세상에 알맞은 업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계의 부모를 발견했다면 욕계의 부모는 음욕(淫慾)이 많은 중생들이 많으니까 그 중유도 곧 부모에 대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될 중유는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남자가 될 중유는 모친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이는 욕계의 이성(異性)이 서로 상대를 사랑하는 업력과 부합하는 업력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중유는 이승의 모친에게 있는 태중(胎中)이 곧 궁전과 같다고 착각하고 태내에 점점 접근하여 결국 탁태(託胎)하고 만다.
이와 같은 중유가 태어나는 과정은 소승불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대승불교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에서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확실히 내세우지 못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내세워 태중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 이론이 곧 아라야식을 중심한 총보(總報)와 별보(別報)의 설명이다. 그리고 대승유식학에서의 소승불교의 중유 대신에 아라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하여 모태(母胎)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확정짓게 된다.
나) 아라야식(阿賴耶識)에 대한 8가지 증명
이와 같이 윤회의 주체로 확정짓게 된 이유를 유가사지론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고 잇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전생에 지은 업력을 무엇이 보존하였다가 금생에 태어나게 하는가? 아라야식이 존재함으로써 전생에 업력을 보존할 뿐 아니라 금생에도 출생할 수 있고 또 안식(眼識) 등 여러 심식(心識)도 활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식(六識)도 활동할 수 있고 또 선악의 업력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최초의 생명체가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정신체(心識)도 생기(生起)하지 못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안식 등과 함께 활동하는 의식과 의식의 기억력이 명료하게 나타날 수 없고 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유루종자(有漏種子)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간단없이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또 육식신(六識身) 체성 등은 단절이 많은데 무엇으로 인과응보의 업력설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중생 각자가 행동하는 아업(我業)과 인식의 대상인 경업(境業)과 중생이 의지하는 의업(義業)과 중생이 살고 있는 기업(器業) 등 사종업(四種業)을 설명할 수 없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의 사려(思慮)가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정(禪定)의 유무(有無)를 구별하기 힘들게 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멸진정(滅盡定)과 같은 깊은 선정에 들 수 없고 또 멸진정에 들면 심식(心識)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것이며 현재의 수명도 단절되는 모순을 따르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이 사망할 때 상체(上體)가 마비되거나 하체(下體)가 냉촉(冷觸)되면서 점점 시체화하는 절차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의식도 점차 마멸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단절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팔종의 증거를 들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깊이 생각하여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라야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을 설명할 때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특히 그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날 때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할 수 있는 것은 곧 아라야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사망할 때 최후까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아라야식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주체를 여덟 가지 증거를 들어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세의식(細意識)과 일미온(一味蘊), 그리고 보특가라(補特伽羅)와 궁생사온(窮生死蘊), 또는 근본식(根本識) 등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내세워 윤회의 주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라야식 사상만큼 그 이론과 사상이 구족하지 못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라야식이 가장 진리적인 이론을 구비하고 있는 심식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도 가장 최초의 생명체가 되고 있음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어머니 태중에 최초의 생명체로 안착한 것은 아라야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식(識)은 모태에 태어나면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착 즉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정혈(精血)과 아라야식과 화합할 때 최초의 태아가 출생하게 되는데, 그 후 즉시 인간의 모습을 꾸미는데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의 부모는 연(緣)이 되고 아라야식은 업력과 함께 인(因)이 되며 인과 연이 함하여 결과(果報)가 생기는 것인데, 그 태아는 곧 과보이다. 인과법에 있어서 인과 연의 도움이 없으면 과를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라야식에는 연이 있어야 하고 그 연은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생의 인(因)과 부모의 연(緣)이 합하여 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러나 탄생한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 태아의 내용은 업력과 연에 의하여 완숙되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아라야식이 핵심이 되어 그 내용을 완숙하게 되도록 하는데 그것이 곧 인능변(因能變)의 조화이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모태에 안착하자마자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동시에 아라야식에 보존된 전생의 업력이 부모의 연이 가해짐으로써 능히 변화를 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업인이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형체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업인이 연을 만나 인간의 과체(人體)를 형성시킨다는 뜻이다. 그 인(因)의 내용은 등류습기(等流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 등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두 습기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 등류습기(等流習氣)
등류습기(等流習氣)의 뜻은, 등(等)은 상사(相似) 즉 서로 같다는 뜻이고 유(流)는 유류(類流) 즉 종류와 무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습기(習氣)는 전7식(前七識) 등이 활동하여 익히고 습관들인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습기는 다음의 결과를 가져올 업력과 같으며 종자(種子)라는 별명도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등류습기는 전생에 모든 정신(七轉識)과 육체 등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받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즉 동등한 종류(等類)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習氣)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받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친인연종자(親因緣種子)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이 친한 것만이 인과응보가 될 수 있는 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유식론(成唯識論)]에는 등류습기가 인연이 되는 것은 과보가 인(因)과 유사하다(等流習氣爲因緣故 果似因)라고 하였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는 '등류의 뜻은 인연이 생하므로 인연의 법은 반드시 그 성질이 동등하다(等類義 爲因緣生 因緣之法 必同性故)'라고 하였다. 즉 인성(因性)과 과성(果性)이 동등한 인과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업력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업자득의 철저한 인과법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업인설이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악업은 금생에 악보를 받도록 하고 또 전생의 선업은 금생에 선보를 받도록 하는 것이 등류습기의 업력이다.
등류습기는 때로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이 명언종자는 우리의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의식할 때 언어와 명사를 연상하면서 행동한 업력종자를 뜻한다. 명언은 표의명언(表義名言)과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나누어진다.
* 표의명언은 어떤 사물의 뜻과 의리(義理)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것을 뜻하고, 또 평가하고 표현할 때 명사(名詞)와 구문(句文)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나 행동할 때 그 뜻을 생각하고 평가하며 또 언어 문자로 말하거나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내용의 행위가 우리 생활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업력의 이름을 명언종자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제6의식이 이미 명사와 문구가 붙어있는 대상을 반연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 현경명언은 마음(心識)이 인식의 대상을 마음속에 능히 비추어 그 대상의 명사와 문구를 환하게 생각하여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대상의 모습을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을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의 모습을 견분(見分)이 분별하고 요별할 적에 그 대상의 명사와 명구(名句)를 생각하면서 하게 되므로 그 행동 속에 명사와 명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업력의 이름도 명언종자라고 지은 것이다. 이들 두 가지를 분명히 나누어 말할 것 같으면 표의명언은 반연되어지는 인식의 대상(所緣境)의 이름과 명구의 수동적 뜻을 생각하면서 표현하는 행동의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현경명언은 칠전식(七轉識)이 능동적으로 인식의 대상을 반연하여 그 명언과 구문을 분별하는(能緣識) 것에서 조성되는 종자를 뜻한다. 이와 같이 표의는 수동적인 소연(所緣)이고, 현경은 능동적인 능연(能緣)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등류습기에는 명언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심식(心識)의 활동(能緣識)과 인식의 대상(所緣境)을 보다 넓게 그리고 심오하게 업사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류습기는 업인으로서 반드시 같은 성질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이숙습기(異熟習氣)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이숙습기라는 업력은 반드시 인(因)과 과(果)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異性)을 초감(超感)하기 때문이다. 이숙(異熟)이란 말은 이미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찰나찰나 변천하고 변화시킨다는 뜻으로서 인과에 있어서도 인(因)과 과(果)가 반드시 동일하게 성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因)의 성질과 다른 과(果)가 서로 다르게 성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숙습기의 조성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六識)이 한다. 이들 육식이 활동하는 행위는 선업과 악업, 그리고 무기업 등 세 가지 성질의 업력으로 조성되는데, 이들 업력들은 제8아라야식에 보존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증상연(增上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내에는 이미 선업과 악업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 육식이 찰나찰나 선악의 행위를 통하여 선악의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 이들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薰習)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새로운 업력의 영향을 끼쳐 기존 업력으로 하여금 본래의 성질을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이미 나쁜 짓을 하여 악업의 업력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착하게 변하여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선업이 기존의 악업에 영향을 주어 다음의 결과를 악업과는 다른 선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과의 도리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의 진리는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고정적인 인과사상으로 정립되어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융통성 없는 인과사상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선업을 많이 닦아도 이미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선인이 될 수 없게 되고 또 아무리 악업을 지어도 이미 선업을 좀 지어놓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는 인과법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일인주의(一因主義)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육식의 활동여하에 따라 변하며 또 아라야식의 내용도 찰나찰나 변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박토에 씨앗을 심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후 좋은 거름을 주어서 잘 가꾸면 그 씨앗은 박토에 그대로 있다가 나는 것보다 훨씬 잘 클 것이다. 또 씨앗은 나쁘지만 그 토질이 좋은 데다 거름을 잘 해주면 그 씨앗은 토질과 거름의 영향으로 매우 잘 커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여 기존의 선업과 선과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고 생각되면 더욱 선업을 지어 그 악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없애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因)이란 한 번 지어 조성해 놓으면 하나의 세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을 공능(功能)이라고 하며 공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인력(引力)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업력을 인이라 하고 인을 또 종자(種子)라고 비유하여 부른다. 이러한 종자의 힘에 의하여 열매를 맺듯이 업력은 삼계의 세계에 두루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이숙습기라 한다. 이숙습기는 친생자과(親生自果)하는 등류습기와는 달리 친생이과(親生異果)하는 법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칙에 의하여 아라야식은 내생의 총과보를 받을 수 있는 진이숙(眞異熟)이 되고 또 이러한 진이숙은 후천적으로 지은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지은 육식의 업력이 먼저의 진이숙을 변화시키는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업력에 의하여 몸을 바꾸어 윤회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현세의 몸도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인간의 내용으로 변천할 수 있다. 참으로 이숙습기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있는 가장 현실적인 업력설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두 습기설을 살펴보았다. 이 두 습기설은 두 가지 업력설로서 앞으로 과보를 받는 결과에 대하여 가장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이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因能變)이라 한다. 인능변은 또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등 두 가지 습기, 즉 두 가지 업력의 변화를 내용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업력이 다음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이러한 업력은 또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과보를 끌고 다니는 인력(引力)을 말하여 인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업에 의하여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과보를 이숙과(異熟果)라 한다. 이숙과는 또 진이숙과 이숙생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진이숙은 곧 아라야식이 최초에 과보를 받을 때 이름한 것이고 동시에 이 진이숙을 끌고 온 업력의 이름을 인업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진이숙에서 발생되는 업과를 이숙생(異熟生)이라 하며 이숙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전칠식(前七識)을 뜻한다. 그리고 칠식과 더불어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 육근(六根)도 이숙생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이숙으로부터 몸과 정신작용이 동시에 변화하여 결과로 나타나며 인간의 모습과 내용을 구비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할을 하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 한다. 만업은 구석구석 빈틈없이 하나의 과보를 원만하게 구족되도록 해주는 업력이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스승이 윤곽(眞異熟)을 그려 놓으면 제자가 그 자세한 내용까지도 채워 그려 넣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내용으로 한 업력의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그 업력이 세분화하여 과보의 총체를 끌고 오는 업력을 인업(引業)이라 하고 그 총체 위에 하나하나 인간의 형체를 구비해 주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업에 의하여 끌려온 과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만업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계와 이목구비 그리고 오장육부가 형성되는 것을 별보(別報)라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능히 받도록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무루업(無漏業)을 제외한 선업은 가히 사랑스러운 과보(可愛果)를 받고 또 악업의 종자는 가히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比可愛果)를 반드시 가져오게 하는 초감(招感)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을 이숙습기(異熟習氣)라 한다. 이는 삼계의 윤회를 가능케 하는 업력으로서 업종자(業種子) 또는 유지습기(有支習氣)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유지습기란 삼계에 윤회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선악업은 정발업(正發業)과 수발업(隨發業)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전육식 가운데서 제6의식의 활동에서 조성되는 업력을 정발업이라 하고 또 의식을 제외한 안식 등 전오식이 활동하여 조성된 업력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심식의 활동 내용에 의하여 명명된 이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은 결정적인 활동을 하지만 오식(五識)은 대부분 의식에게 수종(隨從)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업(發業)이라는 뜻은 곧 모든 심식의 행동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이 발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다름 아닌 업력을 즉시 발생시키고 선악업을 조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식의 활동에는 서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정발업과 수발업 등 여러 업력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들이 모여 아라야식에 보존되었다가 과보를 가져올 때 능변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이승의 부모의 연(緣)을 만났을 때 선악업과 함께 과보를 발생하기 시작하여 그 과보를 완성할 때까지 능히 변화하는 업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업력의 세력이 변화없이 과보를 받을 수 없다.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능변(果能變)도 인능변의 태아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 형성될 때까지의 변화과정을 뜻한다. 이는 업력과 더불어 과보의 변화와 과보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因)과 과(果)는 불가분리하며 항상 동시에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 없는 과능변이 있을 수 없고, 과능변 없는 인능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바와 같이 인능변이 과보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의 업력이 아라야식에 실려와서 부모의 연을 만나 그 연의 도움으로 인간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과능변은 곧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말하기를 "과능변은 두 가지 습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果能變 謂前二種習氣故)"라고 한 바와 같이 업력의 결과이다. 여기서 두 가지 습기란 말할 것도 없이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뜻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업력(習氣)에 의하여 과보의 완성이 가능하다.
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면 인능변은 종자인 업력에 의하여 태아(果報)가 모태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變現)을 말한다. 그러나 과능변은 종자, 즉 업력에 의하여 생겨난(因生) 현재의 과보(現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은 내적인 원인론(原因論)인데 반하여 과능변은 외적인 결과로서 인간의 형체를 구성해 나아가는 외부의 변화(變現)를 뜻한다.
이러한 과능변의 내용을 능변과 소변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능변(能變)은 소변(所變)에 반대되는 어구로서 능히 창조적인 입장인 능조자(能造者)를 뜻하며, 소변은 창조되어지는 피조물(被造物)의 입장을 뜻한다. 이는 불교가 어떤 특정적인 유일신(唯一神)을 부정하고 인과의 법칙을 내세워 업력을 창조자 대신으로 내세운 표본이 되는 것이다. 본래 능조자격인 원인과 피조물격인 결과도 없는 것이 진리(眞如)의 세계이다. 그러나 윤회하고 있는 중생계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있는 것이며 그 논리가 곧 여기서 말하는 인능변과 과능변의 내용이다. 이러한 능소(能所)의 관계는 자기의 업력(自業)이 자신을 창조(自得)한다는 자업자득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마) 이숙습기(異熟習氣)의 과보(果報)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의 진리는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라는 업력이 연을 만나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과능변이라고 한다.
인능변 가운데 등류습기의 능변(能變)은 선인은 선과를 가져오게 하고, 악인은 악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업인(業因)과 과보(果報)가 그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등류과(等類果)라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등류인(等類因)에 의하여 등류과가 초래된 것이며 또 동류인(同類因)에 의하여 동류과(同類果)가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인과법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등류습기의 내용보다 더욱 복잡하고 또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인과법칙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이숙습기의 논리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업인과는 달리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지옥의 중생이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고, 또 인간이 사왕천(四王天)과 제석천(帝釋天) 등 여러 천국에 태어날 수 있는 윤회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곧 이숙습기의 원리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숙이라는 뜻은, 변천한다는 뜻과 변화한다는 뜻과 교환한다는 뜻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는 인과의 부사의한 도리를 설명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유식학의 인과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숙의 내용을 중국의 규기법사(窺基法師)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종류의 변화과정 등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넓혀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 시간을 달리하여 변천하는 것(異時而熟)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시시각각 변천한다는 뜻이다. 먼저 원인의 변천을 살펴보면 중생 각자가 업력을 아라야식 속에 훈습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그 업력을 곧 종자라고도 표현한다. 이 종자는 아라야식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변천 또는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면서 다음의 결과를 맺을 때까지 생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는 서로 인과 연이 되어 먼저의 종자는 다음 시각의 새로운 종자로 변천하면서 항상 생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자가 종자를 출생시킨다는 말은 동일한 종자가 다음의 새 종자로 발생한다는 뜻으로서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내용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력이고 또 항상 새로운 생명력으로서 여러 가지 생활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인 아라야식은 인간의 의식과 육체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새로운 연을 만나면 즉시 우리 인간의 정신인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새로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 전문적인 언어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즉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원인이 되고 인간 내부와 주위의 환경은 연이 되는 것이며 현재의 행동과 인간의 주변에 나타난 새로운 상태가 곧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을 발생시킨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익힌 여러 가지 지식과 습관을 곧 아라야식 내에 다음의 지식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이것이 다음의 행동과 지식 그리고 습관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지식과 습관이 업력이 되어 현재의 행동과 지식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행이라는 말은 현재의 정신 행위, 육체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습을 뜻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과거에 각자가 익히고 배웠던 습관과 지식으로서 자신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의 발생이며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과 습관의 발생은 현재의 생활을 뜻하는데 현재의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종자에 의한 결과로서 이 결과인 행위는 다시 원인을 조성하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정신 생활과 육체 행위는 아라야식의 업력 즉 종자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으로서 실현되는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결과임과 동시에 업력을 조성하여 다시 자신의 아라야식 내에 업력인 종자를 보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한다. 즉 현재의 행동은 아라야식 내에 종자를 훈습(薰習)한다는 말이다. 훈습한다는 말은 조성(造成)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며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조성해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킨다는 뜻이 된다.
이상과 같이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전생과 금생, 또는 금생과 내생 등과 연결시켜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논술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승적인 인과설이다. 그러나 대승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곧 현재의 생활 숙에서 인과가 시시각각으로 성립되고 또 전개되며 찰나찰나에 업력을 조성하고 동시에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듣고 보았던 것은 곧 아라야식 내의 종자가 되며 그것은 또 다음 찰나의 지식과 습관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야말로 찰나에 인과가 성립되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사상이며 또한 찰나인과사상(刹那因果思想)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을 고정시켜 운명에 얽매이게 하는 신(神)의 창조설과 또는 고대의 이교도들의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인과론과 업보사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쳐 주는 사상인 것이다. 찰나에 변천과 변화가 없는 인과사상은 인간의 발전을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승유식학(大乘唯識學)에서는 고대 인도의 운명론적인 인과사상을 타파하고 현재의 불행과 빈곤과 고통의 상태를 찰나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인 행위와 현행에 의하여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개조와 아울러 행복과 부귀와 안락한 상태의 환경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에 이숙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것(變異而熟)
이는 위에서 살펴본 이시이숙(異時而熟)의 논리와는 조금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물론 넓은 안목으로 보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내용에지만 그러나 학문적으로 구별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면 따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이라는 말은 정신과 육체 또는 모든 사물이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변천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시시각각으로 겉모습만 변천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을 비롯한 모든 내용도 변천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면서 변천해 왔고 현재도 찰나찰나 그 내용은 변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인과법칙이 없으면 인간의 내용은 발전할 수 없고 개선될 수 없으며 또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중심한 모든 심식은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식들에 의존한 육체의 내용과 외모도 심식의 선과 악의 여하에 따라 발전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밖의 자연계도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인간의 선악 여하에 따라 자연계도 선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종류를 달리하여 이루어지는 것(異類而熟)
종류 즉 과보를 달리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과 내용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생의 과보와 금생의 과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을 뜻한다. 가령 윤회과정에서 인간이 사망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났다고 하면 금생의 인간의 몸과 내생의 극락세계의 몸과 서로 다른 종류의 몸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하나의 변천이기 때문에 이숙의 의미가 있다.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생과사를 되풀이하면서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이류이숙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숙의 진리도 업력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세계는 업력과 관련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업력의 내용을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업력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일한 인과 과가 연결되도록 하는 등류습기라는 업력도 있지만 항상 다른 종류로 변천시켜 과보를 받도록 하는 이숙습기도 있다는 것이 인과사상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 이숙습기는 다른 과보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적극 힘을 발휘하는 업력으로서, 이는 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전6식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다. 이들 심식에 의하여 조성된 선악의 종자가 아라야식에 훈습될 때,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이숙무기종자(異熟無記種子)를 도와서 다른 성질의 결과를 초래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이숙습기를 증상연종자(增上緣種子)라고도 한다.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 즉 업력에 대하여 어떤 과보나 결과를 발생하도록 연(緣)이 되어주고 힘을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이숙무기종자라는 말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가 인간의 정신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무기(無記)종자로서 다른 힘을 빌려서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종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육식(前六識)이 찰나찰나 활동하면서 조성한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되면서 이미 보존되어 있는 이숙무기종자에 힘이 되어 주고 업력을 증가시켜 주는 증상연종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에 이숙무기종자는 새로 증가해 오는 증상연종자 즉 이숙습기의 선성 또는 악성의 여부에 따라 선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또 악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때에 조성된 육식(六識)의 업력은 기존의 업력을 도와서 다른 결과의 과보를 맺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업력의 이름도 이숙습기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안식 등 육식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하고 이 이숙습기는 또 다른 업력을 도와서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그것은 전6식의 업력은 분명히 선, 악, 무기 등 삼성(三性)에 통하고 또 선악의 훈습력(薰習力)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숙습기로서 증상연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이를 분별훈습종자(分別薰習種子)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므로 유부(有覆)는 무명 등 번뇌의 뜻으로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뜻이 있으나 그 성질이 무기성(無記性)이므로 강력한 이숙인(異熟因)이 될 수 없고 동시에 자신의 결과(自果)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숙습기로서 이숙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은 전6식의 업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리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찰나찰나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마음이 착해서 착한 행동을 했을 때의 업력이 아라야식 내에 들어가 먼저 잘못을 저질러 조성된 종자에 증가하여 악의 내용을 약화시켜 악의 종자로 하여금 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이 증상연이 되어 그 내용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나쁜 종자가 좋은 비료 등을 만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숙습기의 논리에 의하여 이숙과(異熟果)라는 말이 있게 된다. 즉 전자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을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이 중생인데, 특히 인간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업력에 따라 선인(善人)이 될 수도 있고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이숙습기와 이숙과의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고 동시에 윤회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승에서 저승에 태어날 때 이승의 몸과는 달리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이숙인(異熟因)과 이숙과(異熟果)의 논리이다.
바) 과능변(果能變)과 태아(胎兒)
위에서 이숙(異熟)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그 가운데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이류이숙의 뜻도 있었다. 이 이류이숙의 뜻은 이숙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인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전생에서 금생의 몸을 받고 금생에서 내생의 몸을 받는 등 이승에서 저승의 다른 몸을 되풀이하면서 받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이승의 부모를 만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나는 순간 저승의 몸과 다른 몸을 받아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인능변과 과능변이 이루어진다.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인간의 모습을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과보를 형성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아라야식을 비롯한 말나식과 의식 등이 차례로 형성되는데 이때의 이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마음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다음의 정신계가 말나식인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 한다. 그리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을 제삼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 태안에 태어난 태아는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차례로 변천하며 모든 정신계를 형성하고 그 심식(心識) 하나하나는 또 사분(四分)의 내용으로 변화하여 인식의 활동을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계의 심식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의 뜻이 있는데 분별과 요별의 뜻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사분설(四分說)이라 한다. 사분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각식(各識)의 내용으로서 인식의 대상(六境)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을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분(相分)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인식대상이 마음 안에 비치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그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오관(五根)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끌여들여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분은 마음 안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상분을 인식하는 또다른 인식작용이 있는데 이를 견분(見分)이라 한다. 이 견분은 견조(見照)한다는 뜻으로 상분에 해당하는 대상물을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捨)고 하는 식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서 상분은 객관계(客觀界)가 되고 견분은 주관계(主觀界)가 된다.
이와 같이 한 식(一識) 안에 객관과 주관이 나누어져 모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을 이른바 분별심 또는 요별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곧 상대적인 마음의 형상으로서 진리롭게 관찰할 수 있는 합일(合一)의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견분은 상분에 대해서 선이다, 악이다,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니다라는 세 가지 성질로 인식을 하는데 여기에는 또다시 그 견분의 인식이 틀림없는지를 거듭 확인하는 자증분(自證分)이라는 심분(心分)이 있다. 심분이라는 말은 마음의 분한 또는 역할이라는 뜻으로서 심식 내에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자증분은 식(識 )의 역할에서 가장 중체가 되며 상분과 견분은 이 자증분 위에서 활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은 항상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또 활동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동시에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심분(心分)의 내용을 달팽이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달팽이는 전체의 몸이 있는데 그 머리 위에 두 뿔이 밖으로 튀어나와 이것이 밖을 내다보는 눈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달팽이에 심분을 비유해 보면 자증분은 달팽이의 몸과 머리에 해당하며 상분과 견분은 달팽이 머리 위에 나타난 두 뿔과 뿔 위에 있는 두 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심식 하나하나에는 상분과 견분 그리고 자증분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심분(心分)은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증자증분은 앞의 자증분의 활동을 뒤에서 재증명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팔식은 각기 사분(四分)의 작용이 있는데 이들 사분의 작용은 과능변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즉 과능변이란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부모를 만나 과보를 받을 때 그 과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그 과보는 다름 아닌 어머니 태 안의 태아를 말한다. 그러므로 총과보(總果報)를 받은 아라야식이 처음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이를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에 의하면 제이능변식인 말나식이 나타나고 또 제삼능변식인 의식 등 육식이 변화하여 정신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이 차례로 변화하여 인간의 정신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그 팔식 하나하나에는 그 식이 발생하는 찰나에 위에서 말한 사분의 작용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태 안에 태어난 태아의 정신계는 태어난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인간적인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태아이므로 지상에 태어난 아이들 만큼 밖의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 태아는 모태의 세계가 전 우주와도 같은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공간으로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태아는 그것을 모르고 넓은 공간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태아는 인간의 생활이 어머니 태 안에서 시작되며 비록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태아라 할지라도 팔식의 정신계는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식별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신라의 유식학자인 원측법사(圓測法師)는 그가 저술한 [해심밀경소]에서 어머니가 뜨거운 물을 마시면 태 안에 있는 태아는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매우 찬물을 마시면 그 태아는 추워서 덜덜 떠는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태아도 지상의 인간과 같이 모든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유식학적으로 보는 인생은 아라야식의 탁태(託胎)로부터 시작되며 탁태한 그 태아는 즉시에 팔식을 구족하고 동시에 사분작용을 야기하여 태내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과보를 받는 절차이며 과능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과능변의 뜻에는 위에서 설명한 심식의 구성과 사분작용의 활동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형성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육체가 형성되는 태내오위(胎內五位)를 살펴보기로 한다.
* 갈라람(Kalala)
육체의 형성과정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여 살펴보면 부모의 탐애(貪愛)로 말미암아 몇 방울의 정혈(靜血)이 모태 안에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마치 우유가 결집된 상태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포함됨과 동시에 전생의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갈라람이라고 하는데 갈라람(Kalala)이라는 말은 곧 응활(凝滑)이라는 뜻이 있으며 응활은 응고된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이 갈라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화합하여 출생한 최초의 사람이다.
정신과 육체가 화합한 갈라람이 태 안에 생겨남과 동시에 정신계가 형성되고 또 육체의 본질이 형성된다. 이들의 형성내용을 분류하여 보면 정신적인 변화와 형성은 이숙식 또는 능변식이라 하고,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보는 이숙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신과 육체가 갈라람이 중심하여 점차 구비하게 된다.
그 육체의 본질은 견고한 성질(堅性), 액체의 성질(溫性), 따뜻한 성질(煖性), 생동하는 성질(動性) 등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등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질로 구성된 육체의 본질은 처음으로 갈라람이라는 인간의 형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 내용은 완전한 인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 대한 조심성이 따르게 되며 또한 임신부로서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태아가 이러한 갈라람의 위치에 있는 기간은 태내에 태어나면서부터 일주일간을 말한다.
* 액부담(額部曇)
이 갈라람에서 더욱 발전한 인간의 형태를 액부담(額部曇)이라 하며 이 액부담(Arbuda)은 액체적인 육체가 점차 응고되어 그 위에 엷은 피부(薄皮)가 생겨나는 위치를 뜻한다. 마치 끓인 우유 위에 막이 생기는 것과 같이 살결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 액부담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2주(第二週)의 기간을 말한다.
* 폐시(閉尸)
다음은 폐시(閉尸)의 기간으로서 이 폐시(Pesi)의 기간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3주(第三週)에해당한다. 이 기간은 태아의 살결이 제법 견고해지고 혈육이 잘 형성되는 육체가 마련된다. 그러기 때문에 폐시(Pesi)라는 범어를 혈육(血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 건남위(鍵南位)
다음 태아의 기간은 건남위(鍵南位)에 들어가게 되며 건남위(Ghana)의 태아는 근육이 견고해진 아이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건남을 견육(堅肉)이라 번역하며 이는 제사주(第四週)의 태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 발라사(鉢羅奢)
다음으로 건남위의 태아가 더욱 성장하여 사지(四肢)와 오장(五臟)과 육부(六腑)가 완성되는 기간으로 이를 발라사(鉢羅奢)라고 한다. 발라사(Prasakha)는 지절(支節)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곧 인간의 형체가 완전히 구비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발라사의 기간은 위에서 말한 사위(四位)의 태아 기간보다도 훨씬 긴 기간이므로 어머니의 태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까지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태아가 태어나면서 지상에 출생하기 이전의 변화는 쉴새없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과능변의 형태이며 동시에 이숙과의 내용을 뜻한다. 요컨대 이러한 태아관(胎兒觀)은 모두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과거의 업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모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 등 육체적 차별이 있게 되고 부모와 주거지 등 환경의 차별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생에 지은 업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승의 과보의 차별이 있게 될 뿐이지 인간의 근본 자성까지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중생은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약간의 차별이 있는 과보를 받지만 일단 과보를 받은 중생들은 평등한 입장에서 삶을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전생의 업력은 선업 또는 악업(因是善惡)이지만 금생의 과보를 받고나면 그 과보의 내용은 선성에 치우치지 않고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무기성(果是無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전생의 악업에 의하여 금생의 악보를 받고, 또 전생의 선업에 의하여 금생의 선보를 받는 인과가 있으나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이라는 것이다.
무기라는 말은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 입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승에 출생한 태아는 귀천과 빈부의 환경을 접하기는 하지만 그 태아들의 자성(自性)은 평등한 것이다. 즉 누구나 꼭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의 삶을 출발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진리에 의하여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도 부자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부잣집 아이라 할지라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태아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본성이 곧 불성(佛性)이고 지혜의 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아라야식이 인간의 과보를 받게 되면 이를 진이숙(眞異熟)이라 하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육식 등 여타의 정신과 육체가 형성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4) 공업(共業)과 사회(社會)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을 알아보았다. 아라야식이 인간의 모든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진체의 업력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총보(總報)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라야식으로부터 모든 정신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마음(七轉識)과 여러 정신작용(五一沈)이 형성되고, 또 육체의 부분이 하나하나 형성되는데 이들을 모두 별보(別報)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가 자라나듯이 아라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에서 지말식(枝末識)과 육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만히 형성되면 인간으로서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삼계와 육도 가운데 인간계(人道)의 과보를 받고 인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중생의 종류 가운데 인간계에 태어나서 살도록 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습을 구비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업력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계도 창조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사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생하면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공업은 그 사회를 공동으로 유지시키는 업력을 말하는데 가령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휘하여 한국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한국 내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공업을 발생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자연계까지도 원만하게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 악화된다면 그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세계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연계가 파괴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업은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뜻하는데 그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무질서해지면 공동사회도 필연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생태계는 뭇 생명체가 발생하는 공업력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행위는 자신에게만 한하는 업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한하는 업력은 불공업(不共業)으로서 불공업은 자신의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공업은 이와 다르다.
공업은 공동사회를 형성해가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힘을 표현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업력은 다음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는가 하면 공동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공업이 있다.
이러한 업력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발휘하게 되는데 업력의 사상을 알고보면 그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심성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남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개인질서와 더불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법은 중생의 질서를 잡아주는데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믿음(信)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덕성(佛德)을 신앙하고, 둘째는 인간의 청정자성(佛性)과 자연에 포함된 진여성(眞如性)에 해당하는 실성(實性)을 신앙하며, 셋째는 모든 인과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공능함을 발휘하는 공능(功能)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신앙은 인과법칙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인과법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앙하지 않게 되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거칠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 사회에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개인과 사회는 결과가 된다. 동시에 모든 삼라만상도 자체의 공능과 진여의 세력이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 마음의 행위
이상과 같이 인과는 곧 개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며 그 인과를 조성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보살심(菩薩心)을 발휘하여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인 아집(我執)과 모든 것을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我所)이 앞서는 마음이 있다.
아집과 소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제6의식에서 보통 나타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층심리에서 충동질하는 제7말나식에 원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말나식으로부터 보살심을 방해하고 여러 진리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명은 모든 것이 평등한 진리이며 주관과 객관계가 통일된 본성을 망각하고 나타나는 무지를 뜻한다. 본래 본성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와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를 무아성(無我性)이라 하며 무아성은 곧 자타(自他)가 없으며 모든 생명체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불심이다.
이러한 무아를 진아(眞我)라 하며 진아는 나 가운데 가장 참된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라고 할 때 육체만을 나라고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아집을 앞세우는 나를 말할 때가 많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아만(我慢)과 나만을 사랑하는 아애(我愛)를 앞세운 나를 가리키는 때가 많다.
이는 완전히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아치(我痴)의 소산으로서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또 불성 및 진여성에 해당하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아치라고 한다. 동시에 본심에서 반대의 마음으로 돌아서 무지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를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전도심은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충동질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행위에 따라 육체의 행위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행이 선행하지 않는 한 육체의 행위도 정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마음을 고치는데는 염불과 참선을 닦아야 한다는 등 부단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과 참선만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무명과 아집과 아애와 아만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제는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그 마음의 병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성자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한다. 스스로 무명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위에서 공업과 불공업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업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각자가 찰나찰나 행동을 통하여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즉각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들 업력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눈(眼識). 귀(耳識). 코(鼻 識). 혀(舌識). 몸(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며 생활하는데 그 행위로 말마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다음에 과보를 받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내세운다. 이 아라야식은 인간의 몸(五根)과 인간의 행동으로 조성되는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과 그밖에 인간이 사는 사회까지도 잘 포섭하고 섭지(攝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전생의 업종자(業種子)와 자신의 몸(五根)과 그리고 자신이 살게되는 세계(器世間)을 능히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며, 또 이 세상에 출생한 후에도 자신의 업력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며 동시에 이 세상이 건전하게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두 아라야식이 한다.
출생할 때 몸과 종자와 세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과능변(果能變)이라고 하며 이를 아라야식의 과상(果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전이나 출생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몸과 업력과 세간을 유지시키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아라야식의 인상(因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心識)이라는 뜻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종자식은 일체의 선업과 악업인 유루업(有漏業)과 동시에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을 모두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자식은 칠전식(七轉識)이 훈습한 종자를 잘 보존하고 섭지하였다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그 종자로 하여금 그 중생이 사는 현재 생활에 나타나게 하고, 그 중생이 사는 현상계(現象界)도 변현(變現)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변현이라는 말은 업력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창조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전생의 업력으로 자신과 사회를 창조하여 나타났고, 또 현재 사는 자신과 사회도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에 의하여 창조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모든 주체는 여러 심식 가운데서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이상과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라야연기(賴耶緣起)라고 한다. 즉 모든 정신계와 물질계는 오직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되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과 종자는 이에 부합하는 연을 만나서 결과 즉 과보를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연을 만나야 결과를 발생하게 된다. 만약 업력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그대로 아라야식에 보존되데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연은 결과에 대한 역할이 업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인(因)과 연(緣)은 과(果)를 가져오게 하는데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반반씩 힘을 가하여 과보가 초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발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력이고 또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은 연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항상 인과 연이 부합되어야 하는데 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동등하게 역할을 한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되며 인과 연과 과가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 못지않게 연도 중요한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청정하게 하는데 그 사회의 환경이 많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모두 연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식의 대상인 객관계와 자연계를 연으로 하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연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환경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라야식의 종자가 좋게 싹이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사화교육 등 모든 교육도 연이 되는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연을 만나 자신의 아라야식에 있는 종자가 잘 자라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도리는 무궁무진한 진리이며 심오한 경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창조라고 한다. 악인(惡因)이 선연(善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선과(善果)를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인(善因)이 악연(惡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악과(惡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연기의 도리이며, 동시에 창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여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모든 것의 총인(總因)이라 하며 동시에 아라야식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인상(因相)이란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을 살폈다. 아라야식은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몸을 받고 또 그 몸과 정신을 부단히 변화시키고 또 유지시킬 수 있는 체성(體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또 아라야식은 진이숙(眞異熟)으로서 과보를 받는 총체라는 뜻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보식은 과체(果體)로 최초에 과보를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중생이 삼계와 육도 내에서 업력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을 때, 과보를 아라야식이 최초로 받으며 그리고 능히 변화시켜 무형(無形)의 업력과 더불어 유형(有形)의 과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최초의 생명체이며 근원이다. 여기에 의지하여 칠식(七識)과 육근(六根)이 생기며 출생 후도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인간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것을 아라야식의 별명인 아다나식(阿陀那識)에서도 알 수 있다. 아다나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고 번역하며, 집지(執持)의 뜻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비롯하여 정신과 육체도 함께 잘 붙들어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중생의 과보를 받는데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이숙식(異熟識)으로 과보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이 과보체(果報體)를 출생하는 내용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학설은 이른바 인간의 태아(胎兒)가 출생하는 것과 그 내용이 같으므로 불교적 태아설과 함께 설명해 보고자 한다.
가) 인능변(因能變)과 태아(胎兒)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능히 변천한다는 뜻으로서 과보에 대한 원인의 변화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불교의 교리는 반드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능변은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을 때, 그 업인이 어떻게 변화하여 과보가 발생하는가를 소상히 알려주는 학설이다. 물론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출생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사생(四生)의 내용을 다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나 모든 교리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우리 인간을 대표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능변과 과능변도 인간의 태아와 관계시킴으로써 더욱 현실성이 있고, 또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태아로 출생하기 전에 어떠한 영혼이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과거 소승불교에서 가장 많이 취급해 왔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위에서 말한 인능변과 과능변의 총체가 되는 아라야식을 말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소승불교에서는 그 문제를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의 사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유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유(中有)는 전생에 지은 모든 업력을 지니고 사망해서 다시 출생하기까지의 중간 생명을 뜻한다.
* 생유(生有)는 중유 기간의 영혼(阿賴耶識)이 출생의 인연을 만나 이승에 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 본유(本有)는 중유가 출생하여 이승에서 살다가 사망하기까지의 생명체를 뜻한다.
* 사유(死有)는 이승에서 살다가 인연이 다 되어 사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중생이 윤회하는 과정을 사유(四有)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사유 가운데 중유와 생유가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아라야식의 인능변과 과능변과의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설명의 편의상 비록 소승불교의 교설이지만 요약하여 인용해 보기로 한다.
소승불교의 중유설은 매우 인격화된 논리를 갖고 있다. 즉 중생이 사망하면 49일을 전후하여 거의 내세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생활을 5,6세의 아동만큼이나 큰 존재로서 냄새를 맡고 식사를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매우 검은 빛을 발휘하며 업력이 같은 무리들끼리 산다. 선업을 많이 지은 중생들은 그 몸에서 매우 흰 빛을 발휘하며 역시 선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산다.
중유는 부단히 출생처를 찾아 우주 공간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므로 중유의 별명을 구유(求有)라고도 한다. 구유라는 말은 공간에 있으면서 출생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유를 건달바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심향(尋香)이라 하며 심향은 냄새를 먹고 사는 중유의 생활을 나타낸 말로서 냄새를 찾아다닌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공간에 있는 중유는 이승의 출생처를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다시 생과 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신의 업력과 인연이 맞는 부모와 세계를 발견하면 곧 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유는 천안(天眼)과 같이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도 다 볼 수 있는데 다만 업력에 적합한 것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은 업력과 합당한 부모와 환경을 발견하면 급속도로 그 세상에 알맞은 업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계의 부모를 발견했다면 욕계의 부모는 음욕(淫慾)이 많은 중생들이 많으니까 그 중유도 곧 부모에 대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될 중유는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남자가 될 중유는 모친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이는 욕계의 이성(異性)이 서로 상대를 사랑하는 업력과 부합하는 업력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중유는 이승의 모친에게 있는 태중(胎中)이 곧 궁전과 같다고 착각하고 태내에 점점 접근하여 결국 탁태(託胎)하고 만다.
이와 같은 중유가 태어나는 과정은 소승불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대승불교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에서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확실히 내세우지 못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내세워 태중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 이론이 곧 아라야식을 중심한 총보(總報)와 별보(別報)의 설명이다. 그리고 대승유식학에서의 소승불교의 중유 대신에 아라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하여 모태(母胎)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확정짓게 된다.
나) 아라야식(阿賴耶識)에 대한 8가지 증명
이와 같이 윤회의 주체로 확정짓게 된 이유를 유가사지론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고 잇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전생에 지은 업력을 무엇이 보존하였다가 금생에 태어나게 하는가? 아라야식이 존재함으로써 전생에 업력을 보존할 뿐 아니라 금생에도 출생할 수 있고 또 안식(眼識) 등 여러 심식(心識)도 활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식(六識)도 활동할 수 있고 또 선악의 업력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최초의 생명체가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정신체(心識)도 생기(生起)하지 못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안식 등과 함께 활동하는 의식과 의식의 기억력이 명료하게 나타날 수 없고 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유루종자(有漏種子)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간단없이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또 육식신(六識身) 체성 등은 단절이 많은데 무엇으로 인과응보의 업력설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중생 각자가 행동하는 아업(我業)과 인식의 대상인 경업(境業)과 중생이 의지하는 의업(義業)과 중생이 살고 있는 기업(器業) 등 사종업(四種業)을 설명할 수 없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의 사려(思慮)가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정(禪定)의 유무(有無)를 구별하기 힘들게 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멸진정(滅盡定)과 같은 깊은 선정에 들 수 없고 또 멸진정에 들면 심식(心識)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것이며 현재의 수명도 단절되는 모순을 따르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이 사망할 때 상체(上體)가 마비되거나 하체(下體)가 냉촉(冷觸)되면서 점점 시체화하는 절차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의식도 점차 마멸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단절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팔종의 증거를 들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깊이 생각하여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라야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을 설명할 때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특히 그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날 때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할 수 있는 것은 곧 아라야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사망할 때 최후까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아라야식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주체를 여덟 가지 증거를 들어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세의식(細意識)과 일미온(一味蘊), 그리고 보특가라(補特伽羅)와 궁생사온(窮生死蘊), 또는 근본식(根本識) 등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내세워 윤회의 주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라야식 사상만큼 그 이론과 사상이 구족하지 못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라야식이 가장 진리적인 이론을 구비하고 있는 심식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도 가장 최초의 생명체가 되고 있음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어머니 태중에 최초의 생명체로 안착한 것은 아라야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식(識)은 모태에 태어나면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착 즉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정혈(精血)과 아라야식과 화합할 때 최초의 태아가 출생하게 되는데, 그 후 즉시 인간의 모습을 꾸미는데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의 부모는 연(緣)이 되고 아라야식은 업력과 함께 인(因)이 되며 인과 연이 함하여 결과(果報)가 생기는 것인데, 그 태아는 곧 과보이다. 인과법에 있어서 인과 연의 도움이 없으면 과를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라야식에는 연이 있어야 하고 그 연은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생의 인(因)과 부모의 연(緣)이 합하여 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러나 탄생한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 태아의 내용은 업력과 연에 의하여 완숙되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아라야식이 핵심이 되어 그 내용을 완숙하게 되도록 하는데 그것이 곧 인능변(因能變)의 조화이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모태에 안착하자마자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동시에 아라야식에 보존된 전생의 업력이 부모의 연이 가해짐으로써 능히 변화를 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업인이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형체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업인이 연을 만나 인간의 과체(人體)를 형성시킨다는 뜻이다. 그 인(因)의 내용은 등류습기(等流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 등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두 습기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 등류습기(等流習氣)
등류습기(等流習氣)의 뜻은, 등(等)은 상사(相似) 즉 서로 같다는 뜻이고 유(流)는 유류(類流) 즉 종류와 무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습기(習氣)는 전7식(前七識) 등이 활동하여 익히고 습관들인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습기는 다음의 결과를 가져올 업력과 같으며 종자(種子)라는 별명도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등류습기는 전생에 모든 정신(七轉識)과 육체 등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받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즉 동등한 종류(等類)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習氣)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받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친인연종자(親因緣種子)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이 친한 것만이 인과응보가 될 수 있는 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유식론(成唯識論)]에는 등류습기가 인연이 되는 것은 과보가 인(因)과 유사하다(等流習氣爲因緣故 果似因)라고 하였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는 '등류의 뜻은 인연이 생하므로 인연의 법은 반드시 그 성질이 동등하다(等類義 爲因緣生 因緣之法 必同性故)'라고 하였다. 즉 인성(因性)과 과성(果性)이 동등한 인과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업력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업자득의 철저한 인과법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업인설이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악업은 금생에 악보를 받도록 하고 또 전생의 선업은 금생에 선보를 받도록 하는 것이 등류습기의 업력이다.
등류습기는 때로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이 명언종자는 우리의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의식할 때 언어와 명사를 연상하면서 행동한 업력종자를 뜻한다. 명언은 표의명언(表義名言)과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나누어진다.
* 표의명언은 어떤 사물의 뜻과 의리(義理)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것을 뜻하고, 또 평가하고 표현할 때 명사(名詞)와 구문(句文)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나 행동할 때 그 뜻을 생각하고 평가하며 또 언어 문자로 말하거나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내용의 행위가 우리 생활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업력의 이름을 명언종자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제6의식이 이미 명사와 문구가 붙어있는 대상을 반연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 현경명언은 마음(心識)이 인식의 대상을 마음속에 능히 비추어 그 대상의 명사와 문구를 환하게 생각하여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대상의 모습을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을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의 모습을 견분(見分)이 분별하고 요별할 적에 그 대상의 명사와 명구(名句)를 생각하면서 하게 되므로 그 행동 속에 명사와 명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업력의 이름도 명언종자라고 지은 것이다. 이들 두 가지를 분명히 나누어 말할 것 같으면 표의명언은 반연되어지는 인식의 대상(所緣境)의 이름과 명구의 수동적 뜻을 생각하면서 표현하는 행동의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현경명언은 칠전식(七轉識)이 능동적으로 인식의 대상을 반연하여 그 명언과 구문을 분별하는(能緣識) 것에서 조성되는 종자를 뜻한다. 이와 같이 표의는 수동적인 소연(所緣)이고, 현경은 능동적인 능연(能緣)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등류습기에는 명언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심식(心識)의 활동(能緣識)과 인식의 대상(所緣境)을 보다 넓게 그리고 심오하게 업사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류습기는 업인으로서 반드시 같은 성질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이숙습기(異熟習氣)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이숙습기라는 업력은 반드시 인(因)과 과(果)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異性)을 초감(超感)하기 때문이다. 이숙(異熟)이란 말은 이미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찰나찰나 변천하고 변화시킨다는 뜻으로서 인과에 있어서도 인(因)과 과(果)가 반드시 동일하게 성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因)의 성질과 다른 과(果)가 서로 다르게 성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숙습기의 조성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六識)이 한다. 이들 육식이 활동하는 행위는 선업과 악업, 그리고 무기업 등 세 가지 성질의 업력으로 조성되는데, 이들 업력들은 제8아라야식에 보존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증상연(增上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내에는 이미 선업과 악업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 육식이 찰나찰나 선악의 행위를 통하여 선악의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 이들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薰習)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새로운 업력의 영향을 끼쳐 기존 업력으로 하여금 본래의 성질을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이미 나쁜 짓을 하여 악업의 업력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착하게 변하여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선업이 기존의 악업에 영향을 주어 다음의 결과를 악업과는 다른 선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과의 도리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의 진리는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고정적인 인과사상으로 정립되어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융통성 없는 인과사상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선업을 많이 닦아도 이미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선인이 될 수 없게 되고 또 아무리 악업을 지어도 이미 선업을 좀 지어놓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는 인과법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일인주의(一因主義)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육식의 활동여하에 따라 변하며 또 아라야식의 내용도 찰나찰나 변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박토에 씨앗을 심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후 좋은 거름을 주어서 잘 가꾸면 그 씨앗은 박토에 그대로 있다가 나는 것보다 훨씬 잘 클 것이다. 또 씨앗은 나쁘지만 그 토질이 좋은 데다 거름을 잘 해주면 그 씨앗은 토질과 거름의 영향으로 매우 잘 커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여 기존의 선업과 선과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고 생각되면 더욱 선업을 지어 그 악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없애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因)이란 한 번 지어 조성해 놓으면 하나의 세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을 공능(功能)이라고 하며 공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인력(引力)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업력을 인이라 하고 인을 또 종자(種子)라고 비유하여 부른다. 이러한 종자의 힘에 의하여 열매를 맺듯이 업력은 삼계의 세계에 두루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이숙습기라 한다. 이숙습기는 친생자과(親生自果)하는 등류습기와는 달리 친생이과(親生異果)하는 법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칙에 의하여 아라야식은 내생의 총과보를 받을 수 있는 진이숙(眞異熟)이 되고 또 이러한 진이숙은 후천적으로 지은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지은 육식의 업력이 먼저의 진이숙을 변화시키는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업력에 의하여 몸을 바꾸어 윤회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현세의 몸도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인간의 내용으로 변천할 수 있다. 참으로 이숙습기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있는 가장 현실적인 업력설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두 습기설을 살펴보았다. 이 두 습기설은 두 가지 업력설로서 앞으로 과보를 받는 결과에 대하여 가장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이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因能變)이라 한다. 인능변은 또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등 두 가지 습기, 즉 두 가지 업력의 변화를 내용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업력이 다음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이러한 업력은 또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과보를 끌고 다니는 인력(引力)을 말하여 인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업에 의하여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과보를 이숙과(異熟果)라 한다. 이숙과는 또 진이숙과 이숙생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진이숙은 곧 아라야식이 최초에 과보를 받을 때 이름한 것이고 동시에 이 진이숙을 끌고 온 업력의 이름을 인업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진이숙에서 발생되는 업과를 이숙생(異熟生)이라 하며 이숙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전칠식(前七識)을 뜻한다. 그리고 칠식과 더불어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 육근(六根)도 이숙생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이숙으로부터 몸과 정신작용이 동시에 변화하여 결과로 나타나며 인간의 모습과 내용을 구비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할을 하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 한다. 만업은 구석구석 빈틈없이 하나의 과보를 원만하게 구족되도록 해주는 업력이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스승이 윤곽(眞異熟)을 그려 놓으면 제자가 그 자세한 내용까지도 채워 그려 넣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내용으로 한 업력의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그 업력이 세분화하여 과보의 총체를 끌고 오는 업력을 인업(引業)이라 하고 그 총체 위에 하나하나 인간의 형체를 구비해 주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업에 의하여 끌려온 과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만업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계와 이목구비 그리고 오장육부가 형성되는 것을 별보(別報)라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능히 받도록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무루업(無漏業)을 제외한 선업은 가히 사랑스러운 과보(可愛果)를 받고 또 악업의 종자는 가히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比可愛果)를 반드시 가져오게 하는 초감(招感)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을 이숙습기(異熟習氣)라 한다. 이는 삼계의 윤회를 가능케 하는 업력으로서 업종자(業種子) 또는 유지습기(有支習氣)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유지습기란 삼계에 윤회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선악업은 정발업(正發業)과 수발업(隨發業)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전육식 가운데서 제6의식의 활동에서 조성되는 업력을 정발업이라 하고 또 의식을 제외한 안식 등 전오식이 활동하여 조성된 업력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심식의 활동 내용에 의하여 명명된 이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은 결정적인 활동을 하지만 오식(五識)은 대부분 의식에게 수종(隨從)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업(發業)이라는 뜻은 곧 모든 심식의 행동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이 발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다름 아닌 업력을 즉시 발생시키고 선악업을 조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식의 활동에는 서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정발업과 수발업 등 여러 업력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들이 모여 아라야식에 보존되었다가 과보를 가져올 때 능변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이승의 부모의 연(緣)을 만났을 때 선악업과 함께 과보를 발생하기 시작하여 그 과보를 완성할 때까지 능히 변화하는 업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업력의 세력이 변화없이 과보를 받을 수 없다.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능변(果能變)도 인능변의 태아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 형성될 때까지의 변화과정을 뜻한다. 이는 업력과 더불어 과보의 변화와 과보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因)과 과(果)는 불가분리하며 항상 동시에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 없는 과능변이 있을 수 없고, 과능변 없는 인능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바와 같이 인능변이 과보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의 업력이 아라야식에 실려와서 부모의 연을 만나 그 연의 도움으로 인간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과능변은 곧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말하기를 "과능변은 두 가지 습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果能變 謂前二種習氣故)"라고 한 바와 같이 업력의 결과이다. 여기서 두 가지 습기란 말할 것도 없이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뜻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업력(習氣)에 의하여 과보의 완성이 가능하다.
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면 인능변은 종자인 업력에 의하여 태아(果報)가 모태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變現)을 말한다. 그러나 과능변은 종자, 즉 업력에 의하여 생겨난(因生) 현재의 과보(現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은 내적인 원인론(原因論)인데 반하여 과능변은 외적인 결과로서 인간의 형체를 구성해 나아가는 외부의 변화(變現)를 뜻한다.
이러한 과능변의 내용을 능변과 소변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능변(能變)은 소변(所變)에 반대되는 어구로서 능히 창조적인 입장인 능조자(能造者)를 뜻하며, 소변은 창조되어지는 피조물(被造物)의 입장을 뜻한다. 이는 불교가 어떤 특정적인 유일신(唯一神)을 부정하고 인과의 법칙을 내세워 업력을 창조자 대신으로 내세운 표본이 되는 것이다. 본래 능조자격인 원인과 피조물격인 결과도 없는 것이 진리(眞如)의 세계이다. 그러나 윤회하고 있는 중생계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있는 것이며 그 논리가 곧 여기서 말하는 인능변과 과능변의 내용이다. 이러한 능소(能所)의 관계는 자기의 업력(自業)이 자신을 창조(自得)한다는 자업자득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마) 이숙습기(異熟習氣)의 과보(果報)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의 진리는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라는 업력이 연을 만나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과능변이라고 한다.
인능변 가운데 등류습기의 능변(能變)은 선인은 선과를 가져오게 하고, 악인은 악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업인(業因)과 과보(果報)가 그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등류과(等類果)라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등류인(等類因)에 의하여 등류과가 초래된 것이며 또 동류인(同類因)에 의하여 동류과(同類果)가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인과법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등류습기의 내용보다 더욱 복잡하고 또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인과법칙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이숙습기의 논리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업인과는 달리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지옥의 중생이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고, 또 인간이 사왕천(四王天)과 제석천(帝釋天) 등 여러 천국에 태어날 수 있는 윤회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곧 이숙습기의 원리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숙이라는 뜻은, 변천한다는 뜻과 변화한다는 뜻과 교환한다는 뜻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는 인과의 부사의한 도리를 설명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유식학의 인과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숙의 내용을 중국의 규기법사(窺基法師)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종류의 변화과정 등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넓혀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 시간을 달리하여 변천하는 것(異時而熟)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시시각각 변천한다는 뜻이다. 먼저 원인의 변천을 살펴보면 중생 각자가 업력을 아라야식 속에 훈습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그 업력을 곧 종자라고도 표현한다. 이 종자는 아라야식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변천 또는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면서 다음의 결과를 맺을 때까지 생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는 서로 인과 연이 되어 먼저의 종자는 다음 시각의 새로운 종자로 변천하면서 항상 생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자가 종자를 출생시킨다는 말은 동일한 종자가 다음의 새 종자로 발생한다는 뜻으로서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내용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력이고 또 항상 새로운 생명력으로서 여러 가지 생활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인 아라야식은 인간의 의식과 육체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새로운 연을 만나면 즉시 우리 인간의 정신인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새로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 전문적인 언어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즉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원인이 되고 인간 내부와 주위의 환경은 연이 되는 것이며 현재의 행동과 인간의 주변에 나타난 새로운 상태가 곧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을 발생시킨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익힌 여러 가지 지식과 습관을 곧 아라야식 내에 다음의 지식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이것이 다음의 행동과 지식 그리고 습관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지식과 습관이 업력이 되어 현재의 행동과 지식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행이라는 말은 현재의 정신 행위, 육체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습을 뜻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과거에 각자가 익히고 배웠던 습관과 지식으로서 자신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의 발생이며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과 습관의 발생은 현재의 생활을 뜻하는데 현재의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종자에 의한 결과로서 이 결과인 행위는 다시 원인을 조성하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정신 생활과 육체 행위는 아라야식의 업력 즉 종자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으로서 실현되는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결과임과 동시에 업력을 조성하여 다시 자신의 아라야식 내에 업력인 종자를 보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한다. 즉 현재의 행동은 아라야식 내에 종자를 훈습(薰習)한다는 말이다. 훈습한다는 말은 조성(造成)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며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조성해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킨다는 뜻이 된다.
이상과 같이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전생과 금생, 또는 금생과 내생 등과 연결시켜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논술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승적인 인과설이다. 그러나 대승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곧 현재의 생활 숙에서 인과가 시시각각으로 성립되고 또 전개되며 찰나찰나에 업력을 조성하고 동시에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듣고 보았던 것은 곧 아라야식 내의 종자가 되며 그것은 또 다음 찰나의 지식과 습관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야말로 찰나에 인과가 성립되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사상이며 또한 찰나인과사상(刹那因果思想)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을 고정시켜 운명에 얽매이게 하는 신(神)의 창조설과 또는 고대의 이교도들의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인과론과 업보사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쳐 주는 사상인 것이다. 찰나에 변천과 변화가 없는 인과사상은 인간의 발전을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승유식학(大乘唯識學)에서는 고대 인도의 운명론적인 인과사상을 타파하고 현재의 불행과 빈곤과 고통의 상태를 찰나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인 행위와 현행에 의하여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개조와 아울러 행복과 부귀와 안락한 상태의 환경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에 이숙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것(變異而熟)
이는 위에서 살펴본 이시이숙(異時而熟)의 논리와는 조금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물론 넓은 안목으로 보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내용에지만 그러나 학문적으로 구별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면 따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이라는 말은 정신과 육체 또는 모든 사물이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변천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시시각각으로 겉모습만 변천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을 비롯한 모든 내용도 변천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면서 변천해 왔고 현재도 찰나찰나 그 내용은 변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인과법칙이 없으면 인간의 내용은 발전할 수 없고 개선될 수 없으며 또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중심한 모든 심식은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식들에 의존한 육체의 내용과 외모도 심식의 선과 악의 여하에 따라 발전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밖의 자연계도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인간의 선악 여하에 따라 자연계도 선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종류를 달리하여 이루어지는 것(異類而熟)
종류 즉 과보를 달리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과 내용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생의 과보와 금생의 과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을 뜻한다. 가령 윤회과정에서 인간이 사망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났다고 하면 금생의 인간의 몸과 내생의 극락세계의 몸과 서로 다른 종류의 몸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하나의 변천이기 때문에 이숙의 의미가 있다.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생과사를 되풀이하면서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이류이숙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숙의 진리도 업력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세계는 업력과 관련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업력의 내용을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업력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일한 인과 과가 연결되도록 하는 등류습기라는 업력도 있지만 항상 다른 종류로 변천시켜 과보를 받도록 하는 이숙습기도 있다는 것이 인과사상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 이숙습기는 다른 과보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적극 힘을 발휘하는 업력으로서, 이는 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전6식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다. 이들 심식에 의하여 조성된 선악의 종자가 아라야식에 훈습될 때,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이숙무기종자(異熟無記種子)를 도와서 다른 성질의 결과를 초래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이숙습기를 증상연종자(增上緣種子)라고도 한다.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 즉 업력에 대하여 어떤 과보나 결과를 발생하도록 연(緣)이 되어주고 힘을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이숙무기종자라는 말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가 인간의 정신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무기(無記)종자로서 다른 힘을 빌려서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종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육식(前六識)이 찰나찰나 활동하면서 조성한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되면서 이미 보존되어 있는 이숙무기종자에 힘이 되어 주고 업력을 증가시켜 주는 증상연종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에 이숙무기종자는 새로 증가해 오는 증상연종자 즉 이숙습기의 선성 또는 악성의 여부에 따라 선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또 악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때에 조성된 육식(六識)의 업력은 기존의 업력을 도와서 다른 결과의 과보를 맺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업력의 이름도 이숙습기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안식 등 육식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하고 이 이숙습기는 또 다른 업력을 도와서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그것은 전6식의 업력은 분명히 선, 악, 무기 등 삼성(三性)에 통하고 또 선악의 훈습력(薰習力)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숙습기로서 증상연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이를 분별훈습종자(分別薰習種子)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므로 유부(有覆)는 무명 등 번뇌의 뜻으로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뜻이 있으나 그 성질이 무기성(無記性)이므로 강력한 이숙인(異熟因)이 될 수 없고 동시에 자신의 결과(自果)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숙습기로서 이숙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은 전6식의 업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리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찰나찰나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마음이 착해서 착한 행동을 했을 때의 업력이 아라야식 내에 들어가 먼저 잘못을 저질러 조성된 종자에 증가하여 악의 내용을 약화시켜 악의 종자로 하여금 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이 증상연이 되어 그 내용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나쁜 종자가 좋은 비료 등을 만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숙습기의 논리에 의하여 이숙과(異熟果)라는 말이 있게 된다. 즉 전자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을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이 중생인데, 특히 인간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업력에 따라 선인(善人)이 될 수도 있고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이숙습기와 이숙과의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고 동시에 윤회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승에서 저승에 태어날 때 이승의 몸과는 달리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이숙인(異熟因)과 이숙과(異熟果)의 논리이다.
바) 과능변(果能變)과 태아(胎兒)
위에서 이숙(異熟)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그 가운데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이류이숙의 뜻도 있었다. 이 이류이숙의 뜻은 이숙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인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전생에서 금생의 몸을 받고 금생에서 내생의 몸을 받는 등 이승에서 저승의 다른 몸을 되풀이하면서 받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이승의 부모를 만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나는 순간 저승의 몸과 다른 몸을 받아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인능변과 과능변이 이루어진다.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인간의 모습을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과보를 형성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아라야식을 비롯한 말나식과 의식 등이 차례로 형성되는데 이때의 이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마음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다음의 정신계가 말나식인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 한다. 그리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을 제삼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 태안에 태어난 태아는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차례로 변천하며 모든 정신계를 형성하고 그 심식(心識) 하나하나는 또 사분(四分)의 내용으로 변화하여 인식의 활동을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계의 심식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의 뜻이 있는데 분별과 요별의 뜻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사분설(四分說)이라 한다. 사분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각식(各識)의 내용으로서 인식의 대상(六境)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을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분(相分)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인식대상이 마음 안에 비치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그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오관(五根)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끌여들여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분은 마음 안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상분을 인식하는 또다른 인식작용이 있는데 이를 견분(見分)이라 한다. 이 견분은 견조(見照)한다는 뜻으로 상분에 해당하는 대상물을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捨)고 하는 식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서 상분은 객관계(客觀界)가 되고 견분은 주관계(主觀界)가 된다.
이와 같이 한 식(一識) 안에 객관과 주관이 나누어져 모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을 이른바 분별심 또는 요별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곧 상대적인 마음의 형상으로서 진리롭게 관찰할 수 있는 합일(合一)의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견분은 상분에 대해서 선이다, 악이다,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니다라는 세 가지 성질로 인식을 하는데 여기에는 또다시 그 견분의 인식이 틀림없는지를 거듭 확인하는 자증분(自證分)이라는 심분(心分)이 있다. 심분이라는 말은 마음의 분한 또는 역할이라는 뜻으로서 심식 내에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자증분은 식(識 )의 역할에서 가장 중체가 되며 상분과 견분은 이 자증분 위에서 활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은 항상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또 활동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동시에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심분(心分)의 내용을 달팽이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달팽이는 전체의 몸이 있는데 그 머리 위에 두 뿔이 밖으로 튀어나와 이것이 밖을 내다보는 눈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달팽이에 심분을 비유해 보면 자증분은 달팽이의 몸과 머리에 해당하며 상분과 견분은 달팽이 머리 위에 나타난 두 뿔과 뿔 위에 있는 두 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심식 하나하나에는 상분과 견분 그리고 자증분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심분(心分)은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증자증분은 앞의 자증분의 활동을 뒤에서 재증명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팔식은 각기 사분(四分)의 작용이 있는데 이들 사분의 작용은 과능변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즉 과능변이란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부모를 만나 과보를 받을 때 그 과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그 과보는 다름 아닌 어머니 태 안의 태아를 말한다. 그러므로 총과보(總果報)를 받은 아라야식이 처음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이를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에 의하면 제이능변식인 말나식이 나타나고 또 제삼능변식인 의식 등 육식이 변화하여 정신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이 차례로 변화하여 인간의 정신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그 팔식 하나하나에는 그 식이 발생하는 찰나에 위에서 말한 사분의 작용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태 안에 태어난 태아의 정신계는 태어난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인간적인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태아이므로 지상에 태어난 아이들 만큼 밖의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 태아는 모태의 세계가 전 우주와도 같은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공간으로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태아는 그것을 모르고 넓은 공간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태아는 인간의 생활이 어머니 태 안에서 시작되며 비록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태아라 할지라도 팔식의 정신계는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식별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신라의 유식학자인 원측법사(圓測法師)는 그가 저술한 [해심밀경소]에서 어머니가 뜨거운 물을 마시면 태 안에 있는 태아는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매우 찬물을 마시면 그 태아는 추워서 덜덜 떠는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태아도 지상의 인간과 같이 모든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유식학적으로 보는 인생은 아라야식의 탁태(託胎)로부터 시작되며 탁태한 그 태아는 즉시에 팔식을 구족하고 동시에 사분작용을 야기하여 태내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과보를 받는 절차이며 과능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과능변의 뜻에는 위에서 설명한 심식의 구성과 사분작용의 활동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형성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육체가 형성되는 태내오위(胎內五位)를 살펴보기로 한다.
* 갈라람(Kalala)
육체의 형성과정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여 살펴보면 부모의 탐애(貪愛)로 말미암아 몇 방울의 정혈(靜血)이 모태 안에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마치 우유가 결집된 상태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포함됨과 동시에 전생의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갈라람이라고 하는데 갈라람(Kalala)이라는 말은 곧 응활(凝滑)이라는 뜻이 있으며 응활은 응고된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이 갈라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화합하여 출생한 최초의 사람이다.
정신과 육체가 화합한 갈라람이 태 안에 생겨남과 동시에 정신계가 형성되고 또 육체의 본질이 형성된다. 이들의 형성내용을 분류하여 보면 정신적인 변화와 형성은 이숙식 또는 능변식이라 하고,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보는 이숙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신과 육체가 갈라람이 중심하여 점차 구비하게 된다.
그 육체의 본질은 견고한 성질(堅性), 액체의 성질(溫性), 따뜻한 성질(煖性), 생동하는 성질(動性) 등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등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질로 구성된 육체의 본질은 처음으로 갈라람이라는 인간의 형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 내용은 완전한 인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 대한 조심성이 따르게 되며 또한 임신부로서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태아가 이러한 갈라람의 위치에 있는 기간은 태내에 태어나면서부터 일주일간을 말한다.
* 액부담(額部曇)
이 갈라람에서 더욱 발전한 인간의 형태를 액부담(額部曇)이라 하며 이 액부담(Arbuda)은 액체적인 육체가 점차 응고되어 그 위에 엷은 피부(薄皮)가 생겨나는 위치를 뜻한다. 마치 끓인 우유 위에 막이 생기는 것과 같이 살결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 액부담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2주(第二週)의 기간을 말한다.
* 폐시(閉尸)
다음은 폐시(閉尸)의 기간으로서 이 폐시(Pesi)의 기간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3주(第三週)에해당한다. 이 기간은 태아의 살결이 제법 견고해지고 혈육이 잘 형성되는 육체가 마련된다. 그러기 때문에 폐시(Pesi)라는 범어를 혈육(血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 건남위(鍵南位)
다음 태아의 기간은 건남위(鍵南位)에 들어가게 되며 건남위(Ghana)의 태아는 근육이 견고해진 아이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건남을 견육(堅肉)이라 번역하며 이는 제사주(第四週)의 태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 발라사(鉢羅奢)
다음으로 건남위의 태아가 더욱 성장하여 사지(四肢)와 오장(五臟)과 육부(六腑)가 완성되는 기간으로 이를 발라사(鉢羅奢)라고 한다. 발라사(Prasakha)는 지절(支節)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곧 인간의 형체가 완전히 구비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발라사의 기간은 위에서 말한 사위(四位)의 태아 기간보다도 훨씬 긴 기간이므로 어머니의 태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까지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태아가 태어나면서 지상에 출생하기 이전의 변화는 쉴새없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과능변의 형태이며 동시에 이숙과의 내용을 뜻한다. 요컨대 이러한 태아관(胎兒觀)은 모두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과거의 업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모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 등 육체적 차별이 있게 되고 부모와 주거지 등 환경의 차별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생에 지은 업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승의 과보의 차별이 있게 될 뿐이지 인간의 근본 자성까지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중생은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약간의 차별이 있는 과보를 받지만 일단 과보를 받은 중생들은 평등한 입장에서 삶을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전생의 업력은 선업 또는 악업(因是善惡)이지만 금생의 과보를 받고나면 그 과보의 내용은 선성에 치우치지 않고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무기성(果是無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전생의 악업에 의하여 금생의 악보를 받고, 또 전생의 선업에 의하여 금생의 선보를 받는 인과가 있으나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이라는 것이다.
무기라는 말은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 입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승에 출생한 태아는 귀천과 빈부의 환경을 접하기는 하지만 그 태아들의 자성(自性)은 평등한 것이다. 즉 누구나 꼭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의 삶을 출발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진리에 의하여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도 부자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부잣집 아이라 할지라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태아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본성이 곧 불성(佛性)이고 지혜의 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아라야식이 인간의 과보를 받게 되면 이를 진이숙(眞異熟)이라 하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육식 등 여타의 정신과 육체가 형성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4) 공업(共業)과 사회(社會)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을 알아보았다. 아라야식이 인간의 모든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진체의 업력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총보(總報)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라야식으로부터 모든 정신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마음(七轉識)과 여러 정신작용(五一沈)이 형성되고, 또 육체의 부분이 하나하나 형성되는데 이들을 모두 별보(別報)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가 자라나듯이 아라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에서 지말식(枝末識)과 육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만히 형성되면 인간으로서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삼계와 육도 가운데 인간계(人道)의 과보를 받고 인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중생의 종류 가운데 인간계에 태어나서 살도록 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습을 구비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업력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계도 창조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사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생하면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공업은 그 사회를 공동으로 유지시키는 업력을 말하는데 가령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휘하여 한국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한국 내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공업을 발생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자연계까지도 원만하게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 악화된다면 그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세계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연계가 파괴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업은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뜻하는데 그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무질서해지면 공동사회도 필연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생태계는 뭇 생명체가 발생하는 공업력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행위는 자신에게만 한하는 업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한하는 업력은 불공업(不共業)으로서 불공업은 자신의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공업은 이와 다르다.
공업은 공동사회를 형성해가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힘을 표현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업력은 다음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는가 하면 공동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공업이 있다.
이러한 업력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발휘하게 되는데 업력의 사상을 알고보면 그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심성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남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개인질서와 더불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법은 중생의 질서를 잡아주는데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믿음(信)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덕성(佛德)을 신앙하고, 둘째는 인간의 청정자성(佛性)과 자연에 포함된 진여성(眞如性)에 해당하는 실성(實性)을 신앙하며, 셋째는 모든 인과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공능함을 발휘하는 공능(功能)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신앙은 인과법칙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인과법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앙하지 않게 되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거칠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 사회에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개인과 사회는 결과가 된다. 동시에 모든 삼라만상도 자체의 공능과 진여의 세력이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 마음의 행위
이상과 같이 인과는 곧 개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며 그 인과를 조성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보살심(菩薩心)을 발휘하여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인 아집(我執)과 모든 것을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我所)이 앞서는 마음이 있다.
아집과 소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제6의식에서 보통 나타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층심리에서 충동질하는 제7말나식에 원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말나식으로부터 보살심을 방해하고 여러 진리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명은 모든 것이 평등한 진리이며 주관과 객관계가 통일된 본성을 망각하고 나타나는 무지를 뜻한다. 본래 본성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와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를 무아성(無我性)이라 하며 무아성은 곧 자타(自他)가 없으며 모든 생명체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불심이다.
이러한 무아를 진아(眞我)라 하며 진아는 나 가운데 가장 참된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라고 할 때 육체만을 나라고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아집을 앞세우는 나를 말할 때가 많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아만(我慢)과 나만을 사랑하는 아애(我愛)를 앞세운 나를 가리키는 때가 많다.
이는 완전히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아치(我痴)의 소산으로서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또 불성 및 진여성에 해당하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아치라고 한다. 동시에 본심에서 반대의 마음으로 돌아서 무지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를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전도심은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충동질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행위에 따라 육체의 행위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행이 선행하지 않는 한 육체의 행위도 정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마음을 고치는데는 염불과 참선을 닦아야 한다는 등 부단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과 참선만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무명과 아집과 아애와 아만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제는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그 마음의 병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성자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한다. 스스로 무명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위에서 공업과 불공업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업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각자가 찰나찰나 행동을 통하여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즉각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들 업력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눈(眼識). 귀(耳識). 코(鼻 識). 혀(舌識). 몸(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며 생활하는데 그 행위로 말마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다음에 과보를 받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내세운다. 이 아라야식은 인간의 몸(五根)과 인간의 행동으로 조성되는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과 그밖에 인간이 사는 사회까지도 잘 포섭하고 섭지(攝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전생의 업종자(業種子)와 자신의 몸(五根)과 그리고 자신이 살게되는 세계(器世間)을 능히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며, 또 이 세상에 출생한 후에도 자신의 업력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며 동시에 이 세상이 건전하게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두 아라야식이 한다.
출생할 때 몸과 종자와 세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과능변(果能變)이라고 하며 이를 아라야식의 과상(果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전이나 출생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몸과 업력과 세간을 유지시키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아라야식의 인상(因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心識)이라는 뜻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종자식은 일체의 선업과 악업인 유루업(有漏業)과 동시에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을 모두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자식은 칠전식(七轉識)이 훈습한 종자를 잘 보존하고 섭지하였다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그 종자로 하여금 그 중생이 사는 현재 생활에 나타나게 하고, 그 중생이 사는 현상계(現象界)도 변현(變現)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변현이라는 말은 업력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창조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전생의 업력으로 자신과 사회를 창조하여 나타났고, 또 현재 사는 자신과 사회도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에 의하여 창조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모든 주체는 여러 심식 가운데서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이상과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라야연기(賴耶緣起)라고 한다. 즉 모든 정신계와 물질계는 오직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되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과 종자는 이에 부합하는 연을 만나서 결과 즉 과보를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연을 만나야 결과를 발생하게 된다. 만약 업력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그대로 아라야식에 보존되데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연은 결과에 대한 역할이 업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인(因)과 연(緣)은 과(果)를 가져오게 하는데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반반씩 힘을 가하여 과보가 초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발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력이고 또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은 연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항상 인과 연이 부합되어야 하는데 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동등하게 역할을 한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되며 인과 연과 과가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 못지않게 연도 중요한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청정하게 하는데 그 사회의 환경이 많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모두 연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식의 대상인 객관계와 자연계를 연으로 하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연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환경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라야식의 종자가 좋게 싹이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사화교육 등 모든 교육도 연이 되는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연을 만나 자신의 아라야식에 있는 종자가 잘 자라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도리는 무궁무진한 진리이며 심오한 경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창조라고 한다. 악인(惡因)이 선연(善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선과(善果)를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인(善因)이 악연(惡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악과(惡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연기의 도리이며, 동시에 창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여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모든 것의 총인(總因)이라 하며 동시에 아라야식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인상(因相)이란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출처 : 한손에 연꽃을 들어보이며
글쓴이 : [應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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