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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김민웅 칼럼] 진보적 중심을 위해(프레시안 081024)

by 마리산인1324 2008. 10. 24.

 

<프레시안> 2008-10-24 오후 12:01:17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1024112708&s_menu=정치

 

 

'진보적 중심(Radical Center)'을 위해

[김민웅 칼럼] 민노당의 분당, 진보신당의 등장 그리고 진보정치의 미래

 

 

다음은 진보신당이 주최한 진보신당 10년 평가에서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 진보신당의 등장, 그리고 진보정당의 미래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 토론 발제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파행과 지리멸렬 앞에서도 여전히 반사이익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과 진보정당의 현실을 짚어보면서, 과연 어떤 대응이 요구될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그 이후의 현실이 진보정치 전체에 걸쳐 의미 있는 지점으로 귀결되려면 어떤 노력들이 요구될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진보적 중심>이라는 개념을 통해 진보적 가치와 대중성을 지닌 진화된 진보역량의 결집을 주장하고 있다. 필자
  
  1. 진보정치의 분열 또는 분화?
  
  창당 8주년의 지점을 통과하고 있던 민주노동당이 2008년 2월 당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해결되지 못하면서 결국 정당으로서의 내적 일체감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는다. 이른바 "분당(�사태다.
  
  민주 노동당의 틀에서는 더 이상 계속 진보정치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운 창당을 추구하는 세력이 독자적으로 결집하면서, 기존의 민주 노동당으로서는 4월 총선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종북주의 정당이라는 이념적 타격과 세력약화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반면에 이탈-결집-창당의 수순을 전개한 진보신당의 주축은 도리어 대중과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총선이라는 정치활동의 공간에서, 민주 노동당이 안고 있는 부채라고 판단되는 부담들을 털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시험에 도전적으로 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달랐다. 한쪽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위기"였고, 다른 한쪽에게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기회"가 된 셈이었다.
  
  이 시기, 진보신당의 주체는 스스로를 새로운 진보로 전제하고 민주노동당을 소멸해 갈 (또는 소멸해가야 할) 구 진보세력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러한 구 진보세력의 청산이 진보정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민주 노동당은 정파대립의 패권주의 논란과 함께, 진보신당 주도세력이 현실적 근거가 없는 종북주의 혐의를 내세워 민주노동당을 안팎에서 파괴하려 한 분열주의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양 자 간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 세력의 관계는 과거의 동지적 차원에서, 결국 적대적 수준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 새것이며 무엇이 낡았는지에 대한 판단과 평가의 극한적 엇갈림"은 진보정치의 내부구조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이렇게 해서 적어도 진보정치 내부에서는 상호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도에 처하게 되었다. 대중들의 선택을 서로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해서는 상대를 향해 민감하게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혹한 현실이 된 것이다. 이건 각기의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구축하는 문제와는 따로, 사실 별반 즐거울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태가 되었다. 정당적 일체감의 파산은 두 개의 경쟁적 진보정당을 출현시켰고, 이 두 가지의 길의 역사적 운명에 따라 우리는 이 나라 진보정치의 미래를 가늠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 분당의 과정에서 제기 된 문제와, 이후의 결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향후 진보정치 전체의 목표와 전략을 만들어 내는데 일종의 관건적 의미를 갖는다. 현실적으로 실체가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앞으로 과연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래도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의 문제가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함께 할 수 없다면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라는 피할 수 없는 격돌의 문제가 될 것이며, 함께 할 수 있다면 제3의 진화 모색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일단, "분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보정치 역량의 전체적 약화를 가져온 분열적 분당"인가, 아니면 "진보정치의 진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서의 분화"인가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정치 전체의 역량 약화를 초래해서 작은 차이를 넘어서 힘을 함께 모아 대처해야 할 정국에 무력해지는 과정이 되었다면 이는 그 원인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분열적 분당이 될 것이다. 반면에, 과정상의 진통은 있었더라도 결국 진보정치의 수준을 높여가는 진화에 기여하는 분화로 파악된다면 이는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바로 이를 규명해보는 작업이 이 글의 핵심적 논지가 될 것이다.
  
  여기서 밝힐 것은 나는 민주 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소속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평가의 시선은 각 당으로 볼 때에는, 어디까지나 외부자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당시 민주 노동당 분당 사태의 면모를 정밀하게 주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외부자의 시선이 오히려 내적 인연의 고리에 의해 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적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나름의 주관적 희망을 가지고, 민주 노동당의 분당사태가 가져온 진보정치의 전체적 결과와 운동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이에 대해 발언해보고자 한다.
  
  한편,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나는 당시 분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큰 맥락에서 변하지 않았음을 전제한다. 엄격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분당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곧 진보신당 창당 주체는 잘못했고 민주노동당은 잘했다는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호 비판의 대목이 분명히 있고 책임을 공유해야 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이는 사실 분당의 책임을 규명하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나는 분당 자체가 가져온 현실은 그 책임규명의 차원을 넘어서서 계속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비판적인 것이다. 애초, 필자의 분당사태 비판은 그러한 의식에서 출발하며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로 보아서도 여전히 동일하다.
  
  2. 평가의 기준: "오늘의 시점"에서 평가
  
  민주노동당의 분당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로 해야 사실관계가 바로 설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사실관계를 치밀하게 따지는 방식보다는 그 결과로 만들어진 분당사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오늘의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다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겠다. 그 까닭은 차후에 원인과 문제제기의 편에서 언급하겠지만, 당시의 책임 규명에 몰두할 경우 오늘의 현실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 있지만 이명박 정권의 폭력과 기만 그리고 파국으로 가는 정치에 맞서기 위해 보다 큰 걸음을 해야 한다는 각도에서 지금 중요해지는 것은, 그러한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진보정치의 미래를 진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현재의 국면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언급하자면 분당사태는 우선 오늘의 시점, 그러니까 분당 이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분당이 낳은 것이 무엇인가를 보자는 것이다. 1. 총선과 2. 촛불 정국 그리고 3. 이명박 정권의 파시스트적 공세에 마주한 현실을 기준으로 민주 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등장의 의미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분당 당시 예견했던 상황이 포함되어 있는 시점이다.
  
  2-1. 총선
  
  그런 점에서 보자면, 4월 총선에서 민주 노동당은 무엇보다도 명망성 높은 스타 의원 노회찬/심상정의 부재로 인해 대중적 동력을 이끌어 내는데 고역을 치른다. 그에 더하여 종북주의 논란에 의한 이념적 혐의가 선거 국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조직 역량에 있어서도 이탈사태가 이어지면서 공백이 생겨 정치적 대응력이 상당정도 무너지게 된다. 말하자면 분당은 민주 노동당에게 선거진용 편성에서 결정적 수준에 이를 만큼 위기를 가져온다. 당차원의 긴급대응이 있었지만 결과는 10명을 배출했던 17대와 비교할 때 의회정치에서 정치적 비중과 의미를 갖기 어려운, 5석의 소수당이었다. 총선을 치루면서 민주 노동당의 하부구조는 분당의 상처를 다방면에서 겪게 되며, 지역사회에서 진보신당 조직과의 상호 경쟁 내지는 감정적 긴장 상태로 인해 인간적 좌절감과 조직적 낭패감을 경험하게 된다. 시민사회 진영이나 노동진영에서도 이러한 사태는 그대로 반영되어 기존의 민주 노동당 조직은 파행을 겪는다.
  
  진보신당으로서는 총선에서 노회찬/심상정 낙선은 분당으로 인한 역량 약화와 신생정당으로서의 불리함이 겹친, 분당사태의 결과라는 측면이 매우 높다. 분당은 진보신당에게 민주 노동당이 지니고 있다고 여긴 정치적, 이념적 부담을 청산하는 계기이자 그로써 총선에서 "새로운 진보"라는 슬로건을 통해 진보세력 지지층의 결집을 가져올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되었지만, 실제로 선거 국면에서는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분당과정에서 에너지를 상당부분 이미 소진했고, 그 결과로 총선공간에 뛰어드는 시기나 여력도 부족했고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지도 올리기도 간단치 않았다. 민주 노동당의 전국적 위세를 몰아 돌파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도 분당으로 인한 붕괴로 복구가 쉽지 않았으며 선거자금을 비롯한 자원의 공급도 딸려 총선에 임하는 진보신당으로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선거를 하게 된다. 의회에 진출하는 것만이 진보정당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미 확보했던 고지마저 잃게 되었던 것은 정치적 손실임에 분명하다. "분당에 따른 자충수"라는 뼈아픈 지적이 가능한 대목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해서 분당은, 총선의 국면에서 진보정치 전체의 역량약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4월 총선을 넘기지 못한 채 분당한 상황은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지혜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두 당 모두에게 시련의 시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분당을 반대했던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누누이 지적하고 경고했던 바였다. 특히 의회정치에서 맹활약을 기대했던 노회찬/심상정 두 스타 정치인의 낙선은 모두에게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이 나라 진보정치의 무대를 넓히는데 있어서 타격을 준 사태였다. 한편, 민주 노동당은 선거에서 진보신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성과를 가져오면서 급박했던 위기의식은 일정하게 진정된 반면에, 분당 직후 혁신-재창당의 결연한 긴장이 점차 사라지고 내부의 혁신의지는 다소 퇴각하는 양상을 보여 진보신당 등장과 관련되었던 당 내부의 문제해결에 미진한 모습을 노출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 대목은 진보신당의 분당과정에서 빚어졌던 논란의 일정한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상황이라고 할 만 했다. 개념은 다소 달랐지만 분당 원인에 대한 자체반성과 평가에 의해 정리되었던 "낡은 요소의 척결"에 대한 의지가 후퇴하는 정당에게 미래는 밝을 수 없는 것이다. 민주 노동당으로서는 다시 한 번 긴장하고 자기혁신과 가치의 진보적 재창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정리하자면, 분당은 적어도 총선국면에서 민주 노동당, 진보신당 양 쪽 공히 분열적 요소가 극대화된 시발점이었으며 그간 축적해놓은 정치적 자산까지 낭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2-2. 촛불정국
  
  촛불정국은 이명박 정권에게도 타격을 주었지만 진보정당 전체에게도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행동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정당으로서 한계와 위기, 그리고 나아갈 바를 동시에 일깨운 상황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총선 충격을 딛고 민주 노동당이 강기갑 의원을 스타로 배출하고, 진보신당이 새로운 진보정치문화를 선보인 매우 중요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총평해보자면, 촛불정국에서 진보정치의 대중성을 상대적으로 보다 넓고 깊게 확보한 쪽은 진보신당이었다. 물론 이것이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율을 계속 높이는 기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지라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면모라고 하겠다.
  
  양 당을 비교해볼 때, 촛불정국이 확인시켜 준 시민 민주주의의 자율성, 정치문화의 축제성, 다양한 가치의 무대, 미디어 소통의 진전된 양식에 대한 대중적 주도권은 민주 노동당보다는 진보신당이 활력을 가지고 확보해나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칼러 TV"의 등장은 진보신당의 이미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젊은 진보"의 실체를 만들어나가는데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에 반해 민주 노동당은 강기갑의원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배출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소득이었다. 광우병 문제에 대한 강기갑 의원의 진력을 다해온 정치역정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기갑 의원 한 사람에게 과도한 의존을 해버린 모습을 보여, 민주 노동당의 역량이 다양하지 못하며 대중적 지지를 넓혀가는 능력이 자칫 빈곤하고 왜소하다는 인상을 주는 측면도 결과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 노동당 당원들의 촛불참여는 적극적이었으나 진보신당에 비해 촛불정국에 적합한 새로운 정치문화 창출에는 여력이 부족했다고 하겠다. 깃발행군은 이어졌으나, 대중 속에서 새롭게 결합하는 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미숙했던 셈이다.
  
  이러한 차이는 진보신당이 분당해나간 명분과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새로운 진보정치의 문화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안이다. 이른바 "칙칙한" 또는 "어두운 색조"의 기존의 진보정치 문화에서 탈각하여 젊은 세대의 다양한 문화적 가치와 결합하려는 의지와 역량이 있는가 없는가는, 진보정치의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촛불정국에서 보였던, 촛불소녀들을 비롯하여 비조직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발랄한 문화가 진보적 선택과 융합되는 것은 진보의 새로운 세대가 확장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직된 운동방식이나 언어 내지는 언술 등의 한계를 벗어나 진보의 대중적 넓이와 깊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진보정치 모두에게 중대한 과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정국은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의 출현이 갖는 "분화적 성격"을 일정하게 입증해주었다. 총선국면이 진보정치 전체의 역량 약화라는 "분당의 분열적 성격"을 드러내었다면, 촛불정국에서는 민주노동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새로운 진보정치문화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간 진보신당이 "진보정치 진화를 위한 분화적 역할"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고 하겠다. 이는,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정치권에서는 강기갑 의원의 무대가 다른 정당에 비해 거의 독점적으로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 노동당 자신의 자산으로 확대재생산해나가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진보신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진보신당이 보여준 역동적인 정치문화가 촛불광장에서 선보일 기회가 사실상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민주 노동당 분당이 분화라는 관점에서 일정하게 의미를 획득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촛불정국의 전개과정에서 우리는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일정하게 연대하지 않으면 정국 돌파가 어렵다는 것이 확인되어가는 국면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이 대목은 그 다음 단계의 현실과 이어진다. 분열과 분화의 부정과 긍정적 계기를 융합하고 총괄해서, 진화된 연대가 촉구되는 수순이 되어간 것이다.
  
  3. 이명박 정권의 파시스트적 공세
  
  촛불정국 초기의 당황했던 이명박 정권의 대응은, 곧이어 파시스트적 총공세로 변모한다. 이명박 정권은 신자유주의 체제 관철을 파시스트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촛불시위는 65일을 넘기는 긴 여정이었지만, 조직적 역량의 차원에서 이명박 정권의 역공을 격퇴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와 상황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진보역량과 시민민주의의 힘이 하나로 굳게 뭉쳐 돌파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시민 민주주의의 자발성과 진보적 정당정치의 조직성이 긴밀하게 결합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8월과 9월을 지나면서 촛불정국은 언론과 방송으로 옮겨 붙고, 지역으로 확산되지만 중앙에서는 오랜 시위에 따른 피로감과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 높은 강도의 진압으로 일정하게 소강국면을 통과하게 된다. 그와 함께 이명박 정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총공세를 펼친다. 이러한 상황과 병렬적으로 세계경제의 위기는 심화되어갔고 동북아시아 정세에 대한 한반도 남쪽의 관리능력은 거의 부재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시민 민주주의와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을 비롯해서 진보정치세력 전체의 결집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촛불정국이 진보진영이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 보여준 동시에, 그 선택의 방향 역시 일깨운 셈이다. 상대는 있는 세력, 없는 세력 모두를 끌어 모아 역공을 전개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이쪽은 각 정치세력 사이에 차별성을 부각시켜 연대의 원칙을 까다롭게 만들고 역량이 분산된 채 대응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다행이도, 2008년 10월 25일을 기점으로 <민생민주 범 연대 기구>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는 것은 반 이명박 전선의 결집을 알리는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범 연대기구가 앞으로 얼마나 강력한 동력을 발휘하면서 제2차 촛불 정국을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역량의 총집결과 보다 강력한 연대구조만이 이명박 정권의 파시스트 체제를 분쇄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 확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연대의 방식, 그 범위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진보진영 전체의 결집에 대한 요구는 분명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지난 8개월 동안 "분열과 분화의 계기 모두를 경험"한 이 시점에서 새로운 진화의 노력이 필요해지는 국면에 마주했다. 물론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이 전열정비를 하고 준비하는 일도 중장기 목표로서 중요해지고 있긴 하겠지만, 모든 것은 일상이 축적되어가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시할 때 이 시기의 방향과 선택은 향후 진보정치의 길을 규정해나갈 것이다. 2010년의 경우, 현재와 같은 진보정당의 다당적 구조는 분열적 계기를 보다 심화시키고 진보정치 역량 전체에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정국에서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상호 협력하고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으로 가고 있는 것은, 시민 민주주의의 힘에 의해 떠밀려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 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주도적 선택이나 중심에 서서 하는 작업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동력을 집결시켜나갈 수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해진다. 진보진영 내부의 작은 싸움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고 그것이 큰 싸움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작은 싸움에서 진을 빼고 정작 큰 싸움에서 패한다면 이것은 진보정치 전체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시기에, 민주 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분당의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으면서 대국적 결속의 정치적 지혜를 발휘하는 것만이 민주 노동당 분당이 낳은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를 진보적으로 극복, 융합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여 진다. 분당의 문제는 이러한 차원에서 재검토,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분당의 원인과 문제제기에 대한 평가
  
  자, 그렇다면 당시 분당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패권주의와 종북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이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분당의 책임소재를 규명해보자거나 누군가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든지 아니면 어느 한쪽의 정당성과 어느 한쪽의 부당함을 논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서 제기된 문제가 오늘날 진보정치의 대응력에 어떤 의미와 도움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3-1. 종북주의 논쟁
  
  "종북주의" 논쟁은 그 과정이나 결과가 모두 대단히 파괴적이었다고 보겠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전체를 부당하게 매도하는 방식이 되었고 조선일보라는 극우언론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도 "적과의 동침"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또한, 당시 민주노동당을 종북주의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 대중들을 향해 민주노동당을 "종북당"으로 보라는 식의 이념적 공세가 되어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우파의 냉전전략에 휘말려 들어간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더해 반북 대결주의와 국가보안법에 기초한 냉전형 정치구도를 극복해갈 힘을 훼손시킨 것이다.
  
  종북주의 논쟁은 형식 논리상 북한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번진 사태이나 출발은 기존의 민주노동당에 대해 안으로부터의 정파적 공세라는 성격이 보다 강하다고 여겨지는 전술이었다고 보여 진다. 그런데 이는 한반도의 정세, 동북아시아의 미래, 우리의 주체적 대응 등 고려해야 할 바가 복합적인 현안을 과도하게 단순화시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모두의 운신을 좁혀버리고 말았다. 특히 북한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한반도 전체의 평화적 전환의 전략을 중심에 놓고 고민해온 세력조차 종북주의로 매도되어버리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진보세력의 정치행위로서 극도로 주의해야 할 대목이었고, 이 종북주의 개념이 압도적으로 확산되면서 여타 다른 분당의 조건이나 이유, 내지는 원인과 가치들이 차분하게 짚어질 여력을 상실하게 해버렸다는 점도 아울러 돌아봐야 할 것이다.
  
  분당의 근거를 종북주의 세력의 주도권 문제로 설정한 것은 새로운 진보는 북한에 대해 할 말을 한다는 근거가 되기도 했는데, 특히 인권과 관련한 사안에 대한 접근은 미국의 대북 해체전략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수준의 조심성과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대목이었다. 북한의 인권문제가 체제적 본질에서 기인한 바가 있다 해도 동북아시아 환경변화가 그런 요소를 해체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경로도 있는 것인데, 종북주의 논쟁은 이런 길을 스스로 차단시켜버린 셈이 된 것이다. 한편, 종북주의 논리의 연장선에서 북한의 정권과 주민에 대해 분리대응을 하고 민족적 단결이 아니라 민중적 차원의 남북 단결을 지향하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그것은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북한의 권력이라는 실체를 상대로 정당정치의 차원에서 풀어야 할 과제를 놓고 생각한다면 현실성도 없고 적절치 못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북주의 논쟁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북한과의 관계 진전,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자주적 입지를 진보정치가 공유하는 노력을 약화시킨 책임이 있다.
  
  3-2. 정파 패권주의
  
  분당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나는 정파 패권주의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비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문제는 당 내부 민주주의의 문제로서 소수파와 다수파 간의 정파적 견해가 충돌했을 때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치가 구조가 있는가의 사안이다. 분당 이전의 민주 노동당은 이 장치와 제도가 취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일부 정파의 패권적 결정을 조직화했고 내부 민주주의를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오늘날에도 신랄하게 비판받을 바가 있다.
  
  정파의 존재는 어떤 정당이든 있는 법이고, 따라서 정파 대립과 갈등은 민주주의의 장치가 역동적이면 도리어 당의 진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력도 탄생하는 법이고 노선과 이론 논쟁으로 정당정치의 발전도 가져오는 법이다. 문제는 한 정파가 다수의 힘으로 민주적 논쟁과정에 이르는 길을 봉쇄하거나 중대결정을 정파이해와 관련해서 주도해버리는 사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당내 소수파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대한 의지를 가진 개인, 세력은 정치적 좌절감이 깊어져 더 이상 당에 대한 애정을 지속시키기가 어렵게 된다.
  
  민주 노동당의 정치적 입지와 관련해서 사회경제적 현안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진보적 지식인 사회의 상당수가 진보신당의 지지 세력이 된 것은 그래서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혁파할 좌파적 대안이 논쟁될 수 있는 정당내부의 공간이 정파 패권주의에 의해 소멸되고 있다고 판단한 탓이다. [여기서 길게 논쟁할 바는 아니나 물론 여기에는, 민족주의 논쟁에 따른 문제가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민족주의를 청산해야 할 의식이라고 보는 적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의 의식과 자세는 민족주의가 현 단계에서 지니고 있는 진보성, 말하자면 분단의 극복과 동북아시아의 현실에서 반제투쟁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측면이 있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볼 수 있었던 파시즘과 결합한 민족주의, 좌파적 대안을 무산시킨 민족주의와는 달리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되어온 민족주의는 미국의 패권체제를 극복하고 통일과 관련해서 진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향후 진보정당의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논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민주 노동당의 분당은 다수 정파의 패권적 행태가 당내의 민주적 구조를 훼손함으로써 진보신당을 만든 세력을 결과적으로 축출해버린 의미도 존재한다. 말하자면, 누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가? 나갈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든 책임을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항변과 질문이 도전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파 패권주의는 민주 노동당 내부에 아직 확실히 청산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이 민주 노동당의 혁신 재창당 과정에서도 제기된 문제이자 향후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미래적 진보정당의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육성해나가려면 정파 패권주의를 돌파하는 지도자 개인의 힘도 요구되고, 당내 민주주의의 건강성 회복도 동시에 필요해지는 것이다.
  
  3-3. 대중과의 만남
  
  
그렇다면 어찌해서 민주 노동당의 정파적 패권주의가 발생하고 이것이 급기야 분당의 한 중요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민주 노동당의 정당 활동이 대중과 밀착하면서 전개되지 못하고 중앙당 정치에 매몰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파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의회진출에 유리하고, 각 지역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발상과 풍토가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 정치를 해왔기 때문에 대중과의 만남에서 진보정치의 역량을 유연하게 뿜어내는 것이 미숙하고 당 활동이라는 것이 진보정치를 위한 대중 사업보다는 내부의 정파경쟁과 권력투쟁, 내지는 인신공격과 때로는 모함에 이르는 모습들이 드러나면서 서로 깊은 상처를 주는 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정치가 그런 모순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현실인식이 있다면 이를 지속적인 극복과제로 설정하고, 분당에 이르지 않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습을 갖추어나갈 수 있도록 안에서 노력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여전히 깊게 남는다.
  
  한편, 촛불정국의 경험은 민주 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모두에게 대중과 만나는 방식에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했고, 그 안에서 진보정치의 담론을 확대재생산하는 훈련을 받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는 특히 <대중적 진보정당의 성장과 성숙>이라는 과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결국 지지 세력의 확대가 국가 권력의 장악으로 가는 길이고, 그것은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 결론: "진보적 중심(radical center)"의 창출
  
  이제 결론을 내릴 차례다. 민주 노동당의 분당은, 기본적으로 진보정치 전체의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는 분열적 계기와, 진보정치의 진화를 경쟁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분화의 계기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총선과 촛불정국을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는 한편, 이명박 정권의 파시스트적 공세와 민생의 불안은 진보정치 전체의 역량을 극대화시킬 필요를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민주 노동당 분당은 진보정치 세력 전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결과 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분열적 분당의 측면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각기 분화의 계기를 통해 기여할 수 있는바 역시 뚜렷해졌다. 민주 노동당은 진보정치의 모태로서 그나마 축적해온 지난 8년의 기반을 지켰으며, 종북주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분단과 통일을 비롯해서 자주적 입지의 역사적 가치를 후퇴시키지 않았다. 또한 진보정치의 주 현안들에 대해 치열하게 싸웠다. 진보신당은 입지조건이 여러 가지로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보적 정치문화에 유연하게 나서면서 다양한 진보적 가치들을 정치무대에 올려놓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로써 진보신당의 정치적 존재감을 실현시켜왔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애초에 규정했듯이 정당의 존립이 어려울 만큼 실패하거나 또는 현실적으로 소멸하지도 않았으며, 진보신당은 의석이 하나도 없다고 정당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각기 나름의 정치적 생존을 이루어냈고 미래를 향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서로 배워나가면서 진보정치의 영토를 넓혀나갈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로 분화의 계기는 분당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분화의 계기가 더욱 살아나려면 분당이후의 지형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분화적 계기의 발전은 분당에 따른 소모적 내부 경쟁과 상호 파괴적 긴장을 낳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진보정치 전체의 발전을 위해, "분열과 분화의 상호 모순을 넘어서는" 방향선택이 절실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열적 분당의 문제는 극복하고 분화적 계기에서 만들어진 전체 진보진영의 새로운 발전은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함을 확인한다. 앞의 문제는 연대로 풀고 뒤의 문제는 서로 창조적으로 자극하고 배우는 자세로 풀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문제는 그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연하게 진화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진정한 연대와 결속이 가능해진다. 상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정체성은 배타성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창조적 진화를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는 진보가 취할 자세는 아니다. 민주 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각 정당 내부의 계급적, 이념적 중심성을 확고하게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할 바가 아닌가 한다.
  
  이명박 체제와 대치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면서 진보정치 전체의 진화를 위한 연대와 상호 창조적 삼투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적 관계에서 화학적 결합의 과정과 경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로 친화력을 갖는 계기와 기회를 보다 많이 가지면 가질 수록 이 문제는 차차 해결되어나갈 수 있다. 그걸 거부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한 자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진보적 중심론>을 내세우는 바이다. 이른바 "중도통합론"이라는 방식으로 민주당이 지향하는 개혁성과 대중성의 결합이 이야기되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는 논리가 되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이었다. 이와는 달리 진보정치는 서로 연대하고 결합하면서 그 결집된 동력으로 대중성과 진보성(급진성)을 동시에 폭발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중과 만나는 방식을 매일 매일 고민하면서 좌우편향을 경계하고 이들과 가장 친화력 있게 소통하는 훈련을 하는 것과 함께, 그 내용은 최대한 진보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이 <진보적 중심론>의 골자다. 가장 많은 대중들을 끌어안는 중간에 존재하면서도 여전히 진보적일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정치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가장 대중적 관심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현안을 가지고 이들의 삶을 개선시켜나가는 끈질긴 쟁투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의 가치가 대중성과 결합하면서 희석되거나 제대로 된 정치적 표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을 우려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차피 진보정치가 감당해나가야 할 몫이다. 세력연합의 구상이 자칫 진보의 중심이 서 있지 못한 과거의 대동단결론이나 가치가 아닌 세력연합의 반복이 될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 없고, 과거와 비교해서 진보세력의 성장과 현실의 정세변화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진보적 중심론>을 실현시켜나가려면 우선 분당의 긴장을 도처에서 구조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함께 모일 수 있고 어느 쪽도 일방적 주도자가 되지 않는 "제3의 근거지" 또는 "제3지대"가 필요하다. (가령, <민생민주 범 연대>도 그러한 "제3의 근거지" 내지는 "제3지대"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또는 각 당이 서로 상대를 초청하고 만나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역시 제3의 근거지, 내지는 제3지대가 될 수도 있다.) 거기에서 분당의 상처를 서로 씻고, 분열적 계기를 최소화시키는 노력을 거듭하고, 하나의 당이었을 때 나타나지 않았던 분화의 계기를 통한 진화된 내용을 서로 학습하면서 결속과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는 정치적 축제의 장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며, 그로써 대중들에게 진보정치의 미래에 희망을 가지게 할 것이며 집권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힘을 모아주는 공간을 창출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진보정치의 정치력이다. 대중과 함께 하면서 대중에게 진보적 대안의 실체를 경험해나갈 수 있는 길을 꾸준히 여는 것이다.
  
  대중들이 보기에는 그리 달리 생기지도 않은 자들이 자기들끼리도 힘을 합치지 못하면서 분열적으로 엉키고 있는데,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정치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대중과 하나 되면서 진보성을 계속 확대해나가며, 그러면서도 연대를 강화하고 결집된 역량을 과시하는 진보적 중심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면 진보정치는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민주 노동당 안팎에서 <진보대연합론>이 꾸준히 논의되었던 것은 당연히 위기돌파를 위한 진보적 담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민주 노동당의 혁신과 확장론의 연장이었다는 점에서 주시해야 할 대목이었다. 이 논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어느 정당이 중심이 돼서 다른 세력을 자기 하부구조로 만들겠다는 식은 아니었고 그렇게 해서는 실패일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오늘의 현실은 또한 단지 진보진영 내부의 결속과 대연합의 수준을 넘어서서 민주당의 진보진영(진보정당 또는 진보정치 세력이 민주당 내의 진보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도 유연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진정성을 너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민주당 내부의 진보적 입장을 가진 세력과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자세는 모두 소중한 것이다.)을 비롯하여 진보적 시민운동 전체의 정치적 결속을 추구하는 운동을 펼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야 하는 국면이다. 이 작업에는 진보적 중심성을 견지하면서도 고도의 정치적 유연성을 바탕으로 연합과 연대의 폭을 확장해나가는 노련한 대중적 지도력의 발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명박 파시즘의 지배가 강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소수의 저항적 정치조직으로 남고자 한다면 어찌하는 수 없겠으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경영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걸 못할 리 없지 않을까? 진보정당의 새로운 미래는 최고의 목표로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해, 온당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강렬하고도 투철한 권력의지가 기반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 의지는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진보정치에 대한 물러설 수 없는 책임의식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민웅/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