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헌교수님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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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래 유행하고 있는 '통섭'이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과 이념적 성격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 글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안상헌 -
人文學志 第39輯(2009)
忠北大學校 人文學硏究所
사회생물학적 ‘통섭(Consilience)’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 안 상 헌 / 충북대, 철학 -
1. 들어가는 말
사회생물학적 ‘통섭consilience’ 이념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회자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1998)이 번역되어 소개된 2005년 이후의 일이다. 이 저술은 그의 주저인 '사회생물학'(1975)의 마지막 장(27장)에서 ‘인간’을 사회생물학적 탐구영역으로 끌어들여 ‘사회생물학을 사회학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에 반대하는 진영과 치열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주제를 더욱 심화시킨 후속 저술이다. ‘통섭’이란 생경한 용어는 한국어 번역자들이 이 책의 제목인 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붙인 개념으로서 독서대중에게는 매우 익숙한 용어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통섭’이라는 용어가 널리 주목받게 된 까닭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학문 간의 벽이 매우 높고 폐쇄적인 데 대한 비판적 관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동안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는 물론 각 분야 내의 세부전공 분야까지도 서로 고립된 채로 연구되거나 교육되어 왔으며 그 결과 학문 간의 상호이해는 물론 학문적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의 전문화, 세분화 현상은 비단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였으며, 이는 사회적 노동의 급속한 분화와 함께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도 분업적 전문성과 효율성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학문의 분업화와 세분화는 단순히 학문 간의 소통부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다각적인 접근과 조명을 필요로 하는 복합적인 현실적 사태에 대한 총체적 이해는 물론 실천적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분업’과 ‘협업’이 동전의 양면처럼 수평적이고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양자의 관계를 수직적이고 외재적이고 우연적인 실증적인 관계에 있는 위계질서로 간주함으로써 ‘분업화된 하부구조에 대한 상부구조의 외적인 조정과 규율과 통제’에 의존하는 조직체제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학적인 접근방식이 바로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방식이다. 학제적 접근방식은 대학사회에서는 학제적 연구소 설립, 학과 통폐합과 학부제 도입, 연계전공 및 통합과정 도입, 팀티칭 등으로 나타났으며, 일반사회에서는 현안 중심의 팀워크 운영이나 위원회 제도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학제적 연구’와 ‘통섭’ 이념은 그 목적과 내용과 원리에 있어 전혀 다른 접근방식이다. 즉 ‘학제적 연구’는 ‘하나의 복합적 사태나 문제를 다양한 측면과 수준에서 접근하여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일면적 이해를 지양하고 종합적인 이해와 실천적 문제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다원주의적 접근방식’이라면, ‘통섭’은 ‘사회생물학적,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동물 연구와 인간 및 사회 연구를 ’적응과 자연선택‘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진화론적 원리를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일원론적인 접근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통섭’ 이념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된 동물의 한 종에 속하므로 동물의 행동을 파악하는 방식과 “원리적으로”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윌슨의 두 저술의 부제가 각각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통섭: 지식의 통합'이라는 구체적인 이념 형태로 표방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결국 ‘통섭’ 이념의 핵심적 전략은 ‘인간, 사회, 문화, 종교, 윤리, 예술 등을 다루는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자연과학의 하부구조인 사회생물학의 하위 범주에 귀속시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섭’ 이념이 소개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학제적 연구’와 ‘통섭’을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또한 ‘통섭’을 이질적인 모든 존재와 학문 영역을 가로지르는 (윌슨과는 정반대 입장인) 포스트모더니스트적인 용어로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대중매체를 통한 ‘통섭’ 이념의 대중적 확산에 비해 이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이나 비판적 논쟁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1) 서양의 철학사와 과학철학에서 추구되었던 ‘통일과학’의 이념을 윌슨의 ‘통섭’ 이념과 비교하여 간단하게 살펴보고, 2) 그가 제시한 ‘통섭’의 문제의식의 단초들을 살펴본 다음, 3)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통섭’을 위해 그가 새롭게 제시한 ‘유전자-문화 공진화’와 ‘후성 규칙’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4) ‘통섭’ 이념의 일원론적, 환원론적 문제점과 한계를 ‘변증법적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2. ‘통일과학’의 이념
철학사적으로 보면 ‘통일과학unified science’ 이념은 철학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여 하나의 원리로 사유하거나 파악하려는 존재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주로 해왔던 동서양 철학사 전체가 ‘통일과학’ 이념의 역사적 파노라마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탈레스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한 이래 피타고라스가 ‘수적 비례 혹은 조화’를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라고 주장했을 때 이미 세계를 하나의 궁극적 원리로 일원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설명방식은 중세의 신학적 ‘통합’ 이념을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대수학을 발전시킨 데카르트와 미적분을 정초한 라이프니츠 등에 의해 ‘보편학matesis universalis’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수학주의Mathemetik’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러한 보편학 이념은 뉴턴 이래로 ‘자연과학의 양화 및 수학화’와 더불어 간단한 자연법칙적 원리를 통해 모든 자연세계를 설명하려는 이른바 ‘물리학주의physicalism’로 이어졌으며, 20세기 초반에는 카르납을 중심으로 한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s들의 ‘통일과학’ 이념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헤겔에서 엥겔스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조차도 ‘대립자의 투쟁과 통일’,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부정의 부정’와 같은 몇 개의 간단한 변증법적 근본원리로서 자연과 사회 및 의식 일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를 부단히 추구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동양에서도 ‘태극설’과 ‘이기론’ 혹은 ‘음양오행설’과 같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통해 자연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 이로부터 인간의 도덕성 및 정치와 국가 원리까지 도출하려는 일원론적인 형이상학적 ‘보편학’ 이념이 존재해 왔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하나의 보편적 원리로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이념은 철학의 영원한 꿈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이래로 현대 자연과학에서도 우주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들 - 중력, 자기력, 약력, 강력 - 을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물질적 자연세계를 일원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른바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의 꿈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과 같은 가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적 ‘통섭’ 이념도 서양 철학사의 오랜 꿈이었던 ‘보편학’ 이념과 계몽주의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7-18세기에 꽃을 피웠던 계몽주의의 꿈은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과 함께 도래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 계몽주의자였던 콩도르세의 죽음과 더불어 퇴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계몽주의에 반하는 낭만주의 사조가 서방세계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운동의 엔진이었던 계몽적 이성의 힘은 면면히 살아남았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은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적 탐구의 장인노동화로 인해 지식은 ‘통일성’이 아니라 ‘파편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더하여 오늘날 ‘지식의 파편화’를 더욱 부추겨온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의 통일’ 이념은 20세기 초반의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는 계몽주의 운동의 핵심적 이상인 ‘통일과학’ 이념을 계승했지만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뇌의 작동기제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 관념론자들에 맞서 그들의 ‘실재론’적 입장을 끝까지 견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두뇌과학과 유전학의 발전에 힘입어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다윈 진화론의 기본 원리인 ‘적응과 자연선택’이라는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문화까지도 진화론적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통섭’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그의 ‘통섭’ 이념은 전적으로 두뇌의 진화와 작용기제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발전과, 특히 유전학의 발전을 통한 두뇌의 유전자적 작용기제와 인간게놈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통섭’ 이념을 하나의 통일된 일원적 원리로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던 ‘위대한 근대 계몽주의 정신’의 복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 일반을 하나의 원리로서 설명하려는 일원론적 ‘통일과학’ 이념이 전면적으로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계몽주의 이래로 자연과학적 ‘통일과학’ 이념이 추구해 왔던 ‘하나의 원리’는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의 모든 속성과 특성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원리가 아니라, 그 대상의 특정한 속성만을 일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원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장 오래된 보편학의 이념인 ‘수학주의’는 세계 내 존재가 지닌 수학적 특성만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 존재가 지닌 다른 유형의 비수학적 특성이나 속성을 남김없이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근대의 ‘물리학주의’도 마찬가지로 세계 내 존재의 물리적 속성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존재가 지닌 다른 속성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물리학적 설명방식으로는 돌멩이의 물리적 속성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돌멩이의 유용성, 아름다움, 존재 의미까지도 물리적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윌슨이 현대 자연과학의 ‘통섭’이념의 선구자로 간주하는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도 사실은 근대 자연과학 특히 근대 물리학에 토대를 둔 ‘물리주의적인 통일과학’ 이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논리실증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했던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에 대한 초기의 ‘그림이론’에서 후기의 ‘쓰임새이론’으로 철학적 입장을 바꾼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이론’은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사이비-과학을 축출하기 위해 세계 내 사태와 일치하는 사실적 요소명제 즉 실증적으로 참-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의미한 명제를 제외한 모든 명제를 무의미한meaningless 명제로 간주하여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참-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평가적 가치명제를 주로 사용하는 윤리학과 세계 내 존재의 사태와는 실증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변적 추상명제를 주로 사용하는 형이상학은 잠시 철학의 영역에서 추방된 듯 보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철학적 작업을 전통철학에 대한 ‘치료 작업therapeutic enterprise’이라 불렀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증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명제만을 논리적으로 연결하여 체계화한 과학이론만이 참다운 과학적 지식체계라고 주장하는 일종의 과학철학 내적인 ‘통일과학’ 이념이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은 실증적으로 참-거짓을 검증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그 말을 사용하는 맥락 즉 그 쓰임새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실증주의를 뒷받침하던 초기 입장을 완전히 포기했다. 이러한 후기 입장에 따르면, 현대 과학이론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나 명제조차도 과학이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기 위한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하나의 어떤 세계 내 존재를 설명하는 접근방식은 그 대상의 어떤 측면과 속성을 이해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졌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른 설명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설명방식이나 접근방식 또한 인간 행동의 ‘어떤’ 측면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사회생물학자들이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적응과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진화한 인간의 두뇌작용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동일한 곳에서 일어난 동일한 사태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인종, 집단, 계급에 속하는 개인들의 상이한 행동방식을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파악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사회체제나 사회구조의 계급적 속성이나 지배적 속성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지적 관심은 이론적 ‘설명’의 정합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적 관심사’일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설명의 정합성’만이 아니라 ‘실천적 적합성’까지도 고려해야만 그 의미와 위력을 지닌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근대 이후의 실증과학은 주로 ‘기술적 관심’에 따라 발전한 역사적 산물이며,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비판적 관심’의 역사적 산물이다. 즉 오늘날의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이 주제로 다루는 자유와 정의와 권리의 문제, 실천윤리의 문제, 자유의지와 필연의 문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문제, 미적 가치와 윤리적 규범의 문제 등은 모두 실증적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실존적인 당면과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학문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각 시대와 지역에서 제시된 전통적인 철학적, 신학적, 윤리적, 과학적 세계관, 인간관, 방법론들은 모두 그 시대의 토양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당대의 삶의 실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한 성찰과 비판과 노력 끝에 만들어낸 그 시대의 삶의 실천적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현대판 생물학주의biologism라 할 수 있는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두뇌과학, 인지과학, 유전공학에서의 인간이해와 인간게놈지도의 완성 등은 오늘날의 어떤 인간적 삶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적 산물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윌슨이 제기한 사회생물학적 ‘통섭’ 이념을 포함하는 현대판 ‘생물학주의’ 또는 ‘과학주의scientism’의 관심사와 지향점은 정말 과학내적인 정합적 설명방식에만 국한된 것인가? 아니면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실천적 관심사의 산물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윌슨의 답변을 듣기 위해서는 그가 ‘통섭’ 이념을 처음 제기했을 때의 문제의식의 흔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통섭’이념의 문제의식
1) 실마리 하나 - 자살 : 윌슨의 ‘통섭’ 이념의 단초는 그의 ?사회생물학? 제1장 첫머리와 제27장의 첫머리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제1장 유전자의 도덕성’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까뮈는 진정한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자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도된 엄격한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는 틀린 말이다. 생리학과 진화의 역사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생물학자들은 자기인식은 뇌의 시상하부와 림프체계 안에 있는 감정조절센터에 의해 제약을 받아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센터가 선악의 기준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를 원하는 윤리철학자들이 참조하는 온갖 감정들 -- 미움, 사랑, 죄책감, 두려움 등 -- 을 우리의 의식 안으로 가득 채워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는 ‘무엇이 이 시상하부와 림프체계를 만들어 내었는가?’ 하는 것이다. 정답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것’이다. 인식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윤리학(자)을 설명하려면 이 단순한 생물학적 명제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
윌슨이 고심 끝에 만들어 내놓았을 이 첫 명제들 안에는 단지 윤리학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설명은 사회생물학적인 설명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으며,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포괄하는 사회과학은 물론 철학, 윤리, 종교, 예술, 문학 등을 포괄하는 인문학은 모두 사회생물학의 하위범주로 재편될 것이라는 그의 핵심적 논지가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위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윌슨의 말처럼 만약 우리가 ‘생리학과 진화의 역사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생물학자’라면 당연히 이러한 학문적 관심사에 따라 ‘자살’에 대한 생리학적 혹은 진화론적 설명방식을 취할 것이며, 이에 대해 누구도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생리학자 겸 정신과의사라면 ‘자살’ 충동을 억제하거나 조절하기 위해 감정조절센터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을 개발하거나 투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자살’ 현상을 생리학이나 진화론을 통해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베르테르 효과’까지 동반하는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비록 ‘자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사회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자살’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리학적 혹은 진화론적 자살 기제의 설명으로는 ‘자살’을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설사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이 자살의 심리기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설명방식으로 날로 늘어나는 빈곤층과 청소년들의 자살증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이에 대해 어떤 실천적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생리학적 접근을 통해 ‘자살’ 충동을 억제하는 약물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자살예상자를 미리 찾아내어 약물을 투입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계층적인 여러 원인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본적 제거하지 않는 한 ‘자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살’에는 사회학자들이 분류하는 유형이나 사회심리학자들의 동인분석을 통해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자살’ 유형이 있을 수 있다. 즉 실존주의 철학자인 까뮈가 ‘철학의 유일한 진지한 문제’라고 말하며 제기한 ‘자살’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유형의 ‘자살’이다. 까뮈가 말하는 ‘자살’은 사회적, 심리적, 생리적 설명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철학적, 문학적 의미의 ‘자살’이며, 이는 실존적 인간의 근원적 부조리absurdité를 드러내기 위한 철학적 개념이다. 예컨대 그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저지른 ―인간의 합리적 이성만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살인’ 행위와 온갖 합리적, 종교적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죽음을 선택하는 따위의 ‘자살’ 행위는 생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문학 속의 자살’이며, 이는 생리적 기제를 밝힐 수도 없고, 약물로서 ‘자살’충동을 조절할 수도 없는 그런 유형의 ‘자살’이다. 소설 속에서의 ‘자살’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통해 도대체 어떻게 해명하며, 현실적 사태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윌슨이라면 그런 주인공을 상상해낸 작가의 심리기제를 생리학적으로 구명하면 궁극적으로 설명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작가는 이미 죽고 없으며, 설사 두뇌과학, 유전학, 진화심리학의 비약적 발전이 인간의 자살충동기제의 보편적 특성을 완벽하게 구명해낸다 하더라도―물론 이것조차 ‘불가능한 꿈’으로 보이지만―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인 픽션에 등장하는 ‘자살’을 설명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2) 실마리 둘 - 외계인의 시선 : 윌슨의 ‘통섭’이념의 문제의식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인간: 사회생물학에서 사회학으로’라는 제목이 붙은 제27장 첫머리이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방식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외계인의 시선’을 도입한다.
자 이제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종들의 목록을 완성하기 위해 다른 행성에서 온 동물학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연사적인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런 거시적macroscopic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생물학의 세부 분야로 축소될 것이며, 역사, 전기, 픽션fiction은 인간 행동학human ethology의 연구주제가 될 것이며, 인류학과 사회학은 모두 단일종인 영장류에 대한 사회생물학이 될 것이다.
이런 비유적 설명은 얼핏 보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더 꼼꼼하게 따져보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로 윌슨은 다른 행성에서 파견된 외계인을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종들의 목록을 완성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동물학자’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외계인이 정말 사회적 종의 분류에 관심을 가진 동물학자라면 인간을 사회적 동물의 한 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는 모리스가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로 간주하고 동물학적으로 관찰하여 인간의 행동을 서술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양자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행동에 관심을 갖는가 아니면 동물적 행동에 관심을 갖는가 하는 차이일 것이다. 사실 윌슨이 제시한 ‘외계인의 시선’이란 ‘사회생물학적 관점’을 의미하며, 굳이 비유하자면 외계에서 온 동물학자는 윌슨이 가르친 수제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거시적macroscopic 관점’이란 곧 윌슨 자신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생물학의 세부 분야로 축소될 것이며, 역사, 전기, 픽션fiction은 인간 행동학human ethology의 연구주제가 될 것이며, 인류학과 사회학은 모두 단일종인 영장류에 대한 사회생물학이 될 것”이라는 것도 사실은 윌슨의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왜 외계인까지 동원하여 이런 과격하고 대담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생물학과 사회과학이 통합해야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도발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외계에서 지구로 파견된 외계인이 윌슨이 상정하고 있는 바와 같은 ‘동물학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외계인이 우리와 동일한 지적 수준에서 동물학자와 동일한 관심사를 갖고 동일한 관찰을 할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윌슨이 소망하는 바의 외계인이 파견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과연 윌슨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관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관찰했을지는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계인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지구에 머물 것인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가 동물이나 인간 일반의 사회적 행동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전지식을 갖추고 있는지도 우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설사 외계인이 전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인간 종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지구상에 매우 특이한 생물종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처음 마주친 인간은 농부일 수도 있고, 과학자일 수도 있고,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일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어린아이일 수도 있고, 길거리의 시위대일 수도 있다.
만약 외계에서 파견된 외계인이 동물학자가 아니라 ‘지구를 물리적으로 정복하거나 정치적으로 지배할 목적으로 파견된 첩보원’이라면 그들이 인간 사회를 관찰하는 방식은 물론 동물학자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물리적 정복이 목적이라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대량학살무기나 방어무기의 위력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정치적 지배가 목적이라면 해당 지역이나 국가의 조직형태와 정치문화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경제적 식민지 건설이 목적이라면 인간의 노동능력이나 기술적 능력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즉 그들은 제국주의시기에 식민지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나 문화인류학자들의 관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윌슨이 ‘문화결정론’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비판해 왔던 문화인류학은 바로 이런 그들의 특수한 관심사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윌슨이 제기한 ‘외계인의 시선’은 윌슨의 입지를 강화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 관점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윌슨의 ‘외계인의 시선’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외부에서 관찰하여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외재적 관점’이 지닌 모든 철학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외재적 접근방식과 인과적 설명방식은 전적으로 ‘관찰과 실험’이라는 ‘경험주의적empiricist’인 방식을 따르고 있는 바, 경험주의와 논리실증주의의 과학방법론은 앞에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뿐만 아니라, 포퍼를 중심으로 하는 ‘비판적 합리론자’들과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하는 ‘변증법론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60년대의 ‘실증주의논쟁’, 과학철학에서 전개되었던 ‘이해와 설명’을 둘러싼 방법론 논쟁, 그리고 카르납 - 포퍼 - 쿤 - 파이어아벤트로 이어지는 과학철학 내부에서의 과학론과 방법론을 둘러싼 내재적 논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3) 실마리 셋 - ‘한국어판 서문’: 윌슨의 ‘통섭’ 이념의 문제의식은 1998년 저술한 ?통섭?에 가장 자세하게 개진되어 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통섭’에 대한 본격적 논의에 앞서, 윌슨이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에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는 짧은글은 실마리를 잡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특히 유용하다.
이 책의 주제는 한 마디로 지식이 갖고 있는 본유의 통일성이다. 지식은 과연 본유의 통일성을 지니는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싶다. 나는 이것이 철학의 중심 논제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서로 다른 인간의 마음속에는 정말 둘, 셋 또는 무한히 많은 진리가 담겨 있는가? 아니면 객관적인 실재에는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과 환상이 그곳에서 나오는 단 하나만의 진리만이 존재하는가? 지식은 언제까지나 지금 현재 서양 문화가 인식하고 있는 세 갈래의 학문분과들인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이 나뉘어져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영원히 각자의 진리 영역에만 예속되어 있을 것인가?
윌슨의 ‘통섭’이념의 핵심은 ‘지식이 갖고 있는 본유의 통일성’이다. ‘통섭’이념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는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의 대상―객관적 실재―에 대한 자연과학적 진리, 사회과학적 진리, 인문학적 진리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 하나의 과학적인 보편적 진리만이 존재한다. 윌슨의 이런 주장 속에서 ‘과학적 합리성의 독선주의’와 ‘전문적 기술 관료들의 독단’과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을 떠올리는 것이 과연 무리한 일인가? 조금 더 읽어보자.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하는 논조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밖에 없다. 그 첫 째는 자연과학에서 나온다. 자연과학자들은 물질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 자연과학은 근래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로 그 범위를 확장하여 세 영역을 한데 묶고 있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그 하나가 자연과학에서 나온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자연과학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한데 묶어낼 수 있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 수 있는가? 물질세계의 작동방식의 이해가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또한 종교적 진리가 과학적 진리에 통합될 수 있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길은 모든 방법을 한데 묶는 것뿐이다 ......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적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들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더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는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에 있어서 주된 원동력이기 때문에 상당한 믿음을 준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물질적 이해는 현대 문명의 기본인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현재 산업국가와 세계경제를 한데 묶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의 통합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은 자연과학의 중요성과 그것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저 단순한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지식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통합 말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적 설명들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의 원동력이기에 ‘통섭’을 신뢰할 수 있고, 산업과 경제를 한데 묶어주기에 자연과학적 ‘통섭’을 신뢰할 수 있다면,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자연과학으로의 ‘통섭’을 신뢰할 수 있는 결과적 토대는 무엇일까? 단지 인간과 세계를 단 하나의 진리로 한데 묶어주기 때문일까? “자연과학의 중요성과 그것의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로지 과학내적으로만 보면 아마도 현대의 두뇌과학과 유전학의 놀라운 발전과 성과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 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존재를 하나의 보편적 진리로서 한데 묶어세우는 것은 ‘보편주의’ 이념이 초래하는 끔찍한 미래 즉 ‘위대한 신세계’를 기약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학문 분과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개념이 아직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서둘러 ‘통섭’을 제기하는 이면에 숨은 의도는 정녕 없는 것일까?
그러나 ?통섭?의 ‘서문’에 나타난 윌슨의 입장은 ?사회생물학?에 개진된 완고한 환원주의적 ‘통섭’이념에 비하면 훨씬 더 조심스럽다. 일단 그는 ‘지식의 본래적 통일성’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고 물러선다. 그리고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인과적 설명을 아우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통합’이 현대 자연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생물학으로의 ‘통섭’은 실증적으로 증명된 ‘과학이론’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철학적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이제 그가 ‘과학자의 길’에서 ‘철학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생물학? 논쟁 당시 그가 ‘자연주의자-과학자naturalist-scientist’로서 반대진영에 속하는 ‘철학자-과학자philosopher-scientist’들과 싸웠다던 당시와 비교하면 큰 진전이자 변화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선 ‘철학자의 길’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에 돌입한 투사의 길이자, 양자의 관계를 ‘단순한 동반자적 관계’가 아니라 ‘지식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해야 하는 ‘가시밭길’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자연과학자로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인과적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데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20여 년간 같은 길에 들어선 동료 철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과 함께 양자의 인과적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1) 유전자-문화의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2) ‘문화유전자cultgene’ 혹은 ‘밈meme’ 이론, 3) 빈 서판blank slate 비판, 4) 종교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과 비판 등에 관한 후속 작품들의 출판으로 이어졌으며, 그들은 이러한 저술들을 통해 양자를 ‘통섭’할 수 있는 중요한 인과적 연결고리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후속 저술들이 사회생물학적 설명방식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설명방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4. ‘유전자-문화의 공진화’와 ‘후성 규칙’
?사회생물학? 논쟁 이후 ?인간의 본성?의 저술을 거쳐 ?통섭?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윌슨이 ‘통섭’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진화된 가설’은 바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와 ‘후성 규칙’이다. 윌슨의 자서전에 따르면,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은 ?사회생물학? 논쟁 이후 반대진영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유전자 결정론’ 혹은 ‘유전적 환원주의’이라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1979년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전자 결정론’으로 불리는 자신의 논지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인간은 행동과 사회구조를 습득할 수 있는 성향, 즉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성향을 물려받았다(inherit). 이러한 특성에는 성적 노동 분업, 부모자식간의 유대, 근친에 대한 두드러지는 이타주의, 근친상간 회피, 윤리적 행동방식, 낯선 자에 대한 의심, 부족중심주의, 집단 내 위계질서, 남성지배, 제한된 자원의 획득을 위한 영토 침입 등이 포함된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선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발달의 통로는 -- 우리가 아무리 다른 방식을 원할지라도 -- 다른 방향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유전자에 의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문화가 크게 변화하더라도 문화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특성으로 수렴된다.
그는, ‘?사회생물학?에서는 인간의 문화적 차이보다는 인간 본성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이 없었지만’ ‘자연선택을 통한 인간 행동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집단생물학의 추론방식을 도입’한 점과,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인간 게놈의 역할의 중요성’과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유전자 결정론’은 반대진영으로부터 종족의 차이, 성적 차이, 지능의 차이, 계급적 차이를 모두 유전적으로 결정된 ‘자연적 특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라는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심지어 어떤 비판가들은 ?사회생물학?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동물의 사회적 행동 편’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 편’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고편이라는 의심까지 받았다. 그러나 윌슨은 그 당시 자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정치적으로 순진했었다’고 말한다. ?사회생물학?을 저술하면서 그는 단지 ‘처음에는 진화생물학의 지적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 종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으나, 나중에는 ’인간 편‘의 적절성을 통해 ’동물 편‘의 지적인 설득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그가 ?사회생물학?에 ‘인간 편’을 포함시킨 결정적 이유는 ‘진화생물학이 사회과학의 토대로서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물학과 사회과학이 통합해야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믿고서 일부러 도발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즉 그의 말에 따르면 ?사회생물학? 제27장은 “시약에 떨어뜨린 촉매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의 전말을 다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결과 ‘사회생물학’이라는 용어는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다루던 사회생물학회도 ‘인간 행동과 진화 학회Human Behavior and Evolution Society’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논쟁 직후 윌슨은 뒤늦게나마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 인문학, 과학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뒤 더욱 도발적인 사회생물학적 주장을 담은 ?인간의 본성?(1978)을 저술하였으며, 이 저술을 집필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이론을 정립하는데 착수했다. 윌슨에 의하면,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에 뛰어든 직접적 이유는 사회생물학적 인간이해에 반기를 들었던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People’ 그룹이 ‘과학’을 ‘개별적인 객관적 지식’으로 보지 않고 ‘문화의 일부’ 혹은 ‘정치사와 계급투쟁과 얽혀있는 사회적 과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생물학? 논쟁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다루는 사회생물학이 ‘문화’를 분석 대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곤경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의미론에 기반을 둔 마음과 문화가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반대진영의 비판이 줄기차게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 마침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제자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유전과 문화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으며,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문화에 의해 전달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는 뇌의 산물이다. 반대로 뇌는 고도로 발전된 조직화된 기관이자 유전적 진화의 산물이다. 뇌는 감각적 수용을 통해 프로그램화된 하나의 편향체들이며, 어떤 것은 학습하고 어떤 것은 학습하지 않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편향체가 문화를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정도까지 이끈다. 반대로 뇌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의 유전적 진화는 문화가 지배하는 환경 안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문화의 변화는 이러한 뇌의 속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윌슨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의 발전을 만들어내는데 상호작용해 왔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했으며 이에 관한 이론을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명명했다.
개인은 전 생애에 걸쳐 무수한 정보와 가치판단, 특정한 문화의 맥락 속에서 가능한 행동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간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인은 선택 가능한 것들 중에서 특정한 결혼 풍습, 창조신화, 윤리 규범, 분석방식을 선택한다.
윌슨은 서로 경쟁하는 선택지를 ‘문화유전자cultgens’라 불렀으며 이를 도킨스의 ‘밈meme’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했다. 윌슨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기억을 수정하고 결정할 때마다, 시각적 이미지, 소리 같은 자극에서 출발하여, 정보를 저장하거나 장기기억으로부터 기억내용을 끌어내고, 마지막으로 지각된 대상과 관념에 대한 정서적 평가에 이르는 복잡한 생리적 과정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문화유전자가 동등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인지는 중립적인 필터가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전에 기반을 둔 문화’의 사례로서, 색깔지각, 음소 형성, 후각, 선호하는 시각 디자인,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 등을 열거하면서, 이런 특성들은 인간 종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며,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전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생리적 기제에 기반을 둔 선호’인 ‘후성 규칙epigenetic rule’이 문화를 다른 방향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특징적인 생리적 선호인 ‘후성 규칙’이 문화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 인지를 통해 유전자가 문화와 정신의 발달을 형성하는데 작용한다는 것이다.
5. ‘통섭’ 이념의 문제점과 한계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생물학? 논쟁 이후 윌슨의 인간 행동에 대한 ‘유전자 결정론’과 ‘유전자 환원주의’는 ‘유전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진화’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행동은 오로지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고심 끝에 고안된 새로운 설명방식이자,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은 본래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 오로지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이른바 ‘문화 결정론cultural determinism’을 겨냥한 대안적 설명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에 의한 공진화와 후성 규칙에는 여전히 원천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왜냐하면 진화론적인 단일한 보편적 원리에 입각하여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생물학의 하위 범주에 통합하려는 초기의 ‘통섭’ 이념이 이전보다도 더욱 강고한 형태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문화의 공진화’는 그 명칭으로만 보면 ‘유전자 결정론’와 ‘문화적 결정론’을 종합한 이상적인 ‘통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성 규칙’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보듯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은 사실상 ‘전 단계의 유전적 진화’와 ‘후 단계의 유전적 진화’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윌슨에 있어 ‘문화적 진화’는 ‘후성규칙’에 따라 진화되는 ‘유전적 진화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유전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의 대등한 상호작용과 상호침투’가 아니라 ‘유전자-유전자 공진화gene-gene co-evolution’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자연과학과 문화과학 즉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통섭’은 결국 자연과학의 하위범주로의 환원의 변종이자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화론에 토대를 둔 사회생물학적 ‘통섭’이념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난제들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윈의 진화론 이래로 인간이 우주의 생성 및 진화와 그 안에서 발생한 생명의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 종교적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intelligence design을 믿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과 뇌의 진화가 인간만의 독특한 사유기제를 만들어내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사회생물학적 ‘통섭’이 저절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비록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종의 일부’라 할지라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놀라운 유전적 근친성이 확인되었다고 하더라도, 동물성에서 독립된 종으로 분화된 인간성(humanity)을 모두 동물성(animality)으로 환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윌슨을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이 ‘통섭’이념을 주장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즉 그들의 사회생물학적 ‘통섭’ 이념은 인간의 심리, 행동, 문화, 사회, 정치, 도덕 및 감성 등을 인간종이 공유하고 있는 진화적 속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인간의 ‘자연적 속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문화적 속성’으로만 파악하려는 이원론적 설명방식을 고수하는 전통적 사회과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말 신칸트학파의 등장 이래로 딜타이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리케르트의 ‘자연과학과 문화과학, 가다머의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학문방법론이 아직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더구나 인간과 동물을 근원이 완전히 다른 피조물로 여기는 기독교 신학적 사고방식도 여전히 남아있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와 행위와 문화와 사회제도를 설명하거나 이해함에 있어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를 무시한 채 오로지 ‘사회적, 문화적 산물’로만 파악하려는 이원론적 접근방식과 설명방식에 대한 방법론적 비판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 이해에 있어 사회생물학적, 진화심리학적 접근방식은 ‘물리학주의’에 입각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통일과학’ 이념에 비견되는 ‘생물학주의(biologism)의 오류’를 피하기 어렵다. 인간이 자연 존재의 일부이며 동물의 일종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자연환경 및 문화적 환경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존재방식이 동물의 그것과 명백히 다르다는 점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보편적 동일성’과 ‘개별적 차별성’ 중 어느 하나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배제하고 ‘절대적 보편주의’로 일관하거나 ‘절대적 특수주의’로 일관하는 배타적인 이원론적 사유방식은 변증법적 관점에서 보면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or’, ‘전부 아니면 무all or nothing’라는 이분법적 사유방식으로서 파악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유방식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의 뇌의 기제가 이진법적인 체계로 진화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복잡한 사태나 문제를 파악함에 있어 먼저 최대한 이분법적으로 ‘인 것’과 아닌 것‘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분석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사태 파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바른 사태파악을 위해서는 잘게 쪼개진 ‘인 것’과 ‘아닌 것’의 필연적인 내적 연관 관계를 따져가며 그것을 다시 총체적으로 종합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윌슨도 고백하고 있듯이 ‘유사성’에만 주목하면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즉 인간과 동물의 사회생물학적 진화의 ‘공통성’의 측면에만 주목하면 동물세계와 인간세계의 차이는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동물세계와 인간세계의 차이에만 주목하면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 세계처럼 보인다. ‘문화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윌슨의 반대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인간세계와 동물세계의 차이만이 아니라, 인간세계 안에 내재하는 무수한 특수성과 차별성과 개별성에 주목한다. 그 까닭은 물론 그들의 주관심사가 과학내적인 이론적인 설명방식의 정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인종적, 성별적인 현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관심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사회생물학? 논쟁이 순수한 과학방법론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곧바로 1970년대 미국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치달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윌슨 자신은 ?사회생물학? 논쟁이 정치적 논쟁으로 치닫는 것을 처음에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그는 ‘정치적으로 순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사회생물학적 방법론의 사회과학 및 인문학적 방법론으로의 확장 가능성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윌슨의 이러한 ‘고백’은 ‘변명’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인종문제, 여성문제, 이주자문제 등으로 뒤끓고 있었던 70년대 미국의 정치적 현실을 벗어나 있었던 외계인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신좌파운동의 진원지였던 대학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과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정치적 편향을 가진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오늘날 진부한 상식에 속한다. 많은 학자들이 오늘날의 시대를 ‘탈-이데올로기의 시대the age of post-ideology’라고 말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는 주장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윌슨도 ?사회생물학? 논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던 것 같다. 그의 책 ?통섭?은 단순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및 인문학의 방법론적 ‘통섭’을 다룬 자연과학적 저술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진화론적, 일원론적, 환원론적 방법론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미래사회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가득 담고 있는 다분히 정치철학적인 저술이다. 따라서 윌슨의 ?통섭?은 과학방법론의 ‘통섭’을 주장하는 과학적 저술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철학적 저술로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윌슨의 저술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라, 근래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수많은 사회생물학적, 진화심리학적 저술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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