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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이 5년 전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했던 지리산 노고단 아래서 다시 108배를 올리고 있다. |
ⓒ 이주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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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여명의 생명평화 길벗들이 5년 동안의 탁발순례를 닫는 기도회에 함께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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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가 납작 엎드린다. 5년 전 그가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했던 곳, 지난 9월 그의 도반인 수경 스님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오체투지를 시작했던 곳, 지리산 노고단 아래서 도법 스님이 다시 납작 엎드린다.
5년 전 떠날 때 혼자가 아니었듯 ‘생명평화탁발순례 5년을 닫는 생명평화 기도회’가 열리는 14일에도 그는 '함께'다. 약 300여 명의 길 위의 도반들이 도법 스님과 함께 지리산 칼바람 속으로 온몸을 눕힌다.
그들은 말한다, "산과 강, 들과 마을, 사람과 마음을 걷고 걸어 그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들과 함께 다시 이곳에 와서 잘 다녀왔음을 아뢴다"고. 그들은 또 얘기한다, "우리나라는 부자나라가 되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구체적 삶의 내용은 거꾸로 생명위기와 공동체 붕괴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험한 세상에도 등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고. 그들은 또 얘기한다 "희망의 새 길은 한 끼의 밥, 하룻밤의 잠자리로 족한 비움으로써 나누는 길, 버림으로써 함께 사는 길에 있다"고.
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인가 이 길을 걷고 있을 아름다운 길동무들과 연대하여 길을 갈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우리 물처럼 살아 나를 버리고 나눠 너를 빛나게 하고, 이웃을 빛나게 하고, 지역사회를 빛나게 할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세상이 밝아지면 그때 비로소 나의 생명도 빛날 것"이라고.
그렇게 그들은 침묵의 다짐을 나누며 108배를 올린다.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돌아온 지금,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떠날 곳은 "내가 사는 동네"라 했다. "가족과 이웃에게 부터 먼저 생명평화의 등불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겠노라"고 그들은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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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과 최종수 신부(왼쪽에서 세번째) 등이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함께 해온 길벗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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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함께 한 이들이 서로 껴안으며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마을로 들어가 마을 속에서 이웃들과 함께 생명평화 등불이 되겠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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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어깨를 걸고 부르는 <아리랑>은 어느덧 가장 부드럽지만 가장 강한 생명평화의 노래가 되어 지리산 능선을 타고 세상으로 흩어져 간다.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지난 5년 동안 3만리(1만2000km) 길을 걸으며 5만명의 사람들과 맺었던 인연도 아리랑 가락과 함께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그래서 도법 스님은 "길이 끝났으니 다시 길은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다.
도법 스님은 "지난 5년간의 탁발순례가 생명평화의 얘기를 들고 삶과 사회의 문제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하여 바로 여기서 생명평화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생명평화문화로 가꾸는 일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도법 스님과 그의 생명평화 도반들은 이제 마을로 들어가려 한다. 도법 스님은 늘 "내 삶과 객관적 사회현실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보자"고 역설해왔다. 실상을 제대로 봐야 성찰할 수 있고 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실상을 알고 보면 나는 항상 대상에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과 상대와 사건과 사회, 자연을 결코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생평평화의 등불들이 이제 마을 속에서 어떤 꽃과 함께 필 것인가.
도법 스님은 길 위에서 "진리 사랑의 길에서 꽃 한 송이를 주웠다, 그 꽃의 이름은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이라고 했다. 그대는 어떤 꽃과 함께 피고자 하는가. 길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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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 스님은 "길이 끝났으니 길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앞으로 보게 될 '실상'은 무엇이고, 그는 또 어떤 성찰과 함께 실천을 할 것인가. "늘 해오던 대로 이제는 마을에서 생명평화 공동체를 가꾸는 일을 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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