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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책]David Harvey-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by 마리산인1324 2009. 5. 18.

 

http://blog.empas.com/jdyi8589/11475947 에서 퍼왔습니다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아카데미
 
정리: 김동영

1,2부
 

계몽프로젝트는 합리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합리적 사고방식의 발전 덕분에 신화와 종교, 미신의 비합리성에서 해방되었으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권력의 자의적 전횡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거쳐야만 휴머니티의 보편적이며 영원불변한 자질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었다. 계몽사상은 인류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지식과 사회조직의 탈신비화·탈신성화를 추구한 세속화운동이었다. 그들은 일시성과 찰나성, 분절성을 모던화 프로젝트를 이룩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하지만 20세기 대학살장과 암살대, 군국주의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핵파멸의 위협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은 ‘계몽프로젝트는 오늘날의 사상과 행위들을 계도하고 자극할 여력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 오늘날의 경제·정치 상황에서 그러한 프로젝트가 실현될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이 프로젝트를 꾸준히 지지하는 이도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해방을 위해 모든 계몽 프로젝트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입장을 택할 것인가는 최근 역사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는 또한 ‘어두운 면’의 발생이 계몽이성의 부적절한 적용 때문이라기보다 계몽이성 그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강도에 달려 있다.

 

핫산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식적 차이를 살펴보면【형식(폐쇄적)-반형식(개방적), 목적-유희, 의도-우연, 위계-무질서, 예술대상/완성작-과정/퍼포먼스/해프닝, 창조/총체화/종합-탈창조/해체/안티테제, 현전/부재, 집중/분산, 장르/경계-텍스트/상호텍스트성, 뿌리/깊이-표면, 해석/독서-해석 거부/오독, 시피니에-시니피앙, 편집증/정신분열증, 기원/원인-차연/흔적, 확정성/불확정성】,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 가운데 순간성, 분절성, 불연속, 혼란 따위를 전면 수용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사실에 대한 대응은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사실에 맞대응해 넘어서고자 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듯 ‘분절성과 변화의 무질서한 흐름’속에서 헤엄치며 심지어 이에 탐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던사상과 포스트모던 사상 모두에서 분절성, 순간성, 불연속, 혼란적 변화상황이 연속적으로 관찰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저자가 포스모던이라는 사상이 모던사상의 연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타자성, 타자성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정보 및 지식의 생산과 분석, 전송 따위가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에만 푹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언어와 의사소통의 관계에 있어서 모더니스트들은 언급되는 것(기의 또는 메시지)과 언급하는 방법(기표 또는 미디어)사이에 튼튼하고도 뚜렷한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것을 끊임없이 쪼개어져서 새로운 조합으로 다시 뭉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생활은 다른 텍스트들과 뒤얽힌 채 더욱 많은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텍스트들로 여겨진다. 텍스트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기호작용과 의미의 생산에 참여하는 셈이다. 이는 고정된 재현체계에 대한 모든 환상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세상에 대한 어떠한 통일적 재현이나 하나의 총체성으로 묘사될 수 없으며, 일관된 재현이나 행위가 억압적이거나 환상적일 따름이므로(그에 따라 자기 소모적, 자기배제적일 운명이므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총론적 프로젝트에도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계가 시시각각 깊이를 잃고 가식적인 껍데기나 입체적 환상, 드문드문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로 바뀌어가고 있어 사건들의 급박함과 스펙터클의 충격요법(오락용뿐만 아니라 정치적, 과학적, 문화적인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이야말로 의식을 자아내는 원재료가 되고 있다.

 

이는 생산자로서 모던 예술가들의 아우라는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던 창작은 물러가고, 기존 이미지들에 대한 노골적인 인용, 발췌, 누적, 반복이 판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가치나 믿음의 연속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신의 연속성조차도 공공연하게 유지시키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례로 건축과 도시 디자인을 들고 있다. 건축은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며 도시는 하나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모더니스트 건축 사상은 거대 도시 전반에 걸쳐 기술적 합리성을 갖춘 효율적 도시계획, 도시재개발에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건축은 분절적이며 서로 중첩된 과거 형태들의 꼴라쥬이자 도시 재활성화와 절충주의에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건물인 뉴올리언즈에 있는 무어의 <피아짜 이탈리아>는 이 지역의 이탈리아 이민을 위한 공공기관이지만, 그것은 기능적인 측면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현대적 맥락에 적용된 하나의 무대장치이자 하나의 파편이다. 이런 유형의 포스트모던 건축과 도시 디자인은 어떤 환상의 세계에 대한 추구, 즉 기존 현실을 뛰어넘어 순수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환각적 고상함을 시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기능이 아니라 허구인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추수를 비판하며 해체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한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점은 도덕적·정치적·경제적 체계들과 부딪쳐 굴절되기 쉬운 미쳐 날뛰는 세상을 그대로 반사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방향이 없는, 심지어 방향을 꼬이게 만드는, 그리하여 형태와 공간을 느끼는 우리의 습관적 방법을 파괴시켜버리는 것이다. 겉보기엔 질서가 잡힌 경우라도 그 속에 분절화, 혼란, 무질서가 중심적 주제로 남는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에 대한 허구와 분절을 드러내고자 하는 속성이다.

 

저자는 또한 모던화로 다시 돌아가 맑스로부터 자본주의의 모던화를 찾고자 한다. 저자는 맑스가 이야기한 사회변동의 위기재재적 역학뿐만 아니라, 개인주의, 소외, 분절화, 순간성, 혁신, 창조적 파괴, 투기적 발전, 생산과 소비방식의 종잡을 수 없는 변천, 시·공간 경험의 변동을 일으키는 자본주의하에서 작용하는 사회과정을 자본주의 모던화 조건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자본주의 모던화 조건으로부터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나 문화생산자들이 자신의 미학적 감각이나 원리, 실천 등을 만들어 내는 구체적 맥락이 생겨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선회는 사회적 조건의 근본적 변동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특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주관성, 성, 인종과 계급, 시간적·공간적인 지리적 입지와 탈입지의 차이로부터 출현한 다양한 형태의 타자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상이 타자의 목소리의 신빙성을 인정함으로써 진보적 전망을 열어보이면서도, 뒤이어서 곧바로 그 타인들의 입을 막아서 더욱 보편적인 권력의 원천으로 옮겨가는 것을 봉쇄한다. 타자의 목소리들을 난해한 타자성 속에, 즉 이러저러한 언어게임들의 특수성 속에 가두어버린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사상은 불균형적 권력관계의 세계에서 타자의 목소리들(여성, 소수인종 및 소수민족, 식민지 민중, 실업자, 젊은이들의 목소리)의 권한을 박탈한다.

 

저자는 이제 포스트모더즘이 만들어지게 된 구체적인 과정으로 불확실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변모를 통해 보고자 한다. 1945년에서 73년까지 노동통제 관행이나 기술상태, 소비행태, 정치·경제적 권력구도들의 특정한 조합 위에서 전후의 장기호황이 일어났으며, 이는 포디즘-케인즈주의라고 불린다. 하지만 1973년 이후 이런 체제가 붕귀되면서 급속한 변화와 변동,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기가 닥치게 되었다. 새로운 생산 및 마케팅 체제는 더욱 유연한 노동과정과 시장들을 그 특징으로 하며, 지리적 이동성이 높아지고, 소비관행이 급격하게 뒤바뀌는 양상을 보인다. 포디즘과 유연적 축적이 단절인지 연속인지를 떠나 그 이행의 과정에 나타난 일관성은 꽤 뚜렷하다. 우선 보다 유연한 자본운동은 포디즘 아래에서 길러진 한층 경직된 가치들이 아닌 것들, 즉 모던한 생활의 새로운 것, 유동적인 것, 순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 그리고 우연적인 것들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집단적 행동이 더더욱 어렵게 되며(사실상 이것이 노동통제 강화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엄청난 개인주의가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으로의 이행에 있어 필요조건으로 기능한다. 결국 새로운 기업형태 및 혁신, 기업가주의 등을 통하여 새로운 생산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는 꾸준한 비율의 성장이 필수적이다는 점, 생산 및 시장에서의 노동통제가 자본주의의 지속에 있어 필수적이다는 점, 부분적으로 강제적 경쟁법칙에 직면한 개별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서 비약적 혁신을 이루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언제나 기술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역동적이라는 특성을 들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동적 속성을 중심으로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체제로의 변화는 생산이나 노동시장, 소비의 유연성이 전혀 새로운 방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 위기 경향에 대해 여러 금융적 해결을 모색한 결과라고 본다.

Q1.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성공은 타자성에 있다고 보았다. 타자성은 그동안 소외된 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진보적 열망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그들의 권력화를 막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동안 소외된 자들을 연구의 중심으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텍스트 다시읽기를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들의 권력화를 막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Q2. 저자는 맑스의 자본론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가 모던화 될 수 있는 다양한 본질들을 읽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맑스에 대한 이해라기 보다 맑스에 대한 이차적 해석으로 보인다. 진정으로 상품의 물신성 속에 광고와 상업화의 이미지에 대한 의미와 돈이 가지는 허구적 기표에 대한 이해 등을 맑스를 통해 이해해야만 하는가? 맑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역동성 측면보다는 자본주의의 허구와 파멸을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맑스를 너무 의도적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Q3. 저자는 유연적 체제를 포디즘의 시간적·공간적 위기 속에서 경직성을 탈피하기위한 일시적 대안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시·공간적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은 없는가?

 

 

3, 4부

 

하비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기초의 변환, 즉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 속에서 찾고자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포디즘의 위기라는 경제적 측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의 위기는 시간과 공간적 형태의 위기라고 가정한다. 만약 이 가정이 맞는다면 시·공간적 위기의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포스트모던한 문화적 실천과 철학적 담론으로의 충동적인 전환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와 같은 시·공간 경험의 변화에 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비는 공간 및 시간의 경험에서 우선적으로 사회생활에서의 공간과 시간을 설명하고자 한다. 모던화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리듬을 끊임없이 파괴시키며, 모더니즘은 덧없고 분절적인 세계에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을 자신의 사명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역사가 왜, 그리고 어떻게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치닫게 되었는가? 이는 단순한 의미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하여금 지리적 불평등의 양태를 취하게 하고 과잉축적 문제에 대하여 일련의 공간적 해결책을 추구하도록 하는 정치·경제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점, 지정학적 국면을 따라다니는 정치의 심미화와 화폐자본의 힘 등과 관련되어 있다. 포디즘에서 유연적 자본축적으로의 변화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가속적으로 파괴하거나 자본의 회전시간 단축, 공간적 장벽의 축소, 공간 재구조화 속도의 가속화 등에 의한 시공간의 변화 등 시·공간의 경험을 매개로 하여 움직이며, 이는 사회적 권력과 연결되고 자본축적은 지리적 토대의 재구성으로 인해 사회적 권력을 해체하고,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투쟁은 공간적 토대를 재조직하는 성질로 인해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한편으로는 탈영토화를 또 한편으로는 재영토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격변기에 이루어지는 시공간의 불안정성에 의한 문화적·철학적 위기(재현체계, 문화형태, 철학적 정서에서의 변화)는 포스트모던으로의 충동적 전환에 기반이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패션, 생산기술, 노동과정, 이데올로기, 가치나 기존관행 등의 즉흥성과 순간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파생되는 기호와 이미지의 생산과 작용은 시공간의 압축에 의한 순간성과 분절화라는 포스트모던의 기본조건이 된다.

 

사회생활에서의 시·공간 경험은 자본순환과 자본축적의 지속적인 압박에 종속되어 왔으며, 과잉축적의 위기는 전형적으로 공간적·시간적 해결책을 찾아 헤매고 그에 따라 놀라운 시·공간 압축의 감각을 만들어내고, 이는 강렬한 심미적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 시·공간 경험들은 변화했고 과학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연계에 대한 확신이 무너졌으며 미학이 윤리를 압도하고 이미지가 서사를 지배하며 일시성과 분열이 영원한 진리와 통일도니 정치에 우선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비에 의하면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가장 최근에 일어나는 그러한 현상도 분명히 역사 유물론의 틀 안에서 있으며, 심지어 맑스가 제안했던 자본주의 발달에 대한 메타서사로도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비는 또한 포스트모던의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을 이미지와 기호로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함으로서 아무런 비평의 기능을 하지 못함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다수의 유권자가 반대했음에도 재선에 성공한 레이건은 윤리에 대한 미학의 승리에 표상이며, 포스트모더니티는 아무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역사적·지리적 조건으로 논의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의 특성인 타자성, 소외, 우연성을 그저 인간적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윤리는 미학에 완전히 침식당함을 이야기한다.

 

하비는 포디스트 모더니티와 유연적 포스트모더니티의 구분을 통해 각각의 특성을 이항적대립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통해 유연적 포스트모더니티가 포디스트 모더니티의 지배질서를 단순히 유보하는 선에서 새로운 이미지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이 둘의 관계는 집중화와 분산화, 권위와 해체, 위계와 무질서, 영원성과 유연성, 미세한 분업과 사회적 분업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이 존재하는데 이로 인해 둘간의 엄격한 범주보다는 자본주의 일반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 관계들의 변동이 중요함을 고찰하면서, 이러한 대립적 관계들은 자본축적과 투기적 변화의 끊임없는 변형적 활동에 언제나 종속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시공간압축에 대한 굴복, 단순화, 중간영역의 모색, 정면 대응 이라는 네 가지의 반응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역사유물론의 위기와 새로운 융합의 가능성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가 가지는 한계와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치적·경제적 차원의 물질적 기반에서 출발하여, 이 위기가 과잉축적을 시·공간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속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정치적·경제적 전환기에서 만들어지는 위기의식에 의해 형성된 분절화, 불확정성 등은 모던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포스트모더니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관되게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자본주의가 가지는 자본축적과 투기적 성향이 끊임없이 변형적으로 활동함으로서 나타나는 위기의 상황을 이미지와 기호로 소비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실천적으로 나서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비의 가정인 이 시대의 위기가 물질적 측면으로부터 출발한 시·공간적 위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물질적 토대를 벗어나서 이미지나 기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물질적 증대만을 위해 자본의 축적과 투기적 속성을 가진다는 하비의 주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물질적 토대가 중요하지만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회에서 상부구조의 독립적 변화가능성은 충분하며,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모순의 증대론이 깨진 상황에서 지속적인 물질적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측면에 대한 또 다른 불신이라고 여겨진다.

 

본인은 자본주의적 속성이 가지는 역동성들이 끊임없이 인간의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이는 현재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넘어선 세계 공동체의 출현에 맞는 새로운 가치의 형성은 일정한 물질적 토대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 토대는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이며, 의식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계몽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주장하고 싶다. 이 시대의 위기는 물질적 토대의 변화에 의한 시·공간의 위기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확장에서 오는 전환기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이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당연히 거쳐야할 홍역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