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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책]David Harvey-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by 마리산인1324 2009. 5. 18.

 

http://allestelle.net/manuscript/gaudium-book-review/2008/11/11/1004 에서 퍼왔습니다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강유원 / 2008-11-17 / 강유원 서평 ]

 

데이비드 하비(지음), 최병두(옮김),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한울, 2007

 

 

2008년 하반기에 미합중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전세계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결말이 다가왔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섣부른지 타당한지 알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몇십년 동안 자본주의 체제의 특정 국면을 규정했던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그 '간략한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시장, 자유무역의 특징을 갖는 제도적 틀 내에서 개인의 열정적 자유 및 기능을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복지가 가장 잘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제안하는 정치적.경제적 실행에 관한 이론"이다. 사실 이러한 규정은 고전적 자유주의에도 해당하는 것이고, 문자 그대로는 모두 옳아 보이는 말이므로 신자유주의의 함축을 충분히 전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원, 전개과정을 간략하게라도 검토해야 하며, 그에 이어서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요인들을 가리켜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이것에 적대적인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어떤 지점에 반대의 쐐기를 어느 정도 깊이로 박아야 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노고를 감내해야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자본주의 체제는 1960년대 말경부터 심각한 자본축적 위기국면에 들어섰다. 1945년 이후 최소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높은 성장율을 가져다주었던 착근된 자유주의1)는 작동을 멈추었다.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대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 닥쳤다.

 

이 위기에서 좌파가 내놓은 대안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해법을 크게 능가하지 못했고" 이에 대립해서 "기업 및 경영권력을 자유화하고 시장 자유를 재설정하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전면으로 나섰다. 이들, 정확하게 말하면 "상위 계급들은 정치적 경제적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뒤메닐과 레비의 규정에 따라 "신자유주의화는 애초부터 [이들 상위] 계급 권력의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 또는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재건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로 해석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지만 그것이 갑자기 솟아난 것은 아니다. 그것의 기원은 적어도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소수의 배타적이고 열정적인 주창자 집단 — 주로 학계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들 — 은 … (그들이 처음 모였던 스위스 온천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몽페를랭회를 창립하기 위해 저명한 오스트리아 정치철학자 하이에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주요 학자들로는 미제스, 경제학자 프리드먼, 심지어 포퍼까지 포함되었다."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사유재산 및 경쟁적 시장에 대한 믿음"이었으며, 이것을 '자유'라는 가치와 연결시켰다. 자유와 평등은 근대 이후 영원한 가치로 승인되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맥락은 항상 다르다. 그러므로 그것이 특정 집단 구성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으려면 다양한 차원을 매개로 삼아야 한다. "어떠한 사고방식이 지배적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세계에 내재된 가능성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관과 본능, 그리고 우리의 가치와 욕망에 대해 호소하는 개념적 장치를 개발해야 한다. 성공적이라면, 이 장치는 상식에 뿌리를 내리게 되어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시된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창시적 인물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이상을 근본적인 것, 즉 '문명의 핵심가치들'로 설정했다. 이 가치들은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이상이기에 그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영리한 이들의 노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중의 동의를 구축하는데 많은 부분 집중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정치경제적 계급 권력의 문제이나 그것은 체제의 문화적 특질을 바꾸는 것과 병행되어야만 하는 시도이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우회하지 않고 정상적 경로를 따라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하려면 "선거에서 이길 정도로 충분히 큰 범위에 걸친 정치적 동의가 사전에 구축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동의의 구축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동의의 구축'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상식'2)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우선 문화적이고 유화적인 수단이 동원된다. "기업, 대중매체, 그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들 — 대학, 학교, 교회3), 그리고 전문가 협회 등 — 을 통해", 그리고 "싱크탱크의 조직, 대중매체의 일정 부분 장악"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유포된다. 그러나 "폭력의 사용"도 결코 배제되지 않는데, 이것은 아주 직접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켜서 대중들에게 "'대안이 없다'라는 생각을 숙명적으로 또는 절망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모든 국가 개입을 자유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국가가 가치중립적일 것을 요구한다. 더나아가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치인 민주주의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며,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적이고 의회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도 행정적 지시체계나 사법적 결정에 의한 정부를 강력히 선호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체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역설적인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국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집단적 개입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에 봉착할 경우, 신자유주의 국가는 때때로 억압적으로 개입하게끔 강제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고양하고자 하는 바로 그 자유를 부정하게 된다… 즉 자유주의적(확장하면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권위주의에 의존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대중의 자유는 소수의 자유를 위해 제한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국가도 개입할수 없는 개인의 자유'는 환상에 불과하다. 현대의 국가들이 근대적 국가의 지평 위에서 존립하는 한, 즉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공동체"4)로서의 국가인 한, 모든 개인은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이론처럼 국가의 개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베버가 규정한 의미에서의 근대국가를 넘어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일 것이나, 우리의 현실은 국가의 위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바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가를 거부하라'는 신자유주의의 환상에 휩싸여 각자의 생활을 각자가 챙기는 원자적 개인주의 전략에 따라 정치적 사유와 참여를 배제한 재테크 중심주의에 심신을 내맡긴 결과, 우리는 우선 자본주의 사회의 복잡함 속에서 개인의 영악함은 얼마든지 처참하게 깨질 수 있다는 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방심하던 와중에 국가가 상층 지배계급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려 민주적 통제를 넘어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라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국가를 파악하고자 할 때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들의 복합적인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 국가는 1990년대 후반이후 아주 일방적으로 위원회로 형성되었으며, 사회의 모든 세력들은 돈을 매개로 하여 아주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종속변수로 전락해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민주적 거버넌스를 위한 요구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평등과 정의를 위한 요구로 되돌아가는 것"은 굉장히 머나먼 길을 가야하는 지침으로서는 막연한 것으로 들린다. 아직은 뚜렷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좌파라 자부하는 이들도 '착근된 자유주의' 시대의 정책들을 읊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