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헌교수님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http://web.chungbuk.ac.kr/~ahnsah/tnboard/main.cgi?board=open_board
이 글은 '파레콘(참여경제)'주의자인 마이클 앨버트와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에 관한 논쟁을 다룬 논문입니다. 원고 분량의 엄격한 제한으로 말미암아 자세히 다루지는 못했습니다만, 논쟁의 기본 논지를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올려둡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안상헌 -
人文學志 第33輯 (2006)
忠北大學校 人文學硏究所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관한 논쟁 연구
―앨버트와 캘리니코스의 논쟁을 중심으로―
- 안 상 헌 / 충북대, 철학 -
1. 논쟁의 배경과 맥락
‘현존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완전 승리’가 선언된 지도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오히려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삶’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인류의 삶에 희망적 전망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필연적 산물인 낭비경제는 생태계 파괴와 자원 고갈과 같은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를 낳았으며, 자본의 과잉축적의 돌파구인 ‘세계화 자본주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과 중산층 몰락은 반세계화운동의 ‘세계화’를 촉진했으며, 반세계화운동은 세계화 자본주의에 대한 단순한 저항운동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화’를 모색하는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와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앨버트와 캘리니코스의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한 논쟁은 이렇듯 다양한 대안사회 논쟁 가운데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논쟁은 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운동의 세계적 연대를 위해 모인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의 전망과 관련하여 진행된 논쟁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01년 브라질의 포르뚜 알레그레에서 처음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은 특정 이념을 중심으로 모인 조직적 결사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본주의에 반대투쟁을 벌여온 전 세계의 다양한 비정부기구(NGO)들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라는 기치 아래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상호 토론을 통해 각자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모인 일종의 ‘반세계화운동 네트워크 포럼’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사회포럼’에는 사회주의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인종차별종식운동, 평화운동, 반핵운동, 경제정의운동, 소수자운동, 자율사회운동을 비롯한 세계의 반세계화 운동단체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념적으로는 매우 이질적인 운동들이 ‘차이와 연대’라는 느슨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앨버트와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 논쟁은 이러한 반세계화운동을 염두에 두고 각자의 주장을 담은 발제문을 주고받은 후 문제를 제기하고 반론, 재 반론하는 다소 특이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2. 앨버트와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
‘참여경제Participatory Economy’로 알려져 있는 앨버트의 대안사회이론과 ‘민주적 사회주의’로 지칭될 수 있는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이론은 ‘현존 사회주의’가 실패로 끝난 후 각자가 모색해 오던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 반세계화운동의 본격적인 전개와 더불어 수정되고 발전된 것이다. 앨버트의 대안사회에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한 성찰이 짙게 반영되어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로서 국제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에도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1) 앨버트의 ‘파레콘’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은 지금까지 제시된 대안사회론 중에서 비교적 가장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그의 저술 『파레콘』에 자세하게 개진되어 있으나, 이 논쟁의 발제문(a1)은 이 저술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형태로 제시된다.
그의 ‘파레콘’ 모델은 ‘참여경제’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로 경제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참여경제가 지향하는 네 가지의 기본 가치―연대성, 다양성, 평등성, 자율경영―에서 출발한다. 1) ‘연대성’ 가치는 모든 좌파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로서,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경쟁보다는 상호 이익을 존중하도록 하는 기본 가치이다. 2) ‘다양성’ 가치는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지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가치이다. 이 두 기본 가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이 가치 대신에 반사회성이나 단일성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치라고 본다. 3) ‘평등성’ 가치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는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로서, 이 가치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모든 좌파들이 동의하는 가치는 아니다. 왜냐 하면 소득의 분배에 있어 ‘산출량이나 능력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는 좌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앨버트는 이러한 분배방식보다는 ‘노력과 희생에 다른 보상’을 선호한다. 4) ‘자율경영’ 가치는 ‘의사결정에 있어 결정사항에 영향을 많이 받는 순서대로 발언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비롯된다. 상황에 따라 다수결원리나 합의제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이 가치가 우선한다. 이 네 가지 기본 가치는 자본주의적 소유나 기업적 노동 분업, 이윤 중심의 분배, 시장적 분배를 통해서는 무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의 기본 입장이다.
‘파레콘’ 모델의 핵심 제도는 1) 생산자평의회, 소비자평의회를 통한 의사결정, 2) 균형적 복합 직업balanced job complexes, 3) 노력과 희생에 따른 분배, 4) 참여적 계획에 의한 생산과 소비의 조정으로 요약된다(a1).
1) 생산자평의회와 소비자평의회는 ‘파레콘’의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 ‘자율경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참여공간이다. 평의회는 규모에 따라 개인에서부터 생활단위, 이웃, 지역, 국가 평의회가 있을 수 있으며, 작업팀, 작업부문, 작업장, 기업, 경제단위 전체의 평의회가 있을 수 있다. 평의회 안에서의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기본 원칙은 ‘결정사항이 행위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순서대로 발언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2) ‘균형적 복합 직업’은 ‘파레콘’ 모델에서 가장 독특한 제도로서 일의 과정에 있어서의 ‘평등성’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제도는 기업적 노동 분업과는 달리, 한 사람이 두 가지 직업 즉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일과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가 ‘균형적 복합 직업’을 중시하는 이유는 ‘기업적 분업에 따른 삶의 질의 불균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권력을 상대적으로 독점하는 특권계급인 ‘조정자계급coordinator class’의 형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3) ‘노력과 희생에 다른 분배’는 일의 결과에서의 ‘평등성’ 가치의 실현을 위한 ‘파레콘’의 필수적인 제도이다. 이 분배방식에서 결과할 수 있는 분배의 차등은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에 따른 것이며, 더 구체적인 분배방식은 평의회에서 결정된다.
4) ‘참여계획’은 평의회 제도를 통해 ‘자율경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지만 ‘파레콘’ 모델에서 가장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제도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생산과 소비의 조절이 ‘시장경제’에 내맡겨졌을 때 생기는 과잉생산과 낭비경제의 문제점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내맡겨졌을 때 생기는 권위주의적 의사결정과 조정자계급의 형성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무계급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자율경영’ 가치는 개인과 평의회를 통해 제출된 생산량과 소비량에 대한 제안서를 바탕으로 ‘균형적 복합 직업’의 하나인 ‘실무보조국facilitation board’에서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앨버트는 자신이 제시하는 ‘파레콘’ 모델은 미래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 하면 미래사회는 그 사회에 참여하는 미래 세대의 ‘자율경영’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의 ‘파레콘’ 모델은 다른 대안사회 모델로 제시되는 ‘시장사회주의’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대한 비판적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앨버트의 이러한 비전의 제시는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운동들의 연대를 위한 실천적 전략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전략은 현재 반세계화운동의 참여하고 있는 부문운동들―환경, 인종, 여성, 반핵, 평화, 정의, 민주화, 계급, 소수자 등―의 투쟁을 하나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통일하기보다는 부문운동의 ‘자율경영’에 맡겨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경제를 지배적 개념으로 고양시키는 것을 거부하며, 시장사회주의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민주 집중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주의’를 거부하며, 조정자계급을 배제한 두 계급주의를 거부한다.
2) 캘리니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 모델은 그의 『반자본주의 선언』에 개진되어 있지만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에 비하면 덜 구체적이다. 그의 발제문에 제시된 명제를 중심으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출발점 또한 앨버트와 마찬가지로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운동이 모두 수용할 수 있을만한 기본 가치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상이한 관심을 가진 다양한 운동에 있어 ‘관점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은 운동과 직접 관계도 없는 문제에 역량을 소진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분열을 초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가치는 네 가지―정의, 효율성, 민주주의, 지속가능성―이다. (1) ‘정의’ 가치는 “사회구성원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 가치는 마르크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언급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명제를 원용한 것이다. (2) ‘효율성’ 가치는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최대의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효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의미한다. (3) ‘민주주의’ 가치는 ‘금융시장과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현존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정치적 대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민주화’와 ‘권력의 탈집중화’를 의미한다. (4) ‘지속가능성’ 가치는 “재생 가능한 자원의 이용률은 재생률 이하로 줄이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대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지 않으며, 오염과 서식지 파괴는 환경의 복원능력을 넘어서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러한 가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하기에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면 개별적 관심사와는 관계없이 모두 수긍할 수 있을 가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이 필연적이다. 왜냐 하면 신자유주의란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와 ‘맹목적인 경쟁적 자본축적’으로 요약되는 자본주의가 20세기 중반의 케인즈주의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순수화’된 자본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c1). 따라서 국민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케인즈주의로의 복귀’나 ‘자본주의의 인간화’를 주장하는 운동은 반세계화운동의 초기 국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위에서 제시한 기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대안적 사회논리’와 ‘비시장적 대안’으로 ‘민주적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를 대안사회로 제시한다. 앨버트와 마찬가지로 그도 ‘시장경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시장경제는 자본의 경쟁을 통해 자원 배분이 결정되기 때문에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 자원의 효율성, 경제의 민주화, 지속가능성 가치 중 어느 것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를 대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계획경제’를 주장하지만, 그가 말하는 계획경제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관료주의적으로 집중화된 통제경제’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계획된 사회주의 경제’이며, 이는 드레이퍼가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모델과 유사한 것이다. 그는 ‘파레콘’ 모델과 디바인의 ‘협상적 조정을 통한 계획경제’도 ‘민주적 계획경제’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파레콘’과는 달리 ‘사회주의 경제’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이 된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대안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부분적으로 개혁하는 ‘참여예산제도’를 거부하며,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시장사회주의’ 모델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부분적 개혁 모델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일시적으로 허용되지만 ‘경쟁과 이윤추구’에 치명적인 부담을 주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며, 시장사회주의 모델은 개인의 삶이 시장의 동요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경쟁적 이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연대가 파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국제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은 국가 사회주의 모델과는 구별되며, 경제적 정치적 권력은 생산자, 소비자, 지역주민 평의회의 자기경영적 네트워크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회주의 모델과는 달리 오히려 무정부주의적 모델인 ‘파레콘’ 모델과 유사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략적 문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은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다수에 의한 자기해방’ 즉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만 가능하며 ‘위로부터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적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대안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경제, 정치, 군사, 정치적 거대 권력과 맞서야 하며 때로는 체제 방어를 위한 폭력적 저항에 맞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율적 조직의 분산된 민주주의적 에너지’와 ‘변혁을 위한 힘의 결집에 필수적인 집중과 협동’을 결합해야 하는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탈 집중화된 자유주의적 조직형태인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반세계화운동에 있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집중화와 탈집중화의 필연적 대립과 긴장을 해결하려면 (‘정당’이라 부르든 않든 간에) 전략과 강령을 다룰 ‘정당’과 유사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딜레마는 아직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반세계화운동은 대안사회에 대한 최대한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탐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3. 논쟁의 주요 쟁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앨버트와 캘리니코스는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서 세계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거부하고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대안사회를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세부적인 쟁점으로 들어가면 양자의 차이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 결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며, 이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 차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1) ‘가치’ 문제
캘리니코스도 인정하고 있듯이, 대안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용어는 서로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즉 앨버트의 ‘연대성’, ‘다양성’, ‘평등성’, ‘자율경영’ 가치와 캘리니코스의 ‘정의’, ‘효율성’, ‘민주주의’, ‘지속가능성’ 가치는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치고 있다: 앨버트의 ‘연대성’과 ‘다양성’ 가치는 ‘정의’ 가치에 포함될 수 있으며(a2), ‘효율성’과 ‘지속가능성’ 가치는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a2). 그리고 앨버트의 ‘자율경영’ 가치는 ‘민주주의’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a2). 다만 큰 차이를 드러내는 가치는 ‘평등성’ 가치, 즉 앨버트의 ‘노력과 희생에 따른 분배’ 원칙과 캘리니코스의 ‘삶에 필요한 자원에의 동등한 접근’ 원칙이다. 캘리니코스는 ‘삶에 필요한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이 기본 원칙이며 ‘노력과 희생에 따른 분배’는 부차적 원칙이라고 주장한다(a2). 왜냐 하면 ‘노력에 따른 분배’가 ‘성과에 따른 분배’보다는 낫지만, 이러한 원칙만으로는 노약자에 대한 분배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앨버트는 ‘평균 이하로 일하고 평균 이상의 소비를 원하는’ 경우에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이라는 원칙으로서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고 반박하면서(a3), 노약자에 대한 분배 문제는 평의회에서 ‘의사결정에 의해 많이 영향을 받는 사람의 우선 발언권’ 원칙에 따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차이는 개인의 선택권을 강조하는 앨버트의 입장과 개인의 물질적 욕구의 기본적 충족을 강조하는 캘리니코스의 입장이 대립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는 쉽게 조정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2) ‘파레콘’ 문제
캘리니코스는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의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그는 ‘파레콘’의 생산자위원회와 소비자위원회의 ‘자율경영’에 동의하면서, 이는 자신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모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a2). 그리고 ‘균형적 복합 직업’에 대해서도 ‘균등한 보상과 일상적 작업의 균배’라는 측면에서 매력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인다(a2). 그러나 ‘참여계획’에 대해서는 ‘개인과 평의회가 제안하고 실무보조국의 도움을 받아 조정하는 것’은 원자론적atomistic 접근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특히 개인적 제안의 허용은 ‘경제 전체의 변수를 규정하기 위한 기제(소비와 투자를 위한 자원의 몫을 배분하는 기제)가 결여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a2) 이에 대해 앨버트는 ‘파레콘’에서 전체적 계획은 하나의 포괄적 과정, 즉 ‘경제 전반에 걸친 선택적 조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단기적 선택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적 선택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a3).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자율경영’ 방식의 토론을 통해 전 지구적 자원할당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체적인 자원할당 기준’도 없이 실현가능성도 없는 ‘지구촌 차원의 평의회’를 통해 전 지구적 자원을 할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한다(a4). 여기에서도 개인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앨버트의 무정부주의적 입장과 사회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캘리니코스의 사회주의적 입장이 대립하기 때문에 이론적 화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른 논쟁점과 맞물리면서 양자의 입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3) ‘사회주의’ 문제
캘리니코스는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의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는데 반해, 앨버트는 캘리니코스의 ‘사회주의’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나는 사회주의를 ‘파레콘’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파레콘 사회주의’란 존재하지도 않는다”(c4)고 주장하면서 캘리니코스가 ‘파레콘’을 ‘민주적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데 단호하게 반대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민주적 절차’가 강조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념의 근거하는 한 ‘중앙 집중적 계획경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c2). 즉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주의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c2) “노동자계급을 위한 계급차별을 지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 공허하게 들린다”(c2)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사회주의’ 사회의 ‘조정자계급’에 대한 비판과 직결된다.
또한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적 환원론’라고 비판하는데 반해,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a2)으로 '탁월한 설명적 이론'(a6)으로 여전히 타당하며,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환원론’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목적으로 한다(a4)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사회의 모든 부분에 주목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라는 것도 경제적 계급 개념에 입각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를 넘어선 영역에 대한 도구의 조잡성이 문제’(a4)라고 비판한다. 즉 마르크스는 여성의 이익, 문화적 학대, 정치적 억압을 우선시하는 사회와 역사를 개념화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무정부주의를 결코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a3)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캘리니코스는 “가부장제, 인종차별, 권위주의 문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결정적으로 만들어진 사회, 정치, 문화 환경적 안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이나 전략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앨버트는 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a2)고 반박한다. 이 논쟁은 결국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운동의 관계를 ‘다원적 목적을 가진 운동의 네트워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사회주의와 관련된 또 하나의 쟁점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캘리니코스는 토니 클리프의 주장에 따라 ‘1920년대 이후의 소련은 국가사회주의 사회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변종에 불과하다’(a2)고 보는데 반해, 앨버트는 ‘소비에트 경제는 사적 소유와 시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c4), ‘조정자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경제’라고 주장한다(a3). 이 논쟁의 핵심은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의 관료주의적 지배를 사회주의 사회의 특권계급인 조정자계급의 문제라고 보는데 반해, 캘리니코스는 스탈린주의의 관료주의적 지배를 사회주의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변형된 국가자본주의의 문제라고 간주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가치를 옹호한다는 점이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캘리니코스는 1970년대 미국 좌파의 논쟁에서 거론된 경영자 계층의 계급구조를 예로 들면서 전문직 피고용인은 동질적 사회집단이 아니라 그들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자본 혹은 노동에 귀속되기 때문에 조정자집단이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a2). 이러한 논쟁은 결국 이 논쟁의 핵심 쟁점인 ‘조정자계급’의 존재 문제로 옮아간다.
4) ‘조정자계급’ 문제
앨버트에 있어 ‘조정자계급’ 개념은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개념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전문경영인의 관료주의적 지배를 비판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다. 앨버트에 있어 ‘조정자계급’은 ‘경영자뿐만 아니라 변호사, 의사, 엔지니어 등 직무에 권한을 부여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며(c4), ‘일과 정보를 독점하고, 상대적으로 고소득과 지위를 누리며, 하층계급의 삶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으로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독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적 이익과 목적을 추구하는 반노동자계급’(a3)으로 규정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계급주의에 매몰되어 조정자계급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보면 “조정자집단을 양성하고 있으면서도 조정자계급의 존재를 거부하는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하지만”(c4) 이는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앨버트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캘리니코스는 조정자계급 즉 제3계급의 존재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사유재산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 중간계급 대리인이 과연 지배계급일 수 있는가 반문하면서 소련에서도 모든 관료가 지배계급은 아니었다(a4)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앨버트는 ‘두 계급만을 강조하며 조정자집단에는 비중을 두지 않는 현대경제의 이해’를 모두 거부하며, ‘실재하는 사회주의는 물론 상상되는 사회주의는 모두 조정자집단이 경제를 지배하는 제도’(a2)라고 반박한다. 이에 캘리니코스는 조정자계급이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역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이후 사적 부르주아지와 소유계급의 붕괴와 함께 임금노동을 하는 중산층의 일부가 지배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는 스탈린체제 뿐만 아니라 탈식민지국가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a2)고 주장하면서 독자적 계급으로서의 조정자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정자계급의 존재 문제가 이 논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로 등장하는 까닭은 ‘조정자계급’의 문제는 ‘사회 조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운동 조직의 문제’로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5) 운동 조직 문제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앨버트는 반세계화 운동과 관련하여 ‘풀뿌리 민주주의와 직접 자치’를 선호하며 ‘조정자집단’의 선도적 역할이나 중추적 기능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c2) 왜냐 하면 다양한 이념적 편차와 상이한 목표를 가진 ‘운동들의 운동’에 있어 지도적 중심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캘리니코스는 반세계화운동이 단순한 반대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승리를 목표로 하는 조직’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앨버트는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들을 레닌주의자로 만들고, 나조차도 레닌주의자로 만든다’(c4)고 일축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캘리니코스는 근본주의적 해방투쟁에 가능한 한 많은 반세계화운동들이 동참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목적이 모든 무정부주의적 운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태리 자율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율주의자들은 다수의 동참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노동조합에 대해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드러냄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것이다.(c5) 자율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반-권력counter-power’이라는 용어는 유럽 우파들로 하여금 반세계화운동을 사회민주주의 정부로부터 ‘토빈세’ 따위나 얻어내려는 압력단체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율주의자들은 ‘세계사회포럼’을 순수한 ‘토론의 광장’으로만 유지되기를 원하며 이라크전쟁 반대시위를 위한 동원수단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한 동원수단과 상대적 집중과 전략적 지향이 필요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과 민주적인 중앙 집중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입장이다. 그러나 앨버트는 무정부주의자나 ‘파에콘’주의자들도 그러한 목적을 가진 조직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가부장제, 권위주의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조직’(c4)이기 때문에 통일된 단일 조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형태로 연대하면서 각자의 운동 목표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혁명적 조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캘리니코스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유된 관점과 전략을 갖춘 운동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건강한 내부 토론을 필요로 한다’(c4)면서 민주적인 중앙 집중적 기구의 필요성에 반대한다.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레닌주의가 비록 대중의 자발적 조직의 민주주의적 형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자기해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필연적이었다는 점에서 레닌의 민주 집중제를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올바르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해 줄 것’(c5)이라고 주장한다.
6) 민주집중제 문제
캘리니코스는 스탈린식의 관료주의적 중앙 집중제와는 달리 민주집중제가 제대로 실천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수결원칙의 올바른 적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일의 진행상황을 평가하고 미래의 전략을 짜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토론을 토론으로서만 끝내서는 안 되며 다수결 투표를 통해 의사결정을 이끌어 냄으로써 토론과정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던 간에 참석한 모든 구성원들을 결속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는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며, 조직의 이념적 결속을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어떤 정치적 원칙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면 구성원들이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에 동의하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이러한 조직 원리는 민주주의적 토대 위에서 얼마든지 완벽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c3) 그러나 앨버트는 ‘민주적 중앙 집중제가 다수결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는 캘리니코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레닌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트로츠키도 그렇게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공산주의 정당도 그렇게 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즉 트로츠키는 ’일인 경영”의 주창자였으며. 레닌은 “공장 내의 모든 권력은 관리자의 손에 집중되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창하고 “기업경영에 있어 노동조합의 직접 개입은 해로울 뿐만 아니라 용납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트로츠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 견해’에 호소한데 반해 레닌은 ‘기술적 필요성“에 호소하고 있다는 정도라는 것이다.(c4) 논쟁이 진행되면서 논점이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지면서 양자의 견해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고 각자의 이념적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7) ‘함께 행진하면서 대화하기’
반세계화운동과 관련하여 앨버트는 ‘현재의 역사적 정황이 과연 캘리니코스가 옹호하는 경제적 조정자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를 용납하는 쪽으로 나아갈지는 의심스럽다’(c6)면서도, 승리를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인종, 성차별, 계급, 정치권력 운동에 우선권을 주는 다양한 운동이 요구되며, 대규모의 변혁 때까지 만이라도 개별적 운동의 ‘자율경영’의 토대를 구축하는 고도로 반권위주의적인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어쩌면 일부 좌파들의 예상처럼 ‘대규모 군중을 모으는 일’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나 ‘만약 더 큰 운동을 건설하려는 욕망을 진실로 레닌주의라 정의할 수 있다면 모든 무정부주의자들도 기꺼이 레닌주의의 우산 속으로 들어갈 것’(c6)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만큼, ‘부문운동들이 서로 예속됨이 없이 함께 결속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광범위하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며, 사람들이 모였다가는 금방 떠나버리지 않고 회원 자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하부구조를 튼튼하게 구축하여 미래의 대안사회를 구상하고 예비할 수 있도록 하며, 단일 이슈에 구애됨이 없이도 단일 이슈에 주목하고, 개량주의로 변질됨이 없이도 개혁을 성취하며, 분파주의로 변질됨이 없이도 전략적이며, 조정자주의로 변질됨이 없이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c6) 운동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하자면 과연 어떤 주장이 이러한 과제에 도움을 줄지 아니면 방해가 될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권위주의운동을 하는 ‘글로벌 정의Global Justice’와 같은 다른 운동집단은 모두 떠나버릴 것이라는 것이다.(c6)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세계사회포럼’은 캘리니코스가 말하는 방식의 행동강령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세계사회포럼’은 “서로 배우는 장소, 작은 운동들에 의해 추구되는 공동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장소”(c6)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캘리니코스도 자신과 앨버트의 입장 차이를 명백히 밝히면서도, 이 논쟁은 과거에 범했던 역사적 오류와 재앙을 반복하지 않는 이론과 전략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함께 행진하면서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동일한 적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역사, 이론, 전략 문제에 있어 불일치가 존재하더라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화는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비전과 전략의 차원에서 함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는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협동해 나가면서 우리의 불일치가 협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c6)라는 말로 앨버트의 제안에 화답한다.
4. 비판과 전망
이 논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마이클 앨버트이다. 이 논쟁을 처음 제기한 사람도 앨버트였고, 논쟁 방식을 결정한 사람도 앨버트였으며, 논쟁 공간도 앨버트가 주관하는 Zmag이었다. 앨버트는 이 논쟁 외에도 다른 좌파 지식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으며, 그 때마다 논쟁 주제는 ‘파레콘’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밑그림을 그리고 구축한 ‘파레콘’ 모델은 갈수록 구체성을 더해가고 있으며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여러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제시한 ‘파레콘’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제시한 기본 가치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긍하지만, 이 기본 가치 위에 구축한 ‘파레콘’ 모델에 대해서는 대부분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앨버트 비판
‘파레콘’ 모델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의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어떻게 ‘파레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관한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실현가능성에 대한 언급 없이 대안사회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본주의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언급 없이 자본주의를 넘어선 제도적 비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앨버트에게 비전의 실현을 위한 실천적 전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전략은 ‘비개량적 개량 투쟁non-reformist reform struggles’이다. 이 전략은 현존 자본주의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파레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 과정에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들의 요구와 투쟁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족, 문화, 정치, 국제, 생태운동과 같은 모든 운동과 연대하여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작업장의 환경 개선 요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균형적 복합 직업’의 가치와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울 수 있고, 공해방지 투쟁은 소비자와 생산자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경제적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자율경영’의 가치를 깨우칠 수 있으며, 군비축소나 사회복지 투쟁은 ‘생산자 및 소비자 평의회를 통한 협상적 할당’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가치를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개량적 개량 투쟁”은 ‘반자본주의운동’ 혹은 ‘자본주의 극복 운동’일 수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평등성, 연대성, 다양성, 자율경영, 무계급성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개량적 개량 투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 가지 선택지―자본주의, 조정자주의, 무계급주의―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앨버트가 사회운동 노선을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로 정립하는 이유는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운동들에는 1) 자본주의 틀 안에서 자본주의를 민주화하려는 노선, 2)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선, 3) 계급적 지배를 완전히 벗어난 대안사회를 건설하려는 노선이 혼합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조정자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도 아니면서 노동계급 위에 군림하면서 의사결정권의 상대적 독점을 누리고 있는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조정자주의’에 대한 비판의 실질적 과녁은 개인의 우월한 자질과 능력이나 특별한 훈련이나 교육을 받은 소수의 조정자계급의 특권적 지위를 용인하는 ‘사회주의’ 노선이다.
앨버트가 ‘사회주의’에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권력지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실패로 끝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만약 중앙 집중적 계획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엘리트계급의 지배를 낳는다면 그리하여 노동자를 억압하고 불평등과 비효율성과 경제침체를 낳는다면 대처의 말대로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TINA)’”. ‘파레콘’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은 대자본의 집중화된 국가기구에 대한 두려움과 집중화된 노동자국가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찬 소부르주아 중간계급이며, 이들은 ‘대기업에 의한 탈 소유’와 ‘노동자계급에 의한 탈 소유’ 모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유토피아적 모델은 앨버트의 객관적 계급적 토대를 반영하고 있다. 앨버트의 ‘파레콘’ 모델은 현실에 근거를 둔 미래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20세기의 실패로부터 정신적 외상을 받은 21세기 초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 캘리니코스 비판
캘리니코스의 대안사회는 민주적 집중계획을 지지하면서도 제도적 기능은 없는 대안사회 모델로서 ‘사회주의’ 모델이라기보다는 ‘파레콘’에 훨씬 가까운 모델이다. 캘리니코스의 ‘이행기 강령’ 또한 그가 계승하는 트로츠키주의와는 다른 방법을 채택한다. 즉 트로츠키는 노동계급투쟁을 혁명, 노동자계급국가, 계획경제와 관련지어 요구를 발전시키는데 반해, 캘리니코스는 혁명의 필요성은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행기 강령’에서는 혁명과는 무관한 개량주의적 개혁노선을 나열하고 있다. 토빈세의 도입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이행기 강령은 본래 수백만의 민중투쟁과 혁명의 필요성 사이를 매개하는 ‘가교’여야 하는데,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민중투쟁을 자유주의 경제와 매개하는 ‘가교’이자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운동과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가교’일 뿐”이며 따라서 개량주의적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들, 계급투쟁을 완화하려는 사람들, 사회세력의 조정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부르주아들”이며, 이 부류에 속하는 캘리니코스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혁명적 프로그램과 개량주의 프로그램을 화해시키는데 주력하는 정치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3) 전망
이 논쟁의 출발점은 ‘대안사회’이지만 실천적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왜냐 하면 이 논쟁은 이론적 가상공간에서 일어난 철학담론이 아니라 반세계화 투쟁이 고조되는 시기의 구체적 현실공간에서 일어난 실천적 논쟁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는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세계화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핵심적인 실천적 과제들이 노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을 통해 합의되거나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 ‘개량주의적 자본주의’ 노선에서 ‘무계급사회의 건설’ 노선에 이르는 온갖 다양한 스펙트럼의 부문운동들이 총망라되어있는 ‘운동들의 운동’인 반세계화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 연대하여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단하기 어렵다. 왜냐 하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운동은 언제나 급변하는 객관적 조건과 정세 속에서 우발적인 사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반세계화 투쟁의 구체적 실천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토론될 것이며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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