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09.04.02 (목) 17:26
[선차를 마시며] <9>끊임없는 수행 정진, 송광사 회주 법흥 스님
“마음먹기에 따라 이 땅은 苦海가 아니라 淨土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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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이들에게 책이나 서예작품을 주기를 좋아하는 법흥 스님이 기자에게도 ‘仁者無敵(어진사람은 적이 없다)’이라고 쓴 서예 한 점을 내주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방우산방’의 내실이 스님을 닮아 정갈하다.
그는 늦깎이 수행자였기에 시간을 금쪽같이 썼다. 또한 참선에 들었다 하면,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치열한 수행력을 보였다.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오후불식(午後不食) 등 무서운 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이룬 뒤, 훗날 조계종 종정에 오른다. 그의 상좌로 서울 길상사 법정 스님(77)과 송광사 법흥(78) 스님이 한국 불교를 굳건히 떠받치고 있다. 지금은 환속했지만, 시인 고은도 효봉의 상좌였다.
법흥 스님을 만나러 남도 땅 끝자락 송광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작은 냇가를 건너니, 복작대던 한낮의 시간이 온데간데없다. 매화나무 위에서 새들이 수런거릴 뿐, 산사는 침묵에 빠져 있다. 스님의 거처인 화엄전 ‘방우산방(放牛山房)’은 사찰 뒤쪽에 자리 잡아 더욱 고요하다.
불가의 스승과 제자는 속가의 부모 자식과 다름없는 법, 제자는 스승의 외모며 성품까지 빼닮는다. 산문에 들어선 지 51년째인 법흥 스님도 일생을 방일함 없이 살아왔다. 여든을 앞둔 지금도 경을 읽거나 참선, 사경, 운력 등으로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다. 스님은 1959년 28살 때 머리를 깎았다. 그도 출가 전에 일반 대학인 고려대 국문과(54학번)를 다녔다. 시인 조지훈이 은사이고,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과 한 해 후배다. 법흥 스님은 국문학도 출신답게 경학에 밝고, 기억력이 비상했다. 그는 ‘선(禪)의 세계’와 ‘계율강요’라는 역작을 저술했다. 한국 불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이들 책은 해를 거듭할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이 중에 보조국사와 송광사를 속속들이 다룬 ‘선의 세계’는 10쇄, 2만7000권이나 찍어냈다.
법흥 스님은 ‘선의 세계’ 속에 나오는 ‘선종십우도(禪宗十牛圖)’를 설명하며 스스로 경책하는 듯했다. 듣던 대로 스님의 말은 빨랐고, 언어 사용에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 선승들은 소의 순함과 과묵한 특성에서 순일한 심법(心法)을 닦아가는 자신들의 본분을 발견했지요. 부처님도 불도의 깊은 의미를 자주 소에 비유해 설했습니다. 소와 목동을 소재로 선수행 과정을 형상화한 10장의 그림을 보면 불교에 대한 발심이 절로 나지요.”
스님은 책장을 넘기며 중요한 부분을 짚어줬다. 제1, 2도에서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목동은 제3도 ‘견우(見牛)’에서 곱향나무(쌍향수) 뒤에 숨어 있는 검은 소를 발견하고 미소 짓는다. 소위 ‘한 소식’ 했다는 초견승의 단계지만, 공부를 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4도 ‘득우(得牛)’는 달아나려는 소와 고삐를 붙잡는 목동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직 공부가 덜 됐음을 알고, 자신을 더욱 채찍질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5도 ‘목우(牧牛)’에서 목동은 확실히 소를 붙잡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삐를 놓았는데도 소는 달아날 생각을 안 한다.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고, 선악의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다.
“누가 비방해도 전혀 마음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던 효봉 스님은 이 단계까지 공부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6도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목동이 소 등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읽을 수 있다. 제7도 ‘망우존인(忘牛存人)’에는 소는 없고 목동만 앉아 있다. 견성하면 마음의 소였던 화두를 버려야 하는 이치다. 제8도 ‘인우구망(人牛俱忘)’에서는 사람과 소, 둘 다 보이지 않는다. 옛날 중국의 조주 선사가 도달했던 ‘천진(天眞)’의 경지라고 한다. 제9도 ‘반본환원(返本還源)’은 계곡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꽃은 붉게 피어 있다. 얼룩진 마음의 때를 씻으니 대자유, 본래 면목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저 수행의 끝은 어디일까. 제10도 ‘입전수수(入廛垂手)’에는 지팡이를 짚고 삿갓을 쓴 고승이 산을 내려와 그윽한 표정으로 마을을 바라다본다.
“수행자의 최종 목표는 득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에게 열심히 전해야 하지요.”
그래서 붓다는 득도 후 열반에 들 때까지 팔십 고령에도 쉼없이 법(진리)을 전했으리라. 지금 법흥 스님도 1974년 송광사에 들어가 4반세기를 상주하며 오직 그 길을 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스님은 과거 오랜 기간 본인은 물론, 모든 중생의 해탈을 위해 전국 각지의 기도 도량을 찾아다니며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해인사에서는 성철 스님의 권유로 3000배를 시작해 340일 동안 17만배나 올렸다. 수행자의 고단하고 위대한 여정이 듣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스님은 중생이 불교를 가까이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은 고통을 벗고 피안(彼岸)인 극락에 가는데 있지요. 생멸(生滅)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종교가 불교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자력으로 피안에 가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셨던 거지요.”
해답은 마음에 있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 땅은 고해(苦海)가 될 수 있고, 정토(淨土)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공부는 결국 마음을 갈고, 닦고, 기르는 공부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은 죽은 자를 살려놓기도 하고, 법을 중국에서 해동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스님의 이야기인즉 이렇다. 언젠가 한국 관광객이 스위스 알프스 꼭대기에 올랐다가 목이 말라 냇가에서 물을 마셨다. 그런데 냇가에는 ‘POISON’라고 쓰여 있었다. ‘포이즌이라니? 그럼 물에 독(毒)이 섞여 있다는 말인가?’ 관광객은 순간 초주검이 돼 병원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의사가 진찰 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관광객의 설명을 듣고 의사가 까르르 웃었다. “당신은 프랑스어로 쓰인 ‘푸아송(물고기)’을 잘못 읽은 겁니다. 즉, 낚시질을 하지 말라는 경고지요.” 관광객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중국에서 선의 법맥을 받아온 고려국사 태고보우가 명나라에 갔을 때 일이다. 명나라 청공 선사가 법담으로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전에도 태고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보우가 “허공이 태고(太古)에서 나왔다”고 답하자, 노장이 크게 찬탄하며 이렇게 읊었다. “오, 불법이 동쪽으로 가고 있구나.”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지요. 일체유심조 사상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인류 사회를 이끌어 가는 큰 등불이 될 것입니다.”
스님의 이야기는 참선으로 넘어갔다. 불가에서는 앉아서 한 생각에 집중하는 참선을 중요시한다. ‘학문의 왕’ 철학이 논리에 의존한다면, 선(禪)은 논리와 상극이다. 부처를 이루는 데는 문자나 언전(言詮)이 미치지 못한다. 오직 본심을 통해 자기 성품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참선을 한마디로 ‘생각하는 힘’이라고 풀이했다. 생각하는 힘은 무궁·무량해 생사의 근본이며 선악의 근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곧 만법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며, 특히 붓다가 깨달음의 방편으로 삼았던 참선은 핵무기가 난무하는 21세기 인류 정신문명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오랜 참선으로 단련된 몸인지, 법흥 스님은 지금도 총기가 번뜩인다. 젊은 시절에는 경전을 읽으면 그대로 암기해 버렸다고 한다. 그가 이야기 중에 불교경전은 물론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철학과 문학을 두루 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 모아온 불서를 지난해 11월 모교인 고려대에 기증했다. ‘대정신수대장경’ ‘남전대장경’ 등 모두가 고가품이요, 애지중지하던 서적들이다. 스님은 이렇게 책이건, 서예작품이건 남 주는 것을 좋아한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이뤄진다고 보지요. 이 세상에서 부부로 만나려면 8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스님은 깊고도 깊은 부부 인연을 통해 가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설혹 악연으로 만나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전생의 업장을 덜어낸다는 마음으로 참고 또 참으며 잘 넘어가라고 했다. 마음을 넓히면 업장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늘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힘쓰세요. 평소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꾸준히 참선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 놓아야 합니다.”
법흥 스님은 요즘도 새벽 3시에 눈을 뜨면 대웅전과 전각을 돌면서 절을 하고, ‘대능엄주’ 독송으로 하루 일과를 연다. 아침마다 독송하는 ‘법화경요품’은 닳을 대로 닳았다. 스님은 이 세상의 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자각이 있었기에 남루한 옷 한 벌 걸친 채 영원한 자유의 길, 무소유의 여정에 들었으리라.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책 읽는 시간이 자꾸 줄어든다”는 법흥 스님을 뒤로하고, 방우산방을 빠져나왔다. 대지에 봄빛이 가득하다.
송광사=글·사진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 법흥 스님은
경학에 밝은 학승… ‘선의 세계’ ‘계율강요’ 등 저술
1931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청주고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77년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주지, 1984년 송광사 유나,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통도사 해인사 상원사 망월사 김룡사 묘관음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행정진했다. 2007년 4월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2008년 10월 대종사 품계를 받았다. 현재 송광사 회주 소임을 맡아 조계총림 송광사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스님은 제자들에게도 게으름을 타파하고 근면할 것을 강조해 왔다.
- 기사입력 2009.04.02 (목) 17:26, 최종수정 2009.04.02 (목)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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