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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위클리조선 [2032호] 2008.12.01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25/2008112501104.html

 

 

[여행] 북아프리카 보석상자 튀니지

 

사막과 바다가 마주앉아 마법을 풀어내는 곳
튀니지 동남부 사하라 사막 일대 오아시스들로 향하는 사막길은 험했다. 포장길이긴 해도 파도 치듯 울퉁불퉁하고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큼 좁다. 일행은 수도 튀니스에서부터 타고 온 버스를 돌려보내고 4륜구동 랜드크루저 두 대로 갈아타야 했다. 난폭하게 요동치는 차에 몸을 싣고서 사방 끝도 없이 황량한 사막길을 졸며 깨며 갔다.

▲ 사하라 관문 두즈에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체험하는 관광객들. 왕복 한 시간 반 코스가 2만원쯤 한다.
한 시간쯤 갔을까. 홀연히 호텔 하나가 나타났다. 도저히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막길에 이글스가 노래한 ‘호텔 캘리포니아’처럼 불쑥 타메르자 팰리스가 서 있었다. 붉은 열대 붓꽃 부게인빌레아가 만발한 나지막한 스페인 빌라풍 건물, 물빛 푸른 수영장, 상냥하고 세련된 종업원들. 사막 모래 바람에 시달릴 각오를 내심 단단히 했던 일행은 느닷없이 만난 안락하고 고급스런 호텔에 잠시 말을 잊었다. 대리석 바닥이 깔린 객실 커튼을 열어젖히자 테라스 앞 시야 가득 푸른 대추야자 숲과 황폐한 황톳집들이 펼쳐진다. 40년 전 때 아닌 홍수로 폐허가 된 옛 타메르자 마을의 잔해들이, 울창한 야자숲과 어우러져 기묘한 장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바깥 풍경이 내다보이는 욕실,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에 들어앉아 몸과 마음을 녹이면서 튀니지라는 나라가 지닌 만화경(萬華鏡)에 다시금 감탄했다.

북아프리카의 보석상자 튀니지는 그렇게 곳곳에서 여행자를 즐거운 혼돈에 빠뜨리곤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 도시 저 마을을 옮겨 다닐 때마다 뜻하지 않게 다양하고 이색적인 풍물들을 마주치며 겪는 매혹적 혼란이다.

▲ 튀니지
유럽인의 서머 리조트, 제르바섬

튀니지 북부에서부터 동쪽으로 꺾여 1200㎞를 타고 내려오는 지중해변은 유럽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프리카 휴양지다. 호수처럼 두 대륙에 갇혀 수줍게 찰랑거리는 터키석 빛 바다와 고운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거기에 서면 여기가 아프리카라는 것도, 국민 98%가 모슬렘인 이슬람국가라는 것도 실감할 수가 없다. 훌륭한 식당과 호텔, 요트항이 즐비하고 해변엔 비키니는 물론 토플리스 여인들이 거침없이 일광욕을 즐긴다.

야스민하마멧에서 수스에 이르는 40㎞ 해변만 해도 모두 5만 침상을 갖춘 고급 숙박시설과 카지노, 놀이공원들이 들어서 있다. 유럽 전역에서 패키지 여름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거대 리조트다. ‘바다의 오아시스’로 불리는 동남부 제르바섬도 아름다운 해변 30㎞를 따라 4성급 이상 호텔만 130개가 늘어서 있다. 그러고도 해안선 대부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 해변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관광자원이 무진장이다.

 

 

 

청백 물감을 풀어놓은 수채화의 마을, 시디부사이드

수도 튀니스 북동쪽 25㎞ 지중해변 언덕엔 그림 같은 마을 시디부사이드가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엔 숱한 프랑스 문인·예술가들이 사랑했고, 지금은 세계 각국 관광객이 어김없이 들르는 명소다. 외벽은 눈부신 흰색으로, 창과 문은 흰색을 섞은 연한 청색 ‘튀니지안 블루’로 칠한 집들이 동화처럼 들어서 ‘북아프리카의 산토리니’로 불린다. 흰색은 따가운 햇빛을 반사시켜 집을 시원하게 하려고, 푸른색은 파리나 모기가 하늘인 줄 착각해 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칠했다고 한다. 이제는 아예 법으로 집 외관을 청백 두 가지 색깔로만 칠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도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청색들, 갖가지 문 모양과 장식들을 음미하며 골목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짧다.

튀니지는 색색깔 아이스크림을 가득 늘어놓아 입맛 따라 마음껏 골라 먹게 하는 아이스크림가게 같다. 예를 들어 맘만 먹으면 짙푸른 지중해에서 광막한 사하라까지를 하루에 즐길 수 있다. 사계절 휴양지 제르바섬에서 지중해와 진흙 마사지를 누리다 불과 두 시간 남짓 서쪽으로 차를 몰아가면 사하라 관문 두즈에서 낙타를 탄다.

▲ 고성(古城)으로 둘러싸인 하마메트 옛 도심 ‘메디나’의 수백 년 된 주택가 골목. ‘튀니지안 블루’로 장식한 문과 창이 동화의 한 장면 같다. / 비르사 언덕에 선 고대 카르타고 유적이 한니발의 도시 카르타고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다.

 

‘스타워즈’ 세트장이 있는 곳, 옹크주멜



튀니지가 지닌 장대한 풍광, 이국적이다 못해 외계적(外界的)인 풍물들을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서 4까지 중요한 배경으로 활용했다. 서남부 사하라 거점도시 토주르에서 4륜구동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나간 사막 한복판 옹크주멜엔 ‘스타워즈’ 세트장이 남아 있다. 에피소드 1에서 제다이 기사 콰이곤 진 일행이 고장 난 우주선 부품을 구하려고 타투인 행성 마을에 들렀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년 아나킨을 만나는 곳이다.

철망에 모래를 이겨 붙여 지은 집 30~40채와 소품들이 덩그러니 들어선 세트장을 기념품 행상 네댓, 경비 경찰 네댓이 지키고 있었다. 집들은 바람에 쓸려 곳곳에 앙상한 철망을 드러냈다. 한 무더기 일본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다 떠나고, 다시 이탈리아 관광객들이 떠들썩하게 몰려왔다 빠져 나갈 때마다 세트장은 정적에 잠겼다.

루카스는 마트마타 지역에서 원주민 베르베르족이 사는 토굴집도 지나쳐 보지 않았다. 4세기부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며 사막 모래 바람도 피하도록 언덕을 파 내려가 굴을 뚫어 만든 방에서 생활하는 집이다. ‘스타워즈’에서 외계인들의 재즈바로 등장했던 토굴집은 호텔이 돼 손님을 맞고 있었다.

사막 언저리엔 야자나무 우거지고 샘물이 흐르는 오아시스와, 그랜드캐니언 못잖게 장
대한 협곡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가슴 때리던 러브 스토리 ‘잉글리시 페이션트’도 토주르 일대 사막과 협곡에서 찍었다. 캐서린과 알마시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랑을 나누던 셀자 협곡을 일행은 메틀라우이역에서 출발하는 협궤 증기열차 ‘붉은 도마뱀’으로 즐겼다. 붉게 칠한 열차가 사막의 도마뱀처럼 꼬리치며 달린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기기묘묘한 협곡과 황톳빛 사암 구릉들을 누비며 왕복 84㎞를 달리자니 마치 미국 애리조나의 국립공원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로마 말발굽에 한니발 꿈이 잠들다, 카르타고

수스에서 내륙으로 한 시간쯤 달려간 고대 도시 엘젬에서 만난 콜로세움은 ‘글래디에이터’의 모티브가 된 곳이자 촬영지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튀니지를 지배한 로마가 3세기에 지었다. 3만5000명을 수용해 3번째로 큰 로마 원형경기장이자 5월이면 국제 오케스트라 축제가 열릴 만큼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다. 지하엔 14세 때부터 소년들을 가둬 검투사로 사육하던 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튀니지 총독 전용석에 서서 1800년 전 살아남기 위해 맹수나 동료와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검투사들의 잔인한 운명을 생각했다.

튀니지는 온 나라가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기원전 9세기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부터 로마, 비잔틴, 아랍, 오스만트루크까지 이 땅을 거쳐간 문명들의 유적이 풍성하다. 무엇보다 튀니지는 로마와 패권을 다퉜던 고대 강국 카르타고의 나라이자 불세출 명장 한니발의 나라다. 용병 4만과 코끼리 300여마리를 이끌고 피레네산맥과 한겨울 알프스를 넘은 용장(勇將). 패전해 쫓겨 다니면서도 로마 타도의 꿈을 이뤄보려다 좌절하고 독을 마셔 자결했던 애국자. 한니발은 카르타고시의 역(驛) 이름으로 남아있다.

카르타고 시가지가 한눈에 드는 비르사 언덕 카르타고 유적지엔 목을 잃거나 얼굴이 뭉개진 동상, 집을 잃은 기둥 몇 개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가 철저하게 망가뜨린 카르타고 문명 중에서 그나마 살아남아 역사가 교직(交織)해낸 승패의 잔혹함을 말하고 있었다.

 

 

 

 

옛도심 메디나와 장터 ‘수크’, 그리고 튀니지 사람들

여행자들의 가슴에 튀니지를 잊지 못할 나라,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로 새겨놓는 마지막 방점이 튀니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살갑게 이방인을 맞아줬다. 일부 나이 든 사람들만 빼고 대개는 카메라를 들이대도 손을 내젓지 않았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수백 년 된 옛 도심 ‘메디나’와 우리 이렛장 격인 장터 ‘수크’에 순박한 사람 냄새가 물씬했다.

튀니스 남쪽 나블 중심가에 금요일마다 서는 수크는 그 자체가 장관이었다. 2㎞도 넘을 것 같은 외길 시장통은 걷기도 힘들 만큼 사람이 넘쳤다. 로마시대 제조법 그대로 만든다는 특산 도자기부터 갖가지 기념품과 생필품, 낙타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호객과 흥정 소리가 요란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현지 사람들과 뒤섞인 채 어깨를 비비며 거닐면서 장터의 싱싱한 생명력을 호흡하고 있었다.

튀니지 중동부의 유서 깊은 도시 케루안은 이슬람 4대 성지로 꼽힌다. 9세기에 아프리카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시디오크바 대사원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경건한 분위기 못지 않게 인상적인 것도 역시 티없는 사람들이었다. 호텔을 나서 둘러본 인근 주택가 밤거리엔 카페마다 사람들이 나와 앉아 진한 커피나 민트차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며 카드나 마작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누구 하나 동양에서 온 여행자들을 차갑게 쳐다보지 않았다. 서툰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웃어 줬다.

동네 구멍가게, 피자 노점, 결혼식장을 불쑥불쑥 들여다보는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 ① 사막길에서 꿈처럼 만난 타메르자 팰리스호텔 앞 마을의 폐허와 대추야자 숲. ② 튀니지에선 남자들이 모자에 꽃을 꽂고 다니며 판다. ③ 낙타를 조심하라는 도로 표지판. ④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배경으로 활용한 베르베르족 토굴집. ⑤ 나블 금요장터 ‘수크’의 도자기 노점에서 흥정하는 관광객들.

 

머리는 유럽, 가슴은 아랍, 발은 아프리카에 둔 나라



튀니지에선 여느 이슬람국가와 달리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일상의 종교적 규율도 그리 엄하지 않고 여성이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

국부(國父) 부르기바는 1956년 프랑스의 73년 식민통치를 끝내고 건국하자마자 일부다처제와 히잡 의무화를 폐지했다. 수도 튀니스는 ‘북아프리카의 파리’라 할 만큼 서구적이고 ‘튀니스의 샹젤리제’라는 부르기바 대로엔 한껏 멋을 낸 여성들이 활보한다.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혼혈이 대다수여서 흑인도 거의 볼 수 없다. 그래서 튀니지를 가리켜 “머리는 유럽에, 가슴은 아랍에, 발은 아프리카에”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튀니지에 가거든 호텔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곧장 거리로 뛰쳐나가 보라. 굳이 모험심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이방인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섞여 거리를 거닐고, 노천 카페에 앉아 민트차를 마시고, 뒷골목 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간다. 불과 며칠 전 떠나온 남루하고 잡다한 일상이 까마득한 옛 일처럼 잊혀져 버리는 곳, 여행 열흘을 넘기도록 지치거나 지루하기는커녕 호기심과 찬탄이 마르지 않는 곳, 튀니지는 그런 나라였다.


/ 글·사진 =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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