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2007.08.01 통권 575 호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8/08/200708080500012/200708080500012_1.html
전설의 아나키스트, 단주 유림의 불꽃 인생 |
‘최대한의 민주주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사상하는 세계’를… |
김영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kaone@kaone.co.kr |
세계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단주 유림. 독립운동가, 사상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반독재 민주화 투사….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이름은 많지만,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명칭은 전 인류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꿈꾼 ‘실천적 아나키스트’다. 국수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함께 배격하고 진정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던 실천적 지식인으로, 국내 최초의 전국 아나키즘 조직과 세계 최초의 합법적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을 만든 그의 거대했으나 고독했던 생애를 조명했다. |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君在大韓重)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君去大韓空).”
1961년 4월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행된 단주(旦洲) 유림(柳林·1898~1961) 선생 사회장 당시,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이자 성균관 초대관장인 심산 김창숙이 한 추도사 중 일부다. 시인 구상은 유림 선생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적광(寂光)의 진혼(鎭魂)’이란 글을 써 애도했다.
‘북극성과도 같은 고절(高節)이었다. 단주, 당신이 지녔던 그 인류적 이상이나 민족적인 소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류해방을 향한 열정이요, 의지요,
세계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단주 유림. 독립운동가, 사상가,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반독재 민주화 투사였던 그의 사상에 대한 학술 연구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1993년 독립기념관에 유림의 어록비가 제막된 데 이어 2001년 4월에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유림을 선정했고, 2001년 4월과 2005년 11월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아나키즘 학술대회가 열렸다.
2006년 8월 독립기념관이 주최한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특별기획전’에선 유림의 유품 전시회가 있기도 했다. 오는 9월14일에는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대회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의 공동 주최로 열리며 유림의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왜 유림이고, 아나키즘인가
아나키즘은 식민지시대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상적 조류였으나 민족주의, 공산주의에 비해 오랫동안 잊혀왔던 정치사상이다. 그러나 이제 지역분쟁, 환경파괴 등에 대한 전 지구 단위의 공동 대처가 절실하고 이를 재해석해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이념이 필요하게 됐다. 공산권의 붕괴와 더불어 정보의 공유와 개방, 전자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 등은 아나키즘이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아나키즘이 제시하는 자율질서와 자치, 공동연대, 상호부조, 자유연합, 인본적 가치 추구 등은 인류가 품어야 할 이상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있어왔다. 국가의 강제 권력과 각 개인의 자주성이 부딪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의 지배로부터 각 개인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또 한반도의 현실에서 실천적인 모습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유림은 이런 물음에 대한 치열하고 진지한 고민을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 가능한 이상이자 대안으로 파악하고, 그 방법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아나키즘은 현실에서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아나키즘의 각기 다른 물줄기들이 경남 안의에 모아졌다. 그간에 쌓아왔던 한국 아나키즘의 역량이 모두 결집된 것이다. 당시 언론은 1946년 4월20일부터 23일까지 있었던 전국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에 대해 ‘해외와 38선 이북에서 온 이들을 포함해 600여 명 이상의 아나키스트 참가가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이 대회는 유림이 주도한 명실상부한 아나키스트들의 전국 모임이었다. 이 대회의 결과물로, 1946년 7월7일 서울시내 연무관에서 1000여 명의 당원이 참가한 가운데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유림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아나키즘 정당 ‘독립노농당’이 창당됐다.
공개된 합법적 대중공간에서 세계 아나키즘 역사상 최초의 아나키즘 이념정당이 탄생한 것. 유림이 전체 아나키즘 세력을 결집해 창당한 독립노농당은 1961년 4월1일 유림의 사망과 곧이어 일어난 5·16군사정변으로 강제해산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나키즘의 이름을 가진 여러 물줄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인 곳이 유림과 독립노농당이라는 호수였다. 그러나 그 호수는 유림의 사망과 함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다.
이후 1990년 4월6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독립노농당의 재건’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독립노농당 강제해산 당시 핵심 간부들이었던 하기락, 정인식, 유영봉, 주경희 등이 백발이 성성한 채 ‘사회당’을 창당 발기했다. 사회당은 하기락이 위원장이었고 정인식과 유영봉이 조직과 당무를 맡았으며, 유림 사후에 태어나 새롭게 아나키즘의 싹을 틔우던 일군의 20대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현재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와 한국자주인연맹, 한국정치사상연구소에서 아나키즘 운동의 실천과 이론 연구를 하며 한국아나키즘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
12세 때 ‘忠君愛國’ 혈서 써
189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유림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본명은 유화종(柳花宗)이었으나 1919년 3월6일 유화영(柳華永)으로 개명했다. 그는 1931년 만주에서 독립투사 양성기관인 ‘의성숙(義誠塾)’을 설립하고 동아일보에 학생모집의 글을 실을 때부터 유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고상진(高尙眞), 고자성(高自性), 고삼현(高三賢), 김영진(金永鎭)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호는 월파(越坡)였으나 ‘부산 정치파동’ 이후부터 단주(旦洲)라는 호를 사용했다.
유림의 친가와 외가는 향촌의 지주로 안동의 전통적인 양반가였는데 유림이 물려받은 경제적 토대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의성숙’을 설립할 때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유림은 9세에 사서삼경을 아버지로부터 익혔으며 신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수학 중이던 1910년, 한일강제합방이 되자 ‘나라를 되찾겠다’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전통적 학문 배경을 갖고 있는 유림이 일찍부터 현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애국계몽 및 구국항쟁의 의지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협동학교에서의 수학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협동학교를 졸업한 유림은 1915년에 대구에서 정진탁 등과 각지 청년들을 규합해 ‘부흥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대구경찰서에 구금됐다. 1917년에는 김용하 등과 ‘자강회’를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다 대구경찰서에 재구금됐으며,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아 1918년에는 일제에 대한 대규모 암살파괴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 선포에 사전부터 협력했고, 3·1운동이 개시되자 이운형(서로군정서 특파원)과 함께 가담했으며, 향리인 안동군 임동면 편항장터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탈출한 유림은 이상룡, 김동삼 등과 협의한 후 서로군정서 비밀특파원이 되어 국내에 두 차례 들어왔다. 1920년 말경에는 베이징으로 가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 남형우 등과 순한문 잡지 ‘천고’를 발행하는 데 관여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가담한 후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각국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혁명 이론을 연마했다. 당시 이동휘, 김만겸 등과 연계했으나 그들의 공산주의 이론에 만족할 수 없어 결별했다. 이때 유림은 이미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극복하는 높은 수준의 아나키스트가 되어 있었다.
문호 바진과의 인연
유림은 1921년 중국 청두(成都)에서 대문호 바진(巴金·1904~2005)을 만나 그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진에 의하면 자신이 당시 청두의 ‘반월보’에 ‘세계어(Esperanto)의 특징’이란 글을 발표하자 고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토어를 보급시킬 수 있을까를 상의하러 왔던 것입니다. 나는 그로부터 에스페란토어를 배웠으나 몇 번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보급 활동은 하지 않았지요.”
바진은 생전에 일본의 바진 연구가 시마다 교코(嶋田恭子)에게 유림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면서 “고자성(高自性)이 최초의 친구지요, 그러나 교류는 많지 않아서 그는 바로 청두를 떠났지요”라고 말했다 한다. 고자성, 그가 곧 유림이다.
또한 바진은 시마다와 한 대담에서 “나와 그의 교류는 많지 않았으나 나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의 의리, 인정이라든가 예의, 관습을 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천박한 인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성실하고 착실하며 솔직하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말한 바 있다. 시마다는 “한국인에 대한 바진의 인상은 다분히 고자성, 즉 유림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922년 봄 상하이에서 김두봉의 ‘깁더조선말본’ 발간을 돕던 유림은 그해 9월, 쓰촨성의 청두로 돌아와 국립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특허입교(特許入校)’로 수학하게 됐고 국립사범학교라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청두에는 아나키즘 활동이 활발했는데 쓰촨성 출신의 저명한 교육자이자 아나키스트인 우위장(吳玉章)이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외국에 가서 일하면서 공부하자는 취지인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유학의 중국 내 가장 큰 창구였던 쓰촨성의 청두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유림이 공부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유림은 1925년 8월경 국립성도대학교 사범부 문과를 졸업하고 국민정부 교무원 자격으로 남중국과 일본을 시찰하며 프랑스 유학 준비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관계로 도불(渡佛)은 실현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유림은 1925년에 상하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창설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 선전하던 중, 대구에서 신재모, 방한상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자 방한상에게 편지를 보내 “아나키스트 단체를 많이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계획 중인 ‘원동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 조직되면 여기에 가맹할 것”을 권고했다. |
일제는 “진우연맹 관계자들이 ‘파괴단’을 조직해 일제를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요인 암살을 도모하며 여기에 사용할 폭탄을 상하이 민중사의 유림에게 위촉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에선 파괴단의 혐의 부분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 진우연맹은 상하이의 유림과 조직적으로 연계했으며 대중적 기반과 조직력을 갖춘 대표적인 아나키즘 단체였다. 중심인물인 신재모, 방한상은 노동, 농민, 청년운동 지도자들이며 광복 후 독립노농당 핵심간부가 됐다.
유림은 1925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광둥(廣東)의 노동자 대파업에 참가한 후 ‘광동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에 관여했다. 이때 ‘광동기계공인총동맹’에서 활동하며 생디칼리슴 이론으로 무장한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조선 최초의 전국 아나키스트 조직
1929년 11월22일자 동아일보는 “광동기계공총맹에서 10만 공인을 지도, 만주서 조선인 교양운동에 크게 활약, 대동서에서 치유법 위반으로 취조 송국, 유화영의 정체 판명” 등의 제목으로 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석하려다 체포된 유림에 대해 보도했다. 이어 동아일보는 12월11일자에서 “흑색운동계 거물 유화영 국외 방축(放逐), 일곱 나라 말을 능통코 박학다식해 취조하던 경관도 탄복, 봉천까지 호송한 후 방면” 등의 제목으로 보도를 이어갔다.
유림은 다시 광둥, 우한, 베이징 등을 거쳐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량치차오(梁啓超), 천두슈(陣獨秀) 같은 중국 사상가, 혁명가들과 교류 또는 연대한 후 지린(吉林)으로 향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지린에서 이청천, 김응섭, 여준, 이탁, 김동삼 등과 한족노동당, 정의부, 재만한인교육회 등의 항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재만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는 한편,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해 독립군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교과서 편찬, 교원 양성 등의 활동도 펼쳤다. 이 시기에 중학생이던 김일성이 유림을 찾아와 인사한 적이 있는데,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재주는 있어 보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는 1960년 4·19혁명 직후 서울대에서 있었던 ‘정치대강연회’를 부탁하려고 자택을 찾은 유세희, 이영일, 이수정, 윤식 등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학생들이 김일성에 대해 묻자 유림이 들려준 말이기도 하다. 유림은 북한의 역사 왜곡, 즉 김일성 항일투쟁의 과장과 지나친 미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1929년 3월 하순, 유림은 헤이룽장(黑龍江)성 해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와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를 놓고 김좌진가 격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유림은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으므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라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9년 11월10일, 11일에 평양에서 ‘관서흑우회’ 주최의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무산됐고 대회 참가를 위해 평양에 온 유림은 그곳에서 검거돼 취조를 받은 후 펑톈(奉天·선양의 옛이름)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그는 와중에서도 1929년 11월1일 평양 기림리 소재 소나무 숲에서 아나키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최갑용, 이홍근, 조중복, 임중학 등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무정부연맹)’을 결성했다. 유림은 만주를 군사훈련 기지로 정하고 만주 방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무정부 연맹은 국내 최초의 전국 단위 아나키스트 조직이었다.
‘따로 또 같이, 책임은 함께’
유림은 무정부연맹 결성 후 펑톈에서 독립운동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의성숙’을 건립했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된 200여 명의 학생을 사재를 털어 교육시키고 숙식을 제공했다. 이 학교는 1930~31년까지 1년 정도 운영되다 자금 부족으로 중국 국민당 좌파가 운영하는 ‘평단고급중학(대학 예과 수준)’에 합병됐다.
1931년 4월15,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의성숙 학생모집 광고에는 유림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글 중 ‘주의사항’ 란에 “조선 청년으로서의 시대적 자각이 없는 이,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안락을 희생할 만한 결심이 없는 이는 입학할 수 없다”고 적시돼 있다. 즉 의성숙이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독립운동 간부 양성기관임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유림은 의성숙을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0년, 남상옥을 원산으로 보냈고 남상옥은 김정희, 노호범 등과 함께 ‘원산청년회’를 재건했으며 ‘원산일반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유림은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통해 아나키즘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1931년 9월29일 유림은 원산일반노동조합과 관제 노조인 ‘함남노동회’ 간의 충돌 와중에서 무정부연맹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펑톈 자택에서 체포돼 원산으로 압송됐다. 1931년 10월7일자 동아일보는 ‘무정부주의자의 거두 유화영 검거, 원산서의 수배로 검거, 봉천 모 중학교 교원’ 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유림의 검거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1937년 10월8일 원산·함흥·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유림은 이내 만주로 다시 망명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남북만주와 베이징, 톈진(天津) 등에서 독립운동세력의 재편성과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유림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 의견을 주고받으며 중국공산당이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농촌 중심의 해방구를 통한 중국 특유의 혁명과정에 공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태도 차이를 분명히 했다. 유림은 일본군이 톈진의 각국 조계지를 점령하자 그곳을 탈출해 1942년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머물면서 한국독립군의 원조 문제를 토의했다.
유림은 1942년 10월20일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4월24일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해 국무위원에 피선됐다. 그의 임시정부 참여는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과 전 국민의 자유연합 의지에 의해 성립됐으므로 각 정파는 자파의 독자성을 유지하되 연대하고, 정부는 공동으로 구성해 서로 책임져야 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유림은 1943년 5월10일 충칭에서 무정부연맹을 대표해 ‘재중국자유한인대회’ 주석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전후 한국의 완전자주독립과 외국의 어떠한 간섭도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유림이 건설하려던 세상
충칭 임시정부 국무위원 시절,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 중 한 명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유림을 초대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보낸 이가 유림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당신네 임시정부에 당신을 노리는 자가 있소” 하면서 이름을 밝히려 하는 순간 유림은 이를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름을 대지 마시오.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면 나는 그를 죽여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라 잃은 백성이 이국만리에 망명해 독립운동한답시고 서로 죽이는 꼴이 되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소.”
저우언라이는 평소 사상과 노선은 달랐지만 유림의 식견과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유림은 광복이 되어 임시정부 요인으로 귀국한 후 1945년 12월7일 조선일보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보였다.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유림과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1946년 7월7일 창당)이 해방 정국에서 정한 일차적 목표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세력이 되어 근로대중의 최대 복리를 추구하되 경제 운용의 주체로서 중·소 자산층을 활용한 자주적 계획경제, 민주입헌정치, 민주정부 수립이었다. 아울러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차별과 주도권 설정 대신에 농공병진(農工竝進)과 상호조화, 연대를 강조했다. 산업기관 관리와 경영에 노동자의 참여권을 보장하고, 자력으로 경작할 농민에게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사유권을 인정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해방 공간에서 ‘자주’의 견지에서 신탁통치를 해석하고 또 반대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의 최고 5년간 신탁통치 실시와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결과에 대한 각 정파의 주장과 해석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만 35년간의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난 이 땅의 민중에게 신탁통치 반대는 절실하고도 당연한 ‘즉시독립’의 요구였다.
유림은 1947년 7월에 남북협상 안(案)을 가장 먼저 제시하고, 1948년 3월에는 “독립정부 수립이 늦어질지라도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유림은 1948년 4월19일, 평양에서의 협상이 아니라 서울에서의 대화와 협상을 주장했다. 이는 북측이 미리 짜놓은 각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는데, ‘협상은 하되 자주적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이는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구심체로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조직한 유림이 김구와 김규식 등의 평양행을 만류한 이유였다. 민족해방과 통일이라는 명제는 같아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대응전략과 정세인식에서 아나키스트들과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큰 차이를 드러낸 셈이다. 유림이 우려한 점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결국은 분단의 고착화와 골육상쟁의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의 아나키스트들은 남북협상에 반대했으나 한민당과 이승만 등 극우세력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극우세력과는 정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반대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이 1948년 5월5, 6일 서울시내 역경원에서 제2차 전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해 당의 단정(單政) 반대 노선을 어긴 5·10 제헌의회 선거 출마자 50여 명 전원을 당에서 제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5·10 제헌의회 선거에 당선된 이들은 정준(김포), 장홍렴(무안), 신방현(공주), 육홍균(선산), 최석홍(영주) 외 9명이었다. 이때 부위원장 박열도 제명당했고, 또 한 명의 부위원장인 이을규도 당을 떠나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당의 공식 결의로 개인자격의 선거 참여를 허락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이 전당대표자대회를 통해 제헌의회 선거 참가자들과 이승만의 노선에 동조하는 이들을 전원 제명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단독선거 참여자들을 제명함으로써 독립노농당의 당세는 만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유림은 민족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지키기 위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노선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단독정부 수립 후 결국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지킬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는 대국민 담화 방송을 했다. 유림은 수도 서울을 넘겨주고 자신들만 몰래 빠져나와 수많은 시민을 희생시킨 책임을 물어 이승만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 이 정권은 더 이상의 공개 비판을 막기 위해 그를 3개월가량 불법 구금하며 탄압했다. 전쟁 중인 1952년 5~7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이 정권 연장을 위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세칭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을 때 유림은 신익희, 장면 등 야당 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을 규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발기했다.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유림은 물러섬이 없었다. |
1953년 3월 휴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을 즈음,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반대를 내세웠다. 그러나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더 이상의 동족 상쟁을 막기 위해 휴전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또한 유림은 1959년 12월부터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북한 송환이 시작됐을 때 ‘재일동포 강제추방’이라며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식민지배의 결과인 재일동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판한 것이다.
1960년 6월 서울대에서 열린 ‘정치대강연회’에서 유림은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독립노농당이 아나키즘 정당임을 밝히며, “자본은 무제한으로 허용할 수 없으며 중요 산업은 국유화하고 토지는 경작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19 후 유림은 분열된 혁신계열의 통합을 위해 ‘혁신동지총연맹’ 결성을 주도했고, 7·29 선거 이후에는 혁신진영의 통합을 모색했다.
유림은 해방 후 공간인 1948년 프랑스 파리의 ‘세계아나키스트대회(1948년 10월1일)’에 한반도 대표로 초청받았다. 그는 당시 아나키즘의 세계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것을 다짐하고 반드시 이 행사에 참여하려 했으나 결국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전통의 바탕 위에 시대의 실정에 맞는 사상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고자 안간힘을 다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의 노선은 아나키즘 처지에선 최선의 길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그들은 그 결과의 참담함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한 현실의 고통을 마지막까지 감내하면서 분투했다.
한반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 김일성,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등의 각 정파와 그들이 추구했던 노선은 그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반도의 통일과 통일 이후의 체제를 생각한다면 해방공간에서 치열하게 각축했던 각 정파와 그들의 노선 경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분단의 극복과 통일된 후의 미래체제 선택에서 아나키즘 이념정당으로서 독립노농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땅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유림과 독립노농당의 아나키스트들이 온갖 간난(艱難)을 무릅쓰고 아나키즘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혁명가 유림, 인간 유림
유림의 일생은 자신에게 지극히 엄격한 혁명가의 전형, 그대로였다. 외아들 원식이 폐병으로 죽어갈 때 “독립운동을 안 하겠다고 서약하면 가석방을 시켜주겠다”는 감옥 교회사(敎誨師)의 말에 유림은 “내 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내 아들도 바라던 바일 것이오, 나는 나가면 또 반드시 그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라며 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또한 외아들 원식이 일본군 장교가 됐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상면도 허락하지 않았고 부인마저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멀리해 유림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혼자서 지냈다. 그리고 사위가 이승만 정권의 고위 경찰이라는 이유로 사위 본인은 물론, 외동딸도 눈을 감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 독재정권의 고위 경찰이라는 사실은 민족적 양심과 대의명분에 비춰볼 때 그것이 비록 천륜에 의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혁명가 유림,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외아들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외아들이었으나 평생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며느리로 인정한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여인’일 뿐이었다. 그 ‘인연 없는’ 며느리가 죽어 서울대병원에 안치됐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이때 유림은 놀랍게도 아무 연락 없이 병원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의아스러워 이유를 묻는 청년당원에게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아.”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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