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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04-30 18:00:5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1800541&code=940100&s_code=as028

 

 

[제2부 촛불의 과제와 전망]문화적 인간주의를 찾아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되고
-<문화적 인간>주의를 찾아서


김형수(시인)

0. 마을로 가는 길

촛불 행진을 마치고, ‘맑은 물에 영혼을 씻고 난 기분’이 되어 떠들던 기억이 난다. 그때 거리의 불빛이 꼭 강둑에 쏟아지는 햇살 같아서, 멱 감은 몸을 말리듯이 두 꼭지의 글을 썼다. <창비주간논평>에 <아고라 폐인의 기록>, <경향신문>에 <정치폭발인가 문화폭발인가>. <녹색평론>의 좌담도 했는데, 이 글 제목이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1년이 꽤 길었나 보다. 신문을 읽는데 관련 내용이 너무 낯설었다.

기사 요지 - "‘광장의 저항’이 대중의 각성과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이명박 정부와 부르조아를 향해 ‘쾌락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중간계급의 행동", "‘욕망정치론’과 ‘다중지성론’에 자리 잡은 대중에 대한 지나친 힐난과 신비화를 넘어서야."

여기에서, 과학적이지 말자고 주장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언어들은 내게 ‘존재의 망각’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의 도약은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전문화된 분야들의 동굴로 몰아넣는다. 정치와 경제, 사회에 관한 각종 이론들로 가득 찬 전문성의 세계는 오늘날 개인들이 누리는 광활한 ‘삶의 세계’를 다루기에 너무 작고 좁은 건 아닌지…….

동시대의 삶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언어들이 우선 마을로 내려와야 하고, 더불어 주민의 열정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현실인식에서 전위적 실험적 계몽적 모험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 속에 내장된 무궁한 신비와 경이의 현상조차 생경하고 건조한 말들로 축소하는 것도 경계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한 예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에서 그런 요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문화적 천착을 감행한다.

한국 사람들이 ‘내 생각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 이로부터 미신 · 직관 · 계시 · 통찰력 · 광기 ·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가 도출된다. 이것이 노래와 시와 춤과 꿈과 정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가장 순수한 한국의 전통이다. (…) 이것은 서구 합리주의자인 내가 가장 알 수 없는 한국이다. (…) 나는 이러한 토착적 근원으로부터 외국인 여행자가 한국에서 감지하는 현세적이고 거리낌 없으며 활기 있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동양의 다른 이웃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너무나 매력적이고 강렬한 에너지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한다.

마침, 나의 주제가 ‘문화적 인간주의를 찾아서’였는데,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문화도 끼어들어야 하는 것으로서 ‘문화적 인간주의’라면 보탤 말이 없다. 그러나 지상에는 엄연히 <문화적 인간>들이 살고, 그들의 눈으로 해석되어야 할 세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그것이 당대의 눈높이이며, 그로부터 예전에 없던 역사 행위들이 출현한 때문이라면 얼마나 감사한 배려인가. 부족하지만 이것은 후자로서 ‘<문화적 인간>주의’의 고민과 꿈에 접근해보려는 리포트이다.

1. 문화적 인간

<문화적 인간>은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역사의 산물이다.

이 시대를 문명사적 전환기, 세계화 · 정보화 · 환경생태화의 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라 부른다면 발원지는 1989년에서 찾아야 옳다. 인터넷의 출현, 복제생명의 탄생,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겪은 해에 인류가 U턴을 시작한 까닭이다. 이를 문명사적 ‘비약’이 아니라 ‘전환’이라 말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유네스코의 한 자료(<>)를 보면 ‘발전’이라는 말에 "인간적 요소(즉 문화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관계, 신념, 가치, 동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복합체로서의)의 중요성"이 부가된 것은 1988년이다. 곧이어, 경제를 버리지 않으면서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가 등장하고, 그 개념이 확대된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에서부터 건강하고, 교육을 받으며, 생산적이며, 창조적이며, 자기 존엄과 인권을 누릴 수 있는 개인의 기회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능력으로서의 발전을 측정"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사회적 진보를 문화적 조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탄생하는 것이다.

전에는 직접적인 생산 활동이 중시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정치, 그 기반이 되는 경제, 또 거기서 파생되는 사회문제 등이 세상사의 중심이고, 문화는 외곽에서 향유되고 소비되는 부산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후 문화는 모든 사회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새로운 발전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정치나 경제의 수족이 아니라 그것들을 담는 그릇이면서 그것들을 뛰어넘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하여, 정치활동도, 제품의 생산과 유통도, 여타의 사회적 실천까지 문화적 행위들로 구현되면서 그것이 자아실현의 방편으로서 마침내 인간 활동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되는 틀이 형성된다. 이러한 현상을 식자들은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을 추구하는 시대로 옮겨왔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출현하게 된 사회적 존재를 ‘문화적 인간’이라 해두자는 제안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적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는가?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는 눈만 뜨면 돈을 세는 사람(경제적 인간), 왼 종일 가로등을 켜고 끄는 사람(사회적 인간), 늘 왕으로 추앙받아야 되는 사람(정치적 인간) 등이 나오는데, 그것을 연민하는 행위자로 어린 왕자가 등장하여 말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만약 여러분이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봤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차라리 "2만 달러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는 게 낫다."

이것이 문화적 인간의 독백이다. 이 문화적 인간을 이해할 때 유의할 것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세속적인 현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기가 대개 자기 존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2.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2008년 촛불은 문화적 인간들이 주동한 역사행위였다.

당시 촛불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놀라운 점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조종하는 기현상이었다. 분명히, 인류가 ‘야생의 대지’를 버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문명의 블랙홀 속’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는 행복하였노라."했던 루카치의 말이 꿈결 같은 때, 20세기의 숱한 공동체에서 빠져나온 개인들은 거침없이 밀물져 오는 미래에 의하여 끝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자연보다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보니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그림자인지조차 혼동되었다. 인터넷…, 디지털…, 이런 첨단의 도구들에 의해 삶도 게임처럼 작동되고 현실도 기계처럼 조작된다고 느껴지며 어느덧 실존의 세계는 잃고 가상공간만 얻은 건 아닌지 염려되던 차에 놀랍게도 광장의 불빛이 발견된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은 21세기의 인류가 <문화적 인간>으로 성장해온 속도가 놀랍게 빠르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촛불 2천여 개가 청계천변을 떠돌 때 한국 사회는 이를 전혀 정치 발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네티즌들이란 의례히 그러는 것. 아고라에서 안단테가 이명박 안티 카페를 만들어서 청원 요청을 한 후 무려 10만 명이 서명을 할 때까지도 ‘다음’은 이를 메인 화면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언젠가 여성부를 없애자는 청원에 10만 명이 서명했을 때처럼 사고의 균형성, 공익성, 객관성을 인정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던 것이 순식간에 거리로 몰려나오고 집단지성을 형성하며 익명의 존엄성들이 새로운 윤리의식을 드러내는데, 온 세상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부여받은 가장 훌륭한 자질의 하나가 다른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동정하는 감수성을 가진 점이라 한다면 이는 인간에게 마을을 형성하는 본성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하는 셈이 된다. 사실상 2008년 촛불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을 이루는 ‘마을 효과’는 네티즌의 일부가 온라인에서 뛰쳐나와 오프라인을 만나는 순간에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출현한 것이다. 판타지에서 떠돌던 말들이 곧장 인정미를 야기하는 실존의 언어들로 둔갑되면서 우리가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 역량이 나온다. 오프라인에서 교사, 교육청, 경찰로 연결되는 협박이 감행되면 온라인에서 곧장 방비책이 나오고, 난적 난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무력화시키는 사회적 발언이 형성된다. 그 특성이 ‘대중에서 다중으로’ ‘공간 공동체에서 시간 공동체로’ ‘정치에서 문화로’ ‘지도와 계몽에서 집단 지성으로’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미 지적했던 바, 얼룩소와 생쥐의 외피를 입은 아버지와 아들이 "너만 보면 미치겠<소>"와 "나 때문에 약오르<쥐>" 퍼포먼스도 그곳에서 나왔고, 여고생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대통령은 왜 배운 대로 하지 않는가, 법을 지키지 않는가, 대한민국을 삼류로, 국민을 싸구려로 만드는가 하는 연설도 그러한 작품이었다. 내가 2008년 촛불을 일컬으면서 자꾸 ‘민요’를 연상시키려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쌓아 이루는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가는, 삶의 질을 버리고 물신주의를 택한 유권자와 그 지도자들이 0교시 수업, 영어몰입교육 운운 하면서 보여준 천박한 허영에 대한 수준 높은 조소, 또 재택촛불, 산책촛불, 귀가촛불들이 국경도 없이 누비는 지구적 소통, 그리고 현대 문명이 확보한 첨단의 개인 미디어들을 동원하는 대동세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거기에 시대적 지평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이건 꼭 이명박하고 겨루는 싸움이 아니고, 낡은 꿈들, 헛된 망상들과의 싸움이에요. 그 꼭지점에 정치적 표상으로 이명박이 있는 거고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시, 모든 곳에 저는 전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상부구조에 속한 전 영역이 다 촛불집회에 와서 학습해야 한다고 봐요."(녹색평론 101호, 좌담 <2008년, 촛불광장에서>)

그런데 왜 그것이 오래 존속하지 못했단 말인가?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통치기구의 보복에 있었다. 하지만 마을은 침묵하면서도 체험한 서사를 오래 간직하는 저력을 갖는다.

3. 마을들

■ 마을이 형성되는 이유

근대 이후 지속되어 온 사회의 해체와 자아의 과잉은 언제나 인간을 외롭게 만든다. 최근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모국어의 달인 중에 김소월 시인이 있다. 나는 인간의 영혼에 파문을 남기는 체험이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그의 <옛 이야기>만큼 탁월하게 포착한 예를 알고 있지 못하다. 시는, 밤이면 외로움에 겨워서 우는 사람을 화자로 한다. 그도 예전에는 지난날의 이야기를 설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님이 떠난 다음에는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이 찢겨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님에게 들려주던 옛 이야기의 파편들밖에.

나는 이것이 ‘어떤 마을’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 예컨대 ‘권태로운 창’이나 ‘미네르바’ 같은 생명의 현재진행형들 뿐만 아니라 최진실, 장자연 같은 과거완료형, 또 최근 강원도에서 죽어간 현재완료형들의 실존적 상태였다고 본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고립감 속에 놓인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의해 정치와 경제, 사상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초월해서 한 덩어리가 되면 모두가 첨단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으로 촘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속에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아가 있다면 타자 속에도 동일한 자아가 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독립되면 사회는 종잡을 수 없는 ‘자아들의 무리’가 된다. 그리고 각각의 자아가 제멋대로 세계상을 그리면서 자기와 타자의 공존을 성립할 수 없게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서로 연결되는 ‘회로’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마을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 산업화 세대

전통시대에도 ‘자아’라는 개념이 존재했지만(공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라),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종교, 전통과 관습, 문화, 자연과 혈연적 결합 등에 의해 자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전통시대의 한국 사회가 ‘미덕’과 ‘헌신’에 의존하여 결속을 꾀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서열화’의 그늘이 있었다. 조선은 선비사회였고, 지식인들의 헌신과 열정이 시대 윤리를 창조했다. 일제와 싸울 때도, 또 해방후에도, 모국어를 잊은 중앙아시아의 유랑민들 속에서도 이는 다르지 않다. 북한도 유교사회주의라는 평을 듣는 편이다.

이제 그것이 분단시대의 남한을 이끌어온 개발시대의 주역들에 의해 일그러진 영웅의 얼굴로 변형을 시작한다. 전후 복구 시기가 지난 이후, 누가 한국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는가 하는 개탄이 끊인 적이 없다. 스스로 이 시대를 밑바닥부터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창시자들이 존재했던 까닭이다.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여기서 발생되는 딜레마는 항구적이다.) 그 속에서 나타난 중심축이 산업화 세대이다. 산업화 세대의 창시자들은 냉전의 병영에서 만들어진 반공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사회생활에 사용했으며 민간마을을 병영화시켰다. 학교까지도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화시켰다. 한반도에서 빈곤을 퇴치시켰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이들의 창시자 의식은 온갖 낡은 가치관의 거점이 되었다. 자율성이라고는 없는 새마을, 부녀회, 여타 관변 단체들의 간섭을 받는, 해체일로의 농촌공동체를 신경림의 <농무>는 걷어차 버린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 민주화 세대

스스로를 산업화 시대의 말석에다 배치하고 개발독재로 부를 쌓는 한국에 긍지를 느끼지 못하던 세대는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함으로써 또 다른 시대의 창시자가 되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농경적인 전통사회가 길러온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 해체되는 것에 저항하는 사상은 현재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송두율, <(탈)현대의 구조>)

새로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단일한 윤리의식을 부여하여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하게 만든 민중운동은 근대화 시대의 말석에서 출발한 민주화 세대의 가치관을 한국 근대의식의 정점으로 끌고 간다. 4.19로 주권의식을 얻고, 5.18로 피 흘려서, 6월 항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기까지 그들이 만든 신화는 마침내 개인의 존엄을 초월할 만큼 큰 권위를 누린다. 이렇게 해서, 누가 한국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고 개탄할 발언자가 둘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체제 일선에 나서면서 세속화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마을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의 주역들은 민중이 주인 되는 위대한 마을을 거의 구축하다시피 했지만, 강력한 도덕성을 앞세워서 ‘개인’을 억눌러 집단에 복속시켰던 곤혹과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또한 사분오열과 자중지란을 이기지 못한 채 세계사적 변동이라는 도전을 맞는다. 아마 이것이 ‘87체제’라는 낱말의 속뜻일 것이다. 이후 IMF라는 악조건 속에서 문명사적 전환기를 헤쳐 갈 비전을 찾아내지 못했고, 세계화 정보화 환경생태화 시대의 정의를 선도하지도 못했으며,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대항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멋들어지게 표현했던 ‘악마의 맷돌’에 의해 공동체가 부서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짧은 기간에, 전래의 공동체가 지닌 목가적 연결을 말끔히 해체시켜 버리는 이 가공할 ‘악마의 맷돌’(세계시장경제체제) 속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약 40억의 인구가 눈뜬 채로 그냥 흡수당해 들어간다. 산중 마을에서 수제품을 만들어 재래시장에 내다 파는 식으로 존속하던 셀 수 없이 많은 소수 민족들이 대형 마트의 고객이 되면서 값싼 노동력을 팔기 위해 국경들을 넘는다. 나는 최근에 <<한겨레21>>에서 폴라니에 관한 특집을 읽었는데, 노동과 자연과 화폐를 시장 질서에 맡기면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 촛불 세대

같은 시기에, 참여정부의 추락과 함께 민주화 세력의 권위가 끝없이 하강해간 풍경은 고향의 대지가 수몰되는 것 같은 아쉬움을 준다. ‘보수’가 낡은 가치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진보’가 새로운 가치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면, 87년체제라는 기계는 그동안 구악을 청산하는 기능은 가동시킨 반면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생산하는 기능은 게을렀다. 사회를 한 몸통으로 본다면 오른쪽 기능은 작동되고 왼쪽 기능은 고장이 난 것 같은 양상이었다. 구르는 두 개의 바퀴 중 하나가 멈추면 수레는 결국 제 자리만 맴돌게 되어 있다. 이 틈을 풍미한 것이 ‘반동적 시대정신’들이다. 육교를 철거하고 청계천에 물을 되돌리려 한 사람들이 시대적 적응력을 조금 더 인정받았던 건 국민의 ‘무지’ 때문이 아니다. 민주화 세력이, 낡은 모델은 위기인데 새로운 발전 모델은 제시하지 못하니 외면해 버린다. 헌데 그것이 짝퉁을 등장시키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여기서 2008년 촛불에게 주목할 것은 그들이 민주화 세대의 창시자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스로 감동을 잃어간 민중의 공동체를 지킬 의지도 애착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마을을 꿈꾼다. 이제 기존의 인식 틀로 국민을 재공동체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당신이 우주가 되려거든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라

촛불 세대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졌지만 아직 <문화적 인간>으로서의 전망과 그에 맞는 안정된 시대 윤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촛불이 타오르면서 던진 질문이요 꺼지면서 남긴 과제였다고 본다.
21세기 상황이 출현한 이후 우리는 줄곧 ‘문화의 세기’를 이야기해 왔다. 그때부터 문화적 관점을 의식하고 국민의 정부 때는 중요한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난 시대에서 세상의 ‘전범’은 모두 관리자였는데, 그 전범을 창조자로 바꾸려 한 것이다. 예컨대 판사, 검사 등 시대의 관리자들이 기존의 사회 전범이었다면, 국민의 정부는 창조자를 전범으로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소위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권력 주변의 관리인에서 창조자에게로 사회 중심이 이동했다고 믿으면서 사회 곳곳에는 상당한 수준의 창조적 열기가 생성되었다. 지하철이고 어디고 가리지 않고 춤 연습을 하기 위해 몰려다니는 청소년들, 캠코더를 들고 독립영화를 찍겠다고 거리를 누비는 학생들, 새로운 서태지를 꿈꾸느라 입시교육에서 벗어나 독자적 교육의 길을 걷는 자식들과 그것을 응원하는 부모들, 이것이 이후에 찾아오는 한류열풍의 결정 요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자들을 사회적 모범으로 부각시키려 한 이 중요한 기획은 신지식인의 길을 문화산업에 맞추면서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한다. 문화의 세기를 끌고 갈 기획을 문화적 가치가 배제된 산업적, 경제적, 수익적 방향으로 역주행시킨 것이다. 왜 그렇게 됐는가?

한국사회는 그동안 다른 나라들이 수세대에 걸쳐 이룬 근대화를 압축적이고 비약적으로 경험했다. 선진국들이 몇 세대에 걸친 발전을 한 세대에 이루었다는 것은 곧 그 나라들이 서서히 파괴(혹은 변화)해 왔던 전통적 환경, 문화, 윤리들을 우리는 한 세대에 파괴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 폐해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위기의 본질이다.

한국은 지금 소비의 질을 통해 삶의 질을 평가하는 저급한 회로에 갇혀 있다. 사치품으로 부의 크기를 과시하는 것을 ‘현시적 낭비’라 하는가? 소비로부터의 소외가 삶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이 심각한 가치전도가 수정되어야 한다. 부는 부의 증식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쪽으로 사용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부가 소비를 통한 하급의 욕망을 해소하는 기회의 범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한 토대로 작용하는 가치관을 확보했을 때만 소비로부터의 소외가 삶의 소외로 이어져버리는 몰가치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육이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내적 동기가 되도록 ‘부와 발전’의 개념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모럴의 출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0. 타고 난 재에 남은 불씨

민주화, 평등, 자유 등이 호소력이 있던 시대는 지났다. 국민에게는 이것들이 어떤 사명감으로가 아니라 그냥 자명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문제는 절차나 제도가 아니라 국민 하나하나의 삶의 질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촛불의 진로를 기존의 개혁적 정치관념의 틀로 분석하는 경향에 거리를 둔다. 물론 단기적인 의미로서 국가권력의 방해를 극복하는 과제들이 있긴 할 것이다. 더 가깝게는 나도 자주, 옛 민주화 세대에 의해서 민주적인 언론이 만들어지듯이 국민 포털이 들어설 수 있었다면 촛불은 좀더 지속적으로 <온라인의 지혜로 오프라인의 오류를 수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허나,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준비한 자리는 아닐 터이니…….

끝으로, 어디에선가,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는 이야기꾼이 얘기를 끝마칠 때가 되면 땅에다 손바닥을 갖다 대고서, ‘이제 저는 제 얘기를 여기다 내려놓습니다. 누군가가 이어가도록요.’"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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