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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촛불1년]촛불항쟁과 한국 진보의 과제(손석춘, 경향신문090430)

by 마리산인1324 2009. 5. 1.

 

 

<경향신문> 2009-04-30 23:57: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2357382&code=940100&s_code=as028

 

 

[제3부 종합토론]촛불항쟁과 한국 진보의 과제

 

촛불항쟁과 한국 진보의 과제


손석춘(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1. 문제의식

촛불항쟁 1주년을 맞아 촛불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전반적으로 성찰하고 부문별로도 짚어본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이 글은 그 과제를 진지하게 토론하기 위한 말 그대로의 발제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적 논의와 시간절약을 위해 에두르거나 번잡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다만 촛불항쟁 첫돌을 맞아 진보의 과제를 논의하는 발제문이므로 촛불항쟁의 기본성격을 발제자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능한 간결하게 세 가지로 압축해 제안했다. 시대적 요구로 논의하고 있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핵심은 ‘진보적 재구성’이고, 진보적 재구성의 원칙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탐색해보자는 게 본 발제의 문제의식이다.

2. 촛불항쟁의 성격

촛불항쟁은 2008년 5월2일 서울 청계천광장에서 10대 청소년들 중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해 8월15일 100회 집회를 넘도록 전국 곳곳에서 이명박 정권에 저항해 일어났다.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수입과 학교 교육의 경쟁강화에 맞선 촛불은 곧이어 보건의료, 전기와 수돗물 사영화에 반대하고, 삶의 환경을 원천적으로 파괴할 경부대운하의 저지, 비정규직과의 연대 움직임으로 퍼져갔다.

시장과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중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촛불항쟁은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대중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촛불항쟁은 단순한 ‘안티’에 머물지 않았다. 100회 집회 내내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가 <헌법 제1조>였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정신을 실제로 구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최초의 운동이라는 성격도 지닌다. 이는 종래의 진보운동과 차별성을 갖는 지점이다. 촛불을 든 민주시민들은 과거의 진보운동에 나선 사람들에 견주어 대한민국에 국가적 자긍심을 적극 표출하면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실제로 구현하려고 나섰다. 그것을 하버마스가 규정한 ‘헌정애국주의’로 분석할 수 있지만, 기실 하버마스와 무관하게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 민중 스스로 자연스럽게 일궈낸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촛불항쟁에 나섰던 민주시민들 대다수의 언어와 ‘문법’을 담아 ‘주권운동’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간추리면, 100 만 명 넘는 국민이 참여해서 100회 넘도록 타오른 2008년 촛불항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에서 출발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을 열망하며 국민 스스로 전개한 최초의 주권운동이다. 바로 그 점에서 촛불항쟁은 21세기의 세계사적 지평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해도 좋다. 과도한 평가는 금물이지만 학문적 식민성에 사로잡혀 자신이 딛고 있는 사회에서 일어난 민중의 새로운 창조성을 개념화하지 못하는 일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옳다. 촛불항쟁의 형식도, 주권운동의 내용도, 모두 세계사적 전망을 담고 있다고 발제자는 판단한다.

3. 촛불항쟁과 이명박 정권의 탄압

촛불항쟁은 6월10일 100만 집회가 정점이었고 8월15일이 넘어서면서 이명박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수그러들었다. 그래서다. 일각에선 촛불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명박 정권을 오히려 강화시켰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하지만 비관만 할 일은 아니다. 촛불은 경부대운하를 일단 저지시켰고 공공부문의 밀어붙이기식 사영화(민영화)에 예기를 꺾었다. 무엇보다 주권자로서 국민 다수의 주권의식을 크게 높인 일은 가장 큰 성과다.

물론, 촛불항쟁은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온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방송 장악을 위한 집요한 공세나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드러나듯이 이명박 정권은 자신의 반민주적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철거민 5명의 참사 앞에서도 이명박 정권은 ‘법치’를 내세워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이 경찰을 두둔하고 나섰다. 게다가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 종주국마저 정책 전환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거꾸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왜 이명박 정권은 대기업과 금융규제 완화, 종부세와 법인세 상속세 인하와 같이 최상층의 기득권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할까?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 정권은 여론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부자신문과 이해관계가 같다. 실제로 용산 철거민 참사를 ‘전철연의 과격시위’탓으로 여론화한 게 바로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였다. 언론 못지않게 이명박 정권의 버팀목은 공안당국이다. 촛불항쟁을 거치며 이명박 정권은 자신이 기댈 곳은 부자신문과 ‘공권력’임을 새삼 확인한 듯하다. 이 정권이 방송 장악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유, 용산참사의 책임자이자 촛불 폭력진압을 주도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끝까지 두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명박 정권은 앞으로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인 언론과 폭력적 국가기구인 경찰에 의존해 재벌 중심의 전면 개방 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펴나갈 가능성이 높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이명박 정권이 상위 10% 중심 정책을 주저 없이 펴나가는 이유가 폭력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믿기 때문만 일까라는 데 있다. 이명박 정권 시기 진보세력의 과제를 논의할 때 더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대목이 진보세력 내부 요인이기에 그 물음은 더 적실하다.

촛불항쟁이 거세게 타올랐음에도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행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정치적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어서다. 100만개의 촛불이 100회 넘게 타올랐지만 정치적 대안이 없었던 촛불은 구심점을 잃고 지쳐갔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촛불항쟁 내내 어떤 정당도 촛불을 든 민주시민들의 대안으로 믿음을 주지 못했다. 국민 대다수인 민중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촛불항쟁이 벌어졌던 2008년 5·6·7·8월과 촛불항쟁 첫 돌을 맞는 2009년 5월은 객관적 세계정세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2008년 9월 본격화한 미국의 금융 위기는 세계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중소기업 도산과 자영업 몰락, 실업률 급증이 현실화하고 있다. 민중의 생존권이 더 위협받는 국면이다. 경제 침체가 장기화할 때, 민중의 고통은 무장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환할 조짐이 보이지 않기에 더 그렇다.

4. 진보 재구성의 3원칙

앞서 살펴본 촛불항쟁과 그 이후의 국내외 상황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대한민국의 경제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은 익어가는 데 주체적 조건은 준비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진보의 과제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답은 자명하다. 정치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일이다. 비단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통일운동이든 정치적 구심점이 없을 때, 각 부문의 운동 발전도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정권에 맞설 정치적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더 많은 민중의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 박근혜의 ‘줄푸세’정책에서 드러나듯이 그와 이명박의 경제정책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바로 그렇기에 진보세력의 대안은 더 절실하다. 물론, 정치지형에서 진보세력이 외면 받는 데는 외적 요인이 크다. 반세기 넘도록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이데올로기가 그 주범이다. 비단 언론만이 아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교육을 통해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자본독재의 이데올로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내면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다. 외적 요인은 냉전에서 ‘승리’한 초강대국 미국의 현실적 힘을 정신적, 물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외적 요인이 설령 지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요인만 강조한다면, 주체적 대응에 게으를 수밖에 없다. 가령 “언론 탓”만 한다면, 임기 내내 언론을 지청구 삼아 좌충우돌로 5년을 보낸 노무현 정권과 우리가 다를 게 없다. 노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도 늘 ‘진보’를 자처해 진보세력 전반에 대한 국민 불신을 불러왔다. 그래서다. 외적 요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내적 요인을 더 중시해야 옳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창조한국당과 민주당 일부로 흩어져있는 진보적 정치세력이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과 더불어 정치적 대안을 만들려면 재구성이 관건이다. 현재 네 정당 가운데 어느 정당도 단독으로 집권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정치적 구심점이 절박하다고 해서 지금 당장 새로운 정당을 누군가 주도하거나 ‘헤쳐 모여’식으로 만들 수도 없다. 촛불항쟁에 나섰던 모든 세력이 지금 할 일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기반을 튼튼하게 마련하는 일이다. 바로 그것이 진보의 진보적 재구성이라고 발제자는 판단한다. 여기서 ‘진보적 재구성’이라 할 때 그 대상인 동시에 주체는 진보정당의 정치인이나 당원들만이 아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 통일운동만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국민이다.

그래서다. 촛불을 든 모든 사람들이 진보적 대안을 만들어가는 진보적 재구성의 3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실사구시의 원칙이다. 실사구시란 말 그대로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다. 고전을 읽다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의 독일어판 서문(1890)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로 인해, 특히 승리보다도 패배로 인해 투사들은 자신들의 만병통치약(universal panacea)이 지금까지 부적절했음을 깨닫고 노동자 해방의 진정한 조건을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 더 한층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엥겔스가 그렇게 주장한 근거가 “1874년 인터내셔널이 해체될 당시의 노동계급은 그것이 설립된 1864년의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고 분석한 점이다. 그렇다. 10년의 변화도 엥겔스는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이론을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애용’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노동자 해방의 진정한 조건을 철저히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물며 그로부터 두 세기가 바뀌었다. 그 사이에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이 있었고, 소련-동구의 몰락과 중국의 전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난을 경험했다. 모두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다. 그 사실에 기초할 때, 우리는 경직된 사상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진리를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더 절감할 수 있다. 막연한 이상주의와 구호 수준의 담론을 넘어서서 실제로 ‘해방의 진정한 조건’을 ‘철저히’ 파고들어야 옳다. 진보세력이 집권했을 때 현재의 정치경제 체제와 전혀 다르게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이 필요하다.

실사구시가 필요한 이유는 관념적 이상주의의 모호한 비전이 분열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중의 삶, 민중의 고통이 엄중한 데도 경직된 사상에 기초해서 주자학적 논쟁에 치중하면 반목하거나 갈라질 수밖에 없다. 책임지고 실현가능한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실제 ‘경제 살리기’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실사구시의 원칙이 중요한 까닭이다.

둘째, 학습토론의 원칙이다. 실사구시의 원칙으로 구성해가는 비전과 정책을 국민 대다수인 민중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해나가야 한다. 국민 대다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노출되어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는 ‘글로벌스탠더드’의 이름으로 때로는 ‘개혁’의 이름으로 주입되어 왔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의 당위성을 노무현 정권은 국민혈세 수십억을 쏟아 홍보해왔다.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경쟁 중심과 시장만능주의 교육이 큰 흐름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이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학습하고 토론하는 ‘학습모임’을 일터마다, 지역마다, 학교마다 만들어가지 않을 때, 한국사회의 여론지형이나 정치지형은 바뀌기 어렵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회운동 내부에서도 학습모임 활동이 절실하다. 다양한 수준, 다양한 부문에서 학습모임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아래로부터 자연스럽게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갈 수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인터넷의 발달은 학습토론 모임 활성화에 큰 무기일 수 있다. 이미 촛불항쟁에서 인터넷은 중요한 무기임을 우리 모두 확인했다. 다만, 인터넷 카페의 온라인 모임만으로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바뀌기는 어렵다. 온라인을 매개로 활용하면서 곳곳에 학습모임을 만들어 토론을 벌여나가야 한다. 촛불을 들었던 민주시민들과 더불어 진보세력이 ‘한줌’ 안에서 다툴 게 아니라 한줌 밖으로 나가야 할 때다.

기실 학습모임은 ‘스터디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운동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학습하고 토론하는 데 소홀해온 게 명백한 사실이다. 그 결과가 낡은 시대의 담론을 고집하며 서로 분열을 일으킨 게 아닐까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연대단결의 원칙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체제로 국민 대다수가 고통 받고 있는 데도 진보세력이 선거혁명을 꿈조차 꿀 수 없는 이유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대상과 ‘함께 싸울 사람’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상대는 단결해있다. 신자유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촛불항쟁에 나선 모든 사람을 단결시킬 원칙, 공통분모를 찾는 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당장 단결을 이뤄갈 수 없다면, 먼저 연대의 틀로 손잡을 필요가 있다. 연대를 통해 함께 실현가능한 사회의 상을 그리고 정책대안을 마련해갈 때, 연대는 어느 순간 견고한 단결을 일궈낼 수 있다. 연대단결의 기준으로 세 가지를 제안한다.

① 신자유주의 극복: 더러는 신자유주의를 불가피한 현실로 보거나(김대중-노무현 정권) 더러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개량주의라고 비판한다. 두 편향을 넘어서야 한다. 사회주의 또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이루기 어렵다. 실사구시의 태도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고 단결해야 한다. 시장만능과 경쟁중심, 노동시장 유연화의 체제를 바꿔나가는 데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여성운동의 모든 부문운동은 공통분모를 확보할 수 있다.

② 분단체제 극복 : 통일운동을 유럽적 기준에서 민족주의운동으로만 볼 문제는 결코 아니다. 분단체제는 현실적으로 남과 북의 국방비 과다지출로 인한 복지예산 축소와 민생경제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 남쪽 경제의 과도한 대외의존체제와 북쪽의 경제봉쇄로 인한 자급자족체제를 모두 넘어서는 통일민족경제의 형성은 남과 북을 진정한 진보사회로 재구성해 가는 데 절실한 과제이다. 더러는 ‘종북주의’를 거론하고 더러는 외세에 대한 몰인식을 들지만, 공통분모로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남과 북의 합의문인 6·15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은 연대하고 단결해야 한다.

③ 과거운동노선 불문 : 신자유주의체제와 분단체제 극복에 동의하는 모든 사람이 연대하고 단결할 때 마지막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순간부터 더는 상대의 ‘과거 운동노선’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5. 촛불의 길: 주권운동

촛불항쟁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을 실현하고자 국민 스스로 나선 최초의 주권운동이다. 2008년 촛불항쟁이 주권운동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기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체제의 건설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체제를 현실로 내올 수 있다면, 그것은 21세기 인류가 걸어가야 할 이상적 사회로 자리매김될 게 분명하다.

발제자는 촛불을 든 민주시민들의 항쟁, 그 감동어린 축제는 세계사적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현실화할 주체세력의 형성, 곧 진보세력의 진보적 재구성의 3원칙으로 실사구시·학습토론·연대단결(실·학·연대)를 제안했다. 그 원칙을 진보정당과 진보언론, 진보학계, 사회운동에 적용한다면 과제를 더 구체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

① 진보정치세력은 실·학·연대에 기초해 외연을 확대하며 재구성에 나서야 한다. 국민 대다수가 확신을 갖고 표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② 진보학계는 진보정치세력에 구체적 정책대안이 없다는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정책을 만들어 제안해야 한다. 정책은 이론 못지않게 학문으로서 사회과학의 중요 영역이다. 그 점에서 진보적 학자들과 진보적 싱크탱크의 연대가 중요하다.

③ 진보언론은 지금보다 더 진보정당과 진보적 대안 기사 비율을 높여가야 한다. 다만 서로 갈등의 양상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정책과 연대를 중심으로 보도해가야 옳다.

진보정당, 진보학계, 진보언론을 추동해 갈 토대는 사회운동이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만나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각각 한계에 봉착해있다. 공통분모는 촛불항쟁이다. 주권은 촛불항쟁에서 민주시민 스스로 창출해낸 운동 방향이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도록 각 부문 운동에서 부문별 주권을 의제로 제기하고 쟁취해 갈 필요가 있다. 가령 노동운동은 노동현장의 의사결정권을, 농민운동은 식량 주권을, 학생운동은 등록금 결정과 학사운영 참여권을, 시민운동은 영역별로 주권 또는 의사결정권을 의제로 제기하고 그것을 현실로 구현해나갈 수 있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범국민운동 또는 국민주권운동으로 연대의 틀을 마련할 때 각 부문별 운동도 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했듯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체제를 넘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과정을 촛불항쟁에서 나온 언어로 ‘주권운동’이라 개념화할 수 있다. 그 때 주권운동은 한 사람의 자유와 모든 사람의 자유가 이어지는 새로운 사회를 구현해나가는 ‘21세기 영구혁명’의 실천이다. 바로 그 점에 2008년 촛불항쟁의 역사적 의미, 현재적 의미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