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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책]David Harvey-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by 마리산인1324 2009. 5. 18.

 

http://parxisan.egloos.com/tag/데이비드하비/page/1 에서 퍼왔습니다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aris, Capital of Modernity (200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2005 생각의 나무

 

1848년 파리는 자본과 노동력이 넘쳐났지만 이윤을 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파리 지사 오스망은 대규모 도시개발로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를 흡수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무리한 도시 개발은 파리의 부동산을 자본주의 논리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파리를 계급에 따라 두 지역으로 갈라 놓았다.

1848년 파리는 경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도시는 예전에도 경제 위기를 많이 겪어보았는데, 대부분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생겨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달랐다. "무모한 투자(특히 철도에 관련된), 과잉생산"에 의해 벌어진 자본의 위기였다. "자본주의적 과잉 축적, 대규모 과잉 사태를 빚은 자본과 노동력이 나란히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재통합하여 이윤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이고 제대로 된 위기였다. 자본주의를 개혁하던가, 아니면 혁명을 통해 그것을 전복하던가, 두 선택지 중의 하나가 1848년에 모든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났지만 곧 분쇄되었다. 그리고 보통선거로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4년 뒤에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선언한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 개혁이 단행되었다. 1853년 오스망은 파리 지사로 취임했고 황제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도시 개발을 시행했다.

도시 개발은 "모든 권력을 틀어쥔 황제와 그 핵심 자문관들(오스망을 포함하는)의 명령으로 간단하게 착수된 기획이 아니라 자본의 연합을 통해, 또 그것을 위해 조직"되었다. 소액 저축을 동원하고 “거대한 투자를 창출해내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수직적으로 통합된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 “금융 권력의 엄청난 중앙집중화”를 이루었다. 도시 개발을 위한 자금은 적자재정으로 조달되었다. “국가 부담의 공공사업은, 적어도 원리 차원에서는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을 흡수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경제성장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납세자에게 더 이상의 비용을 부담을 지우지 않고도 자본과 노동력의 지속적인 완전고용을 보장할 수 있다.” 위기는 실제로 “자본과 노동력 과잉을 수송과 교통 시스템의 재편 작업에 장기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새 도로 시스템은 공간관계를 자본주의 논리에 더욱더 얽매이게 만들었다.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따라 토지가격이 형성되자 대규모 투기 자본이 “주식 시장에 비해 안정적이고 수익이 높은 투자처”인 부동산에 투입되었고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변하였다. 개발업자들에게 이것은 가격이 “상승하는 위치의 임차권을 따낼 놀라운 기회가” 되었지만,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슬럼의 철거와 건설 투기로 인해 서쪽이 확고하게 부르주아 구역이 된 반면, 북부와 동부 변두리 토지 개발이라는 별도 시스템은 상류 계급과 어떤 식으로도 뒤섞이는 일이 없는 저소득 주거 지대를 만들어냈다."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변두리(일터까지 더 먼 길을 가야 하는)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도심 가까이의 집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비좁게 살아야 했다." 게다가 변두리에서도 "대다수 주민이 투기적 활동에 손을 댔고, 이미 낮았던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단물을 또 빨아냈다.”

제2제정기의 오스망화는 "자본주의 역사상 계급에 근거하는 최대의 공동체적 봉기"인 파리 코뮌을 불렀다. 개발독제기의 새마을 운동도 오스망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 당시 '모더니티의 변두리, 서울'에서 벌어진 공간관계의 변형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우리는 아직도 뉴타운 재개발에 쩔어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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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김동욱기자의 역사책읽기>

 http://blog.hankyung.com/raj99/223104

 

 

죠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

 전형적인 불란서풍 이름을 가진 이 인물은 거대 건축, 건설 사업을 주도한 역사상 유명한 여러 ‘삽질의 대가’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굳이 땅을 뒤집어 파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은 ‘삽질’의 달인들을 역사 속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지만(피라미드를 지은 이집트 쿠푸왕이나, 정말로 삽으로 땅을 파서 바다 같은 호수를 만들고 퍼낸 흙으로 이화원내 산을 만든 서태후 등등) 오스망 남작처럼 전 세계 각국에 자신의 ‘삽질’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친 사람은 많지 않다.

<계획적으로 설계된 파리 개선문 주변의 방사상 대로. 사진출처:다음블로그 0518bluebird>

나폴레옹3세 시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파리의 모습으로 근본적으로 파리 시내를 뜯어 고친 이 인물의 이름을 딴 ‘오스망식’, ‘오스망스런’이란 표현은 불어에서 우리가 ‘불도져’, ‘무뎃포’, ‘밀어부쳐’라고 말할 때 같는 의미와 비슷한 뜻을 지녔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예전에 파리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보면서 Haussmann을  불어식 오스망이 아니라 독일어식 하우스만으로 잘못 읽었다 한번 웃었고, 그의 이름에서 건축물인 집(Haus,House)이 연상돼 또 한번 웃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무뎃포로 과감하게 밀어부처 도시를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건설한 오스망의 도시 계획, 도시 건설법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주변국, 남북 아메리카는 물론 20세기 한국에까지 유사한 스타일의 도시 개발을 잉태한 시원 같은 존재다.

 물론 오스망 등장 이전부터 파리는 유럽의 중심도시로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많은 문제를 분출했었고, 이에 대응하는 도시개발이 계속돼 왔다.  

 10세기말 카페 왕조의 통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파리는 12세기에 필리프2세 시기에 거리를 포장하는 등 중심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필리프2세는 레 알(Les Halles)에 새로운 중앙시장을 개발하고 도시 주위에 튼튼한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13세기에 완성되는 노트르담 성당의 공사도 시작했다. 당시 파리는 인구 15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이후 도시는 지속적으로 커져갔고 16세기말 부르봉 왕조의 앙리4세 때에 다시한번 ‘재개발’ 열풍이 몰아친다. 앙리4세는 불결한 거리를 청소하고 루브르를 확장하면서 이탈리아 모델을 따라 광장 몇곳을 추가로 만들었다. 도시 기반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귀족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관료제가 확장되면서 파리시는 인구가 50만명까지 증가한다.

  1670년대가 되면 파리는 구 성벽 너머 지역으로 확장되는 등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파리의 통치자들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루이14세가 파리 교외 베르사유에 있는 동안 재상 콜베르는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대로로 도시를 에워쌌고 앵발리드 군인병원과 수많은 개선문, 원형 빅투아르 광장의 공사를 시작했다. 이 시기 파리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을 희생해 가면서 성장하는 ‘피를 빨아먹는 향락과 악덕의 대도시’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파리시가 오늘날 보이는 모습으로 외관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 돼서다.

 이에 앞서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1세는 파리를 “멋지고 거대하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탈바꿈하고자 했지만 결국 전쟁의 패배로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대신 파리시는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 치하에서 진정한 변신을 했다. 1851년 권력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은 집권 직후 파리를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선언하며 “이 위대한 도시를 장식하는데 총력을 쏟아붇자”고 선언했다.

 이 시기 파리는 소비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는데 1852년에는 정찰제로 판매하는 백화점인 벨 자르디니에르, 프랭탕, 사마리텐 등의 초기 백화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나폴레옹3세는 정부의 위신을 드높이고 런던과 경쟁하고,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좁은 길로 바리케이트를 건설하기 쉬웠던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길 원했다.

 당시 비좁은 파리 시가는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하기 쉬운 구조였는데 도로를 직선화하고 넓게 만들어 바리케이트를 설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진압 병력의 투입도 신속하고 손쉽도록 만들길 원한 것이다.

이 같은 나폴레옹3세의 야심찬 선언을 실행한 것은 당시 파리 지사였던 조르쥬 외젠 오스망 남작이었다. 바로 그의 지휘 아래 웅장한 대역사가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그의 계획과 추진력에 의해 직선의 넓은 대로들이 나타났고 그 대로를 따라 화려한 건물들이 동일한 설계로 지어졌다.

 이 건물들에 부르주아들이 임대료를 내고 입주했고 빈민들은 교외로 밀려나갔다. 600km에 달하는 하수도망과 수도시설, 가스 가로등을 비롯해 대규모 녹지가 조성됐고 10만 그루의 나무가 파리시에 식수됐다.

파리는 잘 설계된 공원들로 장식된 넓은 대로를 따라 다시 조직됐고 이 같은 파리의 도시배치와 설계, 건축 아이디어는 후일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도시들과 워싱턴,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의 하노이까지 퍼져 나갔다.

이처럼 새로 꽃단장을 한 파리시에 대한 전 세계 각지의 열망은 대단했다. 19세기말 브라질 사람들은 리오 데 자네이로시를 리빌딩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모델로 신대륙의 도시가 아니라 바로 구대륙의 파리를 선택했다. 파리는 유럽문명의 최고봉을 상징했으며 도시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모델로 여겨진 것이다. 이에 따라 파리시의 거리들은 아베니다 센트럴 주변을 비롯해 리오 데 자네이로에 복사본 형태로 재건설됐고 프랑스 빌딩 스타일이 모방돼 리오 데 자네이로시 곳곳에 세워졌다.

 이같은 프랑스식 도시 개발 방식은 이웃국가인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도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시민들의 건강과 보건 생활 향상을 위한 조치가 강력히 요구됐다. 이에 따라 빈에서는 보건 관련 시설을 비롯해 도시 기반 인프라 시설이 빠른 속도로 확충되게 된다.

 1873년에 빈에선 이전까지 교회가 자선이라는 명목으로 담당하던 의료영역을 시가 떠맡으며 최초의 시립병원이 만들어졌다. 곧이어 공원과 각종 공공시설, 공공 서비스 시설 등이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같은 공공시설이 도시의 새로운 외관을 구성하는 움직임은 링슈트라세의 건설과 호흡을 같이했다. 빈의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을 허물고 옛 성곽이 있던 자리에 도시를 빙 두르는 환상의 도로망이어서 ‘반지 같은 길’이란 뜻의 링슈트라세는 파리의 경우처럼 군사적 측면이 도시 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48년 혁명을 경험한 오스트리아는 도시 빈민구역과 외곽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이나 폭동이 일어날 경우, 이를 재빨리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손쉽게 진입하게 도로를 넓게 설계했고 시내 요지에 신속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링슈트라세가 건설되면서 도로 주변에 처음 들어선 가장 중요한 건물은 교회건물인 포티프키르헤 였다. 이 교회는 유사시 군대의 병영으로 활용한다는 목적도 겸비해 건설됐으며 만약을 대비해 도시 중앙역사 주변에는 군대주둔 장소와 화약고도 들어서게 된다.

 오스망 남작이 새로 만든 파리시의 모습은 유럽각지의 주요 도시들의 얼굴마저 대대적으로 ‘성형수술’하는데 모델이 된 것이다.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 서울의 역사를 봐도 오스망 남작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만명 이하로 떨어졌던 서울의 인구는 1954년 124만, 1956년 150만, 1963년 360만으로 급팽창하면서 19세기 파리와 빈이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문제에 맞딱뜨리게 된다.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 기반시설이 인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 이에 따라 50-60년대 서울에선 하수구가 제대로 없어 비가 오지 않더라도 진창이 되는 곳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이런 서울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친 것이 김현욱 시장시절이다. 한국의 오스망으로도 비유되는 김현욱 시장 시절 서울의 모습은 본격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동차를 위해 전찻길은 뜯겨 나가고, 사창가였던 종삼은 세운상가 건설로 철거돼 사창가는 당시 변두리인 청량리와 미아리로 밀려나고 , 청계천은 포장되고 그 위에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처럼 땅위를 평정한 김현욱 시장이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물러난 이후엔 양택식 시장이 바톤을 이어받아 서울을 개조해 나간다.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지녔다는 양 시장은 서울시내 왠만한 사거리에는 지하도를 팠다고 한다.

 실제 오늘날 한국은행 주변 등 을지로와 광화문, 시청, 남대문 주변 상당지역에서 이때 정말로 삽으로 팠음직한 시공수준의 지하도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도시가 집중화되고, 인구가 급팽창 하면서 세계 각지에선 각국의 오스망에 비견되는 ‘삽질의 대가’들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그들의 삽질은 적잖은 노동을 요구했으며 당대에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을 들었던 것은 공통적인 듯 하다.

 그 같은 인물들이 나온 것은 일정정도 시대의 필요에 따른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얼굴을 뜯어고친 전시대의 ‘삽질’에 대한 평가는 모든 삽질의 대가들에게 고르게 부여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각 국가가 처한 상황과 역사적 입장이 다른 면도 있겠지만 ‘삽질’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얼마나 미래를 내다보고 한 것인가에 따라 수준차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삽질’에도 격이 있고 수준차이가 있다는 것은 후대의 평가를 받아보고야 알게된다. 하지만 한번 칼을 덴 얼굴은 쉽게 원상회복이나 개선이 쉽지 않으니 첫삽을 뜨기 전에 언제나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참고한 책>

조엘 코트킨, 도시의 역사,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2007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최갑수 옮김, 까치 1998

한홍구, 대한민국사2, 한겨레출판 2003

Rochard Bessel, 'European Society in the Twentieth Century',in T.C.W.Blanning(Edited),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Modern Europe,Oxford University Press 1996

Carl E. Schorske, Fin-de-Siecle Vienna-Politics and Culture, Vintage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