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9-04-30 14:36: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1436291&code=940100&s_code=as028
[제1부 촛불의 성찰과 평가]촛불, 사회운동, 민주주의
촛불, 사회운동, 민주주의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정치학)
1. 촛불항쟁이 남긴 과제
작년 6월 10일 자정에 가까운 시간부터 그 다음 날 새벽까지 ‘스티로폼 논쟁’ 이 진행되었다. 컨테이너로 구축된 명박산성을 스티로폼을 쌓아 넘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진행된 시민들의 논쟁에 대해, 필자는 촛불항쟁을 평가한 한 글에서 이 논쟁이 촛불항쟁이 직면했던 그리고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를 보여준다고 지적한 있다.
컨테이너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광장에서 우리끼리 모여있는 것만으로는 변화와 성취를 이루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장을 넘어서고자 시도했다. 반면 광장에 머무르고자 했던 사람들은 비폭력노선의 견지가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지켜주는 것이며 컨테이너를 넘어선다고 해서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입장이 당시 비교적 많은 시민들의 동의를 얻었으나 과연 광장에서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전망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실 촛불항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미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다. 운동과 제도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은 운동과 제도정치 어느 하나를 선택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활력을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특히 제도적 성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사회운동과 제도정치가 어떻게 선순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발전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고 둘 중 하나를 절대화시키는 이분법적 구도에 빠졌고, 촛불항쟁 국면이 마무리되는 것과 함께 우리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현재 촛불항쟁을 평가하고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의의 중의 하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진지한 노력을 촉발하는 데 있을 것이다.
더욱이 촛불항쟁이 마무리된 이후 지금도 사회운동과 정치는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촛불항쟁 이후에도 여러 사회적 갈등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해 말부터 올초까지 가장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던 미디어법 문제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제도권 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으나 그 전망이 밝다고는 할 수 없다. 용산참사문제도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금융부분의 문제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상황이 진행되면 민생문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데 단기적으로 경제적 위기에 가장 강력한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는 추경예산 등과 관련해 다양한 사회계층의 요구가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촛불항쟁이 보여준 것처럼 진보개혁진영이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사회운동이 시민들이 권리를 보호하고 민주주의의 후퇴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나, 운동적 방법에만 의존해서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내년에는 지방자치제 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제도정치 공간을 활용할 것이며, 어떻게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강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운동과 정치의 선순환이 필요하다
작년 촛불항쟁 때 진행된 운동과 정치에 대한 논쟁에서 제도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한국사회의 핵심문제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의 부재 혹은 정당정치의 부재로 판단했고, 운동이 제도의 혹은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제도정치와 정당정치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운동정치가 적어도 제도정치와 정당정치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차원에서, 나아가 더욱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에 빠질 수 없는 요소라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운동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제도정치나 정당정치의 문제점을 부정하거나 이를 개혁할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만약 자유주의적 모델에 따라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다양한 계급, 계층적 이해가 반영될 수 있는 공정하고 경쟁적인 절차(선거, 의회의 토론 등)를 통해 정책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제도정치나 정당정치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집합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이 모델을 대체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모델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 모델에서는 사회운동의 역할은 가능하면 이익표출이라는 기능에 제한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주의적 모델에 따른 민주주의적 규칙이 과연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이익을 공평하게 반영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불만은 다양한 대안적 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탐색을 촉발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모델을 보완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 중의 하나는 참여비용이 높은 정당과 제도정치에만 정치를 제한하지 않고 접근성이 높은 정치적 행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운동은 단순히 이익표출이라는 민주주의적 과정의 한 단계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 양자 사이의 논쟁은 쉽게 해결될 수 없을 것이나 운동과 정치 사이에 선순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운동만능론 혹은 정치만능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작금 우리의 정치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보수세력은 지금도 촛불항쟁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으며 촛불항쟁의 의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사회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현재와 같이 재력, 언론 등 선거와 같은 제도 내 민주주의적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자원의 분배에서 결정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정치적 지배를 영원히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한 이명박정부의 출범 이후의 상황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대다수 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지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협하는 결정들이 제도적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분산적이고 산발적인 사회운동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점도 명확하다. 운동과 정치의 선순환을 실현시켜야 민주주의의 진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을 지난 1년의 과정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순환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좋은 정당 혹은 좋은 정책이 있지만 사회운동이 이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단에서는 당연히 좋은 정당 혹은 좋은 정책을 운동이 지지하게 만드는 것을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진보정당들을 지지대상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진보정당들의 주장들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유권자들에게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유권자들, 혹은 잠재적 지기기반의 적극적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지금까지 자신들의 활동방식과 내용에 대한 성찰이 없이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방식으로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현재 제도정치 와 정당정치(진보정당 등) 내에서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하는 것에 있으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핵심과제이다. 즉 문제는 사회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 정당정치 공간에서의 전략에 있다.
3. 촛불항쟁을 넘어서기 위해
운동과 정치의 관계에서 문제는 사회운동의 에너지가 왜 정당정치로 수렴되며 제도정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있으며, 병목은 사회운동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 정당정치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개혁정당은 반독재민주화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정치세력이다. 현실정치에서 이 세력은 특정 지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른 진보개혁정당들에 비해 넓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기반은 과거보다 크게 축소되어있으며 새로운 확장도 어려워보인다. 현재 외부의 역량을 흡수할 수 있는 동력(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인물이든 아니면 반독재라는 과거에 매력이 있는 정치적 목표이든)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독재민주화라는 목표를 내걸고 다양한 운동적 에너지를 흡수하며 정치주체를 재생산하고 확대시켰던 과거의 메커니즘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자유주의 개혁정당의 헤게모니가 약화된 다는 것은 이들의 헤게모니 하에서 억제되었던 목소리들이 더욱 큰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운동과 정치의 선순환 관계가 과거 자유주의적 개혁정당과 사회운동 사이에 이루어지던 메커니즘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가능성에만 머무르고 있다.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유주의 개혁정당의 후퇴로 창출된 새로운 공간은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 세력에 의해 메워지기보다는 보수적 담론에 포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진보정당들은 사회운동으로부터 자원과 인력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그 내에서만 보면 정치와 운동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관계가 일종의 폐쇄회로 내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현재 필요로 하는 운동과 정치의 선순환 구도와는 거리가 멀다.
하나는 밭은 있는데 씨가 없고 다른 하나는 씨는 있는데 밭이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출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소위 ‘진보’ 혹은 ‘개혁’으로 지칭되는 이념과 비전이 갖는 호소력, 설득력이 약화된 것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단기간 내에 해결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닫힌 공간에서 좋은 설계도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러 차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실험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작년 촛불항쟁 시기 제출된 생활정치에 대한 문제제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들의 생활과 밀착된 공간에서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안을 찾아나가는 활동이 축적되어갈 때 진보의 재구성도 가능할 것이다. 생활정치는 또한 정치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당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생활정치는 아직은 제도정치보다는 운동에 가까운 활동공간이 되기 쉬우며 당장 권력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과 동떨어진 활동이 되기 쉽다. 권력이 나날이 대중들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활정치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촛불항쟁이 직면했던 딜레마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집합적 결정에 미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사실 민주주의는 정책결정과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던 것처럼 ‘다수의 지배’를 본질로 한다. 사회운동은 반드시 다수의 형성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치, 특히 제도정치나 정당정치는 다수를 형성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기 다양한 진보정치가 한계를 보인 지점도 바로 이 다수의 형성과 관련한 분명한 비전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만약 진보정치가 자신의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와 비전만이 정답이고 이러한 정답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식으로 운동과 정치 사이의 병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자신이 주력하고 있는 의제의 전면적 실현을 당장 제도정치적 공간에 요구하고 이것만을 기준으로 해 정치적 행위를 판단해서도 안된다. 이는 제도정치에 과부하를 걸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냉소주의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정치에서의 병목을 타개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논의의 지평을 바꾸어, 다수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비전들을 만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정책에 대한 논의도 단순히 정책의 선험적 우위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과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전이 없다면 사회운동은 정치에서 어떤 희망을 갖기 어려울 것이고 이들의 에너지가 제도정치와 정당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자신의 가치와 다수의 형성 사이에는 매우 팽팽한 긴장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긴장관계를 견디지 않고 정치적 성공을 거둔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긴장관계를 짐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는 것에 촛불항쟁을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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