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미학> 6호(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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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마르크스의 만남과 어긋남
안상헌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데리다의 초혼제
데리다의 삶과 철학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키기에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는 너무나 이질적이었으며, 뱉어버리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현실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리다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입장은 ‘침묵’과 ‘유보’였으며 ‘공백’으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이런 침묵과 유보와 공백의 시기에 그의 주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현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끊임없이 촉구해 왔다. 오랜 망설임과 유보와 긴 기다림 끝에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때가 정말 느닷없이 ‘선물’처럼 그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였고,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의 공공연한 선언이었으며,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완전 승리의 ‘도래’였다. 상황은 모든 것이 너무나 어긋나 있었지만, 좌파들의 혼돈과 절망감이 깊어가고 배반의 탈주가 진행되는 극적인 상황은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침묵’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극적인 반전을 가능케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하 『유령들』)을 펼치면 마르크스의 혼령을 불러들이는 데리다의 초혼제의 비장함이 눈에 밟힌다. 서두에서 “시대가 제멋대로 가고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대사가 인용되고, “지금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몰하고 있다”라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의 패러디가 등장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를 걷어들이기라도 하듯이, 괄호 속에 “그러나 함께 맞물림이 없는 지금. 맞물림이 풀려버리거나 어긋나 있는, 제멋대로 가고 있는 지금, 그 가장자리가 다시 규정할 수도 있는 어떤 맥락에 의해 보장된 맞물림 안에서 결코 다 함께 지금일(유지될, maintenir) 수 없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연결고리가 풀려버린 지금”이라는 단서가 매달려 있다. 여기서 모든 것들이 어긋나고, 매듭이 풀리고, 제멋대로 가고 있는 ‘지금’이란 ‘현존’ 사회주의가 사라진 지금,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선언되는 지금, ‘역사의 종말’이라는 독단적 선언이 횡행하는 지금,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가 최후의 승리를 자축하는 지금, 단일 시장체제로의 ‘세계화’가 기치를 올린 지금, 그럼에도 절박한 삶의 문제들이 산재한 지금, 형이상학적, 독단적, 절대주의적, 전체주의적 역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지금이다.
화제는 곧바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왜 복수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데리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이 하나 이상일 수도, 하나 이하일 수도 있는 마르크스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선포하려는 유령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오랜 침묵과 유보와 공백 끝에 데리다가 마르크스를 ‘유령’으로 불러내는 까닭은 여럿이다: 1) 마르크스 자신이 유령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 2) 마르크스 자신도 끊임없이 유령에 시달려 왔다, 3) 그는 유령을 쫓아내려 시도하지만 결코 유령을 쫓아낼 수 없었다, 4) ‘마르크스는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마르크스를 축출하려는 공모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마르크스의 유령은 결코 축출될 수 없다, 5)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메시아적 약속을 말해주고 있다, 6)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으로부터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7) 이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죽음’을 아무리 선언하더라도, 죽음을 선언하면 할수록, 데리다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유령으로 우리 곁에 (비-)존재한다.
데리다의 유령학은 세 가지 원천으로 이루어진다: 1) 초기 저술의 존재-인식론의 해체, 2) 후기 저술의 윤리적 전회와 ‘정의’로서의 해체, 3) 셰익스피어와 마르크스에 등장하는 유령들이 그것이다. 초기 저술에서 절대주의적 ‘현재’의 형이상학과 이항대립을 비판하는데 사용된 차연, 반복가능성, 차이적 보충 같은 개념들은 후기 저술에서 해체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정의’, ‘선물’처럼 주어지는 ‘메시아적’ 미래, ‘다가올 민주주의’에의 ‘약속’이라는 이름들로 대치되며, 마르크스에 있어 이러한 메시지는 ‘나는 너의 아버지의 영혼이다’라며 늘 되돌아오는 ‘유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데리다에 의하면, 유령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비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삶의 방식을 자신으로부터도, 삶으로부터도, 삶에 의해서도 배울 수 없으며, 오직 타자로부터, 절대적 타자성으로부터, 죽음에 의해서만 배운다. 또한 우리는 삶에서만 배울 수도 없고 죽음 안에서만 배울 수도 없으며, 삶과 죽음 사이의 유령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령과 함께 대화하고, 교제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는 데리다의 유령학은 해체의 윤리학, 정치학, 사회이론이기도 하다. 데리다에 따르면, 유령학은 기억의 정치학, 유산의 정치학, 미래 세대의 정치학이다. 유령의 정치학은 정의롭지 않은 오늘의 상황이 존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과거에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할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타자를 끌어들여, 결국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정의’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정의롭지 않은 지금-여기의 현재를 넘어서 지나간 과거의 환영들에 대한 ‘채무’와 다가올 미래 세대에게 줄 ‘선물’로서 응답할 책임성을 지닌 정의가 그가 말하려는 정치학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치학은 해체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차연, 반복가능성, 어긋남, 차이적 보충과 같은 해체의 논리는 유령의 논리로 이관되고 적용된다.
데리다와 마르크스의 만남과 어긋남을 논의하기 전에 마르크스 정신의 계승자들이 데리다의 마르크스 초혼제에 동의해야 할 지점을 몇 가지 먼저 지적해 두어야겠다. 마르크스 계승자들은 1) 후쿠야마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완전 승리를 뒷받침하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독단적 선언에 대한 반대에 동의할 것이다, 2)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한 현재주의와 역사적 목적론에 대한 문제 제기에도 동의할 것이다, 3) ‘새로운 세계질서’(자본주의적 단일 시장체제로의 ‘세계화’) 구축 과정에서 나타나는 절박한 과제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도 동의할 것이다, 4) 또한 ‘현존’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래’의 도래에 대한 신념에도 동의할 것이다, 5) 이에 대한 동의는 마르크스에 대한 채무이자, ‘과거’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작업이자, 타자에 대한 책임이자 정의라는데도 동의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일시적 혼절 상태에 빠져있던 마르크스 정신의 계승자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계기를 제공한 데리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데에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진정한 계승자라면 데리다의 마르크스 초혼제에 대한 이러한 많은 부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에 대한 유령학적 해석에는 많은 부분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앞에서 열거한 것들에 동의하는 것이 곧 데리다의 마르크스 해체의 논리와 결과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1)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론이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마르크스 정신의 계승자라면 데리다에 의지하지 않고도 쉽게 논증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그 내재적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에 대한 내재적 분석과 이를 지양하기 위한 현실적 실천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존재할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재주의적(과학주의적) 해석과 역사-목적론적(헤겔주의적) 해석에 대한 논쟁은 이미 마르크스주의 논쟁사에서 데리다의 유령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문제로서, 데리다의 마르크스 해체가 이 논쟁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3) 자본주의적 단일 시장체제로의 ‘세계화’ 과정에 내재한 모순과 문제는 데리다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실천운동 또한 데리다가 제시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는 다른 다양한 형태들이 모색될 수 있다. 4) ‘현존’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래’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신념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이념에 속하며, 이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라는 변증법적 논리와 유물론적 역사이해를 통해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5) ‘다가올 민주주의’는 마르크스에 대한 채무 변제,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애도작업, 타자에 대한 책임과 정의에 의한 미래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현실적 미래이다. 6) 데리다가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일시적 혼절 상태에 빠져있던 마르크스 정신의 계승자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부채가 곧 데리다의 ‘유령의 정치학’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의 몇 가지 과제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1) 데리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의 흔적들: 93년 『유령들』의 출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데리다가 어떤 입장을 견지해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해체적 수용: 일반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모습을 지닌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할 것이다. 3) 마르크스의 데리다 비판: 해체 당하기 이전의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데리다의 유령학적 마르크스 해체 전략의 몇 가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4) 데리다 초혼제의 유산: 데리다의 마르크스 초혼제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와 과제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사회이론으로서의 데리다의 한계, 즉 데리다의 유령학이 지닌 이론적 실천적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서는 세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2. 데리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의 흔적들
마르크스와의 본격적인 만남(『유령들』)이 있기까지 데리다가 마르크스를 언급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이런 흔적은 그가 마르크스를 ‘유령’으로 초혼할 때까지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침묵’과 ‘유보’와 ‘공백’의 흔적들로서, 데리다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직접 언급한 흔적은 1971년, 1972년, 1980년, 그리고 1993년이다.
1) 1971년: 데리다는 한 대담에서 “로고스중심적 담론의 해체 작업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보자면, 지배 이데올로기 담론으로 이해되는 로고스중심적(관념적, 형이상학적, 종교적) 담론에 의해 억압되어온 역사적 텍스트인 유물론적 텍스트를 만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여겨지는데, 당신은 이에 대해 말하면서도 마르크스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텍스트들에 대한 참조를 유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데리다의 응답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관념론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그와의 만남은 내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의 조건이 엄격하게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급한 접근이나 결합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독단과 혼동과 기회주의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나의 작업과 마르크스주의 텍스트의 결합은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텍스트를 완성된 철학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현 상황에 단순히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상반되는 어떤 것도 지금으로서는 제시하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텍스트들은 텍스트의 표면 밑에 감추어진 완성된 기의를 찾아내는데 목표를 두는 해석학적 혹은 주석적 방법에 의거해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책읽기는 변화를 수행하는(transformatif) 작업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물질’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물질’이 ‘근본적 이타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유물론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유물론적 텍스트에서 ‘물질’ 개념이 항상 절대적 바깥이나 근본적 이질성으로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 바깥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확신도 내게는 없다. 내가 이 개념을 피하는 까닭은 이 개념이 로고스중심적 가치로 재활용되어 실재론, 감각주의, 경험주의와 같은 로고스중심주의적 변형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물질’이라는 기표가 지닌 문제는 그것의 재기입이 새로운 근본 원리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하거나, 이론적 퇴행에 의해 ‘초월적 기의’로 재구성되는 경우이다. 왜냐 하면 선험적 기의는 단지 관념론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질’ 개념은 두 번 표지되어야 한다. 즉 한 번은 전복 단계인 해체된 영역에서, 또 한 번은 대립 쌍(물질/정신, 물질/관념, 물질/형상)을 벗어난 해체하는 텍스트 안에서 표지되어야 한다.
‘모순’과 ‘변증법’에 대해서도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 텍스트 안에서 모순과 변증법이 형이상학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설사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사변적, 목적론적, 종말론적 지평으로부터 모순 개념을 일시에 해방시킬 수 있는 동질적인 마르크스주의 텍스트를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언급들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관점과 태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해체론적인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며, 방대하고 치밀한 독서의 여정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영역에는 근본적 비결정성이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유보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68년의 격랑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데리다에 있어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당신’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언급은 뒤에서 살펴볼 1980년의 한 세미나의 고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
2) 1972년: 데리다가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1972년『책의 바깥(Hors Livre)』이다. 주로 헤겔 텍스트(『정신현상학』 서문, 『논리학』 서문, 『철학사 강의』 서문, 『법철학 강의』 서문 등)의 서문 해체를 통해 텍스트의 산종(dissémination)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 글에서 그는 마르크스 텍스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본』 독일어판 2판 발문과 19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 서문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헤겔 후기에 대해, “만약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헤겔의 아포리즘과 관념론과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옹호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서술 방식(méthode d'exposition)’ 때문이다. 마르크스 옹호는 서문에 나타난 그의 개념 및 실천과 본질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술 방식’과 ‘탐구 방식’의 차이를 제시함으로써 헤겔 변증법을 전도한 마르크스에 대해, 그는 마르크스의 담론 형식과 헤겔의 표현 방식의 유사성을 갈라놓는 중요한 국면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의 『강요』 서문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의 서문은 발전의 양적, 질적 이질성과 그 안에 기입된 전체적인 역사적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함으로써 마르크스의 헤겔 후기에 내재한 해체적 요소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 좌파에 속하는 마이클 라이언은,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후기는 로고스중심주의적 폐쇄성과 사변적 변증법을 통한 지양적 해결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충동을 벗어나고 있으며, 이는 “데리다가 자신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라 해석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데리다는 초기의 하이데거적인 존재-인식론적 해체의 입장에서 레비나스의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요구를 통해 하이데거를 보충하는 재작업에 들어간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있음(Es Gibt)을 부재 속의 현재, 은폐 속의 드러냄으로 읽는 부분을,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타자의 흔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작업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데리다에 대한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정치적 작업 속에서도 데리다는 여전히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유보와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3) 1980년: 10년이 지난 80년 여름 데리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정치적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된다. 『인간의 종말: 데리다의 작업에의 참여』라는 주제로 프랑스 세리지에서 열린 데리다에 관한 ‘정치적 세미나’에는 전 세계로부터 데리다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세미나의 주된 주제는 “해체는 어떤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가?”, “해체론적 정치학의 정립은 가능한가? - 그리고 바람직한가?”, “데리다는 68년 전후의 저술에 나타난 혁명적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좌파’라는 널리 퍼진 가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정치적 주제를 계속 회피하고만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데리다 좌파에 속하는 스피벅은, ‘해체론의 정치화’를 주장하면서, 해체론이 정치경제학을 배제하고 있었다면 이제 ‘해체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마르크스를 세밀하게 읽으면 마르크스가 해체론자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선례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데리다 우파에 속하는 로고진스키는 ‘급진적 혁명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해체의 정치학은 급진적 ‘혁명의 거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결정적인 단절이나 ‘인식론적 단절’을 믿지 않는다. 단절이란 항상 운명적으로 낡은 옷 속에 재기입되기 때문”이라는 데리다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해체론은 급진적 단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해체를 필수적이게 하는 것은 바로 단절의 불가능성이며, 데리다에 있어 단절 이념은 단지 전략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갑론을박에 대해 데리다는, 68년 당시에는 ‘반마르크스주의 연대’에 편들지 않기 위해 혁명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담론도 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세력화의 약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의 혁명 이념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좌파 세력의 재결집을 평가절하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또 데리다는 분열을 피하려는 좌파들의 목적을 도와주기 위해, 복합적인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혁명적 기획과 실제간의 차이와 간격에도 불구하고 전선 공격에서는 물러나 있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략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철수, 후퇴, 침묵”으로 나타났다. 데리다는 이러한 침묵을 ‘공백’이라 말하면서도, 이러한 공백은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정치적 제스추어였으며, 68년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적절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토론을 주최했던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그 당시는 그런 전략이 적절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이러한 공백을 마르크스 읽기로 대치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 데리다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해체 작업에 대한 데리다주의자들의 입장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데리다 좌파들의 ‘해체의 해체’를 통한 해체의 정치화(politicizing Deconstruction), 즉 해체의 혁명화이며, 다른 하나는 데리다 우파들의 정치적인 것의 해체(deconstructing the Political), 즉 혁명의 해체이다.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데리다는 대부분의 토론 참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양자의 어느 입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세미나를 통해 해체론의 지지자들이 정치적 문제에 있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발언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한정 침묵하거나 유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대한 준비작업에서 그가 취한 전략은 ‘정치적인 것의 해체’를 통해 ‘해체를 정치화’하려는 이중 전략으로 나타나며, 이후에 발표된 글에서 윤리의 문제, 정의의 문제, 선물, 계산 불가능성과 같은 개념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준비작업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4) 1989년: 다시 10년이 지난 후 데리다는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미국 카르도조 로우스쿨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법에서 정의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데리다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해체는 어떤 정의로운 행동도, 정의에 대한 어떤 정의로운 담론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1989년 이전의 이중 긍정에 관한 담론, 교환과 분배를 넘어선 선물, 비결정성, 비교불가능성, 계산 불가능성에 관한 담론, 단일성, 차연, 이질성에 관한 담론들은 모두 정의에 관한 담론이었으며, 정의의 관한 담론이 간접적으로 전개되었던 까닭은 단지 정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정의를 배반하지 않고는 정의를 주제화하거나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는 비록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본격적인 정치적 발언에 나섰으며, 마르크스주의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체론적 정의론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여기에서 제시된 해체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기반으로 하여 곧바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유령학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5) 1993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유보와 침묵을 지켜왔던 데리다는 마침내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그동안 준비한 작업들을 통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해체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지금’에 와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다시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세대는 일생동안 마르크스주의 유산이 절대적으로 규정했던 세계 해석과 텍스트 독해와 논쟁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험을 공유했다(36쪽).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질문은 이미 보았던, 늘 보아왔던, 반복되어 온, 이 시기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부여되었던 질문이었다. ‘역사의 종말’, ‘마르크스주의의 종말’, ‘철학의 종말’, ‘ 인간의 종말’, ‘최후의 인간’과 같은 종말론적 주제들은 지난 40년 동안 우리의 일용 양식이었다(36-37쪽).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종말의 고전들을 읽거나 분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구와 소련의 전체주의적 테러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 안에서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었다(37-8쪽). 이러한 특이한 시기에 이중적이고도 고유한 경험을 겪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 대한 미디어들의 담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지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후쿠야마와 같은) 젊은 사람들이 뒤늦게 이런 담론에 열을 올리는가?(38쪽) 데리다에 있어, 이러한 ‘지금’의 상황은 한 편으로는 이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다른 한 편으로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자신이 준비한 ‘정의로서의 해체’로서 응답할 수 있는 기회였고 ‘사건’이었다. 즉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옹호, 반박과 해명이 동시에 가능한 가장 적절한 시점이며, 정치적으로도 마르크스의 정신과 유산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절박한 시점으로 판단되었다.
마르크스를 읽고, 다시 읽고, 토론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잘못일 것이다. 즉 또 다른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에서의 ‘강의’나 ‘토론’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론적, 철학적, 정치적 책임을 결여하는 것은 더 큰 잘못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독단에 이르는 기제와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 기구들(국가, 당파, 세포조직, 조합 및 교의를 만들어내는 다른 기구들)이 사라지는 과정에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거나 알리바이 증명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책임이 없다면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없이는 안 되며, 마르크스가 없이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기억과 그의 유산이 없이는 - 어떤 마르크스이든, 그의 천재성이든, 아니면 최소한 그의 정신들 가운데 하나이든 간에 -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가설이자 또한 우리의 당파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하나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35-6쪽)
마르크스주의에 유보와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가 지금에 와서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분명히 ‘어긋난 시대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다시 읽기를 통해 그가 제시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유령’의 모습을 띠고 우리 앞에 등장한다. 데리다는 왜 우리에게 이토록 생소한 마르크스를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불러내는가?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긴 이야기와 비판적 검토가 요구된다.
3. 데리다의 마르크스 해체
데리다의 마르크스 읽기는 해체적 비판과 수용이라는 이중 작업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 작업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저술들에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 텍스트 자체에 나타난 마르크스를 상정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그는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존재-신학적, 역사-목적론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판의 근거를 마르크스 텍스트 자체에서 끌어낸다. 그러나 양자는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자에서 하나 이상으로 나타나는 마르크스의 정신들은 후자에서도 하나 이상의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주장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정신이 하나 이상의 모습들을 지니게 되는 원인은 바로 마르크스 자체에 있다.
데리다는 마르크스 해체 작업은 다섯 가지 과제, 즉 1) 스콜라적인 마르크스 읽기와 토론의 극복, 2)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정신을 완전히 청산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 3)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임 회피와 변명에 대한 반박, 4) 마르크스가 물려준 유산을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어받을 책임, 5) 마르크스 정신에는 하나 이상의 정신이 있다는 유령학의 정립을 함축한다. 첫 번째 과제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존재-신학적 역사 목적론의 해체적 비판을, 두 번째 과제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새로운 신성동맹’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대한 비판을, 세 번째 과제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좌절과 침묵에 대한 대안적 비판을, 네 번째 과제는 마르크스 정신의 실천적 계승을, 다섯 번째 과제는 마르크스 텍스트 해체를 통한 유령학의 구축과 마르크스 정신의 새로운 계승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데리다의 해체 작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데리다가 ‘문제삼는 것은 마르크스의 철학적 응답, 더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 자신의 존재론적 응답’(58쪽)이다: ‘마르크스의 서명을 통해 하나의 질문으로 열린 유령적 성격은 마르크스 자신의 존재론적 응답에 의해 은폐된다. 마르크스 자신의 응답에 따르면 환영은 존재하지 말아야 하고, 잠시라도 혹은 상상으로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 계승자들의 응답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도처에서 다양한 정치적 결론을 끌어내는데, 이러한 결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저항하는 보충적 환영들을 희생시킨다’(58-59쪽).
2)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마르크스의 저술과 명령에서 야기되는 위험, 즉 고전적 저술에 대한 조용한 주석을 통해 정치적 명령을 중화시키거나 둔화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킬 때 생기는 위험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마르크스의 절박성, 절실함, 명령을 강조한다. 그는 마르크스에 대한 최근의 상투적인 스콜라적 주석과 토론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내용을 정치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암호해독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거나 암호해독(해석)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변혁으로 바꾸는데 참여하는데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는 조건 하에서만 마르크스의 복귀나 마르크스에로 돌아간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금, 마르크스주의가 와해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르크스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60-61쪽).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마르크스를 하나의 위대한 고전으로 간주하고 이를 해석학적, 문헌학적, 철학적 규범에 따라 해석하는 대학의 풍토와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론주의로의 퇴행과 정치적 중립화로의 복귀에 반대하는 작업을 선언한다(62쪽). 데리다에 있어 마르크스는 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하는 이론가가 아니라, “늘 전투에 호소하고, 혁명적 테러를 요청하고, ‘영구혁명’을 추천하고, 혁명을 명령하는 ‘절박성(immanence)’에 호소하는”(63쪽) 유령으로 다가온다.
3) 지금 이런 절박성에 호소해야 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의 축출을 공모하는 오늘날의 ‘새로운 신성동맹’에 대응해야 하는 절박성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공모자들은 축출해야 하는 그들의 적이 더 이상 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음을 두려워한다(88쪽).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공모자들은 여전히 마르크스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는 비-마르크스주의자들, 잠재적-마르크스주의자들, 유사- 혹은 의사-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 ‘마르크스주의의 죽음’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88쪽). 공모자들의 이러한 선언에 절박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선언이 단순한 ‘선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행적 행위’(89쪽)라는 점이다. 이들은 “때로는 더 비밀스럽게 혹은 덜 비밀스럽게, 때로는 더 공개적으로 혹은 덜 공개적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에서 전선을 옮겨다니면서 맹세하고, 서약하고, 약속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따위의 수행적 행위를 끊임없이 지속한다”(89쪽). 수행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은 미디어(정보, 출판, 원격 통신, 기술적- 원격 담론들, 기술적 원격 아이콘 등)들로서, 공모자들은 미디어들 자체의 미디어적 성격을 알아내고는 이를 이용한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담론들은 주로 정치인들의 정치적 담론, 대중매체들에서의 담론, 학자들의 담론들이다(91쪽). (후쿠야마의 책을 비롯한) 이러한 담론들이 ‘미디어 제품'으로 슈퍼마켓 등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정신이 지닌 잠재력을 은폐하고 싶은 공모자들의 충동질 때문이다(115-6쪽).
4) 데리다가 문제삼는 것은, 마르크스와 그 계승자들이 이러한 사태에 과연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예’ 그리고 ‘아니오’이다(93쪽). 이런 이유로 그는 “한 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유산을 가정해야 하지만, 이러한 유산이 필연적인 만큼 또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재확인해야 한다”(93-94쪽)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마르크스 해체는 ‘비판적 상속’(95쪽) 즉 ‘유산을 걸러내는 선택적 비판’(97쪽)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의 불가피성과 구조적 불충분성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될 수밖에 없는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과학과 비판의 토대가 되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이 존재-신학적 존재론과 메시아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102쪽)이라고 단언하고,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정신’을 ‘존재론, 철학체계, 형이상학 변증법적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 역사 유물론과 방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당 기구, 국가, 노동자 인터내셔널에 구현된 마르크스주의’와 엄격하게 구분한다(116쪽).
6)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정신’을 자신의 ‘해체’와 구별한다: 그는 “해체는 단지 비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판이 모든 비판에 대해 제기하는, 심지어는 그 질문에 대해서까지도 제기하는 질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해체는 존재론적이든 비판적이든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116-117쪽)라고 말한다. 그는 해체에 대해, ‘나의 해체적 전개는 애당초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에 내재한 존재-신학적 개념과 역사에 있어서의 고고학적-목적론 개념을 문제삼는 것이었으며, 역사의 종말이나 무역사성에 맞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존재-신학적-고고학적-목적론이 역사성을 가로막고, 궁극적으로는 역사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해체는 어떤 다른 역사성을 사유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새로운 역사나 ‘새로운 역사주의’가 아니라, 메시아적이고 해방적인 약속을 ‘약속’으로서 확인하는 사유로의 접근을 개방하도록 허용하는 역사성으로서의 사건성의 또 다른 개방의 문제였다‘(125-6쪽)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은 결국 ‘해방적 욕망’은 결코 해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며, 이런 의미에서 ‘해방적 욕망’은 재정치화의 조건이 된다(126쪽). 또한 ‘약속, 결단, 그리고 책임은 항상 조건으로만 남는 비결정성의 증명 가능성을 지녀야 한다’(126쪽).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해체적 사유는 대립과 대립이 상정하는 존재론을 넘어서 있으며, ‘타자를 참조할 가능성, 근본적 타자성과 이질성의 가능성, 차연의 가능성, 기술성과 관념성의 가능성을 현재하는 사건 자체에, 현재적인 것의 현재에 각인함으로서, 환영, 모조, 종합적 이미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의 작용을 파악하는 방법을 박탈하지 않는다’(126쪽)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해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정한 정신에, 그 중 하나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으며, 그렇다고 비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라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7) 이러한 해체적 관점에서 그는 현대 세계의 열 가지 절박한 과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제안은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정신을 계승하는 입장에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일 것이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현실과 규제적 이념간의 간격을 가정하는 관념론자들에게도, 시장, 자본법칙, 자본의 유형, 의회민주주의, 대의제와 선거제도, 인간, 여성, 어린이의 권리 내용, 평등, 자유박애 개념, 존엄성, 인간과 시민간의 관계 등과 같은 이념의 개념 자체를 다시 문제삼는 사람들에게도, 지금처럼 모든 것이 잘못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정한 정신의 유산에 충실함은 의무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43-5쪽).
8) 따라서 그는, 마르크스의 상이한 정신들은 쫓아내기보다는, 선별하고, 비판하고, 옆에서 지켜주고,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하며, 이를 망각하거나 미리 배제하면 새로운 환영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신에 대한 이런 비-배타적인 수용은 이런 까닭에 기존의 특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누구도 즐겁게 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뒤늦게-마르크스주의에-가담하는 위험한 태도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여기에서 시대를 거스르고 거꾸로 가는 것에 호소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명백하고 절박한 ‘시대의 어긋남’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지금이 마르크스를 맞아들이기에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145쪽).
9) 데리다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고취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항상 근본적 비판, 자기비판을 하는데 충실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고유한 변형, 재평가, 자기 재해석에 개방되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소망은 아직 비판 부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 정신은 일용 양식과도 같은 ‘계몽의 정신’을 상속받은 것이라고 말한다(145쪽). 따라서 이러한 비판 정신은 마르크스주의적 교의나, 상정된 체계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전체성이나, 노동, 생산방식, 사회적 계급과 같은 근본 개념이나, 그들의 기구들에 종속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정신과는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의 해체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사변만이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 기구와 전략의 가장 구체적인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해체는 궁극적으로는 방법적 절차나 이론적 절차가 아니라(146쪽), 현실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주장한다.
10)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해체한다. 그의 텍스트 해체는 주로 마르크스 자신이 환영, 환영의 개념, 유령 혹은 귀신의 개념을 어떻게 다루었으며, 어떻게 규정했으며, 어떻게 존재론에 얽매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유물론, 당, 국가, 전체주의적 국가를 존재론에 연결시키게 만들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대한 데리다의 응답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브뤼메르 18일』,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길게 다룰 수 없지만, 텍스트 분석을 통해 데리다가 얻은 결론은 (1)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유령적 존재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광범위한 언급이 있으며, 유령의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텍스트에는 유령에 대한 두려움과 이러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유령 사냥(축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이러한 두려움과 축출의 결과는 결국 존재-신학적, 역사-목적론으로의 퇴행으로 나타난다, (4) 그러나 마르크스의 텍스트의 근본 이념인 해방적, 메시아적 이념은 우리에게 하나의 명령으로, 해체될 수 없는 정의로 남아있다. (5) 이러한 유산을 계승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부채이자, 의무이자, 책임이다, (6)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존재하는 것도, 비존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으며, 우리는 이 ‘유령’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11) 그는, ‘유령학’으로 재구성된 마르크스의 정신은 끝없는 비판과 자기비판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마르크스의 유령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적 이념 또는 질문을 제기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해방적이고 메시아적인 긍정이며, 모든 독단적인 것, 형이상학적 종교적 결단, 메시아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떤 약속의 경험이다. 약속은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데 머물지 않고, 사건을, 새로운 행동방식을, 실천을,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46-7쪽)’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해체 가능한 존재-신학적 내용을 부여함으로써 해방적 종말론을 규정하고자 하는 후쿠야마의 반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물론, 목적론적 존재론과 메시아적 종말론을 혼동하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알뛰세르의 해석 경향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가 중시하는 해체적 사유는 ‘정의 이념의 해체 불가능성과 긍정과 약속의 환원불가능성을 환기시키는 것’(147쪽)이다. 이러한 사유는 근본적이고 끝이 없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무한한 비판’ 원리를 정당화하지 않고는 작용할 수 없다. 또한 이런 비판은 도래할 것의 절대적 미래로 개방된 경험의 운동, 즉 필연적으로 비결정적인, 추상적인, 황량한, 위임된, 드러난, 사건과 타자의 기다림에 주어지는 경험의 운동이며, 여기에서는 어떠한 예속도 정당화되지 않는다(148쪽).
12) 그는, 이러한 정신에 충실하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여된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특정 계급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가올 세기의 ‘새로운 계몽’이란 이름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와 해방 이념을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다르게 사유하고 만들도록 노력하자고 호소한다(149쪽). 이러한 책임은 상속자의 책임이며,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상속자들이며, 철학적, 과학적 형식의 기획과 약속의 절대적 특이성의 상속자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속과 기획은 절대적 유일성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특이하고, 총체적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49쪽).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앞선 것은 없으며, 철학적, 과학적 담론이라는 사건 또한 사회 조직의 세계적 형태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은 인간, 사회, 경제, 만족, 국가와 국가의 소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고 말한다(150쪽).
13) 마지막으로 그는 마르크스와 해체와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한다. 즉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이름으로 새겨진 정신들 가운데 하나가 “해체”이다. 이러한 해체는 마르크스 이전 공간에서는 불가능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해체는 특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특정한 마르크스 정신 안에서 하나의 급진화의 의미를 지닌다(150쪽). 그러나 급진화는 항상 그것이 급진화하는 그 자체로 부채를 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해체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과 기억과 또 마르크스주의 “정신”을 말하는 이유이다(152-3쪽).
4. 마르크스의 데리다 비판
이미 한 세기 전에 죽은 마르크스가 살아있는 데리다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근이 가능하다면 이는 마르크스를 ‘유령’으로 불러내는 데리다의 초혼제를 패러디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하나 이상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가운데 하나가 데리다에게 다가가 ‘나는 당신이 초혼제를 통해 불러낸 그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마르크스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데리다에게 말을 걸 것이며, “내가 당신이 말하는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까닭은 다음과 같다”라며 이렇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1) 나는, 당신의 말처럼, 나의 이름으로 나를 존재-신학적, 역사-목적론적 존재론으로 왜곡하는 과학주의적,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이론을 ‘철학적 원리’에서 출발한 적이 없으며, 오직 ‘현실에서 출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입지점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현실에서? 아니면 어떤 정립된 철학적 원리에서? (불행히도 뒤늦게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출발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신은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철학적 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당신이 그토록 오랜 동안 (‘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해 말하기를 머뭇거린 이유나, 하필 모든 것이 어긋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 나를 ‘유령’으로 끌러들이는 까닭도 절박한 ‘현실’보다는 당신의 ‘해체적 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은 아닌가?
2) 이 문제는 당신이 ‘지금의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제시한 10가지 절박한 과제를 담은 전보문과 ‘세계화’, ‘원격-기술 미디어 현실’ 따위에 대한 언급에서도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당신이 지금의 ‘현실’로부터 끌어낸 실천 전략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는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현실로부터의 출발’이 ‘당신의 해체 전략’과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당신의 해체 전략이 처음부터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발견된 새로운 ‘철학적 원리’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면서도 그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분석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활동을 통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자, 앞으로 ‘우리가 삶의 활동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우리의 현실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역사 유물론적 현실 이해는 불가피하다. 현실 분석과 실천에 있어 방법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방법은 내용과 분리된 별개의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당신이 나의 방법을 ‘방법론적 지침’이 아니라 ‘선험적 방법론’으로 체계화하려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존재-신학적 역사-목적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당신에 있어 방법이란 무엇인가? 당신에 의하면 ‘해체’는 ‘방법’도 ‘개념’도 아니며,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유’를 통한 끝없는 자기 비판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약속’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일단 유보해 두더라도, 당신도 인정한 바 있듯이, 나는 현실분석에 있어 ‘탐구의 방법’과 ‘서술의 방법’을 구분해 말한 바 있다. 이런 구분은 내가 사용하는 모든 방법과 개념들은 현실 분석의 과정에서 발견된 것들이며, 이는 분석 대상인 바로 그 현실을 벗어나 일반화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3) 나는 늘 ‘현실로부터의 출발’ 못지 않게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방법의 명료화를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왜냐 하면 과거 많은 사람들이, 한 때 나의 동료들이었던 사람들조차, 이런 명백한 방법의 길은 제쳐둔 채 ‘신비화’의 길을 자초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비판’, ‘비판에 대한 비판’,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실천적으로 매우 심각한 오류를 낳았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계를 뒤흔드는 듯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늘 가장 충실한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의 원인을 찾고자 했으며, 그 결과 ‘유물론적 역사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다룬 나의 저술은 당신도 알다시피 불행히도 1920년대 말까지 서랍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의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방법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심했으며, 당신이 비판하는 존재-신학적 해석이 오랫동안 범람했으며, 이에 대한 당신의 비판은 당연한 것이다.
4) 그러나 당신이 나의 저술들로부터, 특히 슈티르너 비판으로부터 ‘유령학’을 도출한 것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유’로서의 해체의 의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말 뜻밖이다. 당신은 나의 슈티르너 비판이 『독일 이데올로기』의 전체 맥락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배제하고, 오로지 유령을 언급한 대목에만 주목함으로써 유령학의 단초로 삼고 있다. 더욱이 당신은 슈티르너와 내가 환영을 축출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갔다고 주장한다. 이는 나의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과 슈티르너의 관념론 비판이 정반대의 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일차적으로 헤겔 이후의 청년 헤겔학도들의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토대를 유물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한 텍스트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텍스트는 한 때 독일 변혁운동의 동지들이었던 브루노 바우어, 포이어바하, 슈티르너,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변혁노선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서였다. 이데올로기 비판의 이론적 실천적 논거는 ‘포이어바하’ 편의 ‘유물론적 역사 이해’ 부분에 정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당신이 역점을 두고 있는 나의 슈티르너 비판 부분은, 당신의 말대로 슈티르너의 유령을 가지고 약간의 말장난을 즐긴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다. 슈티르너 비판이 이 저술 전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이 2/3가 훨씬 넘는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당시 슈티르너 비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하기 직전에 나는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에서 청년 헤겔학도들의 변혁운동의 이론과 노선을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들에 대한 비판에 착수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나의 슈티르너 비판의 진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당신의 ‘유령학’에서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이에 대해 약간 길게 언급해 두어야겠다.
나와 엥겔스는 『신성가족』에서 청년 헤겔학도들의 변혁노선, 즉 인간의 신성한 본성에 대한 올바른 관념으로 그릇된 관념을 대치하려는 포이어바하의 관조적 유물론, 독단적 전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강조한 브루노 바우어의 자기의식 따위에 기반한 변혁노선을 비판했지만, 현존하는 현실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확신에 대해 찬물을 끼얹는 급진적 도전을 해온 사람이 바로 슈티르너였다. 슈티르너는 청년 헤겔학도들과 동일한 현실적 전제에서 출발했으나 『유일자와 그 소유』에 이르러 청년 헤겔학도들의 혁명적 관념론이나 현존하는 현실에 대한 모든 저항은 사이비이론이라는 급진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슈티르너의 이러한 급진적 반전은 일대 사건이었으며 우리는 이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과 같은 말이 끼칠 영향을 한 번 상상해 보라: “당신들의 머리 속에 든 관념은 전혀 옳지 못하다. 당신들은 정신이 돈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거창한 것을 상상하고 있고, 당신들 멋대로 당신들을 위한 신의 세계를, 정신적 왕국을, 이상세계를 그리고 있다. 당신들은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 내가 고매한 목적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정말 정신병동에 갇힌 바보천치들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변혁적 실천에 대한 슈티르너의 이런 폭탄 선언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변혁적 실천을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몰아붙이는 슈티르너에 대항하여 변혁적 실천의 불가피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슈티르너 비판의 강력한 무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현실(적 전제)”로부터의 출발이었다. 이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슈티르너의 ‘무전제의 철학’(“나는 나 자신만을 전제한다. 나 자신을 전제하는 자는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전제도 갖지 않는다”)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었다. 슈티르너의 ‘무전제의 자기 정립(voraussetzunglose Selbstsetzung)'은 분명히 헤겔 『논리학』의 본질 범주에 대한 논의에서 끌어온 것으로, ‘누구도 에고이스트가 아닌 어떤 것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선언은 자신의 헤겔 철학에서 파생한 관념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모든 독단적 전제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 전제’는 결코 제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맞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적 전제’는 슈티르너의 ‘독단적 전제’를 규정하는 현실적 조건이자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슈티르너가 나와 다른 현실적 전제를 획득하지 못하는 한, 현실적 전제를 자신의 사유의 전제로 인정하지 않는 한, 독단적 전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슈티르너의 변혁적 실천에 대한 공격은 다른 청년 헤겔학도들의 ‘이상보다도 더 이상적인’ 한낱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획득한 자유의 기준이 인간에 대한 이상과 상응하는 개념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고 조롱하는 슈티르너에 대해, 사람들은 현존하는 생산력이 규정하고 허용하는 정도로만 자신을 해방한다고 응답했으며, 슈티르너가 이상을 자기향유(selbstgenuss)의 한 형태라고 부정했을 때, 나는 모든 과제와 이상은 사실상 물질적으로 규정된 혁명의 과제라고 대응했던 것이다. 사실 포이어바하 편에서 명료화된 ‘유물론적 역사 이해’는 (바우어, 포이어바하, 진정한 사회주의자 그륀 등을 포함하여) 슈티르너 비판의, 비판에 의한, 비판을 위한 이론적 자기명료화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나의 슈티르너 비판이 어떤 이유로 당신에게는, 슈티르너와 내가 다 함께 유령을 축출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축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존재-신학적 역사 목적론으로 퇴행한 것으로 비쳤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당신의 해체론의 원리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5)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해 두겠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신은 학문의 출발점에 있어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원리’, 즉 ‘해체’ 이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당신의 ‘철학’에 대한 이해와 나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다르다. 이에 대해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철학에 관한 언급을 인용해 두겠다.
사변이 멈추는 곳에서, 즉 현실적인 삶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학문 즉 인간의 실천적 활동 및 실천적 발전과정에 대한 기술이 시작된다. 의식에 관한 공론이 사라지고 현실적 지식이 이것을 대신해야 한다. 고립된 철학은 현실의 기술과 더불어 그 실질적인 매개물을 상실한다. 인간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고찰로부터 추상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결과들의 총합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추상들은 그 자체로서는 즉 현실적인 역할과 분리되면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추상들은 역사적 자료의 정리를 용이하게 하고 그 개별적인 사건의 배열순서를 암시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그러나 추상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시대를 근거지을 수 있는 방법과 틀을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자료들을 고찰하여 정리하고 이를 현실로서 기술할 때 문제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난점은 각종 전제들을 해결해야 제거할 수 있는데, 그러한 전제들이란 여기에서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직 현실의 삶의 과정과 각 시대의 개인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추상들’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의 ‘고립된 철학’, 즉 이데올로기로서의 철학과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다. 나의 ‘추상들’은 현실 파악의 구체적인 맥락을 벗어나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물며 나의 텍스트 안에서 전개되는 내용적 맥락을 분절하여 이를 해체하고, 추상화하고, 초역사화하는 따위는 나의 텍스트 이해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존재론적 해석도, 당신이 지적한대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나의 정치적 명령을 중화시키거나 둔화시키기 위해 나의 저술을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키는 비정치적인 해석도, ‘마르크스가 죽은 지금, 마르크스주의가 와해된 지금이야말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르크스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60-61쪽)도 모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 하면 당신은 나의 유물론적 현실 이해의 유산을 배제하고는 나로부터 아무 것도 물려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유령으로서가 아니라, 당신 말대로 당신들이 ‘읽고 또 읽어야 하는’ 텍스트 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에 그치고, 이제 당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나의 이러한 명백한 주장들을 접어두고 당신은 나로부터 무엇을 취하려 하는가? 그것이 당신과 ‘지금’ 현실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에 대한 당신의 기억이 현실의 절박성을 넘어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데 어떤 현실성과 실천성을 지니는가?”
마르크스의 이런 질문과 답변에 대해서는 물론 긴 주석과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주장에 일단 수긍한다면, 데리다가 마르크스 정신과 유산의 긍정적 핵심인 ‘유물론적 역사이해’를 (비배타적인 방식으로) 배제한 채, 마르크스의 ‘비꼬는 말투의’ 일시적 말장난으로부터 ‘유령학’과 유령학적, 심하게 말하면 유토피아적 ‘실천’ 강령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긍정적 유산은, 1) 실천적 현실 파악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현실적 전제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의 활동과 그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다(물론 여기에는 데리다가 말하는 변화된 지금의 현실이 포함된다), 3)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목적은 역사이론이나 역사철학의 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서의 실천이다, 4) 따라서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독단적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적 이데올로기는 실천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며, 그런 변혁적 실천노선은 현실적으로 결과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에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글에서는 ‘유보’해 둘 수밖에 없지만, 마르크스 자신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적 지침에 의거하여 데리다 ‘유령학’의 현실적 토대를 파악한다면, 데리다 해체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신비주의적 성격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 이념이 완전한 무정부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한,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말처럼 이성이나 진리 이념의 근본적 부정이 아닌 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대로 계몽 정신의 비판 이념을 계승하는 한(145쪽), 그리고 마르크스의 해방 이념을 받아들이는 한, 데리다의 해체의 정치학은 많은 비판과 질문에 답변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최근 연구들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데리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데리다의 해체론적 사회비판과 실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아직 더딘 편이다. 그 까닭은 아마도 90년대에 급속하게 진행되어온 ‘세계화’ 과정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대응이 더 절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유령들』 출간 이후에 가진 데리다와의 여러 대담들과, 최근의 데리다 비판 논문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5. 데리다 초혼제의 유산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해체함으로써 여러 유산들 가운데 하나를 비판적으로 선택하였듯이, 우리도 데리다의 텍스트를 마르크스 혹은 우리의 관점에서 해체(혹은 재구성)함으로써 여러 유산들 가운데서 하나를 비판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해체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1) 이론적으로는 그의 해체 정신에서 마르크스 텍스트의 개방성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사변적 독단에 대한 해체와 비판 정신은 치열하고 준엄하다. 이는 마르크스의 정신, 즉 이데올로기 비판 정신과도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그의 해체 정신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텍스트를 다시 치밀하게 해체해 보아야 한다. 그가 말한 것 가운데서 말해지지 않는 것,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 즉 그의 텍스트에 감추어져 있는 차연과 차이적 보충물을 끌어내야 한다. 물론 해체론자가 아니라 재구성론자라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재구성해야 한다.
2) 윤리적, 정치적, 실천적으로는 정의에의 절박성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단일시장에 귀속시키는 국가주의적 “세계화” 즉 “새로운 신성동맹”에 대한 이의제기의 절박성은 ‘현실에서의 출발’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도 매우 절박한 과제이다. 이에 대한 절박성이 없다면 어떠한 실천도,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세계를 해석하는 이론을 제시한 것도 아니며, 맹목적 실천만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는 줄곧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강조해 왔으며, 그 이유는 원리적인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 없이는 어떤 형태의 실천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20세기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패배의 변증법’으로 규정하는 까닭도 이론과 실천의 괴리, 이론의 중립화, 이론적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자조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절박성에 대한 강조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절박성은 필연성과 분리되는 우연성이 아니라, 필연성과 우연성의 통일로서의 절박성일 때 실천적 현실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3)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계화가 현 시대의 절박한 과제들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비판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대안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아직도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다. 세계화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는 ‘세계 시장’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의한 ‘인터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결여된 ‘다가올 미래’의 약속이란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150여 년 전에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의 역사적 도래와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4) 데리다의 해체의 정치학은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무관한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철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데리다의 정치철학은 마르크스의 텍스트 해체를 통해 물려받은 마르크스의 유산이라기보다는 데리다 자신의 해체 논리에 따라 정립된 그의 고유한 정치철학이다. 따라서 데리다에 의해 유령으로 나타난 마르크스의 정신은 마르크스의 정신의 어떤 유령이 아니라 데리다의 자신의 유령학의 산물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은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비판적 선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데리다의 해체적 윤리-정치-법-실천 철학의 풍부한 내용을 드러낼 수 있으며, 다른 형태의 사회비판이론이나 다른 학문분야와의 관련 속에서 그 의미가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 이끌림과 어긋남
어딘가에 마음이 이끌린다는 것은 자신의 빈곳을 채우고 싶은 욕구의 표지일 것이다. 한 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던 사람들이 데리다의 유령학에 이끌리는 모습을 보면서 용비어천가의 ‘뿌리깊은 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이끌림은 뿌리깊은 나무의 비상의 몸짓일까, 아니면 뿌리가 거들 난 나무의 부랑(浮浪)과 절망의 몸짓일까? 또 이런 이끌림에는, 데리다의 말대로, 어떤 현실적 절박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혼절상태에 있는 우리 시대의 마르크스 정신의 계승자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라는 질문보다는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어디로?”라는 현실적 질문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살아가는 ‘어떤 세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제도가 지배하는 현실적인 삶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이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한, 마르크스의 정신은 데리다의 비유처럼 하나의 부채 상태로 항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 마르크스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완전 승리가 선언되면 될수록, 마르크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선언의 안팎에서, 가장자리에서 항상 ‘유령’이 아니라 현실적 ‘현재’로서 존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데리다를 읽든, 마르크스를 읽든, 또 누구를 읽든 “콤바인으로 타작하는 듯한” 엉성한 책읽기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빗으로 빗듯” 꼼꼼한 책읽기의 경우도, “해체”라는 이름으로 (데리다의 마르크스 읽기의 경우처럼) 전체 맥락을 해체해 버리거나,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지적대로 “해체”를 빙자한 (로티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경우처럼)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 식의 제멋대로 읽기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맥락 읽기”와 “꼼꼼한 읽기”를 병행하지 않고는 그에 대한 적절한 글쓰기도, 가로지르기도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데리다와 마르크스의 만남과 어긋남에 대한 하나의 잠정적 시론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1) J. Derrida, Spectres de Marx, Edition, Galilée, 1993, p. 21.(다음부터는 본문 괄호 안에 쪽수만 넣는다.)
2)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상태도, 현실에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오늘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MEW 3. 35).
3) 까갈리츠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은 자본주의의 생명과 함께 할 것이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은 자본주의의 종말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생명력은 마르크스주의의 축출을 주장하는 자본주의 신성동맹에 의해 재확인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데리다의 주장과 논거는 다르지만 형태상으로는 유사하다. Boris Kagalitsky, De-Revising Marx, in Espaces Marx(http://www.internatif.org/Espmarx/) 1998 참조.
4) 최근 시애틀에서 있었던 WTO 체제에 대한 세계 NGO들의 저항운동이나, 인터넷을 통한 NGO의 국제적 연대망도 그 한 사례이다.
5) 여기서 말하려는 "현실적 미래"란 데리다가 거부하는 역사 목적론적 관점에서 도출된 현재주의적 "미래의 민주주의(démocratie futur)"(110쪽)나 외부로부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의 자궁 안에서 자라난 미래"를 의미한다.
6) Entretiens avec Jean-Louis Houebine et Guy Scarpetta, in Positions, Les Editions de Minuit, p. 84.
7) Positions, p. 86.
8) Positions, p. 88-9.
9) Positions, p. 99-100.
10) Positions, p. 100-101.
11) J. Derrida, ƒHors Livre', in La Dissemination, Edition de Seuil, 1972, p. 9- 6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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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nderson: In the Tracks of Historical Materialism, Verso, London, 1983.
R. Bernasconi: Different styles of eschatology: Derrida's take on Levinas' political messianism, in: Research in Phenomenology, v28, 1998. pp.3-19.
R. Bernstein: An Allegory of Modernity/Postmodernity: Habermas and Derrida, in: Working through Derrida, pp. 204-229.
J. Derrida: The Deconstruction of Actuality: A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in: Radical Philosophy, n68, Autumn, 1994, pp. 28-41.
-: du droit a la justice, in: Force de Loi, Galilee, 1994, pp.11-63.
-: Entretiens avec Jean-Louis Houebine et Guy Scarpetta, in: Positions, Les Editions de Minuit, Paris, 1972. pp. 5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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